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사람들

Here’s Johnny Marr

The Smiths had to break up because the pressure on me was intolerable.

By the time of our third album, The Queen Is Dead, my drinking had spiralled out of control and it was making me seriously ill. Basically I was using alcohol to lessen the unbearable strain I was u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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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번이 유투의 이번 투어에 대해 말하길

아래 기사의 발단이 된 데이빗 번의 블로그 포스트이다.

출처는 http://journal.davidbyrne.com/2009/07/071409-budapest.html

유투에게 감사를!

우리가 바르샤바의 나이트 클럽 (Stodola라는 그리 크지 않은 공연장입니다)에서 있을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마크 E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이렇게 비교적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은 유투의 월드 투어 덕분이라구요. 이 공연의 프로모터는, 유투 공연의 상당 수의 프로모터를 맡기도 한 국제적 기업, 라이브 네이션입니다. Stoloda 같은 공연장은 사실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게다가 티켓 매수도 보통 때보다 적게 잡혔는데, 덕분에 거기서 일하는 스텝들에게 제대로 임금을 지불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여기가 무슨 VIP를 위한 클럽인 것도 아니죠. 손실 메꾸기 위해 티켓 한 장에 200불 씩이나 받고 파는 그런 곳이 아니란 겁니다 – 그냥 베니어판으로 만든 스탠딩 공연장일 뿐이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공연을 떠맡은 덕분에,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손해를 보고 있을 거예요. 앞으로 있을 유투의 스타디움 공연으로 그 적자를 메꿀 수 있길 기대하면서요.

그들의 공연은 공연 역사상 가장 비싼 공연일 것입니다. (제작비 측면에 있어서 말입니다): 스테이지를 짓는데 4천만불을 들였어요. 계산을 해보니, 200대의 트럭이 그들의 투어를 따라다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같은 직업군으로서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이건, 과잉이라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을 생각한다면 꽤나 형평에 어긋나는 일이도 하지요. 아니면 유투의 일주일짜리 특집방송 덕분에 우리가 레터맨에서 내쳐진 것이 날 수치스럽게 만든 것일까요? 뭐 여러분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 하지만 어쨌든 고마워요, 친구들!

유투의 최대 팬 포럼인 인터피어런스닷컴을 통해 이 포스트를 보았다. 데이빗 번이 대차게 까이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유투 팬덤과 데이빗 번 팬덤이 서로 배제성을 띤다고 볼 수는 없다. 데이빗 번 팬 중에 유투 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대의 경우는 존재한다. 그래서 데이빗의 이 포스팅에 대해서도 유투 팬들의 반응은 갈리고 있다. 신경 끄고 니 일이나 잘 하라는 사람도 있고, 더 심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데이빗의 뜻은 이해하겠는데 내 생각은 이러저러하다고 점잖게 코멘트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코멘트는 이런 것이다. 4천만불짜리 공연과 아프리카의 기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보노가 사회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본업’인 음악적 활동에 돈을 바를 권리가 소멸되는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데이빗 번의 입장과 유투 팬들의 입장 모두 이해를 한다. 데이빗 번의 발언은 나의 오래된 고민과 일치한다. 사회운동을 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밴드라는 이질적인 요소의 조합, 그게 유투의 정체이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양자택일을 해야만하는 것일까? 펑크 아나키스트와 팝 캐피탈리스트의 경계에 선 펑크 캐피탈리스트,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터 훅의 80년대

2007년 8월호 모조 부록에 실렸던 피터 훅과의 짧은 인터뷰.

Interviewed by Pat Gilbert

나의 80년대피터 훅

약물, , 맨체스터의 천재적 펑크 디스코정말이지 대단한 10년이었다니까!

당신은 리스트에 두 번 올랐습니다, 조이 디비전의 Closer와 뉴 오더의 Low-Life로요. 그들이 그렇게 출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들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예술적 자유를 전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죠. Blue Monday 10분짜리 곡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걸 싱글로 내놨죠; Love Will Tear Us Apart는 앨범에 [Closer] 수록되지도 않은 곡이었습니다. 다른 밴드들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팩토리와 5050으로 수익을 나눴습니다. 덕분에 앨범을 만장 판 정도로도 1년은 먹고 살 수 있었어요수지 앤 더 밴시스는 아마 십만장은 팔아야 했을 겁니다.

라이브 에이드로부터 제의를 받은 적 있나요?

아뇨. 나는 밥 겔도프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꽤나 모욕적이었죠. 그걸 거절한 사람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80년대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Blue Monday] 1983년 톱 오브 더 팝스에 출연했을 때였죠. 우리 세대에겐 거기에 출연하는 것이 최고로 여기지곤 했어요.

최악의 순간은요?

이언 커티스의 자살입니다. 이언은 1980 5월에 죽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80년대를 그 사건과 함께 시작한 거나 다름없어요. 그런 재앙적인 출발이 어디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가장 정신나간 순간은 언제였죠?

그건 너무 많군요우리는 미국에 빨리 진출한 편이었죠. 거긴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압니다. 클럽 앞에서 우리가 뉴 오더라고 하면 사람들이 특별한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약이고 술이고 할 거 없이 잔뜩 앵겨줬죠. 영국에서라면 귓방망이를 흠씬 맞았을 겁니다. 미국에서 우린 쾌락을 찾았고 정신나간 세계에 입성했어요. 그리고 애시드 하우스와 함께 80년대가 종언을 고했죠… 80년대는 정말이지 빌어먹게 좋았습니다.

어떤 음악을 듣곤 했나요?

바우 와우 와우, 헤이지 팬테이지, 맬컴 맥라렌의 모든 작품들. 애덤 앤트는 엄청난 아이콘이었고 마르코 피로니는 끝내주는 기타리스트였죠. 씨어터 오브 헤이트, 데쓰 컬트, 플레이 데드와 같은 80년대의 골수 고딕적 면모도 좋았습니다. 미국에서 디제잉을 많이 했는데 그들은 죄다 80년대에 빠져있어요. 그 시기의 곡이라면 뭐든지 열광하더군요.

80년대가 당신에게 부를 가져다줬습니까?

그렇죠, 헌데 하시엔다에 대해선 좀 할 말이 있습니다. 그걸 6번이나 말아먹었거든요. 결국 하시엔다와 팩토리에 6백에서 9백만 정도의 돈을 쏟아 부었죠

My ’80s- Peter Hook

 Drugs, Booze, genius Manc punk disco – worra decade!

You’re in the list twice, for Joy Division’s Closer and New Order’s Low-Life. What made those groups so special?

We did stuff to make us happy. We were allowed complete artistic freedom. Blue Monday was 10 minites long, but we put it as a single; Love Will Tear Us Apart wasn’t on the album [Closer]. Everyone else was doing what they were told. Also, we had a 50/50 split with Factory so we could live for a year by selling 10,000 albums- Siouxsie & The Banshees would have had to sell 100,000.

Were you approached to Live Aid?

No. I take it Bob Geldof didn’t like us. You felt quite affronted that you weren’t asked. I’ve never heard anyone say they turned it down.

High point of the decade?

Appearing on Top Of The Pops in 1983 [with Blue Monday]. Doing that progranne was a dream for my generation.

Low point?

The suicide of Ian Curtis. Ian died in May 1980, so the ’80s were all up for us after that. It couldn’t have started out more fucking disastrously, could it?

Craziest moment?

There were so many… we got to America quite quickly, and they knew how to treat you over there. If we were outside a nightclub, when we said we were New Order they’d drag you in, put you in a special room and fill you full of drugs and alcohol. In England all you’d get was a thick ear. In Amercia we discovered hedonism and entered that whole mad world, then to finish the decade with acid house… the ’80s was fucking great for us.

What were you listening to?

Bow Wow Wow, Haysi Fantayzee, all that stuff that felt it had come from Malcolm Mclaren. I thought Adam Ant was a great character and Marco Pirroni was a fantastic guitarist. Theatre Of Hate, Death Cult, Play Dead – the serious goth side of it was good. I DJ in America a lot and they’re fucking obsessed with the ’80s. Play anything from that time and they go mental.

Did the decade make you millionaire?

Yeah, but thanks to the Hacienda I lost it – six times over. We worked out that we lost between six and nine million on that club and Factory…

 

마이클잭슨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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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3” by Michaeljacksonphoto_drewcohen.JPG: Drew H. Cohen
derivative work: Gaston S/Kpo! 09 (talk) – Michaeljacksonphoto_drewcohen.JPG.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그의 죽음을 접한 후 새삼 마이클잭슨이 나에게 어떠한 존재였는가는 생각해보게 된다. 80년대 음악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고 있을 만큼 나름 80년대 팝음악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그의 존재감은 나의 음악생활에 분명히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처음 산 LP가 바로 마이클잭슨의 스릴러(Thriller)였다는 점이 떠오른다. 그전까지 이런저런 히트싱글을 모음집 형식으로 묶은 조악한 “구르마 테잎(리어카라는 이동수단에 쌓아놓고 한 개의 1천 원씩 정도 받고 팔던 불법복사 카셋테잎)”을 통해 음악을 접했었던 내가 큰맘 먹고 거금 2,500원을 주고 산 앨범이 바로 마이클잭슨의 앨범이었다.

하얀 양복을 입고 옆으로 누워 앞을 응시하는 마이클잭슨의 사진이 인쇄된 간단한 디자인의 앨범이었지만 그 속내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Billie Jean을 비롯하여 앨범 거의 모든 곡이 차트에 오르고 리듬앤블루스뿐만 아니라 락부문까지 그래미상을 수상하는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한마디로 전무후무한 대중음악의 산 역사라 할만한 앨범이 되었다.

이 앨범을 통해 내가 경험한 또 하나의 최초는 바로 스테레오사운드의 쾌감이다. 히트싱글 Thriller를 들으면 도입부에 문이 삐걱하고 열리며 누군가가 뚜벅 뚜벅 걷는 장면이 묘사된다. 헤드폰으로 들으면 이 발자국 소리가 좌에서 우로 옮겨지는 부분이 선명히 느껴지는데, 어린 마음에 친구와 함께 들으며 무척이나 신나했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한편 그의 음악을 처음 안 것이 스릴러 앨범부터였고 이후의 앨범은 그럭저럭 챙겨들었지만 그의 어릴 적 음악은 접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그 전의 어린 시절을 알게 된 것은 학창시절 같은 반 친구덕분이었는데, 80년대에 유행하던 주문제작(!) 테잎 – 음반가게에 자기가 듣고 싶은 곡을 리스트로 주고 복사해서 만든 카셋테잎 -을 만들 때에 그의 조언에 따라 마이클잭슨의 곡을 녹음하고서였다.

즉, 하나에 2천 원 정도 했던 이 테잎을 주문할 때에 그 친구가 자기의 음악적 취향을 뽐내며 – 알고 보면 그 친구도 자기 형한테 주워들은 풍월이었지만 – 마이클잭슨의 어린 시절 곡을 추천해주고 덕분에 그 곡을 알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의 성인시절 음악도 좋지만 어린 시절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그의 맑은 음색도 또한 맘에 든다. 그가 죽은 이 시점에 더욱 애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잘 가요 마이클.

조니 마, 80년대를 회상하다

2007년 8월호 모조 매거진의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소책자 80 From The Eighties의 발문을 조니 마가 작성하였다.

80 From The Eighties

Interviewed by Lois Wilson

[발문]

 80년대가 시작하던 그때는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열일곱이었고 맨체스터 도심부의 옷가게에서 일하며 존슨즈에서 팔법한 런던 킹스로드 로커빌리 스타일의 옷을 팔고 있었죠. 그리고 함께 밴드를 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클럽 씬은 정신 없었어요: 히어로즈라는 게이 클럽이 있었는데 굉장히 특이한 곳이었어요. 그리고 하시엔다가 있었죠.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명백히 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알려진 대로의 하시엔다웃통을 벗고 손을 흔들어 대던 사람들의는 좀 더 나중의 모습으로, 1987년에서 88년 정도일 겁니다. 1981년에서 82년의 그곳은 예닐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신인 밴드들의 공연을 볼 수 있던 훌륭한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뛰어난 80년대 밴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곤해요. 건 클럽, 버스데이 파티, 서튼 레이쇼, 씨어터 오브 헤이츠, 킬링 조크를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소위 포스트 펑크라 알려진 것들이죠. 포스트 펑크는 새로운 음악의 어휘집에서 가장 중요한 최초의 단어였습니다. 나에게, 그리고 내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펑크 록은 오래된 음악의 어휘집에서 가장 중요한 최후의 단어였죠, 그것은 갓 등장한 펍 록이었어요. 그 뒤에 찾아온 것은 미니멀하고, 깔끔하고, 생기 넘치며, 간결한 미학의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초기 기타 사운드를 설명해 주는 것이죠, 콜린 뉴먼과 에드윈 콜린스의 기타 소리도 마찬가지 구요.

 존 필과 그의 프로듀서 존 워터스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필의 라디오 쇼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게시판과 같았습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거든요. 그래서 던디의 음악가와 브라이튼의 학생이 만나거나 같은 시간에 음악을 들을 수 있었죠. 온 나라가 이 괴팍하고 열정적이며 전복적이고 힘을 가졌으나 타협하지 않는 뻔뻔스러운 인물에 의해 결집되었습니다. 그리고 밴드 자신들에게는 필의 라디오 쇼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어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표출시킬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주 받아 마땅한 것들도 있었습니다토니 해들리 패거리나 사이먼 르 본 패거리들 말입니다. 금요일 밤의 TV를 장악하던 레벨 42, 리빙 인 어 박스, 튜브에 등장한 티어스 포 피어스도요. 정치적으로는 많은 것들이 일반인들의 통제영역을 벗어났다는 압도적인 감각이 존재했습니다. 광부들의 파업은 마가릿 대처의 폭압적 권력표출과 토리당이 60년대부터 내세우던 모든 가치들이 낳은 결과입니다. 연대는 미디어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미세스 대처는 광부들에게 경제적 전략을 약속하지 않았고 동정 없는 잔혹함으로 그것을 집행했습니다. 도덕성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거대한 무력감만이 있었습니다.

 1986년 이후, 만약 인디 씬이 극심한 빈사상태에 이르러있었다면, 음반은 물을 줘서 만들었을 것이고 꽃은 스피커로부터 피어났겠죠.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고, 댄스음악은 그래픽 디자인, 기술적 측면, 약물, 의상, 포괄적 감각에 있어서 또 다른 정신을 형성했습니다. 우리들, 스미스는 주류로부터 추방당했다고 생각하며 적을 둘 곳을 찾아 다녔습니다. 반대로 엑스터시 친화적인 밴드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였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80년대가 나에게 부를 가져다 주었을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확답을 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도 있겠지요

조니가 가장 좋아하는 80년대 싱글 곡

1. The Beat Save It For Later [Go-Feet, 1980]

2. Talking Heads Burning Down The House [Sire, 1983]

3. The The Heartland [Epic/Some Bizare, 1986]

4. S’ExpressMantra For A State Of Mind [Rhythm Hing, 1989]

5. Psychedelic Furs Dumb Waiters [CBS, 1981]

 

[Afterword]

 The beginning of the 80s was a very exciting time. I was 17, working in a clothes shop in Manchester’s city centre, selling a take on the London King’s Road rockabilly style, the kind of clothes sold in Johnson’s, and I was looking for people to form a group with. The club Scene was busy: there was a gay club calld Heroes, which was seminal , then the Hacienda. That became a really key place, obviously, but what it’s known for – people with no shirts on with their hand in the air – came later, in 1987-88. In 1981-82 it was a great place to see the bands of the day with just seven other people. People forget that there were really good ’80s bands. I saw The Gun Club there, The Birthday Party, A Certain Ratio, Theatre Of Hate, Killing Joke. What’s now known as post punk, it was the letter A in the new lexicon. To me, and a lot of people of my generation, punk rock was the letter Z in the old lexicon, just warmed-up pub rock. What came afterwards was a reductive, clean, fresh, lean new aesthetic and that pretty much describes my early guitar sound and the guitar sound of Colin Newman and Edwyn Collins.

 John Peel and his producer John Walters were very important. Peel’s radio show was like a bulletin for ideas for like-minded people. Because this was pre-internet it was a centralised hot spot, so a Dundee musicain and a Brighton student would be tuning in and listening at the same time. The whole nation was being brought together by this quirky, passionate, subversive character who was in a position of power but was bold enough not to compromise. And for bands themselves it was vital; it allowed us to formalise new ideas and get them out there.
But there was much to rail against, too – the Tony Hadleys and Simon Le Bons. Level 42, Living In A Box, Tear For Fears on The Tube, dominating Friday night TV. Politically there was a prevailing sense of things getting beyond the control of ordinary people. The miners’ strike summed up the crushing power of Margaret Thatcher and everything the Tories had stood since the ’60s. Solidarity was destroyed with the cooperation of the media. Mrs Thatcher wasn’t just implementing an economic strategy on the miners, but enforcing it with an absolute brutal lack of compassion. There was a terrible lack of innocence involved, and that created a massive sense of helplessness.

After 1986, if the indie scene had got any feyer the records would have been made out of liquid and petals would have flown out of the speakers. Things needed to change and dance informed a different mentality in graphic design, technology, drugs, clothes, sense of inclusion. The Smiths, we were looking for a home, feeling excluded from the mainstream, and the bands who were chomping E, they were the opposite, they embraced and were embraced by everyone.

And did the ’80s make me a millionaire? Probably, but someone else got their fingers on it…

Johnny’s Fave ’80s Singles
1. The Beat Save It For Later [Go-Feet, 1980]
2. Talking Heads Burning Down The House [Sire, 1983]
3. The The Heartland [Epic/Some Bizare, 1986]
4. S’Express Mantra For A State Of Mind [Rhythm Hing, 1989]
5. Psychedelic Furs Dumb Waiters [CBS, 1981]

 

데이빗 번 interviewed 닐 핀

데이빗이 진행하던 PBS의 프로그램 Sessions At West 54th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Sessions..시리즈는 DVD로 출시되었지만 인터뷰는 DVD에 수록되지 않았다.

Interviewee: Neil Finn

Interviewer: David Byrne

Date: Dec 5th 1998

출처는 SomethingSoFinn.com이다

데이빗 번: 당신이 스플릿 엔즈를 시작할 무렵의 뉴질랜드 음악 씬은 어땠습니까? 나는 당신들 공연을 본 적 있거든요, 이곳 뉴욕의 보텀 라인에서 말입니다.

닐 핀: 그건 내가 밴드에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나는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었죠.

데이빗 번: 맙소사 – 그 공연을 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닐 핀: 그래요. 뉴질랜드에서건, 세계 어디서건 우린 이상한 존재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나팔 바지 차림의 밴드가 커버 곡을 연주하며 현상유지를 하는 게 전부였던 시기입니다. 스플릿 엔즈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길을 갔던 거죠. 우리의 의상을 만들어 준 노엘 크롬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는 망토를 두른 채 손에는 번개 조각을 들고, 진한 화장을 하고, 펄럭대는 줄무늬 바지를 입고서 오클랜드의 중심부인 퀸 스트릿을 어슬렁거리곤 했어요. 그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플릿 엔즈의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그를 뮤지션이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어느 날이었던가 공연 중에 숟가락으로 연주를 하더라구요. 그건 썩 괜찮은 연주이긴 했어요. 당시로선 그만한 실력이면 밴드에도 들어올 만 했죠. 결국 그는 자신의 밴드의상도 준비해왔어요.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밴드가 둘 있습니다. 하이 로빙 텅즈라는 밴드였는데, 꽤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인비트윈즈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우리가 좋아하던 밴드는 그 둘 이었습니다.

데이빗:여기서 멀리 떨어진,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점이, — 그리고 나 또한 뉴욕이 아니라 상당히 작은 마을에서 성장했다는 말을 해야겠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미국 출신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 유리한 조건이란 생각이 들었는데요

:, 그렇죠.

데이빗:중심부가 아닌 곳에 있는 것 말입니다. 덕분에 뭔가를 계획하고 그것에 대해 심사 숙고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나요? 그러다 보면 실수도 좀 할 순 있지만

:그렇습니다. 또한 그런 변방에서는 세상이 퍽 낭만적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문화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건 정제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우린 모타운과 R&B, 팝의 차이를 알지 못했어요. 실제로, 우리에겐 단 한 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우린 다른 세계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덕분에 커다란 꿈을 가질 수 있었죠, 그건, 어쩔 수 없이 다소 왜곡된 꿈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웃음]

데이빗:새 앨범에 “Sinner”를 비롯해 죄를 다룬 곡이 몇 있습니다.

:.

데이빗:내가 읽은 인터뷰 중에, 당신이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한 것에 대해 얘기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아이리시 가톨릭인가요?

:그렇습니다.

데이빗:뉴질랜드엔 많은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이민자가 있지요.

:맞아요. 아일랜드인은 전 세계에 펴져 있습니다. 난 어머니가 아이리시 가톨릭이었고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어요. 우리 가족은 며칠에 한번씩 가톨릭 사제들과 술을 마시거나 다과회를 갖곤 했습니다. 많은 경우 술을 마셨죠. 굉장히 기억에 남는 파티가 있었는데요,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며 끝난 파티였습니다. 그날 밤엔 신부님들과 우리 이모들이 노닥거리기까지 했죠. 실은, “Sinner”의 가사에 내가 가장 만족하는 건 모든 장벽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나는 그 구절을, 엄격한 가톨릭 신자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흥겨운 파티를 벌이는 와중에, 돌연 모든 방해물이 사라져 아이들이 멋대로 날뛰고, 밤을 새우고, 술을 훔쳐내고, 그런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과 결부시키려고 했습니다.

데이빗:그들이 그렇게 파티를 자주하면 안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난 그런 류의 교리를 깨뜨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일랜드인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삶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데 능해요. 개중에는 끝이 안 좋았던 사람도 있긴 하지만요 아일랜드 출신 중에는 정말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죠. [웃음]

데이빗:하지만,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최소한 가톨릭에서는, 속죄할 수 있다, 용서받을 것이다, 하는 의식 말입니다.

:, 그렇죠.

데이빗:  끔찍한 짓을 하고 괴로워하다가도, 이것만은 언제나 인지하고 있잖습니까 , 용서해주시겠지.”

:그래요. 그런 점에선 굉장히 위안이 되는 종교이기도 하죠. 언제 한번 고해성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데이빗:신부님을 모셔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진짜요? (목을 가리키며) 거기에 뭐 하나 갖다 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 당신이 직접 해줄 수도 있을 거예요, 데이브. [웃음] 확실히, 고해성사는 굉장한 일입니다. 무슨 일을 저지르더라도 성모송주기도문을 세 번씩만 기도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니요. 게다가 그건 여전히 가사를 쓰는데 귀중한 자양분이 됩니다. 가끔 그것에 너무 많이 기대는 것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와 관련된 생각을 계속 떠올리곤 합니다.

 

David Byrne: When you started off with Split Enz, what was the music scene like in New Zealand at that time? Because I saw the group when you first played the Bottom Line here in New York…

Neil Finn: That was before I was even in the band, actually. I was in school.

David Byrne: Gosh — I saw this and I thought, “What is going on down there?”

Neil Finn: Yeah. Well, it was strange in New Zealand, and strange everywhere. But at the time it was all bands playing covers, with bellbottoms, a status quo kind of time. And Split Enz was an oddity right from the very beginning. There was a guy called Noel Cromby who used to design the costumes, and he would wander down Queen Street, which is the main street of Auckland, in a cape with a piece of a lightning bolt in his hand, full makeup, and big flared gingham pants. He was one of those kind of characters. He started making costumes for Split Enz, he wasn’t a musician at all, but ended up playing spoons one night at one of the shows and that was good enough to get into the band, in those days. And he just brought his costumes with him.

But, there were two bands that I remember. High Roving Tongues, which I always thought was a really good name, and the In-Betweens — those were the two bands we used to like.

David Byrne: Did you feel that coming from New Zealand, which for us is pretty far away — and I might preface that by saying that I didn’t grow up in New York, I grew up in a slightly smaller town. Still in the United States. But I felt in some ways it was an advantage…

Neil Finn: Oh, yeah.

David Byrne: …not to be quite in the center of things. It gave you time to develop and think about things, and you could make mistakes…

Neil Finn: Yeah. Also the world had a slightly romantic tinge to it from afar as well. We had a certain amount of culture coming to us in a very random way. We didn’t know the difference between Motown and R&B and pop. And, in fact, we only had one radio station and they played everything. So it was a romantic sort of impression we had of the rest of the world, and it enabled you to grow up with big dreams, which, inevitably got slightly soiled. [LAUGHS]

David Byrne: There’s songs on the new record, “Sinner” and some other ones, that refer to sin.

Neil Finn: Yeah.

David Byrne: You’ve mentioned in some of the interviews that I’ve read, about having a Catholic background. Is that Catholic as in Irish Catholic?

Neil Finn: Yeah.

David Byrne: There were a lot of immigrants that went to New Zealand from Ireland and Scotland.

Neil Finn: Yeah. The Irish have had an impact on the world everywhere. But my mother was an Irish Catholic and we grew up around it. We had priests over every few days for drinks and cups of tea. In fact, it was usually drinks. And very memorable parties where everybody would end up singing, and by the end of the night the priests would be flirting with our aunties. In fact, in the song “Sinner,” there’s a line about, “the closest I get to contentment is when all the barriers come down.” I relate that to the feeling that happens when reasonably strict Catholics get together and have a bit of a shindig, a party, and suddenly all the barriers are dropped and the kids are able to get away with anything, stay up all night, and steal drinks and…

David Byrne: Do you think they have to have those parties to let go every once in a while?

Neil Finn: Well, I think it’s necessary to shed those kind of doctrines and dogmas. And the Irish are the best in the world at playing off both sides of life against each other. Sometimes with bad consequences — there’s some pretty screwed up people coming out of that country. [CHUCKLES]

David Byrne: But there’s a sense — there’s always the sense, at least in Catholicism, that you can be redeemed, or you can be forgiven.

Neil Finn: Oh, yeah.

David Byrne: You can feel horrible that you’ve done something terrible, but you kind of always know that, “Well, I can be forgiven this.”

Neil Finn: Yeah. I know, it’s a very comforting religion in that respect. I probably should still be going to confession now, but, umm…

David Byrne: We can arrange to have a priest come in.

Neil Finn: Can you? You just need to have a little thing there (points to neck,) and you could just about do the job yourself, Dave. [CHUCKLES] But, yeah, confession was a very amazing thing. The idea that you could do anything and go and see the priest and say three “Hail Marys” and three “Our Fathers” and all would be well. And still, it’s a rich and fertile breeding ground for lyrics for me. I sometimes get a bit self-conscious about drawing on it too much, but nevertheless it keeps popping up.

Pet Shop Boys 일문일답

Q 매거진 2009년 4월호에 실린 짧은 인터뷰이다.

 

A ROUND WITH
PET SHOP BOYS

 

그들은, 당연하게도, 영국 팝계의 국보이며 그것을 증명해 줄 브릿 어워즈 또한 수상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바운티 반 조각에 대한 기대만큼 그들을 흥분시키진 못 할 것이다.

 

WORDS JOHNNY DAVIS

 

> Q가 벌이는 한판입니다. 뭐 먹고 있어요?

 

닐 테넌트: 필터 커피요.

크리스 로: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요.

 

> 히트곡 제조기인 브라이언 히긴스가 이끌고 있는 걸즈 어라우드의 제작팀인 제노매니아와 함께 새 앨범, Yes를 막 마무리지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NT: 오 그렇습니다, 그는 히트곡을 매우 좋아해요.
CL: 뭐, 우리가 다 그렇죠.
NT: 그렇긴하지, 하지만 그는 정말 장난이 아니예요. 제노매니아에서 작업하는 동안 스매시 히츠 [82년부터 84년까지]에서 일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건물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있고 그들은 모두 음악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들 모두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습니다. 정말 멋진 환경이었어요.
CL: 사람들은 우리의 점수를 매기곤 했습니다.

 

> 그들이 수정해야할 것을 지적해주던가요?

 

CL: 아뇨, 아뇨, 컴퓨터로 하더군요. 마치 아이튠즈처럼요, 거긴 별점매기는 기능이 있잖아요, 코멘트도 달리구요.
NT: “멋진데”…”형편없군”…
CL: 잔인하다구요! [소리치며] 멋집니다!
NT: 기분좋게 만들 때도 있어요: “브라이언이 당신의 브리지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답니다.”

 

> 크리스, 새 앨범에서는 노래하게 되었군요: “니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거야, 캡틴 브리튼?”

 

CL: 그래요, 그렇게 부르라고 시키더군요.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요.
NT: 그건 내가 쓴 겁니다. 난 마블 코믹스의 캡틴 브리튼의 런던 편집장이었거든요 [75년에서 77년까지. 그리고 테넌트는 그가 어떻게 그의 상관들에게 어째서 영국버전의 캡틴 아메리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지를 물었고, 그리고 그들 중 아무도 그 사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얘기해주었다].

 

> 어쩄든, Very 앨범의 히든 트랙이었던 I Believe In Ecstasy 이후 처음 듣는 크리스의 목소리라서 좋았습니다.

 

NT: 앨범에는 수록하지 않은 곡이 있어요 – 보너스 디스크에서 수록된 곡이죠, 현대적인 방식으로요 – This Usde To Be The Future라는 곡입니다, 나와 크리스와 [휴먼 리그의] 필 오우키가 함께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크리스가 그 곡을 부른 게 맞지요…
CL: 기술의 발전은 놀랍습니다. 덕분에 할 수 있게 된 걸 생각해보면 대단하죠.

 

> 영화 맘마 미아!를 보았습니까? 피어스 브로스넌의 “노래”는 대단했습니다.

 

CL: [상당히 불쾌해하며] 끔찍해요. 그건 그냥 마임이예요. 예전 같았으면 브로스넌은 립싱크를 해야했을 겁니다.

NT: 대체 왜 립싱크를 하지 않는 거죠? 요즘엔 왜 다들 자신이 노래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건 오만한 겁니다. [생각에 잠기며] 물론, 난 영화를 보지 않았습니다…

 

> 그건 일종의 동의를 구하는 –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식의 배역선정 아닐까요?

 

NT: 흠, 난 동의할 수 없어요.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CL: 이게 다 가라오케 때문이예요.
NT: 내가 마지막으로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른 건 뉴캐슬에서 [화가] 샘 타일러-우드의 전시회에 갔을 때 였죠. 뒤풀이 파티에 가라오케가 있었어요. [갤러리스트] 제이 조플링이 이러더군요, “West End Girls를 예약넣을 거니까 – 불러야돼요.”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난, 어떤 상황에서도, 그건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두들 졸라대서, 결국 불렀습니다, 그리고 트레이시 에민이 끼어들었죠. 물론 트레이시 에민이 끼어들고 난 뒤에는 상황이 우스꽝스러워지고 말았죠.

 

> 올해 브릿 어워즈에서 공로상을 수상했죠?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까?

 

CL: 음, 수상을 전적으로 환영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좀 달라요. 팝의 중요성을 천명하는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록이 모든 걸 다 이룬 건 아니잖아요.
NT: 우리가 받을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EMI에서 우리에게 전화해서 말하기를, “그들이 상을 수여한다면, (a) 상을 받아들일 건가요? 그리고 (b) 시상식장에 갈 건가요?” 나는 그들이 아직도 우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단 사실에 놀랐습니다! 1987년에 West End Girls로 최고의 싱글 상을 받을 때 크리스는 시상식장에 가지 않았거든요.

 

> 당신들은 광고를 찍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존 라이든은 버터 광고를 하고 있고요, 석스는 생선튀김 광고를 하고 이기 팝은 자동차 보험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원칙을 가진 뮤지션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NT: 우리는 광고를 안 하기로 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CL: 아이팟 광고는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 광고 덕분에 Viva La Vida를 들었거든요…
NT: 크리스가 이런 문자를 보냈어요, “콜드플레이가 엄청 좋은 레코드를 만들었어!” “이상한 소리 하지마!” 제노매니아에서 음반 작업을 할 때, 우린 바운티 초콜릿 하나를 반씩 나눠먹곤 했어요. 그들에겐 이게 정말 재밌었나봐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운티 반쪽을 들고서 “바운티: 반쪽씩”이라고 말하는 광고를 찍는 건 어떨까 하는.

 

> 오래된 스매시 히츠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80년대 팝 스타들을 당혹케 했던 불손하기 짝이없는 질문]

 

NT: 아니오! 크리스가 어제 투덜거리더라구요, “이제 더이상 우리에게 좋은 질문을 하지 않아…”
CL: 좋은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어요, 정말 좋은 질문이었죠. 우리가 받은 유일한 좋은 질문 – 미안해요! – 좋은 질문은 이런 거였어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폰 응용프로그램은 무엇입니까?

 

> 그럼 스매시 히츠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당신이 도시의 중심부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NT: 아뇨,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도시의 중심부라면 난 아마도… 난 베를린일 겁니다. 여기저기서 재건축이 이루어지고; 노후된 곳도 많구요…하하!
CL: 엄…[당황하며] 내가 도시의 중심부라구요? 정말 이상한 질문이군요.
NT: [설명하며] 내가 스매시 히츠를 그만둔 뒤에 그리 되었죠, 스매시 히츠는 상당히 초현실적으로 변모했습니다. 방종을 부리기 시작한 거죠. 아마도요.

 

> 좋습니다 그럼, 가장 좋아하는 아이폰 응용프로그램은 뭔가요?

 

CL: 내가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건 체크 플리즈라는 건데요. 그건 몇명의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는지 등을 보여주는 일종의 퍼센티지 정보예요.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이 각기 얼마의 돈을 내야하는지도 알려주기도 해요…

 

> 그리고 30분 후에는…

 

CL: 아뇨, 그건 그냥 일시적인 거예요. 물론, 계산기로도 같은 걸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기본적 수학 지식이 있어야합니다.

 

A ROUND WITH PET SHOP BOYS

They are, but of course, British pop’s national treasure and now have the Brit to prove it. None of which is as exciting to either of them as the prospect of half a Bounty.

WORDS JOHNNY DAVIS

> It’s Q’s round. What are you having?

Neil Tennant: A filter coffee.
Chris Lowe: Nothing, thanks.

> You’ve just completed your new album, Yes, with Xenomania, Girl’s Aloud’s production team, led by hit-maker Brian Higgins…

NT: Oh yes, he loves hit records.
CL: Well, we all do.
NT: Yes, but he really takes the biscuit. Working at Xenomania reminded me of working at Smash Hits [’82-’84] cos you’ve got this house full of people and they’re all totally into music. And they all have comments to make. A truly great atmosphere.
CL: And you get marked as well!

> With a red pen?

CL: No, no, on the computer. Like on iTunes, where you have a staring, and you get comments.
NT: “Brilliant”…”Rubbish”…
CL: It’s ruthless! [Hooting] It’s fantastic!
NT: You get quite chuffed: “Brian thinks my bridge is brilliant.”

> Chris, you get a spoken line on the new album: “Who do you think you are, Captain Britain?”

CL: Yeah, I was tlod to say that. I’d never heard of him.
NT: It was scripted by me cos I was the London editor of Captain Britain at Marvel Comics [’75-’77. Tennant explains at length how he told his superiors why a British version of Captain America would never work, but they didn’t listen].

> Well, it’s nice to hear your voice for the first time since I Believe In Ecstasy, the hidden track on 1993’s album Very.

NT: There’s a song not on the album – on the bonus disc, in the modern way – called This Used To Be The Future, sung by me, Chris and [The Human League’s] Phil Oakey. So Chris actually sings on it…
CL: Through the wonders of technology. It’s amazing what you can do now.

> Have you seen the Mamma Mia! film? Pierce Brosnan’s “singing” is quite remarkable.

CL: [Quite cross] Dreadful. It’s just panto. In the old days Brosnan would have mimed to a singer.
NT: Why didn’t he do that? Why does everyone think they can sing these days? There’s such an arrogance about it. [Thinks] Of course, I haven’t seen the film…

> Isn’t that part of the appeal – the “anyone can do it” casting?

NT: Well, I object to that. Anyone can’t do it.
CL: It’s karaoke that’s to blame for this.
NT: The last time I did karaoke we went to [artist] Sam Tyler-Wood’s exhibition in Newcastle and they had karaoke at the party afterwards. [Gallerist] Jay Jopling said, “We’re going to put West End Girls on – you’ve got to sing.” I said, “I am not, under any circumstances, going to do that.” Everyone insisted, so I went and did it, and then Tracey Emin jumped in. So, of course, it turned into a joke with Tracey Emin.

> You picked up the Outstanding Contribution Award at this year’s Brits. Were you tempted not to accept?

CL: Well, we don’t really approve of awards. But this one is a little bit different. It acknowledges the important of pop in the world. You know, it’s not all rock.
NT: I didn’t think we’d get it. EMI phoned and said, “If they give you this award, (a will you accept it? And (b) will you turn up?” I was impressed that was how they still thought of us! When we got the award for West End Girls in 1987 for Best Single, Chris didn’t turn up.

> You don’t “do” ads, but now John Lydon is advertising butter, Suggs is doing fish fingers and Iggy Pop’s selling car insurance. What happened to musicians with principles?

NT: Oh, well we’ve given up on all that. That’s the way it is now.
CL: We’d love to be in an iPod advert. That’s how I got to hear Viva La Vida…
NT: Chris text me and said, “Coldplay have made a really good record!” “Don’t be ridiculous!” At Xenomania, after we’d done some work, we liked to have a piece of chocolate, a plain chocolate Bounty. And we’d have half each. They thought this was completely hilarious. So we were thinking we could do an advert where we open up the Bounty, have half and say, “Bounty: half each”.

> Has anyone ever asked you the old Smash Hits questions? [Notoriously irreverent enquiries that perplexed ’80s pop stars]

NT: No! Chris was complaining yesterday, “We don’t get asked any good questions any more…”
CL: We did get asked one, and it was great. The only good question – sorry! – a good question that we got asked was, “What’s your favourite iPhone application?”

> Here’s a Smash Hits one, then: Have you ever thought you were a city centre?

NT: No, I haven’t thought I was a city centre. But if I was a city centre I would probably be… I’d be Berlin. A lot of rebuilding; a lot of decay…Ha ha!
CL: Erm…[baffled] If I was a city centre? That’s a very odd question.
NT: [Explaining] It was the period after I left Smash Hits, when they got slightly surreal. To the point of self-indulgence. Possibly.

> Alright then, what’s your favourite iPhone application?

CL: The one that really thrills me is Check Please. It works out how many people are dining, the percentage tip, and it tells you to the penny how much each person needs to put in…

> And an half-an-hour later…

CL: No, it’s instant. Yes, a calculator could do the same thing, but you need some basic mathematical skills to be able to do that.

Chris Frantz(Talking Heads) interview

Almost 30 years on, Tom Tom Club’s debut sounds as bright as when the stylus hit its grooves the first time round. Sprightly, breezy and infused with an unselfconscious sense of fun, it sounded – as it still does – like a very modern record. Drawing a line in the sand, Tom Tom Club eschewed the influences of their CBGBs contemporaries by immersing themselves in funk, R&B and the then-revolutionary sounds of the nascent hip-hop movement.

인터뷰 보기

모리시, 비니 라일리 그리고 [Viva Hate]

모리시의 솔로 데뷔 앨범, [Viva Hate]에 관한 얼터너티브 프레스의 기사이다. 원문은 모리시-솔로닷컴에서 볼 수 있다.

COOL의 기원>>>

고전 다시보기

모리시

증오 만세

스미스의 해체 후 얼마 안 되어 녹음/발매 된 모리시의 솔로데뷔 앨범은 여전히 그의 가장 뛰어난 정규앨범으로 남아있다. 이 비참의 대명사가 얼마나 동료를 좋아하는지 데이빗 헤밍웨이가 입증해 보일 것이다.

모리시가 스티븐 스트릿과 듀러티 컬럼의 비니 라일리와 함께 녹음한, 비바 헤이트는 모리시가 스미스의 해체로 비롯된 들뜬 분위기에 안주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보여준 앨범이었다. 물론 그렇게 단언하기엔 앨범이 다소 유행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긴 하지만 – 심지어 모리시조차 앨범을 “뜻했던 바대로 얻어낸 결과라기보다는 어쩌다 일어난 일에 가깝다”고 표현하였다 – 비바 헤이트의 많은 수록 곡은 여전히 당신을 흥분시킬 만큼 좋은 음악이다. 처음 듣는 이들을 위해 제목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그것은 통쾌할 정도로 염세적인 제목이다. 모리시의 말에 따르면, 비바 헤이트는 원래 뒤집힌 교육이라는 가제를 달고 있었으나, 최종 제목인 비바 헤이트가 갑자기 떠올랐다고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증오의 감정은 넘쳐나고 사랑의 감정은 찾아보기 힘들죠. 증오는 세상이 굴러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광란적이고 집요한 비니 라일리의 기타 사운드로 포문을 연 비바 헤이트는 불친절하고 급작스럽게 끝을 맺는다, 마치 길로틴에 의해 잘려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너와 그는 연인이었던 거야?/그랬다면 그렇다고 말해/시트 위/텐트 안에서/너의 텐트가 활짝 열린 채.”라는 다소 천박한 가사가 모리시의 목소리를 통해 강렬하게 드러나는 첫번째 트랙, “알사스인 사촌”은 앨범의 가장 뛰어난 수록 곡 중 하나이다. 마지막 곡인 “사형대의 마가렛”의 경우, 대처를 자극시키기 위해 던진 다음과 같은 가사 덕분에 모리시는 경찰에 취조 당하기까지 했다. “언제 죽을 거야? 언제나 돼야 죽을 거냐구?”

또 다른 측면에서 비바 헤이트는, 아역스타로 인생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나이 들어버린 이의 운명에 대한 고찰한다든가 (“별 볼일 없는 녀석, 이젠 또 뭐야?”), “폐쇄되었어야만 하는 한 해안마을”에 핵폭탄이 떨어지길 빈다든가 (“매일매일이 일요일 같아”) 혹은 (비록 끔찍이도 재미없는 풍자이긴 했지만) 전통의상을 온몸에 걸치고 다니는 벵골인들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든가 (“승강장의 벵골인”) 하는 등의 모리시의 영국성(性)에 대한 집착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앨범의 가장 중요한 곡이자, 기묘하게 늘어지며 단조로운 “늦은 밤, 우수에 찬 거리”는 1972년 무렵의 어린 모리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3곡 중 첫 번째 곡이다. (나머지 곡은 “가족을 해체해”와 “스웨이드헤드”) 라일리의 부드러운 기타 연주 위로 모리시가 이렇게 읊조린다. “난 다른 이들의 즐거운 시간에 몰래 손 댄 적 없어.”

“그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습니다.”. 라일리가 그 곡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모두가 그렇게 느꼈고 다들 별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만은 제스터 게임을 하지 않았죠, 내 장담 합니다.“

“가족을 해체해”에서, 모리시는 친구들과 헤어지던 유년기의 기억을 떠올린다. (“행운을 빌어줘, 친구. 안녕.”) 이것은 모리시가 스미스 시기에도 또 그 이후에도 반복해야 했던 일이기도 하다: 비바 헤이트의 제작이 끝나고, 그는 다시는 라일리나 스트릿과 함께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데이빗 헤밍웨이와 비니 라일리의 대화.

어떻게 비바 헤이트의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나요?

스티븐 스트릿이 듀러티 컬럼의 앨범 두 장을 프로듀스 했었습니다. 그는 모즈(모리시)를 위한 코드와 곡 구성을 짜고 있었죠. 그들은 몇 개의 러프한 데모를 만든 상태였는데, 건반과 샘플 스트링, 기타를 연주할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그래서 스티븐이 나에게 제안을 했죠. 모리시는 꽤 맘에 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어요.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작업에 들어갔을 때, 내가 모든 음악을 다시 쓰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스티븐 스트릿이 잘했다, 못했다를 평가하는 건 아닙니다 – 그는 뛰어난 프로듀서예요 – 하지만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곡을 다시 썼어요. 모든 작업은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나는 그들을 매우, 매우 좋아해요.

이전에도 모리시와 친분이 있었어요?

몇 번 그를 보긴 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 혼자였어요. 조이 디비전의 공연을 보러 오거나 했었죠. 혼자 있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모리시의 여성 친구이자, 맨체스터의 펑크 밴드인 루더스 (Ludus)의] 린더와는 어울리곤 했습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 전까진 인사도 나눠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스미스의 팬이었습니까?

“순이는 지금 어때”를 듣자마자 그들을 좋아하게 되었죠. 정말 뛰어난 곡입니다. 엄청난 기타 리프와 보컬을 담고 있어요. 멋진 곡이죠.

모리시의 다른 음악을 들어보았나요? 최근의 곡이라던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바 헤이트 이후의 곡은 별로 듣지 않았어요. “국제적 바람둥이들의 최후”는 들어보았습니다만… 별로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로커빌리 스타일의 음악은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거든요. 관심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꽤 불행한 일이죠. 난 내가 듣는 음악에 대해 세밀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클래식 음악, 플라멩코, 남아프리카 힙합처럼요. 내가 절실히 원하는 스타일의 음악이 있죠.

모리시와 작업하는 건 어땠나요?

즐거웠어요. 음악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구요. 반주의 음량을 낮추면 어느 부분이 절(verse)이고 어느 부분이 코러스인지 알 수 없게 되는데요, 그는 코러스를 불러야 하는 부분에서 절을 불렀고 절을 불러야 하는 부분에서 코러스를 불렀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신선하다는 느낌을 줬어요. 그가 과연 어떤 음으로 노래를 부를 것인지 항상 기대할 수 밖에 없었죠.

함께 제스터 게임을 하거나 음식 빨리 먹기 게임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모리시의 냉소적인 유머감각 덕분에 우린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리시는 애정을 담아서 날 놀려먹곤 했어요. 매우 친절하고 재밌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그와 작업할 마음이 있습니까?

비바 헤이트 이후에도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을 받았었죠. 하지만 난 그걸로 내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했어요. 내 작업을 하는 중이기도 했구요. 또한 나는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일을 하는데 능하지도 않고, 관심이 많지도 않아요. 내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거든요. 나는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고 그것에 전력을 다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모리시와의 작업이 당신에게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까?

나 자신의 음악을 다루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비바 헤이트를 만들 때는 내 접근법을 바꿀 필요가 있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나의 방식을 취했습니다. fin.

 

 이 인터뷰에선 좋은 얘기만 하는 비니지만, 모리시의 비공식 다큐멘터리, [주얼 인 더 크라운]에서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한다. 그는 모리시와 스티븐 스트릿이 비바 헤이트의 작곡 크레딧에 자신을 이름을 안 올려준 것이 영 섭섭한 모양이다. 비바 헤이트의 전곡은 모리시/스트릿으로 크레딧이 올라있다.

데이빗 린치VS 데이빗 번

 

Q .이름이 데이빗?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Q.예술학교 다녔다던데?

데이빗 린치-난 펜실베니아 미술학교 2년 중퇴

데이빗 번- 나도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2년 중퇴

Q.처음에 머리(HEAD) 때문에 유명해젔조?

데이빗 린치-난 70년대 말 실험 영화 eraserhead

데이빗 번-나도 70년대말 실험적인 밴드 talking heads

Q그 담엔 사람(man)덕에 그유명세 이어갔조?

데이빗 린치-난 80년대 elephantman

데이빗 번-나도 80년대 television man

Q.지리멸렬한 중산층 생활과 사이이코 킬러에 관심이 맞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Q.본격적인 메인스트림에서의 성공은?

데이빗 린치-난 캐나다 국경과 접한 워싱턴의 한 작은 마을의
기괴함을 다룬 첫번째 TV시리즈 ‘트윈픽스’감독

데이빗 번-나도 멕시코 국경과 근접한 텍사스의 한 작은 마을의
기괴함을 다룬 첫번째 영화 ‘트루 스토리스’감독

Q.본업외에 다른 분야에 참여한적은?

데이빗 린치-줄리 크루스 음반에 가사참여

데이빗 번-TWYLA THARP의 발레 CATHERINE’S WHEEL 작곡 참여

Q 당신들 성(姓) 모두 잔인한 살인과 관련이 있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lynch …(~을 린치[사형(私刑)]를 가하여 죽이다[교수형으로 하다])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BURN과 발음 비슷-_-? <美俗> 전기 의자에서 사형에 처해지다.)

Q 기괴한 이름가진 파트너가 있조?

데이빗 린치-안젤로 바달로멘티(ANGELO BADALOMENTI)

데이빗 번-브라이언 이노(BRIAN ENO)

Q.당신 작품이 브룩클린 음악 학교에서 공연된적이 있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Q타임지 표지에 실린적 있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