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T

They Might Be Giants

They Might Be Giants March 25th, 2005.jpg
They Might Be Giants March 25th, 2005” by Be3n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전염성이 강한 멜로디에 기묘한 유머감각과 뉴욕 포스트펑크씬의 아방가르드 미학을 조합한 음악을 구사했던 They Might Be Giants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가장 예기치못했던 얼터너티브 밴드 성공스토리였다. 음악적으로 John Flansburgh와 John Linnell 듀오는 모든 것에서 그들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차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로운 절충주의는 그들의 불가사의하고 기괴한 유머감각에 의해 잘 버무려졌다. ’80년대 그들은 인디레이블에서의 싱글발표와 계속적인 투어를 통해 그들은 대학 캠퍼스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90년대 메이져 레이블로 이적한 후 발표한 Flood는 MTV의 지원사격 등에 힘입어 골드앨범이 되는 등 상업적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어 그들은 그런지가 도래하기 전까지 가장 성공적인 얼터너티브 밴드로 평가받게 된다. 그러나 그룹의 예측불가능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90년대 중반에는 MTV를 뒤덮은 포스트그런지 그룹들과 모던락 래디오에서 외면당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그리고 또다시 그들은 일종의 컬트로 남게 되었다.Flansburgh와 Linnell은 소년시절부터 친구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래를 쓰기 시작한 그들은 대학교에 들어간 후 본격적인 밴드생활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음악적 경력의 무대를 부르클린으로 결정한 그들은 George C. Scott 주연의 영화에서 밴드의 이름을 차용하고 드럼머쉰을 이용하여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곧 맨허튼 언더그라운드에서 실력자로 부상하였고 많은 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레코드 취입은 그리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앤써링머쉰에 노래를 녹음하는 방식을 시도하였고 이런 희한한 술수가 먹혀들어가 마침내 인디레이블인 Bar/None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1986년 별도의 이름이 붙지 않은 데뷔앨범을 발매하였는데 대학가 라디오에서 인기를 얻게 된다. 싱글 “Don’t Let’s Start”의 기발한 비데오도 MTV의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2집 Lincoln에서는 “Ana Ng”가 컬리지 히트싱글이 되었고 앨범차트 89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메이저레이블의 주목을 받은 TMBG는 마침내 1990년 Elektra와 계약을 맺고 그 해 말 Flood를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는 “Birdhouse in Your Soul” 과 “Istanbul (Not Constantinople)”가 크게 히트하여 마침내 골드앨범의 영광을 누리게된다. 1992년에 발매된 Apollo 18은 전작에 비해 덜 성공적이었다. 앨범의 써포트투어에서 TMBG는 처음으로 완전하게 갖춰진 백밴드를 쓴다. 이 밴드에는 Pere Ubu의 베이시스트였던 Tony Maimone와 드러머 Brian Doherty가 가세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얼터너티브락 씬에 몰아친 그런지락의 기세로 말미암아 TMBG는 언론과 MTV의 주목을 받는데 실패하였다. 이후에 발표된 일련의 앨범들 역시 주류의 외면을 받았지만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는 여전히 많은 컬트팬들이 지지를 보냈다.

디스코그래피
1986 They Might Be Giants Restless-Bar/N
1989 Lincoln Restless-Bar/N
1990 Flood Elektra
1992 Apollo 18 Elektra
1994 John Henry Elektra
1996 Factory Showroom Elektra
1998 Severe Tire Damage [live] Restless
1999 Live BMG Special
1999 Long Tall Weekend They Might Be
2001 Mink Car Restless
2001 Holidayland Restless

링크
Official Site
Fan Page
Fan Page

The The

Formed 1979
Group Members Matt Johnson Keith Laws
Styles College Rock, Post-Punk, Alternative Pop/Rock


The The는 댄쓰팝에서 컨트리까지 다양한 음악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싱어 쏭라이터 Matt Johnson은 분신이라 할 수 있다. 1961년 8월 15일(오~ 광복절이네요) 런던에서 출생한 Johnson은 나잇클럽과 그의 삼촌이 소유한 펍에서 음악활동을 처음 시작하였다. Johnson이 처음 조직한 밴드는 그의 나이 11살에 조직한 Roadstar였다. 15살에 그는 DeWolfe라는 음악관련 출판사에 취직하였다. 차심부름이나 하는 사급에서 출발한 그는 3년후 레코딩스튜디오의 보조엔지니어로 승진하였다.


1979년 그는 신디싸이저 플레이어인 Keith Laws와 함께 The The의 구체화 작업에 들어갔다. 1980년 Scritti Politti의 오프닝 공연으로 데뷔한 그들은 1년후 계약상의 문제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LP Burning Blue Soul을 발매하였다. 그 해, 그는 The Gadgets란 밴드에서 키타를 맡았다. 그리고 The The는 Some Bizzare라는 컴필레이션에 한 트랙을 담당하였다.


1982년 The The – 이제 실질적으로 Johnson의 솔로프로젝트가 되어버린 – 는 The Pornography of Despair를 녹음하였다. 하지만 Johnson은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았고 발매를 포기하였다. 1983년 This Is the Day라는 싱글을 Orange Juice의 Zeke Mayika와 함께 녹음하였다. 이 노래는 The The의 실질적인 데뷔 앨범이라 할 수 있는 1984년 Soul Mining에서 핵심적인 음악적 특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The The 는 1986년 Infected라는 앨범으로 팝계에 복귀하였는데 이 작품은 현대 영국 사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주제로 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서는 Neneh Cherry, Art of Noise의 Anne Dudley, 그리고 Swans의 Roli Mosimann과 같은 다양한 이들이 참여하였다.


1989년 앨범 Mind Bomb을 발표하였는데 Johnson는 The Smiths의 키타리스트였던 Johnny Marr, 베이시스트 James Eller, 그리고 ABC의 드러머였던 Dave Palmer과 함께 앨범작업을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그때서야 밴드라고 불릴만한 진용을 갖췄다. 이 라인업은 1993년 Dusk까지 이어졌으나, 1995년 Hanky Panky의 작업에서는 키타리스트로 Eric Schermerhorn, 키보디스트 D.C. Collard, 하모니카에 Jim Fitting, 그리고 드러머 Brian MacLeod 등 진용을 전면 교체하였다. 이 앨범은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Hank Williams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디스코그래피
1981 Burning Blue Soul 4AD
1982 Uncertain Smile Maxi
1983 Soul Mining Epic
1986 Infected Epic
1989 Mind Bomb Some
1993 Dusk Epic
1993 Dusk & Live in New York (Yeah It’s a Bootleg) Sony
1993 Solitude Epic
1994 Dis-Infected Alex
1995 Hanky Panky 550 Music/Epic
2000 NakedSelf Interscope

링크
Official Site

Tears For Fears

Tears for Fears 2008.jpg
KWa자작의 “Tears for Fears 2008“. 위키미디어 공용에 의해 CC BY-SA 3.0으로 라이선스됨.

Roland Orzabal과 Curt Smith는 Tears For Fears라는 그들 밴드의 이름을 아서 자노브(Arthur Janov)의 “primal scream therapy”이라는 치료 요법에서 따올 만큼 지적인 분위기의 씬쓰팝 듀오였다. 더나아가 그들은 자노브의 이론을 데뷔앨범 The Hurting에 도입하는 대범성을 보였다. 이 앨범은 본토 영국에서 빅히트를 기록하였다. 2집 Songs from the Big Chair를 통해 그들은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 “Shout”, “Head Over Heals” 등이 엄청난 히트를 하였고 이로 인해 그들은 MTV 세대를 이끄는 확실한 선두주자가 되었다. 엄청난 성공에 부담을 느낀 탓인지 이들의 3집은 4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싸이키델릭한 타이틀 The Seeds of Love가 히트하긴 하였고 앨범도 많이 팔렸지만 밴드의 종말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스미쓰가 90년대 초반 그룹을 떠나면서 Tears For Fears는 오자발의 솔로프로젝트가 되었다. 2000년 다시 재회한 이들은 다시 Tears For Fears의 이름으로 앨범을 내기로 합의한다.

디스코그래피
1983 The Hurting (Mercury)
1985 Songs from the Big Chair (Mercury)
1989 The Seeds of Love (Fontana)
1993 Elemental (Mercury)
1995 Raoul and the Kings of Spain (Epic)
2004 Everybody Loves a Happy Ending
2022 The Tipping Point

링크
Fan Site

Talking Heads

Talking Heads band3.jpg
By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hotos/52489759@N00″>Jean-Luc</a> – originally posted to <a href=”//commons.wikimedia.org/wiki/Flickr” class=”mw-redirect” title=”Flickr”>Flickr</a> as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s://www.flickr.com/photos/52489759@N00/12084638″>Talking Heads</a>, CC BY-SA 2.0, Link

David Byrne, Chris Frantz 와 Tina Weymouth는 70년대 중반 Rhode Island 디자인 스쿨에 다녔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카나다와 발티모어에서 자란 Byrne은 Revelateion이라는 이름의 스쿨밴드에서 그의 음악경력을 시작하였다. Byrne의 다음 모험은 좀더 진지한 것이었는데 아코디언 연주자인 Marc Kehoe와 함께 그는 발티모어와 샌프랜시스코의 아트스쿨과 레스토랑에서 Bizadi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Byrne은 Rhodes Island에서 Chris Frantz라는 드러머를 만나서 Artistics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그들은 커버버젼을 주력했으나 Byrne은 그 와중에서 ‘Psycho Killer’, ‘I’m Not In Love’, ‘Warning Sign’ 같은 나중에 Talking Heads 시절 써먹은 노래를 만들었다. 그룹의 열렬한 팬 중에 한명은 바로 Tina Weymouth 였는데 후에 Frantz와 결혼하였다.

Artistics가 1974년 중반 해체된 이후 셋은 그들 스스로 밴드를 조직할 것을 고려하였다. Weymouth 는 베이스를 배웠고 이 세명의 졸업생은 New York 의 Lower East Side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른 예술학교 졸업생들처럼 창고에서 기숙하는 길을 걸었다. 트리오는 1975년 초반 진지하게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주요 연습곡은 Byrne의 오리지날곡들과 버블검 사운드, 그리고 60년대 펑크락의 커버버젼이었다. 그 해 5월 그들이 연주하곤 했던 음악에 관한 선입견이 없을 만한 그런 이름, Talking Heads란 이름을 찾아냈다.

6월에 그들은 CBGB에서 Ramones 공연의 전 공연으로 데뷔공연을 가졌다. New York 은 그 당시 한 시절의 음악적인 폭발력의 한 중앙에 있었다. Patti Smith, Tom Velaine, Richard Hell이 이끄는 Television, 그리고 Ramones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Brill Building의 사망 이후 미국락계의 메인스트림으로 나서고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Talking Heads에게는 매우 유익한 토양이 되었다. 트리오는 1976년 Beserkeley 레코드사를 위해 ‘Psycho Killer’, ‘First Week, Last Week/Carefree’, 그리고 ‘Artists Only’가 담긴 최초의 데모테잎을 만들었다. 이 데모테잎은 ‘1,2,3 red light’의 라이브 버전과 함께 80년 브트랙 EP에 실려있다. 이 테잎은 그들이 그들의 첫 앨범을 만든 시기에는 사라진 단순하고 일렉트릭한 매력이 살아있는 음악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중에 1976년 여름 데모 세션이 이어진다.

그리고 11월에는 Ramones와 Flamin’ Groovies같은 이들의 고향인 Sire와 계약을 체결했다. 12월에 그들은 New York에서 처음 발매된 그들의 첫싱글 ‘Love Goes To Building On Fire’/’New Feeling’을 녹음했다. 이 두 트랙은 ‘New Feeling’의 경우 그들의 데뷔앨범에 다시 삽입되었고 A면의 경우 Sire의 히트작 ‘New Wave’에 포함되긴 했지만 Talking Heads의 정식앨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첫 싱글의 앨범재킷은 영국판의 경우 흔하지만 미국판의 경우 수집품목이 될만큼 귀하다. 그 싱글이 발매될 때 Talking Heads는 Jonathan Richman 이 빠졌던 오리지날 Modern Lovers 의 키타리스트였던 Jerry Harrison을 영입 4인조가 되어 있었다. 1976년 몇 번의 공연 후 그는 밴드에 합류하기로 동의했다. 이들은 유럽에서의 일련의 공연 이후 그들의 첫 LP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그룹은 4월에 바하마에서 그들의 두번째 LP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를 녹음하기 위해 1978년 초반 유럽에서 돌아왔다.

디스코그래피
1977 TALKING HEADS 77 review
1978 MORE SONGS ABOUT BUILDING AND FOOD review
1979 FEAR OF MUSIC review
1979 LIVE ON TOUR 1979 review
1980 REMAIN IN LIGHT review
1982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 review
1983 SPEAKING IN TONGUES review
1984 STOP MAKING SENSE review
1985 LITTLE CREATURES review
1986 TRUE STORIES review
1988 NAKED review
1991 THE BEST OF: ONCE IN A LIFETIME review
1991 POPULAR FAVORITES: SAND IN THE VASELINE review
1999 12 x 12 review
1999 STOP MAKING SENSE 99 review

링크
Talking Heads Korea : New Feeling
The Name Of This Site is Talking-Heads

Talk Talk

Talk Talk in 1988.jpg
Talk Talk in 1988” by http://www.talktalk.hu/eng/spiritus.html, Copyright : EMI Records, Ltd., 1988.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It’s My Life로 유명한 Talk Talk는 그들의 전성기 당시 유행하던 뉴웨이브/씬쓰팝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Jazz, 클래식, 그리고 앰비언트뮤직의 다양한 음악적 결실을 받아들인 범주를 지을 수 없는 싸운드를 선보였던 유니크한 밴드이다.

Talk Talk의 스토리는 싱어이자 쏭라이터인 Mark Hollis에서부터 시작한다. Eddie and the Hot Rods와 같은 펑크밴드의 매니저, DJ, 프로듀서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Ed Hollis의 동생이었던 그는 당초에는 아동 심리학자가 꿈이었다. 그러나 1975년 그는 학교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고 이 곳에서 The Reaction이라는 밴드를 조직하였다. 1977년 밴드는 Island 레코드사를 위해 데모테잎을 녹음하였다. 이 곡들 중 한 곡의 제목이 Talk Talk였으며 1978년 I Can’t Resist라는 싱글을 내놓은 후 밴드는 해산하였다. 그의 형 Ed는 Mark에게 베이스 Paul Webb, 드러머 Lee Harris, 키보드 Simon Bernner를 소개하였고 Mark는 이들과 함께 1981년 Talk Talk 를 조직하였다.

프로듀서 Jimmy Miller와 여러개의 데모를 녹음한 후 Talk Talk는 EMI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곳에서 그들은 Duran Duran의 프로듀서였던 Colin Thurston과 함께 두개의 싱글을 제작하였다.(Mirror Man과 Talk Talk) EMI의 의도는 이들을 New Romantic의 대열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1982년 이들은 Duran Duran의 영국공연 오프닝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데뷔 LP인 The Party’s Over는 씬쓰팝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당시 이 부류의 음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직성과 가사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Talk Talk에게 있어 1983년의 최대의 유산은 It’s My Life를 쓰고 녹음한 일이었다. 터닝포인트는 프로듀서이자 멀티인스투루멘탈리스트인 Tim Friese-Green의 가세였다. 그는 밴드의 비공식 멤버로 활동하면서 Hollis의 이상적인 음악적 파트너로 남아있었다. It’s My Life는 전작 The Party’s Over에 비해 보다 풍부하고 자연적인 텍스춰를 가미함으로써 데뷔 앨범에 전착하곤 하는 뉴웨이브 계열 음악의 고질적인 악습을 따르지 않았다. 타이틀트랙은 영미 양국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1986년의 The Colour of Spring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 앨범에서는 Life Is What You Make of It이나 Give It Up과 같은 곡들이 히트하였고 Talk Talk는 당시 밴드들 중 가장 앨범 판매고가 좋은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대규모의 공연이 이어졌고 EMI는 이들의 다음 작업에 많은 예산을 책정하게 되었다.

1987년 그들은 네번째 앨범을 위해 Suffolk 의 한 버려진 교회에 머물렀다. EMI는 결과물이 빨리 나오길 기대했으나 쉽게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예산이 상당부분 초과하였고 데드라인은 진작에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Hollis는 EMI에 작업중인 작품을 공개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앨범에서 싱글 발매와 공연은 없을 것이라고까지 공언하였다. 이러한 산고끝에 발매된 Spirit of Eden은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상업적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 난해하고 사색적인 작품은 스탠다드팝뮤직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길이가 길고 여백인 많은 곡들은 째즈의 텍스춰에서 따온 복잡한 악기 구성 등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EMI와 Talk Talk간의 관계는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EMI는 밴드의 동의없이 Sprit of Eden의 트랙 I Believe in You의 싱글 버전을 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다음에 그들은 밴드를 회사의 명단에서 제외시켜 버릴 심산이었다. Talk Talk는 회사를 고소하였고 EMI는 맞고소로 대응하였다. 밴드가 법정에서 승리하였고 다음 앨범을 위해 Polydor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Paul Webb이 그룹을 떠났다. 그리고 1991년 Laughing Stock이 게스트뮤지션의 도움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Talk Talk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디스코그래피
1982 The Party’s Over [EMI]
1984 It’s My Life [EMI]
1986 The Colour of Spring [EMI]
1988 Spirit of Eden [EMI]
1991 Laughing Stock [Polydor]
1999 London 1986 [live] [Blueprint]

링크
Fan Page

Taco

Taco Puttin on the Ritz.jpg
Taco Puttin on the Ritz”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RCA.. Licensed under Wikipedia.

Puttin’ On The Ritz라는 단 한곡의 빅히트곡으로 1983년도 팝스계를 휩쓸었던 Taco는 독일이 낳은 뉴웨이브 아티스트이다. Nena, Tangerine Dream 등의 뒤를 이어 독일록의 명예를 걸고 전세계 팝계에 데뷔한 그는 일찍부터 가꾸어 온 풍부한 성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뉴웨이브의 장점을 그대로 펼쳐 보였다.

타코가 태그가 자신의 밴드 Taco’s Bizz를 이끌고 함부르크 클럽가에 나타난 것은 1980년이었다. 향수에 젖게 하는 그의 감미로운 공연이 점차 인기를 얻어 갔고, 이런 클럽가의 인기가 독일 전역에 퍼져가자 드디어 취입을 결정하게 되었다.

After Eight이란 타이틀로 발매된 데뷔 앨범에는 Cheek To Cheek, Singin’ In The Rain, Puttin’ On The Ritz 등 주로 클래시컬한 명곡을 리바이벌시킨 것이 주를 이루었다. 반응ㄴ 실로 대단했는데 급기야 RCA 레코드사를 통해 1983년에 전세계 시장에 발매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Puttin’ On The Ritz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Irving Berlin의 오리지널인 이 곡은 타코의 목소리를 30년대의 스타일로 담고, 그 위에 뉴웨이브 스타일과 신서사이저 사운드로 더빙시켜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디스코그래피
AFTER EIGHT 1982
LET’S FACE THE MUSIC 1984
PUTTIN’ ON THE RITZ – BEST OF TACO 1991

링크
팬페이지

T’Pau

T'Pau 2010.jpg
T’Pau 2010” by Thomas Riggs from London, England – T’Pau.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보컬 Carol Decker (b. Sept. 10, 1957)
기타 Ronnie Rogers (b. Mar. 13, 1959)
드럼 Tim Burgess (b. Oct. 6, 1961)
키보드 Michael Chetwood (b. Aug. 26, 1954)
베이스 Paul Jackson (b. Aug. 8, 1961)

유명한 TV 시리즈 Star Trek의 한 캐릭터의 이름에서 밴드 명을 따온 T’Pau는 1986년 결성되었다. 팀의 주축은 보컬 Decker와 기타를 맡은 Rogers였고 이 둘이 작곡라인을 맡았다. 밴드는 Virgin의 계열인 Siren과 계약을 체결하고 1987년 데뷔싱글 “Heart and Soul”을 발매했다. 발매시 거의 광고도 하지 않았지만 이 곡이 한 청바지 광고에 쓰이면서 영미 양국에서 5위안에 드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데뷔앨범 Bridge of Spies는 영국에서 금새 차트 1위에 올랐다. 연이은 네 개의 싱글들도 최소한 차트 20위안에 들었다. 그러나 미국차트에서는 그리 신통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Bryan Adams, Nik Kershaw와 함께 투어하면서 밴드는 새 기타리스트 Dean Howard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번째 앨범 Rage를 내놓았다. 이 앨범은 영국차트에서 4위에 랭크되었다. 이어지는 앨범 The Promises가 1991년 간신히 탑텐에 진입하였다. 고별공연 후 T’Pau는 해산했고 Decker는 솔로캐리어를 쌓아갔다. 1998년 재결합하여 Red라는 앨범을 발매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7 Bridge of Spies [Virgin]
1987 T’Pau [Alliance]
1988 Rage [EMI]
1991 The Promise [Atlantic]
1998 Red [Renaissance]

링크
Official Site
T’Pau Music and Discu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