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Bitters End – https://thefilmstage.com/first-look-at-ryusuke-hamaguchis-haruki-murakami-adaptation-drive-my-car/, Fair use, Link
OTT를 최근 넷플릭스와 와챠로 옮겼다. 옮긴 김에 어떤 영상이 있는지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나중에 볼 영상 찜하느라 시간을 좀 보냈는데, 오랜만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가게 구석구석을 뒤져서 ‘희귀한’ 비디오를 발견하는 듯한 재미를 느꼈다. 넷플릭스에는 없었던 – 또는 내가 그동안 찾지 못한 – 영상이 몇 개 있었는데, 예를 들면 동경러브스토리, 리포맨, 4차원의 난장이 E.T., 아푸 3부작 등을 발견했다. 아무튼 그 와중에 이번 달 압축적으로 꽤 많은 영화를 몰아서 본 것 같다. 그래서 여기 단평을 남긴다.
코드명 J (1995)
윌리엄 깁슨의 단편 소설 《메모리 배달부 조니》를 원작으로 하는 사이버펑크 계열의 영화다. 마침, 영화를 보기 몇 주 전에 오랜만에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를 다시 읽었기에 그 기분의 연장선상에서 넷플릭스를 끊기 며칠 전에 감상했다. 영화의 원제는 소설의 원제와 같은 《Johnny Mnemonic》인데 우리나라 출시 명은 뜬금없이《코드명 J》로 바뀐다. 좀 어이없는데 암튼, 호불호가 있는 영화인데 결국 윌리엄 깁슨 팬이라면 나름 즐기며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키아누 리브스의 연기는 너무 어색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2023)
아내가 왓챠에 재밌는 영화가 있다고 추천해 줘서 왓챠에서 처음 본 영화다. 아무 정보 없이 본 이탈리아 영화인데 2023년 만든 영화인데도 2차 대전 직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흑백 필름에 주인공인 여성이 남편에게 수시로 폭력을 당해 《자전거 도둑》 유의 좀 짜증 나는 리얼리즘 영화인가 했더니 의외로 코믹한 연출도 있어 그리 많이 짜증 나지 않으면서 보았다. 결국 신파조로 흘러가는 듯한 고통받는 여성의 삶이 막판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통해 희망을 찾게 되는데 그 부분이 가장 큰 이 영화의 매력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5)
트위터에서 다들 재밌다고 하는데 사실 디카프리오의 청승맞은 모습이 포스터여서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화장실에 갈 때는 제외하고는 거의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정주행했다.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가 괜찮으면서도 어딘가 현학적인 냄새가 났는데, 이 영화는 그런 느낌 없이 직관적으로 캐릭터들에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영화였다. 《허공에의 질주》에 대한 21세기 변주라는 느낌도 들었고, 희망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희미하게라도 미소를 지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노예 12년 (2013)
이 영화는 쿠팡플레이에서 봤다. 솔로몬 노섭이라는 실존 인물이 북부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가 사기꾼의 꼬임에 빠져 남부로 갔다가 노예로 팔리며 12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보는 것도 고통스러워 한 며칠간 안 보다가 다시 보기도 했다. 극 중간에 노섭이 백인 관리의 린치로 나무에 목이 묶인 채로, 발끝으로 서서 며칠을 버티는 장면이 압권인데 거기서 며칠 감상을 쉬었다. 이 영화를 흑인에서 백인으로 인종을 바꾸고 SF적 요소를 가미하면 찰턴 헤스턴 주연의 《혹성탈출》이 된다.
국제첩보국 (1965)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첩보물 3부작인 렌 데이턴 원작의 해리팔머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인데 얼마 전에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하게 되어 처음 스크린으로 감상하였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파이 세계의 환상을 그대로 소설과 영상에 옮긴 작품이라면 이 해리팔머 시리즈는 ‘노동계급 스파이’라는 설정의 안티히어로물이다. 당시 영국 영화계의 대세 배우인 마이클 케인이 해리 팔머 역을 맡아 삐딱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지닌 스파이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존 배리의 서늘한 멜로디의 사운드트랙도 극의 분위기에 크게 기여했다.
드라이브마이카 (2021)
개저씨 없는 – 오히려 심히 심약한 성격의 일남 – 홍상수 영화 보는 느낌. 그 와중에도 물론 원작자 하루키 스타일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타르코프스키가 《솔라리스》에서 미래주의적 분위기 연출을 위해 도쿄의 고가도로 드라이브 장면을 찍었다던데 그 장면이 연상되는 드라이브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이 눈이 시원해지면서 인상적이다. 차는 현대인에게 이동의 수단이면서 대사 연습의 공간이자 진실한 대화의 장소다. 여담으로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차로 가면 그 비싼 민자도로 통행료랑 뱃삯이 얼마였을지 궁금하다.
플란다스의 개 (2000)
봉준호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작. 오랫동안 그 영화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 마치 그 영화를 진작 봤다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는데 어렴풋이 이 영화도 그런 영화. 백수 생활이 짜증 나는 와중에 아파트 내에서 짖어대는 개 때문에 짜증이 증폭되는 남주의 좌충우돌과 이 남주와 희한하게 동선이 겹쳐 같이 어울리는 여주에 관한 이야기다. 정말 단편 정도로 그칠 소재를 멱살 잡고 장편으로 만들어 극장 개봉에까지 성공했다는 것이 봉준호 감독의 실력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연기는 어설펐고 남주 아내 역의 배우가 가장 연기가 좋았다.
알제리 전투 (1966)
폴 토마스 앤더슨《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만들며 레퍼런스로 중요한 영감을 얻었던 작품으로 언급한 영화다. 제국주의 일타강사 프랑스에서는 금기시되는 치욕의 역사인,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독립 과정을 다큐멘터리 찍듯이 만들어서 당시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작품이다. 지금 다시 봐도 형식이나 연출 기법이 고루하지 않다. 이 의사(擬似) 다큐 형식의 연출은 그 뒤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오늘날 유럽이 왜 제삼세계 인민의 집단이민으로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해 역사적 링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메트로폴리스 (1927)
개인적으로는《플란다스의 개》처럼 보지는 않았으나 여태 봤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영화였다. (아니면 봤어도 까먹었을 수도 있고) 암튼 최초의 SF영화라 할 수도 있고, 최초의 계급투쟁 영화라 할 수도 있고, 여러모로 엄청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도시 풍경에 대한 묘사 하나만 놓고도 할 말이 너무 많은 영화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마리아. 배우가 너무나 극명한 두 명의 캐릭터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서 깜놀. 연기력, 춤솜씨, 그리고 특히 어떻게 양쪽 눈을 그렇게 차이 나게 뜰 수 있는지 감탄하였다.
난징! 난징! (2009)
조금 전에 막 감상을 끝낸 이 글의 마지막으로 소개할 영화다. 일본의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중국 영화다. 요즘 만들어진 중국 영화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연출이 예상보다 차분해서 좀 의외였다. 대학살이라는 잔혹한 역사에 비해 오히려 톤이 좀 낮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흑백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제리 전투의 존재를 부정하는 프랑스처럼 일본도 난징 대학살의 존재를 외면한다. 제국주의 전통(!)을 지닌 국가가 이 모양이니 세계평화가 요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