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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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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Aid at JFK Stadium, Philadelphia, PA” by Squelle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85년 7월 13일 “Live Aid” 콘서트가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됐다. Bob Geldof와 Midge Ure가 기획하고 런던에 있는 웸블리 스타디움과 필라델피아에 있는 JFK 스타디움 두 곳에서 열린 이 콘서트는 172,000 명1의 관중과 19억 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공연을 펼친 이벤트였다. 이 이벤트를 통해 주최 측은 에티오피아의 기근을 해소하기 위해 3억 달러를 조달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날 이 이벤트에서 영향 받은 콘서트가 호주나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도 열렸다.

이 콘서트는 1984년 말 발매된 “Do They Know It’s Christmas?”의 성공에 힘입어 첫 발을 내딛은 셈이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상황을 보도한 BBC 뉴스를 본 Bob Geldof가 Midge Ure에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작업을 하자고 요청했고 그들이 만든 노래가 바로 “Do They”다. 당시 영국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모여 만든 이 곡은 영국 차트에서 5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약 8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금액을 조달하였다. 또한 이 곡은 “We Are The World” 등 이어지는 자선 노래에 강한 영감을 주었다. Bob은 이쯤 되자 이제 더 많은 돈을 조달할 콘서트를 기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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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b Geldof Rock am Ring 1987” by Original uploader was ‘ElLo57 at de.wikipedia – Originally from de.wikipedia; description page is/was here.. Licensed under CC-BY-SA-2.0-de via Wikimedia Commons.

Bob Dylan, David Bowie, Phil Collins2, Mick Jagger, Madonna, Judas Priest, U2, Elton John, Duran Duran 등 수많은 당대의 뮤지션들이 총 16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 이벤트는 영국 공연장에서는 “Do They”를, 미국 공연장에서는 “We Are The World”를 부르는 것으로 공연을 마쳤다. 이 이벤트에서 주최 측은 당초 예상했던 금액 이상으로 자선기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주최 측은 당초 1백만 파운드를 예상했었지만 결과는 1억5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또한 이 이벤트의 성공에 힘입어 Bob Geldof는 엘리자세브 2세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받는다.

좋은 의도도 기획된 이벤트지만 비판도 뒤따랐다. Bob Dylan은 공연 중에 “이 중 얼마라도 농부들이 모기지를 갚는데 쓰인다면”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결국 이 발언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그해 9월 Willie Nelson 등이 기획한 Farm Aid 공연이 열렸다. 영국 측 진행자였던 방송인 Andy Kershaw는 후에 음악적으로는 지루한 공연이었고 아프리카 측 뮤지션이 참여하지 않는 등 해당 대륙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PrinceHello라는 노래를 통해 자신이 왜 이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았는지를 말한다.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급진적인 반응은 같은 해 조직된, 자선이 아닌 뮤지션의 직접적인 저항을 요구하는 Artists United Against Apartheid일 것이다.

공연 참가 뮤지션들과 그들의 말
에릭 클랩턴과 필 콜린스의 Layla 공연

  1. 런던에서는 72,000명, 필라델피아에서는 100,000명이 참여
  2. 그는 웸블리와 JFK 두 곳에서 모두 공연을 갖고 Eric Clapton을 위해 드럼을 치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Cassette Tape

통상 카셋테잎(Cassette Tape)이라 불리는 콤팩트카셋(Compact Cassette) 또는 뮤직카셋(Musicassette)은 오디오의 녹음과 재생을 위한 마그네틱 테잎 형태의 레코딩 포맷이다. 통상 이미 녹음된 형태 또는 녹음을 위해 아무것도 녹음되지 않은 형태로 판매되었다. 원래는 구술 녹음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기술이 발전에 따라 음악 감상용이나 초기 컴퓨터의 데이터 저장용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0년 초에서 1990년대 말까지가 카셋테잎이 가장 일상적인 녹음 수단이었다.

1935년 AEG는 Fritz Pfleumer가 1928년 발명한 마그네틱 테잎의 기술에 근거하여 최초의 오픈릴식(reel-to-reel)의 테잎 녹음기를 “Magnetophon“이란 이름으로 – 독일에서는 Tonbandgerät 란 이름으로 – 출시한다. 하지만 비싼 가격과 어려운 작동 방법 때문에 1950년대 까지 대중화되지 못하고 주로 라디오 방송국과 레코딩 스튜디오 등에서만 사용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에 진공관이 트랜지스터 등으로 대체되는 등의 기술발전에 따라 가격이 크게 낮아져 대중화의 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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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kc60cassette“.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62년 필립스가 새로운 제품을 발명한다. 이 제품은 Compact Cassette이라는 트레이드마크를 달고 유럽과 미국에 각각 1963년과 1964년에 소개되었다. 필립스는 또한 1964년 11월 “캐리코더 150(Carry-Corder 150)”이란 이름의 녹음기/재생기를 미국에서 출시해 1966년까지 25만 개를 넘게 팔았다. 1968년까지 85개의 제조업체에서 2백4십만 개가 넘는 재생기를 팔았다. 초기에 그리 좋지 않았던 음질은 1970년대 8트랙 테잎의 보다 나아진 품질 등의 계기를 통해 계속 개선되어 갔다.

통상 ferric oxide라는 화합물을 재료로 하는 마그네틱 테잎으로 생산되었지만 좀더 발달된 기술이 사용된 “크롬” 테잎이나 “메탈” 테잎이 더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다. 테잎의 길이는 통상 재생시간의 분으로 표시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각 면이 23분의 길이로 되어 있는 총 46분의 재생시간을 가진 C46과 총 60분의 재생시간을 가진 C60이었다. 이외에도 90분과 120분, 그리고 그 이상의 재생시간을 가진 제품도 있었다. 테잎을 갈아 끼우는 수고를 없애는 “오토리버스” 기능도 도입되는 등 기술발전은 계속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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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manTPS-L2” by Original uploader was FPAtl at en.wikipedia Later versions were uploaded by Kafziel at en.wikipedia. – Originally from en.wikipedia; description page is/was here..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카셋테잎은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79년 출시된 Sony의 Walkman과 같은 소지 가능한 포켓 레코더의 등장과 고음질의 재생기의 등장이 활용도를 획기적으로 높였기 때문이다. 카셋테잎 자체보다 그리 크지도 않은 혁신적인 제품이었던 Walkman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며 LP의 대체물이 되어가는 카셋테잎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소지가 간편한 크기와 녹음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철의 장막 너머로 락음악을 전하기도 하는 등 개발도상국에서 특히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테잎은 소위 녹음을 위한 “공(blank)테잎”으로 팔렸다. 소비자는 이 테잎을 이용해 자신이나 친구의 레코드에서 또는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오디오를 녹음할 수 있었다. 당시 음악업계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집에서 테잎으로 녹음하는 것은 음악을 죽이는 짓이다(Home Taping Is Killing Music)”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녹음할 권리를 주장했다.1 그레이트풀데드와 같은 반골적 기질의 밴드는 그들의 공연을 녹음해 팔라고 독려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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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taping is killing music” by Seems that the original poster found it here and cropped..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이러한 논란은 법적분쟁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1988년 “CBS 대 암스트래드” 케이스가 있었다. 당시 암스트래드는 고속의 두 개가 붙어있는 카셋데크와 같은 기기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 기기를 이용해 소비자는 한 테잎의 내용물을 손쉽게 다른 테잎에 복사할 수 있었다. 명백히 음악업계가 반대하는 녹음을 용이하게 하는 상거래였지만 결과는 암스트래드의 승리였다. 그 기기를 이용해 소비자가 그런 행위를 할 개연성이 높음에도 제조업체의 책임은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전체적인 팝시장과 더불어 싱글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카셋테잎의 존재는 소중한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음반 가게에서는 소비자가 녹음해서 듣고 싶은 노래를 적은 리스트를 가져오면 웬만한 LP가격의 절반 정도의 가격에 그 노래를 녹음한 카셋테잎을 팔았다. 거리에선 불법으로 녹음된 테잎을 파는 소위 “구루마 테잎”이 염가에 판매되었다. 주머니 사정이 신통치 않았던 학생 팬들은 이런 테잎을 이용했고 후에 CD에서 노래를 테잎에 편집 녹음해 친구에게 선물하는 이벤트도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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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track inside” by User Isis on en.wikipedia – Originally from en.wikipedia; description page is (was) here * 20:50, 21 October 2002 [[:en:User:Isis|Isis]] 198×276 (12,479 bytes) <span class=”comment”>(photo of inside of 8-track tape cartridge)</span>.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서구에서 테잎의 인기는 1980년대가 저물면서 빠르게 쇠퇴했다. 대체재는 CD였다. 2001년 전체적으로 팔리는 음악 매체 중에 테잎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4%였다. 이제 대부분의 메이저 레이블은 테잎의 형태로 음악을 생산해내지 않는다. 하지만 향수는 남는 법. Sonic Youth의 Thurston Moore는 2009년 “나는 오직 카셋테잎으로만 음악을 듣는다”고 선언했다. 몇몇 인디 음악가들은 여전히 테잎으로 음악을 녹음하고 판매한다. 하이파이에 대한 일종의 반항의 형태로 로우파이(Low-Fi) 장르도 발전했다.

1990년대 DAT나 MiniDisc와 같은 테잎을 대체하는 디지털 녹음용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카셋테잎의 기술개발은 중단되었다. 카셋테잎 돌풍의 주역 필립스는 1992년 DCC(Digital Compact Cassette)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런 후계자들은 카셋테잎이 누리던 인기를 얻지 못했다. 2011년 개정판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는 콘사이스 버전에서 “cassette tape”이란 단어를 삭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전에 새로운 400개의 단어를 대체하기 위해 구시대의 단어를 삭제한 것이다.

  1. 이러한 선동은 mp3 시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RIAA는 “mp3 불법 다운로드는 공산주의를 다운로드하는 것과 같다”며 뒤에 붉은 얼굴의 레닌이 서있는 포스터까지 만들기도 했다.

LP와 EP

LP란 “Long Play”의 약자로 1분에 33과 1⁄3 회전을 하는, 미세한 홈이 파인 비닐 레코드를 의미한다. 이는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1948년 도입하고 이후 전체 레코드 산업에서 표준으로 자리 잡은 아날로그 사운드 전달매체인 그램폰(gramophone) 축음기를 위한 포맷이다.

LP가 처음 도입될 당시는 거칠어서 소리가 더 시끄러운 셸락 화합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흠도 더 컸다. 이에 따라 회전속도도 78rpm이었고 12인치 레코드의 경에도 연주시간이 한 면당 5분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던 것이 기술발전으로 미세하게 흠을 팔 수 있게 되면서 연주시간은 20분 이상으로 늘어났다.

연주시간이 늘면서 LP는 특히 클래식 음악을 녹음하기에 적합했다. 클래식 음반은 긴 연주시간 때문에 여러 장에 담은 서적 형태의 세트로 팔던 시절에 “레코드 앨범”이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앨범”이란 표현이 일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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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 de vinilo – A todo color” by BanfieldOwn wor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한편 팝뮤직도 LP를 반겼는데 개별 싱글 레코드를 10개 정도 모아 한 장의 LP에 담아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콘셉트 앨범”을 지향하는 락밴드나1, 기타 앨범 한 장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싶은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등은 이러한 개념을 선호했다.

예를 들어 80년대에 Bruce Springsteen은 그의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인 Born In The U.S.A.를 앨범 Nebraska를 제작하는 와중에 작곡했지만 앨범의 콘셉트와 다르다는 이유로 Nebraska에 담지 않는다. 앨범 전체의 통일성은 LP에 중요한 것이 통념이 되었다.

한편 EP라는 명칭의 레코드도 있는데 이는 Extended Play의 약자다. 이 레코드는 싱글보다는 많은 노래를 담고 있지만 LP 또는 full studio album이라 하기는 부족한 형식이다. 이 형식은 특히 예산이 풍부하지 않아 full-length album을 낼 여력이 없는 펑크/인디밴드들이 선호하였다.23

  1. 이러한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앨범 중 하나는 The Beatles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다
  2. 영국의 공식 차트 회사는 EP를 25분의 길이 혹은 4개의 트랙이 담긴 앨범으로 정의했다
  3. Astrud의 Superman은 수록곡이 여섯 곡인 EP형식이다.

Single

우리의 음반 시장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싱글”일 것이다. 정식 앨범(LP)의 수록곡 중 인기를 얻을만한 곡을 따로 뽑아 싱글로 발매하는 것이 일반적인 서구 음반시장과 달리 우리나라는 음반 시장의 협소함 등으로 인해 싱글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음반 시장이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던 시절 싱글 음반 시장은 음악 산업의 발달에 많은 기여를 했다. 싱글은 일반적으로 앨범 수록곡 중 한두 곡을 골라 A면에 담고 B면에는 미발표곡이나 리믹스 버전 등을 담는 형식이었다.

싱글의 역사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시기는 대략 상업적 음악 시장에서 축음기 음반(gramophone record)원통형 축음기(phonograph cylinders)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초기 축음기의 디스크는 다양한 속도와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1910년 쯤 78 rpm의 10인치(25cm) 셸락 음반 형식이 거의 표준이 되었다.


1920년대 에디슨 레코드사의 싱글

음반의 표준이 일반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은 자신의 곡을 이러한 새로운 형식에 부합하도록 만들었다. 마이크로그루브 녹음과 개선된 마스터링 기술이 가능해진 1960년대에는 곡의 길이가 라디오 방송에 친화적인 3분 내외인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던 중에 Bob Dylan의 “Like a Rolling Stone“이 레코드 업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CBS는 6분 13초에 달하는 이 곡을 쪼개서 양면에 담으려고 했는데, Dylan과 팬들은 한 면에 그 곡을 담고 라디오 방송국도 이 곡의 전 곡을 방송할 것을 요구했다. 이 곡이 성공 덕으로 음악 산업에서 곡의 길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긴 셈이다.

현대에 들어 싱글은 7인치(18cm), 10인치(25cm), 12인치(30cm) 비닐 레코드 – 대부분 45 rpm의 속도인 -, 10인치(25cm) 셀락 디스크(78rpm), 카셋, 3.5인치 CD 싱글 등 다양한 형태로 발매되었다. 드물게 DVD와 LD의 형태로도 싱글이 발매되었다. 이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끌었던 포맷은 45rpm의 7인치 싱글이었다. 이 형식의 레코드는 1949년 RCA가 처음 도입했다. 양면 녹음이 일반화되고 스테레오 녹음이 가능해지면서 1970년대에 45rpm 레코드가 본격 생산되었다.


45rpm 레코드

12인치 싱글은 1970년대부터 디스코텍의 DJ들에게 인기를 얻었는데 보다 긴 연주시간 덕분에 다양한 익스텐디드 댄스 리믹스를 담는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싱글 시장이 거의 형성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1980년대부터 12인치 싱글이 청계천 음반 상가 등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는데 바로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디스코텍의 DJ들이 수요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최근 인기가 식긴 했지만 여전히 12인치 싱글은 댄쓰곡의 표준으로 간주되고 있다.

싱글 판매는 서구 대부분의 나라에서 탑40의 형식으로 선정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차트 진입이 가능하려면 레코드 회사는 차트를 만드는 회사가 요구하는 형식에 맞게 음반을 제작해야 했다. 싱글은 특히 신생 뮤지션들의 가장 어린 팬들에게 파고들기 좋은 소재였다. 그들은 지불여력이 적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값이 싼 싱글을 구입해서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싱글의 전성기는 아마도 락뮤직의 초기 시절 45rpm의 싱글이 융성했던 1950~60년대 일 것이다. 60년대 중반쯤 되자 뮤지션들은 통일된 주제의 곡들이 담긴 정식 앨범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The Beatles이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처럼 말이다. 그리고 CD가 일반화되고 디지털 다운로드가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며 사실상 싱글 시장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이에 따라 차트를 만드는 회사도 싱글 차트 진입의 기준을 바꿔야만 했다.

Wikipedia를 참고하여 작성

The Smiths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에 관해 당신이 모르는 20가지 사실

이 글에서 요약 발췌

The Smiths의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이 30년 전인 1984년 2월 20일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탄생에는 부족한 예산 등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오늘 날에는 완벽한 클래식으로 전 세계 락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글에서 당신이 모를 수도 있는 이 앨범에 대한 20가지 트리비아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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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miths The Smiths” by http://www.amazon.co.uk/Smiths/dp/B00002496V/ref=sr_1_1?ie=UTF8&s=music&qid=1273132134&sr=8-1. Licensed under Wikipedia.

1. 커버의 사진은 Andy Warhol이 프로듀스한 1968년 영화 Flesh의 스틸 중에서 배우 Joe Dallesandro의 모습이다.

2. 밴드는 처음에는 The Teardrop Explodes의 前기타리스트와 함께 Troy Tate라는 제목의 앨범을 녹음했었다. Morrissey가 “우리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바르게 해냈고 보면 알 것이다.”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John Porter와 함께 전체를 다시 녹음해야 했다.

3. 나중에 Mike & The Mechanics에 합류한 Paul Carrack이 이 앨범의 키보드를 치고 있다.

4. Morrissey는 가사 때문에 What Difference Does It Make?이 가장 싫어하는 스미쓰의 곡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안이하고 다소 쑥스러운…”

5. Suffer Little Children에서 들리는 여성의 웃음소리는 Pretty Girls Make Graves에서 “Oh really?”라고 말하는 부분은 몇몇 쏘스에 따르면 녹음 당시 Morrissey의 여자친구였던 Annalisa Jablonska 의 것이라 한다.

6. 많은 이들이 왜 The Smiths가 전설적인 맨체스터의 인디 레이블 Factory에서 발매되지 않았는지 의아하는데, 엄청난 팬이이자 Morrissey의 친구이기도 했던 Tony Wilson에 따르면 당시 레이블이 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Morrissey에 따르면 Wilson은 Johnny Marr의 연주에 대해 “이 모든 Byrds의 곡들은 이미 연주되고 또 연주되었었다.”라고 했다고.(비웃는 톤인듯? – 역주)

7. Reel Around The Fountain의 멜로디에 대해 Johnny Marr는 “난 R&B 곡 Handy Man의 Jimmy Jones 스타일로 연주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8. The Smiths의 작업 타이틀은 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이었다.

9. John Porter와 함께 한 맨체스터의 플루토 스튜디오에서의 첫 녹음은 단지 6일이었다. 이 기간에 대부분의 녹음을 끝낸다. 그러나 Rough Trade가 그 뒤에 Sire 레코드사와 배급에 관한 계약을 해지한다. 이는 사운드에 살을 더 붙일 수 있는 예산이 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0. 총 녹음비용은 6,000파운드가 소요됐다.

11. The Smiths는 Thompson Twins를 누르며 영국 차트 2위까지 오른다. Rough Trade의 한 쏘스에 따르면 “1위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당시 카세트를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12. 오리지널 앨범에서 싱글로 발매된 것은 겨우 두 곡이다.: What Difference Does It Make? (정규앨범 발매 후) 와 Hand In Glove (정규앨범 발매 전).

13. Morrissey는 Rough Trade의 사장 Geoff Travis과 John Porter에게 투자한 예산 때문에 앨범이 “맘에 들만큼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어쨌든 발매했다.

14. Hand In Glove의 가사는 극작가 Shelagh Delaney와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Leonard Cohen에 대한 언급이 있다.

15. Suffer Little Children는 라이브에서 딱 한번 연주됐다. 1982년 10월 4일 맨체스터의 The Ritz에서 열린 The Smiths의 생애 최초의 공연에서였다.

16. 앨범의 두 엔지니어 중 하나였던 Neill King은 지금은 북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17. 최초의 트랙리스트에는 The Smiths의 발매 전에 싱글로 발매됐던 This Charming Man이 없었다. 이 노래는 나중에 영국의 카세트 버전에 보너스트랙으로 들어갔고, 미국 발매 시에는 모든 앨범에 들어갔다.

18. 앨범의 Hand In Glove 버전은 그들의 데뷔 싱글의 리믹스 버전인데, 밴드 스스로 Stockport에 있는 스트로베리스튜디오에서 250파운드를 들여 프로듀스한 작품이다.

19. What Difference Does It Make?는 프로모션 비디오없이 발매되었는데, Morrissey가 비디오는 “매우 빨리 소멸”하게 될 어떠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20. Morrissey는 Hand In Glove에서의 “우리가 비록 넝마 뒤에 숨겨져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무엇인가다.”라는 2행시가 가장 좋아하는 스미쓰의 가사라고 말했다.

십 년 전에 했던 설문조사들 캡처 이미지들

이 사이트를 들르시는 분들 중 사이트의 역사가 10년도 넘었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이 있을까요? 처음에는 popi.com 이라는 도메인으로 사이트를 시작했죠.(누가 비싼 값 준다고 도메인을 팔았는데 알고 보니 포르노 사이트 운영자더군요 -_-;;) 당시에는 지금보다 댓글 호응도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설문조사를 하기도 했는데 오늘 우연히 이미지 폴더에서 이 오래된 이미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당시 했던 설문조사들의 캡처 이미지들인데 제로보드 형식이라서 좀 빈티나는군요. 🙂 질문은 캡처해놓지 않아서 어떤 질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이 가는 것들도 있네요. 각자 알아서들 판단해보시죠. 어떤 질문을 했기에 저런 대답들을 했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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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카셋테잎

옆집 할아버지가 우리 부부를 초대해서 며칠 전에 와인을 같이 마셨다. 집을 구경하다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의 소지품이라며 가질 거면 가지라고 해서 가져온 카셋테잎들. 따님 성격이 깔끔했는지 테잎들의 상태가 극히 깔끔했다. 그중에 재밌는 카셋테잎 몇 개의 이미지를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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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y Johnson과 Andy Bell의 대화

Twitter를 하다보면 팝스타들의 일상, 그것도 실시간의 일상을 알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재수가 좋으면 그들의 댓글도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는 팬레터에 대한 답장을 받은 기분이랄까? 여하튼 최근에 목격한 스타의 재밌는 트윗을 하나 소개한다.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프론트맨이었던 Holly Johnson이 Erasure의 싱어 Andy Bell에게 Debbie Harry에 대한 안부를 전하며 서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마치 그들의 파티에서의 사담을 엿듣는 기분이 들기도? 🙂

HollyJo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