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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lan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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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lans album”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Epic Records.. Licensed under Wikipedia.

달콤한 수거팝 싸운드로 인기를 누렸던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여성 4인조 놀란스는 친자매들로 구성된 가족 그룹이다. 이들 부모는 Sweetheart Singers라는 이름으로 더블린에서 활동하던 듀엣이었다. 1962년 영국으로 이주한 이들 부부는 클럽 등지를 돌며 노래를 불렀고 가끔 자녀들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것이 인기를 얻자 아버지는 가족을 끌어들여 아예 그룹 이름을 싱잉 놀란스라고 짓고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다.

그러다 1975년 봄 부모가 빠지고 딸들만이 남아 놀란시스터스(The Nolan Sisters)라고 이름을 바꾼 뒤 정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신선한 외모와 발랄하고 생기있는 보컬로 BBC의 클리프리챠드쇼에 고정 출연했으며 프랭크시나트라의 유럽 공연시에도 오프닝밴드로 참여해 팬을 확보했다.

1978년 불멸의 명곡들을 리바이벌한 데뷔앨범 ‘The Nolans Giant Hits’를 내놓은 이들은 1979년 두번째 앨범 The Nolan Sisters를 발표했다. 이 앨범으로부터는 싱글 Spirit Body And Soul과 I’m In The Mood For The Dancing이 크트되어 영국 챠트에 오르는 호조를 보였는데 이때부터 이들은 그룹의 이름을 놀란스로 바꾸고 세계 시장을 노리기 시작했다.

1980년 들어 일련의 히트 싱글 Who’s Gonna Rock You, Don’t Make Waves 등이 인기를 얻었고 이 곡들이 단겨있는 세번째 앨범 Making Waves를 내놓았다. 같은 해 이들은 동경 가요제에 참가하여 Sexy Music으로 그랑프리를 차지하여 인기를 덛은 뒤 1982년 4월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내한 공연을 가졌고 그해 4집 앨범을 발표하였다.

디스코그래피

The Nolans Giant Hits(1978)
The Nolan Sisters(1979)
Making Waves(1980)
Don’t Love Me Too Hard(1982)
Altogether(1982)

링크

공식 홈페이지
Japanese Fan Site

New Kids on the 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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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OTB 2008-11-06” by goaliej54NKOTB Concert.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New Edition 의 성공 이후 프로듀서 Maurice Starr 는 그들을 닮은 새 그룹을 만들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흑인 틴에이저 대신에 교외의 백인 아이들이었다. 그 결과가 New Kids on the Block 이었다. Donnie Wahlberg, Jordan Knight, Jon Knight, Danny Wood, Joe McIntyre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된 이들이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내놓은 1986년에는 가장 나이 든 소년의 나이가 불과 16세였다. 이들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점화된 것은 두 번째 앨범 Hangin’ Tough 에서부터였다. 이 앨범에서는 You Got It (The Right Stuff), I’ll Be Loving You (Forever), Hangin’ Tough 등이 큰 인기를 끌면서 동년배 소녀들의 우상으로 등극하였다. 이어지는 앨범 들 역시 수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최고의 상한가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인기를 얻은 행운은 또한 불행이 되었다. 그들의 음악적 변신을 실험하고자 내놓은 1994년의 Face the Music 은 R&B를 위주로 한 앨범으로 음악적인 성숙함을 보여주었음에도 전통적인 팬층이나 새로운 청중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1994년 밴드는 해체하고 솔로 캐리어에 돌입하였다.어쨋든 실질적으로 이들의 성공에 고무되어 여러 기획사들은 90년대에 수많은 보이밴드를 양산하였고 또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p.s. 이들을 좋아했던 내 사촌동생이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길…

디스코그래피

1986 New Kids on the Block Columbia
1988 Hangin’ Tough Columbia
1990 Step by Step Columbia
1994 Face the Music Columbia
1995 Merry, Merry Christmas Sony Special Products

링크

FanPage
참고페이지

New Edition

프로듀서 Maurice Starr가 80년대 초반 New Edition을 발굴해냈을때조차 그는 이 그룹이 향후 10년에 걸쳐 가장 영향력있는 urban R&B 작품들을 배출해내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들의 첫앨범에는 Bobby Brown, Ralph Tresvant, Ricky Bell, Mike Bivins 그리고 Ronald Davoe 등이 참가하였고 이제 갓 10대를 넘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상적인 목소리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고, 곧 첫싱글 “Candy Girl.”을 챠트에 올려놓았다. 두번째 앨범은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에서는 그들의 최고의 히트곡인 “Cool It Now.”와 “Mr. Telephone Man” 등이 크게 히트했다.

이들의 성공의 요소는 무었보다도 10대들의 감성에 걸맞는 달콤한 보컬로 윤색되어진 틴에이져 취향의 흑인음악이라는 점이었다. 프로듀서 Maurice Starr는 이러한 점을 잘 간파하여 이후 New Kids On The Block을 발굴하여 백인얼굴을 가진 흑인그룹의 전형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인종간 문화의 결합은 오늘날 팝시장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여하튼 두 앨범의 커다란 성공이 막 10대를 벗어난 이들에게 적잖이 부담이었는지 이후 앨범들에서는 뚜렷한 음악적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이후의 앨범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의 Post New Edition의 행적이다. 3집 이후 그룹을 떠난 Boobby Brown의 솔로활동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급기야 당대의 미녀가수 휘트니휴스턴과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나머지 멤버 역시 Bell Biv Devoe란 이름으로 앨범을 내 90년 벽두를 Poison이라는 강렬한 R&B로 강타한다.

이후 1996년 이들은 Bobby Brown의 교체멤버였던 Johnny Gill까지 합세하여 재결합 앨범을 발표한다.

디스코그래피

1983 Candy Girl Warlock
1984 New Edition MCA
1985 All for Love MCA
1986 Under the Blue Moon MCA
1989 Heart Break MCA
1996 Home Again MCA
1996 Crucial MCA
1996 You’re Not My Kind of Girl MCA
1996 Christmas All over the World

Modern T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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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talking” by CHR!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독일 출신의 댄쓰팝 듀오 Modern Talking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할 줄 아는 재능있는 아티스트였다. 그들의 경쾌하면서도 유럽적인 우아함이 곁들여 있는 유로댄쓰 넘버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와 춤추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통통 튀는 비트로 무장하여 80년대 댄쓰클럽을 그들의 무대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업적 성공은 The Intersong 레이블 소속의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Dieter Bohlen의 재능과 타고난 미성의 소유자 Thomas Anders의 절묘한 배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1984년 내놓은 이들의 첫싱글 “You’re My Heart, You’re My Soul”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미국에서는 20세기 말에야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였다) 이들은 이후 일련의 앨범에서 “You Can Win If You Want”, “Cheri Cheri Lady”, “Brother Louie” 등을 연속적으로 히트시켜 그야말로 유럽 최고의 댄쓰팝 듀오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질주는 1986년 발표한 그들의 다섯번째 앨범 In the Middle of Nowhere에서부터 서서히 제동이 걸리게 된다. 이 시기에 Bohlen은 그의 새 프로젝트 Blue System을 듀오 생활과 병행하게 된다. 그리고 1987년 그들의 마지막 앨범 In the Garden of Venus이 발매되었다. 각자가 상당 기간 솔로 활동을 한 후 1998년 재결합을 선언하고 새로운 앨범 Back for Good을 발매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5 1st Album RCA
1985 Let’s Talk About Love Import
1985 You Can Win If You Want BMG
1986 Ready for Romance Alex
1986 In the Middle of Nowhere Import
1987 Romantic Warriors Alex
1987 In the Garden of Venus Import
1998 Back for Good Ariola
1999 Alone BMG
2000 2000: Year of the Dragon BMG
2001 America: The 10th Album BMG

링크
Thomas Anders & Modern Talking
독일어 싸이트

Milli Vanilli

1998년 4월의 어느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계적인 팝듀오로 명성을 날린지 만 10년이 되던 날이었다. 지난 날의 명성이 저절로 떠올려졌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술과 마약에 찌들고 때론,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다시 한번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급기야 자살을 결심한다. 이젠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자신도 없다……

그의 이름은 Rob, 밀리바닐리의 한 멤버였다… 국내에서 Milli Vanilli는 대중적으로 알려져있지 않은 편이다. 그렇지만, 그들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1989년 그레미 어워드 최우수 신인 가수상을 받았다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립싱크 사건으로 가수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는 것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All Or Nothing” “Baby Don’t Forget My Number” “Blame It On The Rain” “Girl, I’m Gonna Miss You” “Girl, You Know It’s True” Remix를 제외한 그들의 데뷔앨범이자 마지막이었던, 단 한 장의 앨범에서 히트된 곡이다.

그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수려한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이 독일출신의 흑인듀오는 단숨에 정상에 올라섰다. 빌보드 앨범챠트에서 8주간이나 1위를 차지했고, 각종 시상식에서 그해 최고의 신인이자 듀오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의 음악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무명의 가수가 부른 곡에 단지 입만 맞춰 뮤직비디오를 찍었을뿐이었던 거다. 자신들의 이름으로 앨범을 내고, 명성과 모든 것을 얻었다. 하지만 비밀이란 영원할 수 없는 법. 곧 그 사실은 전세계에 알려졌고, 팬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준 채로 그렇게 사라졌다. 얼마 후, 진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가가 밝혀지고 그들의 앨범이 새로나왔지만 Milli Vanilli만큼의 명성을 얻진 못했다.

Rob은 그 이후로, 방탕한 생활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그 사건을, 자기자신은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전세계 각종 음악관련 뉴스그룹이나 BBS에서 그들이 죄(?)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 찬반논쟁이라기 보다는 ‘용서할 수 있는가’와 ‘절대 용서 못한다’가 아닐까. 그러나 이젠 적어도 Rob에게는 중요치않은 문제가 되어 버린 듯하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아닌, ‘스스로 용서하지 않은 자’가 되어버렸으니까.

디스코그래피

1988 All or Nothing Hansa
1989 All or Nothing [Remix Album] Hansa
1989 Girl You Know It’s True Arista
1991 Moment of Truth Alex
1991 Quick Moves: The Remix Album Arista

Martika

Martika는 Tiffany나 Debbie Gibson처럼 10대에서부터 팝스타의 길을 걸었다. 추구한 음악은 역시 또래의 취향에 맞는 버블검 사운드였다. 1969년 5월 18일 생인 Martika의 본명은 Marta Marrero로 그녀의 부모는 쿠바 출신이다. 그들은 쿠바 혁명이 발발하자 그 곳을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Martika는 음악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TV 시리즈 등에 출연하면서 연예활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 그녀의 첫 싱글 “More Than You Know”은 미국 차트에 오르는 등 소폭의 인기를 얻었다. 이어지는 싱글 “Toy Soldiers”는 미국에서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 이 곡은 1991년 제작된 동명의 액션영화의 주제가로 쓰이기도 했다 – 1989년에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이 발매되었다. 1991년 “Martika’s Kitchen”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Prince로부터 작곡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뭔가 로맨틱한 관계도 있었던 듯 하다.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Martika는 1999년 Wiseguy에 캐스팅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디스코그래피
1989 Martika [Columbia]
1990 Como Un Juguete [Sony]
1991 Martika’s Kitchen [Columbia]

링크
Photo Gallery

Ma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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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onna, Rotterdam, 26-8-1987” by Olavtenbroek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마돈나를 한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자신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첫 앨범을 발표한 84년부터 지금까지 연예계를 한번에 휘어잡는위력을 발휘하는 몇 안 되는 엔터테이너로서 자신만의 노래와 이미지를 완벽하게 표현하여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진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초부터 마이클 잭슨과 함께 뮤직비디오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한 그녀는 자존심,독립성,그리고 솔직함을 무기로 마돈나,자신만의 표현을 하고 있다.

DJ Mark Kamin에 의해 픽업

1958년 8월 16일,미국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 로체스터에서 태어난 마돈나 (본명:마돈나 루이즈 베로니카 치치오네)는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계모인 어머니밑에서 8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그녀는 어려서부터 치어리더,피아노 레슨,발레등 춤과 노래에 특출난 재능과 끼를 발휘하여 미시간 주립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는등 그녀의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1977년,그녀는 발레를 하기위해서 뉴욕으로 가 도너츠가게 카운터에서 일을 하면서 [Alvin Ailey & Martha Graham]이라는 무용단에 들어가 춤을 추던 중 노래로 방향을 전환.클럽의 인디 밴드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면서 자신만의 곡을 만들기 시작한다. 클럽에서도 마돈나의 특이한 음색과 펑키하면서도 과격한 춤실력을 주목 받아 마침내 1982년 Dj Mark Kamin에 픽업되어 ‘Everybody’라는 노래로 클럽에서부터 인기를 얻게 된다.

첫 데뷔 앨범[Madonnna] 1983년에 발표한 그녀의 첫 데뷔 앨범[Madonnna]는 대중들에게 많은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클럽에서만큼은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앨범 수록곡인 ‘Hoilyday’는 방송챠트에 진입을 했고 ‘Borderline’ 은 1984년에 Top10에 들어 17주간동안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Lucky Star’는 차트에 4위로 랭크가 되었는데 그녀의 곡들과 함께 특이하면서도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의상으로 꾸며진 뮤직비디오도주목을 받게 된다.

1984년에 발표된 마돈나의 두 번째 앨범 [Like A Virgin]은 차트에서 정상을 기록하면서 6주간 차트에 머무르게 되는데 1985년 어느 아티스트보다 최고의 음반 판매율을 보이게 된다.1986년에 히트를 기록한 마릴린 먼로에게 헌사한 노래 ‘Material Girl’로 그녀는 투어를 시작했으며 ‘Crazy For You’로 그 해 5월 두 번째 히트곡을 낳게 되면서 영화 [Vison Quest]와[Desperately Seeking Susan]에 출연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그해 마돈나는 영화계의 악동,숀펜과 자신의 생일날 결혼을 했으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4년 후에 숀펜과는 결별을 하게 된다.1987년 그녀의 다섯번째 앨범 ‘Open Your Heart’가 싱글로 발표되고 그녀의 세번째 영화 [Who’s That Girl]의 주제가인 ‘ La Isia Bonita’가 여섯 번째 싱글 앨범으로 정상에 오르게 된다. 파격적인 뮤직비디오 ‘Like A Prayer’와 영화 [Dick Tracy]출연 팝과 락,댄스를 포함한 그녀의 네 번째 앨범인 [Like A Prayer] 슬립 차림의 마돈나가 불 타는 십자가 앞에서 흑인성직자와 키스를 하는 파격적인 화면으로 꾸며진 뮤직비디오와 함께 또 한번 마돈나는 뜨거운 화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4집에 수록된 ‘Express Yourself’,’Cherish’,’Keep It Together’이 싱글 원을 기록하면서마돈나는 1990년 4월부터 12월까지 [Blond Ambition]이라는 타이들로 투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그리고 90년 5월에는 [Vouge]가 히트를 기록하면서 웨렌 비티와 영화 [Dick Tracy] 에 출연을 하게된다그녀는 ‘Immaculate Collection’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앨범에서는 ‘Justify My Love’와 ‘Rescue Me’ 두 곡이 히트를 하게 되고 ‘Rescue Me’는 미국 여자 가수중에서 차트에 15위로 첫 등장하는 신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2년 여름,영화 [League of their Own]의 주제가로 사용되기도한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라는 히트곡을 내놓고 1993년에 발표된 [Erotica]와 1995년에 발표된 [Bedtime Stories]는 플레티넘을 기록하면서 일곱 번째 멀티 플레티넘을 기록하게 된다. 개성파 연기자 마돈나,[에비타]로 골든 글로브 최고 여자 배우상 수상 1996년! 마돈나는 영화 [에비타]에서 주인공을 맡으면서 그녀의 인생에서 잊지못할 한 해를 맞게 된다.마돈나는 에비타에 출연하면서섹시한 이미지에서 엘레강스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로 탈 바꿈하게 되는데 그 결과 그해 골든 그로브 [Musical or Comedy] 부문에서 최고 여자 배우상을 거머지게 되고 그녀의 트레이너인 카를로스 레온의 딸 [Lourdes]를 출산하게 된다.

마돈나는 1998년 트랜스적인 요소가 강한 [Ray Of Light]를 발표하면서 이미지를 바꾸게 되는데[Ray Of Light ]는 99년, 제41회 그레미 시상식에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최고 팝 앨범상,최고 댄스 레코딩상,단편 뮤직비디오상을 받으면서 그간 그래미와 인연이 없는 마돈나에게 세 개의 트로피를 선사하기도 했다.

뮤지션,가수,영화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진 마돈나! 15년동안 마돈나는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다른 뮤지션들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그녀는 위대한 가수도 아니고 위대한 배우도 아니지만 항상 새로운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고 파격적이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전 세계에 자신만의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tube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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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여자 돈키호테? 신의 명령으로 가부장제와 정면대 결하는 제2의 잔다르크?

83년 데뷔한 이래 변함없이 대중적 우상의 권좌에 머물러온 마돈나는 어 느 쪽으로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 범인의 눈에 무모하고 비정상으로 비칠 만치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가 하면, 그늘에 파묻혔 던 성적 금기를 끄집어내며 고정된 성역할을 파기해나가는 등 마돈나의 행각은 언제나 좌충우돌이다. 한때는 페미니스트들이 열렬하게 찬미하고, 한때는 보수주의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바로 동성애자들의 동지 가 되는 등 그녀의 지지층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모한다. 그 결과 40줄에 접어든 지금에도 마돈나는 ‘성스러운 창녀’의 이미지를 고수한다. 오랜 만에 만들어진 할리우드 뮤지컬 <에비타>에서 돋보이는 것은 알란 파커의 예리한 연출도,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육감적인 매력도 아닌 생기발랄하고 격정적인 에바 ‘마돈나’ 페론뿐이다.

마돈나의 전기를 쓴 크리스토퍼 앤더슨은 “마돈나 같은 사람은 일찍이 한명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1억장의 앨범판매고를 기록했 고, 비틀스보다 많은 28곡의 톱 텐 싱글을 가진 톱 스타라는 사실은 차라 리 평범하다. 마돈나를 유아독존으로 만든 것은 “자아, 미워해봐요!”라 는 신조처럼 세인들에게 정서적 충격을 안기고, 심리적 혼돈을 일으켜온 반사회적 태도 때문이었다. <진실 혹은 대담>에서 그녀는 “내가 최고의 가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최고의 댄서가 아니라는 것도요. 그 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을 화나 게 하는 것이니까요”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마돈나는 자신의 흥밋거리를 채우기 위하여 부유한 중서부 출신의 우등생에서 남성의 노리개인 보이토 이(Boy Toy), 남성을 유혹하는 금발의 머티리얼 걸(Material Girl), 네글 리제를 입은 가톨릭 신자 등으로 변신해왔다.

80년대와 90년대의 문화산업을 관통하는 유일한 엔터테이너. 부도덕한 이성과 합리적인 육체의 합일

마돈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명하다. 동시에 마돈나는 감정적이고 제멋 대로다. 그녀는 ‘에비타’처럼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구현해왔 다. 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몸속에 실어, 자웅동체의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상반된 것을 하나에 집어넣어 조화를 이루 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섹스를 할 때 채찍을 맞거나 쇠 사슬로 침대에 묶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십대 미혼모를 두둔 하고, 성스러운 의식과 성물을 노골적으로 훼손하면서도 스스로 가톨릭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등 마돈나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도 10년이 넘도 록 수많은 대중을 자신의 팬으로 거느리고 다닌다. 마돈나는 언제 자신이 변해야 하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실천해 왔다. 그리고 “내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건 서구문 명의 잘못일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 이 바로 미국의 하버드, 뉴욕주립대 등 수많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대중 문화’‘여성’‘동성애’등의 주제어로 마돈나를 연구하는 이유이다.

지금이 80년대라면 마돈나는 소비문화주의에 편승한 대중스타, 대중의 호 기심과 반발심을 교묘하게 자극하여 상품을 팔아먹는 사기꾼 정도로 취급 되고 말았을런지도 모른다. 영화, 음악 등등의 대중예술이 60년대에 키워 왔던 자신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80년대에 마돈나는 대중소비문화의 화려 한 상징이었다. 83년 <럭키 스타> (Lucky Star)를 불렀을 때 마돈나가 직 접 코디한 의상의 벨트에는 보이 토이(Boy Toy)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 어느 날 보이 토이를 아무런 생각없이 머리에 떠올렸어요. 벽에 휘갈겨 썼더니 모두들 재미있어 했어요. 남자의 장난감!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참뜻은 거꾸로라구요”라고 마돈나는 말했지만 대중은 그녀를 ‘장난감’ 으로 인식했다. 마돈나도 그걸 이용했다. 84년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에 이어진 <머티리얼 걸>(Material Girl)에서 마돈나는 먼로를 흉 내낸다. “현찰을 갖고 있는 사내는 언제나 여자의 이상형이지요”라는 말처럼 마돈나는 소비를 부추기고, 탐닉하는 여인상을 보여주었다.

늘어뜨린 십자가와 묵주, 살짝살짝 보이는 배꼽과 토이 벨트 등을 가리켜 <타임>은 “전혀 성스럽지 못한 성물들을 선전하고 있는 것 같다”며 “ 쇼핑몰 문화의 산물”이라고 비난했다. 80년대 중반 마돈나에 대한 평가 는 혹독했다. “마돈나가 풍기는 이미지는 요컨대 음탕한 여자이다. 가장 비싸게 사주는 손님에게 몸을 주는 거리의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섹스와 종교를 기괴하게 뒤섞어놓아 인간의 정신성을 비웃고 있다”고 말하는 대 학교수가 있는가 하면 <빌보드>에서는 “마돈나는 음악계에서 6개월 안에 쫓겨날 것이다. 그녀의 인상이 노래에 십분 반영되고 있으니까”라고 노 골적으로 비꼬았다. <피플> 정도가 비교적 냉정했다. “마돈나는 창녀지 만 그 맛은 달콤하다. 그녀는 통속적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녀의 개성 자체는 하나의 팝 아트가 되어버린다.”

충격적인 사진집 <섹스>의 출판기념회. 동성애자의 벗, 마돈나?

그러나 마돈나는 80년대 후반 보통사람들의 어설픈 기대를 멋지게 뒤집어 버린다. 숀펜과 사랑에 빠져있던 86년 발표한 ‘트루 블루’(True Blue) 란 앨범은 “그녀야말로 팝음악이다. 복잡하면서도 소박하다. 팝의 표면 적인 매력은 물론 그 밑바닥에 깔린 정신과 에너지와 감정을 잘 알고 있 다”“외모와 음악이 더욱 원숙해진 마돈나는 신랄한 평론가의 마음까지 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등의 호평을 받는다. 더 나아가 마돈나는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킨다. <배니티 페어>에서는 “철저한 채식과 하루에 5천m씩 달리는 운동으로 마돈나가 사춘기의 유아비만을 근육으로 변신시 켰다”고 보도했다. “뚱뚱하던 소녀가 매력적인 여왕이 되었다. 매춘부 와 같은 모습에서 세련된 은막의 요부로 눈부시게 다시 태어난 그녀의 온 몸에서는 어떤 메시지가 전해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비어있던 금발 야심 가의 왕관을 물려받을 장본인”이 마돈나라는 것이다.

함께 발표된 뮤직 비디오 ‘파파 돈 프리치’(Papa Don’t Preach)는 새로 운 출발점이 되었다. 임신한 십대소녀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하는 이 노래는 마돈나에게 적대적이던 보수적인 중절 반 대파가 지지를 보내는 이변을 낳았다. 반면 <오픈 유어 하트>(Open Your Heart)는 낭만적이면서도 야한 성적 몽상을 보여준다. <뉴욕 타임스>의 영화평론가 제임스 캔비는 “단 4분 22초 안에 사춘기 소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달콤하고 외설적인 환상이 가득 담겨 있다. 익살맞으면서 섹시한 불멸의 소곡이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당연히 마돈나는 MTV 최고의 시청 률을 올리게 되었고 마이클 잭슨과 함께 MTV의 수호자가 되었다.

정상에 오른 마돈나는 89년 ‘라이크 어 프레이어’(Like a Prayer) 란 앨범을 발매하면서 더욱 도전적이 된다. <롤링 스톤>의 “팝음악으로서 가장 예술에 접근했다. ‘라이크 어 프레이어’는 마돈나를 아티스트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깊이 드러내주는 목소리의 소유자이다”라는 평은 차라리 상투적이었다. 뮤직비디오 ‘라 이크 어 프레이어’는 남부의 백인처녀가 성가대원인 흑인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도망가는 두 사람을 KKK단이 등 뒤에서 쏜다는 이야기다. 인종적 , 종교적 문제를 암시하는 이 비디오는 내용 자체보다도 불타는 십자가 등의 상징 때문에 더욱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건 시작이었다. <익스프 레스 유어셀프>(Express Yourself)는 평범한 가사와 별개로 <메트로폴리 스>에서 영감을 얻은 미래의 풍경에서 사디즘적인 환상을 표현한다. 그리 고 당당하게 말한다. “<익스프레스 유어셀프>의 주제는 음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라고.

페미니스트에게 공격받은, 쇠사슬에 매여 테이블 밑을 기어다니는 장면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제 자신을 쇠사슬에 맨 거예요. 남자가 묶 은 것이 아니라구요. 내 욕망을 붙들어맨 거죠. 내 테이블 밑에서 내가 기어다닌 겁니다. 남자에게 명령받은 것이 아니라구요. 모든 것을 내 맘 대로 한 거예요.” 마돈나는 “내 노래에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그건 당신의 꿈을 믿으라는 것이다. 너 자신을 표현하라”고 말한다. 마돈나가 페미니스트와 때로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전적으로 합치하는 모순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불쌍한 사람은 자신의 쾌락도 남의 허락을 얻어 구하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마돈나는 스스로 쾌락을 쟁취할 것을 주장하 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노래하고, 춤추는 모든 것으로 표현한다. 마 돈나는 ‘블론드 앰비션’(Blonde Ambition) 세계순회공연을 앞두고 안무 가를 마이클 잭슨의 밴드 공연을 맡았던 빈스 패터슨으로 교체한다. 마돈 나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모든 법칙을 깨트리는 거야. 섹스와 자위 등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강요된 죄의식을 없애는 의 식은 물론 지금부터는 아버지든 교황이든 모든 남성권위와 싸워나가야만 해.”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계획없는 좌충우돌은 아님이 분명하다. <저스티파 이 마이 러브>(Justify My Love)는 양성연애, 복장 도착, 엿보기와 사디 즘의 집대성으로 MTV에서 방영금지처분을 받는다. 그러자 마돈나는 ABC의 뉴스 프로그램 ‘나이트 라인’에 출연해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으므로 스 스로 섹시해지는 것을 선택한다며 자신이 90년대 페미니즘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당돌한 선언에 대하여 <뉴욕 타임스>는 “마돈나 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을 빈틈없이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이 <저스 티파이 마이 러브>에 담긴 페미니즘적인 메시지이다. 수백만명의 사람들 이 그 메시지를 알아들었다”라며 옹호한다. 마돈나에게 <저스티파이 마 이 러브>로 검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각광을 받으려는 속셈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가 마돈나를 “미국에서도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류 실업가” “부도덕에 걸맞은 머리와 사업에 걸 맞은 육체를 지닌 여자”라고 부른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포브스>는 마돈나가 수년에 걸쳐 정상을 달린 것은 그녀가 해마다 자신을 혁신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90년 ‘중상비방에 대항하는 게이와 레즈비언 연맹’(GLAAD)에서는 마돈 나에게 미디어상을 주었다. 또한 보스턴 ‘게이 공동체 뉴스’에서는 마 돈나의 ‘블론드 앰비션’순회공연을 “이성애적 언어의 옷을 입고 있지 만 남자연인을 여자 짝으로 바꾸라고 속삭이며 은연중에 레즈비언을 권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게이 100>에서 폴 러셀은 마돈나는 “동성애뿐 아니라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성역할과 성 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타파함으로써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좀더 진 보적이고 관대한 사회풍토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마돈나는 동성애라는 정체성과 스타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마저도 마돈나에게 찬탄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가 된다. 요즘 미국에서 ‘포스트 게이’라는 개념은 고정 적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이성과 동성을 사랑하는 성적 태도를 일컫는다. “성의 구별에서 해방된 섹스는 구속을 없애버린다. 남 자든 여자든 지배하거나 복종하는 자유를 가져다 준다. 남자가 여자 복장 을 해도 좋고, 여자가 남자 복장을 해도 상관없다. 자신의 다른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니까”라는 말처럼 마돈나는 자유로운 양성연애를 공적으로 과시하고 다닌 지 오래이다.

마돈나의 변신은 90년대에도 여전하다. 92년의 앨범‘에로티카’(Erotica )와 94년에 발표된 ‘베드타임 스토리’(Bedtime Story)는 자신이 가진 양면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자가 어두운 면이라면 후자는 그 반대 라는 것. ‘베드타임 스토리’는 “비틀스보다 슈프림스에 더 열광했다” 는 고백처럼 리듬 앤 블루스에 근접하며 진솔한 감정을 깊게 드러낸다. 그리고는 95년에 발라드 베스트 모음집인 ‘섬싱 투 리멤버’(Something to Remember)란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의 첫 곡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와 개인의 관능적 욕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한 천재적인 솔 가 수 마빈 게이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아이 원트 유>(I Want You)이다. <테 이크 어 바우>(Take A Bow) <율 시>(You’ll See) <아이 원트 유>로 이어 지는 발라드 히트곡의 뮤직비디오연작에서 마돈나는 사랑의 아픔에 상처 받으면서도 주체적으로 자신을 지켜나가는 관능적인 여인상을 선보인다. 한때 대통령의 부인, 대법원 여판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국의 가장 유력한 여성 중 하나였던 마돈나는 그러나,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자신을 추스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발라드를 노래하고, 반사회적인 태도를 함부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마돈나의 타협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에서 엄청나게 섹시한 여자는 못된 암캐나 위험한 인물로 취급받게 마련이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마돈나가 어디로 가버렸을 수는 없으니 까. 마돈나의 기이한 몸짓과 충격적인 말, 행동은 결코 즉흥적이거나 우 발적인 것이 아니다. 모두가 치밀한 계산 아래 미리 짜놓은 연출의 결과 인 것이다. <진실 혹은 대담>에서 자신의 섹스까지도 공개하던 마돈나가 절대로 찍지 못하게한 만남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거느린 영화사, 음반 사, 출판사의 관계자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마돈나는 절대로 대중이 자신 의 사업가적 면모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고, 자신을 ‘충동적인 암캐’ 로 바라보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나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큼 나에 게 관심이 쏠려있”다는 것이다.

그 치밀한 판단이 마돈나를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만들었다. 마돈나 는 여성이 남성을 성적으로 지배하던 시대로 되돌려놓았고, 성적 쾌락을 자기 자신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80년대 들어 비약적으로 성장 한 문화산업의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자리를 매김한 것이었 다. 마이클 잭슨이 아직 피터팬에 머무르며 ‘네버랜드’에 숨어있을 때, 마돈나는 여신이 되어 남성들의 사회 한복판에 ‘성의 구별에서 해방된 소돔’을 만든 것이다. 마돈나는 충실하게 우리 시대의 모순과 혼란을 드 러내는 거울을 넘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직면하게 만드는 요술거 울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점까지도, 마돈나와 진실없는 우리 시대는 너무나 닮아 있다.

김봉석 기자 

Copyright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1일

디스코그래피

2000-12 Don’t Tell Me (Single)
2000-12 Music (Special Limited Edition)
2000-09 Music
2000-09 Music (Single)
2000-03 American Pie (Single)
1998 Frozen (Single)
1998 Ray Of Light
1997-07 Evita (O.S.T)
1996-11 Evita (2CD, O.S.T)
1995 Something To Remember
1994 Bedtime Stories
1992-10 Erotica
1990 I’m Breathless
1990 Immaculate Collection
1989 Like A Prayer
1987-07 Who’s That Girl (O.S.T)
1987 You Can Dance
1986 True Blue
1984 Like A Virgin
1983 Ma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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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트리뷰트 앨범에 관한 기사 읽기
Madonna VS Cyndi Lau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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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per, Cyndi

90년 7월 21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는 20만 명의 청중이 운집한 대공연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Pink Floyd의 핵심 멤버였던 Roger Waters의 ‘Wall’ 실황 공연이었다. 스콜피언즈, 브라이언 아담스, 시네드 오코너, 필 콜린즈 등 슈퍼스타들이 대거 참여하고 전세계 10억 이상의 인구가 텔리비젼을 통해 시청했던 이 공연은 아프리카난민 구호 자선공연이었던 85년의 ‘Live Aid’ 이후 최대 규모의 이벤트였는데 이 공연에서 Cyndi Lauper는 Pink Floyd의 앨범 Wall에 수록된 팝의 명곡 “Another Brick In The Wall’을 불러 전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에 올랐다.

Cyndi Lauper는 83년 자신의 솔로 데뷔 앨범(She’s So Unusual)을 발표, 9백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Girls Just Want to Have Fun”과 “Time After Time”등 이 앨범에서만 4개의 Top Ten 히트곡을 만들어 내며 초기 MTV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스타 중에 한 명이 되었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이미 31살이었다.

그러나 30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약 미국 10대 소녀들의 우상이 되어 그녀의 의상과 대표 히트곡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은 10대 소녀들 사이에 유행이 되었다. 이처럼 그녀는 솔로 데뷔 앨범 한 장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듯 하지만 그녀의 나이가 말해주듯 결코 그녀는 단 한번의 시도로 성공의 자리에 올라선 것은 아니었다.

12살에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여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였던 Cyndi Lauper는 10대 후반에 학교를 중퇴하고 뉴욕의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대를 다쳐 1년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힘들게 클럽 활동을 했던 그녀는 77년 뮤지션 John Turi와 함께 Blue Angel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80년 밴드 이름의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 앨범 발표 이후에 그녀는 곧 파산 상태가 되어 밴드를 해산하고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지역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활동을 전개하던 그녀는 앞서 언급한 대로 84년 솔로 데뷔 앨범을 발표 상업적인 대성공과 함께 최고의 신인 아티스트 부문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등 인기 정상에 올랐다.

84년에는 세계적인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고 85년에는 The Goonies의 영화음악에도 참여, “Goonies ‘R’ Good Enough For Me”를 MTV 히트곡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데뷔 앨범의 성공에 비하면 이러한 성과는 미약한 것이었다. 86년에 발표한 두 번째 솔로 앨범 True Colors는 그녀의 데뷔 앨범 She’s So Unusual과 많은 차이를 보이는 작품이다.

전작에서 그녀는 뉴 웨이브를 포함하여 펑크, 레게, 팝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다채롭게 선보이며 자신의 가늘고 소녀 같은 보컬에 걸맞게 경쾌한 분위기의 곡들을 발표했으나 두 번째 앨범에서는 Easy Listening의 발라드곡을 발표하여 훨씬 더 부드러운 사운드와 분위기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앨범도 백만 장 이상이 팔려 큰 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성숙된 음악 분위기와 이미지 변신의 대가로 그녀는 많은 어린 팬들을 잃게 되었다. 89년에는 세 번째 앨범 A Night to Remember를, 93년에는 Hat Full Stars를, 그리고 95년에는 다섯 번째 앨범 Twelve Deadly Cyns…And Then Some을 발표했으나 좋은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이전의 인기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MTV의 스타가 되기에는 이미 그녀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고 음악과 이미지 또한 너무 성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97년에는 Tina Turner와 함께 미국 순회공연에 오르기도 했던 그녀는 Declyn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첫 아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98년에는 Merry Christmas…Have a Nice Life를 발표했다.

tube music

디스코그래피

1984 She’s So Unusual Epic/Legacy
1986 True Colors Portrait
1989 A Night to Remember Epic
1992 A Hat Full of Stars Epic
1995 Girls Just Want to Have Fun Sony
1997 Sisters of Avalon Epic
1998 Merry Christmas…Have a Nice Life! Sony
2001 Feels Like Xmas Sony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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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onna VS Cyndi Lauper

Kershaw, Nik

본명이 Nicholas David Kershaw 인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Nik Kershaw는 80년대 중반 몇곡의 히트곡을 내며 인기를 누렸고 80년대 이후에는 작곡가로써 명성을 날렸다. 그의 음악경력은 10대 시절 기타를 배우면서 시작되었는데 1974년 그는 Deep Purple의 커버밴드 Half Pint Hogg라는 밴드에 몸담았다. 이후 학교를 떠나 째즈훵크 그룹인 Fusion이란 밴드에 합류하였는데 Fusion은 70년대 후반 ‘Til I Hear From You라는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1982년 그룹이 깨진 후 Kershaw는 Mickey Modern이라는 매니저의 도움으로 MCA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1983년 그곳에서 그는 그의 첫 솔로싱글 “I W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를 발표하였고 이 곡은 영국차트 47위까지 올랐다. 다음 싱글 “Wouldn’t It Be Good” 은 영국차트 5위, 그리고 미국차트 46위까지 오르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다. 1984년 여름 “I Won’t Let the Sun Go Down on Me”가 재발매되어 차트 2위까지 오르며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1986년 그의 세번째 앨범 Radio Musicola가 발매되었지만 상업적으로 실패한 앨범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가수로써의 활동보다는 작곡에 주력하게 되여 자신의 앨범을 발매하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Chesney Hawke의 히트곡 “The One and Only” 등의 작곡가로써도 경력을 쌓아가게 되었다. 최근의 활동사항으로는 2001년 To Be Frank라는 앨범을 발매하였으며, 프랑스 출신의 테크노 그룹 Les Rythmes
Digitales의 Sometimes라는 곡의 보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3 Human Racing MCA
1984 The Riddle MCA
1986 Radio Musicola MCA
1990
The Works MCA
1999 15 Minutes Rhino
2001 To Be Frank Ea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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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Site
www.kershaw.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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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ts, The

The Jets는 Tonga에서 미네아폴리스로 이주해 온 이민자 가족으로 구성된 가족그룹이다(총 8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말 대가족이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들마저 18명의 자식들 중에서 고른 것이라 한다). 1986년과 1989년 사이에 The Jets는 몇 개의 댄스팝 싱글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얻었다(Crush On You, You Got It All, Rocket 2 U 등). 또한 몇 개의 정규앨범을 발표했는데 이 중에 데뷔앨범인 셀프타이틀(1986)과 Magic(1987)이 골드와 플래티넘을 획득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틴팝 아티스트들처럼 이들의 생명력도 그리 길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명맥을 이어오던 그들은 1997년 Love Will Lead the Way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최근 그 대가족 중에서 자라난 어린 아이들이 새로운 그룹을 조직하였다 한다. 여하튼 이들을 떠올릴 때면 어쩐지 외관상 특징 때문에 같은 틴팝 계열의 라틴음악을 했던 Menudo가 겹쳐지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여타 80년대 틴팝 그룹보다는 한 차원 높은 퀄리티를 보여준 그룹이 아닌가 싶다.

멤버 : Leroy, Eddie, Eugene, Haini, Rudy, Kathi, Elizabeth, and Moana Wolfgramm

디스코그래피
1986 The Jets [MCA]
1986 Christmas with the Jets [MCA]
1987 Make It Real [MCA]
1987 Magic [MCA]
1989 Believe [MCA]
1995 Love People [Liberty Park]
1997 Love Will Lead the Way [Shadow]
Cross the Line [MCA]
So True [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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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Site(may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