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영화

Aguirre, der Zorn Gottes(아귀레, 신의 분노 : Aguirre, the Wrath of God)

마른 걸레를 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감독은 극한상황에 인간을 배치해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듯하다. 심하게 말해서 배우들에게 스페인의 잉카 정복에 관한 영화를 찍겠다고 속이고 거친 숲속과 물가로 몰아내어 마치 실험쥐처럼 그 반응을 즐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마치 2001년작 Das Experiment 가 소재를 삼았다는 실존의 그 인간실험처럼 말이다. 실제로 영화해설을 찾아 읽어보니 주연을 맡은 클라우스 킨스키는 총으로 감독을 위협하며 촬영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고까지 하니 배우들의 고생이 상상이 간다. 극에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이런 감정이 들었던 것은 정말 배우들의 고통이 뚝뚝 묻어나올 정도로 생생한 화면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역동적이고 거친 화면은 이미 낙오되어버린 상태이면서도 그 안에서 정치놀음을 벌이는 구제불능의 인간군상을 여과 없이 비추고 있다. 클라우스 킨스키의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은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이 지루한 강 여행기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버팀목이다. 자신의 딸과 결혼하여 순수한 피를 유지하겠다는 독백 장면은 히틀러를 은유한 것이라는 것이 중론인데 개인적으로는 히틀러를 광기의 산물이라 보지 않기 때문에 감독이 의도하였건 하지 않았건 간에 그러한 입장에 동조할 수 없다. 강가를 여행하며 겪는 모험담을 다룬 점에서 같은 해 나온 또 하나의 걸작 Deliverance 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후에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다. 어쨌든 감독 헤어조그는 같은 로케이션에서 이 위험한 짓을 10년 후 Budden Of Dreams를 통해 다시 한 번 자행하였으니 지독한 새디스트다.

Roxanne

영혼의 아름다움과 육체의 아름다움 중 어느 것이 더욱 소중한 것인가 하는 질문은 참 진부하지만 연애를 할 때 항상 곱씹곤 하는 질문이다. 영육 분리와 이 중 영혼에 더욱 높은 가치를 두는 가치관은 중세 기독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 거의 맞을 듯? – 결국 이러한 가치관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내려와 일종의 상식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유명연예인들 흔히 인터뷰에서 ‘외모보다는 마음씨를 본다’ 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는 나중에 의사나 재벌3세와 결혼하곤 하니 말이다.

Edmond Rostand의 Cyrano de Bergerac 을 현대화하여 만든 Roxanne 가 바로 이러한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외모만 근사한 소방대원 Chris와 길쭉한 코 탓에 열등감에 시달리지만 재치 있고 사려 깊은 소방대장 C. D. Bates(Steve Martin)는 둘 다 재색을 겸비한 Roxanne Kowalski (Darryl Hannah)를 좋아한다. 그러나 Roxanne 의 눈에는 Chris 가 먼저 필이 꽂혔고 무식한 Chris 는 C.D. 의 도움으로 그녀와 데이트를 즐긴다.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Roxanne 은 결국 둘의 음모를 알아내고 C.D. 와 크게 말다툼을 벌인다.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Steve Martin 의 최전성기에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여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다. 특히 맥주홀에서 모욕을 당한 C.D. 가 특유의 입담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장면에서의 Steve Martin 의 입담은 가히 달인의 경지가 아니었던가 싶다. 원작을 현대화하여 시나리오로 담아낸 이도 바로 그이다. 이후 그는 작가로서의 길을 걷고자 했고 그 데뷔작이 바로 얼마 전에 소개한 Shopgirl 이었다. Darryl Hannah 는 이 작품과 Splash 등을 통해 80년대 섹스심볼로 부각되었다.

비슷한 영화로 프랑스에서 1990년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시라노’와 여성판 시라노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이 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嫌われ松子の一生: Memories Of Matsuko, 2006)

전편 ‘불량공주 모모코’에서 독특한 캐릭터와 묘한 스토리로 신세대 일본영화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신작. 2003년 발표된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작품이라 한다. 운명의 장난으로 여교사에서 천재작가의 동거녀, 창녀, 이발사, 야쿠자의 동거녀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가 고향의 강을 닮은 도쿄의 어느 강가에서 외로이 죽어간 마츠코란 한 인물의 삶을 조카의 눈을 통해 재조명한 작품. 언뜻 들으면 굉장히 비장한 분위기의 멜로드라마가 연상되지만 – 실제 원작도 그러하겠지만 – 나카시마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 뮤지컬을 통한 형식적 실험, 배우들의 슬랩스틱 연기 등을 통해 희극과 비극이 짬뽕된 MTV 정서의 오락물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화려한 껌종이로 만든 모자이크 작품을 보는 기분이다. 감독은 디즈니 영화의 주인공이 문을 잘못 열면 어떻게 될까 하는 가정을 두고 만들었다 하니 상당히 악취미다. 개인적으로 모모코와 마츠코 중에 어느 쪽이 맘에 드는지 묻는다면 모모코를 택하고 싶다. 마츠코는 전형적인 비련의 주인공인 캐릭터라 머리 조금만 굴리면 나올 것 같은 캐릭터지만 로로코 풍의 옷을 좋아하며 폭력배에게 굴하지 않는 공주 스타일의 여자라는 캐릭터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런 캐릭터가 작품에 잘 녹아들어가 있으니 더 말할 나위없으리라.

VENUS戰記(Venus Wars)

Venus Wars Japanese poster.jpeg
By Shochiku – https://www.shochiku.co.jp/cinema/database/04270/, Fair use, Link

야스히코 요시카즈 감독/각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금성이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어서 많은 이들이 이주를 하여 살아가고 있는 어느 미래. 이 행성은 이스탈과 아프로디아라는 두 개의 자치구로 나뉘어져 있다. 아프로디아의 수도 이오에서 모터사이클 경기가 있던 어느 날 이스탈은 이오를 침략하여 하루 만에 아프로디아를 점령하고 만다. 반항기 많은 모터사이클 선수 히로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이스탈에 저항하고 우연한 기회에 저항군에 합류하게 된다. 스산한 이미지의 금성이 두텁게 묘사되고 있고 화면구성이 박진감 넘친다.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한 편.

Breakfast on Pluto

Breakfast on pluto poster.jpg
By IMP Awards, Fair use, Link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하니같은 여자(사실은 남자) 패트리샤 키튼의 삶에 관한 영화다. 정치적 상황을 성적 정체성과 묶어놓기를 은근히 즐기는 닐 조단이 2004년 내놓았으나 국내에서는 이제야 단 한 개의 개봉관에서 개봉되었다. ‘28일 후’ 등에서 씩씩한 사나이 상을 보여주었던 킬리언 머피가 온갖 끼를 다 떠는 게이 패트리샤를 연기해 놀라운 변신 능력을 선보였다. 영연방의 영화계를 이끌어나갈 대표주자 배우가 될것이 확실하다. 주드 로보다 머리숱도 많지 않은가. 훵키한 음악들도 훌륭하다. 아~ 브라이언 페리가 깜짝 출연하는데 아주 지저분한 역으로 등장한다. 노래도 흥얼거린다.

홈페이지

Six Degrees Of Separation

Donald Sutherland (1095412255).jpg
Donald Sutherland (1095412255)” by Alan LightDonald Sutherland
Uploaded by MaybeMaybeMaybe.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의 미국판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플랜 키트리지와 오이사 키트리지 부부는 미술품 거래상을 하면서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전형적인 상류층이다. 어느 날 그들의 투자자와 저녁식사를 위해 집을 나서려는 중 자신들의 자녀와 친구라는 한 흑인청년을 맞이하게 된다. 불쑥 찾아온 이 청년은 화려한 언변과 음식솜씨로 이들을 사로잡는데 스스로를 영화배우 시드니 포이티에의 아들 폴 포이티에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오이사는 다음날 아침 폴이 한 낯선 남자와 침실에서 완전나체로 성행위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둘을 내쫓는다. 이후 이들 주위친구들도 동일인물에게 비슷한 사기를 당하게 되고 이들은 정체불명의 폴이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영화제목 Six Degrees Of Separation 은 전혀 낯선 사람일지라도 여섯 단계만 거치면 알게 된다는 스탠리 밀그램 교수의 인간관계에 대한 이론을 의미한다. 결국 폴의 매력에 빠졌다가 피해 아닌 피해를 입은 이들은 어느 사이 서로의 인간관계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조사를 하게 되고 이는 상류층의 만남에서 좋은 입담거리가 되고 만다. 그러면서도 거리의 흑인청년이었던 폴이 얼마나 쉽게 그들의 고귀하고 차별적인 공간에 스며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감지조차 못한다. 결국 폴과의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오이사는 폴을 도와주려 애쓰지만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딸의 진지한 대화요구는 거절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실력파 배우들의 연기가 감칠맛 나면서 연극작품을 영화화하여 다분히 연극적인 분위기가 돋보인다. 부르주아의 위선을 비웃으면서도 어느새 그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에 동화되게끔 만드는 매력을 풍기는 작품이다. 그들의 폴의 미스터리에 대한 입담 장면은 마치 에큘 포와르가 용의자들을 응접실에 모여 놓고는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Corto Maltese : La cour secrete des Arcanes

이유는 잘 모르겠다. 원제를 굳이 번역하면 ‘비밀의 정원’ 인데 실제 내용은 코르트 말테제의 다른 에피소드 ‘시베리아’이다.(내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여하튼 – 내가 틀렸으면 글을 나중에 수정할 일이고 – 이 작품은 우고 프라트의 유명한 만화 ‘코르트 말테제(Corto Maltese)’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를 2002년 영화화한 작품이다. 짜르의 황금을 실은 채 시베리아 철도를 오가는 열차를 탈취하기 위해 온갖 정치세력들이 모여들고 코르트 말테제 역시 중국의 한 정치집단 홍등과 함께 그 모험에 합류한다. 그의 오랜 친구 라스푸틴, 그리고 신비한 동양여인 상하이 리가 이 모험의 축을 이루고 시대착오적인 군벌지도자 웅게른 장군, 미스테리한 세미노바 공작부인 등이 비중 있는 조연을 꿰차고 있다. 주요군벌마다 잔뜩 무장한 기차를 몰며 전투를 벌인다는 박진감 있는 스토리가 큰 매력인데 우주선을 몰며 우주전쟁을 벌인다는 버전으로 만들어도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다른 에피소드처럼 이번에도 역시 황금은 코르트의 차지가 되지 않지만 코르트는 언제나처럼 (약간은 유치한) 로맨스를 가슴에 간직한 채 또 다시 먼 길을 떠난다(상황설정이 그지없이 민망하지만 코르트에게는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음악도 멋있고 영상도 일품이다.

Noz W Wodzie(물속의 칼, 1962)

로만 폴란스키의 장편데뷔작. 안드레이 부부가 보트 여행을 가던 도중 한 청년이 히치하이킹으로 둘과 동승하게 된다. 안드레이는 청년에게 보트 여행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어울리지 않는 셋의 보트 여행이 시작된다. 처음 안드레이가 청년에게 베풀었던 부르주아적인 너그러움은 차차 한 마리 암컷을 두고 수컷 두 마리가 벌이는 팽팽한 성적 긴장감으로 발전한다. 안드레이는 계급적 우월함을 무기로 청년을 몰아세우고 자존심강한 청년은 그런 그에게 노골적으로 반항한다. 카메라는 이러한 셋의 긴장감을 인물의 원근배치를 통해 적절히 통제한다. 마침내 갈등은 폭력적인 양상으로 발전한다. 필립 노이즈 감독의 Dead Calm를 연상시키는 삼각구도이지만 노이즈의 그것이 보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증폭되는 공포의 경험에 집착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역시 그 한정된 공간에서 더욱 밀도가 높아지는 계급적 갈등과 성적 긴장감을 다루고 있다. 깔끔한 영상배치와 재즈 음악이 잘 어우러지는 소품이다.

참고글

Shopgirl

이 영화에서 마음에 드는 구석은 거의 없었다. 스티브 마틴의 퉁퉁 부은 얼굴과 짜증나는 진지한 연기, 클레어 데인즈의 거칠어진 얼굴골격, 그리고 클레어 데인즈의 남자친구로 나오는 이름모를 배우의 그 짜증나는 캐릭터, 결정적으로 스티브 마틴이 직접 썼다는 어설픈 줄거리로 그 스스로가 어설픈 LA 판 우디 알렌이 되려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1990년작 L.A. Story에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엿보이기는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우디 알렌 조차 자기 스스로 로맨스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기를 포기한 21세기에 스티브 마틴이 본업인 슬랩스틱을 포기한 채 중후하고 로맨틱한 중년이 되고자 하다니! Lost In Transition 이 빌 머레이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준 사례라면 이 영화는 스티브 마틴의 월권을 보여준 사례가 될 것이다.

라디오스타

사실 이 영화에서 독창적이라 할 만한 요소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제목은 The Buggles 의 히트곡 Video Killed The Radio Star에서 따왔음이 분명하고, 80년대 음악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떠오르게 하며, 스타와 매니저와의 관계라는 극의 기본설정은 ‘제리 맥과이어’ 또는 ‘러브액츄얼리’를 연상시킨다. 이렇게 기시감이 분명한, 결말이 불을 보듯 빤한 영화가 그러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힘 – 그것도 강원도의 힘 –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즐거움이면서도 무척이나 기특한 일이다.


한물간 80년대 스타가 자존심만 세서 매니저를 고생시키다가 강원도 영월 촌구석에서 DJ 한자리 얻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고 매니저와의 ‘진한’ 우정도 확인한다는 단 두 줄로 줄거리가 요약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욕심 부리지 않았다는 점일 것 같다. 잘만 우려내면 쓸 만한 에피소드 엄청 나올 것 같은 설정이지만 제작진은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들이 애초 의도했던 기본구도, 즉 ‘마이너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주제의식에 충실하고 있다.


2000년대 대 80년대, 비디오 대 라디오, 서울 대 영월, 댄스 대 락 등등… 영화의 문화코드는 이렇게 양분되어 있었다. 비록 후자가 전자를 이기진 못했지만 어쨌든 80년대 퇴물 락가수가 영월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전국으로 방송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분명히 하게 되는 작은 승리로 귀결된다. 그리고 잠시 헤어졌던 스타와 매니저는 다시 재회하여 멋쩍은 웃음을 나눈다.


간간히 극적비약에 조급해하는 무리한 설정도 눈에 띄지만 박중훈, 안성기 두 관록 있는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조연들의 뒷받침 – 특히 영월 지국장 역의 정규수씨는 정말 신들린 연기였다 – , 감칠맛 나는 대사, 그리고 정겨운 노래들이 어울린 자그마한 뒷동산 같은 영화였다.


p.s. 1 영화 끝난 후 자막을 읽다보면 주요배우들의 매니저들의 이름도 나온다.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배우들의 매니저들까지 챙겨줬을까?

p.s. 2 라디오프로그램이 첫 전국방송을 시작하는 날 첫 곡은 MTV의 개국 첫 시간에 튼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였다. 비디오에 대한 라디오의 복수를 상징하는 오마쥬인가?

Radio Star Strikes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