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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oshua Tree

A landscape monochrome photograph of U2 in the desert sits in the center of a black background. U2 are standing on the left half of the photograph, with a mountain range on the right half. Tiny gold text reading "THE JOSHUA TREE U2" is stretched across the top of the black background.
The Joshua Tree”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87년 3월 9일 U2의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The Joshua Tree”가 발매되었다. Daniel Lanois와 Brian Eno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6년 1월에서 1987년 1월까지 더블린에 있는 여러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U2는 “The Unforgettable Fire”을 내놓은 후 1985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공연을 다니거나 휴식을 가지며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앨범 중 많은 곡들은 1984년에서 1985년까지 미국 순회 공연을 다니면서 느낀 점을 노래로 만든 것들이다. 이 앨범에는 밴드 멤버의 미국에 대한 애증섞인 감정, 종교적인 명상 등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음악적으로도 여전히 펑크적인 요소가 많이 담긴 이전 앨범에 비해서 뿌리 음악에 대한 성찰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Bono가 1985년에 Steven Van Zandt의 Sun City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덕택이었다. 이 자리에서 Bono는 Keith Richards와 Mick Jagger 블루스를 연주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Bono의 생각에 그의 밴드는 펑크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ono는 Bob Dylan, Van Morrison과 교류하며 아일랜드 음악의 뿌리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경험 역시 새 앨범에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명한 앨범 커버의 사진은 Anton Corbjin의 작품이다. 그가 사진을 찍은 이 장소가 바로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이다. Corbjin은 밴드에게 이 나무의 이름이 구약성서의 예언가 조슈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말해주었다. 공원에서 그들은 나무 한 그루가 본래 군집으로 자라는 나무의 특성과 달리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외로운 나무에서 사진을 찍었고 Bono는 앨범의 이름을 이 나무의 이름에서 따오기로 결정하였다. 앨범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또한 비평적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미국 앨범 차트에서 1987년 4월 4일 7위에 진입했는데 이는 Eagles의 1979년 앨범 “The Long Run” 이후 가장 높은 차트 데뷔였다. 앨범은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20여개 나라에서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앨범에서는 “With Or Without You”(뮤직비디오)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포함하여 네 개의 싱글이 정상에 올랐다. 밴드는 이 앨범의 홍보 공연 “Joshua”를 시작하였다. 이 공연은 필름에 담겼고 “Rattle And Hum”이라는 이름으로 1998년 말 공연 실황 앨범이 발매되었다. 1988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밴드는 ‘그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2개 부문에서 수상한다. 앨범은 리마스터되어 2007년에 LP와 CD로 재발매되었다.

애플의 음악팬들을 위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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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o Edge Foxboro 09212009 U2360” by xrayspx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Bono & Edge.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애플이 간밤에 아이폰6, 아이폰6플러스, 애플와치 등 자사의 신제품을 발표했다. 예상대로 아이폰6는 기존 제품보다 모니터 크기가 더 커졌다. 본격적으로 대화면 시장에 진입하기엔 뭔가 좀 작아 보이는데 애플도 이를 감안해서인지 더 큰 아이폰6플러스라는 좀 보기 흉한 사양도 함께 내놓았다. 이를 두고 경쟁업체 htc는 트위터 계정을 통해 “Bigger screen. Better performance. Elegant design. Welcome to the party #iPhone6.”라는 농담을 적어놓았다. 애플와치에 대해서는 트위터에서는 애플의 또 하나의 “망작”이 될 것 같다는 평이 우세하다. 그럼 이것이 다냐?

One more thing.

음악팬들을 위한 보너스로 U2의 신작 파일을 iTunes 이용자에 한하여 무료로 배포했다. 신작의 앨범명은 Songs of Innocence이고 11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캠페인에 소요된 비용은 약 1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다운로드를 받으려면 이곳으로. 롤링스톤의 재빠른 리뷰를 보시려면 이곳으로.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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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havent found cover“. Via Wikipedia.

1987년 8월 8일 U2의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2주간 머물렀다. 이 곡은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이 이 락밴드에게 두 번째 정상곡이 되었다. 이 곡은 드러머 Larry Mullen, Jr.의 드럼 패턴에서 발전한 데모 레코딩을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개인적인 신념과 정신적인 깨우침을 강조하는 가사는 당시 Bono가 듣고 있던 가스펠 음악에서 영향 받았다. The Joshua Tree의 수록곡인 이 곡은 당초 싱글로 발매될 계획이 없었다. 밴드는 “With Or Without You” 다음으로 “Red Hill Mining Town”을 싱글로 내놓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Red Hill Mining Town”의 뮤직비디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Bono가 순회공연 연습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데 어려움을 겪자 그들은 마음을 바꿨다. “I Still Haven’t Found”의 비디오는 라스베가스에서의 콘서트 후인 1987년 4월 12일 오후 라스베가스의 프레몬트 거리에서 잽싸게 만들어졌다.[1. 지금 보니 급조한 느낌이 역력하다. 밴드는 라스베가스 거리에서 전도를 하는 이들처럼 거리를 배회한다.] 싱글은 1987년 5월 발매되었다. 빌보드 차트에는 1987년 6월 13일 51위로 데뷔해서 8주후 정상을 차지한다. 이 곡은 1988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그 해의 레코드’와 ‘그 해의 곡’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뮤직비디오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출처가 어디인지는 불명입니다. http://myhome.naver.com/ouimoi/favorite/80년대사건.htm 라는 링크가 남아 있긴 한데, 지금 열어보니 더 이상 서비스를 하지 않는 페이지라는군요. 누군가 예전에 “음악세계”란 잡지에서 본 것 같다는 코멘트를 달아놓기도 했네요. 여하튼 저작권이 있으신 분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고요. 이 중 몇 개나 동의하시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겠네요.

Pop Events Of The Decade (80년대 팝계의 20대 사건)

1. 1980-핑크 플로이드의 화제작 「벽」

1980년 최대의 화제작은 핑크 플로이드의 「벽」(The Wall)이었다. 67년 데뷔작 「여명의 문 앞에 선 풍적수」(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를 발표한 이래 핑크는 프로그레시브 음악으로 팬들은 물론이고 아티스들에게도 음악적인 영향을 미쳤다. 73년 「달의 어두운 면」(Dark Side Of The Moon) 이래 최대의 앨범이라는「벽」은 15주간 차트 정상을 차지했는데, 82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또 다시 핑크 플로이드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앨런 파커 감독의 이 영화는 당시로선 최장시간의 록영화였다. 라이브 에이드로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봅 겔도프가 주연한 이 영화는 록 스타의 정신적인 붕괴를 다룬 것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정치만화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제럴드 스카프의 작품.

2. 1980-존 레논 흉탄에 쓰러지다

비틀즈의 존 레논이 80년 12월 8일 뉴욕에 있는 다코타 아파트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사내의 총탄에 쓰러졌다.  80년 11월, 5년 동안의 침묵을 깨며 그는 앨범 「이중 환상」(Double Fantasy)을 발표하여 팬들을 설레게 했었다. 싱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Just Like> Starting Over)은 그의 죽음 이후 차트 1위에 올라 사람들을 더욱 애석하게 했다. 비틀즈 시절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말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존은 60년대 팝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만함 속에 번득이는 예지등으로 그의 개성은 더욱 팬들에게 어필되었고, 65년 비틀즈 멤버로서 ‘대영제국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3. 1981-MTV의 영향

1981년 8월 미국의 어느 케이블 방송국은 24시간 동안 음악만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MTV(Music Televison)이다. 75년 일본의 소니사에 의해 비디오가 대중화될 때부터 MTV의 출현은 이미 예상되었는데, 디스크의 소리에 TV의 화면을 접목시킨 것이었다. 노래를 듣고, 거기에다 보기까지 하니 음악의 내용도 상당히 변하게 되었다.  MTV는 뉴 웨이브 가수들의 출현을 앞당기기도 했다.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70년대 통신기기의 대변혁인 비디오가 음악에 미친 영향은 바로 MTV의 출현이었다.

첫 시작을 알린 비디오는 그 유명한 The BugglesVideo Killed The Radio Star

4. 1981-뉴웨이브의 기수들

뉴웨이브라는 말처럼 뜻이 다양하고 복잡한 용어도 드물 것이다. 70년대 말 펑크와 디스코, 그리고 기존 록의 혼합물을 뉴웨이브라고 부르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계적으로는 MTV의 등장이 뉴 웨이브의 출현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70년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80년대의 요구에 맞춘 것이 뉴 웨이브라고 보는데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대중적인 기반은 1981년 블론디였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멘 앳 워크. 폴리스. 유리쓰믹스. 컬처 클럽. 듀란 듀란 등 수많은 아티스트가 등장했다. 감각적인 사운드, 현대적인 감각의 화장 및 분장 그리고 환상적인 패션 등이 그들의 개성이기도 했다. 70년대 말의 파괴적인 펑크 시대 이후 찾아온 대중 음악, 그것이 뉴 웨이브였다.

5. 1982-CD 및 LPD의 개발

디스크와 TV의 만남이 MTV였다. 하지만 우리들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각과 청각의 동시 해결이라는 요구는 풀렸지만 그 질(質)이 문제였다. 먼저 원음(原音)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자 했다. 그것이 CD(Compact Disk)이다. 일본의 소니사와 네덜란드 필립스사는 82년 CD발매를 개시했다. 광통신(光通信)의 발전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화면도 실물에 가까운 생생한 것을 가능케 했다. 그것이  LDP(Laservision Disk Player)이다. 83년 일본의 파이오니어사는 LDP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MTV가 제공하는 음악의 발전 단계가 LDP인 것이다. 이제 팬들은 생생한 소리와 화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비디오의 등장처럼 LDP가 음악계의 흐름을 뒤집진 못하고 있다. 지금은 초기 단계다. LDP의 대중화는 비디오에 못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결국 LDP는 단명하고 말았고 현재는 DVD가 대세죠 : 옮긴 이 주)

6. 1982-80년대의 음악 뉴 에이지

80년대 들어 태동한 두 가지 음악 장르라면 뉴 에이지와 랩이다. 80년대 초부터 ‘뉴 에이지’ 또는 ‘환경음악'(주로 일본) 등으로 불린 이 음악은 동양적인 명상음악이라는데 특징이 있었다. 굳이 뉴 에이지를 82년의 사건으로 잡는데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뉴 에이지라는 음악을 대중화시킨 조지 윈스턴의 활동을 기초로 했다. 80년 조지는 「가을」(Autumn), 「겨울에서 봄으로」(Winter Into Spring),「12월」(December)등을 발표했다. 위의 앨범이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아 83년 초 빌보드 재즈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반젤리스는 82년 <불의 마차 ‘(Chariots Of Fire)라는 영화음악으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반젤리스가 뉴에이지? : 옮긴 이의 의문) 이때부터 뉴 에이지는 그
독립성을 인정받아 87년 최초의 뉴 에이지 그래미 수상자 안드레아스 플렌바이더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CD의 보급은 뉴 에이지를 전파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되겠다.

7. 1983-8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마이클 잭슨

지금도 팬들에겐 <빌리 진>(Billie Jean)의 전주 부분이 귀에 생생할 것이다. 83년 팝계를 휩쓸어 버린 수퍼스타가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마이클 잭슨이다.  당시만 해도 흑인 가수의 방영을 꺼리던 MTV에 그는 백인에 가까운 성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감독 존 랜디스 (“블루스 브러더스”<Blues Brother>의 감독)를 영입하여 만든 비디오 <비트 잇>(Beat It)은 마이클을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타운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보여준 그의 춤 솜씨와 퀸시 존스에 의해 프로듀스된 앨범 「스릴러」(Thriller)의 펑키한 사운드, 그리고 백인에 가까운 분장 등은 MTV의 장점을 가장 완벽하게 이용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앨범에선 싱글 톱10이 7곡이었는데, 덕분에 마이클 잭슨은 그 해 그래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8. 1983-온 거리를 뒤흔든 브레이크 댄스

수퍼스타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뒤로 걷는 댄스 스텝은 팝계의 또 다른 화제거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를 흉내내는 청소년들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관절을 비틀어 대는 춤 때문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기사들이 발표되기도 했었다.  이름하여 브레이크 댄스 열기였다. 이 좋은 소재를 영화계에서 놓칠리가 없었다. 83년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플래시댄스”(Flashdance)가 바로 그것이다.  제니퍼 빌스 주연의 이 영화는 황당한 스토리를 지닌 것이었지만 디스코 작곡가로 유명한 조르지오 모로더의 음악 덕분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특히 아이린카라가 부른 <플래시댄스>와 <신나는 기분> (Flashdance What A Feeling)(이 노래가 언제부터 두곡이었을까나… : 옮긴 이의 의문)은 오스카 주제가상을 받았다. 이 영화 이후 댄스 음악은 영화에서 주요한 위치를 갖기 시작했다.

9. 1984-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열기

84년은 유난히 뛰어난 앨범이 많이 발표된 해였다. 한 앨범이 계속해서 1위에 머무는 바람에 1년(약52주) 동안 4개의 앨범만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프린스의 해라고 해도 좋을 시기였다. ‘보스'(브루스)는 7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가수였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Born In The U.S.A) 앨범으로 대중적인 기반도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끝없는 질주」(Born To Run)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한 그는 그 해 타임, 뉴스위크 양 잡지의 표지인물로 선정되기도했다. 80년 「강」(The River)으로 앨범 1위를 기록한 그는 수작 「네브라스카」 Nebraska) 이후 84년 「미국에서 태어나」를 발표했다. 재킷에 노동자 복장 차림의 사람이 성조기를 향해 오줌을 누고 있는 듯한 자세 때문에 말도 많았지만 본인은 강력히 부인하기도 한 문제의 앨범이었다.

10. 1984-미네아폴리스 사단의 리더 프린스

TV 드라마 “배트맨”(Batman)의 주제곡을 열심히 피아노로 연주하던 소년이 바로 영화 “배트맨”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던 프린스이다. 1984년은 한 마디로 보스와 프린스의 해였다. 특히 프린스는 작곡, 작사, 프로듀서, 싱어를 겸하는 만능 재주꾼으로 83년의 마이클 잭슨 열기를 뒤엎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70년대에 데이비드 보위가 새로운 음악의 창조를 위해 노력했다면 80년대는 단연 프린스였다. 그는 「심홍색 비」(Purple Rain) 한 장의 앨범으로 표현된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스타 제조기이기도 하다. 배내티와 아폴로니아가 프린스 사단 출신이며, 실라E. 차카 칸. 마돈나. 시나 이스턴 등 그가 후원한 가수는 수도 없이 많다.

11. 1985-만능 엔터테이너 마돈나

80년대 최고의 여성 가수로 마돈나를 지목하기에 주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85년 마돈나는 「처녀처럼」(Like A Virgin)으로 전 세계 팝 팬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프로듀서는 듀란 듀란의 프로듀서로도 유명한 나일 로저스. 미모와 섹시함 그리고 가수로서의 가창력과 춤 등이 그녀를 수퍼스타로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MTV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MTV 등장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88년에는 브로드웨이 연극에도 출연하여 화제를 몰고 온 그녀는 영화배우 숀 펜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는 등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지만, 올해 「기도처럼」(Like A Prayer)을 발표하며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였다.

12. 1985-이디오피아 난민구호 ‘라이브 에이드

85년 7월 13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구장과 미국 필라델피아의 존 F. 케네디 구장에서 동시에 대규모 콘서트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개최되었다. 이디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이었다. 장장 16시간의 공연, 200여명의 아티스트 출연, 430억의 자선 기금, 세계 140개국에의 15억 시청자 등등 종래의 모든 기록을 깨버린 행사였다. 영국의 록 그룹 붐 타운 래츠의 리더 봅 겔도프는 이 행사를 개최한 공로로 그 해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라이브 에이드’는 우드스톡 이후 최대의 공연이었으며, 이 행사에 자극받아 해리 벨라폰테는 ‘우리는 곧 세계'(We Are The World) 라는 앨범(We are the world는 라이브에이드 이전에 나오지 않았나요? : 옮긴 이의 의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퀸시 존스. 빌보드 차트 1위 및 그래미상 수상의 영광도 안은 앨범이었다.

13. 1981-뉴 웨이브의 기수들

뉴 웨이브의 열기, MTV의 등장 그리고 아티스트의 개성 등이 그 시대와 딱 들어맞은 뮤지션이 왬이었다.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로 구성된 이 영국 듀오는 1984년 <떠나기 전에 깨워주오>(Wake Me Up Before You Go-Go)를 싱글 차트 1위에 올려 놓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1985년 중국 공연까지 벌였던 그들은 특히 여성 팬들의 우상이었다.  준수한 외모와 로맨틱한 노래로 국내에서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85년 <경솔한 속삭임>(Careless Whisper)은 아마 팝 팬들에게 많은 추억을 준 곡으로 짐작된다. 흑인의 소울을 팝 감각으로 소화시켜 자신들의 개성을 구축했던 이들은 2집 「크게 해봐」(Make It Big)의 성공 이후, 끝없이 해체설이 돌다 결국 86년 헤어지고 말았다.

14. 1986-앰네스티 로큰롤 순회공연 개시

86년 ‘앰네스티’라는 단체가 뉴스에 종종 오르내렸다.’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라는 이 단체는 각국의 탄압받는 양심수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61년에 조직되었다. 온 세계에 이 단체의 존재를 명확하게 알리는 데는 록 스타들의 역할이 컸다. 앰네스티 미국 지부의 잭 힐리라는 사람은 85년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의 위력을 실감한 뒤 대규모 록 행사를 계획했다. 86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이 행사에서 U2와 스팅 등은 자신들의 개성을 팝 팬들에게 강력히 심어 주기도 했다. U2는 이 행사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는 1987년 ‘여호수아 나무'(The Joshua Tree)로 나타났다. 1988년 ‘지금 인권을'(Human Rights, Now!)공연으로 이 행사는 맥을 잇고 있다.

15. 1987-미래의 검은 로큰롤 랩

50년대 로큰롤이 등장했을 때 젊은이들의 호응은 열광적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춤, 가사, 창법 등으로 젊은이들을 흥분시켰던 로큰롤은 기성세대들이 보기엔 천박한 잡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로큰롤은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랩에서 로큰롤이 가졌던 의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80년대 중반 흑인들 사이에서 랩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구 지껄이는 폭력적인 가사, 반복되는 리듬 등으로 일반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던 음악이 랩이었다. 86년 런-DMC에 의해 랩의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하더니 87년 드디어 백인 래퍼 3인조 비스티 보이스의 「살인 허가」(Licenced To Kill)가 앨범 차트 1위에 올라섰다. 뉴 에이지와 함께 80년대에 탄생한 장르로 새로이 위치를 굳힌 랩은 올해 톤 록이라는 또 다른 스타를 내기도 했다.

16. 1987-로큰롤은 U2를 통해 재탄생되었다.

85년의 ‘라이브 에이드'(Live Aid)와 86년의 앰네스티 순회공연을 통해 등장한 스타 중 U2의 부상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 있었다. 특히 앰네스티 공연에서 U2의 리드 싱어 보노가 보여준 개성은 60년대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보여 준 바로 그것이었다. 아일랜드 출신 4인조 U2는 87년 팬들에 보답하는 앨범 「여호수아 나무」(Joshua Tree)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차트 1위에 랭크된 것은 물론이고, 78년 팀결성 이후 발표한 앨범들도 덩달아 차트에 무더기로 진입하여 그들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정통 로큰롤에 실린 의미있는 가사와 진지한 매너로 한몫 보기도한 U2는 그 해 그래미상을 휩쓸기도 했다. 오랜만에 로큰롤이 U2를 통해 기지개를 켠 87년이었다.

17. 1988-일년내내 톱10에 랭크된 조지 마이클의 「믿음」

1988년은 오직 한 명의 스타가 독주한 해였다. 그 주인공은 조지 마이클. 86년 왬이 해산될 때부터 그의 솔로 등장은 시간 문제였다. 섹스 어필하는 용모와 흑인 가수를 방불케하는 소울 창법 등 스타가 될 만한 재능이 넘치는 영국 가수였다.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믿음」(Faith)이었는데, 이 앨범은 88년 한해 단 1주만 11위를 기록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톱10안에 랭크되었었다. 정상에 머무른 기간도 12주였다. 싱글 1위곡도 5개나 터져 나왔다(I Want Your Sex, Faith, Father Figure, One More Try, Monkey). 마이클 잭슨도 마돈나도 이런 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의 포크와 스티브 윈우드의 컴백도 조지 마이클의 열기를 따라 잡진 못한 한 해였다.

18. 1988-헤비 메틀의 전성기를 다시 연 밴드들

88년 후반부의 주인공은 데프 레퍼드와 건스 & 로지스였다. 이들이 벌인 차트 경쟁은 헤비 메틀 만큼이나 치열한 것이었다. 88년 메틀계에 불을 당긴 팀은 반 헤일런의 「오! 자네도 하나 먹었군」(OU 812) 앨범으로 시작해서 데프 레퍼드의 「히스테리아」(Hysteria), 건스 & 로지스의 「파괴 망」(Appetite For Destruction) 그리고 본 조비의 「뉴 저지」(New Jersey)까지 그 열기는 이어졌다. 데프 레퍼드는 83년 「방화광」(Pyromania)에 이어 「히스테리아」도 7백만 장 이상 판매하여 앨범 2장을 연속으로 7백만장 이상 판매한 최초의 밴드가 되었다. 이들을 이어 건스 & 로지스 그리고 본 조비가 메틀의 열기를 이었다. 「뉴 저지」가 차트 1위에 올랐을 때 2위는 「파괴 욕망」, 3위는 「히스테리아」였다. 빌보드 차트 사상 메틀 밴드의 앨범이 1,2,3위를 휩쓴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19. 1989-팝계의 새로운 주인공 10대 가수들

89년은 유난히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돋보인 해였다. ’10대현상’은 88년 티파니부터 시작되었다. 데뷔 앨범 ‘티파니'(Tiffany)를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그녀는 10대 선풍을 몰고 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데비 깁슨이라는 천재 소녀가 출현했다.  데뷔 앨범 「뜻밖에」(Out Of Blue)에 이어 「짜릿한 청춘」(Electric Youth)을 내놓으며 티파니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다. 전반기는 보비 브라운의 독무대였다. 앨범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Don’t Be Cruel)에서 연속으로싱글 히트곡을 내놓았다(Don’t Be Cruel, My Prerogative, Roni, Every Little Step 등). 후반부는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앨범「끈질기게 버텨」(Hangin’ Tough)를 차트 1위에 올리며 동명 싱글곡 외에 <커버 걸>(Cover Girl), <내가 (당신을 황홀하게 하지 않았어요>(Didn’t I<Blow Your Mind>)등을 연속 히트시켰다.

20. 1989-돌아온 공룡들

전반부엔 10대 가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면 후반부는 60년대 로커들의 재등장이 활발한 시기였다. 토론토 공연으로 시작된 더 후의 컴백,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재등장. 봅 딜런. 반 모리슨. 비지스. 링고 스타 등의 새로운 모습이 인상적인 해였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1989년의 사건은 롤링 스톤즈의 재결합 공연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8월 31일 시작된 그들의 순회공연은 미국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뉴욕에선 공연이 예정되자마자 6시간만에 약 30만장의 입장권이 동나버리기도 했다. 새 앨범 「강철 바퀴」(Steel Wheels)와 싱글 <복잡한 감정> (Mixed Emotion)은 차트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U2의 Bono가 가라오케에서 부른 Psycho Killer

이번 주 브라질 상파울로에서의 남미공연을 마친 후, U2와 Muse의 멤버들이 한 나이트클럽에서 가라오케를 즐겼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자리에서 Bono가 선택한 노래는 Talking Heads의 클래식넘버 “Psycho Killer”였다. 녹음상태가 좋지 않아 그의 노래실력을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David Byrne의 그 뻔뻔한 톤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2% 모자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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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번이 유투의 이번 투어에 대해 말하길

아래 기사의 발단이 된 데이빗 번의 블로그 포스트이다.

출처는 http://journal.davidbyrne.com/2009/07/071409-budapest.html

유투에게 감사를!

우리가 바르샤바의 나이트 클럽 (Stodola라는 그리 크지 않은 공연장입니다)에서 있을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마크 E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이렇게 비교적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은 유투의 월드 투어 덕분이라구요. 이 공연의 프로모터는, 유투 공연의 상당 수의 프로모터를 맡기도 한 국제적 기업, 라이브 네이션입니다. Stoloda 같은 공연장은 사실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게다가 티켓 매수도 보통 때보다 적게 잡혔는데, 덕분에 거기서 일하는 스텝들에게 제대로 임금을 지불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여기가 무슨 VIP를 위한 클럽인 것도 아니죠. 손실 메꾸기 위해 티켓 한 장에 200불 씩이나 받고 파는 그런 곳이 아니란 겁니다 – 그냥 베니어판으로 만든 스탠딩 공연장일 뿐이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공연을 떠맡은 덕분에,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손해를 보고 있을 거예요. 앞으로 있을 유투의 스타디움 공연으로 그 적자를 메꿀 수 있길 기대하면서요.

그들의 공연은 공연 역사상 가장 비싼 공연일 것입니다. (제작비 측면에 있어서 말입니다): 스테이지를 짓는데 4천만불을 들였어요. 계산을 해보니, 200대의 트럭이 그들의 투어를 따라다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같은 직업군으로서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이건, 과잉이라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을 생각한다면 꽤나 형평에 어긋나는 일이도 하지요. 아니면 유투의 일주일짜리 특집방송 덕분에 우리가 레터맨에서 내쳐진 것이 날 수치스럽게 만든 것일까요? 뭐 여러분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 하지만 어쨌든 고마워요, 친구들!

유투의 최대 팬 포럼인 인터피어런스닷컴을 통해 이 포스트를 보았다. 데이빗 번이 대차게 까이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유투 팬덤과 데이빗 번 팬덤이 서로 배제성을 띤다고 볼 수는 없다. 데이빗 번 팬 중에 유투 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대의 경우는 존재한다. 그래서 데이빗의 이 포스팅에 대해서도 유투 팬들의 반응은 갈리고 있다. 신경 끄고 니 일이나 잘 하라는 사람도 있고, 더 심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데이빗의 뜻은 이해하겠는데 내 생각은 이러저러하다고 점잖게 코멘트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코멘트는 이런 것이다. 4천만불짜리 공연과 아프리카의 기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보노가 사회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본업’인 음악적 활동에 돈을 바를 권리가 소멸되는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데이빗 번의 입장과 유투 팬들의 입장 모두 이해를 한다. 데이빗 번의 발언은 나의 오래된 고민과 일치한다. 사회운동을 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밴드라는 이질적인 요소의 조합, 그게 유투의 정체이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양자택일을 해야만하는 것일까? 펑크 아나키스트와 팝 캐피탈리스트의 경계에 선 펑크 캐피탈리스트,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David Bryne, U2를 비판하다

U2 is doing a 360° world tour and have stepped up to defend the cost of it after recent protests. The band opened their tour in the UK at Wembley on Friday (August 14), where 88,000 people attended, but they have received criticism recently from David Bryne, the former Talking Heads singer, who wrote on his blog that the cost for the world tour is excessive when considering the band’s stance on world hunger. 전문보기

U2

U2 Gelsenkirchen August 3rd 2009.png
U2 Gelsenkirchen August 3rd 2009” by SteBo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20년간의 활동기간 동안 비평적인 면과 상업인 면 양쪽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밴드 중의 하나인 U2는 예술적과 상업적이라는 음악산업의 양 면에서 그들의 활동기간 동안 성공적인 행보를 계속해왔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의 밴드의 초기 시절부터 현재까지 U2는 여타 다른 락밴드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전통적인 한계로부터 자유를 부루짖어 왔으며 또한 자유로웠다. 독창적인 사운드에 진솔한 가사와 사회도전적인 메시지를 섞은 음악을 들려 줌으로써 U2는 비평가들은 물론 다른 동료 락 밴드로부터 존경을 얻어왔으며 전세계적으로 광적인 그들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U2는 1976년 14세의 Larry Mullen, Jr.(Drum)가 자신이 다니던 학교인 Dublin’s Mount Temple School의 게시판에 새로운 밴드의 멤버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내면서 시작 되었다. Mullen(drum), Adam Clayton(Bass), Paul Hewson(“Bono”, vocals), Dave evans(“The Edge”, guitar), Dick(Dave의 형, guitar) 이렇게 5명은 한데 뭉쳐 “Feedback”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된다. 하지만 연습도 제대로 시작하기전 Dick은 다른 밴드에 가입하게 위해 밴드를 떠난다. “Feedback”은 밴드의 이름을 “The Hype”라 바꾸고 주말과 방과 후 연습을 시작하게 되고 진실한 우정과 조화를 이뤄간다. 연습을 시작한지 18개월 후 밴드에게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1978년 3월 한 contest에 참가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들은 입상을 하게 되고 CBS 레코드사의 Jackie Hayden을 만나게 된다. “The Hype”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은 Hayden은 그들에게 데모 앨범을 내자는 제의를 하게 된다. contest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The Hype”는 밴드명을 U2바꾸고 그들의 매니저로 Paul McGuinness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들은 학교 밖으로 그들의 활동영역을 넓혀가게 되고 가능한한 더블린 주위에서 많은 연주를 하며 지역 팬들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1979년 9월 U2는 계속된 연주 활동을 기반으로 그들의 첫 싱글 “U2:3″를 발표한다. 이 싱글은 아일랜드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이 인기에 힘입어 U2는 그해 12월 영국 공연을 감행하고 팬과 비평가의 주목을 끌기 위해 애쓰지만 유료 관객 9명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기게 되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아일랜드로 돌아온다. 다시 아일랜드에서 좀더 큰 규모의 공연을 계속하며 1980년 두 번째 싱글 “A day with out me”가 성공을 거둔 뒤 U2의 가능성에 매력을 느낀 “Island Records”와 1980년 3월 계약을 체결하고 세계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그들의 대망의 첫 앨범[Boy]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영국과 아일랜드 양국의 음악지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음악’이라는 열광적인 평을 얻어낸다. 이 앨범의 가사는 그 당시 다른 락 밴드들이 기피하던 믿음, 삶, 죽음, 정신적인 면등을 다뤘다.

앨범 발표 후 이들은 영국과 아일랜드를 벗어나 유럽과 미국에 투어를 나서게 되고 이로인해 전 세계적으로 그들의 음악의 추종자들을 만들어 나간다. ‘bubblegum pop’ 밴드들이 만연하던 80년대 초 음악씬에서 U2의 출현은 하나의 혁신이었으며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81년 1월 U2는 그들의 2번째 앨범 [October]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발매 1주후 영국차트 11위에 등극한다. 이 앨범은 약간의 기독교적 색채를 가진 앨범이었고 “With a shout”, “Gloria”같은 곡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아담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멤버는 크리스찬이었고 이들 셋은 더블린에서 “Shalom”이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이 단체의 활동에서 세 멤버들은 락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적인 믿음 사이에서 의문을 갖게 되고 이로인해 아담과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 둘을 조화시키고 그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믿음을 희생시키지 않고 음악을 계속해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의 밴드내의 혼란은 [October]저조한 판매 실적으로 나타났고 크게 주목받은 싱글 없이 U2라는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리는데는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83년 U2의 본격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알리는 신호탄인 세 번째 앨범 [War]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그 당시 만연하던 버블검 사운드에 대한 전면적으로 반기를 든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가사와 음악 또한 더욱 진보적이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이 앨범에서 처음으로 보노는 “Sunday, Bloody Sunday”라는 노래에서 북아일랜드에 대해 노래했으며 “폴란드 자유노조 대표 바웬사”에게 바친 다는 부제가 붙은 이 앨범의 첫 싱글 “New year’s day”는 영국 차트 10위에 도달하고 미국 차트 50위 권에 육박하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그들의 첫 히트 싱글이 되었다. 또한 이 노래의 비디오 클립은 미국 MTV에서 자주 방영되어 밴드를 소개하고 새로운 팬을 확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앨범의 홍보를 위한 투어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이 투어 중 ‘Red rocks amphitheatre’에서의 모습을 담아 [Under a blood red sky]라는 그 들의 첫 라이브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에 등극하고 84년 1월에는 플래티넘을 획득한다.

위의 두 앨범의 성공으로 U2는 “롤링스톤지”로부터 “올해의 밴드”라는 칭호를 받게되고 “Island Records”와의 재계약에서 좀더 창조적인 권한과 금전적인 보수를 얻어내게 된다. 이러한 성공을 한껏 느끼고 있을때 U2는 음악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고 그를 위해 새로운 프로듀서로 그 유명한 “Roxy Music”출신의 Brian Eno와 Daniel Lanois를 영입하고 그들의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을 준비한다.

1984년 10월 네 번째 앨범 [The unforgettable fire]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U2를 관록의 밴드로 세상에 소개한다. 전작의 도전적인 자세는 Martin luther king, Jr.을 위한 “Pride(in the name of love)”와 약물에 빠져 고생하고 있는 보노의 친구에 대해서 노래한 “Bad”에서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앨범은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싱글 “Pride”는 UK Top 5에 U.S. Top 50에 등극했다. 다른 싱글 “The unfotgettable fire”는 영국 차트 8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롤링스톤지는 U2에게 “80년대의 밴드”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세계 락 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가는 유일한 밴드일 것이다”라고 평했다. 4년여 동안의 투어 뒷편으로 그들의 앨범과 싱글들은 계속된 판매량 증가로 그들을 80년대 중반의 국제적인 스타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성적에 힘입어 “The live aid”와 “Conspiracy of hope”같은 모금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대망의 1987년이 되어서 그들의 최고의 앨범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5번째 앨범 [The Joshua tree]가 발표된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다. “With or without you”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가 미국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이 중 “With or…..”는 영국에서도 1위를 차지한다. 이때 U2는 Beatles, The who에 이어 락밴드로는 세 번째로 TIME지 커버를 장식하게 되며 Time에서는 U2를 공연이 항상 매진이며 표를 구하기 힘들다 하여 “Rock’s hottest ticket”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이 앨범으로 Grammy Award에서 “Album of the year”와 “Best rock performance” 두 개 부문을 수상하게 된다. 실로 U2는 명실상부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밴드가 된 것이다.

그해 10월 U2는 그들이 정상에 서기 까지 그들에게 영향을 준 미국 뮤지션들에 대한 트리뷰트성의 앨범이자 6번째 앨범 [Rattle and hum]을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영, 미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다. 비비킹과의 연주, 밥 딜런과의 가사 공동 작업, 비틀즈의 커버곡 수록, 빌리할리데이에 관한 노래등등…이 앨범은 동명의 기록 영화에 사운드 트랙이다. 이 앨범에 대한 활동 후 밴드 멤버들은 잠시 휴식기를 가진다. 그리고 1990년 말에 새로운 앨범 작업을 위해 베를린에 모인다.

1991년 11월 그들은 어찌보면 상당히 모험적이고 인더스트리얼 계열의 기타 사운드와 피드백,일렉트로닉 댄스 비트를 가미한 7번째 앨범 [Achung Baby]를 발표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팬들과 비평가들은 과거의 그들의 음악에 대한 추억보다는 새로운 변화를 반기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행보, 지칠 줄 모른는 실험정신, 발빠른 시대 음악 변화의 수용”이라는 멋진 미사여구로 말이다. 이 앨범 발표 후 가진 ‘Zoo tv’ 투어에서 그들은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한 볼거리와 아직은 그들의 음악이 ‘좋다’라는 평을 받는 시기였기 때문에 투어는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2백 50만이라는 관객 수와 함께…. 그들의 8번째 앨범 [Zooropa]는 1993년 3월 더블린에서 레코딩 되었다. 이 앨범에서 에지는 프로듀서라는 직함을 달게 되고 “Numb”에서는 리드보컬을 맡게 된다. 앨범 발매에 따른 투어 후 U2는 “Batman forever”등의 사운드 트랙 작업에 참여했고 Passenger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그들의 프로듀서 Brian Eno와 결성하여 [Original soundtrack 1]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앨범은 비평적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U2는 1996년 초 새로운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그들은 이 앨범에서 Prodigy나 Chemical brothers 풍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수용하고 싶어했고 정말 그렇게 했다. 앨범 발매전 인터넷에 공개된 그들의 새 노래는 가히 충격이었다. 팬들사이에서는 “U2가 댄스 음반을 만든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그 새노래는 바로 “Discotheque”였다. [POP]이 1997년 3월 발매되었을 때 일렉트릭 댄스의 영향은 소문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충격 때문인지 이 앨범은 처음에는 차트상에서 성적이 괜찮았으나 전작들에 비해 너무나 빠르게 차트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엄청나게 발전된 볼거리로 포장된 “POP mart”투어를 행하고 아직 그들은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투어 후 그들은 북 아일랜드로 관심을 돌리고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98년 9월 그들의 베스트 앨범 [U2: The best of 1980-1990]을 발표한다. 1999년 초 그들은 Brian Eno와 Daniel Lanois를 프로듀서로 두고 새 앨범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 2000년 초 U2는 보노가 각본에 참여하고 Mel gibson, Milla Jovovich등이 출연하고 그들의 절친한 친구인 Wim Wenders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The Million Dollar Hotel”의 사운드 트랙에 참여하여 “Stateless,” “The First Time”, “The Ground Beneath Her Feet”세곡의 노래를 들려준다.

디스코그래피
1980 Boy (Island)
1981 October (Island)
1983 War (Island)
1983 Under a Blood Red Sky [live] (Island)
1984 The Unforgettable Fire (Island)
1985 Wide Awake in America [live] (Island)
1987 The Joshua Tree (Island)
1988 Rattle & Hum (Island)
1991 Achtung Baby (Island)
1993 Zooropa (Island)
1997 Pop (Island)
2000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Interscope)
2000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Universal)
2000 Hasta la Vista, Baby: Live From Mexico City (U2 Limited )
2004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Interscope)

링크
U2 Community
Rock On The Net

최근소식
U2가 그들의 통산 12번째 앨범을 발표할 계획을 밝혔다. No Line on the Horizon이라는 제목의 이 앨범은 북미에서 2009년 3월 3일 발매될 것이라 한다. Brian Eno, Daniel Lanois, Steve Lillywhite가 프러덕션을 돕는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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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o도 블로거다

요즘은 음악활동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시키는 활동에 더 적극적인 것 같은 Bono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경제학자인 Jeff Sachs와 함께 파이낸셜타임스에서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시간되시는 분들은 방문해보시도록.

커버버전

http://en.wikipedia.org/wiki/Cover_version

어떤 노래의 커버버전은 다른 아티스트에 의해 다시 녹음되는 것을 말한다(리메이크와 ‘개선된 리메이크’와 비교하라).


비록 커버버전이 때로 아티스트적인 이유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슈퍼마켓의 바겐세일 통을 채우기 위해, 심지어는 음반가게에서 특화시켜 발매된다. 그래서 잘 모르는 소비자는 오리지날 레코딩과 쉽게 혼동한다. 특히 그 포장이 의도적으로 혼란을 주는 경우 그렇다. 그것은 오리지날 아티스트의 이름을 큰 활자로 쓰고 작은 글씨로 originally sung by 또는 as made popular by 라고 에두른 표현을 작은 글씨로 써넣는다. 때로는 다소 비상식적인 ‘커버’라는 단어가 녹음의 진실을 알려줄 뿐이다. 특정한 출반 업체는 ‘오리지날'(강조 역자주) 커버버전이라는 이름으로 왜곡을 극대화시킨다. 커버버전은 가끔 장르로 취합된 모음집의 형태로 팔린다. 슈퍼마켓이 커버버전 세일을 할 때 DJ를 배치해서 특별한 콜렉션에서 독점적으로 뽑아낸 아이템을 연주하게 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반부터 어떤 회사가 엄청나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레코드를 가지고 있고 다른 회사들이 그 레코드의 성공에 기대어 돈을 벌 요량으로 레이블을 위해 새로운 버전을 녹음함으로써 그 곡을 ‘커버’할 뮤지션이나 가수를 가지고 있는 경우 축음기 레코드 레이블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락앤롤의 초기 시절 흑인 락뮤지션이 부른 많은 오리지날이 팻분과 같은 백인 아티스트에 의해 다시 녹음되었고 톤은 보다 락앤롤의 날카로운 면을 제거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도 있었다. 이러한 커버버전은 몇몇 이들에게는 보다 부모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고 백인들의 래디오 방송국의 편성자들의 구미에도 더욱 맞는 것들이었다. 또한 남자 아티스트들의 곡을 여성 아티스트들이 커버하기도 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몇 십 년 동안 많은 인기곡들의 커버버전이 녹음되었다. 때로는 인종적으로 다른 스타일로, 때로는 커버버전이 사실상 오리지날과 구분할 수 없는 케이스도 있었다. 예를 들어 ‘Light My Fire’의 호세펠리치아노 Jose Feliciano 버전은 도어스 The Doors 의 오리지날버전과 확실히 구분된다. 그러나 칼칼톤 Carl Carlton 이 1974년에 로버트나잇 Robert Knight 의 1967년의 히트곡 ‘Everlasting Love’를 커버한 곡은 오리지날과 거의 구분하기 어렵다. 커버버전은 종종 다른 언어로 녹음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팔코 Falco 가 1982년 독일어로 부른 “Der Kommissar”는 10년 후 애프터더파이어 After the Fire 에 의해 영어로 녹음되었다. 비록 독일어 제목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말이다. 팔코의 오리지날 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영어곡은 그러나 오리지날의 정신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고 미국 차트에서 탑5에 들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루이지애나에서 존재했던 특정 타입의 커버버전을 스왐프팝 swamp pop 이라고 한다. 컨템포러리, 클래식 락, 알앤비, 그리고 컨츄리 음악이 Cajun(아카디아(Acadia) 출신 프랑스인의 자손인 루이지애나주의 주민, 앨라배마주미시시피주 남부의 백인과 인디언[흑인]의 혼혈아 : 역자주) 주민들을 염두에 두고 녹음되었다. 몇몇 가사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Cajun 악기로 녹음되기도 했다. 몇몇 스왐프팝은 전국적인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역의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커버버전은 때로 익숙한 곡을 최신 취향에 맞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Singin’ In The Rain” 은 원래 1929년 헐리우드의 익살극 영화에 쓰였던 곡이다. 유명한 진켈리 Gene Kelly 버전은 1950년의 헐리우드 뮤지컬을 위해 최신 스타일로 도입되었고 1952년 같은 제목으로 녹음되었다. 1978년 프랑스 가수 쉴라 Sheila 가 비디보션그룹 B. Devotion group 과의 협연으로 한때 뮤지컬 세대의 취향에 맞게 재편된 그 곡을 디스코 풍으로 커버했다. 디스코 전성 시대에 유명한 곡들이 디스코 스타일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다. 영화 감독 바즈루맨 Baz Luhrmann 은 그의 영화들에 사용하기 위해 옛날 노래들을 현대화시키고 스타일화 시켰다. Strictly Ballroom에서의 존폴영 John Paul Young 의 “Love Is In The Air”, Romeo and Juliet에서의 캔디스테이튼 Candi Staton의 “Young Hearts Run Free”, 그리고 냇킹콜 Nat King Cole, 니르바나 Nirvana, 키쓰 Kiss, 델마휴스턴 Thelma Houston, 마릴린먼로우 Marilyn Monroe, 마돈나 Madonna, 물랭루즈 Moulin Rouge에서의 티렉쓰 T Rex 등의 새로운 커버버전은 각각의 영화의 구조에 맞게 디자인된 것들이다. 그리고 현세의 청중들의 취향에 맞게 재편된 것들이다.


신진 아티스트들은 때로 미국의 아이돌과 국제적인 대응하는 이들에 의해 증명된 유명하고 ‘안전한’ 곡들을 연주하면서 대중에 소개되기도 한다. 기존 아티스트들은 종종 커버버전을 녹음함으로써, 또는 다양한 라이브 공연에서 녹음되지 않는 커버버전을 연주함으로써 그들이 음악경력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에게 영감을 미쳤던 아티스트나 노래들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U2는 아바 ABBA의 Dancing Queen을 라이브로 불렀고 카일리미노그 Kylie Minogue는 클래쉬 The Clash의 “Should I Stay Or Should I Go”를 연주하였다. 이들 곡들은 그들(U2와 카일리 미노그 : 역자주)의 캐릭터와 전혀 맞지 않아서 녹음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라이브를 할때에는 그들은 아티스트적인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종종 공인된 ‘라이브 레코딩’으로 발매되어 합법적인 커버버전이 되기도 한다.


펑크 뮤직은 클래식 락을 펑크적 형식으로 재해석하여 기존 곡을 파괴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Me First & the Gimme Gimmes, The Mighty Mighty Bosstones, NOFX, Goldfinger 와 같은 밴드는 그 방면으로 유명하다. 최근 몇 년간 몇몇 잼밴드들과 관련 그룹들이 힙합 음악들을 커버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콘서트에서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다. 아마도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어 상업적으로 발매된 중에 제일 유명한 커버는 스눕더기독 Snoop Doggy Dogg 의 “Gin and Juice”를 the Gourds가 소화해낸 블루글래스 bluegrass 버전일 것이다. 피쉬 Phish, 켈러윌리엄스 Keller Williams 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Rappers Delight” (The Sugarhill Gang), “Baby Got Back” (Sir Mix-A-Lot), 그리고 다른 힙합 곡들을 커버했다.


비틀즈 The Beatles 는 그 어떤 밴드들보다도 많은 커버버전을 가지고 있다. “Yesterday”는 1965년 오리지날이 나온 이래 약 3천 번 커버되었다. 많이 커버버전된 다른 곡들은 리차드베리 Richard Berry 의 악명높은 “Louie Louie”, “Free Bird” (Lynyrd Skynyrd), “No Woman No Cry” (Bob Marley & the Wailers), 밥딜런 Bob Dylan 과 레오나드코헨 Leonard Cohen 의 예전 곡들 많은 부분들이 있다(2002년 12월 31일 현재 레오나드코헨의 곡 중 공식적으로 커버된 곡의 수는 759곡이다).


많은 유명밴드들이 전적으로 다양한 다른 밴드들에 의해 자신들의 곡이 다시 불려진 – 때로 오리지날과 전혀 다른 – 트리뷰트 앨범을 가지고 있다. 영화 I Am Sam 의 사운드트랙은 이와 관련 특히 유명한 사례이다. 이 앨범은 다양한 모던락 아티스트들에 의해 커버된 비틀즈 트랙을 싣고 있다. 또다른 유명한 사례는 Conception – 스티비원더  Stevie Wonder 와 그의 mentee India. Arie에 의해 불려진 오리지날 곡들을 커버한 곡들로 구성된 – 스티비 원더의 곡을 재해석한 – Conception 이다.


피시나 그레이트풀데드 The Grateful Dead 와 같은 잼밴드는 스튜디오가 아닌 콘서트에서 커버하기로 유명하다.


몇몇 상업적으로 성공하거나 유명한 커버버전은 노래 제목, 오리지날 아티스트, 오리지날 버전의 발매년도가 커버한 아티스트와 발매연도에 따라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