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린 글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빌리 맥킨지(Billy Mackenzie)는 스코틀랜드의 포스트펑크/신스팝 밴드 The Associates의 보컬이었다. 이 밴드는 앨런 랜킨(Alan Rankine)과의 잠깐 동안의 듀오 경력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Billy Mackenzie의 원맨밴드로 활동하였는데 짧은 활동기간과 상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음악성으로 결코 적지 않은 족적을 남긴 뮤지션이다.
그들이 내놓은 총 4장의 스튜디오 앨범 중에서 가장 음악적으로나 – 그나마 상업적으로 – 많이 거론되는 앨범은 1982년 발표된 2집 Sulk다. 식물원을 연상시키는 어떤 무대장치에 기대어 앉아 있는 빌리와 앨런의 모습의 커버가 인상적인 이 앨범은 ‘부루퉁함’이라는 단순하고 짧은 앨범명과 달리 상당히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는 앨범이다. 경쾌한 신스 연주는 여느 상업적인 신스팝 밴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멜로디는 조이디비전 만큼이나 우울하고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이하게도 이 앨범은 첫 트랙과 마지막 트랙을 모두 신스팝 연주곡으로 배치되어 있다. 첫 곡 Arrogance Gave Him Up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 마치 마이애미바이스의 여느 에피소드의 거리 장면에서 등장할 것 같은 그런 경쾌한 – 트랙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경쾌한 신스 연주가 음습한 멜로디 및 가사와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두 번째 트랙 No에서부터다. 마치 비바람이 부는 것 같은 신스 연주가 몰아친 뒤 어두운 멜로디가 시작된다. 일단 가사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Tore my hair out from the roots
Planted them in someone’s garden
머리카락을 뿌리부터 뽑아냈어.
누군가의 정원에 심었어.
이런 가사를 시작으로 앨범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다양한 실험적인 사운드와 – 그렇지만 무척 아름다운 – 뜻 모를 가사가 난무하는 트랙으로 채워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Gloomy Sunday, Skipping, Club Country 등이 맘에 드는 트랙이다. 가사의 모호함에 대한 설명은 맥켄지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의 모호함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NME와의 인터뷰에서 맥켄지는 ‘Party Fears Two’는 많은 것에 대한 것일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투는 것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공산주의와 보수주의, 정당의 극단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정신분열증 환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출처]
물론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러한 모호함을 통해 신비주의를 조장하고 그들의 예술적 지위를 높이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The Associates의 경우에는 이런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더라도 수긍이 갈 정도로 뛰어난 성과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더더욱 오만할 자격을 갖췄다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뛰어남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앨런은 앨범이 발매된 직후 그룹을 떠났고 맥킨지는 홀로 The Associates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스튜디오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음악적 자산은 빠르게 소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