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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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Division Closer”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Closer는 영국의 포스트펑크 밴드 Joy Division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발매된 스튜디오 앨범이다. 1980년 7월 18일 레코드 레이블 Factory를 통해 발매된 이 앨범은 리드 싱어 Ian Curtis가 자살로 생을 마친 두 달 후에 발매되어 그의 유작이 되었다.(그의 삶과 죽음은 Anton Corbijn의 영화 Control을 통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유명한 앨범 재킷은 Martyn Atkins와 Peter Saville이 맡았다. 사진은 Bernard Pierre Wolff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제노아에 있는 한 가족 묘지를 찍은 사진이다. 묘지 사진을 쓰자는 아이디어는 Peter Saville의 아이디어로 Ian의 죽음을 전해들은 Peter가 그의 죽음을 기리고자 낸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Martin Hannett이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오프닝 트랙의 제목이기도 한 J.G. Ballard의 소설 The Atrocity Exhibition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Ian은 사실 그 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대부분 곡의 가사를 다 썼다고 한다. 어쨌든 이 앨범은 그룹의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준 걸작 앨범이 되었다. 한 평론가가 “고딕락의 어둠의 일격(dark strokes of gothic rock)”이라고 표현한 이 앨범은 이후 고딕락, 이모(emo), 인디 뮤지션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는 앨범으로 남게 되었다. 12인치 LP로 발매된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6위까지 올랐고 호주에서는 4주간 1위에 머물렀다.

Johnny Marr, I Feel You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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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ny Marr University of Salford 2012 crop” by University of Salford Press Office – Derived from File:Johnny Marr University of Salford 2012.jpg (cropped and straightened), original source Flickr: Johnny Marr 9.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The Smiths의 기타리스트였던 Johnny MarrDepeche Mode의 히트곡 I Feel You을 커버하여 뮤직비디오로 제작했다는 소식을 그의 페이스북 계정에 알려왔다. 풀 동영상은 곧 올릴 계획이라고.

Video for Johnny’s Record Store Day cover of Depeche Mode’s “I Feel You” coming soon…(출처)

I Will Surv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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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ria Gaynor (1976)” by Rob Mieremet / Anefo – Derived from Nationaal Archief.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9년 3월 10일 Gloria Gaynor가 부른 “I Will Survive”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총 3주간 1위에 머물렀다. R&B 차트에는 5위까지 올랐다. Freddie Perren과 Dino Fekaris가 만든 이 곡은 뉴저지 출신의 이 가수의 경력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곡이 되었다. Gloria Gaynor의 이전 히트곡은 Jackson 5의 클래식 “Never Can Say Goodbye”의 커버 버전(#9 Pop, #1 Club Play)과 The Four Tops의 커버 버전 “Reach Out, I’ll Be There”였다. 디스코가 인기를 끌던 시대적 흐름을 잘 읽은 Gloria는 그녀의 다섯 번째 앨범 “Love Tracks”를 위해 모타운의 프로듀서이자 작곡가였던 Freddie Perren, 그리고 Dino Fekaris와 함께 일하기로 한다. 앨범을 위해 이들이 만든 곡 중 하나가 바로 “I Will Survive”였다. Gloria는 이 노래를 몹시 좋아해서 이 곡을 녹음하는 것에 즉시 동의했다. 실은 이 녹음은 힘든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Gloria는 앨범 작업 도중 어머니를 잃었고 등의 고통 때문에 척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보컬을 녹음할 때에 그녀는 등 교정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당시 디스코의 프로듀싱 경향은 많은 편집을 거치곤 했다. 피치를 더 빠르게 올리는가 하면 오버더빙, 멀티보이스 등도 횡행했다. 하지만 이 곡은 백그라운드 싱어를 쓰지 않은 채 속도의 조절도 없이 Gloria의 보컬 하나만으로 곡을 만들어냈다. 때문에 이 노래는 다른 디스코 곡에 비해서 더 비어있고 투명한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이 곡은 처음에는 1978년 발표된 “Substitute”의 B면 곡으로 출시되었다. “I Will Survive”가 분명히 히트할 것이라는 Gloria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레이블인 폴라이도 레코드사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이 곡의 레코드를 뉴욕의 유명한 디코스인 스튜디오54의 DJ Richie Kaczor에게 직접 가져갔다. Richie가 이 레코드를 틀기 시작하자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상황이 이쯤 되자 폴라이도는 그 곡을 A면으로 하는 싱글을 발매했다. 1978년 12월 16일 핫100 차트에 87위에 등장한 이 곡은 12주 후 정상에 등극한다. 급기야 역경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겠다는 긍정적인 메시지 덕분에 이 곡은 여성이나 동성애자 그룹의 찬가가 되는 등 디스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가 되었다. Gloria는 이 곡으로 1980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베스트 디스코 레코딩’ 부문을 수상하였다. 롤링스톤은 이 곡은 “the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에서 492위에 등재했다.

Music Video

The Joshua Tree

A landscape monochrome photograph of U2 in the desert sits in the center of a black background. U2 are standing on the left half of the photograph, with a mountain range on the right half. Tiny gold text reading "THE JOSHUA TREE U2" is stretched across the top of the black background.
The Joshua Tree”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87년 3월 9일 U2의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The Joshua Tree”가 발매되었다. Daniel Lanois와 Brian Eno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6년 1월에서 1987년 1월까지 더블린에 있는 여러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U2는 “The Unforgettable Fire”을 내놓은 후 1985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공연을 다니거나 휴식을 가지며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앨범 중 많은 곡들은 1984년에서 1985년까지 미국 순회 공연을 다니면서 느낀 점을 노래로 만든 것들이다. 이 앨범에는 밴드 멤버의 미국에 대한 애증섞인 감정, 종교적인 명상 등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음악적으로도 여전히 펑크적인 요소가 많이 담긴 이전 앨범에 비해서 뿌리 음악에 대한 성찰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Bono가 1985년에 Steven Van Zandt의 Sun City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덕택이었다. 이 자리에서 Bono는 Keith Richards와 Mick Jagger 블루스를 연주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Bono의 생각에 그의 밴드는 펑크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ono는 Bob Dylan, Van Morrison과 교류하며 아일랜드 음악의 뿌리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경험 역시 새 앨범에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명한 앨범 커버의 사진은 Anton Corbjin의 작품이다. 그가 사진을 찍은 이 장소가 바로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이다. Corbjin은 밴드에게 이 나무의 이름이 구약성서의 예언가 조슈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말해주었다. 공원에서 그들은 나무 한 그루가 본래 군집으로 자라는 나무의 특성과 달리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외로운 나무에서 사진을 찍었고 Bono는 앨범의 이름을 이 나무의 이름에서 따오기로 결정하였다. 앨범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또한 비평적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미국 앨범 차트에서 1987년 4월 4일 7위에 진입했는데 이는 Eagles의 1979년 앨범 “The Long Run” 이후 가장 높은 차트 데뷔였다. 앨범은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20여개 나라에서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앨범에서는 “With Or Without You”(뮤직비디오)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포함하여 네 개의 싱글이 정상에 올랐다. 밴드는 이 앨범의 홍보 공연 “Joshua”를 시작하였다. 이 공연은 필름에 담겼고 “Rattle And Hum”이라는 이름으로 1998년 말 공연 실황 앨범이 발매되었다. 1988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밴드는 ‘그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2개 부문에서 수상한다. 앨범은 리마스터되어 2007년에 LP와 CD로 재발매되었다.

Can’t Fight This Fe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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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 Fight This Feeling Cover Art” by Source (WP:NFCC#4). Licensed under Wikipedia.

1985년 3월 9일 미국의 락밴드 REO Speedwagon의 “Can’t Fight This Feeling”이 빌보드 핫100차트 정상에 올라 3주간 머물렀다. 같은 해 3월 2일에는 어덜트컨템포러리 차트 3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REO Speedwagon은 오랜 기간 무명으로 지내다가 아홉 번째 스튜디오 앨범 “Hi-Infidelity”에서 “Keep On Lovin’ You”를 히트시키며 인기 락밴드가 되었다. 하지만 1982년 발매된 후속 앨범 “Good Trouble”은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밴드가 후속작으로 준비한 작품이 이 곡이 수록된 “Wheels Are Turnin’”이었다. 리드 싱어 Kevin Cronin을 비롯한 밴드 멤버들은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아 녹음 세션을 연장하기도 하고 하와이 등지에 머물면서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다. Kevin은 하와이에서 10년 전에 떠올랐던 아이디어를 되새기며 작품을 구상했고 그 결과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Can’t Fight This Feeling”이라고 한다. 멤버들이 다시 모여 녹음에 들어갔는데, 멤버들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던 한 여인에게 연정을 품는다는 내용의 이 노래를 “그 멍청한 발라드”라고 부르며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못해 이 노래를 녹음한지라 앨범의 첫 싱글은 “Can’t Fight This Feeling”이 아닌 “I Do’wanna Know”였다. 이 노래는 1984년 12월 차트 29위에 오르는 신통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어서 발매된 싱글이 “Can’t Fight This Feeling”이었는데, 발매 즉시 엄청난 가세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85년 1월 19일 핫100 차트 46위에 처음 진입한 이 곡은 불과 8주후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밴드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다. REO Speedwagon은 이 노래를 1985년의 라이브에이드 콘서트에서 부르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We Are The World

1985년 3월 7일 USA For Africa의 “We Are The World”가 발매되었다. Michael Jackson과 Lionel Richie가 쓰고 Quincy Jones와 Michael Omartian이 프로듀스한 이 곡은 아프리카의 기근 해결에 도움을 주고자 만든 곡으로 같은 취지로 발표된 Band Aid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었다. 이 곡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당초 Harry Belafonte와 자금조달책인 Ken Kragen의 생각이었다. 이 둘은 몇몇 아티스트들에게 의사를 타진하여 프로젝트를 구체화시켜갔다. Jackson과 Richie는 “Do They Know”가 발매된 지 7주 후에 곡을 완성했고, 이 곡의 로얄티 전액을 USA For Africa 재단에 기부하였다. 곡이 녹음되기 하루 전인 1985년 1월 21일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팝아티스트들이 하나둘씩 녹음실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이벤트가 벌어졌고 아티스트들은 밤을 새워 노래를 녹음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앨범을 무료로 찍어 전 세계에 배포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차트에서 내려오기까지 싱글은 미국에서만 450만 장이 팔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전 세계 총 판매량은 3천 만장에 약간 못 미친다고 한다) “We Are The World”는 1986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듀오 또는 그룹에 의한 베스트 팝보컬 퍼포먼스’ 등 4개 부문에 수상하였다. 이 노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도 하는데 주로 그 취지의 적합성에 관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기근 등 제3세계의 실상을 제1세계에 알리는 데에는 기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근본원인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일부 비평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후에 이들의 음악보다 더 급진적인 자선 앨범인 Artists United Against Apartheid의 Sun City가 등장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독창(녹음장소에 등장한 순서)
Lionel Richie
Stevie Wonder
Paul Simon
Kenny Rogers
James Ingram
Tina Turner
Billy Joel
Michael Jackson
Diana Ross
Dionne Warwick
Willie Nelson
Al Jarreau
Bruce Springsteen
Kenny Loggins
Steve Perry
Daryl Hall
Huey Lewis
Cyndi Lauper
Kim Carnes
Bob Dylan
Ray Charles (피아노와 키보드도 연주함)

코러스(알파벳 순서)
Dan Aykroyd
Harry Belafonte
Lindsey Buckingham
Mario Cipollina
Johnny Colla
Sheila E.
Bob Geldof
Bill Gibson
Chris Hayes
Sean Hopper
Jackie Jackson
La Toya Jackson
Marlon Jackson
Randy Jackson
Tito Jackson
Waylon Jennings
Bette Midler
John Oates
Jeffrey Osborne
Anita Pointer
June Pointer
Ruth Pointer
Smokey Robinson

밴드
David Paich – 신디싸이저
Michael Boddicker – 신디싸이저, 프로그래밍
Paulinho da Costa – 퍼커션
Louis Johnson – 베이스
Michael Omartian – 키보드
Greg Phillinganes – 키보드
John Robinson – 드럼

Licensed To Ill

A painting of the rear end of a Boeing 727, in an American Airlines livery. The "Beastie Boys" logo is printed on its tail.
By iTunes, Fair use, Link

1987년 3월 7일 Beastie Boys의 데뷔 앨범 “Licensed To Ill”이 빌보드 탑200 차트 정상에 올라 7주간 머물렀다. 1986년 11월 15일 발매된 이 앨범은 최초로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한 랩LP로써 빌보드 R&B 차트 2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Rick Rubin과 Beastie Boys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5년 초에서 1986년 말까지 뉴욕에 있는 Chung King House Of Metal에서 녹음됐다. 이 앨범은 당시 막 인기를 얻고 있던 힙합, 랩 등과 락음악의 샘플링을 혼합하여 이 서브장르를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하였다. 발매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어 첫 2주 동안 백만 장이 팔려나간 이 앨범에서는 많은 히트곡이 쏟아져 나왔는데 “(You Gotta) Fight For Your Right (To Party)”과 “Brass Monkey” 등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No Sleep To Brooklyn”에서는 Slayer의 Kerry King이 가세하여 리드기타를 연주하였고 뮤직비디오에서도 글램메탈을 패러디하는 식으로 등장한다. 이 제목은 Motörhead의 “No Sleep ‘til Hammersmith” 앨범에 대한 조롱이다. King이 이 곡에 참여한 것은 당시 Rick Rubin이 Slayer의 앨범도 프로듀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은 원래 이 앨범의 제목을 “Don’t Be A Faggot”으로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이 제목이 동성애 혐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후에 밴드의 멤버 Adam Horovitz는 그 제목에 대해 사과했다). 앨범의 유명한 커버는 David Gambale (aka “World B. Omes”)의 작품인데 산허리에 추락하고 있는 보잉 727 제트기의 일러스트레이션이다.(실제로 1986년 3월 멕시코의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 산에서 보잉 727 추락사고가 있었다) 비행기의 끝부분에 등록번호 “3MTA3”이 적혀 있는데, 이는 사실 트릭으로 거울에 비추어 보면 “EAT ME”를 의미하는 일종의 암호다.

Love Supreme

이코노미스트에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발매된 재즈 명반 “Love Supreme”에 관한 칼럼이 게재되어 여기에 번역해서 올려둔다.

A blue-tinted black-and-white photograph of Coltrane's face looking to the left, with the logo "A Love Supreme/John Coltrane" written in white bold Arial across the top.
John Coltrane – A Love Supreme”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재즈에서 가장 유명한 징과 함께 시작한다. 몇 초 후, 더블베이스가 4노트의 “Love Supreme” 주제를 이어받는다. John Coltrane은 강렬한 색소폰 솔로를 시작한다. 그리고 30분 뒤,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여전히 5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선하게 들린다.

재즈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던 Coltrane은 1967년 그의 나이 40살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간혹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기도 하는 다작의 아티스트였다. 1965년 2월에 발매된 “A Love Supreme”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비평가로부터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Supreme”에 관해서는 과장이 좀 있다. 이 작품은 그 시기의 Coltrane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압도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예를 들어 “Sun Ship”이나 “Crescent”와 같은 작품들) 그 명성은 아마도 몇몇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이 작품은 1960년대 중반의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접근하기 쉽다. “Supreme”은 Coltrane의 기술적인 힘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발매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가 조성(調聲)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그의 앨범 다수는 재즈 클럽에서의 “해프닝”의 결과물로써 고도로 추상적이다. 익숙하지 않은 귀로는 몇몇은 거의 감상하기 어렵다.(“Live at the Village Vanguard Again!”을 시도해보라) “Supreme”은 숙달된 기술과 1960년대 Coltrane의 지성주의가 잘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상당히 이지리스닝인 것이다.

“Supreme”은 또한 Coltrane에게 있어 가장 종교적인 앨범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가장 헌신적인 재즈 팬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아는 것을 느낄 수 없는 이들에조차 어떤 영감을 준다. 그는 요절했다. 그는 맹렬하게 연습했는데, 하루 12시간 씩 했다고 하고, 이는 아마도 가장 기술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룬 색소폰 연주자가 되게 하였을 것이다. Charlie Parker나 Miles Davis와 같은 다른 재즈 거인들과 달리 그에게는 섹스와 관련된 짓궂은 일화가 거의 없다. 그래서 Coltrane의 팬들은 이 사람에 대해 아는 바를 조각조각 모아야 한다.

1950년대 후반의 마약중독에서 회복되는 동안 Coltrane은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고 “Supreme”은 명백하게 종교적인 함축이다. 라이너노트에서 그는 이 작업을 “그에게 바치는 변변치 않은 제물”이라고 칭했다. 첫 악장 “Acknowledgment”에서 Coltrane은 가스펠과도 같은 투로 “A Love Supreme”이란 가사를 되뇐다.(어떤 사람들은 그가 실은 “Allah Supreme”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여긴다. – 진지한 재즈 학자들조차 전적으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지는 않는 주장)

제 4악장 “Psalm”은 Coltrane이 그의 색소폰과 말을 “주고받은” 시에 대한 낭송이다. 당신은 여기에서 그 대화를 들을 수 있다(꽤 감동적이다). 이 작품은 빛나는 색채로 끝을 맺는다. Coltrane은 두 번째 색소폰으로 오버덥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Supreme”은 발매된 그 맥락 때문에 중요하다. Coltrane은 발매 이후 몇 달 후에 사망한다. 이후 어떤 색소폰 주자도 그 정도의 인기와 비평적 찬사를 얻지 못했다. “Supreme”이 나올 즈음 재즈의 인기를 폭락하기 시작했다. 락밴드가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디너 재킷과 작은 클럽이 곁들여진 재즈는 앰프가 가미된 기타와 화려한 의상에 비해서 매우 쿨하지 않은 것이 된 것처럼 보였다.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새롭고 어린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극적으로 자신들의 스타일을 바꿨다. “Supreme”이 나온 3년 후, Davis는 “Miles in the Sky”(명백하게 비틀즈에 대한 고개 끄덕거림이 담긴)이라는 앨범을 내놓는다. 그는 Jimi Hendrix와 함께 연주했다. Herbie Hancock은 전통적인 재즈를 거의 전적으로 생략하였다. 일그러뜨린 기타 사운드, 전자 베이스들, 락 리듬, 그리고 큰 썬그래스가 음악적인 이행기에 함께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Supreme”에 대한 광범위한 숭배는 부분적으로 지금 의미하는 것에 의해 설명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어필했던 “적정한” 재즈라 여기는 마지막 앨범이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그리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은 한 예술 형식의 최후의 일제사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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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mur

A train trestle covered in thick kudzu with "R.E.M. / MURMUR" written in blue
R.E.M. – Murmur” by Source.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Murmur는 미국의 칼리지락 밴드 R.E.M.이 1983년 내놓은 그들의 데뷔앨범이다. 이 앨범은 싱어 Michael Stipe의 암호와도 같은 가사(예를 들어 Talk About The Passion은 집 없는 이들에 관한 노래라고는 하는데 가사만 읽어봐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기타 Peter Buck의 쟁글거리는 연주 스타일, 베이스 Mike Mills의 멜로딕한 베이스라인 등 R.E.M.을 특징짓는 모든 요소를 골고루 보여준 작품이다. 밴드는 이 앨범을 1982년 12월부터 녹음하기 시작했다. 프로듀서로는 Stephen Hague를 기용하였는데 그의 기술적 완벽성에 대한 강조는 밴드의 성격과는 그리 맞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Catapult” 트랙에서 드러머 Bill Berry의 기를 꺾기도 했고 보스턴의 싱크로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그 트랙을 완성했다. 심지어 그는 밴드의 허락 없이 이 트랙에 키보드 파트를 보태기도 했다.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 Pet Shop Boys, New Order 등과 일한 경력의 프로듀서였던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으나, 어쨌든 이에 화가 난 밴드는 이전에 밴드와 함께 일했던 보다 어쿠스틱 친화적인 프로듀서 Mitch Easter와 함께 작업하게 해달라고 레이블인 I.R.S. 에 요청했고 레이블은 시험적으로 함께 일하는 것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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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ch michael scott” by Shot by Robert Toren 1986 San Francisco, California – English Wikipedia. Licensed under Attribution via Wikimedia Commons.

밴드는 북캘리포니아로 가서 Easter와 다른 프로듀싱 파트너 Don Dixon과 함께 “Pilgrimage”를 녹음했다. 이 트랙을 들어본 레이블은 그들과 함께 녹음하는 것을 허락했다. 밴드는 1983년 1월 북캘리포니아에 있는 리플렉션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이전의 순회공연에서 부른 많은 곡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Hague와의 나쁜 추억 때문에 밴드는 락뮤직의 클리쉐와도 같은 기타 솔로랄지 당시 인기 있었던 신디싸이저의 사용을 거부했다. Easter와 Dixon은 많은 부분에서 불간섭 정책을 취했으며 다만 보컬이 수준 이하로 여겨질 때에만 재녹음을 지시했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Murmur는 미국 얼터너티브락의 보다 조용하고 내면적인 부분을 반영하는 앨범으로 특징지을 수 있게 되었다. 발매된 해에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36위까지 올랐다. 첫 싱글 “Radio Free Europe”의 재녹음 버전은 싱글 차트 78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전체적인 앨범 판매량은 비평적 찬사에 못 미쳐 약 20만 장 가량 팔렸다. 앨범은 1991년에 가서야 50만 장이 팔려 골드 앨범이 될 수 있었다.

트랙리스트

Side one
1.”Radio Free Europe” – 4:06
2.”Pilgrimage” – 4:30
3.”Laughing” – 3:57
4.”Talk About the Passion” – 3:23
5.”Moral Kiosk” – 3:31
6.”Perfect Circle” – 3:29

Side two
7.”Catapult” – 3:55
8.”Sitting Still” – 3:17
9.”9-9″ – 3:03
10.”Shaking Through” – 4:30
11.”We Walk” – 3:02
12.”West of the Fields” (Berry, Buck, Mills, Stipe, and Neil Bogan) –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