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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의 반항에서 테크노까지, 소비사회에 대항하는 문화운동

http://www.design.co.kr/D/d200005/html/118.htm


‘대항문화’라는 문구는 언뜻 모순되어 보인다. ‘대항’한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인데 문화적이라는 것은 삶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뽑아내고 그것을 해석하고 감상하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항하여 사랑한다는 것이 성립하는가? 어떻게 개방적이고 창조적이며 의미 있는 문화적 실천행위가 전술적인 대항을 의미하는 용어와 나란히 쓰일 수 있는가?


아마도 19세기의 정치철학가 칼 마르크스에게는 이러한 질문이 떠올랐을 것이다.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대항이라도 노동자와 경영진,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가들 사이의 대항과 같은 경제문제로 얽힌 관계에서만 생길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정치영역에서 과격한 노동운동이나 혁명적인 선동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한마디로 이러한 사고는 문화의 영역을 빼고 오직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만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문화는 대항의 대항으로만 드러날 수 있다. 즉, 문화는 자본주의 내의 지배논리가 모두에게 명확히 보여질 수 있도록 파괴되어야 하고 폭력적인 저항을 통해 거부되어야 하는 이데올로기의 베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수세기가 지난 지금 ‘대항문화’라는 용어는 누구에게도 수수께끼를 던지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의 궁극적인 주체라고 칭송했던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전복시켜야 했던 체제의 편안함에 이미 오래 전에 넘어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롤레타리아들은 여가시간에 그들이 일터에서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과 그 상징들에 깊이 둘러싸이게 되었다.


오늘날 소비주의와 소비문화는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 깊이 들어와 있으며 우리의 언어, 사회관계, 집단의식, 가치관 그리고 우리 자신들과의 관계에까지 완전히 용해되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 중에서 자본주의가 그 기반이 된 문화의 넓은 영역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은 대항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대항문화는 때로는 자본주의와 관련된 모든 사회적, 개인적, 정치적, 성적, 그리고 경제적인 논리에 일반적인 반대입장을 취하면서 이와 동시에 문화의 영역 안에 남는 것을 뜻한다. 즉, 사람들이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미의 어떤 기준을 확인하기 위해 취하는 실천적 행위 및 태도로 남는다.


그러나 대항문화 활동가는 어떤 사람인가?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것이 현재의 대항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학술적으로 대항문화연구를 살펴보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뿌리가 있다. 하나는 미국 시카고학파의 실용주의 사회학자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다양한 비주류 그룹들이 ‘대항문화’라는 용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사회적 규범 속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며, 또 어떻게 주류문화가 이러한 과정에 비슷하게 기여를 하는지에 주로 관심을 보였다.


대항문화를 다룬 또 다른 중요한 학파는 버밍엄 대학의 현대문화연구센터에 근거를 둔 영국학파의 사회학자들로서 이들은 ‘문화연구’라는 학문분야를 개척하여 널리 알려졌다. 이들에 의하면 젊은이들은 대항문화를 통해 도전을 추구하며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본주의적인 논리를 거부한다. 비록 대항문화의 관심이 경제적인 것이며 궁극적인 목표가 정치적인 것일지라도 이들이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대항문화 활동가는 자신을 둘러싼 소비문화를 형성하는 기호의 숲 속에서 경제에 뿌리를 둔 억압에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이러한 분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새롭게 부상한 노동계급의 다양한 문화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이제 노동계급이 소유했던 정치력을 거의 잃었지만 이들은 대항적 입장을 취하는 소비와 기호의 표현을 통해 문화의 차원에서 정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최근의 대항문화는 대항문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토양이 고갈되었다는 문제를 둘러싸고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문화를 통한 대항이 너무나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되어서 스스로를 대항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문화를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청년문화의 모티프는 중년의 소비자를 위한 제품까지 확대되었으며 더 나아가 사회적 규범에 대한 대항, 과격한 미학과 개인주의적이고 반항적인 태도의 추구는 주류 소비문화에 널리 받아들여져서 대항의 진정한 의미가 이제는 시대착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최근의 대항문화적 노력은 대안적 전략을 탐구해야만 했다. 1980년대에 펑크가 서서히 뉴웨이브, 팝, 얼터너티브, 그리고 더욱 더 상업적인 음악 장르로 전환하기 시작했을 때 전복과 문화적 반항을 꿈꾸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고 있었다. 펑크가 디스코 음악에 내세웠던 전통적인 금기는 격렬함과 대항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클럽의 젊은이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깨어지고 있었다.


이에 부합하여 간헐적인 레이브 파티(클럽 파티)를 좇아 다니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끈 테크노 음악이 19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댄스 문화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대항문화 역사상 근본적으로 새로운 발전이었으며 오늘날 대항문화를 고려함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본주의 소비문화, 인공적 안락함, 대용적 쾌락, 그리고 만들어진 행복은 전통적으로 아방가르드와 청년문화그룹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격렬함과 불편함, 그리고 극단의 감정적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펑크와 헤비메탈, 다다, 추상표현주의, 그리고 여타 과격한 문화 형태들은 소비주의가 선호하는 가장된 쾌락의 꿈 뒤에 숨겨진 냉혹한 현실을 찾기를 원했다.



[월간 디자인 2000년 5월호]글/샘 빙클리(뉴욕 뉴스쿨대학교 사회학과 강사)

영국 테크노의 역사

영국 테크노의 역사는 곧 테크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국의 테크노의 태동에서 변천을 거쳐 현재의 대중화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비단 테크 노만이 영국 대중 음악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경향을 대변해온 장르는 아니겠지만, 테크노의 변천 추이를 되짚어 보면 7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모든 영국 대중 음악의 기술적인 발자취와 거의 상통한다는 점에서 진보정신의 순수한 모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테크노의 기원과 기본적인 틀은 독일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그 형식의 다양성과 실용성을 갖춰 다각적인 테크노의 붐을 일으킨 것은 영국의 몫이었다.
영국이 공업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온갖 공장들이 각처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다지만 소규모 전자 제품이나 악기를 만드는데는 그다지 신통한 재주가 없었던 관계로 영국의 뮤지션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악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고 웬만큼 악기레 이블의 협찬을 받거나 밴드의 지명도가 있기 전까진 사구려 중고 악기에 의존하는 뮤지션들이 많은 것이 음악 강국 영국의 현실이었다.

그런 탓에 영국의 테크노는 테크노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중견 뮤지션들이나 비교적 생활이 윤택했던 인텔리 출신의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시작될수 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대중 지향보다는 아트록과 결합되거나 뮤지션의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기 위한 솔로 앨 범의 도구로 이용될 뿐이었다(독일과는 달리 젊은 뮤지션들 사이에 테크노 바람이 일기까 지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굳이 조그마한 바(bar)나 클럽에서 공연을 할 이유가 없었던 부유한 테크노 뮤지션들의 대개는 아트 스쿨 혹은 공학도 출신이었는데 그런탓에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사운드를 표출하기 보다는 자기 도취적이고 약물과 연계를 맺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들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사이키델릭과 아트록의 붐에 편승해 등장한 전자 사운드를 표출하는 여러 실력파 밴드들은 첨단기기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기계적 비트와 갖가지 다양한 효과음을 실전에 활용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테크노 취향의 음악들로 방향을 우회하게 된다. 70년대 초 공간과 시간에 대한 묘사를 담은 호크윈드(Hawkwind)를 비롯한 스페이스 록 밴드들이 바로 영국 테크노의 시발점인 셈이다.

인간적인 풋풋한 연주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극단적인 표현양식을 추구한 이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자 각종 전자음악을 구사하는 밴드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고 그 중 74년은 테크노와 전자 사운드의 기념비적인 해로 일렉트로폰(Electrophon)의 Zygoat, 세븐스 웨이브(Seventh Wave)의 Things to come등의 명반들과 브라이언 이노의 초기 앰비 언트적인 작품들이 속출한 시기였다.

특히, 브라이언 이노는 글램적인 요소가 다분한 록시 뮤직(Roxy Music)에서의 활동을 끝 으로 각종 프로젝트 결성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로버트 프립, 로버트 와트와 펼친 일련의 작품들은 스페이스 록 차원이 아닌 그 이상의 진보성과 의미를 지닌 작업들이었다. 이후 패트릭 모라즈, 릭 웨이크만, 마이크 올드필드, 릭 라이트 등의 건반 연주자와 리퓨지, 킹덤 컴 등의 밴드들이 신서사이저/키보드로만 일관된 음반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테크노의 기법상의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로 두번째 변혁이었던 것이다. 그후 78년경 브라이 언 이노가 표방한 앰비언트에 대한 연구, 천재 뮤지션 에디 좁슨등이 발견되면서 신서사이저 와 드럼 머쉰을 통한 원맨 밴드 붐이 가열됐고 테크노는 매니어들 음악의 최상의 선택으로 끊임없는 지지를 얻게 된다.

80년대 이후 테크노는 영국 대중음악 신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다시금 인식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댄스 음악과의 접목을 통하면서부터다. 이것은 70년대 말엽까지의 매니어 취향, 혹은 극단적인 실험 음악 형태의 테크노를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으로 변모했다 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왜 이러한 테크노의 댄스 뮤직화의 시발점이 하필 영국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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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Big Ben Phone box” by , wiki+spam@eindruckschinderdomain.de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2.5 via Wikimedia Commons.

그것은 앵글로 색슨족의 자기 우월주의와 타인종,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방식에서 이유 를 찾을 수 있다. 흑백이 공존하는 그리고 식민지 작업을 통해서 많은 인종을 거느리고 있 었던 영국이었지만 유독 백인 위주의 문화만이 토착화 되면서 영국에는 흑인의 그루브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런 연유로 마땅한 댄스음악이 생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은 안팎으로 상황이 좋았다. 댄스음악 빈곤에 대한 자기 반성과 함께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디스코가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쳐 주춤하면서 전자 음악의 힘을 빌기 시작한것이다(아울러 영국에는 많은 수의 악기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다소간의 흑인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들은 디스코로 패셔너블한 부분들에 관심을 갖던 모던 보이들은 뉴 웨이브(New Wave)로 각각 제 갈길을 찾기 시작했다. 두가지 음악은 공존하면서 기술적인 많은 부분들을 협력하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부터 테크노는 그 세력을 독일에서 영국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카바레 볼테어, 조이디비전으로 시작된 뉴 테크노 사운드의 움직임은 휴먼 리그(Human League), 뉴오더(New Order), ABC, 하워드 존스(Howard jones),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 팝과 테크노 댄스를 혼합한 음악들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영국 음악의 부흥은 시작됐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 펼쳐진 일련의 음악들은 테크노라는 의미보다는 전자음악, 뉴 웨이브라는 의미로 통용될 뿐이고 또 확실히 기계에 의존하는 부분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앰비언트라는 장르와 인디펜던트라는 의미, 매니어용 댄스라는 구분이 알려지면서 대도시 클럽과 소규모 공연장을 중심으로 분파가 갈려지기 시작했고 테크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거듭됐다. 유투(U2)와 데이빗 보위(David Bowie) 같은 대스타들이 새로운 조류와 브라이언 이노 같은 대 뮤지션을 섭렵하여 자랑스레 대중앞에 섰고 테크노 는 단숨에 인디펜던트 음악에서 오버그라운드, 메인스트림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믹싱 DJ나 스튜디오 맨에 불과하던 사이드 뮤지션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관중을 포섭 하기 시작했고 하나 둘씩 스타밴드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모던록/얼터너티브란 모호함을 함축한 장르가 가세하면서 상승세의 테크노 뮤지션들까지 덩달에 매체에 알려지 게 되었고 그들 역시 상종가를 누리면서 모던록 스타들의 뒤안길에서 믹싱 작업을 조달하 던 테크노 보이를 청산하고 서서히 전면에 나설 채비를 해가고 있었다. 록 음악에서 제휴 한 과격한 행동과 사운드를 선보이기 시작한 프로디지(Prodigy)나 케미컬 브러더스(Chemical Brothers)와 같은 팀들이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빅히트를 하게 되자 테크노는 완연한 대중 가요로 정착되게 된다.

테크노가 완연한 인기를 얻을 즈음 영국에선 괴이한 현상이 발병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분별한 장르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테크노의 수직 상승이 장르 탄생의 모태가 된 셈인데 덥(Dub), 트랜스(Trance), 레이브(Rave), 트립 합(Trip Hop),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 하드코어 테크노(Hardcore Techno), 신스 팝(Synth Pop)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장르들이 탄생했고 단명했으며 다른 장르와 연대하여 또 다시 생성했고 장르에 관한 설명서 가 있어야 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장르와 명칭에 혼란을 겪게 됐다. 90년대 말로 치닫는 현재의 테크노는 이제 브릿팝(Brit Pop)이라는 화두를 무참히 잠재우고 영국을 넘어 세계 각지에 그 세력을 확장 시키고 있는 영국 대중 음악의 최고의 장르이자 글로벌 사운드가 되어있다.

http://myhome.shinbiro.com/~www098/techno2[1].html

Ready To Dancing?

지난 호 까지 힙합 문화와 음악에 관해 알아 보았다. “1990년대는 힙합과 테크노만 있을 뿐이다.” 라는 다소 과격한 말이 있을 정도로 1990년대부터 현재 까지 힙합과 테크노는 전세계적인 붐을 타고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국내의 테크노라 하는 음악들은 말 그대로 돈벌이에 급급하여 심하게 왜곡 되고, 음악자체를 조롱한 ‘댄스가요’ 일 뿐 의식과 사상이 존재하는 ‘댄스뮤직’이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댄스 뮤직 자체를 저급한 음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마저 생겨 나게 되는데 미국의 아티스트인 모비(Moby)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테크노 뮤지션 혹은 댄스 DJ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20년 동안 음악을 해왔다. 나는 전형적인 뮤지션이었다. 재즈, 스피드 메탈, 하드코어, 펑크, 현란한 뉴웨이브까지 연주 해 봤다. 사실 사람들은 댄스 뮤지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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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y 1” by Uncensored InterviewFlickr.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은 조작 매뉴얼이 전화 번호부 만큼이나 두꺼운 그런 장비 40~50개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종류의 음악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이런 음악을 좋아 하는 건 일렉트로닉 악기들은 불평을 하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돈을 줄 필요도 없다.

음악을 판단 하는 나의 유일한 기준은, 음악이 주관적인 수준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오, 헤비메탈, 그건 멋진 음악임에 틀림없어’ 식의 좋고 나쁨을 판단 하는 건 난센스다. 확실히 각각의 음악은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평가될 필요가 있다.” 모비의 말은 댄스 뮤직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껏해야 왜곡된 ‘댄스 가요’ 나부랭이나 듣고 테크노를 비하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락(Rock)의 소멸 이후 대두 되었던 또 하나의 대안인 진짜 테크노 음악(Techno Music)에 관해 논해보자. 이 글이 애초에 대중적인 락(Rock) 음악에 기초하여 락음악 팬들이 다른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일종의 ‘흐름’을 보자는 것이였기에 테크노 음악에 대한 관점도 락음악에서 부터 시작 하도록 한다. 테크노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시기가 단지 힙합 붐이 일어 났을 시기와 비슷했을 뿐 실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 기억 하도록 하자.
지난 호 중 필자가 “락음악의 마지막 계략은 엉뚱하게도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테크노/일렉트로니카 계열에선 과연 누가 락을 죽였을까? 자, 이제 테크노 속으로 뛰어들기 전 우리는 락음악의 막바지 호투에 잠깐 발을 담궜다 빼야할것이다.

Anti-Rock

테크노의 기원은 물론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락의 부정’ 보다는 훨씬 먼저 행해졌던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먼저 락을 부정하려고 했던 락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미 1970년대 초반부터 데이비드 보위, 브라이언 페리(Bryan Ferry), 루리드(Lou Reed) 등은 글램 락(Glam Rock) 이라는 장르로 락의 부정을 표면적으로 들어낸 대표로 꼽히고 있다. 특히 데이비드 보위 같은 경우는 끊임없는 변신(음악적, 외형적 이미지 모두)으로 디스코를 거쳐 브라이언 이노 와 함께 엠비언트에까지 손을 뻗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1960년대 락스타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는 달리 비대하고 과도한 자신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외모와 음악은 그들의 뇌세포에 까지 깊숙이 침투 한 것일까? 과도한 나르시즘은 과도한 쇼맨쉽(?)으로 표출되었고 그들의 그러한 ‘행태’는 도전이나 개혁 이라기보단 ‘도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결과 그들의 음악은 군중에게서까지도 너무 빨리 ‘도피’ 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보위는 끊임없는 변신으로 글램 록이 사장길에 접어들 무렵인 1975년 Young America을 발표, 아방가르드 디스코(avant-garde disco)를 선보이며 그 난관을 멋지게 빠져나가게 된다.

그 후 1978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성공으로 디스코(Disco)의 황금기에 접어들게 되고(락 팬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테지만….) 현재까지도 여러 장르들과의 훌륭한 융화력으로 더욱 많은 서브 장르를 창출해내는 결과를 낳는다. 그 후 1980년대로 넘어와 뉴웨이브, 나아가 신스팝과 뉴로맨틱스가 있을 것이다.

뉴웨이브의 전조가 퍼브락 이라면 뉴로맨틱스의 전조는 신스팝 일 것이다. 우선 퍼브락에서 출발하여 뉴웨이브를 이끈 인물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였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 된다. 리버풀 출신의 그는 버디 홀리와 비틀즈, 홀리스(The Hollies) 등에 심취해 10대를 보내며 마침내 1975년 그의 첫 앨범인 My Aim Is True를 발매, 세상에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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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Costello 1978”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4646227/.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이 앨범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데뷔앨범으론 드물게 호평을 얻으며 그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된다. 이후에 그는 1979년 ‘Armed Force’, 1980년 ‘Get Happy’ 등의 음반으로 1980년대 중반 락이 다시 ‘모던 락’ 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정 받게 된다.

코스텔로와 더불어 뉴웨이브의 주역으로는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 와 잼(The Jam)을 들 수 있을 것 이다. 프리텐더스는 코스텔로와 는 달리 자신들의 음악을 펑크록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펼쳤고 맨체스터 출신의 버즈콕스(The Buzzcocks)와 함께 펑크 팝(Punk Pop)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잼은 리듬앤블루스, 소울, 포크 등을 모드(Mode)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구사하는 식의 음악을 선보여 인정 받았다.

신디사이저로 대표되는 새로운 ‘전자악기(혹은 전자음악)’는 주류팝을 반대했던 펑크를 밀어 내면서 기존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자양분으로, 후에 주목 받게 될 뉴로맨틱스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평론가 피터 윅(Peter Wicke)은 1980년대 대중음악계를 ‘합성물의 시대’ 라고 명명 했을 만큼 일정하게 스타일을 분류하기 어려운 스타일들이 많이 대두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스팝과 뉴로맨틱스다. 듀란 듀란(Duran Duran), 컬쳐 클럽(Culture Club)과 같이 락 밴드의 구성을 보일 때는 뉴로맨틱스라는 명칭으로, 디페시 모드 (Depeche Mode), 휴먼 리그 (Human Leag – ue), 울트라 복스 (Ultra vox)와 같이 신디사이저와 보컬 형식을 보이는 밴드들에게는 신스팝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미미한 차이 였다.

신스팝은 독일의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의 영향을받되 그들과는 달리 가공되지 않은 전자음에 노골적으로 ‘팝적’ 선율을 접목 시킨 형식의 단조롭고 거북함 없는 곡을 양산하게 되는데 이는 또한 디스코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것 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정작 음악적인 감각 보다는 전자기술에 집착한 나머지 밋밋한 음악을 ‘양산’ 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다.

한편 1970년대 말 영국 클럽씬에서는 신스팝과 글램록에 심취한 이들이 데이비드 보위를 기념하는 행사인 ‘A Club For Heroes’ 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게 되는데 이 행사는 주변 클럽으로 확산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을 기반으로 뉴로맨틱스의 첫번째 선두주자에 속하는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는 뉴로맨틱스 스타일을 물위에 올려놓은 최초의 밴드라는 찬사를 받으며 뉴로맨틱스 최초의 히트 싱글인 ‘To cut a long story short’를 1980년 영국 싱글 차트 5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성공에 많은 밴드들이 그 뒤를 잇게 되며 울트라 복스, 휴먼리그 등도 히트 싱글을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단순 신시사이져음색에 팝적인 선율의 도입으로 군중에 관심을 끌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선 레게 와 디스코 스카를 도입해 좀더 쉬운 음악을 선보인 밴드들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펑카폴리탄(Funkaplitan)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뉴로맨틱스가 흑인 음악과 라틴음악을 어떻게 팝적으로 분해 하고 요약해서 수용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무렵 ‘A Club For Heroes’ 행사의 주도자 였던 보이조지(Boy George)는 펑크 밴드 출신의 드러머 존 모스(Jon Moss)등과 뜻을 합쳐 컬쳐 클럽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은 양성적 섹슈얼리티와 다국적 음악스타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그들의 그러한 성공은 1960년대의 티니바퍼(Teenybopper)의 주역인 소녀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때맞춘 MTV 출현 덕분이었다. 그들 (컬쳐 클럽을 위시해 듀란 듀란, 왬(Wham), 프랭키 고우즈 투 할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우상으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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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ie Goes to Hollywood in London cropped” by Jane McCormick Smith – Jane McCormick Smith.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이상 뉴웨이브-신스팝-뉴로맨틱스까지의 행보를 간략히 짚어 보았다. 락 팬들은 어쩌면 필자가 여기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들을 ‘역겹게’ 읽었을지도 모르나 위에 나열한 밴드(음악)들의 진화와 테크노 음악과의 연장선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기에 그들에 대한 설명을 피할 수 없었던 점을 충분히 감안 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락 음악 팬들은 데쓰(Death Metal) 과 펑크 이후 곧바로 인더스트리얼로 뛰어 넘었을 테지만…) 뉴로맨틱스 신예들의 선전에도 불구 하고 언더그라운드씬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위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 주자로 단연 인더스트리얼(Industrial)과 앰비언트(Ambient)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앰비언트가 좀더 진보적인 전자음악에 대한 갈증을 푸는 역할을 했다면 인더스트리얼은 락음악 팬들을 전자 음악쪽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 장본인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Pretty, Hate Machine

인더스트리얼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인물로는 1990년대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와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나 미니스트리(Ministry)등의 밴드들이 팝차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인간의 소음에 대한 동경은 더욱 오래 전부터 시도 되어왔다.

명망 있는 클래식 음악가인 루이 루솔로(Lui Russo – lo)는 1913년에 이미 인토나루모레(intonarumore)라는 ‘기계’를 연주에 도입 했으며 에릭 사티(Erick Satie)는 1920년대 이미 권총과 타자기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 수용하는 예를 보여주었다. 그 이후에도 프랑스의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ese)는 1933년 퍼커션 만으로 이루어진 이오니자숑(Ionisation)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소음을 포함한 어떠한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수 있는 권리 를 주장 하면서 소음을 음악적영역에 포함시키는데 적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실험은 196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영역에도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예전의 클래식 음악가들과 다른점은 대중적인 ‘매체’를 적극 ‘이용’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1976년대 영국으로 돌아와 인더스트리얼의 시조 라는 칭호를 얻은 스로빙 그리슬(Throbbing Gristle)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룹의 리더인 제네시스 피오리지(Genesis P-Orridge)는 1976년 스로빙 그리슬을 결성하기 이전부터 전위 예술에 몸담던 인물인데 그는 1969년 Coum트랜스미션이라는 아방가르드 예술단체를 결성하여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해오던 인물이다.

그들의 음악 활동은 펑크가 가졌던 부정 및 해체 그 이상의 강도와 충격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쓰였던 기본 악기인 기타, 베이스, 드럼 조차도 거부 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내 비췄고, 기존의 곡 진행 방식 마저 모두 무시해 버렸다. 일 예로 멤버간의 포지션 설정을 “너는 기타를 한번도 쳐보지 않았으니 기타를 치고, 난 드럼에 재능이 있지만 베이스를 연주 하지.” 라는식 으로 결정 했고, 멤버중의 하나가 기타가 너무 무겁다고 하자 아예 기타의 보디를 반으로 잘라서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들의 이러한 음악적 관점에 변조된 이펙터와 신시사이저, 샘플러 등은 그들에게 안성맞춤인 ‘도구’ 였다. 또한 이들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전신이었던 Coum트랜스미션에서 보여주었던 과격한 공연을 보여주어 리더인 피오리지는 정신병자였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피오리지는 Coum트랜스미션의 활동 당시 자신의 피를 주사기로 뽑아 재 투여 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목표를 공유한 아티스트을 양성하고 유대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1976년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하게 되는데 소속된 밴드들 가운데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밴드가 바로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였다.

카바레 볼테르는 리처드 H. 커크(Richard H, Kirk), 스티븐 맬 맬린더(Stephen ‘Mal’ Mallinder), 크리스 왓슨(Chris Watson) 이상 3명을 주축으로 결성된 밴드인데 이들은 이미 1973년경부터 신시사이저와 테이프 기기들을 이용한 실험에 몰두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오늘날 머신 리듬(Machine Rhythm)이라 불리는 인더스트리얼의 트레이드마크를 발전시킨 장본이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 외에도 이들의 실험은 후에 여러 인더스트리얼 아티스트들에게 사운드 표본을 제시하게 된다. 허나 인더스트리얼 레코드 레이블(IR)에서는 이들의 초기 작업만을 발매 했으며 정식 데뷔앨범은 1978년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레이블에서 발매되게 된다.

스로빙 그리슬 이나 카바레 볼테르의 선전에 힘입어 1970년대 말에는 인더스트리얼은 IR 레코드에만 국한 되지 않은 더욱 넓은 활동무대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그들의 영향력은 음악 만큼이나 파격적으로 영화, 패션, 건축 등 많은 분야게 적용되었다. 신체를 뚫고 불로 낙인을 만드는 이르나 리벳 헤드의 패션 스타일과 연쇄 살인범을 추모하고 약물이나 섹스, 정신질환 등을 주요 소재로 삼는 트랜스그레시브 소설(Transgressive Fiction)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스로빙그리슬이 해체되는 연도인 1981년도를 기점으로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까지 테크노 전조에 대한 신스팝과 뉴웨이브, 뉴로맨틱스 그리고 초기 인더스트리얼 유파에 대해 알아 보았다. 다음 편에는 1990년대 들어와 다시 부활하게 되는 ‘변형된’ 인더스트리얼과 테크노에 관해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  

http://www.iautosound.co.kr/200202/auto0502.html 
 

Techno

★ 테크노의 역사

테크노는 말 그대로 기술(技術)이란 의미의 ‘Technology’ 에서 따온 단어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발명품인 컴퓨터의 탄생은 음악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바로 신디사이저라는 첨단 악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테크노 음악도 이와 발맞추어 탄생하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의 록시 뮤직 (Roxy Music), 브라이언 이노 (Brian Eno), 독일의 탠저린 드림 (Tangerin Dream), 크라프트베르크 (Kraftwerk) 등 유럽 지역의 진보 성향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도입해 더욱 실험적인 음악을 발표했는데 이들이 만들어낸 전위적이면서 신비주의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뒤에 등장하는 테크노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초기 테크노 음악은 70년대 후반 디스코, 펑크라는 신조류의 영향을 대거 수용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테크노 팝이라고도 불리우던 이 당시 테크노 음악은 팝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사운드로 전과는 달리 대중적인 인기 또한 얻을수 있었다. 버글즈 (Burgles), 게리 뉴만 (Gary Numan), 울트라복스 (Ultravox), 휴먼 리그 (Human League) 등이 당시 주목받던 뮤지션들이다. 한층 발전된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예전의 실험적인 사운드에서 탈피하여 뉴웨이브 (New Wave), 뉴 로맨틱 (New Romantic), 댄스, 팝 사운드를 차용한 신스 팝 (Synth Pop)은 80년대 초반 대중 음악계의 주류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현재까지 최고의 신스 팝 밴드로 인기 정상을 누리고 있는 디페쉬 모드 (Depeche Mode), 역시 디페쉬 모드를 거친 빈스 클락 (Vince Clark)이 결성했던 야주 (Yazoo, 훗날 이레이저 Erasure로 발전됨), 유리스믹스 (Eurythmics), 하워드 존스 (Howard Jones)등의 음악은 당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레이저, 프랭키 고즈 투 헐리웃 (Frankie Goes To Hollywood), 팻 샵 보이즈 (Pet Shop Boys), 아트 오브 노이즈 (Art Of Noise)등 영국 신스 팝 계열의 뮤지션들이 더욱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80년대 중반에 와서 테크노는 다양한 세분화를 이루게된다. 샘플링 머쉰같은 전자 악기들이 보편화되면서 새로운 음악적 실험이 이뤄지는데 대표적인 댄스 뮤직인 하우스 (House), 기계적인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 경향의 음악은 이 시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테크노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90년대에 등장한 테크노 음악을 일컫는다. 현재의 테크노는 엠비언트 (Ambient), 애시드 재즈 (Acid Jazz), 트랜스 (Trance), 드럼 앤 베이스 (Drum and Bass), 하드코어 테크노 (Hardcore Techno), 트립 합 (Trip-Hop) 등 마치 세포 분열을 연상케 할만큼 수많은 하위 장르로 파생되고 있다.

★ 대표적인 90년대 테크노 뮤지션

불협화음, 전위적인 구성, 파괴적인 기계음 등, 세기말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프로디지 (Prodigy)는 단연 90년대가 낳은 최고의 테크노 밴드이다. (1997년, 테크노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차지) 프로디지와 함께 영국 테크노의 3인방으로 군림하는 케미컬 브러더즈 (Chemical Brothers)와 형제 듀오 오비탈 (Orbital), 이외에도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삽입된 ‘Born Slippy’로 유명해진 언더월드 (Underworld), 테크노의 불모지였던 미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모비 (Moby, 영화 ‘007 네버다이’에 참여) 프랑스의 대프트 펑크 (Daft Funk), 에어 (Air), 독일의 아타리 틴에이지 라이엇, 트립-합을 정착시킨 영국의 혼성듀오 포티쉐드 (Portishead) 등은 90년대 테크노 음악의 붐을 주도한 대표적인 뮤지션들이다.

★ 국내의 경우

정통 테크노 음악이라고 부를 만한 시도를 국내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달파란 (시나위, H2O를 거친 베이시스트 강기영의 예명)이 발표한 독집 음반 ‘휘파람 별’ 이나 조동익의 영화음악 모음집 ‘Movie’에 수록된 ‘일탈’, ‘현기증’ 등 일부곡 정도랄까 ? 흔히 일반인들이 테크노라고 생각하는 음악들은 대개 댄스 음악에 테크노적인 요소를 양념처럼 첨가한 것 뿐이다. 멜로디가 강조된 음악을 선호하는 국내 정서와 이와는 반대인 90년대 테크노 음악과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다.

이제 테크노는 세기말을 맞이하는 1999년, 중요한 문화 현상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했다. 비인간적이고 기계적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 없이 테크노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듯 보인다. 하지만 테크노의 미래가 지금처럼 밝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다양한 음악적인 실험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앞서 등장했다 소멸한 여러 장르의 음악들 처럼 테크노 음악도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뮤지션들도 기억하겠지만.

Kraftwerk / Trans – Europe Ex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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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Europe Express Germa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Kling Klang.. Licensed under Wikipedia.

크라우트록(Krautrock)… 캔,파우스트,노이 등의 실험적 혹 음악은 `아트 록’이 반드시 거장적 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뒤셀도르프 출신의 크라프트베르크가 `록 음악`을 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래는 전자 음악의 시대이다’라고 확신한 이들은 전자 악기 및 전자기기만을 사용한 음악을 만을 사용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승부수는 로보틱(Robotic)하고 강박적인 일렉트로닉 펄스(Electronic Pulse)에 기포한 감정 없고 비인간적인 사운드였다. 8비트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리듬, 일렉트로닉 키보드의 리프(혹은 시퀀스)는 자칫 단조롭게 들리기 쉽다. 그러나 22분이라는 오랜 시간을 지속하면서도 이런 단조로운을 떨쳐 버린다. 갖가지 음향효과가 양념처럼 들어가고 특유의 몰환적 기타 사운드는 최면적 효과를 발휘한다. ‘테크놀로지 속의 스피리추오리티'(Spirituclity in technology)라는 후대의 테크노 씬의 맹아는 이미 여기부터 존재한다. 그들의 미래주의적 프로젝트는 멋지게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들이 주 영향은 협의의 록 음악분만 아니라 록의 외부까지 멀리 환장된다. 뉴로맨틱스, 알렉토로신서 캅, 하우스, 테크노ㅡ 인더스트리얼, 앰비언트에 이르기까지 크라프트베르크의 유산은 지대하다. 독자는 그들의 초기 작품이 정말 실험적인 록 음반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독일의 록음악이 이 앨범이 없었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알려졌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에 속한다.(신 현 준)

Y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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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O2008(cropped)” by YMO2008.jpg: The_Junes of Flickr.com
derivative work: Solid State Survivor (talk) – YMO2008.jpg.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굳이 YMO를 이야기하는 이유 두가지. 작년 가을에 일본에 갔을 때 놀란 일이 있다. 타워 레코드에서 신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렸다. YMO의 [Rydeen]이었다. 나온지 십년도 넘은 음악이 갑자기 나오는 이유가 뭐지, 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YMO의 베스트 음반이 새로 발매된 탓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일종의 ´전설´로 여긴다. 일본 대중음악인으로선 미국과 유럽 등지의 음악인에게 영향을 준 최초의 그룹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얼마전 국내 발매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반 [BTTB] 탓이다. [Tong Poo]이라는 타이틀의 음악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피아노 연주로 흘러나오고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YMO 시절에 사카모토 류이치가 만들었으며 YMO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이다. 새로운 감흥을 자아내는 것이다.

사카모토의 국내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선지 요즘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것도 작은 이유다. YMO는 키보드의 사카모토 류이치, 베이스와 키보드의 호소노 하루오미, 그리고 드럼과 키보드의 다카하시 유키히로로 구성된 3인조 그룹이었다. 도쿄 대학 출신의 사카모토 류이치는 전형적인 인텔리 음악인이며 그룹의 리더였던 호소노 하루오미는 음악 제작과 연주를 겸했으며 다카하시는 록 음악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YMO는 80년대 일본 음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엔카와 댄스, 그리고 록으로 삼분되어 있던 일본 음악계에 테크노라는 새로운 장르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YMO 멤버들은 차갑고 정형화된 음악을, 공연장에서 마치 로봇 같은 매너로 연주했다. 중국의 인민군복을 입고 무대에 등장해 세간에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이들은 노래의 제목을 장 뤽 고다르의 영화제목에서 빌어오는 등 혁신적인 대중음악을 들려줬다. 그리고 미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들이 외국무대로 향한 것은 [솔리드 스테이트 서바이버 Solid State Survivor]라는 앨범을 발표한 직후였다. YMO의 무개성적인 테크노음악은 당시 록 음악의 대안을 찾고 있던 서양 젊은이들에게 어필했으며 미국 시장에서 앨범을 발매한 YMO는 일본 대중음악인으로선 최초로 세계순회 공연을 하는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80년대 초반, 일본에선 ´YMO붐´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만큼 청년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셈이다. 83년에 해산을 한 YMO는 이후 1993년에 멤버들이 다시 모여 신작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는데 전성기 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얻진 못했다. 이미 음악계의 판도가 댄스풍의 테크노음악으로 바뀌어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은 더 이상 젊은 층에 어필할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YMO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이들은 시기적으로 운이 좋은 셈이었다. 전자악기의 보급에 발맞춰, 테크노 음악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들고 나온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YMO 덕에 이후 일본에서 테크노 음악이 계속적인 흐름을 만들 수 있었으며 그 정신적 자양분을 YMO가 제공하였음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번 공연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Tong Poo]를 연주할까. 만약 그렇다면, 이미 20여년 전에 일본에서 음악적 신화를 구축했던 세 음악인의 자취를 흐릿하나마 다시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족 한가지. 일본의 젊은이들이 YMO에 갖는 대단한 존경심과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분은 국내에서 출판된 일본의 판타지 만화 [가면 속의 수수께끼]를 꼭 찾아서 보길 바란다. 이 만화를 그린 작가는 YMO의 대단한 매니아인 듯한데 만화 곳곳에 그들의 음반 자켓과 음악인들 캐릭터를 재치있게 그려넣었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 <글: 김 의 찬> 출처 http://www.odemusic.co.kr/(주의 : 현재는 야동 사이트로 연결됨)

디스코그래피
1978 Yellow Magic Orchestra EMI
1979 Solid State Survivor EMI
1980 Public Pressure [live] Alfa
1980 Xoo Multiplies EMI
1981 BGM EMI
1981 Technodelic EMI
1983 Naughty Boys Restless
1983 Service Restless
1984 After Service [live] Restless
1993 Technodon EMI
1997 Yellow Magic Orchestra [Import Bonus Tracks] Sony Music
2003 Zosyoku Japanese Import
2003 Yellow Magic Orchestra: U.S. Edition Sony Music

Shamen, The

소용돌이 치는 듯한 싸이키델릭 락과 하드코어 힙합 리듬을 뒤섞은 the Shamen의 음악은 8~90년대 댄쓰클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Colin Angus, Peter Stephenson, Keith McKenzie, 그리고 Derek McKenzie로 구성된 이 4인조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들의 음악적 뿌리를 이른바 네오싸이키델릭에서 찾고 있다.

공식적으로 1986년 결성된 the Shamen은 1987년에 데뷔앨범 Drop을 발매하였다. 이 앨범은 다양한 키타 텍스춰와 60년대 후반 락밴드들에 대한 향수가 적절히 배합된 앨범이었다. 이 앨범 발매 후 Angus는 acid house/hip-hop에 푹 빠져 들고 말았으며, Derek McKenzie는 그룹을 떠나고 이어 William Sinnott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William은 밴드의 싸운드를 재편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는데 쌤플, 드럼머쉰 등에 의존한 리듬펄스가 크게 강조되게 되었다.

1988년 스테이지에 선 이들은 새롭게 다듬어진 싸운드로 스테이지에 올랐다. 이 시기에 Peter Stephenson 와 Keith McKenzie 가 밴드를 떠났다. 결국 Angus와 Sinnott는 듀오가 되고 만 셈이다. 1989년 In Gorbachev We Trust라는 세번째 앨범으로 the Shamen 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의 청취자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듀오는 계속해서 댄쓰뮤직에 몰두하였다.

막 메인스트림이 그들의 음악에 주의를 기울여갈 즈음 Will Sinnott는 1990년 5월 23일 카나리섬에서 익사하였다. Sinnott의 가족들의 격려로 말미암아 Angus는 활동을 계속했고 처음으로 챠트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영국에서 91년과 92년 사이에 다섯 개의 싱글히트곡이 쏟아졌다. “Move Any Mountain (Progen 91)”은 1991년 말 마침내 미국 팝40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1993년은 그야말로 침몰의 시기였다. 이어지는 앨범은 팬들로부터 외면을 받았으나 그들은 꾸준히 앨범을 냈다.

디스코그래피
1987 Drop (Communion)
1988 Strange Day Dreams (Moksha-Materia)
1988 What’s Going Down? (Communion)
1989 In Gorbachev We Trust (Edsel)
1990 En-Tact (Epic)
1992 Boss Drum (Epic)
1995 Axis Mutatis (One Little)
1996 Hempton Manor (One Little)
1998 UV

링크
Fan Page

Madonna

Madonna, Rotterdam, 26-8-1987.jpg
Madonna, Rotterdam, 26-8-1987” by Olavtenbroek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마돈나를 한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자신감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첫 앨범을 발표한 84년부터 지금까지 연예계를 한번에 휘어잡는위력을 발휘하는 몇 안 되는 엔터테이너로서 자신만의 노래와 이미지를 완벽하게 표현하여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진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80년대 초부터 마이클 잭슨과 함께 뮤직비디오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한 그녀는 자존심,독립성,그리고 솔직함을 무기로 마돈나,자신만의 표현을 하고 있다.

DJ Mark Kamin에 의해 픽업

1958년 8월 16일,미국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 로체스터에서 태어난 마돈나 (본명:마돈나 루이즈 베로니카 치치오네)는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계모인 어머니밑에서 8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그녀는 어려서부터 치어리더,피아노 레슨,발레등 춤과 노래에 특출난 재능과 끼를 발휘하여 미시간 주립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는등 그녀의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1977년,그녀는 발레를 하기위해서 뉴욕으로 가 도너츠가게 카운터에서 일을 하면서 [Alvin Ailey & Martha Graham]이라는 무용단에 들어가 춤을 추던 중 노래로 방향을 전환.클럽의 인디 밴드에서 피아노와 기타를 연주하면서 자신만의 곡을 만들기 시작한다. 클럽에서도 마돈나의 특이한 음색과 펑키하면서도 과격한 춤실력을 주목 받아 마침내 1982년 Dj Mark Kamin에 픽업되어 ‘Everybody’라는 노래로 클럽에서부터 인기를 얻게 된다.

첫 데뷔 앨범[Madonnna] 1983년에 발표한 그녀의 첫 데뷔 앨범[Madonnna]는 대중들에게 많은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클럽에서만큼은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앨범 수록곡인 ‘Hoilyday’는 방송챠트에 진입을 했고 ‘Borderline’ 은 1984년에 Top10에 들어 17주간동안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Lucky Star’는 차트에 4위로 랭크가 되었는데 그녀의 곡들과 함께 특이하면서도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의상으로 꾸며진 뮤직비디오도주목을 받게 된다.

1984년에 발표된 마돈나의 두 번째 앨범 [Like A Virgin]은 차트에서 정상을 기록하면서 6주간 차트에 머무르게 되는데 1985년 어느 아티스트보다 최고의 음반 판매율을 보이게 된다.1986년에 히트를 기록한 마릴린 먼로에게 헌사한 노래 ‘Material Girl’로 그녀는 투어를 시작했으며 ‘Crazy For You’로 그 해 5월 두 번째 히트곡을 낳게 되면서 영화 [Vison Quest]와[Desperately Seeking Susan]에 출연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그해 마돈나는 영화계의 악동,숀펜과 자신의 생일날 결혼을 했으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4년 후에 숀펜과는 결별을 하게 된다.1987년 그녀의 다섯번째 앨범 ‘Open Your Heart’가 싱글로 발표되고 그녀의 세번째 영화 [Who’s That Girl]의 주제가인 ‘ La Isia Bonita’가 여섯 번째 싱글 앨범으로 정상에 오르게 된다. 파격적인 뮤직비디오 ‘Like A Prayer’와 영화 [Dick Tracy]출연 팝과 락,댄스를 포함한 그녀의 네 번째 앨범인 [Like A Prayer] 슬립 차림의 마돈나가 불 타는 십자가 앞에서 흑인성직자와 키스를 하는 파격적인 화면으로 꾸며진 뮤직비디오와 함께 또 한번 마돈나는 뜨거운 화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4집에 수록된 ‘Express Yourself’,’Cherish’,’Keep It Together’이 싱글 원을 기록하면서마돈나는 1990년 4월부터 12월까지 [Blond Ambition]이라는 타이들로 투어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그리고 90년 5월에는 [Vouge]가 히트를 기록하면서 웨렌 비티와 영화 [Dick Tracy] 에 출연을 하게된다그녀는 ‘Immaculate Collection’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앨범에서는 ‘Justify My Love’와 ‘Rescue Me’ 두 곡이 히트를 하게 되고 ‘Rescue Me’는 미국 여자 가수중에서 차트에 15위로 첫 등장하는 신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2년 여름,영화 [League of their Own]의 주제가로 사용되기도한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 라는 히트곡을 내놓고 1993년에 발표된 [Erotica]와 1995년에 발표된 [Bedtime Stories]는 플레티넘을 기록하면서 일곱 번째 멀티 플레티넘을 기록하게 된다. 개성파 연기자 마돈나,[에비타]로 골든 글로브 최고 여자 배우상 수상 1996년! 마돈나는 영화 [에비타]에서 주인공을 맡으면서 그녀의 인생에서 잊지못할 한 해를 맞게 된다.마돈나는 에비타에 출연하면서섹시한 이미지에서 엘레강스하면서 지적인 이미지로 탈 바꿈하게 되는데 그 결과 그해 골든 그로브 [Musical or Comedy] 부문에서 최고 여자 배우상을 거머지게 되고 그녀의 트레이너인 카를로스 레온의 딸 [Lourdes]를 출산하게 된다.

마돈나는 1998년 트랜스적인 요소가 강한 [Ray Of Light]를 발표하면서 이미지를 바꾸게 되는데[Ray Of Light ]는 99년, 제41회 그레미 시상식에서 데뷔 이래 처음으로 최고 팝 앨범상,최고 댄스 레코딩상,단편 뮤직비디오상을 받으면서 그간 그래미와 인연이 없는 마돈나에게 세 개의 트로피를 선사하기도 했다.

뮤지션,가수,영화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진 마돈나! 15년동안 마돈나는 전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다른 뮤지션들의 대표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그녀는 위대한 가수도 아니고 위대한 배우도 아니지만 항상 새로운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고 파격적이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전 세계에 자신만의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tube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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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여자 돈키호테? 신의 명령으로 가부장제와 정면대 결하는 제2의 잔다르크?

83년 데뷔한 이래 변함없이 대중적 우상의 권좌에 머물러온 마돈나는 어 느 쪽으로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 범인의 눈에 무모하고 비정상으로 비칠 만치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가 하면, 그늘에 파묻혔 던 성적 금기를 끄집어내며 고정된 성역할을 파기해나가는 등 마돈나의 행각은 언제나 좌충우돌이다. 한때는 페미니스트들이 열렬하게 찬미하고, 한때는 보수주의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바로 동성애자들의 동지 가 되는 등 그녀의 지지층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모한다. 그 결과 40줄에 접어든 지금에도 마돈나는 ‘성스러운 창녀’의 이미지를 고수한다. 오랜 만에 만들어진 할리우드 뮤지컬 <에비타>에서 돋보이는 것은 알란 파커의 예리한 연출도,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육감적인 매력도 아닌 생기발랄하고 격정적인 에바 ‘마돈나’ 페론뿐이다.

마돈나의 전기를 쓴 크리스토퍼 앤더슨은 “마돈나 같은 사람은 일찍이 한명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1억장의 앨범판매고를 기록했 고, 비틀스보다 많은 28곡의 톱 텐 싱글을 가진 톱 스타라는 사실은 차라 리 평범하다. 마돈나를 유아독존으로 만든 것은 “자아, 미워해봐요!”라 는 신조처럼 세인들에게 정서적 충격을 안기고, 심리적 혼돈을 일으켜온 반사회적 태도 때문이었다. <진실 혹은 대담>에서 그녀는 “내가 최고의 가수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최고의 댄서가 아니라는 것도요. 그 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을 화나 게 하는 것이니까요”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마돈나는 자신의 흥밋거리를 채우기 위하여 부유한 중서부 출신의 우등생에서 남성의 노리개인 보이토 이(Boy Toy), 남성을 유혹하는 금발의 머티리얼 걸(Material Girl), 네글 리제를 입은 가톨릭 신자 등으로 변신해왔다.

80년대와 90년대의 문화산업을 관통하는 유일한 엔터테이너. 부도덕한 이성과 합리적인 육체의 합일

마돈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명하다. 동시에 마돈나는 감정적이고 제멋 대로다. 그녀는 ‘에비타’처럼 성녀와 창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구현해왔 다. 남성과 여성을 하나의 몸속에 실어, 자웅동체의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상반된 것을 하나에 집어넣어 조화를 이루 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섹스를 할 때 채찍을 맞거나 쇠 사슬로 침대에 묶이는 것을 좋아한다고 공언하면서도 십대 미혼모를 두둔 하고, 성스러운 의식과 성물을 노골적으로 훼손하면서도 스스로 가톨릭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등 마돈나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면서도 10년이 넘도 록 수많은 대중을 자신의 팬으로 거느리고 다닌다. 마돈나는 언제 자신이 변해야 하는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실천해 왔다. 그리고 “내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건 서구문 명의 잘못일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 이 바로 미국의 하버드, 뉴욕주립대 등 수많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대중 문화’‘여성’‘동성애’등의 주제어로 마돈나를 연구하는 이유이다.

지금이 80년대라면 마돈나는 소비문화주의에 편승한 대중스타, 대중의 호 기심과 반발심을 교묘하게 자극하여 상품을 팔아먹는 사기꾼 정도로 취급 되고 말았을런지도 모른다. 영화, 음악 등등의 대중예술이 60년대에 키워 왔던 자신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80년대에 마돈나는 대중소비문화의 화려 한 상징이었다. 83년 <럭키 스타> (Lucky Star)를 불렀을 때 마돈나가 직 접 코디한 의상의 벨트에는 보이 토이(Boy Toy)라는 단어가 붙어있다. “ 어느 날 보이 토이를 아무런 생각없이 머리에 떠올렸어요. 벽에 휘갈겨 썼더니 모두들 재미있어 했어요. 남자의 장난감!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참뜻은 거꾸로라구요”라고 마돈나는 말했지만 대중은 그녀를 ‘장난감’ 으로 인식했다. 마돈나도 그걸 이용했다. 84년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에 이어진 <머티리얼 걸>(Material Girl)에서 마돈나는 먼로를 흉 내낸다. “현찰을 갖고 있는 사내는 언제나 여자의 이상형이지요”라는 말처럼 마돈나는 소비를 부추기고, 탐닉하는 여인상을 보여주었다.

늘어뜨린 십자가와 묵주, 살짝살짝 보이는 배꼽과 토이 벨트 등을 가리켜 <타임>은 “전혀 성스럽지 못한 성물들을 선전하고 있는 것 같다”며 “ 쇼핑몰 문화의 산물”이라고 비난했다. 80년대 중반 마돈나에 대한 평가 는 혹독했다. “마돈나가 풍기는 이미지는 요컨대 음탕한 여자이다. 가장 비싸게 사주는 손님에게 몸을 주는 거리의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섹스와 종교를 기괴하게 뒤섞어놓아 인간의 정신성을 비웃고 있다”고 말하는 대 학교수가 있는가 하면 <빌보드>에서는 “마돈나는 음악계에서 6개월 안에 쫓겨날 것이다. 그녀의 인상이 노래에 십분 반영되고 있으니까”라고 노 골적으로 비꼬았다. <피플> 정도가 비교적 냉정했다. “마돈나는 창녀지 만 그 맛은 달콤하다. 그녀는 통속적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녀의 개성 자체는 하나의 팝 아트가 되어버린다.”

충격적인 사진집 <섹스>의 출판기념회. 동성애자의 벗, 마돈나?

그러나 마돈나는 80년대 후반 보통사람들의 어설픈 기대를 멋지게 뒤집어 버린다. 숀펜과 사랑에 빠져있던 86년 발표한 ‘트루 블루’(True Blue) 란 앨범은 “그녀야말로 팝음악이다. 복잡하면서도 소박하다. 팝의 표면 적인 매력은 물론 그 밑바닥에 깔린 정신과 에너지와 감정을 잘 알고 있 다”“외모와 음악이 더욱 원숙해진 마돈나는 신랄한 평론가의 마음까지 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등의 호평을 받는다. 더 나아가 마돈나는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킨다. <배니티 페어>에서는 “철저한 채식과 하루에 5천m씩 달리는 운동으로 마돈나가 사춘기의 유아비만을 근육으로 변신시 켰다”고 보도했다. “뚱뚱하던 소녀가 매력적인 여왕이 되었다. 매춘부 와 같은 모습에서 세련된 은막의 요부로 눈부시게 다시 태어난 그녀의 온 몸에서는 어떤 메시지가 전해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비어있던 금발 야심 가의 왕관을 물려받을 장본인”이 마돈나라는 것이다.

함께 발표된 뮤직 비디오 ‘파파 돈 프리치’(Papa Don’t Preach)는 새로 운 출발점이 되었다. 임신한 십대소녀가 아이를 낳는 것을 인정해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하는 이 노래는 마돈나에게 적대적이던 보수적인 중절 반 대파가 지지를 보내는 이변을 낳았다. 반면 <오픈 유어 하트>(Open Your Heart)는 낭만적이면서도 야한 성적 몽상을 보여준다. <뉴욕 타임스>의 영화평론가 제임스 캔비는 “단 4분 22초 안에 사춘기 소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달콤하고 외설적인 환상이 가득 담겨 있다. 익살맞으면서 섹시한 불멸의 소곡이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당연히 마돈나는 MTV 최고의 시청 률을 올리게 되었고 마이클 잭슨과 함께 MTV의 수호자가 되었다.

정상에 오른 마돈나는 89년 ‘라이크 어 프레이어’(Like a Prayer) 란 앨범을 발매하면서 더욱 도전적이 된다. <롤링 스톤>의 “팝음악으로서 가장 예술에 접근했다. ‘라이크 어 프레이어’는 마돈나를 아티스트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깊이 드러내주는 목소리의 소유자이다”라는 평은 차라리 상투적이었다. 뮤직비디오 ‘라 이크 어 프레이어’는 남부의 백인처녀가 성가대원인 흑인청년과 사랑에 빠지고, 도망가는 두 사람을 KKK단이 등 뒤에서 쏜다는 이야기다. 인종적 , 종교적 문제를 암시하는 이 비디오는 내용 자체보다도 불타는 십자가 등의 상징 때문에 더욱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건 시작이었다. <익스프 레스 유어셀프>(Express Yourself)는 평범한 가사와 별개로 <메트로폴리 스>에서 영감을 얻은 미래의 풍경에서 사디즘적인 환상을 표현한다. 그리 고 당당하게 말한다. “<익스프레스 유어셀프>의 주제는 음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라고.

페미니스트에게 공격받은, 쇠사슬에 매여 테이블 밑을 기어다니는 장면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제 자신을 쇠사슬에 맨 거예요. 남자가 묶 은 것이 아니라구요. 내 욕망을 붙들어맨 거죠. 내 테이블 밑에서 내가 기어다닌 겁니다. 남자에게 명령받은 것이 아니라구요. 모든 것을 내 맘 대로 한 거예요.” 마돈나는 “내 노래에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면 그건 당신의 꿈을 믿으라는 것이다. 너 자신을 표현하라”고 말한다. 마돈나가 페미니스트와 때로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전적으로 합치하는 모순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불쌍한 사람은 자신의 쾌락도 남의 허락을 얻어 구하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마돈나는 스스로 쾌락을 쟁취할 것을 주장하 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노래하고, 춤추는 모든 것으로 표현한다. 마 돈나는 ‘블론드 앰비션’(Blonde Ambition) 세계순회공연을 앞두고 안무 가를 마이클 잭슨의 밴드 공연을 맡았던 빈스 패터슨으로 교체한다. 마돈 나가 그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모든 법칙을 깨트리는 거야. 섹스와 자위 등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로부터 강요된 죄의식을 없애는 의 식은 물론 지금부터는 아버지든 교황이든 모든 남성권위와 싸워나가야만 해.”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계획없는 좌충우돌은 아님이 분명하다. <저스티파 이 마이 러브>(Justify My Love)는 양성연애, 복장 도착, 엿보기와 사디 즘의 집대성으로 MTV에서 방영금지처분을 받는다. 그러자 마돈나는 ABC의 뉴스 프로그램 ‘나이트 라인’에 출연해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으므로 스 스로 섹시해지는 것을 선택한다며 자신이 90년대 페미니즘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당돌한 선언에 대하여 <뉴욕 타임스>는 “마돈나 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을 빈틈없이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이 <저스 티파이 마이 러브>에 담긴 페미니즘적인 메시지이다. 수백만명의 사람들 이 그 메시지를 알아들었다”라며 옹호한다. 마돈나에게 <저스티파이 마 이 러브>로 검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각광을 받으려는 속셈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가 마돈나를 “미국에서도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류 실업가” “부도덕에 걸맞은 머리와 사업에 걸 맞은 육체를 지닌 여자”라고 부른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포브스>는 마돈나가 수년에 걸쳐 정상을 달린 것은 그녀가 해마다 자신을 혁신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90년 ‘중상비방에 대항하는 게이와 레즈비언 연맹’(GLAAD)에서는 마돈 나에게 미디어상을 주었다. 또한 보스턴 ‘게이 공동체 뉴스’에서는 마 돈나의 ‘블론드 앰비션’순회공연을 “이성애적 언어의 옷을 입고 있지 만 남자연인을 여자 짝으로 바꾸라고 속삭이며 은연중에 레즈비언을 권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게이 100>에서 폴 러셀은 마돈나는 “동성애뿐 아니라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성역할과 성 에 대한 뿌리깊은 고정관념을 타파함으로써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좀더 진 보적이고 관대한 사회풍토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마돈나는 동성애라는 정체성과 스타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마저도 마돈나에게 찬탄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가 된다. 요즘 미국에서 ‘포스트 게이’라는 개념은 고정 적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이성과 동성을 사랑하는 성적 태도를 일컫는다. “성의 구별에서 해방된 섹스는 구속을 없애버린다. 남 자든 여자든 지배하거나 복종하는 자유를 가져다 준다. 남자가 여자 복장 을 해도 좋고, 여자가 남자 복장을 해도 상관없다. 자신의 다른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니까”라는 말처럼 마돈나는 자유로운 양성연애를 공적으로 과시하고 다닌 지 오래이다.

마돈나의 변신은 90년대에도 여전하다. 92년의 앨범‘에로티카’(Erotica )와 94년에 발표된 ‘베드타임 스토리’(Bedtime Story)는 자신이 가진 양면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자가 어두운 면이라면 후자는 그 반대 라는 것. ‘베드타임 스토리’는 “비틀스보다 슈프림스에 더 열광했다” 는 고백처럼 리듬 앤 블루스에 근접하며 진솔한 감정을 깊게 드러낸다. 그리고는 95년에 발라드 베스트 모음집인 ‘섬싱 투 리멤버’(Something to Remember)란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의 첫 곡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와 개인의 관능적 욕구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한 천재적인 솔 가 수 마빈 게이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아이 원트 유>(I Want You)이다. <테 이크 어 바우>(Take A Bow) <율 시>(You’ll See) <아이 원트 유>로 이어 지는 발라드 히트곡의 뮤직비디오연작에서 마돈나는 사랑의 아픔에 상처 받으면서도 주체적으로 자신을 지켜나가는 관능적인 여인상을 선보인다. 한때 대통령의 부인, 대법원 여판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국의 가장 유력한 여성 중 하나였던 마돈나는 그러나,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자신을 추스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발라드를 노래하고, 반사회적인 태도를 함부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마돈나의 타협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에서 엄청나게 섹시한 여자는 못된 암캐나 위험한 인물로 취급받게 마련이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마돈나가 어디로 가버렸을 수는 없으니 까. 마돈나의 기이한 몸짓과 충격적인 말, 행동은 결코 즉흥적이거나 우 발적인 것이 아니다. 모두가 치밀한 계산 아래 미리 짜놓은 연출의 결과 인 것이다. <진실 혹은 대담>에서 자신의 섹스까지도 공개하던 마돈나가 절대로 찍지 못하게한 만남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거느린 영화사, 음반 사, 출판사의 관계자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마돈나는 절대로 대중이 자신 의 사업가적 면모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고, 자신을 ‘충동적인 암캐’ 로 바라보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나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큼 나에 게 관심이 쏠려있”다는 것이다.

그 치밀한 판단이 마돈나를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만들었다. 마돈나 는 여성이 남성을 성적으로 지배하던 시대로 되돌려놓았고, 성적 쾌락을 자기 자신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80년대 들어 비약적으로 성장 한 문화산업의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자리를 매김한 것이었 다. 마이클 잭슨이 아직 피터팬에 머무르며 ‘네버랜드’에 숨어있을 때, 마돈나는 여신이 되어 남성들의 사회 한복판에 ‘성의 구별에서 해방된 소돔’을 만든 것이다. 마돈나는 충실하게 우리 시대의 모순과 혼란을 드 러내는 거울을 넘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직면하게 만드는 요술거 울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점까지도, 마돈나와 진실없는 우리 시대는 너무나 닮아 있다.

김봉석 기자 

Copyright 한겨레신문사 1997년01월21일

디스코그래피

2000-12 Don’t Tell Me (Single)
2000-12 Music (Special Limited Edition)
2000-09 Music
2000-09 Music (Single)
2000-03 American Pie (Single)
1998 Frozen (Single)
1998 Ray Of Light
1997-07 Evita (O.S.T)
1996-11 Evita (2CD, O.S.T)
1995 Something To Remember
1994 Bedtime Stories
1992-10 Erotica
1990 I’m Breathless
1990 Immaculate Collection
1989 Like A Prayer
1987-07 Who’s That Girl (O.S.T)
1987 You Can Dance
1986 True Blue
1984 Like A Virgin
1983 Mado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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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트리뷰트 앨범에 관한 기사 읽기
Madonna VS Cyndi Lau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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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ftwerk

Kraftwerk by Ueli Frey (1976).jpg
Kraftwerk by Ueli Frey (1976)” by Ueli Frey – http://www.drjazz.ch/album/bilder/kw05.jpg. The photo comes from the collection of Kraftwerk photos made by Ueli Frey..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독일 그룹 Kraftwerk 는 그들 스스로가 Robot Pop이라 명명한 자신들만의 새로운 음악을 선보임으로써 이후 등장하는 수맣은 아티스트들에게 – synth-pop, hip-hop, techno 등 – 음악적 청사진을 제시하여 20세기 후반 팝씬에 일대 혁신을 몰고온 장본인들이다. 일렉트로닉 음악의 형태를 다신 선구자로써 그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Kraftwerk는 Can, Tangerine Dream과 함께 ’60년대 후반의 독일 실험주의 음악공동체에서 자라왔다. 주요멤버인 Florian Schneider와 Ralf H?ter는 Dusseldorf 음악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에 이들은 Organization이라는 실험적인 Jazz-Rock 듀오를 조직하여 1970년 Tone Float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밴드를 해체하고 그들 스스로를 Kraftwerk(독일어로 “발전소”라는 뜻임)라 재명명하였다. 그리고 곧 자신들만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점차 미니멀리즘적인 전자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1971년 데뷔앨범 Kraftwerk 1은 Schneider가 스스로 제작한 리듬머쉰 등을 이용하여 그들의 독창적인 기묘함의 초기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1972년의 Kraftwerk 2(앨범 이름도 참 미니멀리즘적이네요)에서 둘은 라이브 드러머없이 오직 드럼머쉰의 리듬으로만 앨범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은 당시의 청중뿐 아니라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에게도 무척이나 낯선것이었고 그당시 주도적이던 팝패션에서 상당히 일탈한 SF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일련의 공연들 역시 상당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3집 Ralf and Florian(1973년)은 여전히 혁신적이고 예언적이었다.

미국에서 첫발매된 그들의 4집 Autobahn은 국제적으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타이틀트랙이 크게 히트했고 앨범은 미국의 앨범차트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상당 부분이 Moog 씬디싸이저로 연주된 이 앨범에는 기존의 팝구조와 멜로디를 해체하겠다는 Kraftwerk의 도전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1975년 그들은 래디오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한 컨셉트 앨범 Radio-Activity로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 앨범은 독일어 버전과 영어 버전, 두 종류로 발매되었다. 기계적인 싸운드가 좀더 세련화된 Trans-Europ Express(1977년 발매), 인간적인 터치가 거의 배제된 The Man Machine(1978년 발매)를 거치면서 Kraftwerk는 이제 그들 스스로를 Automaton(자동인형) – “We Are the Robots”와 같은 곡에서 묘사했듯이 – 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룹의 영향력이 그 정점에 다다를 시점에 그들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동안 가시권에서 벗어나 있던 그들은 1981년 Computer World – 그들이 오래전에 예언하였던 세상인 – 로 돌아왔다. 싱글 “Computer Love”가 영국 차트를 강타한뒤 그들은 다시 몸을 숨겼다. 5년간의 휴식을 즐긴후인 1986년 그들은 Electric Cafe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제 팝씬은 이미 그들이 일궈놓았던 씬디싸이저와 드럼머쉰이 지배적인 음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그룹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1991년 The Mix라 명명되어진 그들의 베스트콜렉션이 나온후 상당기간 침묵을 지켜오던 Kraftwerk는 1999년 후반 “Expo 2000″이라는 새로운 싱글을 내놓았다.

디스코그래피

1971 Kraftwerk 1 Philips
1972 Kraftwerk 2 Philips
1973 Ralf and Florian Warner
1974 Autobahn Philips
1975 Radio-Aktivitat [German] EMI
1975 Radio-Activity Capitol
1977 Trans-Europa Express [German] EMI
1977 Trans-Europe Express Capitol
1978 Die Mensch Maschine [German] EMI
1978 The Man Machine Capitol
1981 Computer Welt [German] EMI
1981 Computer World Warner
1983 Techno Pop [Not Released] EMI
1986 Electric Cafe [German] EMI
1986 Electric Cafe Elektra
2001 Expo 2000 Astralwerks
2001 Expo 2000 [Astralwerks Single] Astralwe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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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출신의 데이빗 볼과 런던 출신의 리처드 노리스의 듀엣으로 결성된 그리드는 화려했던 케리어를 겸비한 테크노계의 슈퍼 프로젝트. 먼저 데이빗 볼은 80년대 초반을 풍미한 듀오 소프트 셀의 멤버로 알려져 있으며, 리처드 노리스는 5-6개의 인기 테크노 연주 밴드를 거친 베테랑. 단아하면서도 공간감을 이용한 수평적인 사운 드가 특징인 이들은 그간 브라이언 이노, 해피 먼데이스, 펫 숍 보이스, 아트 오브 노이즈 등과 작업을 하여 명성을 쌓았고 90년엔 데뷔앨범 “Electric head”를 92년에는 2집인 “Four five six”를 발표하며 노장 테크노의 안정된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라이언록(Lionrock) 인기 절정의 하드코어 테크노 신에 곧 폭발할 기대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라이언록은 각종 모음집과 리믹스 작업 등을 통해 낯익은 트리오. 앰시 버즈 비, 로저 라이언스, 저스틴 로버트슨 등 스튜디오 뮤지션 출신이자 베테랑들인 이들은 다른 밴드들에 비해 비교적 평균 연령이 높은 편이지만 사운드의 파워만큼은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96년에 공식 데뷔앨범인 “An instinct for detection”을 발표.

디스코그래피

1990 Electric Head East West
1994 4,5,6 Import
1995 Music for Dancing
Deconstruction
1995 Evolver Deconstru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