Strangeways, Here We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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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miths가 대중음악계에 – 특히 영국의 대중음악계에 –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활동한 시기는 실질적으로 80년대에 국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정규 앨범도 네 개뿐이다. Strangeways, Here We Come은 이러한 그들의 짧은 밴드 활동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다. 영국에서 1987년 9월 28일 발매된 이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2위에 올라 17주간 머물렀다.

The Smiths는 이 앨범을 1987년 3월부터 앨범 출시 전까지 영국 서머셋州 버킹턴의 울홀(Wool Hall)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였다. 모든 곡의 작곡은 Johnny Marr, 가사는 Morrissey가 맡는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Morrissey는 이 앨범에서 처음으로 악기를 연주하는데 “Death of a Disco Dancer“에서의 피아노 연주가 그것이다. 작업이 끝날 즈음 Johnny Marr는 그룹을 떠나고 밴드는 해체된다.

음악적으로 Marr는 이전에 그들의 음악을 특징졌던 “징글쟁글(jingle jangle)” 사운드를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예를 들면 The Beatles의 White Album 등으로부터 영감을 얻기도 했다. 밴드는 신디싸이저 섹서폰과 드럼머신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엔지니어 Stephen Street의 증언에 따르면 녹음작업은 늘 술파티로 끝났다고 하지만 Marr는 늘 그렇진 않았다고 변명했다.

리드 싱글은 “Girlfriend in a Coma“였다. Morrissey 특유의 냉소적 반전(反轉)이 녹아들어간 가사와 유머러스한 곡진행이 인상적이다. “Paint a Vulgar Picture“에서 Morrissey의 신랄함이 극에 달하는데 음반 산업의 상업성을 쌩얼 그대로 까고 있다. “I won’t share you with the drive and the dreams inside”라는 가사가 담긴 “I Won’t Share You”가 그룹의 마지막 앨범 마지막 트랙이라는 점도 시사적이다.

앨범 타이틀은 맨체스터의 악명 높은 Strangeways 감옥에서 따왔다(지금은 이름을 바꿨다). “Here we come”은 영화 Billy Liar의 “Borstal, here we come”이라는 대사에서 따왔다. 앨범 커버는 Morrissey의 작품으로 ‘에덴의 동쪽’의 출연배우 Richard Davalos가 James Dean을 바라보는 장면을 잘라내어 흐리게 하여 만들었다. 후에 WEA가 밴드의 컴필레이션을 만들 때에도 다시 이 배우의 사진이 쓰인다.

다른 앨범에 비해 음악적 평가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이 앨범 역시 The Smiths의 레전드 필청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Slant 매거진은 “최고의 80년대 앨범”에서 이 앨범을 69위로 선정하였고, 나아가 뉴뮤직익스프레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47위에 선정하였다. 그리고 Morrissey와 Marr는 일반적인 평가와 달리 이 앨범을 밴드의 최고의 앨범으로 여기고 있다.

Meat Is Mu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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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risseyThe Smiths 멤버들이(나머지 멤버들이 자발적인 채식주의자인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락밴드임에도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은 락밴드에게 의례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부순다. 이러한 편견을 파괴하게 되는 밴드의 가장 공공연한 선언이 바로 1985년 발표된 밴드의 2집 Meat is Murder다. Morrissey가 내한공연을 가졌을 적에 그는 앨범 명과 같은 제목의 노래를 연주 목록에 포함시켜 처연한 목소리로 불렀다. 무대 뒤 스크린에는 커다란 눈망울의 소가 클로즈업 된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육식을 좋아하는 스미쓰 팬들은 불편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이 노래를 들어야 했다.

이러한 다소는 마이너한 주장이 노골적으로 담긴 앨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Meat is Murder는 영국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밴드의 작품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되었다.(미국에서는 차트 110위까지 올랐다. 미쿡에서는 여전히 듣보잡) 하지만 Rolling Stone은 2003년 이 앨범을 The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에서 296위에 선정하면서 그 뛰어난 음악성을 칭송하였다.(까탈스러운 평론가 Robert Christgau는 이 앨범에 C+ 등급을 매겼다)

1984년 데뷔 앨범의 프러덕션이 다소 실망스러웠던 Morrissey는 기타를 맡은 Johnny Marr와 함께 직접 앨범을 프로듀스하기로 결정하였다. 엔지니어링은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에서 처음 만났던 Stephen Street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정식 크레딧에는 프로듀싱을 “The Smiths”가 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Rourke와 Joyce는 자신들의 악기 연주의 믹싱 과정에서의 사운드레벨에 대한 조언을 하는 정도만 허락받았을 뿐이다.

앨범 트랙의 내용은 이전 앨범보다 더욱 더 정치적이고 직선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앨범의 마지막 트랙 “Meat Is Murder”가 대표적인 작품이고 그 외에도 “The Headmaster Ritual”이나 “Barbarism Begins at Home”은 체벌에 대한 강한 혐오를 드러낸 작품이다. 음악적으로 밴드는 보다 실험적이 되었는데 “Barbarism Begins at Home”에서는 펑크(funk)적인 긴 후반부 연주를 시도하기도 했다.(베이스 Andy Rourke는 Level 42의 Mark King이라도 된 양 신나게 베이스를 연주한다)

Morrissey는 이즈음에서의 각종 인터뷰에서도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의 공격 대상에는 대처 정부도 있었지만 동료 뮤지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Band Aid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누구나 에티오피아인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영국인에게 매일매일의 고문으로 주입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죠.”라고 대답하였다.

한편 앨범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싱글의 성적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싱글로만 발표한 “Shakespeare’s Sister”는 차트에서 성공적이지 않았다. 앨범의 유일한 싱글 “That Joke Isn’t Funny Anymore”는 49위까지 오르는데 그쳤다. “How Soon Is Now?”는 원래 “William, It Was Really Nothing”의 B면 수록곡이었는데 북미의 댄쓰클럽과 얼터너티브 래디오에서 인기를 얻어 북미에서 발매된 앨범에 함께 수록되었다. 결국 이 노래는 영국에서도 싱글로 발매되었는데 차트 24위까지 올랐다.

앨범 커버로도 늘 이야깃거리를 주는 The Smiths의 이번 앨범 커버는 베트남전에 참가한 군인인 Michael Wynn을 찍은 1967년 작품이다. 원래 그의 철모에 적혀 있는 글은 “Make War Not Love” 였지만 “Meat Is Murder”로 교체되었다. 오리지널 이미지는 Emile de Antonio의 1968년 다큐멘터리 In the Year of the Pig에서 빌려 온 것이다.

BBC 칼럼에 소개된 Rio 앨범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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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일종의 매끄러운 외양과 음악이 등장했는데 이는 한 밴드로 요약될 수 있다. Duran Duran. 새로운 문화 스타일이 부각됐다. 비주얼은 음악만큼이나 중요해졌다. 밴드는 비디오와 MTV의 방송에 의존했다. Duran Duran의 Rio 앨범 커버는 소니 워크맨과 어깨의 패드라는 집단적인 문화적 기억 속에서 80년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디자이너 Patrick Nagel의 육감적인 여성의 일러스트레이션은 Malcolm Garrett의 트렌디하고 스타일리쉬한 그래픽과 결합하여 식별가능하게는 80년대이고 이미지에 집착하는 세대에 잘 어울리는 외양을 창조하게 되었다.[Cool, quirky and collectible: 12 extraordinary album covers 中에서]

Rio 앨범 중 Save A Prayer 뮤비 보기

Combat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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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이 앨범을 처음 구입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 어쩌면 당연하게도 – 밴드 멤버가 찍혀 있는 앨범 표지였다. 한적한 시골의 철도변에 앉아 있는 반항적인 펑크족들의 사진은 밴드의 음악적 방향을 잘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뮤지션과의 작업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Pennie Smith가 찍은 이 사진은 밴드가 1982년 동남아 여행을 하던 중 방콕 외곽의 한 버려진 철도에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

1982년 5월 14일 밴드의 다섯 번째 스튜디오앨범으로 발매된 이 작품은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7위까지 오르는 등 The Clash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에는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애초 이 작품은 “Rat Patrol from Fort Bragg”이라는 이름의 더블 앨범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Mick Jones의 믹싱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멤버들이 이 일을 Glyn Johns에게 넘겼고 작품 길이는 싱글 LP로 줄었다.1

앨범의 첫 싱글로 발표된 작품은 A면 첫 곡이기도 한 “Know Your Rights”다. “이것은 기타로 알리는 공공의 발표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권리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이 권리들은 Catch22의 모순처럼 행사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당신은 발언의 자유가 있다. 실제로 그걸 행사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면 말이다.(The right to free speech, as long as you’re not dumb enough to actually try it)”

앨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세 번째 수록곡인 “Should I Stay Should I Go?”다.2 이 곡은 밴드가 영국 싱글 차트에서 유일하게 정상을 차지한 곡이 되었다. 이 노래의 제목 때문에 이 앨범으로 불화를 겪고 결국 그룹을 떠난 Mick Jones의 자조적인 내용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기도 했지만 본인은 부인했다고 한다. 롤링스톤은 “The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이라는 차트에서 이 곡을 228위에 올려놓았다.

“Should I Stay Should I Go?”와 함께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싱글은 이어지는 곡 “Rock The Casbah”다. 이 곡은 빌보드 핫100 차트 8위까지 올랐는데 이는 밴드의 유일한 미국 차트 탑10 기록이다. 이 곡은 1979년 혁명 이후 서양음악을 금지한 이란 정권을 비꼰 내용이다.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이란계 프랑스 만화작가인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 작품 “Persepolis”에서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다.3

요즘 들어 이 앨범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곡은 제목처럼 펑키한 리듬으로 무장한 “Overpowered by Funk”다. 80년대 The Jam, Spandau Ballet 등을 통해 일반화될 백인 펑크(funk)의 유행을 선도했던 이 노래는 영국에서 작업을 시작해서 앨범 전체를 마무리했던 뉴욕에서 완성되었다. 이 곡의 랩 부분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밴드의 “This Is Radio Clash” 등의 싱글 앨범 표지 작업을 맡기도 했던 Futura 2000이 맡았다.

앨범이 발표된 1982년은 영국 내부의 정치도 그러려니와 세계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The Clash는 이런 상황을 “전투 락”이라는 앨범 속에 진보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녹여냈다. 이 앨범의 미학적 가치는 또한 다양한 음악장르를 – 특히 랩이나 펑크(funk)와 같은 흑인음악을 –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밴드의 이러한 문화적 포용성은 펑크락(punk rock)이 단순한 백인 노동계급의 음악에서 머물지 않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 오리지널 믹스는 브트렉으로 팔리기도 했다고 한다
  2. 어릴 적 하숙집에서 이 노래를 내가 자주 들어 하숙집의 유행가가 되기도 했다
  3. 이란 정부의 풍속 경찰은 파티 등 서양의 문화를 단속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피하려다 지붕에 떨어져 죽기까지 하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Wham!의 중국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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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7일 중국 본토에서는 낯선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날은 Wham!이 서방의 팝 뮤지션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서 라이브 공연을 가진 날이다. 듀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아져가던 시기에 듀오의 매니저 Simon Napier-Bell는 이 나라에서의 공연을 위해 중국 당국과 18개월간 동안 협상했다. 그는 Queen이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결국 중국 당국은 락음악에 다소 현란한 이미지의 Queen 대신 단정한 이미지의 팝음악을 구사하는 Wham!을 선택했다. Napier-Bell이 후에 고백하기를 중국 당국의 이런 결정에는 그의 교묘한 협상전략이 주효한 측면도 있다. 그는 두 개의 중국 당국을 위해 두 개의 브로셔를 만들었는데, 중산층의 젊은이들인 팬과 함께 있는 Wham!의 브로셔와 전형적인 화려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Queen의 보컬리스트 Freddie Mercury의 모습이 담긴 브로셔가 그것이었다. 공연은 열흘에 걸쳐 진행되었고 베이징에 있는 노동자 체육관에서 15,000 명의 관중 앞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성공적인 중국 입성을 마무리했다. 당시 입장권 가격은 무료 카세트테잎을 포함하여 7달러 정도였다. 공연은 “Wham! In China: Foreign Skies”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졌는데 CBS/Fox에서 홈비디오로 1986년 출시했다.

Rain Do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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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Waits와 Iggy Pop과 Jim Jarmusch는 ‘삼란성 쌍둥이’가 아닐까 생각될 만큼 서로 다르게 생겼으면서도 분위기가 닮았다. 그래서인지 Tom과 Iggy는 Jim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고 Jim은 Tom의 음악을 그의 영화에 즐겨 썼다. 또 그래서인지 Tom의 노래가 Jim의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Tom의 대표작 Rain Dogs는 그런 면에서 음악으로 듣는 Jim의 영화와도 같은 분위기다. 1985년 9월 발매된 이 앨범은 “도시에서 퇴거당한 이들”이라는 느슨한 콘셉트를 가진 앨범이어서 더더욱 영화적이다.1 스타일적으로는 블루스와 뉴올리언즈 분위기가 물씬 나는 관악 연주가 어우러져 서커스 악극단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Tom은 이 앨범의 대부분의 곡을 1984년 가을 맨해튼에 있는 한 지하방에서 두 달 동안에 거쳐 썼다고 한다. 그리고 앨범 작업에 도시의 분위기를 가미하기 위해 거리에서의 소음이나 카세트레코더에서 나오는 모호한 소음을 녹음해 두었고, 후에 앨범 곳곳에 배치되었다. 또한 이국적 분위기를 위해 다양한 악기가 동원되었는데 이 중에는 마림바, 아코디언, 더블베이스, 트럼본, 밴조 등이 있다. 이러한 음악적 기조는 신디싸이저와 드럼머신이 지배하던 1980년대 중반의 대중음악계에서는 매우 이채로운 일이다.

앨범 녹음작업 또한 매우 즉흥적이었다고 한다. 기타 연주를 맡았던 Marc Ribot의 회고에 따르면 밴드는 녹음에 들어가기 전에 연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Tom은 스튜디오에서 그들에게 어쿠스틱기타로 곡을 연주해줬다. Tom은 곡의 방향을 위한 제안을 하긴 했지만 처음이나 두 번째 테이크에서 어떤 곡이 나올지에 대해서는 그때의 상황에 의존했다. Tom은 이 앨범에 The Rolling Stones의 Keith Richards도 초대했다. Tom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동물과도 같은 감각으로 곡 작업에 대한 제안을 했다고 한다.

굉장히 익숙한 앨범 커버는 스웨덴의 사진작가 Anders Petersen이 함부르크에 있는 홍등가 Reeperbahn 근처에 있는 Café Lehmitz에서 1960년대에 찍은 사진 연작 중의 하나를 사용한 것이다. 사진 속의 남녀는 Rose와 Lily로 불리웠다 한다.

앨범 듣기

  1. 실제로 이 컨셉트는 Martin Bell 감독의 1984년 다큐멘터리 Streetwise에 영감 받아 생각해낸 것이라 한다

All Mod C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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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am – All Mod Cons“. Licensed under Wikipedia.

요 며칠 The Jam의 All Mod Cons를 즐겨듣고 있다. 1978년 밴드의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으로 발매된 이 작품은 밴드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앨범의 제목은 “일체의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를 의미하는 “all modern conveniences”라는 주택 광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광고 카피를 줄인 숙어다. 밴드는 이 표현을 자신들의 모드 리바이벌(Mod Revival) 스타일의 작품에 일종의 말장난으로 가져다 붙인 것이다.

앨범 전체 수록곡은 The Kinks의 “David Watts”의 커버 버전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소위 “브리티시 인배이전(British Invasion)”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타이틀곡인 “All Mod Cons”는 성공한 이들에게 싹싹하게 굴다가 그들이 실패하는 즉시 떠나버리는 변덕스러운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Mr. Clean”은 Paul Weller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워킹(Woking)이라는 영국 남부 도시의 외곽에 있는 주식거래 지역에서 느낀 이미지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다.

“계급 문제는 당시 제가 매우 중요했어요. 워킹의 외곽에는 주식중개인 벨트가 있었죠. 그래서 난 이미지를 가지고 씨티(The City)에 가기 위해 워털루 역까지의 기차를 잡아타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미스터 클린은 그런 나의 시각이었죠.”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의 발라드 “English Rose”는 오리지널 앨범 발매 시에는 제목도 가사도 없었다고 한다. Paul 은 이 노래에는 음악 자체 없이는 가사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싱글로 발매된 앨범의 마지막 곡 “Down in the Tube Station at Midnight”은 영국 차트 15위까지 오르면서 그룹의 발표작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곡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곡은 지하철을 이용하여 아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다가 극우 깡패들에게 얻어맞는, 한 젊은이의 독백으로 구성된 곡이다.

Q매거진은 “가장 위대한 100개의 영국 앨범”에서 이 앨범을 50위로 선정했다. 또한 NME는 2013년의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219위로 선정했다.

Eternal Fl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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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1일 The Bangles가 부른 “Eternal Flame”이 빌보드 핫100 차트 정상에 올라 1주간 머물렀다. 로스엔젤레스 출신의 여성 락밴드 The Bangles의 두 번째 차트 정상곡인 이 곡은 Billy Steinberg와 Tom Kelly, 그리고 밴드의 리드싱어인 Susanna Hoffs 가 함께 만들었다. Hoffs는 Elvis Presley의 고향 그레이스랜드에 있는 그의 묘지에 타오르고 있던 불꽃을 보고 이 곡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Hoffs는 “Like A Virgin”, “I Touch Myself” 등을 만든 작곡팀과 함께 작업에 들어가 곡을 완성했다. Steinberg가 말하길 Hoffs가 그레이스랜드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자신이 어렸을 때 가곤 했던 유대교 예배당에서 봤던 불꽃을 떠올렸다고 한다. 공동 작곡가 Billy Steinberg는 이 곡을 두고 “비틀즈가 버즈(the Byrds)를 만났다”고 표현하였다. 이 곡은 밴드의 세 번째 앨범 “Everything”의 두 번째 싱글로 1989년 1월 20일 발매되었다. 1989년 2월 4일 핫100 차트에 56위로 데뷔한 “Eternal Flame”은 8주후 정상을 차지한다. 또한 미국 이외에도 호주와 네덜란드를 포함한 8개 국가의 팝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국제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뮤직비디오

Footlo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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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3월 31일 Kenny Loggins가 부른 “Footloose”가 빌보드 핫100 차트 정상에 올라 3주간 머물렀다. Kenny Loggins 본인에게는 생애 최초의 정상곡이라는 기쁨을 안겨준 이 곡은 Kenny Loggins와 Dean Pitchford가 만든 곡이다. 강렬한 댄스리듬의 타악기 연주만으로 인상적인 전주를 시작하는 이 곡의 아이디어는 1980년 “Fame”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Dean Pitchford가 낸 것이었다. Pitchford는 춤과 락뮤직이 금지된 한 시골 마을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그는 친구였던 뮤지션 Kenny Loggins에게 연락해서 이 프로젝트를 위한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Loggins 는 처음에 망설였지만 계약을 맺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Footloose”와 “I’m Free (Heaven Help The Man)”이다. Kevin Bacon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첫 싱글로 발매된 이 곡은 1984년 1월 28일 56위로 핫100 차트에 데뷔했다. 그리고 9주 후 정상을 차지한다. 또한 오스트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한다. Loggins와 Fitchford는 이 곡 덕분에 1985년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지만 Stevie Wonder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에게 수상의 영광을 내줬다. 하지만 그래미에서는 “이 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했다. Brian Grant가 감독한 뮤직비디오는 영화음악으로 쓰인 비디오가 의례 그렇듯이 영화의 주요장면이 적절하게 배치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뮤직비디오

Rock Me Amad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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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Me Amadeus (Falco single – cover art)”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86년 3월 29일 Falco의 “Rock Me Amadeus”가 빌보드 핫100 차트 정상을 차지해서 3주간 머물렀다. Falco와 독일 프로듀서 Rob Bolland, Ferdi Bolland가 함께 만든 이 곡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Johann Holzel이 본명인 이 팝싱어의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다. 이미 1983년 초 “Der Kommissar”로 인상적인 성공을 기록한1 Falco는 두 번째 앨범 “Junge Roemer”가 오스트리아 이외의 지역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자 심기일전하여 3집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오스카 상을 수상한 “Amadeus”를 감상한 Falco가 영화에 영감 받아 “Rock Me Amadeus”를 만들었고 이 곡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곡은 1986년 2월 8일 차트에 79위로 데뷔한 후 7주 후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미국에서 최초로 독일어로 된 차트 정상곡이라는 기록을 남긴다.2 “Rock Me Amadeus”는 또한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다양한 나라에서도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싱글은 다양한 익스텐디드버전으로 출시되기도 했고 많은 대중문화에서 패러디되기도 했다. 한편 Falco는 이어진 싱글 “Vienna Calling”을 차트 18위에 올리며 상업적 성공을 만끽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성공가도는 여기까지가 마지막이었고 1998년 2월 6일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자동차 사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의 41세 생일을 불과 며칠 남겨놓았던 시기다. 그의 시신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묻혔다.

뮤직비디오

  1. 이 노래는 오리지널이 나온 거의 같은 시기에 영국 밴드 After The Fire가 커버하여 역시 상업적 성공을 기록한다
  2. Falco 이전에 Nena의 “99 Luftballons” 독일어 버전이 인기를 끌었지만 이 노래는 핫100 차트 2위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