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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the Earth Stood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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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the Earth Stood Still 1951” by http://manchestersoul.co.uk/sci-fi/TV/TV_D.htm. Licensed under Wikipedia.

이 영화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공상과학영화의 이야기 흐름에서 계속 벗어난다. 어느 날 백악관 근처로 비행접시가 착륙한다. 비행접시에서는 인간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 클래투와 그의 로봇 보디가드 고트가 내린다. 클래투 Klaatu (미스테리한 프로그레시브락밴드 Klaatu 의 밴드 이름이 바로 이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는 긴장한 경찰이 쏜 총에 부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간다. 병원에 찾아온 정치인에게 클래투는 전 세계의 정치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정치인은 냉전 중이라 전 세계의 정치인을 모이게 하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병원을 탈출하여 어느 하숙집에 하숙을 한다. 그 곳에 머물며 한 천재과학자를 만나서 그의 뜻을 전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전 세계의 전기를 잠시 동안 차단시킨다. 결국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인류가 공멸의 길로 들어서면 안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었다. 일종의 기독교적인 선지자의 냄새를 풍긴다. 소름끼치는 외계인의 습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첨단무기의 경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50년대의 공상과학영화의 문법과 괴리가 있어 약간 어리둥절하다(물론 나중에 ET나 클로스인카운터와 같은 유사한 형식의 공상과학영화가 등장하기도 한다). 특별히 스펙타클한 장면도 없는 비행접시가 아니라면 공상과학영화로 분류할 필요가 있을까 할 정도인 이 영화는 결국 기독교 신화의 메타포를 빌어 냉전의 위험성과 군축의 의미를 전달하는, 당시의 답습적인 공상과학영화보다는 한 차원 높은 지적쾌감을 선사하는 영화이다. 감독은 West Side Story 로 유명한 거장 Robert Wise

참고사이트 http://members.aol.com/dsfportree/tdtess.htm

p.s. 그나저나 포스터의 저런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영화에 없는데 어쩌자고 저렇게 B급으로 만들어 놓은지 모르겠다. 아마 Sci-Fi 팬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제작사의 고육지책이리라.

The Quiet Earth

아침에 눈을 떴는데 세상에 나만 홀로 살아남아있는 경우를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이 영화가 그렇다. 과학자 Zac Hobson 이 어느 날 눈을 떠보니 평온한 기운과 달리 무언가 달라져있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이다. 거리에도 상점에도 그가 근무하는 연구소에도……. 지구상의 생명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원인은 바로 자신이 실험했던 새로운 에너지 발굴실험 탓이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황한 그는 이리저리 인간을 찾아 헤매다 이내 단념하고 혼자뿐인 세상에서 물질적 욕구를 폭식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그마저 이내 질려버리고 또다시 헤매다 결국 한 여인과 – 그가 사랑에 빠진 – 경계심이 강한 남자를 만난다.

세상에 셋 뿐인 인간관계. 그 기묘한 관계 속에서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고 사랑하다가 결국 Zac Hobson 은 지구를 온전히 원 상태로 돌려놓는 도전을 감행한다.

과학맹신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보다는 찰튼헤스턴의 ‘혹성탈출’이나 대니보일의 ‘28일 후’ 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재에 의한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쪽에 더 강조를 한 작품이라는 것이 감상포인트다.

Westworld

삶이 지루한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는 과거. 과학이 발달한 어느 시대 사람들은 서부시대, 로마시대 등 갖가지 시대설정이 되어 있고 그 속에서 로봇들이 인간처럼 활동하는 가상의 공간을 창조한다. 그리고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마치 자기가 아노미 상태의 서부의 보안관인양 또는 로마시대의 군주인양 행세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중앙제어실에서 철저히 통제된다.

이곳에서 두 주인공은 나름의 스릴을 만끽하며 일상의 지루함에서 탈출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제어실의 통제에서 벗어난 로봇(율브린너)이 등장하고 부터이다. 제어되지 않는 폭력성이 내장된 채 끊임없이 주인공들에게 덤벼드는 이 로봇 때문에 마침내 그들은 쾌감으로써의 위험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위험에서 탈출하고자 몸부림친다.

1973년 주라기 공원 등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마이클클라이튼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현재 2007년 신작으로 리메이크 작업중이다.

The War Of The Worlds

외계생물체의 침공이라는 소재는 그것이 냉전시대의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건 아니건 간에 에스에프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를 형성할 만큼 인기 있는 소재이다. 2005년 탐크루즈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이 작품(1953년 제작)은 그러한 작품 트렌드의 시초가 되었던 걸작이다.

H.G. Wells 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미덕은 외계인의 침공 이유 등과 같은 자잘한 배경설명은 과감히 생략하고 침공의 스펙타클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 오늘날과 같이 특수효과가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도 빼어난 디자인을 자랑하는 외계비행체의 소름끼치는 촉수가 뿜어내는 광선과 이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의 삶을 근사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당시 극장에서 이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봤을 관객이라면 스펙타클한 화면에서 뿜어 나오는 화력에 무기력하게 당하는 인간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자신은 영화가 끝나면 다시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안도감의 롤러코스터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50년대의 헐리우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매우 풍부한 에스에프, 괴수영화를 양산해내며 해당 장르를 메인스트림으로 격상시켜놓았던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Superman Returns

감독 브라이언 싱어가 게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인가보다. 이때문에 외신에서는 ‘슈퍼맨은 얼마나 게이스러운가?’라는 기사가 화제가 된적도 있다고 한다. 로이스 레인이라는 다소는 이기적인 여인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슈퍼맨에게 얼마나 ‘게이스러운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 멋적은 일이지만 그것도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리라.

나에게 만약 이 영화에 대한 비슷한 기사를 쓰라고 한다면 나는 ‘슈퍼맨은 얼마나 신격화되었는가?’라고 쓸지도 모르겠다. 슈퍼맨이야 지구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초영웅이라는 사실은 초딩들도 다 아는 설정이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구의 평화를 지키느냐 아니면 지구의 사건사고 발생률을 얼마간 감소시킬 수 있느냐 하는 식의 질문을 하면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슈퍼맨이라고 시간을 무한정 늘여살 수 없는 일이고 그나마도 낮에는 돗수없는 안경끼고 능력없는 기자 생활을 해야하니까 일단 8시간(사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턱도 없이 짧은 근로시간이지만)은 회사에서 근무해야 할테고 한잠도 안자고 슈퍼맨으로서 근무를 한다고 해도 16시간 근무인데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범죄와 사고에 다 개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초영웅 영화에 현실성 운운하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일지 몰라도 어쨋든 그의 슈퍼맨으로서의 근무시간 운운하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그가 로이스에게 한 이야기때문이다. 즉 그는 지상에서 떠드는 모든 대화가 들린다고 했다. 이는 단순히 그가 들을 수 있는 범위안에서만 지구를 지키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분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암시가 아닐까? 로이스의 아들이 슈퍼맨의 아들이라는 암시에서부터 후반부 슈퍼맨이 로이스의 아들에게 하는 독백을 듣고 있자면 기독교적인 신성의 후계구도가 연상된다.


 영화를 다 보고난 후 그가 얼마나 게이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감독이 슈퍼맨을 미국의 대중문화에 어떠한 존재로 위치지우려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슈퍼히어로 중에서도 슈퍼히어로… 또는 신적존재로서의 슈퍼맨. 우리는 그런 슈퍼맨을 필요로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