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드라마

해변의 여인

홍상수의 영화는 마치 롤빵처럼 생긴 우리 인생에서 중간부분을 칼로 잘라내어 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승전결에 주력하기보다는 일상사에서 우리가 편의적으로 생략해버리고 있는 우리의 가식과 위선, 그리고 모순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이 그의 주특기다. 그런 면에서 롤빵은 달콤하기보다는 쓴 맛이 강하다. 제법 실력을 인정받는 듯한 감독 김중래(김승우)과 그의 후배이자 팬(김태우), 그리고 그 팬의 여자 친구(고현정)가 서해안에 놀러간다. 천성이 껄떡쇠인 것으로 보이는 김중래가 후배의 여자 친구를 날름 잡수시고는 실존의 문제 운운하며 본질을 회피하는 모습이 가관이다. 여자 또한 사랑의 순수함이나 충실함을 요구해서라기보다는 자존심의 문제 때문에 김중래의 오입을 밝혀내려 안달한다. 결국 Love Actually 에서는 밝혀내지 못한 Love 의 간사함과 치졸함이 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다고 딱히 답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나머지 롤빵을 다 먹어야 해답이 있을까?

Love Actually

대강의 스토리만으로도 영화의 작위성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말연시에는 뭔가 작위적이라도 가슴 따뜻한 영화를 봐줘야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오랜만에 런던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영국 악센트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르게 되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애정의 방향이 어긋나 있었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 비서를 사랑하게 된 수상, 전혀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을 사랑하게 된 작가, 가장 친한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된 남자 등등. 그리고 결과는 다들 예상하고 있다시피 해피엔딩이다. 극중 인물의 청혼에서 한 말처럼 우리는 이 작위적인 해피엔딩을 ‘크리스마스니까’ 용서해줄 수밖에 없다. 왜 크리스마스에는 누군가를 용서해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국영 주연의 두 영화

주말에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 두 작품을 감상하였다. 관금붕 감독의 인지구와 왕가위 감독의 Happy Together. 하나는 이승에서 맺지 못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이루기 위해 자살했던 한 여인(매염방)의 기구한 운명을 다룬 고스트스토리였고, 다른 영화는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이라는 두 홍콩 젊은이들의 동성애를 다룬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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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gefilm”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tieba.baidu.com/p/1484558002. Licensed under Wikipedia.

두 작품 모두에서 장국영은 책임감 없고 우유부단한 연인으로 등장한다. 선천적인 꽃미남 장국영은 어쩔 수 없이 귀티 나고 연약한 인상 탓인지 대개의 배역이 이런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영웅본색에서는 범죄에 몸담은 형 때문에 괴로워하는 강직한 형사로 등장하였을 뿐이다. 매염방과 장국영의 기구한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덕분에 인지구는 보다 감정이입이 쉽게 될 수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예측은 되는 영화였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천재연기자의 생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배역 그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연기자들에게도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그 둘이 생전의 깊은 인연만큼이나 내세에서도 잘 지내고 있을는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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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Together poster” by http://www.moviegoods.com/movie_poster/happy_together_1996.htm. Licensed under Wikipedia.

이에 비해 Happy Together 는 생각만큼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우선은 나의 성(性)취향과는 관계없는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일수도 있겠지만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스타일 위주의 극진행이 오히려 극의 몰입을 방해했던 것 같다. 여전히 그는 스타일리쉬하긴 하지만 극의 깊이감에 있어 2% 모자란 무라카미하루키 유의 팝아트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중경삼림보다도 더 적은 에피소드로 더 깊은 사유를 강요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영화는 어쩌면 현실적인 연인관계가 필연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상실감에 대한 영화였다.

요컨대 장국영은 어느 영화에서든지 존재감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배우였다. 얼굴 그 자체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할까? 이런 면에서 그는 분명 홍콩영화의 큰 별이었다. 매염방과 장국영, 두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끝 모를 지루하고 무의미한 전쟁터의 상징이었다. 20세기 초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과 달리 무기의 발달과 참전국의 확대로 인해 대량학살이 동반되었던 그 이전의 어느 전쟁보다도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부전선은 밀고 밀리는 와중에 무의미한 죽음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후대의 어느 역사가에 따르면 이러한 참혹한 전쟁에 대한 공포심으로 말미암아 연합국이 나치 독일의 준동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였고, 심지어 그들을 어느 정도 용인하려 – 동맹국을 내주고서라도 – 하였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레마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반전영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 참전군인의 눈이 아닌 독일 참전군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 할만하다. 대개의 전쟁영화는 승리자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 또한 당연히도 그 배급자도 역시 승전국인 영미권이 주이기에 – 웬만한 웰메이드 전쟁영화조차도 선악이분법의 구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독일의 평범한 시민이자 학생이었다가 참전한 이들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본다는 설정이 우선 이 작품이 전쟁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반석이 되고 있다.

군인들의 시가행진, 시민들의 환호, 참전을 부추기는 애국교수의 열변, 크게 감화되어 입대를 결심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극 초반 숨 가쁘게 진행되며 극은 중반으로 돌입한다. 애국주의에 감화되어 도착한 전쟁터는 이념이 설 자리가 없는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는 생지옥이었다. 전우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며 호승심은 공포로 바뀌어 가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친구의 죽음으로 친구가 갖고 있던 신발이 내 차지가 되고, 전우의 죽음이 더 많은 식량배급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만족하는 이성마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살아남은 이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잠깐의 휴식과 전우들뿐이다. 잠깐의 휴가동안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머릿속으로만 전쟁을 하는 국수주의자들은 멋대로 승리를 예견한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군인들의 휴식처는 전쟁터가 되고만 것이다.

선구자적으로 사용한 크레인샷을 통해 비참한 전쟁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 주인공이 애국교수가 혼쭐이 날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 그리고 나비를 좇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등이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가족의 탄생

요즘 연기 좀 한다하는 배우들이 다 모였다. 문소리, 고두심, 엄태웅, 공효진, 봉태규, 유승범 등등.

가족에 시달리고 가족에 목매인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족을 형성하는 외로운 사람들에 관한 영화이다. 극은 마치 별로 개연성 없는 삼부작처럼 진행이 된다. 철없는 남동생 때문에 괴로워하는 누나, 철없는 엄마 때문에 괴로워하는 딸, 그리고 너무 정이 많은 애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남자. 서로가 현재의 가족, 또는 미래의 가족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몸서리를 친다. 이들이 어떻게 가족을 이룰 것인가 하는 해법은 영화를 보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연기 좀 한다하는 이들이 모인 덕택에 작품 감상은 매끄러운 편이다. 특히 철없는 동생 역을 맡은 엄태웅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볼을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그렇지만 후반 노년연기를 보여주는 일부 배우들의 어색함은 시야를 방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절하려야 단절할 수 없고 결국은 낯선 이들끼리라도 가족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들의 너저분한 불완전함을 잘 서술해주고 있는 웰메이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로마, 무방비 도시(Roma, Città Aperta / Open City)

로베르토로셀리니의 1945년 작품인 이 영화는 마치 에릭홉스봄의 20세기 역사를 다룬 명저 ‘극단의 시대’를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파시즘과 나찌즘이 극에 달하던 시기 로마에서 저항운동을 펼치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그린 이 영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탈리아식의 사회주의 네오리얼리즘의 큰 축을 이룬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주의 : 이하 스포일러 있음>

극의 줄거리는 크게 반독 항쟁을 벌이고 있는 공산주의자 만프레디, 저항활동을 후원하는 돈피에트로 신부 –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보수적 카톨릭 사이의 갈등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둘 모두 천년왕국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집단윤리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친화성도 무시할 수 없으며 평사제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호의감도 충분한 개연성을 가질 것이다 – , 그리고 만프레디를 사랑하는 배우 마리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는 1928년에 그의 아내가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결코 그녀와 살지 않았다. 여자를 멀리하는 것은 혁명가의 철칙이다.” – 칼파나 두트

마치 사제서품을 눈앞에 둔 성직자의 각오를 연상케 하는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주장에서 언급되는 혁명가의 연애관은 만프레디와 마리나의 연인관계는 만프레디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한다. 투사도 인간일진데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쓸릴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혁명과 욕정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화해할 수 없었나보다.

페데리코 펠리니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이 영화는 이후 “전화의 저편”, “독일 영년”과 함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3대 전쟁 영화이기도 하다.

The Road to Guantanamo

관타나모로 가는 다소 복잡한 경로에 관해 서술한 영화이다. 관타나모는 쿠바 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1903년 이래 미국이 자국의 해군기지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위 미국의 테러세력과의 전쟁 이후 불법적인 전쟁포로 수용소로 유명해진 지역이었다.관타나모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미국 당국의 불법감금, 폭력행사 등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미국 정부는 그 곳이 자국의 치외법권 지역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어 각종 합당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는 파키스탄계 영국청년 네 명이 충동적으로 아프카니스탄에 들렀다가 부당하게 관타나모 기지에 2년여를 불법감금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극은 실제인물의 증언, 전문배우들의 재연, 그리고 각종 언론에 공개된 필름 등을 섞어서 일종의 다큐드라마 형식으로 진행된다. 역동적인 카메라는 마치 우리자신들이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한 이미 24 Hour Party People 등을 통해 음악에도 적지 않은 공력이 있음을 증명한 마이클윈터바텀은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음악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긴장감 조성만을 위한 음악을 화면에 깔아 사실성을 높이고 있다.

이 영화는 영국의 ‘채널4’에서 방영되어 영국 내 반전여론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이 ‘순수한(innocent)’ 네 명의 영국청년의 기구한 운명은 제3세계의 인종적 ’운명‘을 지닌 이들이 아무리 제1세계에 편입되어도 결국은 얼마나 당연하게도 다양한 인종적 편견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일어난 알제리계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유색인종의 폭동 역시 그 나라 안에서조차 제3세계 인종은 내부식민지화 되어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이들의 에피소드는 그 사연이 좀 더 기구할 뿐 예외적인 경우로 치부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좀 더 나아가서 관타나모 기지에 감금된 ‘불순한’ 젊은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작심하고 ‘성전(聖戰)’에 참여했기에 기꺼이 인권을 유린당하여도 정당한 것인가? 영화 속의 부시의 말처럼 “그들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저버린 살인자”들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부시가 선거에서 참패하고 럼스펠드를 희생시켰다 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은 주류에 의해 주입된 편향된 가치가 지배하고 있다. 약자가 하면 ‘불순한’ 테러이고 강자가 하면 자위적 수단으로써의 ‘순수한’ 응징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영화의 후속편으로 ‘불순한’ 젊은이들의 관타나모 여행기를 다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Terms of Endearment

태어나서 자라서 부모에게 반항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가다 죽는 게 사람의 인생이다. 이 영화는 인간의 거의 예외 없는 이러한 삶을 엠마(데보라윙어)의 삶과 죽음을 통해 조명한다. 특별한 기교나 반전 없이 엠마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변해가는 삶을 관찰하는 이 작품은 초반 엠마의 밝은 성격으로 말미암아 다소 가벼운 로맨틱코미디의 분위기로 흘러가다 어느 날 엠마가 우연히 병원에서 종양을 발견하며 신파조의 – 그렇다고 너무 청승맞지 않은 – 멜로물로 전환한다. 중간 중간 엠마의 엄마(셜리맥클레인)과 이웃집 남자(잭니콜슨)가 벌이는 애정싸움도 볼거리다. 엠마가 죽는 순간 이미 애정이 식어버린 남편이 잠이 들었다가 깨는 장면이 여운을 남긴다.

Dogfight(샌프란시코에서의 하룻밤, 1991)

Dogfight(개싸움)은 비행기 공중전을 가리키는 속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탑건류의 전쟁액션물? 아니다. 이 영화에서 개싸움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혈기왕성한 군인들이 가장 못생긴 파트너를 데려오는 이에게 판돈을 몰아주는 이색파티의 명칭이 그것이다. 내일이면 베트남이라는 전쟁터로 떠나는 에디 버들레스(리버 피닉스 분)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친구들과 함께 개싸움 파티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 추녀들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엮은 여자가 로즈피니(릴리타일러). 결국 파티의 진실을 알게 된 로즈는 화를 내며 파티를 떠나고 에디는 그런 그녀에게 사과하러 그녀의 집을 찾아가서 마지막 밤을 함께 시내를 배회한다. 올 여름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온 터라 얼마 전의 두 번째 감상할 때에는 보다 더 시내의 풍경에 애정(?)을 가지고 봤던 작품. 이성에 대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는 결론은 만족스럽지만 전쟁에 대한 알듯말듯한 모호한 자세는 약간 삑사리. 리버피닉스여 편히 쉬소서.

네이버 영화소개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706

Kes

가난한 노동계급 집안의 존재감 없는 소년의 자아극복에 관한 영화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상 조롱과 소외에 시달리는 빌리캐스퍼라는 소년이 황조롱이(kestrel) – 황새목 매과의 조류 – 한 마리를 발견하고 이를 조련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존재감을 회복한다는 단순한 스토리다. 하지만 감독 켄로치 Ken Loach 는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촬영기간의 이 저예산 영화에서 억지스러운 감정이입 없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어떻게 자아를 실현해나가는가를 무리 없이 서술해나가고 있다. 마르쿠제는 어느 책에선가 노예의 삶이나 다름없는 노동자가 예술적인 성취를 추구하면서 자기해방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는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와 어느 정도 맥락이 통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