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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Lies Love

오랜 기간의 준비 끝에 David Byrne과 Fatboy Slim의 공동 프로젝트 “Here Lies Love”가 내년 2월 23일 발매될 예정이다. 2개의 CD(각각 다른 싱어가 노래하는 22곡 수록), 이들 곡중 여섯 곡의 비디오가 담긴 DVD,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100페이지의 책이 패키지로 선보일 예정이다. 싱어는 Florence Welch, Santigold, Sharon Jones, Roisin Murphy 등이 참여했다.

09.29.09: Seattle — 성난 이의 아침식사

여기 시애틀에서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내게는 선전선동으로 보이는 듯한 기운을 느꼈다. 입에 거품을 물거나 내 요거트를 호텔 다이닝룸에 뿌리는 등 격노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 다시

오늘자 뉴욕타임스 1면의 사진을 보면 이란의 핵시설이라고 소문이 난 어떤 종류의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단지 그러한 것들의 그래픽 스타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이라크 침공 전에 범람했던 다양한 종류의 사진들을 닮았다. 대량살상무기들이 저장되고, 감춰져 있고, 또는 제조되고 있는 건물들의 사진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우리를 우리가 현재 놓여져 있는 곤경으로 현혹시켜 이끌었던 소문들이었을 뿐임이 증명되었다. 사람들은 당시 그것에 몰두해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의 단편적인 기억력을 감안할 때에 그들은 두 번째 그것에 몰두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난 이것이 절대 핵시설이 아니라고 말하진 않겠다. — 다만 추측성 사실관계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의 방식이 똑같다는 점은 지적한다.

전망

같은 면에서는 유럽에서 많은 나라들이 중도우익 정치가를 선출하면서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의견을 달리 해줄 것을 간청한다. 기사가 말하는 바, 중도우익은 기존의 “일반적인 복지 혜택, 국유화된 헬스케어, [그리고] 탄소배출에 관한 엄격한 제한”을 수용하였다. 이 세 가지 아이디어라면 미국에서 그들은 좌익으로 분류될 것이다. 비록 작가가 말하길 – 아마도 맞겠지만 – 유럽에서의 좌익은 전통적으로 이보다 더 나아가지만 말이다. 그러한 것들이 아직도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 그리고 현재 정치인들이 “사회주의자”이라는 (그리고 그래서 미국인이 아니라는) 고함치며 소란을 떠는 지적들은 전망의 예정된 “붕괴”에 이르게 하고 있다.

부활

다른 면의 기사에서는 경제가 바닥을 치고 다시 호조를 띄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놀랍지 않은 한편 (경제 붕괴의 재발을 막기 위한, 또는 은행가들의 오만과 탐욕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심각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이는 일종의 좋은 소식을 위한 좋은 소식일 뿐인 것 같다. — 일종의 기분 좋은(feel-good) 것. 경제는 하도 오랫동안 상태가 안 좋아서 필연적으로 잘못 인도하는 고장 난 시스템의 그 어떤 것의 “재림”이나 회귀를 도모하는 것은 아마도 현재로서는 최선의 아이디어가 아닐 것이다. 이 나라의 많은 것들이 지속 불가능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골드만삭스와 다른 이들이 경기침체로부터 수익을 얻는 등 갈퀴로 부를 그러모으는 동안, 다른 이들은 불평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 that isn’t the real world.

 

이글을 쓴 David Byrne은 전설적인 펑크/뉴웨이브 밴드 Talking Heads의 리더였으며 현재 솔로로 독립하여 음악가, 프로듀서, 화가, 설치 아티스트, 자전거 애호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블로그에 올린 원문 보기 / Talking Heads 팬사이트 / 한국어 팬사이트

데이빗 번이 유투의 이번 투어에 대해 말하길

아래 기사의 발단이 된 데이빗 번의 블로그 포스트이다.

출처는 http://journal.davidbyrne.com/2009/07/071409-budapest.html

유투에게 감사를!

우리가 바르샤바의 나이트 클럽 (Stodola라는 그리 크지 않은 공연장입니다)에서 있을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마크 E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이렇게 비교적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은 유투의 월드 투어 덕분이라구요. 이 공연의 프로모터는, 유투 공연의 상당 수의 프로모터를 맡기도 한 국제적 기업, 라이브 네이션입니다. Stoloda 같은 공연장은 사실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게다가 티켓 매수도 보통 때보다 적게 잡혔는데, 덕분에 거기서 일하는 스텝들에게 제대로 임금을 지불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여기가 무슨 VIP를 위한 클럽인 것도 아니죠. 손실 메꾸기 위해 티켓 한 장에 200불 씩이나 받고 파는 그런 곳이 아니란 겁니다 – 그냥 베니어판으로 만든 스탠딩 공연장일 뿐이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공연을 떠맡은 덕분에,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손해를 보고 있을 거예요. 앞으로 있을 유투의 스타디움 공연으로 그 적자를 메꿀 수 있길 기대하면서요.

그들의 공연은 공연 역사상 가장 비싼 공연일 것입니다. (제작비 측면에 있어서 말입니다): 스테이지를 짓는데 4천만불을 들였어요. 계산을 해보니, 200대의 트럭이 그들의 투어를 따라다닐 것으로 예상됩니다. 같은 직업군으로서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이건, 과잉이라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을 생각한다면 꽤나 형평에 어긋나는 일이도 하지요. 아니면 유투의 일주일짜리 특집방송 덕분에 우리가 레터맨에서 내쳐진 것이 날 수치스럽게 만든 것일까요? 뭐 여러분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 하지만 어쨌든 고마워요, 친구들!

유투의 최대 팬 포럼인 인터피어런스닷컴을 통해 이 포스트를 보았다. 데이빗 번이 대차게 까이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유투 팬덤과 데이빗 번 팬덤이 서로 배제성을 띤다고 볼 수는 없다. 데이빗 번 팬 중에 유투 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대의 경우는 존재한다. 그래서 데이빗의 이 포스팅에 대해서도 유투 팬들의 반응은 갈리고 있다. 신경 끄고 니 일이나 잘 하라는 사람도 있고, 더 심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데이빗의 뜻은 이해하겠는데 내 생각은 이러저러하다고 점잖게 코멘트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코멘트는 이런 것이다. 4천만불짜리 공연과 아프리카의 기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보노가 사회운동을 한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본업’인 음악적 활동에 돈을 바를 권리가 소멸되는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데이빗 번의 입장과 유투 팬들의 입장 모두 이해를 한다. 데이빗 번의 발언은 나의 오래된 고민과 일치한다. 사회운동을 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밴드라는 이질적인 요소의 조합, 그게 유투의 정체이다. 그들이 과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양자택일을 해야만하는 것일까? 펑크 아나키스트와 팝 캐피탈리스트의 경계에 선 펑크 캐피탈리스트,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데이빗 번 interviewed 닐 핀

데이빗이 진행하던 PBS의 프로그램 Sessions At West 54th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이다. Sessions..시리즈는 DVD로 출시되었지만 인터뷰는 DVD에 수록되지 않았다.

Interviewee: Neil Finn

Interviewer: David Byrne

Date: Dec 5th 1998

출처는 SomethingSoFinn.com이다

데이빗 번: 당신이 스플릿 엔즈를 시작할 무렵의 뉴질랜드 음악 씬은 어땠습니까? 나는 당신들 공연을 본 적 있거든요, 이곳 뉴욕의 보텀 라인에서 말입니다.

닐 핀: 그건 내가 밴드에 들어가기 전의 일입니다. 나는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었죠.

데이빗 번: 맙소사 – 그 공연을 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닐 핀: 그래요. 뉴질랜드에서건, 세계 어디서건 우린 이상한 존재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때는 나팔 바지 차림의 밴드가 커버 곡을 연주하며 현상유지를 하는 게 전부였던 시기입니다. 스플릿 엔즈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길을 갔던 거죠. 우리의 의상을 만들어 준 노엘 크롬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는 망토를 두른 채 손에는 번개 조각을 들고, 진한 화장을 하고, 펄럭대는 줄무늬 바지를 입고서 오클랜드의 중심부인 퀸 스트릿을 어슬렁거리곤 했어요. 그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스플릿 엔즈의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그를 뮤지션이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어느 날이었던가 공연 중에 숟가락으로 연주를 하더라구요. 그건 썩 괜찮은 연주이긴 했어요. 당시로선 그만한 실력이면 밴드에도 들어올 만 했죠. 결국 그는 자신의 밴드의상도 준비해왔어요.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밴드가 둘 있습니다. 하이 로빙 텅즈라는 밴드였는데, 꽤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인비트윈즈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우리가 좋아하던 밴드는 그 둘 이었습니다.

데이빗:여기서 멀리 떨어진,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점이, — 그리고 나 또한 뉴욕이 아니라 상당히 작은 마을에서 성장했다는 말을 해야겠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미국 출신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 유리한 조건이란 생각이 들었는데요

:, 그렇죠.

데이빗:중심부가 아닌 곳에 있는 것 말입니다. 덕분에 뭔가를 계획하고 그것에 대해 심사 숙고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나요? 그러다 보면 실수도 좀 할 순 있지만

:그렇습니다. 또한 그런 변방에서는 세상이 퍽 낭만적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문화는 한정되어 있었고 그건 정제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우린 모타운과 R&B, 팝의 차이를 알지 못했어요. 실제로, 우리에겐 단 한 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우린 다른 세계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덕분에 커다란 꿈을 가질 수 있었죠, 그건, 어쩔 수 없이 다소 왜곡된 꿈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웃음]

데이빗:새 앨범에 “Sinner”를 비롯해 죄를 다룬 곡이 몇 있습니다.

:.

데이빗:내가 읽은 인터뷰 중에, 당신이 가톨릭 환경에서 성장한 것에 대해 얘기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아이리시 가톨릭인가요?

:그렇습니다.

데이빗:뉴질랜드엔 많은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이민자가 있지요.

:맞아요. 아일랜드인은 전 세계에 펴져 있습니다. 난 어머니가 아이리시 가톨릭이었고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어요. 우리 가족은 며칠에 한번씩 가톨릭 사제들과 술을 마시거나 다과회를 갖곤 했습니다. 많은 경우 술을 마셨죠. 굉장히 기억에 남는 파티가 있었는데요,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며 끝난 파티였습니다. 그날 밤엔 신부님들과 우리 이모들이 노닥거리기까지 했죠. 실은, “Sinner”의 가사에 내가 가장 만족하는 건 모든 장벽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나는 그 구절을, 엄격한 가톨릭 신자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흥겨운 파티를 벌이는 와중에, 돌연 모든 방해물이 사라져 아이들이 멋대로 날뛰고, 밤을 새우고, 술을 훔쳐내고, 그런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과 결부시키려고 했습니다.

데이빗:그들이 그렇게 파티를 자주하면 안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난 그런 류의 교리를 깨뜨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일랜드인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삶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데 능해요. 개중에는 끝이 안 좋았던 사람도 있긴 하지만요 아일랜드 출신 중에는 정말 엉망진창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었죠. [웃음]

데이빗:하지만,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최소한 가톨릭에서는, 속죄할 수 있다, 용서받을 것이다, 하는 의식 말입니다.

:, 그렇죠.

데이빗:  끔찍한 짓을 하고 괴로워하다가도, 이것만은 언제나 인지하고 있잖습니까 , 용서해주시겠지.”

:그래요. 그런 점에선 굉장히 위안이 되는 종교이기도 하죠. 언제 한번 고해성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데이빗:신부님을 모셔다 드릴 수도 있습니다.

:진짜요? (목을 가리키며) 거기에 뭐 하나 갖다 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 당신이 직접 해줄 수도 있을 거예요, 데이브. [웃음] 확실히, 고해성사는 굉장한 일입니다. 무슨 일을 저지르더라도 성모송주기도문을 세 번씩만 기도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니요. 게다가 그건 여전히 가사를 쓰는데 귀중한 자양분이 됩니다. 가끔 그것에 너무 많이 기대는 것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와 관련된 생각을 계속 떠올리곤 합니다.

 

David Byrne: When you started off with Split Enz, what was the music scene like in New Zealand at that time? Because I saw the group when you first played the Bottom Line here in New York…

Neil Finn: That was before I was even in the band, actually. I was in school.

David Byrne: Gosh — I saw this and I thought, “What is going on down there?”

Neil Finn: Yeah. Well, it was strange in New Zealand, and strange everywhere. But at the time it was all bands playing covers, with bellbottoms, a status quo kind of time. And Split Enz was an oddity right from the very beginning. There was a guy called Noel Cromby who used to design the costumes, and he would wander down Queen Street, which is the main street of Auckland, in a cape with a piece of a lightning bolt in his hand, full makeup, and big flared gingham pants. He was one of those kind of characters. He started making costumes for Split Enz, he wasn’t a musician at all, but ended up playing spoons one night at one of the shows and that was good enough to get into the band, in those days. And he just brought his costumes with him.

But, there were two bands that I remember. High Roving Tongues, which I always thought was a really good name, and the In-Betweens — those were the two bands we used to like.

David Byrne: Did you feel that coming from New Zealand, which for us is pretty far away — and I might preface that by saying that I didn’t grow up in New York, I grew up in a slightly smaller town. Still in the United States. But I felt in some ways it was an advantage…

Neil Finn: Oh, yeah.

David Byrne: …not to be quite in the center of things. It gave you time to develop and think about things, and you could make mistakes…

Neil Finn: Yeah. Also the world had a slightly romantic tinge to it from afar as well. We had a certain amount of culture coming to us in a very random way. We didn’t know the difference between Motown and R&B and pop. And, in fact, we only had one radio station and they played everything. So it was a romantic sort of impression we had of the rest of the world, and it enabled you to grow up with big dreams, which, inevitably got slightly soiled. [LAUGHS]

David Byrne: There’s songs on the new record, “Sinner” and some other ones, that refer to sin.

Neil Finn: Yeah.

David Byrne: You’ve mentioned in some of the interviews that I’ve read, about having a Catholic background. Is that Catholic as in Irish Catholic?

Neil Finn: Yeah.

David Byrne: There were a lot of immigrants that went to New Zealand from Ireland and Scotland.

Neil Finn: Yeah. The Irish have had an impact on the world everywhere. But my mother was an Irish Catholic and we grew up around it. We had priests over every few days for drinks and cups of tea. In fact, it was usually drinks. And very memorable parties where everybody would end up singing, and by the end of the night the priests would be flirting with our aunties. In fact, in the song “Sinner,” there’s a line about, “the closest I get to contentment is when all the barriers come down.” I relate that to the feeling that happens when reasonably strict Catholics get together and have a bit of a shindig, a party, and suddenly all the barriers are dropped and the kids are able to get away with anything, stay up all night, and steal drinks and…

David Byrne: Do you think they have to have those parties to let go every once in a while?

Neil Finn: Well, I think it’s necessary to shed those kind of doctrines and dogmas. And the Irish are the best in the world at playing off both sides of life against each other. Sometimes with bad consequences — there’s some pretty screwed up people coming out of that country. [CHUCKLES]

David Byrne: But there’s a sense — there’s always the sense, at least in Catholicism, that you can be redeemed, or you can be forgiven.

Neil Finn: Oh, yeah.

David Byrne: You can feel horrible that you’ve done something terrible, but you kind of always know that, “Well, I can be forgiven this.”

Neil Finn: Yeah. I know, it’s a very comforting religion in that respect. I probably should still be going to confession now, but, umm…

David Byrne: We can arrange to have a priest come in.

Neil Finn: Can you? You just need to have a little thing there (points to neck,) and you could just about do the job yourself, Dave. [CHUCKLES] But, yeah, confession was a very amazing thing. The idea that you could do anything and go and see the priest and say three “Hail Marys” and three “Our Fathers” and all would be well. And still, it’s a rich and fertile breeding ground for lyrics for me. I sometimes get a bit self-conscious about drawing on it too much, but nevertheless it keeps popping up.

데이빗 린치VS 데이빗 번

 

Q .이름이 데이빗?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Q.예술학교 다녔다던데?

데이빗 린치-난 펜실베니아 미술학교 2년 중퇴

데이빗 번- 나도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2년 중퇴

Q.처음에 머리(HEAD) 때문에 유명해젔조?

데이빗 린치-난 70년대 말 실험 영화 eraserhead

데이빗 번-나도 70년대말 실험적인 밴드 talking heads

Q그 담엔 사람(man)덕에 그유명세 이어갔조?

데이빗 린치-난 80년대 elephantman

데이빗 번-나도 80년대 television man

Q.지리멸렬한 중산층 생활과 사이이코 킬러에 관심이 맞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Q.본격적인 메인스트림에서의 성공은?

데이빗 린치-난 캐나다 국경과 접한 워싱턴의 한 작은 마을의
기괴함을 다룬 첫번째 TV시리즈 ‘트윈픽스’감독

데이빗 번-나도 멕시코 국경과 근접한 텍사스의 한 작은 마을의
기괴함을 다룬 첫번째 영화 ‘트루 스토리스’감독

Q.본업외에 다른 분야에 참여한적은?

데이빗 린치-줄리 크루스 음반에 가사참여

데이빗 번-TWYLA THARP의 발레 CATHERINE’S WHEEL 작곡 참여

Q 당신들 성(姓) 모두 잔인한 살인과 관련이 있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lynch …(~을 린치[사형(私刑)]를 가하여 죽이다[교수형으로 하다])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BURN과 발음 비슷-_-? <美俗> 전기 의자에서 사형에 처해지다.)

Q 기괴한 이름가진 파트너가 있조?

데이빗 린치-안젤로 바달로멘티(ANGELO BADALOMENTI)

데이빗 번-브라이언 이노(BRIAN ENO)

Q.당신 작품이 브룩클린 음악 학교에서 공연된적이 있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Q타임지 표지에 실린적 있조?

데이빗 린치-그렇소

데이빗 번-나도 그렇소…

BYRNE RULES OUT TALKING HEADS REUNION

싱어 데이빗 번이 돈이 더는 필요없다면서 Talking Heads의 재결성 가능성을 배제시켰다. 이 그룹은 1991년 해체될 당시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는데 몇 차례의 공연을 위해 다시 팀을 구성한다면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론트맨인 번은 밴드를 재결성하라는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확고하다. 그는 “난 예민하지 않고 그런한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돈이 거의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Talking Heads는 200년 록앤롤 명예의 전당으로의 자신들이 추대되었던 기념식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었다. [원문보기]

David Byrne 공연에 관한 소식들


“Byrne was greeted with a returning heroes welcome. I’ve never heard an ovation as deep and long as that following “Houses In Motion” – it seemed to begin in the back of the large hall and move forward till the room was one extended, hearty bravo that resonated for minutes, stunning even Mr. Byrne.”


Brooklyn Vegan

“The spectacle that went with the music in the 1980s was whimsical and enigmatic, hinting at ritual as well as comedy. Mr. Byrne’s new troupe was closer to Broadway, with smiley, loose-limbed dancers skipping in and out of the band, often sharing moves with the musicians.”

New York Times


Check out the set list below:


“Strange Overtones”
“I Zimbra”
“One Fine Day”
“Help Me Somebody”
“Houses In Motion”
“My Big Nurse”
“My Big Hands (Fall Through The Cracks)”
“Heaven”
“Poor Boy”
“Life Is Long”
“The River”
“Crosseyed and Painless”
“Born Under Punches”
“Once In A Lifetime”
“Life During Wartime”
“I Feel My Stuff”


Encore 1
“Take Me To The River”
“The Great Curve”


Encore 2
“Air”
“Burning Down The House”


Encore 3
“Everything That Happens”

Rolling St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