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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lash(1984), Mannequin(1987)

80년대 대중문화의 분위기를 표현하라면 무언가 잔뜩 부풀어 있고 유치한 듯 하면서도 흥겨웠던 분위기였다(물론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은 지극히 암울했지만). 특히 영미권의 대중문화는 흥겨운 뉴웨이브 음악, 어깨가 잔뜩 올라간 옷과 헤어밴드 등의 화려한 패션 등이 이러한 분위기를 한껏 부추겼다. 영화 역시 이 시기에는 팝적인 분위기가 만발하였고 많은 대중취향의 영화가 장르를 불문하고 코믹하고 경쾌하게 그려졌다. 여기 소개하는 두 편의 영화 모두 그러한 기운이 한껏 느껴지는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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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lash(1984)와 Mannequin(1987) 이 두 편의 영화는 당대의 스타였던 톰행크스, 앤드류맥카시, 다릴한나, 그리고 킴캐드럴(섹스앤더시티에서 밝히는 그 누님) 등을 주연으로 기용한 로맨틱코미디다. 이 두 영화는 또한 중요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바로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연인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Splash 에서의 히로인은 인어이고 Mannequin 에서의 히로인은 마네킹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Splash 는 잘 아시다시피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그리고 Mannequin 은 그러한 맥락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일종의 현대판 로맨스 동화인 셈이니 영화가 재미만 있다면 얼마든지 익스큐즈해줄 설정이고 실제로 두 영화 모두 재미는 보장한다. 한편으로 두 영화는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은막에서 재현하고 있는데 급진적인 여성해방론자라면 약간은 짜증이 날만도 한 스토리이다. 역시 다릴한나가 출연한 또 하나의 80년대 로맨스코미디 Roxanne 에서는 못생긴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성공하는 데도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영화계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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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두 연인 모두 세간의 사람들에게 들킬 새라 조마조마한 사랑을 나누게 되고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개인적으로 아이디어의 참신성은 떨어지지만 극의 밀도감이나 폭소를 자아내는 몇몇 에피소드가 뛰어난 Splash 가 더욱 맘에 든다. 또 결국 남자가 여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를 따른다는 점에서도 약간은 여성해방론자의 구미에도 맞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 Splash 에서 영화 마지막에 감미로운 주제가 Rita Coolidge 의 Love Came For Me 가 깔리면서 두 연인이 해저를 헤엄치면서 인어왕국으로 가는 장면은 제법 감동적이다. 한편 Mannequin 의 주제가는 그 유명한 Starship 의 Nothing’s Gonna Stop Us Now 이다.

Mystery Train(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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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팝 그룹 Pulp 의 Jarvis Cocker 가 그의 노래에서 ‘모든 사람들은 여행자들을 싫어한다(Everybody Hates Tourists)’고 독설을 내뱉긴 했지만 사실 여행자들은 불쌍한 존재다. 도시가 표방하고 있는 하나의 상징을 쫓아 불나방처럼 찾아들지만 그것은 멀리서 보았을 때나 아름다웠을 신기루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일본인 남녀가 찾은 썬 스튜디오가 대표적인 예다. 수많은 명가수들이 녹음했다는 스튜디오는 관광 가이드가 잰 걸음으로 가이드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허름하고 좁은 공간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또 다른 여행자는 더욱 심하다. 죽은 남편의 관과 함께 로마로 향하는 한 여인 – 바로 로베르토베니니의 아내인 그 여배우 – 은 비행편의 문제로 억지로 멤피스에 머물게 된 것이다. 잡화상의 호객행위 때문에 원하지도 않던 잡지책을 잔뜩 사들고 길을 헤매는 와중에 엉뚱한 사기꾼에게 20달러까지 뜯긴 신세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토박이들의 이야기다. 이들에게 멤피스는 여행자들이 느끼는 그 어떤 상징성으로 다가오기보다는 그저 서로 아옹다옹하고 을러대는 지루한 삶의 터전일 뿐이다. 잡화점 주인을 살해하고 도망 다니다 호텔로 피신을 온 두 백인과 한 흑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밀도 깊게 만들어진 에피소드라고 생각된다. 유명한 공상과학 TV 시리즈에서 제목을 따온 이 에피소드에서 결국 이방인들은 제 갈 길을 알아서 찾아가는데 정작 토박이들은 갈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 이 영화는 서부영화의 명배우 Lee Marvin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감독 Jim Jarmusch, 음악 John Lurie, 그리고 극중 라디오 DJ 로 목소리가 등장하는 Tom Waits 가 한결같이 Lee Marvin 의 아들들인 것 마냥 그를 빼다 닮았고 급기야 이를 의식한 Jim Jarmusch 가 이들을 모아 무슨 비밀단체를 결성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 세 번째 에피소드에는 고인이 된 The Clash 의 Joe Strummer 가 문제아 Johnny 로 등장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엘비스만큼이나 위대한 이 인물이 엘비스를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했고, 또 그 영화를 그가 죽은 이 시점에서 감상하자니 왠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인이 목격한 엘비스의 유령만큼이나 묘한 이질감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아키라, AKIRA(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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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오토모가츠히로가 작품의 독립성을 위하여 별도의 위원회(일명 “아키라 위원회”)까지 구성하여 제작한 이 영화는 원작의 인기에 못 미치는 일본의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는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신천지를 소개한 컬트 영상이 되어 일본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장 12권에 달하는 장편만화 원작을 120여 분에 담아낸 탓에 영화는 마치 만화속의 인물들에게 “시간이 없으니 어서들 부지런히 연기해주세요”라고 몰아붙이는 느낌이다. 요즘같아서는 당연히 ‘반지의 전쟁’처럼 3부작 쯤으로 늘였겠지.

아키라라는 상상초월의 절대존재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초능력자들의 대결을 중심으로 카네다와 K 의 모험과 로맨스가 3차 대전이후 재건된 네오도쿄에서 펼쳐진다. 냉정하다 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웅장한 화면 – 네오도쿄의 건물들은 만화에서보다 영화에서 더 미래주의적으로 그려져 있다 – 이 이전의 저패니메이션과 차별화되어 내용에 걸맞는 형식미를 뽐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은 앞서 말했듯이 짧은 러닝타임 – 원작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으로 인해 사건의 설명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각 캐릭터간의 갈등과 대립이 생뚱맞은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데츠오와 다른 초능력자들 간의 대립의 이유, 카네다가 데츠오를 죽이려는 이유, 부패한 정치인 네즈와 혁명가 류가 함께 일한 이유 등이 영화에서는 모호하고 – 나같이 머리나쁜 사람은 원작 만화를 읽어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 결정적으로 원작에서 19호로 불리며 극의 큰 축을 담당했던 신흥종교의 교주는 어이없게도 사이비 교리를 외치다가 데츠오가 파괴한 다리에 떨어져 죽는 식의 엑스트라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키라는 저패니메이션을 뛰어넘어 사이버펑크라는 SF의 하위장르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원작자의 과학문명에 대한 비관적 입장이 형상화된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디스토피아였고 이는 당시 몇몇 걸출한 SF 등과 함께 훗날의 SF 의 경향을 주도하는 데에 한 몫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문명비판의 메시지와 함께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패배와 전후 고속성장에서 나타나는 국민의 피로감을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다. 좌익이 되었건 우익이 되었건 일본의 전후세대는 빠르게 변화하는 문명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느꼈고 그러한 혼란은 좌우익 모두에게 무정부주의, 염세주의적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열망을 네오도쿄의 폭파와 미지의 생명 탄생이라는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Battle Beyond the Stars

스타워즈(1977)와 ‘7인의 사무라이’(아니면 이 영화를 패러디한 ‘황야의 7인’)을 짬뽕하여 철저히 흥행을 노리고 만든, 그러나 참 심심한 작품. 제작 로저 코먼 프러덕션, 시나리오 존세일즈, 미술감독 제임스카메론, 조지페파드(A특공대의 맏형)와 로버트본(‘황야의 7인’에도 출연했던)의 쌍끌이 조연 등 나름대로 호화진용이었다. 하지만 음악에서부터 너무 스타워즈를 베낀 티를 역력한데다 전투장면은 왜 그리도 어둡고 두서없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으로 주인공 Shad 역을 맡은 리차드토마스는 정갈하게 머리빗은 70년대 회사원풍의 가녀린 외모를 하고서는 어찌 그리 죽도 못먹은 사람마냥 힘없이 연기하는지 보는 사람이 지루할 정도이다.(뺨에 점은 또 왜 그리도 커보이는지) 다만 네스토라 불리는 외계인 캐릭터 설정은 나름 볼만 했다. 그러나 어쨌든 나름대로 틈새시장을 노린 이 작품은 로저 코먼이 80년대 내놓은 영화중 가장 좋은 흥행성적을 남겼다고 한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My Beautiful Laundrette,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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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eautiful Laundrette Poster” by The cover art can or could be obtained from MoviePosterShop.com.. Licensed under Wikipedia.

스티븐 퓨리어스가 파키스탄 이민 2세인 작가 하니프 쿠레이쉬(Hanif Kureishi)의 각본을 바탕으로 파키스탄 이민자 2세대인 오마르와 그 가족들이 과거의 식민제국이자 자본주의 체제의 첨병인 영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

영화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비뚤어져 있다. 자신의 이상주의적 가치관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시체처럼 살아가는 오마르의 아버지, 인종적 차별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오마르의 삼촌 나세르와 샬림, 오마르와 어릴 적 친구였으면서도 파시스트 청년들과 몰려다니는 조니, 그리고 다시 만난 조니를 고용인으로 부리면서 – 한편으로는 동성애적 관계에 빠지면서도 – 전도된 만족감을 얻으려는 오마르.

인종, 계급, 동성애, 가부장 등 이 사회의 가장 첨예한 사회적 이슈들이 뒤섞여 있다. 마치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탁기 안의 빨래처럼. 그것들은 때로 색깔진한 빨래가 다른 빨래에 물을 들이듯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전도된 계급관계에 희열을 느끼는 경우처럼 변태적이기도 하고 겉으로는 불륜이면서도 나름대로는 인종을 뛰어넘는 구식 로맨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뾰족한 답은 없다. 그저 매캐한 영국의 매연과 흐린 하늘처럼 늘 우리 옆에 존재할 뿐이다.

오마르는 나름대로 세탁소 같은 ‘깨끗한’ 사업으로 성공하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인종과 성적 편견을 뛰어넘는 조니와의 사랑도 역시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영화 마지막의 애정 어린 물장구가 둘의 미래에 일말의 희망을 암시할 뿐이다.

p.s. 사무실 밖에 있는 조니가 사무실의 오마르를 창너머로 바라보는 얼굴로 오마르의 얼굴이 반사되는 장면은 둘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예리하게 표현한 참 ‘영리하게’ 연출된 장면이었다.

p.s.2 물방울이 보글거리는 듯한 음향효과의 주제음악과 세탁기가 돌아가는 듯한 시각효과의 타이틀시퀀스도 인상적이다.

The Commitments(소설)

아일랜드의 수도 Dublin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Derek 과 Outspan 이 그들이 몸담고 있는 밴드 And And And 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음악에 대해 빠삭한 Jimmy 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Jimmy 는 Frankie Goes To Hollywood 를 누구보다도 먼저 들었고 남들이 열심히 듣고 있을 때는 이미 그들을 쓰레기 취급할 정도로 음악을 듣는 감각이 앞서 있었다.(소위 Hipster?) Jimmy 는 And And And 가 커버하고 있는 Depeche Mode 를 싸구려 “아트스쿨” 음악이라고 치부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이정표를 제시한다. 이른바 “Dublin Soul”!!


Jimmy 에 따르면 Soul 은 보통사람, 즉 인민(people)들의 음악이다. Soul 은 “I wanna hold your hand” 따위의 에두른 표현이 아닌 “I feel like sex machine”과 같은 진솔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랑을 노래한다. 바로 Sex 그 자체를 노래한다. 또한 Soul 은 정치(politics)이다. Jimmy 에 의하면 어느 정치정당, 심지어 노동당마저 Soul 이 없어서 나라꼴이 말이 아닌 것이다. Soul 은 착취 받는 흑인계층, 보다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의 음악으로 정치적인 선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이 만들어질 밴드는 더블린에서 Soul 을 전파하는 전도사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밴드는 하나하나 형상을 빚어간다. 섹서폰, 피아노, 드럼 등 차근차근 진용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고 보컬에는 후에 밴드의 문제아로 등장하는 Deco 가 가세했고, 밴드의 정신적 지주이자 또 하나의 문제아로 자리매김하게 될 Joey 가 트램팻을 맡게 되었다.  


소설은 이런 일련의 밴드의 결성과정과 성장과정, 그리고 갈등과 뒤이은 밴드의 해체를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를 엮어서 서술하고 있다. 후에 이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와는 큰 틀에서 비슷한 사건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Jimmy 는 영화와는 달리 많은 부분을 Joey 에게 의존하고 있다. 또한 밴드멤버 간의 갈등의 결정적 계기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소설에서는 갈등 폭발의 방아쇠는 밴드멤버들이 모두 사모하고 있던 Imelda 가 당기게 된다.  


음악을 주제로 하는 소설은 그 음악을 – 영화와 달리 – 직접 들려줄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시도할 수 없지 않을까 할 정도로 어려운 시도다. Roddy Doyle 은 자신의 고향인 Dublin 과 모타운의 음악인 Soul 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실체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한데 엮으려 시도했고 그 시도는 유의미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소설을,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더 이상 Dublin 을 정치적 갈등과 가난의 고장으로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Secret Agent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파이물 3부작(39Steps, Sabotage) 중 하나로 간주되는 작품.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적국의 스파이 색출과 제거의 임무를 맡은 세 명의 스파이가 스위스로 파견된다. 하지만 현지 역락책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적국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이를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했지만 그는 무고한 사람으로 밝혀진다. 이에 따라 자기들 내부적으로 갈등이 커진다. 한편 진짜 스파이는 연합국의 적국인 터어키의 콘스탄티노플 행 열차에 몸을 싣고 이들은 그를 쫓아 열차에 오른다. 눈에 띌만한 액션이나 미스터리 없이 스파이물답지 않은 다소 긴장감 없는 작품이어서 히치콕의 작품 중에서도 그리 높게 평가받지 못하는 작품이다. 살인에 대한 서로의 입장차이로 인해 스파이들 간에 갈등이 생긴다는 설정은 나름 이채롭지만 그리 큰 설득력이 없다. 다만 이러한 설정 때문에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스파이물을 가장하였으되 실은 반(反)스파이물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The Lost World

코넌 도일 경은 탐정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문학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SF 소설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코넌 도일 경이 1911년 발표된 The Lost World 는 아마존 지방에 지각의 융기로 다른 세계와 격리된 세계가 있고 그 곳에 선사시대의 공룡이 산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어릴 적 이 소설을 일본에서 발간되고 번역된 SF 소설 모음집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소설집에는 이 소설과 함께 역시 코넌 도일 경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높은 창공에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를 소재로 한 소설 등이 실려 있었다.

여하튼 이 작품이 1925년 무성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 첫머리에는 코넌 도일의 동영상도 소개되고 있다. 극의 구성은 앞서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아마존 지역에 존재하는 공룡들의 서식지를 찾아가는 모험담을 줄기로 하고 있다. 이 모험에는 공룡의 존재를 주장하는 비주류 과학자 George Challenger, 약혼녀에게 용기를 과시하려는 젊은 기자 Edward J Malone, 아마존 오지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름다운 여인 Paula White, 그리고 그녀를 연모하는 사냥꾼 John Roxton 경 등이다. 결국 이들은 공룡을 발견하지만 그 서식지는 화산폭발로 인해 흔적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연히 살아남은 브론토사우루스를 발견하였고, 공룡을 영국으로 수송하였지만 항구에서 공룡이 탈출하는 바람에 런던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유치하다 치부될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을 스톱모션 기법을 동원한 공룡의 묘사는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기술의 발전이었고 이후 1933년 제작된 King Kong 에서도 같은 기법이 사용되었다. King Kong 을 비롯하여 쥬라기 공원 등 유사한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이 괴수 SF영화는 불행하게도 오리지널 필름이 거의 폐기될 정도로 손상되었으나 후에 62분짜리 필름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Harold and Maude

영화역사상 가장 기괴한(?) 연인으로 기록될만한 자격이 있는 Harold 와 Maude 가 – 이 정도의 포쓰로 기괴한 연인으로 언뜻 생각나는 정도는 Ghost World 의 이니드와 세이모어 정도 – 펼치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수시로 엄마나 소개팅 상대 앞에서 자살 연기를 펼치는 십대소년 Harold 의 또 하나의 취미는 낯선 사람의 장례식에 참가하는 것. 그런데 거기에서 똑 같은 취미를 가진 한 이상한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어려보이기는(?) 하지만 낼 모레면 여든이 된다는 Maude 할머니. 수시로 남의 차를 훔쳐 타고 말라 비틀어져 가는 가로수가 불쌍하다며 숲으로 옮겨 심는 대담한 짓을 서슴지 않는 혈기왕성한 이 노인네는 죽음을 동경하는 Harold 와 달리 너무나 열정적인 삶의 예찬자이다. 이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감정은 마침내 우정에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두 세대를 훌쩍 뛰어넘는 영화에서의 이들의 사랑이 변태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성장배경, 삶에 대한 태도, 나이 등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두 캐릭터를 관통하고 있는 공통점, 이른바 경직되고 속물적인 부르주아적 가치관에 대한 냉소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설정 때문이다. 이는 동시대 영화로 크게 논쟁이 되었던 Easy Rider 나 M.A.S.H 등이 보여주었던 시대정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가 선명하게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Maude 역을 맡은 Ruth Gordon 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연기 때문이다. 영화를 찍을 당시 실제로 75세였던 이 노배우는 앙증맞은 표정, 발랄한 몸동작, 멋진 노래솜씨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Maude 의 캐릭터를 재현해내고 있다. 또한 상대역인 Harold 역의 Bud Cort 역시 장난기 넘치는 동그랗고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체제와 삶에 반항하는 질풍노도의 십대를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배우의 호연은 삶을 거부하는 십대와 죽음을 거부하는 팔십대라는 선명한 대비 속에 펼쳐지는 갖가지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통해 더욱 빛나고 있다. Harold 가 Maude 의 팔에 새겨진 문신(수용소에서 새겨진)을 발견하는 장면, 둘이 Harold 의 바보 같은 군인 삼촌 – 경직된 보수세력을 상징하는 – 을 속이는 장면, 가로수를 옮겨 심기위해 과속으로 달리면서 경찰을 따돌리는 장면 등은 이 영화의 명장면들이다.

In the Heat of the Night, The Thomas Crown Affair 등 문제작을 선보였던 Hal Ashby 가 감독을 맡았고 Cat Stevens 가 음악을 담당해주었다.

Cloc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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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ckers film poster” by http://www.cduniverse.com/images.asp?pid=1282281&cart=757413591&style=movie&image=front&title=Clockers+DVD. Licensed under <a href="//en.wikipedia.org/wiki/File:Clockers_film_poster.jpg" title="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Clockers (film)“>Fair use via Wikipedia.

우디알렌의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이 되고 싶다는 스파이크리가 바라보는 뉴욕은 우디알렌이 바라보듯 그렇게 여유롭고 지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전쟁터다. 사는 게 전쟁이니 그 삶의 터전도 전쟁이다. 흑인들은 마약을 팔고 백인들은 마약을 산다. 마약을 파는 소년 Strike는 절대 마약을 하지 않는다. 마치 포르노배우가 가장 위생적으로 청결한 것처럼 말이다. 그 대신 초콜릿무스를 수시로 마셔대는 통에 위장이 엉망이다. 그를 자식처럼 여긴다며 개뻥을 치는 마약상 Rodney는 그에게 사람을 죽여줄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암시였지 사주는 아니었다. 하여튼 살인은 이루어졌다. 이제부터 누가 죽였는지를 밝히기 위해 Rocco 형사가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Strike 의 형 Victor 가 자신이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나서는데 평소 행실이 발랐던 그의 말을 Rocco 형사는 믿지 않는다. 스릴러의 형식을 띤 흑인사회의 먹이사슬 보고서로 일관된 스파이크리의 정치적 행보는 마치 켄로치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흑인 우디알렌? Clocker 는 마약판매인 중에 가장 똘마니격으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을 일컫는 은어라고 한다. 총격으로 죽은 흑인들의 생생한 사진을 관객의 코 밑까지 들이대는 타이틀시퀀스가 충격적이다.

p.s. 영화포스터가 그 유명한 ‘살인의 해부’의 포스터를 차용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