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보관물: pop

O’connor, Sinead

Sinead O'Connor 1987.jpg
By Photographer unknown. Distributed by Chrysalis Records. – Worthpoint, Public Domain, Link

그녀는 1987년 ‘The Lion and the Cobra’란 앨범으로 데뷰한 아일랜드 출신의 여가수로서, 데뷰당시부터 지금가지 항상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팝계의 트러블 메이커이다. 삭발한 머리에 완벽한 마스크, 가냘픈 몸매에서 나오는 강한 목소리, 공개적인 IRA지지 발언, 토크쇼에 나와 교황의 사진을 찢은 파격적인 모습… 이런 것들이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이미지이다. 그녀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Nothing Compares to You”는 시네이드의 두번째 앨범 ‘I Do Not Want I Haven’t Got’에 수록된 곡으로 1990년 발표와 함께 빌보드 차트에서 사주간 정상을 차지해,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이곡은 제목의 모양새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프린스가 만든 곡이다. 이노래로 시네이드는 제 33회 그래미 수상식에서 ‘제 3세계 음악 보컬상’을 수상했으나 시상식에 불참하여 또 한번의 충격을 주었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혼란으로 조용할 날이 없는 아일랜드에서 자란 Dubliner답게 그녀는 Van Morrison, U2, Gary Moore 등의 선발 아일랜드 출신 뮤지션들의 뒤를 이어 입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서 열광 팬 못지 않게 많은 적을 두었다.

디스코그래피
1987 The Lion and the Cobra Ensign/Chrysal
1990 I Do Not Want What I Haven’t Got Ensign/Chrysal
1992 Am I Not Your Girl? Ensign/Chrysal
1994 Universal Mother Ensign/Chrysal
2000 Faith and Courage Atlantic

Mr. Mister

Welcome to the Real World CD cover.JPG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emusic.com, Fair use, Link

결성 : 1982년
해체 : 1988년
멤버 : Steve Farris, Howard Buzzy Feiten, Steve George, Pat Mastelotto, Richard Page

미국, L.A. 출신의 4인조 Rock 그룹.

깔끔한 사운드와 팝적인 분위기로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었다. 이 그룹의 역사는 Richard Page와 Steve George가 78년에 결성한 그룹 “Pages”에서 시작한다. Pages는 프로그레시브 풍의 음악을 연주하던 그룹으로 본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훨씬 인기를 끌었다. 이들의 곡 중에서 “Caravan”은 일본 NHK에서 제작한 ‘실크 로드’에서도 사용되었다. 물론 이 때의 연주와 편곡은 KITARO(키타로)가 맡았다. 국내에서도 Pages의 ‘Caravan’이 80년대 잠시 라디오 방송을 타던 때가 있었지만, KITARO의 “Caravan Sary”(실크 로드 – ‘천축’ 앨범에 삽입)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본국인 미국에서도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자 그룹은 해산되고 만다. 그 후, Eddie Money의 빅 벤드 멤버로 활약했던 Steve Farris와 Mike Cahpman의 밴드 등에서 활동하던 Pat Mastelotto를 만나 1982년 결성한 그룹이 바로 MR. MISTER 이다.

Richard Page (리드 보컬, 베이스), Steve George (키보드), Steve Farris (기타), Pat Mastelotto (드럼)의 진용으로 1984년 데뷔 앨범을 발표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룹 YES의 엔지니어였던 Paul De Villers에 의해 상당히 다듬어진 사운드로 1985년 발표된 그들의 두 번째 앨범 “Welcome to the Real World”는 그들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Broken Wings, Kyrie, Run To Her 등의 히트곡을 내게 되는데, 특히 그들의 첫 번째 히트곡인 ‘Broken Wings’는 1985년 12월 7일부터 2주동안, ‘Kyrie’는 1986년 3월 1일부터 2주동안 챠트의 정상을 차지하면서, 앨범역시 ‘앨범챠트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목에서도 보여주듯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경건한(?) 노랫말로 ‘건전한 팝 그룹’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1987년에는 3집 “Go on…”을 발표했다. Peter Gabriel의 앨범 ‘So’를 공동 프로듀스한 Kelvin Killen이 참여 더욱 치밀한 사운드를 만들었다. 3집에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Man of a Thousand Dances’, ‘Healing Waters’, 그리고 신의 섭리를 암시한 ‘Watching the World’, 전쟁에서의 인간의 희생을 다룬 ‘Dust’, 첫 싱글로 발매되었던 ‘Something Real (Inside Me / Inside You)’등을 담고 있었다.

디스코그래피

1984 I Wear the Face RCA
1985 Welcome to the Real World RCA
1985 Go On RCA

Jones, Grace

GraceJones1984.jpg
By Gary Friedman, Los Angeles Times – https://digital.library.ucla.edu/catalog/ark:/21198/zz0002shj0, CC BY 4.0, Link

남성적인 이미지와 거의 매조키즘에 가까운 무대 연출로 자신만의 개성을 창출한 매혹의 흑인 아티스트. Grace Jones는 Jamaica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2세가 되던 해 미국으로 이민해 왔다. 목사이자 정치가였던 엄격한 아버지에 의해 복장과 생활방식, 그리고 정신까지 통제당하는 유년시절을 보냈던 Grace는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의 엄격함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노출이 없는 의상을 강요받고 TV와 영화, 심지어는 음악까지도 허용되지 않는 생활을 당해야 했던 그녀가 패션모델이자 영화배우, 그리고 파격적인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가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21살에 Syracuse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면서 Philadelphia의 나이트클럽에서 일을 하고 뉴욕과 파리에서 모델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1977년 Island社와 계약을 맺고 그녀의 첫 번째 앨범인 Portfolio를 낸다. 짧게 자른 머리, 광분한 듯한 분장, 그리고 화려한 의상 등으로 마치 조각을 보는 듯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그녀는 독특한 남성적인 이미지와 거의 매조키즘에 가까운 무대 연출로 자신만의 개성을 창출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그녀의 이와 같은 파격적인 이미지는 그녀와 결혼 한 프랑스의 아티스트 Jean-Paul Goode이 그녀의 이미지를 완화시켜 대중적인 이미지로 다듬으면서 훨씬 부드러워 지고, 이를 통해 그녀는 더 광범위한 대중들을 자신의 팬으로 갖게 된다.

1981년 Grace는 Nightclubbing 앨범을 발표하고 순회공연에 오르는데, 그녀의 이 앨범에는 그녀의 가장 큰 히트곡인 “Pull Up to the Bumper”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앨범은 David Bowie와 같은 New Wave 뮤지션들에 의해 쓰여진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기도 한다.

한편 배우이기도 했던 그녀는 84년 Conan the Destroyer에, 85년에는 007 시리즈 중에 하나인 A View to a Kill에 출연하며 80년대 중반까지 가수이자 배우로서 절정기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85년에 발표된 앨범 Slave to The Rhythm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87년부터는 그녀의 인기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음반은 대체로 잘 팔리고 있었으나 그녀 생활의 또 다른 문제들이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공하지 못한 공포 영화 Vamp에서 흡혈귀로 출연 한 것을 마지막으로 87년부터 90년까지 그녀는 경제적 파산 상태로 인한 소송사건으로,
코카인 소지 혐의의 재판으로 뉴스란에 나오는 것 이외에는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89년, 그녀는 소속사를 옮겨 Bulletproof Heart를 발표하고 순회 공연을 하는 등 재기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지만 실패한다. 그녀가 대중적 인기를 다시 얻게 된 것은 91년 Island社와 재계약을 맺고 Sex Drive를 발표하여 타이틀곡을 댄스 차트 1위에 올려 놓았을 때였다.

또한 그녀는 92년 그해 박스 오피스 성공작인 영화 Eddie Murphy’s Boomerang에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인기도 다시 얻게 된다. 그녀가 발표한 가장 최근의 앨범으로는 98년에 나온 Private Life : The Compass Point Sessions이 있다.

한편 그녀는 AIDS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하던 시절에 자신의 많은 동료들을 이 병으로 잃어 버린 후 AIDS 환자들의 권익과 구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tube music

디스코그래피

1997 Nightclubbing
1985 Best – Island Life
1980 Warm Leatherette
1968-06 Private Life: The Compass Point Sessions

Hart, Corey

80년대 중반 데뷔싱글 “Sunglasses At night” – 이 곡은 여러모로 80년대 팝의 전형으로 자리잡을만 하다. 인상적인 키보드리프, 곡 중간중간 이어지는 강렬한 기타솔로, 거기에다 80년대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모양새에 이르기까지 신디싸이저에 기반을 둔 락스타일의 곡이라는 형태를 통해 80년대 음악적 특징을 골고루 배합한 별식같은 느낌이다 – 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Corey Hart는 캐나다가 전세계에 내놓은 몇안되는 남자싱어 중 한명이다.

물론 Bryan Adams보다는 상업적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미치지 못했고 때로 “Sunglasses At night”의 단발히트 가수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1984년 – 미국에서의 발매연도로 캐나다에서는 1983년 – 데뷔앨범 First Offense 이후 꾸준히 앨범을 내며 “Never Surrender”와 같은 준척을 건지기도 하는 등 9개의 빌보드 탑40 히트곡을 내며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온 가수이다.

Corey Hart performing in Toronto.jpg
Corey Hart performing in Toronto” by Marc Lostracco – Email.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62년 5월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Corey Hart는 가수가 되고자 한 캐나다의 한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큰 결실을 보지 못한 그는 뉴욕으로 가서 잠시 활동하다 캐나다로 다시 복귀하여 Aquarius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레코드사는 그의 반항적인듯 하면서도 준수한 외모를 활용하기로 하였고 그를 십대의 섹스심볼로 홍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한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었는지 흥미롭게도 그의 사진은 언제나 얼굴을 약간 숙인 채 눈을 반항적으로 치켜 뜬 모습이 대부분이다.

어찌 됐든 캐치하고 대중적인 락댄쓰곡과 준수한 외모에 힘입어 데뷔앨범 이후 연속된 두장의 앨범은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이로써 바야흐로 캐나다 출신 월드스타로써의 입지를 다지는 듯 했으나 이후 발표된 두장의 앨범들은 그에게 상업적 실패라는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이쯤 되자 그는 타개책으로 Columbia 등과 함께 작업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이전과 같은 명예로운 나날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Corey Hart는 이에 굴하지 않고 – 생긴게 의외로 성실해보임 – 바하마로 근거지를 옮겨 90년대 말까지 꾸준한 활동을 펼쳤다.

디스코그래피

1984 First Offense EMI America
1985 Boy in the Box EMI America
1986 Fields of Fire EMI America
1987 Bang! EMI America
1989 Young Man Running EMI America
1992 Attitude & Virtue Sire
1996 Corey Hart Sony
1998 Part One Aquarius
1998 Jade Sony

Hall & Oates

Hall & Oates.jpg
Hall & Oates” by Gary HarrisFlickr: Hall & Oate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홀 앤 오츠는 60년대 말 결성된 미국 출신의 듀오이다. 대릴 홀(Daryl Hall)과 존 오츠(John Oates)의 성을 딴 이름으로 부드럽고 쉬운 멜로디를 내세워 74년 첫 번째 히트 이후로 80년대에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소울의 전통에 뉴 웨이브와 하드 록을 접목시킨 이들의 음악은 매우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67년 대학에서 처음 만난 홀과 오츠는 이내 같이 연주를 시작하였다. 68년 오츠가 학교를 옮기는 바람에 잠시 헤어졌던 이들은 이듬해인 69년 오츠가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오면서 재결합했고 홀이 작곡한 포크에 바탕을 둔 음악을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Whole Oates](72), [Abandoned Luncheonette](73), [War Babies](74) 앨범을 통해 자신들만의 음악을 정립해 나가기 시작한 이들은 아리프 마딘(Arif Mardin), 토드 룬드그렌(Todd Rundgren) 등의 프로듀서와 함께 일하면서 바탕이 되었던 포크적인 색채를 배제하였다.74년 봄 ‘She’s Gone’이 차트 60위에 올랐다. RCA로 옮긴 75년 이후 이들은 소울과 팝, 록을 혼합한 스타일의 곡 ‘Sara Smile’을 10위 권에 올려놓았다. 이 곡의 성공과 함께 ‘She’s Gone’이 재발매되어 역시 10위 권에 진입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76년 발매된 [Bigger Than The Both of Us](76)에서는 ‘Rich Girl’이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80년까지 4년간 이들은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좀더 도전적으로 록의 요소를 음악에 도입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거두어 [Voices](80) 앨범은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이들 최고의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라이쳐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커버곡 ‘You’ve Lost That Lovin’ Feeling’이 차트 12위에 올랐고 후속곡 ‘Kiss on My List’는 두 번째로 정상을 차지한 곡이 되었다.재빨리 발표한 [Private Eyes](81)에는 차트 정상을 차지한 두 곡인 ‘Private Eyes’와 ‘I Can’t Go for That (No Can Do)’가 수록되어 있다.

다음해에 발매된 [H2O](82)는 이들의 최대 히트곡인 ‘Maneater’를 배출하며 전작들을 능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2년만에 발표한 [Big Bam Boom](84)에서는 ‘Out of Touch’가 이들의 1위 행진을 이어갔다. 라이브 앨범을 발매한 후 휴식기에 들어간 이들은 88년 다시 모여 [Ooh Yeah!](88)을 발표했으며 ‘Everything Your Heart Desires’가 차트 3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Change of Season](90)은 이제 이들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앨범이었고 이들은 또다시 휴식기에 들어갔다.7년만에 발매한 [Marigold Sky](97)는 어정쩡한 소울 음악 혼합물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을 받았을 뿐이었다. 백인이 구사하는 소울 음악으로 정평이 나있던 이들은 소울적인 감성을 잘 살려내었던 많지 않은 백인 뮤지션들로 인정받고 있다.

changgo.com

디스코그래피
1972 Whole Oates
1973 Abandoned Luncheonette
1974 War Babies
1976 Daryl Hall & John Oates
1977 Bigger than the Both of Us
1977 No Goodbyes
1977 Beauty on a Back Street
1977 Past Time Behind
1978 Livetime
1978 Along the Red Ledge
1979 X-Static
1980 Voices
1981 Private Eyes review
1982 H2O
1984 Big Bam Boom
1985 Live at the Apollo
1988 Ooh Yeah!
1990 Change of Season
1997 Marigold Sky

링크
Official Site

Chicago

Chicagothebandmillbrook lar.jpg
Chicagothebandmillbrook lar” by TristanbOwn work
“I botched up a bit when I removed the crowd. I didn’t ruin anything that wasn’t already block by people’s heads, so anyone else is welcome to try touching it up. The filename was cropped by photoshop. It was *_large.jpg.”.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Chicago는 Beach Boys 다음으로는 유일하게 두번째로 가장 성공한 미국 락 밴드이다. Chicago는 공식적으로 67년 2월 15일에 그 이름을 따온 도시에서 조직되었다. 밴드의 멤버들은 이 당시로는 새로운 아이디어였던 완전한 호른 섹션(금관악기편성)을 가진 락 그룹을 출범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원래의 라인업은 색소폰과 우드윈드를 맡은 Walter Parazaider 트럼펫을 맡은 Lee Loughnane, 기타와 보컬을 맡은 Terry Kath, 드럼을 맡은 Danny Seraphine, 트럼본을 맡은 James Pankow, 오르간과 보컬을 맡은 Robert Lamm 으로 구성된 6인조였다.

초기에는 그 그룹은 베이스 연주자 없이 활동하려 하였다. 하지만 67년 12월에 베이시스트이자 보컬인 Peter Cetera가 라이벌이었던 the Exceptions로부터 옮겨오게 되었다. 그들에게 Chicago Transit Authority라는 이름(진짜 C.T.A-시카고 통행국-이 반대를 하여 나중에는 Chicago로 바뀌었다.)을 붙여 준,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였던 James William Guercio의 지도하에 LA로 옮겨서 Columbia 레코드와 계약하고 67년 1월에 데뷔 앨범 Chicago Transit Authority을 레코딩했다. 그 앨범은 2백만장 넘게 팔렸고 60년대 말까지 계속되는 거대한 히트들의 연속을 시작하는 4개의 차트 싱글을 낳았으며 각 앨범들은 Chicago 로고와 연속적인 로마숫자를 다양하게 변화시켜갔다.(Chicago II, Chicago III, …)

이 숫자는 나중에 일상적인 숫자로 바뀌게 되었다. Chicago의 음악은 하드락에서 가벼운 팝까지의 스타일의 혼합이었고 재즈와 클래식의 요소들을 종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Cetera의 If You Leave Me Now가 76년의 gold-selling 넘버1 히트가 되자 로맨틱 발라드로 특징지워지게 되었다.

시카고는 77년에 Guercio와의 결별, 78년의 Kath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에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82년에 Hard To Say I’m Sorry 로 다시 일어섰으며 Chicago 16앨범은 밀리언셀러가 되었으며 85년 Cetera의 솔로로의 출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워진 인기를 지탱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년간의 히트 이후에 올디스쪽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Chicago의 인기는 90년 대초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게 되었다.

디스코그래피
1969 Chicago Transit Authority Chicago
1970 Chicago II Chicago
1971 Chicago III Chicago
1971 At Carnegie Hall, Vols. 1-4 (Chicago IV) [live] Chicago
1972 Chicago V Chicago
1972 Live in Japan 1972 Chicago
1973 Chicago VI Chicago
1974 Chicago VII Chicago
1975 Chicago VIII Chicago
1976 Chicago X Chicago
1977 Chicago XI Chicago
1978 Hot Streets Chicago
1978 Chicago Transit Authority: Live in Concert… Magnum
1979 Chicago 13 Chicago
1980 Chicago XIV Chicago
1982 Chicago 16 Full
1984 Chicago 17 Full
1984 Toronto Rock ‘n’ Roll Revival 69 [live] Design
1986 Chicago 18 Full
1986 Live Chicago Castle
1988 Chicago 19 Full
1989 Beginnings Live Peter Pan
1991 Twenty 1 Full
1993 In Concert [live] Pilz
1994 Live in Concert Happy Bird
1995 Night and Day: Big-Band Giant
1995 Chicago Live Intercontinent
1996 Live [Richmond] Richmond
1996 Live in Toronto Magnum
1997 Great Chicago in Concert [live] Goldies
1998 Chicago’s First Christmas Chicago
1998 Chicago Transit Authority: Live in Concert… Ornyx
1998 Chicago 25: The Christmas Album Chicago
1999 I’m a Man [live] Hallmark
1999 Beat the Bootleggers: Live 1967 Griffin Music
1999 Chicago XXVI – The Live Album Chicago
1999 Live! [Columbia River] Columbia River
1999 Rock In Toronto [live] Cleopatra
2000 Live ’69 Prism

Charlene

Soul의 전당인 Motown에서는 매우 드문 백인 여성 싱어였던 Charlene(본명 : Charlene Marilynn D’Angelo) 은 곱상한 미모와 달리 꽤 어려운 삶을 살았던 아티스트였다. 할리우드에서 태어난 그는 16세에 학교를 중퇴 후, 17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마약에 중독 되어 수감되는 등 거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괴로운 시기를 보내던 중 그는 어릴 적 꿈이었던 가수가 되어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73년에 Motown에서 그의 데모 테이프를 인정하여 계약을 체결했고, 1976년에 데뷔앨범을 내놓았다. 싱글이 Hot100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고 가수의 꿈도 그렇게 사그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1982년 플로리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임신중절을 소재로 다룬 그의 곡 I’ve Never Been To Me를 틀어댔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Top3에 진입하는 대히트를 기록하여 Charlene 은 다시 음악계에 부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행운도 잠시여서 이 히트의 직후 AOR 앨범 Used To Be, 84년에도 Hit & Run Lover를 내놓았지만 흥행에 실패하여 결국 1985년 Motown을 떠나고 만다. 한편 I’ve Never Been To Me는 동성애를 다룬 영화 프리쉴라의 사운드트랙에 쓰이면서 또 한번 주목을 받기도 했다.

디스코그래피
1982 I’ve Never Been to Me Motown
1982 Sky Is the Limit Chapel Lane
1982 Used to Be Motown
1984 Hit & Run Lover

링크
eririn80
아티스트 정보
I’ve Never Been To Me 감상&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