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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s,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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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thsPromoPhoto TQID 1985” by Scanned promotional photograph.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스미쓰는 82년 봄 맨체스터 출신의 두 남자, 모리세이(본명 Steven Patrick Morrissey)와 자니 마(본명 John Maher)에 의해 결성되었다. 그해 여름 데모 작업을 위해 드러머인 사이먼 볼스탠크로프트(Simon Wolstencroft)와 녹음을 했지만 그는 스미쓰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다. 후에 사이먼은 폴(The Fall)에 들어갔고, 결국 스미쓰에 합류한 마이크 조이스(Mlke Joyce)와 함께 맨체스터 리츠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베이스가 없던 스미쓰는 82년 말 스미쓰의 평생 동반자인 앤디 러크(Andy Rourke)를 만났는데 그는 자니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스미쓰의 첫 싱글 ‘Hand In Glove’는 차트에 오르지 못했지만 83년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차트 30위에 오르는 실력을 과시했다. 곧장 미국 투어에 오른 네 명은 새로운 싱글 ‘What Difference Does It Make?’를 발표하고 12위에까지 올랐다. 모리세이는 자주 성(性)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가사를 썼는데, 그의 동료 자니의 기타 사운드는 이런 모리세이의 든든한 지지자 역할을 하였다. 한편 1집의 엔딩곡인 ‘Little Children’은 60년대에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어린 아이들에게 바치는 레퀴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비난했고 스미쓰는 언론의 표적이 되어 곤혹을 치뤄야만 했다. 다행히 피해자 측의 모리세이에 대한 변론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스미쓰와 모리세이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에피소드로 남았다.

스미쓰는 미국의 R.E.M이나 벡(Beck)처럼 대학가의 유명한 컬트 밴드가 되어가고 있었다. 86년 메이저 레이블인 EMI로 이적한 후 영국 투어를 하던 중, 자니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의 공백을 크래이그 개넌(Craig Gannon)이 대신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법적인 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되었다. 브릭스톤 아카데미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스미쓰의 영국 공연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았다. 자니는 더 이상 스미쓰에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음악적인 방향이 달랐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에게는 휴식기간이 필요했다. 이들의 미래는 너무나 불투명했으며, 결국엔 87년 8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이전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앨범은 [Strangeways, Here We Come]으로 같은 해 나왔고, 이듬해 [Rank]가 발표되면서 스미쓰의 잔존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멤버들은 각자 세션맨으로서 분주하게 활동했고, 모리세이 또한 화려한 싱글 데뷔를 하였다.

자니는 프리텐더스(Pretenders)와 더더(The The)에서 기타맨으로 활약하다가 버나드와 함께 시작한 일렉트로닉에서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꾸었다. 그는 과외활동으로 브라이언 페리, 토킹 헤즈, 빌리 브래이그, 커스티 맥콜, 팻샵 보이즈, 스텍스, 그리고 반데라스에 이르는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에필로그

필자가 스미쓰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 Pretty in Pink의 싸운드트랙에서였다. 이 OST에 삽입된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라는 긴 이름의 이 노래는 그들의 서정적인 음악적 감성을 잘 표현해주는 곡으로 눈밭에서 반코트를 입은채 서있는 그들의 흑백사진과 오버랩되면서 오랫동안 여운을 남겨주는 곡이었다. 모리쎄이의 시적인 가사와 자니마의 발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절한 키타 사운드는 이들 음악의 핵심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고딕락의 우울한 자화상과 이언커티스(Joy Division)의 표정이 묻어나는 듯한 그들의 음악적 천재성으로 인해 한동안 영국 음악계에 등장하는 신진밴드들은 이들과 비교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이제 모리쎄이는 예전의 샤프한 모습에서 적당히 살집이 잡힌 늙수구레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변한채 미국에서 하드코어 밴드를 이끌고 있고 자니마는 뉴오더의 버나드섬너와 함께 일렉트로닉으로 활동하여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있다 한다.

다른글(출처 : http://www.intermuz.com/theRocker/noiz_box/NOISE5.asp)

70년대 말 펑크의 소진과 함께 뉴 웨이브 팝이 영국 대중음악계를 휩쓸 무렵, 주류 팝 시장은 신시사이저가 주도하는 전자 음악의 홍수로 80년대 팝 음악시장의 모습을 갖춰나간다.울트라복스, 휴먼 리그같은 밴드들이 표방한 신스 팝은 이윽고 듀란 듀란, 컬처 클럽, 왬 등의 아이돌 스타들에 의한 세련된 포장으로 변신한다. MTV의 등장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가져왔고, 주류 팝 시장에선 음악성보다는 외모와 무대 매너로만 음악인의 자질을 판가름하는 경향이 점차 농후해 졌다.

여기서 소개할 80년대 맨체스터 사운드는 바로 이런 당시 영국 주류 팝 시장의 소모적이고도 치열한 ‘음악 팔리기’에 대해 저항하며 맨체스터라는 영국 북부의 공업 소도시를 거점으로 활동한 인디 밴드들의 음악 스타일을 통칭해서 말한다. 영국 내에서 보면 한갓 지방도시에 불과한 이 지역을 거점으로 바로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록 씬의 맹아가 형성되었다.

맨체스터 내의 밴드들은 그들만의 ‘지역성’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음악 색깔을 지니려고 했고 80년대 영국 얼터너티브의 발화점으로서 바로 이 맨체스터를 꼽는데는 별 이견이 없을 듯 하다. 80년대 당시 활동하던 맨체스터 출신 밴드들 중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던 밴드들론 스미스, 뉴 오더, 제임스 등이 있었고, 이들의 직계 영향 하에 등장한 ‘매드 체스터(일명 미친 맨체스터들)군단-스톤 로지스.해피 먼데이스, 인스파이럴 카펫, 살란탄 UK-들은 바로 위에 언급한 세 밴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90년대 등장한 오아시스, 블러, 스웨이드, 펄프와 같은 쟁쟁한 브릿팝 그룹들 역시 바로 이 맨체스터 사운드에서 직,간접으로 그 음악적 영향을 흡수했다 볼 수 있다.

이 글에선 맨체스터 사운드를 대표하는 중요한 두 거목 스미스와 뉴 오더를 소개한다. 이들 그룹은 각각 ‘기타-팝’과 ‘신스 팝’이라는 음악 스타일을 통해 영국 내의 ‘인디 팝’ 운동의 선두를 담당한 밴드들이다. 이 두 밴드는 펑크와 90년대 브릿 팝을 연결 시키는 중요한 가교로서 거론되곤 한다. 앞으로 두 편으로 나눠서 진행 될 본 내용에서 먼저 ‘스미스’에 대해 알아본다.

The Smiths –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스미스의 음악을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이는 당시 영국 내 대중 음악 상황과 연관되어서 붙어진 명칭인데, 당시 영국 팝 음악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스타일은 신시사이저와 시퀸서가 만들어 내는 전자음 위주의 음악이었다. 스미스의 음악은 당시 이런 주류 음악 산업의 배경 대한 신선한 대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팀의 핵인 보컬 모리시와 기타리스트 자니 마는 밴드의 지향점을 규정한다.

팀에서 작사와 보컬을 맡고 있는 모리시[본명 스티븐 패트릭 모리시(Morrissey);1959-]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소유한 음악인 이전의 문학도이다. 그의 정신적인 우상이기도 한 제임스 딘을 닮은 창백한 이미지는 입 안에서 구르는 듯한 맬랑꼴리한 느낌의 보컬과 결합하여 기존 록 음악의 ‘샤우트’한 거친 록 음악 특유의 마초쉽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리시의 공연을 보면서 ‘록 스타’라는 이미지는 오간데 없고 ‘동네 이웃의 친한 오빠’라는 친근한 이미지로서 다가온다. 그저 길을 지나치다가 쉽게 마주치는 그런 수줍은 청년 말이다.

그의 노래는 멜로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리시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모리시의 보컬은 결코 넘치거나 나서지 않는다. 답답할 정도로 제한된 음정 폭(3도에서 길어야 5도)에서 보컬을 구사한다.

그의 보컬은 스미스의 음악 전체에서도 일관된 성격을 유지한다. 그는 명백한 ‘팝’주의자이다. 그의 음악적 자양분은 멀리는 50년대 버디 할리가 보여준 록커빌리의 이미지에서 60년대 크루닝 창법을 통한 스탠더드 팝, 걸 그룹, 그리고 70년대 쇼킹한 스테이지 매너를 과시한 뉴욕 돌스와 데이빗 보위의 글램, 그리고 섹스 피스톨스의 폭력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모리시의 가사 속엔 사춘기 소년의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는’듯한 수줍음(추억의 책갈피 마냥)과,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 마냥 독설 어린 객끼, 여기에 문학도다운 탁월한 언어 감각이 오밀조밀하게 거미줄처럼 짜여 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팝 음악의 ‘남녀 상열지사’류의 가사도 모리시에겐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처절할 정도로 비수를 품은 폭력성은 그의 또 다른 면모이다. 그는 한 때 펑크 매니아라고 자처할 정도로 어린 사춘기 시절 펑크 음악에 매료됐었다. 뉴욕 CBGB 출신 뉴욕 돌스의 팬 클럽 회장까지 역임한 그는 어느 누구보다 펑크의 출현을 반겼었다. 밴드 내에선 그렇게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노래를 부르던 그이지만 한편으론 ‘섹스 피스톨’이 보여준 ‘파괴의 본능’이 그의 가사 속에 녹아 있다.

기타와 작곡을 맡고있는 자니 마[본명: 조니 마어(Johnny Marr) ; 1963- ]는 밴드내의 음악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기타 소리는 록 음악 특유의 디스토션 사운드와는 거리가 먼 크린 톤의, 맑게 울리는 기타 소리이다. 손가락으로 기타 줄을 하나하나 튕겨가며내는 소리는 울리는 소리다. 그의 연주는 한음 한음이 또렷하다. 필요 없는 음의 낭비란 찾아 볼 수 없고 정갈하고 깔끔하다. 일렉기타 또는 어쿠스틱 기타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그의 기타소리를 두고 평론가들은 ‘쟁글쟁글(기타의 소리를 두고 표현하는 말)한 기타 소리가 나는 기타 팝’이라고들 한다.

자니 마의 기타는 지저분하고 거친 록의 본연의 느낌과 거리가 있다. 크린 톤의 기타 음은 기존 밴드 내에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쟁쟁한 기타리스트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단지 모리시의 보컬을 든든히 받쳐주는 반주자의 역할에 가깝다. 리듬 웍이 강조되는 그의 기타 연주는 롤링 스톤의 키스 리처드에 비견될 수 있다. 베이스 주자인 엔디 루어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의 연주 역시 파묻혀 버리지 않고 정확하고 또렷이 들린다. 과거 아트 록 그룹 록시 뮤직이나 재즈 록 밴드 스틸리 댄의 음악에서 느끼는 스튜디오 작업의 정확함과 치밀성이 스미스의 음악에도 살아있다. 각각의 소리가 조화롭게,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 무시됨 없이 명료하게 들려온다.

이런 자니 마가 제시한 스미스의 음악 방향은 모리시의 음악관과 판이하다. 자니 마의 연주에 밀도를 둔 치밀한 스튜디오 작업을 선호하는 반면 모리시는 ‘엘리트’ 적이며 권위적인 록의 기존 이미지’를 증오하는, ‘팝’ 순수주의자이다. 스미스만의 독특한 색깔이란 바로 이들 모리시와 자니 마가 보여준 ‘앤티 록’과 ‘앤티 팝’간의 묘한 긴장관계의 존재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밴드 내의 국면은 분명 본격적인 영국 얼터너티브 씬의 출발을 알리는 심상치 않은 징조였다.

The Smiths – Discography

그들의 활동은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만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자니 마와 모리시의 묘한 대립관계는 인디 음악계가 배출한 훌륭한 성과였을지 몰라도, 팀의 지속에는 확실히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들은 활동한 기간동안 4장의 정규 앨범과 3장의 베스트, 미발표 모음곡 집을 내놓는다. 그리고 몇몇의 앨범에 미수록된 싱글들을 활동 기간 내내 발표한다.

그들이 발표한 곡들은 영국 내에서 싱글 차트의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자국 내의 고정 팬을 확보할 정도의 반응을 보여줬던 스미스였지만 이들의 음악은 미국에서는 미미한 반응을 가져왔다. 아마도 그들의 음악에서 표방하는 “영국적인 상황”의 강조는 미국인들에겐 낮설고 어렵게 받아졌으리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그들이 표방한 ‘팝’이라는 음악 번지수는 미국 인디 씬이나 미국 내 인디 음악을 틀어주던 거개의 대학 교내 방송국에서 결코 반길만한 것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미국 문화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들어내는 모리시의 가사는 미국인들에게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The Smith – (1984)

메이저 급 음반사의 도움 없이 ‘러프 트레이드’ 라는 인디 레이블을 통해 나온 그들의 데뷔 음반은 브리티시 얼터너티브의 출현을 예고했다. 앨범이 나올 당시 영국 주류 음악 씬이 신시사이저로 치장된 기계 음이었던 반면에 이들의 음악은 지극히 소박하고 투명했다. 물론 스트링이나 피아노가 가세된 ‘틴 팬 앨리’ 류의 팝 음악이 아닌 과거 초기의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그랬듯이 ‘밴드 편성의 팝’이었다.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니 마는 ‘우리가 이런 음악을 시도하기 전에는 아무도 이런 식의 기타 반주에 멜랑꼴리한 팝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들은 없었다’고 얘기한다.

82년 클럽 라이브 무대를 통해 데뷔한 이들은 83년 러프 트레이드를 통해 첫 싱글 “Hand in Glove”를 내놓으면서 영국 음반 시장에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가사 내용 중 ‘호모 섹슈얼리티를 나타냈다는 점이 논란이 된 이 곡으로 바야흐로 언더그라운드 씬의 ‘스미스 열풍’을 예감케 한다. 소녀 취향의 팝 넘버인 그들의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은 영국 팝차트 25위까지 진출한다. 모리시의 창백하고 풋풋한 이미지는 소녀 팬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그러나 아동 학대 내용을 다룬 “Reel around fountain”과 무어인(북 아프리카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의 혼혈 인종)의 손에 살해 당한 아이를 보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Suffer little Children”에서 보듯 그들의 음악이 표현 대상은 핑크빛 사랑 타령을 넘어 추악하고 암울한 사회 현실마저 적나라하게 투영시킨다. 커다란 뿔태 안경을 끼고 보청기를 낀 채 수선화를 뒷 주머니에 꽂고(스미스 시절 모리시의 전형적인 무대 매너)무대에 등장하는 모리시가 우스꽝스럽지 몰라도 그의 가사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은 냉정하다.

Meat is murder – (1985)

모리시의 ‘채식주의’선언의 계기가 된 음반. 만인의 화제로 떠오른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은 전작 앨범의 노선을 그대로 유지한다. 성과면에선 전작에 비해선 다소 뒤떨어졌다. “That joke isn’t funny anymore”가 싱글 커트 됨.

The Queen is Dead – (1986)

그들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히는 수작. ‘여왕은 죽었다’라고 하는 앨범 타이틀에서 느끼듯이 전작들에 비해서 거칠게 몰아치는 첫 트랙부터 본 앨범의 진가를 기대하게끔 한다. 영국 왕실의 부패를 꼬집으며, 왕실의 실상을 모리시의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The queen is dead” 만큼 자니 마와 모리시의 특성의 뚜렷이 대비를 지닌 곡도 없을 것이다. 강한 백 비트에 실릴 우렁찬 기타 리프는 단순한 코드 진행과 반복되는 패턴으로 지속되지만 어느 스미스 싱글보다도 강렬하다. 단연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본 곡에서 가히 압권이다. 앨범 시작을 강한 파워로 몰아 부친 이 곡을 통해서 스미스의 음악적 뿌리가 펑크에 있음을 다시금 증명한다.

스미스의 특기인 전형적인 팝 역시 “I know it’s over”에서 들려주는 멜랑콜리한 보컬은 여전하다. 스트링 편곡이 선명한 본 앨범의 첫 싱글 커트 곡인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는 모리시가 표방하는 “영국의 특수성”으로 비쳐진다. 그는 그의 가사를 통해 영국의 인종문제, 계급, 사회 부조리를 그만의 위트와 수사법으로 표현하고 있다.”Queen”이라는 명사의 쓰임에서 보듯이 그의 노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영국 사회이다.

그의 가사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 이런 그의 글 쓰기에서 나타나는 상황적 고려의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이전보다도 훨씬 다채롭다.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기타를 번갈아 가며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돋보이는 “Bigmouth Strikes Again”를 비롯 50년대 록커빌리 사운드의 숨결이 느껴지는 “Vicar in a Tutu”에서도 자니 마의 기타 연주는 유난히 돋보인다. “There is a light never go out”와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에서 보여준 세련된 편곡 솜씨는 ‘스미스’의 음악이 ‘과연 기타 팝’임을 여실 없이 증명한다.

스미스의 모든 것을 유감없이 드러낸 본작은 그들의 1집,2집 앨범을 들은 스미스 팬이었다면 ‘정말로 이젠 모든 것을 거침없이 드러냈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확실한 그들의 음악 색깔을 규정한다.

“Strangeway-Here We come” – (1987)

본 앨범을 내기 바로 직전 스미스는 갑작스런 해산을 선언한다. 이미 전작 “The Queen is dead”를 제작할 당시부터 자니 마와 모리시와의 밴드 내 분열은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둘 간의 음악 성향 차이로 인해 팀 해산을 맞는다. 모리시는 자니 마의 외도( 그는 당시 록시 뮤직에 있던 브라이언 페리나 밀리 브래그와 음악적 교류를 나눴다)가 못 마땅했고, 자니 마 역시 모리시의 60년대 팝 음악에 심취한 태도가 못 마땅했었다. 둘 사이의 음악적 견해차는 결국 본 앨봄 발매를 몇 주 앞두고 자니 마의 밴드를 떠나겠다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모리시는 주저 없이 팀을 해산하고 솔로 활동에 나서게 된다. “I started Something I couldn’t finish”와 “Last night I dreamt that someday loved me”가 싱글로 커트 됨.

Single Collection

Hateful of hollow (Single B-side collection)
The world Won’t listen (single collection-UK version)
Louder than Bombs (single collection -US version)

이외에도 정규 앨범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싱글로 발표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Panic”은 미국 문화로 범벅된 영국의 상황을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갖고 만든 곡이다. “DJ를 교수형에”라는 독설 찬 그의 항변은 그가 미국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반감의 정도를 말해준다.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는 영국 내의 사회문제인 실업을 모리시의 위트 어린 가사로 표현해냈다.

-자스보이- ( jassboy@hanmail.net )

[지나가다] [불평]ah you jassboy -whatever you are- so much to answer for… This sounds half-baked, or half-hearted at its best! 그리고 정정: 무어인이 아니라 60년대 맨체스터에서 있었던 엽기 연쇄살인사건인 무어스 머더(Moors Murder)를 말하는 것. 무어(스)는 그 지방 외곽의 황량한 들판을 지칭. -11월10일-
[lupin] 예전 로저 샤툭이 샤드백작-후작인가? 가 무어스 살인사건과 테디번디 살인사건의 원인 제공자라 했는데 그무어스가 그 무어스군요.. -11월10일-
[lupin] 윗글 쓰신분 =자스보이님딴엔 정성껏 동아 대 백과사전 찿아가며 쓰신 무어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지나가다님의 글을 읽고 다시보니 참 쓸쓸 하네요.. -11월10일-
[lupin] 스미스의 패닉은 들을때마다 딴나라당 선거 유세에 쓰이면 딱이겠다는 생각이…hang the dj,hang the dj -11월10일-
[moz] Hang the blessed DJ~ 한때 제 시그내춰로 쓰기도 했던 문구였습니다. 아~ 토요일 날도 좋은데 저녁때 웬 생일파리에 딸려나가야 하는군요. 고양이 산책이나 시켜야 겠다. -11월10일-
[moz] 선거캠페인쏭 말이 나와서 생각난건데 한때 부쉬녀석(애비부쉬)이 선거캠페인쏭으로 토킹헤즈의 Dont worry about the government를 썼다는군요. 이에 토킹헤즈 측은 it’s bullshit이라고 짤막하게 논평하였답니다. -11월10일-

디스코그래피
1984 The Smiths Sire
1985 Meat Is Murder Sire
1986 The Queen Is Dead Sire
1987 Strangeways Here We Come Sire
1988 Rank [live]

링크
Fan Page
다음의 스미쓰 카페
morrissey-solo.com/
Johnny Marr의 공식싸이트
elmoz의 팬페이지
haine의 팬페이지
SmithyteriaCOOL!!
Johnny Marr 키타탭
Johnny Marr와의 인터뷰

New Order

2005-06-11 New Order live.jpg
2005-06-11 New Order live” by myself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 영국 맨쳐스터에서 결성

멤버 : Peter Hook, Stephen Morris, Bernard Sumner, Gillian Gilbert

1.뉴 오더(new order)의 전신- 조이 디비젼(joy division)

섹스 피스톨즈와 클래쉬가 이루었던 영국 음악계의 펑크(punk)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원래 정치적 색채가 짙은 무브먼트의 성격으로 시작되었던 펑크는 주류 팝 씬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었고 결국 스스로 다시 언더그라운드화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직 섹스 피스톨즈의 여파가 남아있던 1977년,바르샤바(warsaw)라는 이름으로 처음 음악활동을 시작했던 Joy Division은 비록 그 활동 기간이 3,4년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펑크의 새로운 대안인 뉴웨이브의 서막을 열었던 밴드였다. 조이 디비젼은 79년에 맨체스터의 팩토리 레코드(소위 맨체스터 사운드라 부르는 일단의 음악적 흐름을 조성했던 그 레코드사-뉴오더,더 스미스,스톤 로지스 등이 팩 토리 레코드와의 밀월관계로 유명하다)와 계약을 맺고 첫 싱글 ‘Transmission’과 데뷔 앨범’Unknown Pleasures’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곧 비평가들로부터 대대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았고 이후에 발매된 싱글 역시 많은 지지를 받았다.그러나 1980년 5월 18일,대망의 두번째 앨범 ‘Closer’가 미국 시장으로 진출하기 하루전 보컬리스트이자 팀의 핵심적인 존재였던 이안 커티 스가 돌연 목을 매 자살하고 만다.급격한 건강 악화와 영국 팀으로서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그를 자살로 내어 몰았던 것이다. 이안 커티스의 죽음 이후,조이 디비젼은 두장 짜리 회고앨범인 ‘Still’을 발매하고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2.새로운 대안- 뉴 오더(New Order)

너바나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 이후 해산되었듯이 조이 디비젼도 이안 커티스의 죽음으로 해산되었지만,이들은 너바나처럼 뿔뿔이 흩어지지는 않았다.조이 디비젼의 잔류 멤버였던 버나드 섬너(기타)와 피터 훅(베이스),스티븐 모리스(드럼)는 새로 운 여성 키보디스트 질리언 길버트(당시 스티븐 모리스의 애인이자 현 부인)를 영 입하여 80년,새로운 그룹인 뉴오더를 탄생시켰다.

뉴 오더는 초기에는 펑크의 기운이 많이 남아있는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나 차츰 일 렉트릭 사운드와 기타 락의 균형 잡기에 노력하였고 결국 그들 만의 독특한 뉴웨이브 사운드 구축에 성공한 그룹이다.이들은 그당시 독일 전자 음악계의 대부격이었 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 아방가르드 전자 음악으로 유명한 아트오브노이즈(Art Of Noise)의 영향으로 신서사이저와 시퀀서 등을 적극 도입하였지만 분명히 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뉴 오더는 다분히 비상업적이었던-학구적이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듯한-크라프트베르크나 아트 오브 노이즈와는 다르게 상업적으로도 뛰어난 음악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음악이 단지 돈을 위해 양산해내는 ‘땐스’뮤직이라는 말은 아니다.) 뉴 오더는 각종 일렉트릭 악기의 도입과 수많은 댄스 플로어 용의 리믹스 싱글 작 업을 통해서 대중에게 강하게 어필했지만,이들의 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댄스뮤직’으로 불릴 만큼 충분히 비주류 적이다.바로 이런점이 이들의 음악이 단순한 댄스 뮤직으로 매도되지 않고 10년 이상이나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뉴 오더는 비록 국내에서는 그 이름값을 다 못하고 있지만,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일렉트릭 팝의 최대 약점인 말랑말랑 한 사운드에도 불구하고-최고의 뮤지션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이다.

조이 디비젼이 그랬던 것처럼 역시 맨체스터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이들은 조이 디비젼의 음악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스타일의 데뷔작인 ‘Movement’를 81년에 발표했다. 82년에 싱글 ‘Temptation'(영화 트레인 스포팅에도 삽입됨)을 공개하여 대대적인 찬 사를 받은 이들은 83년에 또다른 싱글 ‘Blue Monday’를 발표하고 두번째 앨범인 ‘ Power,Corruption And Lies’를 발표하였다.뉴 오더는 이 두 번째 앨범을 통해 다분 히 펑크적 잔재가 남아있었던 조이 디비젼 시절의 음악적 모습을 청산하고 기타 락 과 신서사이저 댄스 뮤직과의 균형미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85년에 세 번째 정규 앨범인 ‘Low Life’를 발표한 이들은 신서사이저 사운드를 강화 하고 드럼 머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등 보다 일렉트릭 사운드에 치중한 모습을 보 여준다. 86년에 발표한 앨범 ‘Brotherhood’는 기타 파트가 강한 멜로디 위주의 사운드를 선 보여 어쿠스틱과 일렉트릭의 공존을 시도했다.

87년,뉴오더는 그동안 자신들이 발표했었던 싱글들과 B면 수록곡,그리고 미발표곡 들을 한데 모아서 더블 컴필레이션 앨범인 ‘Substance’를 발표한다.사실상 그들의 첫 번째 베스트 앨범이자 싱글과 리믹스 작업에 치중하는 이들의 음악적 스타일을 한 번에 꿰뚫어볼수 있는 작품으로서 미국 시장에서도 놀라운 반응을 얻었다.이 앨 범에는 국내에서도 인기가 좋았던 곡인 ‘Bizarre Love Triangle'(호주 출신의 뮤 지션 프렌테가 리메이크한 노래)은 물론 ‘1963’등 그들의 히트 싱글들과 조이 디비 젼 시절의 미발표곡 ‘Ceremony’,’In A Lonely Place’등이 수록되어 있다. 89년 발표한 하우스 뮤직 스타일의 6번째 앨범 ‘Technique’를 통해 또다시 인기 몰이에 성공한 이들은 90년 영국 월드컵 축구팀 응원가인 ‘World In Motion’을 발표 하여 영국 싱글 차트 첫 정상을 차지했다.

90년대 들어서 이들은 공식적인 활동을 그만두고 얼마 동안 팀 멤버들의 독자적인 프로젝트 밴드 결성으로 팀이 해체된 것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되었다.버나드 섬너 는 영국의 국민적 락그룹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였던 자니 마와 함께 일렉트로닉이 라는 하우스 뮤직 스타일의 밴드를 만들었고,피터 훅은 Revenge를,그리고 스티븐 모리스는 질리언 길버트와 함께 The Other Two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각각 만들어 각자 활동에 전념했다.(버나드 섬너는 90년에 발표되었던 데뷔작 ‘Electronic’ 에 이어 96년에 크라프트베르크의 전 멤버였던 칼 바튼과 함께 두번째 앨범 ‘Raise The Pressure’를 발표했고 피터 훅은 Monaco란 밴드를 결성해서 데뷔 앨범 ‘Music For Pleasure’를 발표했다.)

그렇지만 93년 이들은 그동안의 각종 루머들을 일축시키며 새로운 앨범을 내놓았고 ‘Republic’이라는 이름의 이 앨범은 뉴오더의 앨범 중 처음으로 국내에 라이센스 발매되었다.(이들은 이 앨범부터 레코드사를 이적하여 지금은 런던 레이블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다.) 94년과 95년 두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 이들은 올해 7월 재결성 공연과 함께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다.

From ThaDogg

3. 이름의 기원

Joy Division :
From a sadomasochistic novel “The House of Dolls” by Karol Cetinsky.. Joy Divisions were lines of huts in which deported women were forced to prostitute themselves to Nazi officers on leave. [Bobo]

New Order :
1) From a newspaper article about the “new order of architecture”. [Jenny Turner]
2) Another thinly-veiled Nazi reference. C.f. Joy Division. [Roderick]
3) Depending on how you look at it, on 1993’s New Order Story video, Barney and Gillian cast jokes about the Nazi reference thing, but then got serious and said that they looked at the name as a logical thing [melshgeek]

4. 다른 글

http://www.intermuz.com/theRocker/noiz_box/NOISE6.asp

우울한 신스 팝의 대명사- 뉴 오더

뉴 오더가 제시한 ‘새로운 질서’란 기존의 펑크적 요소에다 가공할 만한 댄스 비트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독특한 신스-팝이었다. 이들은 조이 디비전에서 들려준 무겁고 암울한 고딕 사운드 대신 시퀸서와 드럼 머신, 신시사이저를 도입한다. 80년대 내내 이들이 주력했던 음악은 다름 아닌 ‘디스코!’ 하지만 이 천덕꾸러기 같은 댄스뮤직조차 뉴 오더를 통해 위트와 재치 넘치는 연주력이 십분 발휘된 독특한 신스팝으로 재창조된다.
무거운 베이스음이 곡 분위기를 주도해 가는, 음울한 분위기의 펑크 내 하위장르인 고딕을 주창하며 70년대 말 등장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은 다름 아닌 이 ‘뉴 오더’의 전신 밴드였다. 미국 공연을 앞둔 1980년 5월 그룹의 핵심인 보컬 이언 커티스의 자살은 곧바로 ‘조이 디비전’의 종언을 의미했다. 조이 디비전의 나머지 맴버들인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테판 모리슨은 여성 멤버 이언 길버트를 영입 ‘뉴 오더’를 결성하기 이른다. 그러나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라며 다소간의 음악적 방황을 겪게 된다.

♬ Sound Chek Box ♪♩

Temptation(유혹-1982)
Blue Monday(우울한 월요일-1982)
Age of Consent(합의의 시대)
Confusion(혼돈-1984)
Perfect Kiss(완벽한 입맞춤-1985)
Subculture(하위 문화-1985)
Bizarre Love Triangle(기이한 사랑의 삼각형-1986)
True Faith(진실한 믿음-1987)
Round & Round”(둥글게 둥글게-1989)

그들의 첫 앨범 ‘Movement(움직임-1981)’는 기존 조이 디비전 스타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첫 싱글 “Ceremony(의식-1981)”는 조이 디비전의 짙은 그림자가 여전히 깔려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분명 과거 조이 디비전과의 단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싱글로 발표된 “Temptation(유혹-1982)”은 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나중에 선보일 그들의 음악에서처럼 전자음 비중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비트감은 이전보다 훨씬 힘차게 뻗어나가고 곡 분위기도 예전 ‘Movement’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다.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이 만드는 기타와 베이스간의 하모니가 돋보인다.

하지만 뉴 오더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들의 대표작 “Blue Monday(우울한 월요일-1982)”였다. 뉴 오더의 본격적인 음악 이정표는 바로 이 “우울한 월요일”을 통해 확립된다. 새로 구입한 드럼 머신과 시퀸서의 작동을 시험해 보는 과정에서 탄생한 우울한 월요일은 신시사이저와 드럼 머신이 시종 일관 주요 멜로디와 리듬을 만들어 낸다. 매혹적인 인트로가 신시사이저에 실려 나오는 동안 어느새 디스코 특유의 말 달리는(?) 리듬이 넘실대며 버나드 섬너의 어눌하고 거친 보컬이 뒤를 잇는다. “오늘 당신의 기분은 어떠십니까?”하며 잠시 생각을 할때 쯤 간간이 들이는 피터 훅의 ‘둥당당당’ 하며 울리는 베이스음은 ‘조이 디비전아 안녕!’하고 작별인사를 한다. 마치 지난날 고딕과의 애증을 대변하는 듯. 영국 내에서만 300만장이 팔린 이들의 “우울한 월요일”싱글은 영국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라는 명예로운 기록을 수립하기 이른다. 이듬해 발표된 ‘power, Corruption, & Lie(권력, 부패, 그리고 거짓말-1983)’은 “유혹”과 “우울한 월요일”에서 들려준 음악 재료가 오밀조밀 짜여있다. 버나드 섬너의 기타는 “Age of Consent(합의의 시대)”에서 보듯 그루브 감이 넘실댄다. 전자음이 그다지 화려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그들이 달성한 “변화의 증거”가 물신 풍긴다.
연이은 싱글 “Confusion(혼돈-1984)”과 “Perfect Kiss(완벽한 입맞춤-1985)”, 그리고 “Subculture(하위 문화-1985)”등에선 우울한 월요일을 능가하는 경쾌한 신스 팝을 들려준다. 전자 음의 비중은 훨씬 높아지고 리듬은 보다 치밀하고 경쾌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신스 팝은 어둡고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다. “완벽한 키스” 종반부에서 들려준 휘몰아 치는 듯한 신사사이저 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몽환감을 느끼게 한다.

패션 쇼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쓰이는 “Bizarre Love Triangle(기이한 사랑의 삼각형-1986)”에 지금까지 발표한 싱글들과 미 발표곡들, 그리고 “True Faith(진실한 믿음-1987)”라는 신곡이 수록된 우수한 컬렉션 앨범 ‘Substance’는 뉴 오더가 전형적인 싱글 밴드임을 증명한다. 미국 팝 시장에 그들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된 본 앨범의 신곡 “진실한 신념”은 영국 차트 1위 등극의 영광을 밴드에 선사한다. 조이 디비전에 이어 뉴 오더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남긴 것들- 매드체스터의 산파자

이들의 활동 전반기에 발표된 싱글들에서 발견되는 점은 버나드 섬너의 보컬은 결코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멤버 각자의 기량이 균등하게 조화된 신스 팝이 그들의 특징이다. 80년대 초 인기를 누리던 대부분의 신스팝 그룹들이 ‘노래’라는 부분에 비중을 뒀던 반면 이들의 음악은 철저히 ‘4인조 밴드 편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멤버들의 사진들로 일관된 “Low life-1985” 앨범 자킷 디자인은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이색적이다. ‘음악을 들어달라는 무언의 요구’와도 같은 이들의 의도는 분명 주류 음반 시장의 관행과는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보컬을 맡은 버나드 섬너는 지나치게 의기양양(?)하게 들려 청자로 하여금 거부감마저 준다.

뉴 오더가 남긴 음악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장르-펑크 록과 댄스 팝-간의 온전한 화학반응을 일궜다는 평가로 집약될 수 있다. 뉴 오더는 스미스와 더불어 향후 90년대 브릿팝으로 이어지는 영국 얼터너티브 록음악의 형세를 예견케 해준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였다. 그들이 개척한 “우울한 신스팝”은 맨체스터 내에서 카다란 반응을 몰고 왔고, 89년부터 91년 사이에 뉴 오더의 출신지역인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형성된 “매드 체스터 군단(일명 미친 매드체스터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한다.

80년대 후반 영국 인디 록계의 기억되는 한가지 사건은 댄스 클럽에 불어닥친 “에이시드” 열풍이었고 영국 내에서 몽환적인 하우스 음악의 인기는 주류 록 음악 시장과의 차별 점으로 부각된다. 인디 록계에서도 매드 체스터를 중심으로 이 “에이시드 열풍”의 동반자로 나서게 되었고 이에 뉴 오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설립한 인디 레이블인 팩토리 레코드 회사와 별도로 출신 지역 맨체스터에서 ‘하시엔다’라는 클럽을 운영하면서 맨체스터 출신의 인디 밴드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인디록과 에이시드 하우스 비트와의 화려한 결합음모는 싹이 트고 있었다.

피터 훅이 프로듀서로 참여한”스톤 로지스”나 뉴 오더의 팩토리 레이블 소속이었던 “해피 먼데이”와 같은 매드체스터를 대표하는 밴드들 역시 뉴 오더의 직간접의 영향을 받으며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89년작 ‘Tehchnique(기량)’ 앨범은 이런 “에이시드-하우스” 뮤직의 영향을 온전히 반영한다.”Round & Round”(둥글게 둥글게-1989)는 전형적인 하우스 뮤직 구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개인 프로젝트 활동

하지만 그들의 명성과는 달리 뉴 오더 내부에선 심심치않게 들려온 멤버간의 음악적 견해차는 활동 전반을 통해 전편에 언급한 스미스에 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그들의 모습을 보기란 여간 힘들다. 공식적인 뉴 오더의 음반은 95년에 발매된 그들의 88년-94년까지의 후반기 싱글 베스트 모음집 이후 아무런 새 음반 발매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 해체설도 없지 않아 나돌긴 했지만 아직까진 공식적인 표명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뉴 오더의 공백은 곧 개인 프로젝트 활동의 진행’을 의미했다. 90년대 들어 이들의 소위 “따로 또 같이”활동 형태는 지금까지 계속된다. 버나드 섬너는 전편에서 언급된 기타리스트 자니 마와 ‘일렉트로닉’이라는 테크노 팝 그룹을 결성하여 현재까지 3장의 앨범을 발표해놓은 상황이다. 피터 훅은 ‘Monacco’라는 프로젝트 음반을 발표하고, 스테판 모리슨과 이언 길버트(둘은 부부임)는 ‘The other two’란 그룹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자스보이-  jassboy@hanmail.net )

The ROCKER™ by InterMuz.com since, 2000.

[지나가다] [제 사이트도 아닌 곳에서 저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만] Come on, you j-ass boy! That’s bloody enough. 이언 길버트->질리언 길버트. Age Of Consent-> 법적으로 합의 섹스가 가능한 나이에 대한 함의가 있는 곡. 그리고 제발 디테일을 제맘대로 빠뜨리지 좀 말았으면- 단순히 맞춤법만이 아니라 적어도 타이틀 같은 건 정확하게 인용을 해야 할 게 아닌가 말임다… 헉헉 이상 overtly upset + frustrated된 지나가다였슴다…ㆀ -11월10일-
[moz]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이럴때 싸이트를 만든 보람을 느낀다니깐요. 🙂 -11월10일-

디스코그래피
1981 Movement Factory
1983 Power, Corruption & Lies Qwest
1985 Low-life Qwest
1986 Brotherhood Qwest
1987 Substance Qwest
1989 Technique Qwest
1992 BBC Radio 1 Live in Concert Import
1992 BBC Radio 1 Live in Concert Varese
1993 Republic Qwest
2001 Get Ready [Japan Bonus Track] Wea
2001 Get Ready Warner
2002 Back to Mine DMC
2002 Live in Concert ROIR
2005 Waiting for the Sirens’ Call
2013 Lost Sirens
2015 Music Complete


링크
the Official site
World in Motion
Taxbox23

Stacey Q

Stacey Q (스테이시 큐)

1986년은 마돈나숀 펜(Sean Penn)과 첫 결혼을 했고, 3집 [True Blue]앨범을 발표하며 자신의 음악이 단순한 댄스 팝의 틀에서 벗어날 것이며, 자신의 스타덤이 모두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것을 지켜보던 한 해였다. 그 벤치마킹의 첫 번째 모범 사례로 미국에서 등장한 여가수가 바로 스테이시 큐(본명 Stacey Lynn Swain)였다. 그녀의 메이저 데뷔 싱글 [Two Of Hearts]가 전미 차트 3위, 그리고 전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클럽가를 석권했을 때(한국 라디오와 나이트 클럽에서도 이 곡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대중은 그녀가 “제2의 마돈나”의 후보로 그녀의 이름을 올렸을테니까…
59년생으로 캘리포니아 출신인 스테이시는 소녀시절부터 클래식 발레와 연기를 공부했고, 80년대 초반 댄스 뮤직 밴드 Q(007영화에서 제임스 본드의 상관의 호칭에서 기원함)의 보컬리스트로 처음 프로의 길을 걸었다. 나중에 밴드는 이름을 SSQ로 바꾸게 되는데, 83년작 [Playback] 이후 나머지 멤버들은 그녕의 작업에 도움을 주는 관계로 남고 그녀는 솔로로 독립했다.
그 후 86년에 인디 레이블을 통해 셀프-타이틀 데모 EP를 발표한 데 이어 아틀랜틱(Atlantic)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첫 솔로 앨범 [Better Than Heaven]을 내놓는다. (그 전에 이미 싱글 [Two Of Hearts]는 클럽가를 휩쓸기 시작하고 있었다.) 결국 이 곡의 전 세계적 히트로 그녀는 ‘Overnight Success’에 가까운 스타덤을 얻었고, 후속 싱글 [We Connect]도 Top 40 히트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두 싱글 모두 그녀가 잠시 출연했던 드라마 “The Facts Of Life“에서도 소개되었던 것이 나름대로 히트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88년에 발표된 2집 [Hard Machine]이 싱글 [Don’t Make A Fool Of Yourself]의 저조한 히트로 인해 묻혀버리자 그녀의 이름도 팝계에서 너무나 쉽게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다음해인 89년에 3집 [Nights Like This]가 발표되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앨범이 나왔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녀는 자꾸만 팝계의 저편으로 밀려났다. 결국 한 동안 연예계를 떠나있으면서 티벳 불교에도 심취했던 스테이시는 97년 그 영향으로 당혹스럽게도 포크-록적 성향을 가진 4집 앨범 [Boomerang]을 발표하며 팝계에 다시 복귀했다. (이 앨범에는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곡을 리메이크한 [My Sweet Lord]가 들어있다.)
그 앨범 역시 상업적인 실패를 거두자 그녀는 음악보다 영화쪽에 오히려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Playing The Odd](98), [Citizens of Perpetual Indulgence](00), [Never Mind The Buzzcocks](02) 등 그리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에서 연기 활동을 펼쳤다. 2004년 다시 고향인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댄스 뮤직계로 돌아와 클럽 등에서 공연하면서 음악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에코 정키스(Echo Junkies)의 존 세인트 제임스, 스킵 한 등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새 음반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그녀의 Myspace홈페이지에 실려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녀의 현재 공식 홈페이지는 http://www.stacey-q.com 이다.) 오른쪽 포스터는 이번 달에 예정된 클럽 파티에서의 공연 예정 광고인데, 아직도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만간 그녀의 신곡을 들을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섹슈얼한 느낌을 주지만 (마치 강수지, 하수빈이 생각나는것 처럼) 여린 보컬 능력이 그녀의 아티스트로서의 한계이긴 했지만, 그녀도 스스로 작사-작곡을 할 줄 아는 싱어였기 때문에 언제든 본인이 만족할 작품이 만들어진다면 다시 그녀의 모습을 화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 가장 섹시한(야릇한 충동이 느껴지는) 노래중 하나로 기록될 이 [Two Of Heart]와 그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면서 중학교 1학년 학생의 가슴에 다가왔던 그 야릇해던 느낌이 다시 되살아 나는듯하다.

Stacy Q’s Discography:
SSQ: [Playback] (83)
1집: [Better Than Heaven](86) /
2집
: [Hard Machine] (88) /
3집
: [Nights Like This] (89)
4집: [Boomerang] (97) /
베스트앨범
: [Stacey Q’s Greatest Hits] (95)

ZZ Top

ZZ Top Live.jpg
ZZ Top Live” by Craig ONeal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ZZ Top Live.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지지 탑(ZZ Top)의 음악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다면? 정답은 블루스와 록이다. 또한 텍사스와 멤피스이다. 모래 바람과 말발굽 소리, 싸구려 선글라스와 딱 달라붙는 블루진을 입은 남자, 아름다운 여인들과 빠르고 멋진 자동차… 이 정도면 여러분도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이 빌리 기븐스(Billy Gibbons)의 기타와 더스티 힐(Dusty Hill)의 베이스, 그리고 멤버 중 유일하게 긴 수염을 가지고 있지 않은 프랭크 비어드(Frank Beard)의 드럼이 조화롭게 녹아있는 그들의 앨범 안에 들어있다. 70년 말, 데뷔 앨범인 [ZZ Top’s First Album]을 포함해 2000년 현재까지 총 12장의 정규앨범과 3장의 베스트 앨범, 한 장의 블루스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표하는 동안 많은 음악적 변화를 모색하려 시도했던 그들은 94년 발표한 [Antenna]에서 다시금 70년대의 지지 탑을 연상케 하는 부기우기 사운드로 돌아간 [Rhythmeen]의 연장선상에 있는 [XXX]까지 그들의 트레이드마크인 텍사스 사운드를 충실히 들려주고 있다. 지지 탑은 76년 발표한 앨범 [Tejas]부터 새로운 음악적 모험을 시도했었는데, 83년 발표한 앨범 [Eliminator]에서는 신서사이저 사운드를 도입하기 시작해 댄스, 팝적인 세련된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나, 90년 발표한 앨범 [Recycler]에서는 너무나도 일렉트로닉적 사운드 메이킹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여 지지 탑의 팬들을 실망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시 초기의 지지 탑 사운드로 돌아온 빌리 기븐스는 이점에 대해 “우리들은 여러 음악 스타일을 노래하려 하였으나, 앨범을 발표할 때마다 지지 탑만의 개성을 증명할 수 있는 요소를 삽입해 달라는 팬들의 요청에 따라 계속해서 동일한 요소들을 지켜왔다”고 말하고 있다.

changgo.com에서 전제

사족 : 이들의 트레이드마크는 아무래도 두 기타리스트의 기다란 턱수염이다. 그런데 정작 턱수염을 기르지 않은 드러머가 “턱수염”(Beard)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70 ZZ Top’s First Album Warner
1972 Rio Grande Mud Warner
1973 Tres Hombres Warner
1975 Fandango Warner
1976 Takin’ Texas to the People London
1976 Tejas Warner
1979 Deguello Warner
1981 El Loco Warner
1983 Eliminator Warner
1985 Afterburner Warner
1990 Recycler Warner
1994 Antenna RCA
1996 Rhythmeen RCA
1999 XXX RCA

링크
Fan Page
ZZ Top Cover Band
famoustexans.com
Lyrics
ZZ Top Liveband
ZZ Coverband

Young, Paul

Paul Young by Zoran Veselinovic.jpg
Paul Young by Zoran Veselinovic” by Zoran Veselinovic (note the photographer’s name is corrected here) – http://www.flickr.com/photos/56492970@N07/5705650710/in/photostream.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Hey! If we can solve any problem”

로 시작되는 잔잔한 발라드 Every time You Go Away 를 Hall & Oates 의 곡으로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 노래는 원래 Paul Young 의 노래인 것이다. 날카로운 송곳 머리와 뾰족한 턱과 코가 인상적이었던 영국 젊은이 Paul Young 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불렀던 잊혀진 오리지널을 다시 살려내어 자기만의 색깔을 입힘으로써 명성을 얻은 가수이다.

그는 영국에서 Simply Red 의 Mick Hucknall 과 함께 소위 “파란 눈의 쏘울(blue-eyed soul/pop)”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는 가수였다. 그의 가장 큰 재능은 – 자신이 직접 곡을 쓰기도 했지만 – R&B 클래식 중 팬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진 곡들을 발굴해내어 새 생명을 불어넣는 데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Every time You Go Away 가 대표적인 경우였고 그의 또다른 히트곡 I’m Gonna Tear Your Playhouse Down 역시 Ann Peebles 의 흘러간 곡을 춤추기 알맞게 리메이크한 곡이다.

1959년 1월 17일 런던에서 출생한 Paul Young 의 첫 음악경력은 여러 로컬밴드에서의 베이스 혹은 키타 담당이었다. 그가 처음 보컬로 나선 것은 The Streetband 라는 뉴웨이브 밴드에서 였고 1978년 Toast 라는 곡이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밴드가 해체된 뒤 Young 은 Q-Tips 라는 쏘울밴드를 조직했다.

1982년 그들은 CBS와 계약을 체결했는데 회사의 관심은 Young 의 쏠로활동이었고 이로 인해 Q-Tips 의 해체는 가속화되었다. 결국 팀은 해체되었고 The Royal Family 라는 Young 의 백밴드가 새로이 구성되었다. 그의 솔로 싱글 Iron Out the Rough Spots 가 1982년 말 발표되었고 연이어 Nicky Thomas 의 레게팝 히트곡인 Love of the Common People 의 리메이크를 발표했다. 두곡의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았으나 Marvin Gaye 의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곡인 Wherever I Lay My Hat (That’s My Home) 가 인기를 얻었고 이로 인해 데뷔앨범 No Parlez 의 판매도 호조를 보였다. 1984년 Young 은 유명한 프로젝트 밴드 Band Aid 에 참가하여 Do They Know It’s Christmas? 를 부른다. 이 곡은 국제적인 인기를 누렸고 이 기세를 몰아 Young 은 I’m Gonna Tear Your Playhouse Down 으로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복귀하였다. 1985년 2집 The Secret of Association 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에는 그의 최고의 히트곡 Every time You Go Away 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 곡은 1980년 발매된 Hall & Oates 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었다. 불과 5년 전에 발표된 곡을 리메이크(!)해서 확실한 자신의 곡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Young 은 3집부터는 자신만의 곡을 쓰는데 주력했고 1986년 Between Two Fires 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 앨범은 메이저 히트곡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의 화려한 나날들이 점점 색을 바래갔다. 이후 1990년 새 앨범을 내놓기까지 나머지 80년대는 그에게 있어서는 침묵의 시기였다.

디스코그래피
1983 No Parlez Columbia
1985 The Secret of Association Columbia
1986 Between Two Fires Columbia
1990 Other Voices Columbia
1993 Crossing Columbia
1995 Reflections Vision Music
1997 Paul Young East/West
2003 Love Will Tear Us Apart Colu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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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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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O2008(cropped)” by YMO2008.jpg: The_Junes of Flickr.com
derivative work: Solid State Survivor (talk) – YMO2008.jpg.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굳이 YMO를 이야기하는 이유 두가지. 작년 가을에 일본에 갔을 때 놀란 일이 있다. 타워 레코드에서 신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음악이 들렸다. YMO의 [Rydeen]이었다. 나온지 십년도 넘은 음악이 갑자기 나오는 이유가 뭐지, 란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YMO의 베스트 음반이 새로 발매된 탓이었다. 일본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일종의 ´전설´로 여긴다. 일본 대중음악인으로선 미국과 유럽 등지의 음악인에게 영향을 준 최초의 그룹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얼마전 국내 발매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반 [BTTB] 탓이다. [Tong Poo]이라는 타이틀의 음악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피아노 연주로 흘러나오고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YMO 시절에 사카모토 류이치가 만들었으며 YMO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이다. 새로운 감흥을 자아내는 것이다.

사카모토의 국내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선지 요즘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것도 작은 이유다. YMO는 키보드의 사카모토 류이치, 베이스와 키보드의 호소노 하루오미, 그리고 드럼과 키보드의 다카하시 유키히로로 구성된 3인조 그룹이었다. 도쿄 대학 출신의 사카모토 류이치는 전형적인 인텔리 음악인이며 그룹의 리더였던 호소노 하루오미는 음악 제작과 연주를 겸했으며 다카하시는 록 음악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YMO는 80년대 일본 음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엔카와 댄스, 그리고 록으로 삼분되어 있던 일본 음악계에 테크노라는 새로운 장르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YMO 멤버들은 차갑고 정형화된 음악을, 공연장에서 마치 로봇 같은 매너로 연주했다. 중국의 인민군복을 입고 무대에 등장해 세간에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이들은 노래의 제목을 장 뤽 고다르의 영화제목에서 빌어오는 등 혁신적인 대중음악을 들려줬다. 그리고 미국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들이 외국무대로 향한 것은 [솔리드 스테이트 서바이버 Solid State Survivor]라는 앨범을 발표한 직후였다. YMO의 무개성적인 테크노음악은 당시 록 음악의 대안을 찾고 있던 서양 젊은이들에게 어필했으며 미국 시장에서 앨범을 발매한 YMO는 일본 대중음악인으로선 최초로 세계순회 공연을 하는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80년대 초반, 일본에선 ´YMO붐´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만큼 청년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셈이다. 83년에 해산을 한 YMO는 이후 1993년에 멤버들이 다시 모여 신작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는데 전성기 만큼 열광적인 반응을 얻진 못했다. 이미 음악계의 판도가 댄스풍의 테크노음악으로 바뀌어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은 더 이상 젊은 층에 어필할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YMO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이들은 시기적으로 운이 좋은 셈이었다. 전자악기의 보급에 발맞춰, 테크노 음악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들고 나온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YMO 덕에 이후 일본에서 테크노 음악이 계속적인 흐름을 만들 수 있었으며 그 정신적 자양분을 YMO가 제공하였음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번 공연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Tong Poo]를 연주할까. 만약 그렇다면, 이미 20여년 전에 일본에서 음악적 신화를 구축했던 세 음악인의 자취를 흐릿하나마 다시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족 한가지. 일본의 젊은이들이 YMO에 갖는 대단한 존경심과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분은 국내에서 출판된 일본의 판타지 만화 [가면 속의 수수께끼]를 꼭 찾아서 보길 바란다. 이 만화를 그린 작가는 YMO의 대단한 매니아인 듯한데 만화 곳곳에 그들의 음반 자켓과 음악인들 캐릭터를 재치있게 그려넣었다. 그 재미가 쏠쏠하다. <글: 김 의 찬> 출처 http://www.odemusic.co.kr/(주의 : 현재는 야동 사이트로 연결됨)

디스코그래피
1978 Yellow Magic Orchestra EMI
1979 Solid State Survivor EMI
1980 Public Pressure [live] Alfa
1980 Xoo Multiplies EMI
1981 BGM EMI
1981 Technodelic EMI
1983 Naughty Boys Restless
1983 Service Restless
1984 After Service [live] Restless
1993 Technodon EMI
1997 Yellow Magic Orchestra [Import Bonus Tracks] Sony Music
2003 Zosyoku Japanese Import
2003 Yellow Magic Orchestra: U.S. Edition Sony Music

Ya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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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 Clarke and Alison Moyet of Yazoo (1982)” by http://www.yazooinfo.com/photos.html. Licensed under Wikipedia.

1982년 영국에서 결성된 Yazoo는 Vince Clark과 Alison Moyet으로 구성된 2인조 혼성 듀엣이다. 빈스클락은 야주를 결성하기 전에 Depeche Mode에서 리더로 활동하던 뮤지션이다. 그는 이 그룹에서 많은 히트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공 분야가 컴퓨터였으므로 자신의 컴퓨터에 관한 지식을 활용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그룹을 탈퇴하고 앨리슨모엣과 함께 야주를 만들어 그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 갔다.

Alison Moyet은 학창 시절부터 리듬앤블루스에 심취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위해 London College Of Furniture에 입학하여 자신의 음악성을 정립시켰던 맹렬 여성이었다. 이와 같이 다른 길을 걸어 온 두 사람이지만 1982년 데뷔앨범 Upstairs At Eric’s를 발표하여 유럽 최고의 일렉트로닉 팝 그룹으로 명성을 쌓았다. 개성있는 듀오로 출발하여 환호를 받은 이들은 1982년 유럽 최우수 여성 보컬리스트로 Alison Moyet이 선정되었다. 또한 데뷔 앨범에서 싱글 커트된 Don’t Go는 유럽 챠트에서 넘버 1을 차지했던 최고의 히트 싱글이었다.

미주 지역에서는 1982년 9월부터 이들이 소개되기 시작해서 Situation이 빌보드 챠트에 랭크되어 미국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Yaz로 소개되었는데 미시시피 주에 있는 리듬앤블루스 음반을 제작하는 Yazoo라는 작은 레이블과 이름이 같아 상표권 문제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83년 3월 9일자 빌보드 챠트에 Only You가 67위에 등장하여 한 장의 앨범에서 세 곡이 히트되는 쾌거를 거두었고 앨범 또한 앨범 부문에서도 30주 이상 챠트에 머무르면서 성공의 기쁨을 한 껏 누렸다. 이들은 1983년에 발표된 두 번째 앨범 You & Me Both를 발표한 후에 이들은 해체되었다.

디스코그래피
Upstairs At Eric’S 1982
You & Me Both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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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kovic, Weird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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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YankovicByKristineSlipson” by Kristine Slipson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Yankovic이란 이름이 낯선 사람일지라도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그런 친숙함을 느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의 엽기 카피머쉰 “Weird Al”(이름부터 엽기 코드를 채택하고 있음) Yankovic은 자신의 오리지널곡 보다는 이미 차트에서 명성을 날린 바 있는 곡들을 교묘하게 변조하여 부름으로써 – 심지어는 뮤직비디오마저 엽기적으로 모방함으로써 – 그 정체성을 창조해낸 가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흔히 Comedy Rock 또는 Song Parody라 불리우는데 굳이 패로디라는 형식상의 특징이 아니라면 그는 Frank Zappa나 Denis Leary와 같은 weird한 음악계열과 동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곱살부터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한 그는 폴카스타일 – 보헤미안 음악에서 비롯된 매우 빠른 박자의 춤곡 스타일 – 의 스타인 Frank Yankovic(인척관계 없음)의 전통의 계승자라고도 할 수 있다.

Alfred Matthew Yankovic이 본명인 Yankovic은 1959년 10월 23일 캘리포니아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데모테잎을 제작하는 등 음악 캐리어를 쌓아나가던 그는 대학에 입학한 후 – 건축전공 – 한 캠퍼스 라디오 방송국에서 활동하면서부터 “Weird Al”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 The Knack의 히트곡 My Sharona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My Bologna라는 패로디곡을 제작하였다. 이 곡은 의외의 호응을 얻으면서 – 심지어 The Knack 의 멤버들조차 맘에 들어했단다 [국내 어느 탑아티스트와 비교되네] – 그의 본격적인 음악인생이 시작되었다.

1980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Yankovic은 Another One Rides the Bus을 내놓았다(오리지널이 어떤 곡인지는 이미 짐작하셨으리라…). 이어지는 I Love Rocky Road를 내놓은 후 그는 Scotti Bros와 계약을 체결하고 1983년 데뷔앨범 “Weird” Al Yankovic을 내놓았는데 이 앨범에서는 Toni Basil의 히트곡 Mickey를 패로디한 Ricky가 인기를 얻었다. 이어 내놓은 뮤직비디오도 MTV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의 성공은 무었보다도 뮤직비디오의 효율적인 활용에서 기인한다. 그는 음악에서뿐 아니라 뮤직비디오에서도 익살스러운 패로디(사실 풍자라고 해석하기에는 좀 뭐하고 메이저가 교묘하게 뒤틀리는 일탈적 모습에 쾌감을 느끼는 마이너적인 감성에 호소한 측면이 많다)로 원작을 교묘하게 비틈으로써 MTV의 주요단골 메뉴가 되었다는 점이 그에게는 큰 이득이었다. 또한 MTV는 그의 개인적인 페르소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그의 하와이언셔츠와 긴 곱슬머리, 그리고 약간은 어벙벙한 그의 표정은 그만의 코믹한 트레이드마크로 십분활용되었다. Michael Jackson이 Beat It으로 큰 인기를 얻은 후 Yankovic은 곧장 Eat It을 대항(?)하였는데 코믹한 뮤직비디오는 엄청한 인기를 얻게 되고 싱글 또한 차트의 상위에 오랜 기간 머물러 있었다.Eat It이 담겨져 있는 앨범 In 3-D에는 이외에도 Police, Greg Kihn Band 등의 곡을 패로디한 곡과 Polkas on 45 등이 인기를 얻었다.

이후에도 그의 창작욕(?)은 끊일 줄 몰라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유머는 잘 봐주어도 Naked Gun류의 휴지통 유머에 가까우나 의외로 그를 사랑하는 팬들도 꽤 있는 것 같아 급기야 Yankovic Box Set를 사고야 말겠다는 사람까지 목격한 적이 있다. 🙂

디스코그래피
1983 Weird Al Yankovic Scotti
1984 In 3-D Scotti
1985 Dare to be Stupid Scotti
1986 Polka Party Scotti
1988 Even Worse Scotti
1989 UHF Rock ‘n Roll
1990 Peter & the Wolf/Carnival of The Animals,… Columbia
1992 Off the Deep End Scotti
1993 Alapalooza Scotti Bros.
1995 The TV Album Scotti Bros.
1996 Bad Hair Day Scotti Bros.
1999 Running with Scissors Volc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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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kovic.org

X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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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TC bandphoto” by Jean-Luc Ourlin – http://www.flickr.com/photos/jlacpo/5034883/.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매력적인 멜로디와 생명력이 깃든 포스트 펑크 (post punk)를 선사했던 XTC는 Talking Heads와 함께 “생각하는 사람들의 밴드”로 묶일수도 있었지만 두 그룹의 스타일은 비교할 수 없었다. 그룹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영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멤버들은 대부분 영국 Swindon 지방의 노동자 계층으로 성장했는데 그곳에서는 목두들 정규교육을 팽개치고 팝 음악으로 경력을 쌓으려는 시도를 좋아했다.

Andy Patridge는 말타의 Mediterranean 섬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때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했고 15살까지는 학교에 있었다. 그후 신문사에서 “Teaboy”로 일했고 일했고 그후에는 지방 기술대학에서 예술수업을 받았으며 남는 시간에는 집에서 혼자 기타를 배웠다. 거의 같은 시기에 Patridge와 같은 블럭에 살고있던 Colin Moulding은 우유배달 조합원, 일일노무자, 그리고 지방자치회에서 일하는 틈틈이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드러머는 Terry Chambers로 정해졌는데 그는 15살때 독한 사과주를 너무 많이 마신 사건 때문에 학교를 뛰쳐 나왔다. 그 나이또래 아이들처럼 건설자재 상인이나 서판인쇄공 등의 여러가지 직업을 거쳐 일하면서도 음악적 성공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1976년 셋이 모여 XTC를 결성하기 이전에는 Star Park, The Helinum Kids, Skyscraper 그리고 Snakes 같은 다른 밴드에서 때로는 함께 때로는 떨어져서 연주를 했다. 그룹의 키보드 연주자로 Barry Andrews를 합류해 4인조로 활동했다. 1977년초, 그들은 Swindon 지역에서 지지기반 세력을 확보했다. 이러한 반응과 지방 비평가들이 쓴 호의적인 평론, 즉 열악한 10대 고용원들의 환경을 유머와 신랄한 비평을 조화시킨 밴드에 대한 칭찬에 힘입어 Patridge와 그의 친구들은 당시 펑크의 기세가 가득했던 영국으로 진출해야 될 때라고 느꼈다.

1977년 중반, Virgin Records와 계약을 맺고 10월에 데뷰싱글 “3 DEP”를 발표했고 이어서 79년에는 영국에서 Top 20 안에 든 “Making Plans For Nogel”을 비롯해 5곡의 싱글을 더 발표했다. 78년, Virgin Records는 밴드의 첫 앨범이자 2장의 영국식 앨범 White Music과 를 발매했고 둘 다 영국순위 Top 30을 기록했다.

밴드는 이 앨범들을 영국에서 시작해 일본, 호주, 뉴질랜드, 베네주엘라, 유럽대륙 드리고 종국에는 미국에까지 이어지는 거의 쉴틈없이 진행된 순회공연으로 홍보했다. 밴드가 미국에서 데뷔하게 된것은 1978년 새해전야에 Talking Heads가 참가하는 프로그램에서였다. 청중들의 반응은 79년 초에는 몇배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 레코드사에서는 그해말에 게획한 훨씬 야망있는 순회공연과 때를 맞춰 밴드의 미국시장 첫 앨범인 Drums And Wires가 나왔다. 그런일들이 있기전에 밴드는 Andrews가 탈퇴를 결심하자 재결성을 위해 잠시 Swindon에 돌아가야 했다. 그의 자리는 예전에 밴드와 함께 키보드를 연주했던 적이 있는 Dave Gregory가 넘겨받았다. 그의 전력은 Dean Gabber와 그의 Gabberdines에서 기타리스트와 키보디스트로 활동한 것을 꼽을수 있다.

새로운 결성도 여전히 영국 비평가들에게는 칭찬을 얻었다. New Musical Express에 기고한 Paul Morley는 “재치와 우아하고 다각적인 음악을 만드는… 그들의 음악은 새로운 형용사를 요구한다.” 라며 박차를 가하고 있는 밴드를 격려했다. Melody Maker의 John Orme는 Drums & Wire를 복합성, 대조, 풍부함 그리고 유머까지 XTC는 껍질을 부수고 새로운 땅을 개척했다.”라며 일컬으며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Patridge는 레코드사 약력에 이렇게 썼다. “난 환각의 시간에 대한 음악에 심취했고 그것을 마법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R&B에 마술을 섞은 종류의—이것이 진짜 우리가 하는 일이다… 난 사람들이 ‘오! 맙소사! 저게 뭐야?’라고 생각하는 음악을 좋아한다. XTC는 언제나 사람들이 ‘맙소사’ 라고 말하게 하고 그 모든것이 타당한 이유라고 본다.” 미국에서 가졌던 실황공연에 힘입어 앨범 Drums And Wires 는 밴드를 알고 있는 상당수의 미국 팬들을 확보했다. 뒤이은 걸작 Black Sea는 50위까지 올라갔다.

1981년 말이 되자 라이브를 계속 할 수 없는 몇가지 징조들이 밴드 멤버들 사이에 나타난다. Patridge의 경우에는 모든 종류의 군중들을 선천적으로 강하게 혐오하는 증세를 고치려고 애썼다. 밴드의 새앨범 English Settlement는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 발매 됐는데 고향인 영국에서는 반응이 좋았으나 Black Sea가 얻었던 호응을 얻지 못했고, 아마도 그 이유를 공연홍보의 부족으로 여기는 듯했다. 1982년말, Terry Chambers는 활도의 빈곤함에 불만을 품고 호주의 새로운 목장을 찾아 그룹을 떠났다. 나머지 멤버들은 3인조로 활동할 것을 결정했다. 83년에 그들은 또다른 스튜디오 앨범을 제작하는데 어쿠스틱 연주가 강조된 것이었다. Murmur는 미국의 새로운 레이블인 Geffen Records에서 발매됐다. 앨범은 영국과 미국차트에 오르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고 팬들 가운데에는 이전의 앨범에 비해 부드러눙 톤에 당혹해 할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1984년 밴드는 새로운 스튜디오 앨범을 편집하기 위해 햇병아리 시절의 Hard-Blues를 다시 추구하기 시작했다. Patridge는 “우리의 새앨범과 더불어 저도 심기일전하고 싶었어요. 음악은 훨씬 흥겨운 기분이 들겁니다. Murmer의 가사는 저희집 뒤뜰크기에 대한 아주 작은 목표를 담고 있어요. 새앨범 The Big Express는 우리에게 다시 세상을 둘러보게 한 더욱 Hard한 앨벙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앨범은 1984년 10월 미국의 Geffen에서 발매 되었는데 이것은 흥미는 있었지만 골수팬들을 빼고는 구매자들의 구미를 다시 돋구진 못했다. (1985년 <25 O’Clock>은 영국에서만 발매되었다.) Geffen의 간부들은 밴드의 중요성을 레리블처럼 다수의 록팬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확신을 표명하고 1986년에 새로운 앨범 Skylarking을 발매했다. 영국밖에서 그룹의 문제점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Patridge는 항상 낙천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는 Kristine McKenna(Los Angeles Times, 1982년 4월 4일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팝음악은 즐거움과 대학살로 가득합니다. 마이크를 구부리고 셔츠를 잘라 블라우스로 만들어 입죠. 우린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특별히 잘 생기지 않거나 셔츠를 잘라 만든 블라우스 타입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목표가 잇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문명을 바꿀수는 없지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마 내가 고지식해서 그렇게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제가 바라는 일입니다.”

Punk 77.com

디스코그래피
White Music (1978)
Go2 (1978)
Drums And Wires (1979)
Black Sea (1980)
English Settlement (1982)
Mummer (1983)
The Big Express (1984)
Skylarking (1986)
Oranges And Lemons (1989)
Nosuch (1992)

링크
팬페이지
Weiv의 Skylarking Review
Lyrics
Italian Fan Page

Wire

Wire sept 2013.jpg
Wire sept 2013” by Fergus Kellyhttp://www.flickr.com/photos/55867717@N00/10017094715/.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의 데뷔앨범 Pink Flag으로 이미 거장밴드로 등극한 Wire는 동시대의 펑크밴드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앨범에는 인스트리얼과 미니멀리즘적인 분위기를 강렬히 풍기는 Lowdown에서 초기 락앤롤의 명랑함이 담겨져 있는 파워팝 넘버 Mannequin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적 지형을 40분이라는 짧은 플레이시간에 담아내는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선보였다. 이어진 Chairs Missing과 154은 전작만큼의 성과를 얻어내진 못하였지만 그들은 그룹의 음악적 역량을 꾸준히 확장시키고 세련되게 만들어갔다. 그룹의 컬트팬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와중인 1979년 Wire는 그들의 아이디어가 고갈되었다며 돌연 해체를 선언한다. 다양한 솔로 프로젝트로 여러 해를 보낸 밴드 멤버들은 1986년 재결성하여 다음 몇년동안 일련의 실험적인 팝레코드 시리즈를 내놓는다. 1987년 The Ideal Copy는 이전 작품과 다르게 신쓰팝적인 요소와 디지털 텍스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사운드적으로는 인상적인 기타리프와 그루브한 리듬파트가 New Order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비평은 호의적이었지만 이전만큼 열광적이진 않았다. 이때쯤 그들을 향한 컬트적인 호응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Gotobed가 1991년 그룹을 떠났다. 남은 멤버들은 그룹의 이름에서 e를 뺀 Wir란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조용히 세간의 관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돌연 2001년 그들은 다시 스튜디오에 나타났고 2002년 6개의 트랙이 담긴 앨범 Read & Burn 01을 내놓았다.

1995년 Elastica는 그들의 힛싱글 Connection에 Wire의 곡 Three Girl Rhumba를 샘플링하기도 하였다.

멤버 : Art students Colin Newman (guitar, vocal), Bruce Gilbert (guitar), Graham Lewis (bass, vocal), and Robert Gotobed (b. Mark Field; drums)

디스코그래피
1977 Pink Flag [Restless]
1978 Chairs Missing [Restless]
1979 154 [Restless]
1981 Document and Eyewitness [live] [Mute]
1987 The Ideal Copy [Mute]
1988 A Bell Is a Cup…Until it Is Struck [Mute]
1989 It’s Beginning To & Back Again [Enigma]
1990 Manscape [Restless]
1991 The First Letter [Mute]
2002 Read and Burn, Vol. 1
2002 Read & Burn 01 [Pink Flag]

링크
Official Site
Wireviews
Pink Flag 전곡 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