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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a Rev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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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lecter Berlin 1980” by Braunov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Ska는 60년대 초반에 생겨난 음악장르이다. 당시 저매이카인들은 뉴올리언즈의 R&B 스타일을 재창조해내려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으로 스카 아티스트들은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적 감각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레게(Reggae)로 발전했다. 70년대 후반 일단의 영국 밴드들은 오리지날 스카 싸운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들은 스카에 신경질적인 펑크리듬을 첨가했다. 한걸음 더나아가 이 “스카 복구주의자(Ska Revialist)”들은 그 당시로써는 획기적으로 인종적으로 혼합된 라인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정치적 발언이었다. 주도적인 스카 복구주의자는 The Specials, Madness 등 이다. 하지만 이들의 인기는 영국내로 국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는 일종의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고 한참 후에 등장한 Rancid, Mighty Mighty Bosstones, No Doubt 와 같은 밴드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요앨범

The Untouchables: Live & Let Dance [1984]
The Beat: What Is Beat? [1983]
Bad Manners: Klass [1983]
The English Beat: I Just Can’t Stop It [1980]
Selecter: Too Much Pressure [1999]
Members: Sound of the Suburbs: A Collection of the Members Finest Mo [1995]
The Specials: Singles Collection [1991]

AllMusic 참조

펑크(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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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ones by ian dickson 1977” by Ian Dickson – http://pinterest.com/source/newyorkology.com/. Licensed under Attribution via Wikimedia Commons.

일반적으로 펑크라고 하는 용어는 반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십대나 어린아이에게 적용된다. 또한 이용어는 1950년대 테디스(Teddies)의 최신 변형과 1960년대 모즈(Mod)족, 1970연대의 런던에서 볼 수 있던 특별한 의상 스타일을 묘사하는데 쓰이곤 했다.

미국에서는 비트닉스(비트족)나 히피가 어느 정도 유사한 용어로 쓰였다. 펑크는 이들과 어느 정도 달랐다. 왜냐하면 펑크는 법 외에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타입의 공통된 요소는 이것들이 반인습적이며 반제도적이었다는 것이다.

펑크는 의심할 것도 없이 1970년대 중반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앨비스 프레슬리의 의상 스타일이나 특히 그의 헤어 스타일에는 펑크적인 면이 있었다. 또한 1960년대에는 롤링 스톤스, 후, 프랭크 자파 등등 많은 본보기적인 펑크 뮤지션이 있었다. 이 용어가 음악적으로 적용되기 이전에는 강한 발언과 이상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펑크의 일원으로 낙인 찍혔다. 지미 헨드릭스는 파괴적이며 때때로 무대위에서 기타를 때려 부수고는 했기 때문에 펑크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뮤지션들은 초기 펑커들이었다.즉 이들은 단순히 그들의 공연을 위한 하나의 행위로 행했을 뿐 펑크에 전적으로 몰두하지는 않았다.

펑크는 세 번째의 록 혁명이었다. 최초로 록큰롤의 형성이 있었다. 두 번째로는 비틀즈가 1964년에 혁명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펑크 운동은 1976년에 시작되었으며, 펑크 물결은 음악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것은 반 정부적이었고 반 사회적이었으며 기존 질서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였다. 그것은 파괴적이었고, 염세적이었으며, 인생에 대한 황량한 소망을 드러냈다. 펑크는 또한 대부분이 실직 상태에 있던 영국 젊은이들을 대변했다.

음악적으로 펑크는 록에 대한 권태, 특히 미국 록에 대한 반발이었다. 초기 펑크 밴드들은 디스코, 아트 록, 재즈 록 같은 1970년대에 록이 만들어낸 모든 것 즉, 록의 상업화에 명백히 반대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펑커들은 록큰롤을 1950년대식 스타일로 되돌리고 싶어했으며, 정확하게 현실을 전달하는 가사를 담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했다. 본질적으로 펑크 철학은 허무주의나 반예술주의이다. 어떤 면에서 펑크 밴드들은 ‘일회용’에 불과한 것이었다.

펑커들은 단지 녹음하기 위해서 그룹을 결성하고는 했다.실지로 그들은 그리 많이 연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테크닉은 그들이 추구하는 요점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매우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연주 스타일이 그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들은 정교한 레코딩을 원하지 않았다.펑크는 대중매체를 거부하고 그들 자신의 언더그라운드 매체를 창출해 내었던 것이다. 펑크 밴드들은 독자적인 레코드 레이블과 싸구려 악기를 이용했고, 자동차 차고에서 녹음하는 형식인 가리지(Garage)레코딩을 탄생시켰다.

출처 : http://popsong.netian.com/

영국 테크노의 역사

영국 테크노의 역사는 곧 테크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국의 테크노의 태동에서 변천을 거쳐 현재의 대중화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비단 테크 노만이 영국 대중 음악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경향을 대변해온 장르는 아니겠지만, 테크노의 변천 추이를 되짚어 보면 7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모든 영국 대중 음악의 기술적인 발자취와 거의 상통한다는 점에서 진보정신의 순수한 모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테크노의 기원과 기본적인 틀은 독일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그 형식의 다양성과 실용성을 갖춰 다각적인 테크노의 붐을 일으킨 것은 영국의 몫이었다.
영국이 공업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온갖 공장들이 각처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다지만 소규모 전자 제품이나 악기를 만드는데는 그다지 신통한 재주가 없었던 관계로 영국의 뮤지션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악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고 웬만큼 악기레 이블의 협찬을 받거나 밴드의 지명도가 있기 전까진 사구려 중고 악기에 의존하는 뮤지션들이 많은 것이 음악 강국 영국의 현실이었다.

그런 탓에 영국의 테크노는 테크노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중견 뮤지션들이나 비교적 생활이 윤택했던 인텔리 출신의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시작될수 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대중 지향보다는 아트록과 결합되거나 뮤지션의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기 위한 솔로 앨 범의 도구로 이용될 뿐이었다(독일과는 달리 젊은 뮤지션들 사이에 테크노 바람이 일기까 지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굳이 조그마한 바(bar)나 클럽에서 공연을 할 이유가 없었던 부유한 테크노 뮤지션들의 대개는 아트 스쿨 혹은 공학도 출신이었는데 그런탓에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사운드를 표출하기 보다는 자기 도취적이고 약물과 연계를 맺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들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사이키델릭과 아트록의 붐에 편승해 등장한 전자 사운드를 표출하는 여러 실력파 밴드들은 첨단기기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기계적 비트와 갖가지 다양한 효과음을 실전에 활용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테크노 취향의 음악들로 방향을 우회하게 된다. 70년대 초 공간과 시간에 대한 묘사를 담은 호크윈드(Hawkwind)를 비롯한 스페이스 록 밴드들이 바로 영국 테크노의 시발점인 셈이다.

인간적인 풋풋한 연주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극단적인 표현양식을 추구한 이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자 각종 전자음악을 구사하는 밴드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고 그 중 74년은 테크노와 전자 사운드의 기념비적인 해로 일렉트로폰(Electrophon)의 Zygoat, 세븐스 웨이브(Seventh Wave)의 Things to come등의 명반들과 브라이언 이노의 초기 앰비 언트적인 작품들이 속출한 시기였다.

특히, 브라이언 이노는 글램적인 요소가 다분한 록시 뮤직(Roxy Music)에서의 활동을 끝 으로 각종 프로젝트 결성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로버트 프립, 로버트 와트와 펼친 일련의 작품들은 스페이스 록 차원이 아닌 그 이상의 진보성과 의미를 지닌 작업들이었다. 이후 패트릭 모라즈, 릭 웨이크만, 마이크 올드필드, 릭 라이트 등의 건반 연주자와 리퓨지, 킹덤 컴 등의 밴드들이 신서사이저/키보드로만 일관된 음반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테크노의 기법상의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로 두번째 변혁이었던 것이다. 그후 78년경 브라이 언 이노가 표방한 앰비언트에 대한 연구, 천재 뮤지션 에디 좁슨등이 발견되면서 신서사이저 와 드럼 머쉰을 통한 원맨 밴드 붐이 가열됐고 테크노는 매니어들 음악의 최상의 선택으로 끊임없는 지지를 얻게 된다.

80년대 이후 테크노는 영국 대중음악 신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다시금 인식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댄스 음악과의 접목을 통하면서부터다. 이것은 70년대 말엽까지의 매니어 취향, 혹은 극단적인 실험 음악 형태의 테크노를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으로 변모했다 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왜 이러한 테크노의 댄스 뮤직화의 시발점이 하필 영국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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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Big Ben Phone box” by , wiki+spam@eindruckschinderdomain.de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2.5 via Wikimedia Commons.

그것은 앵글로 색슨족의 자기 우월주의와 타인종,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방식에서 이유 를 찾을 수 있다. 흑백이 공존하는 그리고 식민지 작업을 통해서 많은 인종을 거느리고 있 었던 영국이었지만 유독 백인 위주의 문화만이 토착화 되면서 영국에는 흑인의 그루브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런 연유로 마땅한 댄스음악이 생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은 안팎으로 상황이 좋았다. 댄스음악 빈곤에 대한 자기 반성과 함께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디스코가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쳐 주춤하면서 전자 음악의 힘을 빌기 시작한것이다(아울러 영국에는 많은 수의 악기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다소간의 흑인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들은 디스코로 패셔너블한 부분들에 관심을 갖던 모던 보이들은 뉴 웨이브(New Wave)로 각각 제 갈길을 찾기 시작했다. 두가지 음악은 공존하면서 기술적인 많은 부분들을 협력하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부터 테크노는 그 세력을 독일에서 영국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카바레 볼테어, 조이디비전으로 시작된 뉴 테크노 사운드의 움직임은 휴먼 리그(Human League), 뉴오더(New Order), ABC, 하워드 존스(Howard jones),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 팝과 테크노 댄스를 혼합한 음악들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영국 음악의 부흥은 시작됐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 펼쳐진 일련의 음악들은 테크노라는 의미보다는 전자음악, 뉴 웨이브라는 의미로 통용될 뿐이고 또 확실히 기계에 의존하는 부분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앰비언트라는 장르와 인디펜던트라는 의미, 매니어용 댄스라는 구분이 알려지면서 대도시 클럽과 소규모 공연장을 중심으로 분파가 갈려지기 시작했고 테크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거듭됐다. 유투(U2)와 데이빗 보위(David Bowie) 같은 대스타들이 새로운 조류와 브라이언 이노 같은 대 뮤지션을 섭렵하여 자랑스레 대중앞에 섰고 테크노 는 단숨에 인디펜던트 음악에서 오버그라운드, 메인스트림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믹싱 DJ나 스튜디오 맨에 불과하던 사이드 뮤지션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관중을 포섭 하기 시작했고 하나 둘씩 스타밴드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모던록/얼터너티브란 모호함을 함축한 장르가 가세하면서 상승세의 테크노 뮤지션들까지 덩달에 매체에 알려지 게 되었고 그들 역시 상종가를 누리면서 모던록 스타들의 뒤안길에서 믹싱 작업을 조달하 던 테크노 보이를 청산하고 서서히 전면에 나설 채비를 해가고 있었다. 록 음악에서 제휴 한 과격한 행동과 사운드를 선보이기 시작한 프로디지(Prodigy)나 케미컬 브러더스(Chemical Brothers)와 같은 팀들이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빅히트를 하게 되자 테크노는 완연한 대중 가요로 정착되게 된다.

테크노가 완연한 인기를 얻을 즈음 영국에선 괴이한 현상이 발병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분별한 장르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테크노의 수직 상승이 장르 탄생의 모태가 된 셈인데 덥(Dub), 트랜스(Trance), 레이브(Rave), 트립 합(Trip Hop),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 하드코어 테크노(Hardcore Techno), 신스 팝(Synth Pop)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장르들이 탄생했고 단명했으며 다른 장르와 연대하여 또 다시 생성했고 장르에 관한 설명서 가 있어야 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장르와 명칭에 혼란을 겪게 됐다. 90년대 말로 치닫는 현재의 테크노는 이제 브릿팝(Brit Pop)이라는 화두를 무참히 잠재우고 영국을 넘어 세계 각지에 그 세력을 확장 시키고 있는 영국 대중 음악의 최고의 장르이자 글로벌 사운드가 되어있다.

http://myhome.shinbiro.com/~www098/techno2[1].html

Acid House

애시드 하우스는 하우스에서 파생된 것임에도 주류 하우스의 안티테제로서 등장하였기 때문인지 하우스와는 유사성보다 차별성이 더 두드러진다(하우스의 흑인적인 냄새는 애시드 하우스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하우스는 미국에서, 애시드 하우스는 유럽에서 배양된다). 애시드 하우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롤랜드 TB-303 아날로그 신서사이저인데, 그 몽환적이면서 미니멀한 특유의 TB-303 모듈레이션(modulation:변조) 음원은 애시드하우스 자체를 대표한다. 애시드 하우스는 레이브가 절정에 달했던 88-92년 사이 유럽, 특히 영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지만, 레이브가 주춤해진 현재 과거 같은 명성을 얻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현재 테크노 씬을 주름잡는 뮤지션 대다수가 과거 애시드 하우스에 경배했던 ‘레이브 키드’였다는 사실은 90년대에 애시드 하우스가 얼마 만큼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추천 앨범:
Plastikman Muzik (1994)
Plastikman Consumed (1998)
Hardfloor Respect (1995)
Lords Of Acid Lust (1991)
Drum Club Live In Iceland (1995)

TB-303.jpg
TB-303” by User ミシャー on de.wikipedia – Quelle: selbst fotografiert
Fotograf oder Zeichner: ミシャー.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롤랜드(Roland) TB-303:현재까지도 이 악기는 테크노 씬의 중요한 위치를 점거하고 있다. 한 때 테크노 루프의 90%는 이 악기의 패턴을 응용한 것이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뮤지션들이 장르와 상관없이 자신의 메인 악기로 사용한다. 실례로 팻보이 슬림의 싱글 “Everybody Needs A 303″은 TB-303을 오마쥬한 것이며, 그의 리믹싱 앨범 On The Floor At The Boutique에 수록된 트랙 “Elightenment”에서는 마치 록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라이브 때 긴 시간동안 솔로 애드립하듯이 303 루프의 모듈레이션이 펼쳐진다.
레이브(Rave):레이브는 단순한 의미로 다수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즐기는 ‘올 나이트 댄스 파티’이다. 하지만 레이브는 ‘밀실-클럽-거리-야외(자연)’로 공간을 확장해 가며, 단순한 파티를 넘어선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평가받는다. 초기에는 ‘엑스터시’의 과다한 사용으로 인해 정부 당국이 탄압케 하는 빌미를 제공했지만, 현재는 ‘No Drug/Alcohol’의 슬로건으로 모든 이가 즐기는 축제로서 자리매김한다. 테크노는 레이브의 주요 테마 송이며 실질적으로 테크노의 액트는 레이브에서 발현된다.즉 록이 공연장에서 호흡되듯이 테크노는 DJ의 디제잉으로 레이브에서 표현된다. 레이브의 비공식적 신조는 ‘평화, 사랑, 결속, 존중(PLUR: Peace, Love, Unity, Respect)’으로서, 음악을 통한 정신과 육체가 정신과 육체가 자유롭게 되는 단합적 상태를 지향한다(레이브는 일반 라이브 문화의 뮤지션과 팬의 일반적인 관계와는 다르다. DJ와 청중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서로가 주체이며 객체가 된다. DJ와 청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청중은 보다 능동적이고 참여적이다).

출처불명

각종 장르 설명

다음은 음악전문 도서출판 꾼의 브리티시 모던 록과 Hot Music 1996년 6월의 내용중 일부입니다

1. Ambient

70년대 브라이언 이노(Brian Eno)가 만들어낸 장르로써 90년대 들어 다시 관심을 끌고있다. 거의 명상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음의 변화가 적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일관 하는데 이런 사운드는 청취자의 취향에의 잠재의식 속의 어두운 일면과 청자들의 청력을 몇시간동안 차지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뮤지션으로는 Brian Eno, Aphex Twin, Orb등이 있다.

2. Arsequake

87년에서 83년의 브로드 바톰드 브레이스(Broad-Bottomed Brace)로 지칭된 그룹들, 즉 The Young Gods, Big Black 이 그 대표적인 부류이다. 극단적인 기계음과 강렬한 비트, 기괴함을 주무기로 하는 헤비 록을 추구한다.

3. Baggy

황량한 인디 현상을 내포하고 있는 음악 부류로서 이펙트 페달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에 더하여 드러머의 백 비트가 어우러진다. Shoegazing이 중산층을 겨냥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Baggy는 명백히 노동자 계층을 위한 음악 분야이며 동시에 침체된 분야라 할 수 있다. The Stone Roses, Happy Mondays, Charlantans, Blur 등이 이에 속한다.

4. Drip Rock

Stephen ‘Tin Tin’ Duppy, Prefab Sprout, Felt, Aztec Camera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분야로 이 장르의 음악에는 여러가지가 복합되어져 있지만 대체적으로 싱어로 꽉 채운 듯한 음악과 로맨틱스럽게 꾸민 듯한 풍이 얽혀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5. Dub

레게 음악과 트립 합의 중간쯤 된다고 할까? 세상에서 가장 환상에 잘 빠져들게 만들어주는 장르로 살인과 같은 세상의 여러 추악함을 잊게 해준다. 이 분야의 음악이 긍정적으로 적용할 때는 듣는이의 머리 속을 재정리 할 수 있게하지만 부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때는 나태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이 음악의 대표 밴드로는 Tortois가 있다.

6. Glam Rock

David Bowie, Marc Bolan 으로 대표되어지는 음악 장르로 기괴한 분장과 화장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으며, 70년대 초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뒤에는 Wizzard, The Sweet, Gary Glitter, The Bay City Rollers등이 활동했는데 이들이 노쇠함에 따라 점점 사그라 들어가고 있다.

7. Indie Rock

펑크 록이 인디 레이블에서 발표되면서 대규모 레코드사나 거창한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은 7인치 레코드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런 소규모 레코드 회사들이 인디 록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인디 록은 어떤 형태로든 메이저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인디 록이라고 할 수 없다. 요즘의 인디 라는 것은 찢어진 청바지와 가죽 옷을 몇년동안 입고 싸구려 맥주를 플라스틱 컵에 마시는 사람들을 말한다. 대표 밴드를 꼽는다는 것이 무의미하나 어떤 잡지에서는 스톤 로지스를 최고로 꼽고 있다.

8. Jungle

계속되는 음악의 발전은 특히 댄스 음악의 분야에서 그 강세가 돋보이는데 레이브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인 정글은 BPM 250 이상의 극단적인 빠름과 일정한 포인트음의 딜레이 효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미 외국에서는 중요 장르로 자리집은 만큼 그 파급 속도가 빠른 이 장르에는 Goldie 라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있다.

9. Merseybeat

초기 레코드사의 횡포가 점차 심해지는 가운데, 리버풀은 비틀즈의 성공이후 즉시 여타 밴드들로 꽉 채워졌다. 그 결과 Gerry & The Pacemakers, Billy J.Kramer & The Dakotas 등이 머시비트류로 구분되어졌다. 이 장르는 로큰 롤과 재즈의 한 형태인 스키플(Skiffle), 컨트리적인 하모니가 조화된 장르로서 블루톤스(Bluetones), 라스(Lars), 캐스트(Cast) 등이 이 장르의 인물로 분류된다.

10. New Romantics

60년대 초반 처음으로 시작된 이후 상류층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이 패션으로 발달된 장르이다. 그후 Spandau Ballet 가 인기를 끄는동안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18세기의 댄디나 공립 학교 학생들처럼 보일 정도로 이 장르의 인기는 대단했다. 깔끔하고 귀족적인 외모와 낭만적인 멜로디, 퇴페적인 분위기로 한 시대를 풍미 했었다. 대표 밴드로는 Abc, Duran Duran, Japan 등이 있다.

11. New Wave

70년대 말 한창 득세하고 있던 펑크는 그 과격함과 무례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 받기 시작하였고, 세상은 펑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는 달리 많이 변했다. 사람들은 좀더 살기 좋아짐에 따라 듣기 좋은 것을 찾기 시작했고 그런 취향에 편승해서 아름답고 편안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밴드들이 등장했다. 이 장르에는 XTC, The Knack 등 우리 귀에 친숙한 밴드들이 많이 들어 있다.

12. Pub Rock

주로 퍼브 록이라는 말은 주로 펑크 록 등장 이전인 70년대 전반에 클럽의 소규모 형태인 퍼브(Pub)를 중심으로 충실한 라이브 활동을 행했던 브리즐린 슈워츠와 독스 디럭스 등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음악 장르로서는 과거의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퍼브에서 연주하는 뮤지션이라면 누구라도 퍼브록커이며, 퍼브록은 록에서 리듬 앤 블루스, 컨트리까지의 음악 장르를 불문하고 펼쳐졌다

13. Riot Grrrl

맹렬 여성 붐과 때를 같이한 페미니즘을 한단계 발전시킨 장르이다. 공격적이고 남자들을 능가하는 펑크에 기반을 둔 강력한 음악이 이들의 특징이다.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불안을 대변한 장르로써 음악잡지의 평이나 그 밖의 모든 구속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 음악의 한 사조이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Hole, Seven Years Bitch, Babes In Toyland 등이 있다.

14. Romo

로모가 로맨틱 모더니즘을 뜻하고 있음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글램 록과 나르시즘, 뉴 웨이브 등으로 치장하고 싸구려 신서사이저와 값싼 립스틱에 대한 향수 등으로 그 속에 절대성을 내포하고 있다. 짙은 화장과 성을 종잡을 수 없는 외모등은 이들의 커다란 특징이다. 대표 밴드로는 Orlando, Hollywood 등이 있다.

15. Shoegazing

흔히 드림 팝이라고 불리우는 이 장르는 몽롱한 분위기와 퇴페적인 나른함을 특징으로 한다. 노이즈와 멜로디의 결합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이 장르는 My Blood Valentine 이라는 대표적인 밴드를 가지고 있다.

16. Synth Pop

그룹 Cars 와 Gary Numan에 의해 쉽게 유명해진 음악 장르로 신디 팝이 뜻하는 바는 즉 OMD를 의미한다고 할 정도로 OMD는 이 장르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전기타자수들처럼 쇠잔해져가고 있는 이 분야는 현재 샘플러의 활동만이 눈에 보인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Depeche Mode, Yazoo, Human League, Erasure 등이 있다.

17. Techno

크라프트베르크의 영향하에 원래는 Detroit’s Derrick May, Kevin Saunderson과 Juan Atkins 에 의해서 만들어진 음악이다. 이 장르는 시카고의 하우스 사운드 보다도 더 최면적이며 반복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요즘 거의 모든 전자 음악에 이용되어지고 있는 음악의 분야이다.

18. Trance

엔지니어 혹은 컴퓨터 음악을 하던 이들이 클럽에서 당시 유행하던 터크노 같은 음악보더 좀더 공격적인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 시초가 되었던 이 장르는 듣는 와중에 사람의 정신을 빼놓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대뵤적인 밴드로는 Chemical Brothers, 808 State 등이 있다.

19. Trip Pop

흔히 브리스톨 사운드로 불리우는 이 장르는 최근 가장 각광받고 있는 장르이다. 테크노와 엠비언트, 60년대의 블루스, 재즈에 힙합 리듬이 섞인 이 장르는 퇴페적이고 나른한 분위기로 음악 팬들을 사로 잡으며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브리스톨 3총사로 불리우는 Massive Attack, Tricky, Postishead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0. Hardcore Punk

하드코어 펑크의 시초는 77년, 스토이크온 토렌트 결성을 모태로한 디스체야지의 앨범 “Why”부터 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영국의 하드코어 운동에 가세했고, 이어 익스플롭티드의 앨범 “Troops Of Tomorrow”와 버빙검 출신의 4인조 그룹 G.B.H.의 앨범이 이러한 부류에 편승하였다. 84년 카오스 UK가 앨범 “Short Sharp Shock”를 공개했고, 85년에는 Amebix가 앨범 “Arise!”를 내놓아 하드코어 펑크 흐름을 계승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형성은 점차 메틀 사운드가 가미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86년에는 Conflict가 앨범 “The Ungovemable Force”를 발표하면서 주류를 형성하였고, 87년에는 네이팜 데스가 앨범 “Skam”을, 89년에는 스나이프가 동명 타이틀 앨범을, 88년 Heresy가 “Voice Your Opinion”으로 91년에는 Extreme Noise Terror가 강력한 하드코어 사운드가 깃든 앨범으로 주목 받는다. 그러나 하드코어 펑크는 사운드의 극단적인 요소로 인해 더 이상 자리매김 하지 못한다.

http://community.shinbiro.com/@stage/genre/etc.htm#1

Ready To Dancing?

지난 호 까지 힙합 문화와 음악에 관해 알아 보았다. “1990년대는 힙합과 테크노만 있을 뿐이다.” 라는 다소 과격한 말이 있을 정도로 1990년대부터 현재 까지 힙합과 테크노는 전세계적인 붐을 타고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국내의 테크노라 하는 음악들은 말 그대로 돈벌이에 급급하여 심하게 왜곡 되고, 음악자체를 조롱한 ‘댄스가요’ 일 뿐 의식과 사상이 존재하는 ‘댄스뮤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댄스 뮤직 자체를 저급한 음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 나게 되는데 미국의 아티스트인 모비(Moby)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테크노 뮤지션 혹은 댄스 DJ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음악을 해왔다. 나는 전형적인 뮤지션이었다. 재즈, 스피드 메탈, 하드코어, 펑크, 현란한 뉴웨이브까지 연주 해 봤다. 사실 사람들은 댄스 뮤지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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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y 1” by Uncensored InterviewFlickr.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은 조작 매뉴얼이 전화 번호부 만큼이나 두꺼운 그런 장비 40~50개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 하는 건 일렉트로닉 악기들은 불평을 하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돈을 줄 필요도 없다.

음악을 판단 하는 나의 유일한 기준은, 음악이 주관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오, 헤비메탈, 그건 멋진 음악임에 틀림없어’ 식의 좋고 나쁨을 판단 하는 건 난센스다. 확실히 각각의 음악은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평가될 필요가 있다.” 모비의 말은 댄스 뮤직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껏해야 왜곡된 ‘댄스 가요’ 나부랭이나 듣고 테크노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락(Rock)의 소멸 이후 대두 되었던 또 하나의 대안인 진짜 테크노 음악(Techno Music)에 관해 논해보자. 이 글이 애초에 대중적인 락(Rock) 음악에 기초하여 락음악 팬들이 다른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일종의 ‘흐름’을 보자는 것이였기에 테크노 음악에 대한 관점도 락음악에서 부터 시작 하도록 한다. 테크노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시기가 단지 힙합 붐이 일어 났을 시기와 비슷했을 뿐 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 하도록 하자.
지난 호 중 필자가 “락음악의 마지막 계략은 엉뚱하게도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테크노/일렉트로니카 계열에선 과연 누가 락을 죽였을까? 자, 이제 테크노 속으로 뛰어들기 전 우리는 락음악의 막바지 호투에 잠깐 발을 담궜다 빼야할것이다.

Anti-Rock

테크노의 기원은 물론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락의 부정’ 보다는 훨씬 먼저 행해졌던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먼저 락을 부정하려고 했던 락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 루리드(Lou Reed) 등은 글램 락(Glam Rock) 이라는 장르로 락의 부정을 표면적으로 들어낸 대표로 꼽히고 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 같은 경우는 끊임없는 변신(음악적, 외형적 이미지 모두)으로 디스코를 거쳐 브라이언 이노 와 함께 엠비언트에까지 손을 뻗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1960년대 락스타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는 달리 비대하고 과도한 자신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외모와 음악은 그들의 뇌세포에 까지 깊숙이 침투 한 것일까? 과도한 나르시즘은 과도한 쇼맨쉽(?)으로 표출되었고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도전이나 개혁 이라기보단 ‘도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군중에게서까지도 너무 빨리 ‘도피’ 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보위는 끊임없는 변신으로 글램 록이 사장길에 접어들 무렵인 1975년 Young America을 발표, 아방가르드 디스코(avant-garde disco)를 선보이며 그 난관을 멋지게 빠져나가게 된다.

그 후 1978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성공으로 디스코(Disco)의 황금기에 접어들게 되고(락 팬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테지만….) 현재까지도 여러 장르들과의 훌륭한 융화력으로 더욱 많은 서브 장르를 창출해내는 결과를 낳는다. 그 후 1980년대로 넘어와 뉴웨이브, 나아가 신스팝과 뉴로맨틱스가 있을 것이다.

뉴웨이브의 전조가 퍼브락 이라면 뉴로맨틱스의 전조는 신스팝 일 것이다. 우선 퍼브락에서 출발하여 뉴웨이브를 이끈 인물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 된다. 리버풀 출신의 그는 버디 홀리와 비틀즈, 홀리스(The Hollies) 등에 심취해 10대를 보내며 마침내 1975년 그의 첫 앨범인 My Aim Is True를 발매, 세상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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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Costello 1978”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4646227/.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 앨범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데뷔앨범으론 드물게 호평을 얻으며 그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된다. 이후에 그는 1979년 ‘Armed Force’, 1980년 ‘Get Happy’ 등의 음반으로 1980년대 중반 락이 다시 ‘모던 락’ 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 받게 된다.

코스텔로와 더불어 뉴웨이브의 주역으로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 와 잼(The Jam)을 들 수 있을 것 이다. 프리텐더스는 코스텔로와 는 달리 자신들의 음악을 펑크록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펼쳤고 맨체스터 출신의 버즈콕스(The Buzzcocks)와 함께 펑크 팝(Punk Po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잼은 리듬앤블루스, 소울, 포크 등을 모드(Mode)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구사하는 식의 음악을 선보여 인정 받았다.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악기(혹은 전자음악)’는 주류팝을 반대했던 펑크를 밀어 내면서 기존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자양분으로, 후에 주목 받게 될 뉴로맨틱스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평론가 피터 윅(Peter Wicke)은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합성물의 시대’ 라고 명명 했을 만큼 일정하게 스타일을 분류하기 어려운 스타일들이 많이 대두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스팝과 뉴로맨틱스다.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쳐 클럽(Culture Club)과 같이 락 밴드의 구성을 보일 때는 뉴로맨틱스라는 명칭으로, 디페시 모드 (Depeche Mode), 휴먼 리그 (Human Leag – ue), 울트라 복스 (Ultra vox)와 같이 신디사이저와 보컬 형식을 보이는 밴드들에게는 신스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미미한 차이 였다.

신스팝은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의 영향을받되 그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전자음에 노골적으로 ‘팝적’ 선율을 접목 시킨 형식의 단조롭고 거북함 없는 곡을 양산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디스코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것 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정작 음악적인 감각 보다는 전자기술에 집착한 나머지 밋밋한 음악을 ‘양산’ 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한편 1970년대 말 영국 클럽씬에서는 신스팝과 글램록에 심취한 이들이 데이비드 보위를 기념하는 행사인 ‘A Club For Heroes’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게 되는데 이 행사는 주변 클럽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을 기반으로 뉴로맨틱스의 첫번째 선두주자에 속하는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는 뉴로맨틱스 스타일을 물위에 올려놓은 최초의 밴드라는 찬사를 받으며 뉴로맨틱스 최초의 히트 싱글인 ‘To cut a long story short’를 1980년 영국 싱글 차트 5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성공에 많은 밴드들이 그 뒤를 잇게 되며 울트라 복스, 휴먼리그 등도 히트 싱글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단순 신시사이져음색에 팝적인 선율의 도입으로 군중에 관심을 끌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선 레게 와 디스코 스카를 도입해 좀더 쉬운 음악을 선보인 밴드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펑카폴리탄(Funkaplita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뉴로맨틱스가 흑인 음악과 라틴음악을 어떻게 팝적으로 분해 하고 요약해서 수용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무렵 ‘A Club For Heroes’ 행사의 주도자 였던 보이조지(Boy George)는 펑크 밴드 출신의 드러머 존 모스(Jon Moss)등과 뜻을 합쳐 컬쳐 클럽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은 양성적 섹슈얼리티와 다국적 음악스타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들의 그러한 성공은 1960년대의 티니바퍼(Teenybopper)의 주역인 소녀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때맞춘 MTV 출현 덕분이었다. 그들 (컬쳐 클럽을 위시해 듀란 듀란, 왬(Wham),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우상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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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e Goes to Hollywood in London cropped” by Jane McCormick Smith – Jane McCormick Smith.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이상 뉴웨이브-신스팝-뉴로맨틱스까지의 행보를 간략히 짚어 보았다. 락 팬들은 어쩌면 필자가 여기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들을 ‘역겹게’ 읽었을지도 모르나 위에 나열한 밴드(음악)들의 진화와 테크노 음악과의 연장선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그들에 대한 설명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충분히 감안 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락 음악 팬들은 데쓰(Death Metal) 과 펑크 이후 곧바로 인더스트리얼로 뛰어 넘었을 테지만…) 뉴로맨틱스 신예들의 선전에도 불구 하고 언더그라운드씬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 주자로 단연 인더스트리얼(Industrial)과 앰비언트(Ambien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앰비언트가 좀더 진보적인 전자음악에 대한 갈증을 푸는 역할을 했다면 인더스트리얼은 락음악 팬들을 전자 음악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장본인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Pretty, Hate Machine

인더스트리얼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인물로는 1990년대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나 미니스트리(Ministry)등의 밴드들이 팝차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인간의 소음에 대한 동경은 더욱 오래 전부터 시도 되어왔다.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가인 루이 루솔로(Lui Russo – lo)는 1913년에 이미 인토나루모레(intonarumore)라는 ‘기계’를 연주에 도입 했으며 에릭 사티(Erick Satie)는 1920년대 이미 권총과 타자기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 수용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ese)는 1933년 퍼커션 만으로 이루어진 이오니자숑(Ionisation)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소음을 포함한 어떠한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수 있는 권리 를 주장 하면서 소음을 음악적영역에 포함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영역에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예전의 클래식 음악가들과 다른점은 대중적인 ‘매체’를 적극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1976년대 영국으로 돌아와 인더스트리얼의 시조 라는 칭호를 얻은 스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룹의 리더인 제네시스 피오리지(Genesis P-Orridge)는 1976년 스로빙 그리슬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전위 예술에 몸담던 인물인데 그는 1969년 Coum트랜스미션이라는 아방가르드 예술단체를 결성하여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해오던 인물이다.

그들의 음악 활동은 펑크가 가졌던 부정 및 해체 그 이상의 강도와 충격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쓰였던 기본 악기인 기타, 베이스, 드럼 조차도 거부 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내 비췄고, 기존의 곡 진행 방식 마저 모두 무시해 버렸다. 일 예로 멤버간의 포지션 설정을 “너는 기타를 한번도 쳐보지 않았으니 기타를 치고, 난 드럼에 재능이 있지만 베이스를 연주 하지.” 라는식 으로 결정 했고, 멤버중의 하나가 기타가 너무 무겁다고 하자 아예 기타의 보디를 반으로 잘라서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들의 이러한 음악적 관점에 변조된 이펙터와 신시사이저, 샘플러 등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 였다. 또한 이들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전신이었던 Coum트랜스미션에서 보여주었던 과격한 공연을 보여주어 리더인 피오리지는 정신병자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피오리지는 Coum트랜스미션의 활동 당시 자신의 피를 주사기로 뽑아 재 투여 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 아티스트을 양성하고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976년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게 되는데 소속된 밴드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밴드가 바로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였다.

카바레 볼테르는 리처드 H. 커크(Richard H, Kirk), 스티븐 맬 맬린더(Stephen ‘Mal’ Mallinder), 크리스 왓슨(Chris Watson) 이상 3명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인데 이들은 이미 1973년경부터 신시사이저와 테이프 기기들을 이용한 실험에 몰두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오늘날 머신 리듬(Machine Rhythm)이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트레이드마크를 발전시킨 장본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외에도 이들의 실험은 후에 여러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에게 사운드 표본을 제시하게 된다. 허나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IR)에서는 이들의 초기 작업만을 발매 했으며 정식 데뷔앨범은 1978년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레이블에서 발매되게 된다.

스로빙 그리슬 이나 카바레 볼테르의 선전에 힘입어 1970년대 말에는 인더스트리얼은 IR 레코드에만 국한 되지 않은 더욱 넓은 활동무대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영향력은 음악 만큼이나 파격적으로 영화, 패션, 건축 등 많은 분야게 적용되었다. 신체를 뚫고 불로 낙인을 만드는 이르나 리벳 헤드의 패션 스타일과 연쇄 살인범을 추모하고 약물이나 섹스, 정신질환 등을 주요 소재로 삼는 트랜스그레시브 소설(Transgressive Fiction)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스로빙그리슬이 해체되는 연도인 1981년도를 기점으로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테크노 전조에 대한 신스팝과 뉴웨이브, 뉴로맨틱스 그리고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에 대해 알아 보았다. 다음 편에는 1990년대 들어와 다시 부활하게 되는 ‘변형된’ 인더스트리얼과 테크노에 관해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  

http://www.iautosound.co.kr/200202/auto0502.html 
 

Kraut-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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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lze and Gerard 01” by arcsiLisa ?piewa, Klaus sprawdza Facebook.
Uploaded by S1.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KRAUT-ROCK 70년대 초반의 프로그레시브한 경향 중, 특히 음원(sonic)의 창조적 확장성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독일의 전자 음악을 총칭하여 ‘크라우트-록(Kraut-rock)’ 이라 일컫는다. 당시 영미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재즈나 클래시컬한 성향으로 진화해갔던(<-아트록) 것과는 달리 독일 크라우트-록커들은 기계적(mechanical)이고 전자적(elect ronic)인 사운드에 집중하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다. 낙후된 작업 환경속에서도 신디사이저 작업에 릴테입을 이용한 소스 등을 접목하는(샘플링의 원조)등 첨단의 작업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크라우트-록 밴드로는 파우스트(Faust), 캔(Can), 뉴(Neu),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클러스터(cluster)등을 꼽을수 있다. 크라우트 록커들은 로 큰롤보다는 아방가르드(전위)에 치중했으며 그들만의 특수한 윙윙거 리기(droning), 진동하기(pulsating), 최면걸기(hypnotic)등의 환각 적인 전술은 향후 익스퍼리멘탈 밴드들의 전공필수로 응용되고 있으 며 90년대 후반 현재 가장 첨단 작업으로 주목받는 ‘포스트-록(Post-Rock)’의 표준으로 채택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또한 크라우트-록은 70년대 실행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오히려 80년 대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신스팝과 특히 인더스트리얼 음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Techno

★ 테크노의 역사

테크노는 말 그대로 기술(技術)이란 의미의 ‘Technology’ 에서 따온 단어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컴퓨터의 탄생은 음악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바로 신디사이저라는 첨단 악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테크노 음악도 이와 발맞추어 탄생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의 록시 뮤직 (Roxy Music), 브라이언 이노 (Brian Eno), 독일의 탠저린 드림 (Tangerin Dream),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 등 유럽 지역의 진보 성향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도입해 더욱 실험적인 음악을 발표했는데 이들이 만들어낸 전위적이면서 신비주의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뒤에 등장하는 테크노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초기 테크노 음악은 70년대 후반 디스코, 펑크라는 신조류의 영향을 대거 수용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테크노 팝이라고도 불리우던 이 당시 테크노 음악은 팝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사운드로 전과는 달리 대중적인 인기 또한 얻을수 있었다. 버글즈 (Burgles), 게리 뉴만 (Gary Numan), 울트라복스 (Ultravox), 휴먼 리그 (Human League) 등이 당시 주목받던 뮤지션들이다. 한층 발전된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예전의 실험적인 사운드에서 탈피하여 뉴웨이브 (New Wave), 뉴 로맨틱 (New Romantic), 댄스, 팝 사운드를 차용한 신스 팝 (Synth Pop)은 80년대 초반 대중 음악계의 주류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현재까지 최고의 신스 팝 밴드로 인기 정상을 누리고 있는 디페쉬 모드 (Depeche Mode), 역시 디페쉬 모드를 거친 빈스 클락 (Vince Clark)이 결성했던 야주 (Yazoo, 훗날 이레이저 Erasure로 발전됨), 유리스믹스 (Eurythmics), 하워드 존스 (Howard Jones)등의 음악은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레이저, 프랭키 고즈 투 헐리웃 (Frankie Goes To Hollywood), 팻 샵 보이즈 (Pet Shop Boys), 아트 오브 노이즈 (Art Of Noise)등 영국 신스 팝 계열의 뮤지션들이 더욱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80년대 중반에 와서 테크노는 다양한 세분화를 이루게된다. 샘플링 머쉰같은 전자 악기들이 보편화되면서 새로운 음악적 실험이 이뤄지는데 대표적인 댄스 뮤직인 하우스 (House), 기계적인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 경향의 음악은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테크노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90년대에 등장한 테크노 음악을 일컫는다. 현재의 테크노는 엠비언트 (Ambient), 애시드 재즈 (Acid Jazz), 트랜스 (Trance), 드럼 앤 베이스 (Drum and Bass), 하드코어 테크노 (Hardcore Techno), 트립 합 (Trip-Hop) 등 마치 세포 분열을 연상케 할만큼 수많은 하위 장르로 파생되고 있다.

★ 대표적인 90년대 테크노 뮤지션

불협화음, 전위적인 구성, 파괴적인 기계음 등, 세기말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프로디지 (Prodigy)는 단연 90년대가 낳은 최고의 테크노 밴드이다. (1997년, 테크노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 프로디지와 함께 영국 테크노의 3인방으로 군림하는 케미컬 브러더즈 (Chemical Brothers)와 형제 듀오 오비탈 (Orbital), 이외에도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삽입된 ‘Born Slippy’로 유명해진 언더월드 (Underworld), 테크노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모비 (Moby, 영화 ‘007 네버다이’에 참여) 프랑스의 대프트 펑크 (Daft Funk), 에어 (Air), 독일의 아타리 틴에이지 라이엇, 트립-합을 정착시킨 영국의 혼성듀오 포티쉐드 (Portishead) 등은 90년대 테크노 음악의 붐을 주도한 대표적인 뮤지션들이다.

★ 국내의 경우

정통 테크노 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시도를 국내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달파란 (시나위, H2O를 거친 베이시스트 강기영의 예명)이 발표한 독집 음반 ‘휘파람 별’ 이나 조동익의 영화음악 모음집 ‘Movie’에 수록된 ‘일탈’, ‘현기증’ 등 일부곡 정도랄까 ? 흔히 일반인들이 테크노라고 생각하는 음악들은 대개 댄스 음악에 테크노적인 요소를 양념처럼 첨가한 것 뿐이다. 멜로디가 강조된 음악을 선호하는 국내 정서와 이와는 반대인 90년대 테크노 음악과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다.

이제 테크노는 세기말을 맞이하는 1999년, 중요한 문화 현상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했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 없이 테크노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듯 보인다. 하지만 테크노의 미래가 지금처럼 밝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양한 음악적인 실험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앞서 등장했다 소멸한 여러 장르의 음악들 처럼 테크노 음악도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뮤지션들도 기억하겠지만.

신스팝(synth pop)의 역사

□ 신디사이저(synthesizer)

이미 1870년대에 몇몇 사람들은 전기적으로 생산되는 음악에 대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50년이 되어서야 보다 진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 퀼른에 오직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만 세워진 스튜디오가 있었다. 최초의 신디사이저는 1955년 미국 RCA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초기의 신디사이저는 매우 비싸고 다루기 어려웠다. 1960년대에 진정으로 유용한 신디사이저가 만들어졌다. Don Buchla 와 Bob Moog 가 만든 것들이 그 예이다. Bog Moog 는 신스팝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사용된 미니무그(MiniMoog)나 그 밖의 작품과 같은 신디사이저 제작자로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다. 1970년대에 신디사이저의 생산은 대규모로 성장하였다.

최초의 신디사이저는 아날로그였다. 모든 사운드는 신디사이저의 버튼이나 바(bar)와 같은 움직이는 컨트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로, 그리고 컴퓨터와 연결되는 디지털 신디사이저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MIDI 라고 불리는 인터페이스를 이용했다. MIDI 는 음질이나 박자 등에 관한 정보를 보낸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사운드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운드를 표현하는 숫자들을 보낸다. MIDI 는 이제 대부분의 퍼스널컴퓨터에 있다. 현대 신디사이저를 위한 가장 일상적인 사운드 소스는 샘플링이다. 예로 진짜 사운드의 디지털 녹음. 대부분 그것은 평범한 음악 악기나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에서 추출된다. 때로는 상이한 기술이 섞이기도 한다.

□ 신스팝(synthpop)

1960년대 말 이미 유명한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Beach Boys 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음악을 많이 바꾸지는 않았다. 1968년 최초의 신디사이저로만 연주된 레코드가 발매되었는데 Wendy Carlos 의 “Switched On Bach” 가 그것이다. 그것은 Moog 신디사이저로 바흐를 연주한 음악이었다. 독일에서는 Organisation 과 같은 실험적인 밴드가 1968년 조직되었다. 그들은 1970년 Kraftwerk 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당시 그들은 불협화음이지만 혁신적인 신디사이저 음악을 연주했다. 그들은 1970년대 초반 독일에서 세 개의 앨범을 내놓았다. 그들의 음악은 좀 더 리드미컬해지고 보다 이해하기 쉽게 변해갔다. 1974년 그들은 국제무대의 데뷔작인 “Autobahn”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은 신디사이저와 음향효과가 결합된 20분 길이의 카드라이브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음악을 만들었고 이후 일곱 개의 앨범을 내놓는다. 그들은 신스팝의 스타일을 정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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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Michel Jarre 2008” by Jean michel jarre from flickr user littleO2.jpg: Daniele Dalledonne
derivative work: HekeruiJean michel jarre from flickr user littleO2.jpg.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68년 프랑스의 Jean-Michel Jarre 가 역시 일렉트로닉 음악을 시작했다. 예로 그는 오페라를 신디사이저와 결합하였고 이것이 1972년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첫 앨범 “Oxygene”은 1976년 발매되었다. 그는 클래식과 실험음악에 영향 받아 연주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대부분의 앨범은 통상적인 신스팝과 같은 튠을 사용하지 않는다. 1981년 그는 중국에서 공연을 가진 최초의 서방 음악가가 되었다. 1984년 앨범 ”Zoolook”을 녹음했다. 이 앨범에서는 전 세계 30가지 언어가 샘플링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그는 우주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최초로 녹음하려고 시도한다. 우주비행사이자 색스폰 연주자인 Ron McNair 가 우주선 챌린저를 타고가 우주에서 그와 함께 연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다. 챌린저가 출발 후에 바로 폭발해버렸고 그의 녹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Jarre 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백만의 관중 앞에서 장대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열 장 이상의 앨범을 녹음했다. 이밖에 신디사이저를 초기에 많이 다룬 뮤지션으로 Brian Eno, Mike Oldfield, Pink Floyd, Tangerine Dream, Vangelis 등이 있다.

1970년대 말 특히 영국에서 신디사이저를 주된 악기로 쓰는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Gary Numan, Ultravox, OMD, Human League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Kraftwerk 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Depeche Mode 가 결성되었다. 그들은 Vince Clarke 이 밴드를 떠나 Yazoo(미국에서는 Yaz라 불림)를 결성하고 후에 Erasure 를 결성한기 전까지는 1981년의 그들의 힛싱글 “Just Can’t Get Enough” 과 같은 행복하고 천진난만한 신스팝을 선보였다. 이후에는 보다 멜랑콜릭해지고 어두워졌다. 다른 영국 밴드가 1981년 레코드를 내놓았는데 Duran Duran, Eurythmics, Tears For Fears, Thompson Twins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신스팝의 일종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악기도 사용했다. 캐나다에서 Rational Youth 나 스웨덴의 Adolphson-Falk 가 이와 같은 밴드들이었다. 1984년 Howard Jones, Nik Kershaw, 그리고 독일 밴드 Alphaville 과 같은 신스팝 아티스트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의 다른 신스팝 밴드로는 A-ha, Bronski Beat, New Order, Soft Cell, Visage, Yello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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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talking” by CHR!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84년 유로디스코라 불리는 팝음악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특히 Scotch와 같은 이탈리아 밴드와 Modern Talking 과 같은 독일 밴드가 많았다. 유로디스코는 신디사이저에 기반을 두었기에 신스팝과 구분하기가 어렵다. Pet Shop Boys 의 음악도 유로디스코로 불렸다. 1986년 신스팝의 기반이 약화되었고 이후 오직 신디사이저에 상당 정도 의지하여 만들어진 음악만 신스팝이라 불렸다. 신디사이저는 계속해서 팝음악의 주요한 악기로 자리잡았다. 유로디스코가 영국에 와서 Stock/Aitken/Waterman라는 팀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Kylie Minogue, Rick Astley, Bananarama, Dead Or Alive 와 같은 많은 아티스트를 위해 레코드를 프로듀스했다.  1987년 하우스 뮤직이 영국에 선을 보였다. 이 음악은 본래 시카고에서 출생하였다.(예로 Frankie Knuckles) 하우스는 신디사이저에 기반하여 모노톤과 음향효과가 가미된 댄스음악이었다.

1991년 테크노 음악이 벨지움과 네델란드에 선을 보였다. 이 장르는 본래 1980년대 중반 이후 연주되기 시작한(예로 Derrick May) 디트로이트가 출생지이다. 테크노 역시 신디사이저에 기반을 둔 댄스음악이지만 하우스보다 무겁고 어둡다. 독일에는 U96과 같은 아티스트가 있었다. 1992년 유로디스코가 독일로 돌아온다. 스타일은 좀 더 터프하게 변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프로듀서가 생산한 전형적인 유로디스코 밴드는 흑인 래퍼와 여성 싱어였다. 음악은 신디사이저 멜로디와 래핑, 그리고 심플한 코러스로 구성되었다. 유로디스코는 이제 가끔 ‘댄스’로만 불리울 뿐이었다.

Page, S.P.O.C.K, Sista Mannen Pa Jorden, This Fish Needs A Bike 가 유명한 스웨덴 신스팝 밴드다. Elegant Machinery, Daily Planet, Daybehavior, Encounter, Saft 등이 기타 신스팝 밴드이다. 보다 새로운 스타일의 신스팝 밴드는 미국의 Anything Box, 영국의 Mesh, 독일의 And One 등이 있다. Electronic, Saint Etienne, Kim Wilde 가 신스팝에 가까운 영국 아티스트이다. Melody Club, Kamera, Bobby 등은 신스팝에 가까운 신세대 스웨덴 아티스트이다.

http://www.synt.nu/history/

일본의 뉴웨이브(New Wave)씬 – 글:이종현

안녕하세요. 세 번째 시간을 맞이하는 ‘J’s Musis’의 이종현 입니다. 지난 2주간 밴드붐과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에 대해 얘기를 해봤는데요, 오늘은 뉴 웨이브 편을 2주에 걸쳐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원래 다음주 예정이었던 ‘비주얼 락’ 편은 3월 경에 횟수를 늘려서 다뤄드리기로 할께요.

전셰계적으로 펑크와 디스코가 큰 인기를 모으던 70년대 후반이 거하고 이념, 사상과는 별개의 보다 진보적이고 세련된 음악으로 등장했던 것이 바로 뉴 웨이브죠. MTV로 대표되는 영상 세대를 주요 타겟으로 시작됐던 뉴 웨이브는 포스트 펑크를 비롯, 많은 80년대 음악의 기초가 되기도 했으며 테크노, 얼터너티브 탄생에 큰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일본의 경우 뉴 웨이브는 거의 영미권과 비슷한 시기인 70년대 말에 시작돼 80년대 중반이후 테크노로 대표되는 전자음악과 비주얼 록으로 그 스타일이 나눠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본의 뉴웨이브는 테크노나 비주얼 록의 전향없이 80년대 초반 스타일을 꿋꿋하게 지켜가는 뉴 웨이브 밴드들이 적지 않게 있으며 이 중에는 해외 진출에도 성공한 케이스가 꽤 많기도 하죠. 나이스 뮤직이 일본 시장은 물론 해외 진출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뉴 웨이브 씬을 굳이 언급해야하는 이유는 90년대 일본 대중음악을 뒤흔드는 수많은 실력자들이 과거 뉴 웨이브 바람을 타고 등장했던 수많은 밴드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죠. 문화진보를 요구했던 뉴 웨이브 전사들은 10수년이 지난 현재의 주체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YMO < Be a Superman > 일본 뉴 웨이브의 시작은 70년대 중반 이후 전설적인 두 팀이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바로 YMO라고 불리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와 플라스틱스가 바로 그들이죠. 뉴 웨이브의 시작이자 상업주의 전자음악의 시작으로 알려지는 이들은 멤버 개개인이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며 음악뿐만이 아니라 일본 열도의 문화 전반을 움직이는 주체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3인조로 구성됐던 YMO는 일본 보다 영국에서 먼저 화제를 모았던 특이한 팀이예요. 60년대 사카보토 큐 이후 전무했던 일본 뮤지션의 해외 진출이라는 염원을 쉽게 달성해 준 장본인임과 동시에 해외 뮤지션을 일본에 불러들이는 공로를 갖고 있는 팀이 바로 YM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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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O2008(cropped)” by YMO2008.jpg: The_Junes of Flickr.com
derivative work: Solid State Survivor (talk) – YMO2008.jpg.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밴드 해체 이후 사카모토 류이치는 영화 음악과 현대 음악의 일인자로 세계 시작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로버트 프립, 데이빗 실비앙 등과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패션 디자이너 출신인 다카하시 유키히로는 패션몰 경영과 함께 솔로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또한 음악적인 부분의 핵이었던 호소노 하루미는 일본 앰비언트 뮤직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아이돌 출신 여가수 모리타카 치사토를 부인으로 얻기도 했죠.

YMO 못지 않는 수퍼 멤버 진용을 갖추고 있던 플라스틱스는 해외 활동보다는 내수용 밴드로 각광을 받았었죠. 5인조로 시작된 플라스틱스는 대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밴드 해체 후 사토 치카와 나카니시 도시오는 멜론이라는 팀을 결성해 플라스틱스의 맥을 이어 갔습니다.

한편 밴드의 간판이었던 사쿠마 마사히데는 프로듀서로 변신해 주디 앤 매리, 글레이, 구로유메 등의 앨범에 참여하며 90년대 가장 성공한 프로듀서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음악과 그래픽 디자이너를 겸하는 종합 예술인 다지바나 하지메는 로우 파워스라는 밴드를 결성해 명상 음악에서부터 펑크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을 구사하고 있죠.

뉴 웨이브 음악이 주류 음악과 결탁하면서 더 이상의 뉴 웨이브로의 구실을 못하고 있을 즈음 인디 씬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뉴 웨이브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펑크를, 사운드 기법적으로는 모던함을 추구한 이들은 비교적 전자 음악의 성향은 강하지 않았지만 아이돌 스타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던 대중 음악 씬에 자극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었죠. 일풍당(一風堂), ZELDA(젤다), 우초텐(有頂天), 래핑노즈, 로사 룩셈부르그 등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메이크업을 동반한 퍼포먼스성 공연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80년대 말부터 대학가를 주변으로 새로이 인기를 얻는 음악들이 발굴되고 있었어요. 그런 분위기를 통해 발굴된 팀이 오카무라 야스유키, 카스테라, 소프트 발레, 디렉스(De-Lax), 매스커린 드라이브, 뉴에스트 모델 등이 있습니다. 싱어송 라이터이자 건반 연주자인 오카무라 야스유키는 발라드를 구사하는 가수로 지식인의 사랑을 얻는 독특한 케이스의 뮤지션입니다.

철학적인 노랫말이 돋보였던 카스테라는 기존 음계를 파괴하는 실험을 꾸준히 펼쳐 유니콘과 더불어 대학가의 큰 사랑을 받았던 학생 밴드였는데요, 리더였던 토모프스키는 밴드 해체 후 현재 솔로로 활동을 하고 있죠. 비주얼 매니아들에게까지 크게 어필했던 소프트 발레는 드페쉬 모드를 모델로 활동했던 뉴 로맨틱 계의 팀이죠. 보컬리스트였던 엔도 류이치가 최근 솔로 활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80년대 비주얼 록/테크노에 파장을 남겼던 뉴 웨이브는 90년대 이후 컬리지 록/얼터너티브/노던 롤이라는 의미로 변신하며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죠. 이중 여성 보컬을 앞세운 데이트 오브 버스, 딥 인더 풀, 살롱 뮤직 등은 일본 시장은 물론 해외 진출에까지 이름을 알린 바가 있습니다.

2주에 걸쳐 7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친 일본의 뉴웨이브 음악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아쉬움이 남지만 못다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계속 이어드리도록 하구요, 2월의 ‘J’s Music’ 예고를 해드릴께요. 이제 보다 깊숙히 일본 음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요, 2월엔 3주동안 일본의 힙합 음악에 대해 특집으로 알아볼 예정입니다. 일본 힙합의 역사,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일본이 낳은 대표적인 힙합 DJ까지. 그리고 3월에는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는 비주얼 락에 대해 역사와 음악의 특징, 어떤 뮤지션들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J’s Music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본의 뉴웨이브 편 2부를 모두 마칠께요. 지금까지 이종현이었습니다.

http://www.mbc.co.kr/NETOP/9901/jsmusic/jsmusic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