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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경험한 생각의 흐름

얼마 전에 수잔 손택이라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저명한 평론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우디 알렌의 초기작인 가짜 다큐멘터리 Zelig에서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이지적인 외모와 목소리로 짐짓 진지하게 우디 알렌의 엉터리 캐릭터를 분석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그래서 회사 도서실에서 가장 유명한 그의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를 빌려 아침 일찍 출근할 때마다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이 에세이 모음집에는 Jack Smith 감독의 기괴한 걸작 Flaming Creatures(1963)에 대한 옹호 글도 있다. 노골적인 섹스씬도 있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포르노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이 수잔 손택의 입장이다. 이 에세이에서 작가는 이 영화를 “팝아트의 엉성함, 방자함, 느슨함”이 담겨져 있어 “팝아트라는 경박한 이름으로 통하는 장르의 휼륭한 견본이 되는 작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수잔 손택은 “팝아트 운동이 지닌 한 가지 위대한 미덕은 뭔가 주제에 대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낡은 규범을 후려갈기는 방식에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에세이 모음집의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수잔 손택은 “예술가의 숭고한 중립성”을 방해하는 일체의 시도를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석은 “우리를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잔 손택의 팝아트에 대한 그러한 칭찬에 생각난 비디오가 있었다. 팝아트의 가장 유명한 전도사였던 앤디 워홀의 인터뷰다.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고 부른, 노골적인 反骨기질을 가진 앤디 워홀은 이 인터뷰에서 시종 일관 “I don’t know.” 등의 무성의한 답변으로 일관하는데, 수잔 손택이 말하는 “주제에 대해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낡은 규범”을 무성의하게 후려갈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생각난 이들이 이번에는 Curiosity Killed The Cat이라는 80년대 팝밴드였다. Misfit, Ordinary Day 등의 인기곡을 내놓았던, 그렇지만 단명한 이 밴드가 생각났던 이유는 앤디 워홀이 이들의 뮤직비디오 Misfit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밥 딜런의 비디오를 흉내낸 이 작품은 앤디 워홀이 감독했고 직접 출연도 한 작품이다. 그가 생전에 했던 작업들 중 가장 마지막 작업이라고도 한다.

이 노래를 즐기던 중 이번에는 사이몬 코웰(Simon Cowell)이 떠올랐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TV쇼 American Idol에서 독설을 내뱉는 냉정한 패널로 유명한 그는 사실 영국의 방송인이고 Curiosity Killed The Cat의 매니저이기도 했다. 문제는 일설에 따르면 그가 당시까지도 잘 나가던 Curiosity를 히트곡 리메이크에나 써먹으면서 더 발전할 기회를 막았다는 평가도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Curiosity의 비디오에 대한 유튜브에서의 댓글 속에서 발견했는데, 정확한 워딩은 찾지 못했다. 다만 인터넷을 검색하다 흥미롭게도 이 CD를 발견했다. The Best Of Simon Cowell 이란 제목에 사이먼의 얼굴이 전면에 박힌 이 CD에는 Curiosity를 비롯하여 그가 거느린 가수들의 곡이 들어가 있다. 뭔가 참 구린 기획의 CD란 생각은 든다. 가수의 사진이 아닌 사이먼의 사진이라니.

이게 오늘 아침 출근해서 근무 시작 전까지의 나의 생각의 흐름이었다. 우디 알렌, 수잔 손택, 앤디 워홀, Curiosity Killed The Cat, 사이먼 코웰. 한때 유행했다는 Six Degrees of Kevin Bacon 게임처럼 우디 알렌이 사이먼 코웰까지 도달한 셈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직접 구성해야 했다면 아마 우디 알렌이 아메리칸아이돌에 깜짝 출연하여 자신이 악성(樂聖)이라고 주장했어야 했을 것이다.

최근에 본 영화들 단상

밀양
홍상수의 영화 속 등장인물은 영화에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현실에서는 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반면, 이창동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영화에 나올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하지 않을 것 같은, 진짜 일상생활에서 할 것 같은 행동들을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박하사탕’, ‘시’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공력이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줄거리를 알고 봤음에도 주인공이 느끼는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특히 살인자뿐만 아니라 주변인물 모두가 보여주는 그 뻔뻔한 넓은 오지랖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특히 송강호가 전도연의 허락도 없이 피아노 교실에 가짜 상장을 못 박는 장면.

피아노
이 작품이 유명해진 이후에도 왠지 칙칙하다는 느낌 때문에 일부러 찾아보지 않다가 최근에야 보았다. 한마디로 멋진 영화. 세상과 피아노를 통해서만 대화를 나누는 여인과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감정은 집착이다. 피아노에 대한 집착, 땅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이 세 가지가 얽혀서 끔찍한 비극을 탄생시킨다. 마지막 장면은 만약 내가 연출했더라면 조금 다르게 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 장면.

The Ruling Class
교수형 매듭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노는 것을 즐기는 한 괴짜 부자가 실수로 정말 매듭에 매달려 죽고 만다. 이후 저택에 돌아온 그의 후계자는 자신을 예수라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의 Jack.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 찬 흥미로운 작품. Jack은 어쨌든 자신이 예수가 아니라 Jack 이란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마저도 또 하나의 과대망상이라는 점이 反轉.


Death on The Nile
최근에 원작소설을 읽고 있어서 다시 꺼내본 영화. 아가사 크리스티 작품 특유의 고풍스럽고 긴장감 넘치는 세팅이 매력적으로 묘사된 작품. 다른 에큘 포와르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캐릭터에 독특하고 인상적인 해석을 부여한 피터 유스티노프와 수많은 명배우들이 등장하는 것도 매력적이고, 이집트의 찬란한 유물들도 즐거운 눈요깃거리. 범인을 알아도 재밌다.

Zelig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종, 직업, 행동들을 마치 카멜레온처럼 흡수하여 동화된다는, 독특한 정신병에 시달리는 레나드 젤릭이라는 인물에 관한 가짜 다큐멘터리. 언제나 그렇듯 우디 알렌 특유의 유머코드가 곳곳에 촘촘하게 박혀 있고 수잔 손택과 같은 진지한 학자들이 인터뷰를 통해 천연덕스럽게 젤릭이란 인물의 성격을 분석한다. 그런데 젤릭이란 인물에 열광하는 대중의 이중적인 태도도 어떻게 보면 젤릭이 겪었던 그 정신병 증상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긴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도 비슷한 증상이 많다.

George Harrison :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 물론 내 옆의 고등학생은 보는 내내 몸을 배배 꼬았지만 – 조지 해리슨에 관한 다큐멘터리. 메이저 중의 메이저, 비틀즈에서 약간은 마이너인 조지 해리슨이란 독특한 캐릭터에 주목한 마틴 스콜세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선택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지 해리슨이 비틀즈의 음악과 멤버들의 삶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각인을 남긴 이었음을 이 작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느 음악프로에 영화전문 기자가 나와서 에릭 클랩톤과 조지 해리슨, 그리고 그의 아내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 다큐를 볼 가치가 있다고 했다는데, 뭐 딴에는 틀린 말도 아니다. 그 사건 역시 조지의 삶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었으므로. 영화를 본 후 에릭 클랩톤의 Layla를 들어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Billion Dollar Brain
해리 팔머 시리즈에 대해선 예전에 한번 종합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어쨌든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는데 볼수록 매력적인 작품. 당시 어떻게 이런 삐딱한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제작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듯. 1967년에 제작된 스파이물인데 주적이 반공(反共)주의자 자본가다!

Memorias del subdesarollo(저개발의 기억)
쿠바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으면서도 ‘관료주의자의 죽음’ 등을 통해 사회주의에서 만연한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등 반골기질을 잃지 않았던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의 대표작. 혁명 이후 그의 지인들이 모두 쿠바를 떠나는 와중에도 하바나에 남은 부르주아 세르지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쿠바를 그렸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정치와 성(性)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긴장감과 무료함을 다뤘다는 점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과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굳이 그러한 정치적인 함의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매력적인 플롯이다. 정치와 사랑에 희망은 있을까? 그건 영화를 본 사람이 답해야 할 몫인 것 같다.

Midnight in Paris
입소문을 타고 꾸준하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우디 알렌 감독작. 소설 쓰기를 꿈꾸는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함께 들른 파리에서 시간여행을 통해 헤밍웨이나 스콧 핏츠제랄드와 같은 인물들을 만난다는, 어찌 보면 좀 식상한 설정. 하지만 그 식상함이 우디 알렌 식의 프리즘을 거쳐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도는 보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우디 알렌의 과거 작품 중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 번’과 ‘라디오데이즈’를 합쳐놓은 듯한 느낌.

Cléo de 5 à 7(다섯 시부터 일곱 시까지의 클레오)
건강검진의 결과를 기다리는 여가수 클레오의 감정 기복을 실시간 진행에 따라 보여주는 영화. 이 흥미로운 시도는 매우 성공적이다. 인간이란 찰나에도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동물인데 두 시간이라면 얼마나 더 많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을 것인가? 불행한 것 같고, 행복한 것 같고,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미워하는 것 같고… 이런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OOO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