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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가요제 & 대학가요제

예전에 존재했던 통신서비스였던 유니텔에서 퍼온 글들을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제 목 :[잡담] 강변가요제 & 대학가요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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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일 :01/01/21 01:32:58 수 정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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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가요계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이죠. 대학가요제는 1977년부터인가 시작되었는데 80년대를 관통하면서 가창력이 출중한 인기스타들을 배출하였고, 강변가요제 역시 80년대 초반부터 대학가요제와 쌍벽을 이루며 신인 등용문의 역을 톡톡히 수행했었습니다. 지금은 이 두 가요제가 열리는지조차 잘 모를 정도로
그 인기도가 많이 떨어져 있는데 80년대 이 두가요제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었죠.

지금이야 여기 저기 기획사에서 공개 오디션을 통해 10대 청소년들도 맘만 먹으면 혹은 재능이 인정되면 가수로서의 길이 열려있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일반인이 가수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대학재학생’이라는 참가제한과 입상자들에게 쏟아지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일종의 유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수가 되고싶어하던 청소년들은 ‘꼭 대학에 들어
가서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출전하겠다’는 꿈을 안고 공부하는 경우도 꽤나 많았습니다. 대학생들도 대학 4년 재학기간동안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연달아 출전, 8번 참가신청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기지만 암튼 그 때 그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학벌 위주의 가요제다’, ‘의식없는 대학생들의 잔치’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대학에 가고자하는 일종의 동기가 된다’는 교육적인 옹호론자도 있었고, 이 가요제에 출전한 가수들이 모두 어느 정도 실력을 연마해 왔던 예비가수들이라 가요계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주고 있다는 의견까지 비교적 긍정적인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이 두 가요제로 인해 MBC가 신인등용이라는 측면에서는 KBS를 80년대 내내 압도했었죠. KBS가 나중에 ‘대학가요축제’니 ‘청소년 가요제’ 등을 개최하여 경쟁을 시도했으나 초기에만 반짝하고 모두 사라졌었죠.

암튼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는 그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과 유행을 조금은 반영하면서 많은 히트곡들과 스타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지금은 잊혀진 가수도 있고,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이 두 가요제를 통해 등장한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이 두가요제를 통해 배출되었던 히트곡들을 떠올려볼까 합니다.

1. 도시의 그림자 – “이 어둠의 이 슬픔” (1986년 강변가요제 금상)
개인적으로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히트곡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곡이에요. 혼성 3인조로 구성된 이들은 특히나 메인 보컬을 맡고 있는 여성 멤버의 가창력이 아주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었죠. 김화란이라는 이 여성보컬은 1년뒤 솔로로 독립하여 “타인의 거리”(“타인의 계절”인지 헷갈리네요..)라는 출중한 가창력을 뽐낸 곡을 발표 잠시 인기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가사도 멋졌고, 늘어지듯 끊어지는 멜로디가 너무 좋은 곡.

2. 이상우 – “슬픈 그림 같은 사랑” (1988년 강변가요제 금상)
아마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남자분들이 노래방 가시면 예전에 이 노래 많이 부르셨을 거에요. 이 곡과 비슷한 풍으로 노래방에서 사랑받는 곡이 몇 곡 있죠. 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 김민우의 “사랑일뿐야”,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등등. 저의 단골 레파토리..^^1988년 이상은이라는 대형 스타를 탄생시킨 해로 기억되는 이 때 탄탄한 가창력을 지닌 이상우도 아깝게 금상에 그치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는데 이상은의 “담다디”만큼이나 이 곡도 많은 사랑을 받았었죠. 제가 보기엔 ‘담다디’보다 일시적인 인기에서는 뒤졌지만 오히려 훨씬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던 거 같아요. 이상우는 현재 탤런트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90년대 초반까지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등의 히트곡들을 터뜨리며 많은 가수로서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3. 박영미 – “이젠 모두 잊고 싶어요” (1989년 강변가요제 대상)
첨에 이 곡을 듣고는 단번에 ‘대상’탈 것이라고 직감했던 노래였습니다. 우선 가창력을 많이 참작하는 가요제에 박영미의 보컬을 정말 딱이었고, 노래풍 또한 가요제에 입상하기 딱 좋은 대형 스케일의 발라드곡이었기 때문에…이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은 박영미를 ‘한국의 휘트니 휴스턴’으로 치켜세웠었죠. 그녀 자신도 대상 수상이후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가진 인터뷰에서 가요제 출전 이전에 학교에서도 ‘한국의 휘트니 휴스턴’으로 통했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휘트니 휴스턴이라고 여러 번 밝히기도 하였습니다(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여성참가자들의 90% 이상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휘트니 휴스턴을 꼽았을 정도라는 군요). 이선희와 이상은을 잇는 대형가수로서 손색이 없었는데 아쉽게도 많은 인기를 얻지는 못해서 아쉬웠던 가수. 박영미의 또 다른 히트곡 “꿈에서”도 아주 괜찮은 곡이었는데…

4. 조정희 – “참새와 허수아비” (1982년 대학가요제 대상)
아마 제가 대학가요제를 첨 봤던 게 이때부터인 것 같아요. 이 곡을 듣고는 대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은상이상을 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상을 받더라구요. 청바지에 청남방을 입고 나온 그녀는 자신이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이 곡을 불러서 대학가요제의 분위기를 더욱 살려주었는데 구슬픈 멜로디가 쉽게 사랑받을 만한 소지가 다분했었습니다. 조정희의 지적인 분위기도 역시나 멋졌구요.

5. 우순실 – “잃어버린 우산” (1982년 대학가요제 동상)
대학가요제 입상곡 중에서 대상을 타지는 못했어도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곡들이 꽤 있죠. 이 곡도 그런 곡 중의 하나. 이 때 전 이 곡이 대상을 받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동상에 그치더라구요. ‘안개비가 하얗게~~”로 시작하는 이 곡은 애절한 우순실의 보컬이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나중에 우순실은 80년대 중반 “그건 너”로 유명한 이장희에게 곡을 받아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제목이 “꼬깃꼬깃해진 편지”…저 첨에 이 제목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제 목 :[잡담] 강변가요제 & 대학가요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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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일 :01/01/21 02:12:57 수 정 일 :01/01/24 1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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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학래 & ? – “내가” (1979년 대학가요제 대상)
이성미와 스캔들을 일으키며 이성미가 자살시도하게 만들어 80년대 후반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던 김학래 아자씨도 바로 대학가요제 출신. 이 때 대상받을 때 김학래랑 이름 기억 안나는 한 분이 같이 듀오로 출전하였는데 이름이 도통 기억 안나네요. 전형적인 캠퍼스송 분위기의 곡이었죠. ‘내가 말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에 돌이 되겠소’ 라는 가사 기억하시는 분들 많을 거에요. 김학래는 대상 수상이후 주춤하다가 1980년대 중반 “해야해야”라는 곡으로 빅히트를 기록, 가요톱텐에서 5주 1위의 영예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었는데 난데없이 이성미(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 개그우먼 아줌마)와의 스캔들(이성미와 은기라는 아이까지 낳았던 김학래가 변심)로 다시 인기 추락…물론 히트곡이 없었던 것이 큰 이유였겠지만…여담이지만 김학래의 “해야해야”를 생각하면 Olivia Mewton-John의 “Silvery Rain”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7. 높은음자리 – “바다에 누워” (1985년 대학가요제 대상)
대학가요제가 탄생시킨 빅히트곡 중의 하나.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박력있는 리듬과 쉬운 멜로디때문에 급속도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위에 김학래의 스캔들 얘기를 하다보니 바로 이 듀오가 생각나네요. 가요제에 출전할 때는 물론이고 대상 수상이후에도 이들은 사촌지간이라고 둘의 사이를 밝혔었는데 나중에 연인사이임이 들통났었죠.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 둘의 다이내믹한 보컬솜씨가 인상적이었던 “새벽새”라는 히트곡도 배출하였지만 스캔들 이후 역시 잠잠.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이 곡의 가사가 모 시인의 시를 베꼈다는 것이 들통났었는데 MBC 측에서 자신들의 가요제 권위를 생각해서인지 ‘가사는 괜찮다’는 식의 의사를 표명해서 어영부영 넘어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이 곡이 빅히트를 친 후에 터졌던 일들이라 이 곡의 히트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었죠…’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8. 마음과 마음 – “그대 먼 곳에”(제목이 잘 기억 안나요, 1985년 강변가요제 대상)
이 곡도 대상 수상이후 참 말이 많았습니다. 가사 표절에서부터 곡 표절얘기까지…정말 착하게 생긴 남자멤버와 조금 퉁퉁한 김복희라는 여성멤버로 구성된 이 듀오는 고운 음색의 남자보컬과 허스키한 여성보컬의 조화로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지만 대상곡이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아서인지 그 이후로 활동이 없었죠. 김복희가 솔로로 나섰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별 반응이 없었고…’아~~~ 그대는 먼 곳에 있나요..’라는 김복희의 애절한 허스키 창법과 편안한 멜로디 진행으로 역시 큰 인기를 얻었던 곡입니다. 당시 ‘가슴앓이’, ‘갯바위’ 등의 히트곡으로 인기를 얻은 한마음, 높은음자리와 함께 혼성듀오 붐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지만 이들은 아마도 가요제 출전이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9. 유미리 – “젊음의 노트” (1986년 강변가요제 대상)
유미리가 이 곡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유미리는 이선희 이후 강변가요제가 낳은 최고의 가창력파 가수로 손꼽혔었습니다. 이선희보다 훨씬 매끄러운 창법을 선보인다고 해서 더 후한점수를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암튼 이 곡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했죠. 이 곡은 시원스레 내지르는 유미리의 보컬이 역시나 매력이었던 곡.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리 둘 사랑의 이야기’..아마 유미리가 미국에서 살다 온 교포학생 신분으로 가요제에 출전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이후에 ‘첫인상’이라는 곡이 소폭의 히트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곤 ‘젊음의 노트’만큼의 대형 히트곡을 발표하지
못했었죠. 아까운 가수 한 명 잃어버린 셈.

10. 티삼스 – “매일매일 기다려” (1987년 강변가요제 동상)
이 곡은 아직까지 노래방 애청곡 순위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히트곡이죠. 록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1980년대도 그랬지만 이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요.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록음악이 음반시장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서 우리나라의 록음악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그 판매량이 미미) 현실에서 그들의 출현은 무척이나 신선하고 독창적이었습니다. 강한 록사운드도 훌륭했고, 고음역을 구사하는 보컬,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멜로디 등 인기요소들을 적절히 가지고 있었던 곡이었습니다. 티삼스도 단발히트로 끝나긴 했지만… 티삼스는 티자, 삼각자, 스케일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그룹 이름. 발표당시 남자 청소년들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던 곡. 멋졌죠…^^

제 목 :[잡담] 강변가요제 & 대학가요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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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일 :01/01/21 02:47:59 수 정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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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선희 – “J에게” (1984년 강변가요제 대상)
누가 뭐래도 강변가요제가 탄생시킨 최고의 스타를 꼽으라면 단연 써니 누나이겠죠.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강변가요제 입상곡들 가운데서도단연 이 곡은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곡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때 이선희 개인자격으로 출전한게 아니라 그룹의 일원으로 출전했었던 거 같은데 그 그룹 이름은 기억이 안나네요. 이선희는 등장하자마자 당대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의 탄생이라는 극찬을 들으며 화려하게 활동을 시작했는데 대상 수상 직후 갑작스럽게 발표한 곡들 가운데 표절작품이 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이후 연이은 히트곡을 발표하여 1980년대 중반 최고 인기 여자가수를 차지하게 되었죠. “J 에게”는 초등학생까지 곡을 부르고 다닐 정도로 폭 넓은 지지를 받았던 곡이었는데 이 곡에 등장하는 J가 누구냐는 것으로 다시 한번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면….’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 “영”, “어둠은 걷히고”, “알고 싶어요”,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 “나 항상 그대를” 등도 모두 추억의 옛가요가 되었네요…작곡가이자 매니저였던 윤희중과 결혼하여 조금 놀래기도 했는데 그와 이혼, 이혼 후 남편 자살 등 그녀가 이토록 굴곡많은 삶을 살아갈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12. 유열 –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1986년 대학가요제 대상)
80년대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대상 수상자들을 살펴보면 여성 솔로가수들이 꽤나 많이 발견됩니다. 그에 비해 남성 솔로가수들이 대상을 차지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죠. 그래서 유열의 대상 수상은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유열은 아주 풍성한 성량의 보컬을 선보여 기성가수들에 못지 않다는 평을 들었는데 역시나 가창력이 출중한 가수이다보니 이후에도 여러 곡의 히트곡을 내며 롱런한 가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별이래”, “화려한 날은 가고”, “가을비” 등의 히트곡들을 발표하며 지금까지 분주히 활동하고 있기도… 신효범과의 열애설이 종종 발표되기도…^^

13. 이정석 – “첫 눈이 온다구요” (1986년 대학가요제 금상)
유열만큼이나 출중한 보컬실력을 가지고 있던 가수가 1986년 대학가요제를 통해 등장했었습니다. 바로 이정석. 이정석은 비록 가요제에서는 유열에게 대상을 넘겨주었지만 가요제 이후 인기면에서는 유열을 앞섰었죠. 그의 깔끔한 외모가 한 몫하기도…^^..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를 통해 대상이나 금상 등 큰 상을 받고 가요계에 입문한 가수들이 대부분 가요제 참가곡 이상의 히트곡들을 발표하지 못했던 일들도 많았는데 이정석은 가요제 참가곡보다 훨씬 빅히트를 기록한 곡을 1980년대 후반 발표하게 됩니다. 그 곡은 1980년대 후반 최고의 빅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바로 ‘사랑하기에’…이 곡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에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14. 박선주 – “귀로” (1989년 강변가요제 은상)
박선주는 대중적인 인기면에서는 다른 가요제 출신 가수들보다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아주 보물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성가수들이 작곡에 참여하는 예가 외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인데 1980년대만 하더라도 여성 싱어 송 라이터를 발견하는 것이 더 쉽지는 않았죠. 박선주는 가요제 수상 이후 작곡 공부에 몰두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자신의 앨범에 실어 발표하는 재능을 선보이며 여성 가수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때 본선에서 박영미라는 화려한 가창력의 소유자 때문에 박선주의 가창력이 조금 빛을 잃었던게 사실이지만 박선주는 자신의 솔로앨범을 발표하면서 박영미 못지 않은 넓은 음역의 보컬을 선보여 보컬실력을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윤종신과 함께 부른 “우리 이렇게 스쳐보내면”이나 박선주의 솔로곡 “너”라는 곡을 꼭 들어보시길…). 대상을 놓쳤지만 이 곡 “귀로”는 그 해 강변가요제가 배출한 최고의 히트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사랑한단 말은 못해도 안녕이란 말은 해야지~~~~’…박선주 요새 왜 뜸한지 모르겠네요…아끼는 가수인데…

15. 무한궤도 – “그대에게”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
이 곡과 이 곡을 노래한 무한궤도라는 그룹이 가요제 이후 대단한 관심이 되었었죠. 그룹 멤버들 모두 일류대학의 재원들이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고, 자신들의 소유인 고가의 악기들을 동원, 자신들이 직접 연주하며 노래까지 해서 많은 화제를 모았었습니다. 이들이 대상을 수상하면서 이들에 대한 신상명세가 공개되었는데 여기에는 재벌그룹의 총수 아들까지 있어서 오랫동안 입에 오르내리기도…한마디로 있는 집 자식들의 곡…^^…또 하나 신해철이라는 아티스트를 탄생시킨 그룹이기도 하고 015B라는 그룹의 전신이었다고 해도 괜찮을 듯 싶네요. 달라진 대학가요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곡. 전 이 곡이 대상곡으로 정해질 때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는데 제 의견과는 상관없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더라구요. 아티스트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노총각 신해철을 탄생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아야 하겠지만 암튼 전 이 곡은 별로…^^

제 목 :[잡담] 강변가요제 & 대학가요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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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시 일 :01/01/24 15:57:34 수 정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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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상은 – “담다디” (1988년 강변가요제 대상)

강변가요제를 얘기할 때 이상은과 담다디를 빼놓을 수 없겠죠. 전 이 때 시상식을 거의 뒷 부분-이상우와 이상은이 대상후보에 나란히 나왔던 모습-만 봤었거든요. 그래서 무대에 오른 이상은과 이상우를 보고 둘 다 남자가수구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쎄 이상은이 여자가수더라구요. 얼마나 놀랐는지…껑충한 키에 짧은 머리 스타일, 거기에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까지…암튼 시상식 중간에는 담다디라는 곡을 들어보질 않아서 그 반응을 몰랐었는데 이상은이 대상으로 불리자 그 환호성이 대단하더군요. 앵콜송으로 이 곡을 부를 때 전 담다디를 처음 들어봤는데 쉬운 멜로디에 이상은 특유의 춤(몸짓에 가깝지만…^^)이 아주 인상적이라 뭐 인기 끌기에는 충분할 것 같더라구요. 암튼 이 곡 대상받고 나서 MBC에서 팍팍 밀어주고, 중성적인 매력 때문인지 단기간에 최고의 인기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인기를 끌면서 솔로데뷔 앨범 제작이 아주 초스피드로 이루어졌었는데 이 때 나온 곡이 강인원에게서 받은 곡들이 많았었죠. ‘사랑해 사랑해’, ‘Happy Birthday’ 같은 곡이 솔로 데뷔작에 실리면서 인기를 얻었었고, 뒤에 ‘사랑할거야’로 다시한번 인기를 얻었지만 담다디 열풍만큼은 아니었죠. 근데 나중에 ‘사랑할거야’가 표절곡으로 밝혀지면서 이상은은 상업적인 가요계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었습니다. 미국, 일본 등지에서 전위예술가 활동을 하면서 앨범도 간간히 발표했었는데 예전만큼 주목을 받진 못했죠. 이상은은 데뷔이후 자신의 음악활동이 자신의 주관적인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기획사의 상술에만 놀아났다는 것을 깨닫고 아티스트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곡들을 직접 작곡해서 앨범에 싣기 시작했고, ‘언젠가는’부터 그 새로운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요새는 이상은이 더욱 신비로워진 아티스트로 기억되고 있고, 이상은이라는 이름보다는 리체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기획사의 농간에 놀아나는 요즘 가수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해요.

17. 박미경 – “민들레 홀씨되어” (1985년 강변가요제 장려상)

박미경은 지금껏 언급한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 중에서 현재까지도 가수로서 그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있죠. 얼마전에도 ‘벌’이라는 무지막지한 곡을 발표하고 활발히 활동중인 것은 다들 잘 아실 듯… 박미경과 강변가요제를 연결시켜 생각하다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얼굴 변신…이 당시 강변가요제에 참가했던 그녀의 얼굴을 본 저로서는 지금의 박미경의 모습이 놀라울 뿐…여성가수에게 미모라는 것이 얼마
나 중요한지는 박미경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KBS 대학가요축제가 배출한 ‘물안개’의 스타 석미경과 함께… 박미경의 이름을 떠올릴때 이 곡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참 많은데요, 아마도 그녀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94년 이후 그녀가 발표한 곡들이 거의 강한 댄스음악들이라 그런 것 같아요.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이 곡도 표절곡이랍니다…참 표절곡 많네요…)이후 주춤하던 그녀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 ‘이브의 경고’, ‘아담의 심리’, ‘넌 그렇게 살지마’ 등의 소울풀한 가창력을 선보인 댄스곡들로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박미경이 댄스곡들로 인기를 얻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곡과 ‘기억속의 먼 그대’라는 발라드곡들이 더 좋더군요.

18. 여운 – “홀로된 사랑” (1987년 강변가요제 은상)

남자 둘(안현진, 고상우) 여자 하나(박순화)로 구성된 이 혼성 트리오는 경쾌한 이 곡으로 입상하면서 가요계에 멋지게 데뷔를 했는데 인기가 아주 높았었죠.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으나 묵직한 남성보컬과 비교되는 날카로운 여성보컬이 더 돋보인 점이 강점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 그룹은 이 곡을 히트시킨 이후에 ‘사랑이 떠나버리고’라는 발라드곡으로
연속적인 히트를 기록했는데 더 이상 히트곡들 터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이 당시 대상으로는 문희경의 “그리움은 빗물처럼”이 뽑혔었는데 이 곡보다는 여운의 이 곡과 동상을 수상한 티삼스의 “매일 매일 기다려”가 더 큰 인기를 얻었죠.

19. 바다새 – “바다새” (1986년 강변가요제 동상)

이 곡은 비록 대상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오랫동안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가 높았던 곡입니다. 남자 둘, 여자 하나로 구성된 이 트리오의 곡은 경쾌한 멜로디 진행과 밝은 분위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었는데 이 대회 때 유난히 출중한 가수들(유미리, 도시의 그림자)이 많아서 동상에 그치는 불운을 겪기도…얼마전에 코요테가 남희석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 곡을 부르는 모습을 보았는데 노래를 아주 망쳐놓더군요. 연습을 못했다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신지의 가창력이나 나머지 두 명의 코러스 수준은 좀 심했더군요.

20. 심수봉 – “그 때 그 사람” (197?년 대학가요제 입상)

이 곡이 대학가요제 입상곡이라는 사실은 80년대 중반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구요, 심수봉이 10.26 사태의 쓰라린 과거의 현장에 있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꽤나 오랫동안 TV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죠. 심수봉 자신도 이 때의 일로 오랫동안 시달려왔고, 무척 고통스런 날들을 보냈다고 그러더군요. 이 곡은 심수봉이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높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심수봉의 조금은 청승맞은 창법때문에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히트가요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기억하는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 입상곡들을 적어봤는데요, 주로 80년대 입상곡들이 많은 것 같군요. 90년대 들어서도 이 두 대회는 개최되긴 했지만 칼라, 소나기, 육각수, 주병선 등이 가수를 제외하곤 80년대만큼 뚜렷한 가수들을 배출하지 못했었죠. 이건 시대의 흐름에 많이 좌우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제가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가수들 중에서도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노사연, 배철수가 몸담았던 활주로, 조하문이 있었던 그룹으로 잘 알려진 마그마, 대상곡 하나내고 사라진 이유진, 본선참가로만 만족해야했던 귀뚜라미(고은희, 이정란), ‘한번만 더’의 박성신, ‘밤에 피는 장미’라는 인기곡을 배출한 어우러기, 영화배우로 성공한 한석규 등등이 두 가요제를 통해서 배출된 스타들은 참 많았습니다. 그 때가 그립네요.

80년대 초중반의 대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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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Yong-pil from acrofan” by acrofan.com – http://www.acrofan.com/ko-kr/life/content/main.ksp?mode=view&cate=0203&wd=20130424&ucode=0802030301&page=1&keyfield=&keyword=.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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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계의 제 3의 안정기와 수퍼스타 조용필

⑴ 가요계의 천하통일, 조용필

70년대는 포크의 등장으로 기존 가요계의 주된 흐름인 트로트와 스탠다드와는 분리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나가고, 70년대 후반 록이 거기에 또 하나의경향을 보태는 등 새로운 경향들이 어느 것 하나도 뚜렷한 주도성을 잡지 못한 채 솟아오르는 시기이다.
79년에 조용필은 이전까지의 가요의 성과를 종합하고 총괄함은 물론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면서 수퍼스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창 밖의 여자>, <비련>, <못찾겠다 꾀꼬리>, <촛불>, <물망초>, <꽃바람> 등 그의 재기를 성공시킨 노래들은 모든 계층에 고루 대중적이면서 선율적이며 느낌이 풍부한 단조스탠다드와 강한 리듬·음색의 록을 결합시킨 노래들이다. 또한 조용필은 다양한 쟝르의 곡을 통해 거의 전연령층·전계층에 호소력을 발휘한다. 조용필의 노래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한 쟝르에걸쳐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록에 가까운 노래들 :
<단발머리>, <나는 너 좋아> 등
# 정통 스태다드 :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꽃순이를 아시나요>, <정> 등
# 정통 트로트 :
데뷔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에야> 등
# 포크적·가곡적 분위기의 노래 : <친구여>
# 민요 :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 등

이렇게 다양한 쟝르를 소화한 가수가 소화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스탠다드와 록을 결합한 노래들을 성공시킴으로써 80년대 전반 가요계의 판도를 결정지었고, 이러한 경향에 따라 김수철, 전영록, 윤시내, 이은하, 이선희 등 가요계의 대중적 히트곡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80년대 가요계는 70년대와는 달리 수퍼스타 조용필을 중심으로 일정한 안정기를 맞게 된다.

⑵ 최고의 상품으로서의 조용필

거의 전 연령층, 전 계층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구매자를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용필은 가요계에서 최대이윤을 창출하는 가장 우수한 상품이며, 그 상품적 우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작위적인 노력이 가해진다. 즉 계획적인 매니지먼트에 의해 그다양성이 유지된다. 한 가수가 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경향을 가지게되거나,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경향과 이미지가 최대 이윤창출이라는 원리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다.
다양한 경향의 노래가 동시에 실린 음반이 기획되고 (1집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3집 <고추잠자리>와 <물망초>, <미워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동시에 실림), 다양한 이미지로 부를 작품의 경향과 그 무대, 관객의 취향에 따라 의상 등을 선택하여 변신해가며 적재적소에 등장한다.
또한 대중가요의 경향 변화에 따라 작품의 경향을 바꾸어 나간다. 예를들어 장조트로트가 유행할 때에는 <허공>, 발라드가 유행할 때에는 <그대 발길이 머무는 것에>,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유행할 때는 <꿈> 등을 발표한다.
팬클럽의 결성 등을 통해 인기의 조직적 관리를 시도하는 등 본격적인 가요산업의 시대를 열어나가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전영록, 이선희가 나타난다.

⑶ 가요 수용층으로서의 10대

조용필의 등장이 확인시켜준 것은 10대 -대학생이 아닌 중고등학생 – 특히중학생이 매우 중요한 가요수용층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성스러운10대 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 (70년대 어니언스나 이수만에 대한 호응과는그 질이 다르다).- 10대가 가요의 주요 구매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소형 오디오의 대중적 보급과 경제적 여유로 10대의 음반 구매가 가능해졌다는 것과관련이 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80년대부터 텔레비젼을 중심으로 하는 가요계의 중심적흐름은 10대를 겨냥한 작품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10대들은 대중음악의 주요한 소비자, 음반 구매층이며, 팬클럽과 박수부대 등으로 ‘이것이 대세다’라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오피니언리더의 구실을 하는 계층이 된다.
가요계의 흐름이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게 되면서 전영록, 구창모, 김수철,이선희 등 10대를 겨냥한 가수들의 대거 등장한다. 이시기 가사를 살펴보면 수용층인 10대를 겨냥하여 유아적 발상과 표현이많이 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깨끗이 지워야 하니까’,’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못 찾겠다 꾀꼬리’,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내 사랑 울보’, ‘만나 사랑한게 잘못이었나봐’, ‘그대 우나봐’,’…했잖아’,’…했어요’ 등

⑷ 록의 제2세대의 전성기와 록의 대중화

조용필의 등장은 록의 대중화를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대학가요제 출신을 비롯한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대거 등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록의 제2세대가 전성기를 맞게 된다. – 당시 {영 11} 같은 청소년 쇼프로그램은 이들이 빠지면 이루어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송골배 <어쩌다 마주친 그대>,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김수철 <못다핀 꽃 한송이>, <왜 모르시나>, <나두야 간다>, <젊은 그대>등

록의 대중화 시대의 인간형과 세계 인식

포크와는 달리 록은 반문화적 분위기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고 처음부터 대중가요의 내용적 관행을 따르면서 대중적으로 시작하였다. 록의 제2세대에 이르러서도 록 특유의 세계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비극적 사랑노래의 내용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특히 가사를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는음악양식과 질감, 기법을 중심으로 노래를 발전시킨다.
록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절규’이다. 여태까지의 가요에서는 없었던 남성의 고음과 째지는 듯한 전자악기의 음향, 폭발적인 드럼, 강한 리듬들이 사용된다. 대개 고음부와 저음부가 나뉘며, 클라이맥스인 고음부는 맨 앞의 저음부보다는 완전히 한 옥타브 높은 음높이에서 진행된다. 김수철의 <못 다핀 꽃한송이>, <모르시나>,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등을 보면 한 옥타브 위로의도발적인 절규와 같은 상승이 있다. 저음부와 고음부의 분리와 고음부의 절규는 이 시기부터는 대중화되어서 <잊혀진 계절> 같은 팝발라드 계열의 작품에서도 흔히 드러난다. 조용필의 <촛불>, <비련> 등은 아예 고음부의 절규부터시작하는 강렬함을 보인다.
이러한 노래들의 표현을 보면 이성적이지 않고,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다가온다. 지적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도볼 수 있다.
슬픔의 표현이 직설적이며 도발적이다. (직설적이라는 점에서는 트로트와일치하며 도발적이라는 점에서는 다름) 비극의 원인을 자신의 탓(운명이든 못난 탓이든 여자이기 때문이든)으로 돌리는 자학적 심리와, 그 비극으로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트로트와 흡사하다. 그러나 록의 인간형은 자폐적이며,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는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과 세계 사이에 일정한 벽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세계가 세상 전체보다도 중요하며 자신의내적 세계에 의해 세상 전체를 규정되고 좌지우지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록에서의 자신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것은 곧 세상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같은 극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창밖의 여자>

그 파괴적이고 도발적이며 극단적 분위기의 절규는 자신을 가장 절절하게드러내는 것이며, 록의 아름다움의 핵심이 된다. 도저히 절규하지 않고서는견딜 수 없는 인간의 자기 회복, 인간성의 발현과 같은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그만큼 이 세게가 절규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어둡고 힘든 곳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성의 발현이 파괴적일 정도로 극단적이라는 것에 그 비극성과 불건강성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가사에 드러나는 경우는 그리 흔치않고, 악곡과의 결합을 통한 정서, 질감으로 드러난다.
가사 내용은 복잡한 내면심리를 드러낸다. 특히 팝발라드의 산문적이고 서술적인 가사들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떠나가서 슬프다’ 정도의 단순한 논리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랑이든 이별이든 사람의 움직임이나 외적 사물로의 정서의 응집 (가을의 풍경이라든지, 새의 울음이라든지)보다는 한 순간의 느낌이나 분위기,감각의 포착, 복잡한 내면 심리의 포착으로 기울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 어저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희나리>

(추제호 작사·작곡, 구창모 노래)

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 그래도 우리는 좋아 좋아

알 수 없는 너의 고백이 / 내 마음을 뛰게 하지만

그런 것은 너무 어려워 싫어 (후략)

<나는 너 좋아>

(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노래)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말로 가면 갈수록 강화된다.
팝발라드, 댄스뮤직, 트로트의 세 양식의 태동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가요의 양식은 팝발라드, 댄스뮤직,트로트의 세 양식으로 정리·정립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 정립이 거의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⑴ 팝발라드의 태동

스탠다드의 전쭷을 가지고 있으면서 포크와 블루스의 세련된 분위기를 수용하는 작품도 많다. 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화성을 구사하면서 주로 피아노가 주도하는 반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장조가 주도적이고, 가사는 체언으로 시상을 응축하기보다는 용언으로 서술적으로 마무리하여 말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주는 경향이 주도한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로부터 시작하여(박건호,이범희 콤비의 신선함), 이선희 <J에게>, 최성수 <남남>, 이광조<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문세<난아직 모르잖아요>, <그녀의 웃음소리뿐> 등으로 이어진다.

⑵ 댄스뮤직의 본격화

가창력보다는 용모와 춤을 중심으로 하는 비디오형 가수가 등장하게 된다. 남자가수는 10대를 겨냥, 여자가수는 20대 이상 성인을 겨냥한다.
록의 대중화와 고고, 디스코로 이어지는 대중춤의 유행이 바탕이 된다.
나미 <빙글빙글>,<유혹하지 말아요>,<보이네> 등 건반주자 김명곤의 세련된편곡이 돋보임. 뒤를 이어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등의 등장.

⑶ 트로트의 유지와 장조 트로트의 부활

주로 여자 트로트가수가 주도한다. 정통 트로트 분위기의 김연자, 스탠다드와 결합한 특이한 창법의 김수희, 심수봉등이 등장하게 된다. 퇴행적 비극성을 보다 직설적인 어법으로 노래하면서 목이 메는 듯한 창법이나 휴성의 호흡을 심하게 섞어 간드러지면서도 애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창법으로 노래한다.
뒤를 이어 주현미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같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다.
첫째, {쌍쌍파티}라는 뽕짝메들리의 대중적 인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뽕짝메들리는 익숙한 노래를 매우 단순하고 일률적인 기계적 편곡에 담아서, 동일한 템포의 리듬으로 끊임없이 들려주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노래 하나하나가 아니라 쉬지 않고 동일한 기계적 리듬의 노래가 흘러나와 시간을 채운다는 점이다. 주로 운전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일을 하면서 노래를 듣는 성인층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성인용 춤곡의 구실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부르는 ‘쌍쌍파티’라는 발상 자체가 이러한 성인용 춤곡의 분위기를 만들어 냄)
둘째, 장조 트로트의 부활.
{쌍쌍파티}의 성공으로 데뷔한 주현미의 첫 신곡 <비 내리는 영동교>를 통해 단조트로트가 주도한 흐름을 깨고 장조 트로트의 시대를 열고, 이러한 흐름은 <신사동 그 사람>, <잠깐만>으로 이어진다.
셋째, 나훈아식 창법을 계승한 꺽는 목을 남용하는 목소리를 트로트의 대표적 창법으로 굳히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현철, 문희옥 등으로 이어지면서 두드러진다.(김수희,심수봉을 거치면서 주현미에 이르기가지 트로트는 주로 과장된 창법, 목소리 사운드의 변화로 신선함을 유지함)
넷째, 이전의 트로트보다 단순해지고 표현은 유치해졌으며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 현철<사랑은 나비인가 봐>,문희옥의 {사투리 디스코}등), 훨씬 중년의 향락적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문희옥<사랑의 거리> 등
즉, 이는 더이상 트로트에 진지한 삶의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요계의 다양화와 언더그라운드

텔레비젼에 연연하지 않고 한때의 인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면서,개성있는작품세계를 추구하는 대중음악인이 늘어난다. 70년대 초 포크와 록의 후예들이지만 70년대의 작품세계와 많이 다르다.
팝 세대가 40대에 이르면서 그만큼 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가요인들이 양적, 질적으로 축적되고, 수용층의 취향도 다양해진 것이다. 이들은 가요계의 중심적 흐름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콘서트와 음반판매를 통해 자신의음악세계를 고집하면서 소수의 고정수용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한다.
혹은 한때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인기가수였으나 그 유행이 지나가버린 싱어송라이터들이 그 창작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계속 변화시키면서 언더그라운드로, 혹은 영화음악 등으로 음악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⑴ 포크 계열

가사를 중시하는 특성 때문에 대개 이 계열의 언더그라운들들은 ‘음유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포크 계열의 언더그라운드는 80년대에 들어서서는이미 그 나이가 모두 30대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포크 특유의 지적이고 맑고순수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70년대 초반과 같은 철없을 정도의 순수함은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으로 칩거하여 세상을 관조하는 소극적분위기를 풍기거나(입을 게으르게 움직이는 창법이 일반적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거나 대중가요의 일반적 관행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하는 경향을 보인다.
* 조동진 : 72년 데뷔 후 7년만에 1집 음반을 냄. (79년) <작은 배>, <행복한 사람>, <나뭇잎 사이로> 도시적 세련미와 사색적인 분위기.
* 정태춘 : <촛불>,<시인의 마을>이 실린 1집 이후에는 거의 음반으로만 활동을 해옴. 포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스탠다드를 많이 이어받고 있음. 투박함 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함.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서망부가> 등
* 해바라기 : 대중적 음악어법을 구사. 트로트적 분위기가 나는 스탠다드와결합한 <모두가 사랑이예요> 등으로부터 록의 분위기를 내는 <어서 말을 해>까지. 내용도 사랑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다.
* 신형원 (한돌) : 민중가요권의 작곡자 한돌의 작품.88년 이전까지는 민중가요와의 관계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었고 그저 특색있는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로 알려져 있었음. <불씨>, <유리벽>, <개똥벌레>
* 송창식 : 대곡 분위기의 작품까지 소화했던 최전성기를 넘어서고, 80년대초 작곡자로서 <밀양 머슴 아리랑>, 김연자의 <당신은> 같은 대중적인 곡을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87년 <참새의 하루>,<담배가게 아가씨> 등에서 보통사람의 일상을 낙관적으로 긍정하는 작품을 발표. 국악에 대한 관심도 보임(진보성보다는 국악의 음색을 연구하는 정도).

⑵ 블루스, 록 계열, 록의 제 3세대

* 김창완 : 동요를 비롯하여 명랑하고 순진하면서도 참신한 작품을 발표.초기 산울림보다는 대중의 취향을 파악한 듯 참신함을 강조하면서도 대중적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청춘>, <안녕>* 김수철의 영화음악, 춤음악. 국악과의 결합 시도
* 신촌블루스 : 이정선을 중심으로 함. 이정선은 포크4인조 해바라기로부터 시작하여 한영애를 데리고 블루스로 변화하였고,블루스를 중심으로한 그룹 풍선을 만들어서 이광조, 엄인호 등과 활동한 성과를 바탕으로 이정선, 한영애,김현식, 엄인호, 정서용, 60년대말 소울가수 박인수 등과 신촌블루스로 활동. 정통 블루스.
* 들국화 : 전인권을 중심으로함. 우리나라 록의 최고 단계를 보여줌 음악적 세련됨. 가사에서도 록적인 인식태도도 이미 체질화된 듯, 이전보다 강하게 록적인 세계인식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자폐적인 인간형, 주관적 세계의 절대화. <오후만 있던 일요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순간의 시간을 중시하는 상대적 시간관념 등.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난 세상을 모르나 봐 /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하지만 후횐 없지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

그것만이 내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최성원 작사·작곡)

기나긴 하루 지나고 대지 위에 어둠

이 오늘 오늘은 끝남을 말해주는데

오늘의 공허를 메우지 못해 또 내일로 미뤄야겠네 (후략)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조덕환 작사·작곡)

* 하드록·헤비메탈 그룹 : 백두산, 시나위, 부활, H2O등.

이들 언더그라운드는 우리나라 가요를 다양화하며 과감한 시도를 통해 가요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하는 구실을 하지만, 반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가요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와 우리나라 대중의 음악적 감수성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미국문화 추종적인 분위기를 가장 짙게 가지고 있는 부류이기도 하다.

가요의 미국화 경향의 강화와 우리말 파괴

조용필에 이르러 기존의 가요의 흐름과 록의 결합이 안정적이며, 신촌블루스나 들국화에 이르면 미국의 이른바 정통 블루스, 정통 록의 정착과 재생산이 완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트로트에서 단조스탠다드로 내려왔던 한국가요티가 전혀 나지 않는 완전한 미국화가 이루어진다. 이들에 이르면 3화음체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미국식 재즈, 블루스,록에서 사용하는 불협류의 화음들이 자유자재로 구사된다. 또한 발음이 미국식 음운으로 교체되고, 우리말의 억양과는 다른 액센트와 우리말의 흐흡을 고려하지 않은 악곡을 많이 사용한다. 심지어 일부러 우리말 가사를 들이지 않게 발음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혜은이의 <작은숙녀>)
이런 현상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이런 것을 쓰는 것이 오히려 세련된 것이라는 느낌까지 주기도 한다. (마치 영어나 독불어의 직역투 문장이 지적인 문장인 것같은 느낌을 주는 것처럼)
예) / 날 기억 / 하는 사람 / 들을 지금 모두
나중에는 아예 영어로 된 가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우리말 파괴는 비단 대중음악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8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음악과의 동질화가 진행될수록, 포크보다는 록이, 미국음악과 더욱 동질적인 세련된 언더그라운드일수록 더욱 심하다.

눈여겨볼 80년대 중반 가요의 흐름

글. 김영대( toojazzy@nownuri.net )


한가지 전제를 깔고 시작하자. 이 연재물은 ‘댄스 음악에도 음악성이 있음’과 같은 고귀한 목적이 없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댄스 뮤직은 그저 춤을 추기 위해 존재하는 enjoyable한 음악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댄스 뮤직이 무언가. 어찌 보면 대중음악이라는 본질의 극한에 닿아 있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장르일 것이다. 그저 들으면 되고 그저 춤을 추면 된다. 사실 이것이 본질이다. 물론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선 일방적으로 양산되는 댄스뮤직에 대해 헤게모니 운운하는 극단적 이분법이 적용되어, 록과는 화해할 수 없는 반대편에 위치하게 되었다. 대중 음악부문 중 가장 활발히 수출되어 잘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기본적인 완성도를 논할 수준은 지났다고 보는 시각이 있기도 하지만 예술을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현실이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한가지,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음악 그 자체를 뒤로한 사회적인 논쟁에 불과했다. 누가 더 많이 팔고, 누가 더 많이 차지하고 누가 더 많은 팬을 확보하느냐. 결국엔 그런 문제들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댄스 뮤직을 사회현상이 아닌 음악 그 자체로 받아들여본 시도는 있었던가. 물론 있기는 있었다. 소방차-서태지-HOT로 이어지는 지극히 단순한 계보들. 비록 방송국의 단골 메뉴였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에 빠진 다양한 음악적 흐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연재물에서는 바로 그런 아쉬움들을 메워갈 것이다. 한국 음악사에서 빠질 수 없는 댄스 뮤직앨범들과 문제작들, 그리고 그것들에 영향을 끼친 음악적 흐름들과 뮤지션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무작정한 설명이 아닌 앨범을 따라가며 들어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뜻대로 잘 풀려 나갈지는 미지수이다. 아무쪼록 격려와 질책 부탁드린다.


[눈여겨볼 80년대 중반의 흐름-조용필,전영록,이문세,소방차,김완선,박남정]


필자는 한국 댄스 뮤직의 본격적인 시작을 89년에서 90년까지로 보고 있지만 그 실마리는 이미 80년대 중반에 제공이 되었다는 점을 우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당시에는 ‘댄스 뮤직’이라는 개념은 오로지 미국의 팝음악에만 적용되는 듯한 인상이 강했고 흔히는 그저 ‘보통의 노래보다 빠른 정도의 신나는 음악’이라는 정도였다. 그나마 미디 등의 보급 이전으로 그룹사운드 위주로 음악이 편곡되다보니 오히려 댄스보다는 록에 가까운 음악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조용필의 노래들이 그랬고 유영선과 커넥션의 음악이 그랬다. 보통의 노래들보다 리듬이 빠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댄스곡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의 음악인들 중에는 최신조류에 가장 민감한 인물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전영록이었다.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등 지루한 구성을 탈피하여 가벼운 터치와 리듬, 단순한 멜로디속의 다이나믹한 전개가 특징이었던 전영록의 업템포 곡들은 상당부분 현재의 댄스 음악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발라드 음악의 대표주자로 여겨졌던 이문세 역시 간간이 댄스적인 느낌을 주는 곡들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붉은 노을>과 같은 곡은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템포를 가진 곡이었고 <이밤에>는 한창 유행하던 go-go풍의 전형적인 댄스곡이었다. 하지만 댄스 뮤직을 전면으로 내세운 팀들은 이후에 등장한다. 바로 소방차, 김완선 그리고 박남정. 이들이 이전의 뮤지션들과 전적으로 달랐던 것은 바로 가수가 아닌 댄서출신이었다는 점이었다. 전영록만 하더라도 발라드와 댄스를 넘나드는 싱어송 라이터였고 화려한 무대매너를 보여주긴 했지만 특별히 안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적어도 안무가 노래만큼 비중을 차지한다던가(소방차 <어젯밤 이야기>, <통화중>, <하얀바람>) 혹은 안무 때문에 음악이 히트하는 상황도 만들어졌다.(박남정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소방차의 쉬운 멜로디와 가벼운 동작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어서 인기가 높았고 김완선과 박남정은 외국의 그 어느 스타들 못지 않은 다양한 댄스 테크닉을 선보이며 젊은층을 열광시켰다. 이들은 내놓는 앨범마다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 80년대말까지 끊임없는 인기행진을 계속한다.



      
[JH] 김완선… 그 이름 오랜만에 듣네요.. 현대음률 속에서~ 순간속에 보이는… 이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08월08일-
[다시] 오늘밤에,,,오늘밤?? 그런 제목이었던듯한데요. 김완선은 들을수록 너무 좋더군요 ^^;;; -08월08일-
[moz] 리듬속에 그 춤을.. 이었던 것 같은데요. 예전에 학교 밴드의 보컬을 하던 친구와 이야기나눴던 주제가 김완선은 워낙에 뒤에서 받쳐주는 백업들이 빵빵해서 음악적 수준이 뛰어날 수 밖에 없었죠. 노래실력만 좀 더 좋고 눈만 좀 이상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평가가 내려졌을지도… -08월08일-
[moz] 오늘 Kuwata Band의 Skipped Beat를 다운받아 들어봤는데 소방차의 G까페가 이노래를 표절한 거구만요. -08월08일-
[Willa] 김완선 그 노래는 리듬속의 그 춤을..이 맞아요. 87년 2집앨범에 들어 있죠. 이 앨범에선 나홀로 뜰앞에서라는 청승맞은 댄스곡도 히트했었죠…. -08월08일-
[Eva] 오늘밤은 김완선 데뷰곡이죠… -08월08일-
[moz] 당시 김완선의 앨범에서 키타는 신대철이 맡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 앨범에 에디반헬런이 참여했던 케이스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08월09일-
[Faith] 김완선의 리듬속의 그춤을 이 노래를 신중현이 작곡했단 사실 아시는 분이 몇이나 될련지.. 1집땐 산울림의 김창훈이, 2집땐 신중현이, 3집땐 이장희가 나섰었죠.. -08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