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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s Incorporated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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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sinclogo” by Derived from a digital capture (scan). Licensed under Wikipedia.

by Mikstipe

90년대의 틴 팝 스타들 –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저스틴 팀버레이크 등 – 이 모두가 디즈니 채널 어린이 프로그램인 ‘미키마우스 클럽(Mickey Mouse Club)’ 출신이라면, 사실 80년대에는 이에 그리 뒤지지 않는 팝 스타 꿈나무들을 키웠던 어린이 프로그램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 프로그램이 바로 키즈 인코퍼레이티드(Kids Incorporated.)였다. 이 프로그램은 5명의 어린이들이 어린이 클럽을 직접 운영하면서 겪게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당시에 유행하는 히트곡들과 고전 팝송들을 어린이 배우들이 직접 프로그램에서 라이브로 노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84년부터 93년까지 8시즌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후 프로 가수의 길로 나간 이들을 잠시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프로그램은 총 21명의 출연진이 지나갔다.)

Martika: Gloria역으로 출연. 89년 첫 솔로 앨범에서 [More Than You Know], [Toy Soldiers], [I Feel The Earth Move]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2집 [Martika’s Kitchen]의 실패로 80년대 원 히트 원더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됨.

Rahsaan Patterson : 이 시리즈 출신 중에서는 음악성면에서 가장 인정받은 보컬 겸 송라이터. 97년에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발표했지만, 그 이전에 테빈캠벨(Tevin Cambell) 등의 흑인 가수들의 히트곡을 썼던 경력이 있음. 대중적 큰 히트곡은 없지만 네오 소울 계열 아티스트들 가운데 평론가들에게는 꾸준히 찬사를 받고 있음.

Stacy Ferguson : 아주 어릴 때 프로그램에 합류하여 가장 오랜기간 이 프로그램에 잔류했음.  아래 설명에서도 언급했지만 르네와 함께 와일드 오키드(Wild Orchid) 보컬그룹을 결성하여 2장의 앨범 발표. 이후 연기 생활 등 방황을 거듭하다 마침내 놀랍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블랙 아이드 피스(Black Eyed Peas)의 퍼지(Fergie)로 변신하여 힙합 여전사의 이미지를 완성함. 현재 첫 솔로 싱글 [London Bridge] 빌보드 싱글차트 1위 차지.

Renee Sands : 스테이시와 함께 이 프로그램에서 상당기간 활동했고, 나중에 함께 와일드 오키드(Wild Orchid) 보컬그룹을 결성하여 2장의 앨범 발표. 하지만, 그룹 해체이후에는 그녀의 언니와 작곡가 활동을 한다는 정도만 알려짐.

Jennifer Love Hewitt : 어쩌면 이 프로그램 출신 최고의 스타일지도. 이 프로그램 이후 가수로서 데뷔를 먼저 했으나, 음반보다는 이후에 나온 [Can’t Hardly Wait], [The Heartbreakers], [If Only], 성룡과 함께했던 [Tuxedo] 등 오락 영화의 히로인으로서 헐리우드 인기 스타 대열에 합류. 근작이었던 [Barenaked] 앨범을 통해서 가수로서도 어느 정도는 본 궤도에 올랐음.

이러한 어린이용 프로그램들은 전 미국에서 미래의 연예계 스타를 꿈꾸는 어린이/청소년들이 자신의 기본 실력을 인정받고 뽐낼 수 있는 장이자 지속적인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근거지로서의 구실을 했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 청소년 스타 시장과 달리 서구 엔터테이먼트 시장이 폭넓은 미래의 연예 자산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얼굴과 이미지보다는 종합적인 능력이 미래의 스타와 뮤지션을 키운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니까. 아래에 보너스로 이들이 어린 시절에 노래부르고 연기하는 모습들을 한 번 보면서 떡잎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자.

Mikstipe’s Music Blog에서 원문 보기

Mikstipe’s Music Blog (CJ홀맨의 음악이야기)가 새로와졌습니다. 티스토리 가입으로 더욱 강력한 음악, 동영상 확보 가능해졌거든요.. 자주 놀러 오세요…^^;…. http://mikstipe.tistory.com

커버버전

http://en.wikipedia.org/wiki/Cover_version

어떤 노래의 커버버전은 다른 아티스트에 의해 다시 녹음되는 것을 말한다(리메이크와 ‘개선된 리메이크’와 비교하라).


비록 커버버전이 때로 아티스트적인 이유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슈퍼마켓의 바겐세일 통을 채우기 위해, 심지어는 음반가게에서 특화시켜 발매된다. 그래서 잘 모르는 소비자는 오리지날 레코딩과 쉽게 혼동한다. 특히 그 포장이 의도적으로 혼란을 주는 경우 그렇다. 그것은 오리지날 아티스트의 이름을 큰 활자로 쓰고 작은 글씨로 originally sung by 또는 as made popular by 라고 에두른 표현을 작은 글씨로 써넣는다. 때로는 다소 비상식적인 ‘커버’라는 단어가 녹음의 진실을 알려줄 뿐이다. 특정한 출반 업체는 ‘오리지날'(강조 역자주) 커버버전이라는 이름으로 왜곡을 극대화시킨다. 커버버전은 가끔 장르로 취합된 모음집의 형태로 팔린다. 슈퍼마켓이 커버버전 세일을 할 때 DJ를 배치해서 특별한 콜렉션에서 독점적으로 뽑아낸 아이템을 연주하게 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반부터 어떤 회사가 엄청나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레코드를 가지고 있고 다른 회사들이 그 레코드의 성공에 기대어 돈을 벌 요량으로 레이블을 위해 새로운 버전을 녹음함으로써 그 곡을 ‘커버’할 뮤지션이나 가수를 가지고 있는 경우 축음기 레코드 레이블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락앤롤의 초기 시절 흑인 락뮤지션이 부른 많은 오리지날이 팻분과 같은 백인 아티스트에 의해 다시 녹음되었고 톤은 보다 락앤롤의 날카로운 면을 제거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도 있었다. 이러한 커버버전은 몇몇 이들에게는 보다 부모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고 백인들의 래디오 방송국의 편성자들의 구미에도 더욱 맞는 것들이었다. 또한 남자 아티스트들의 곡을 여성 아티스트들이 커버하기도 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몇 십 년 동안 많은 인기곡들의 커버버전이 녹음되었다. 때로는 인종적으로 다른 스타일로, 때로는 커버버전이 사실상 오리지날과 구분할 수 없는 케이스도 있었다. 예를 들어 ‘Light My Fire’의 호세펠리치아노 Jose Feliciano 버전은 도어스 The Doors 의 오리지날버전과 확실히 구분된다. 그러나 칼칼톤 Carl Carlton 이 1974년에 로버트나잇 Robert Knight 의 1967년의 히트곡 ‘Everlasting Love’를 커버한 곡은 오리지날과 거의 구분하기 어렵다. 커버버전은 종종 다른 언어로 녹음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팔코 Falco 가 1982년 독일어로 부른 “Der Kommissar”는 10년 후 애프터더파이어 After the Fire 에 의해 영어로 녹음되었다. 비록 독일어 제목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말이다. 팔코의 오리지날 가사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영어곡은 그러나 오리지날의 정신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고 미국 차트에서 탑5에 들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루이지애나에서 존재했던 특정 타입의 커버버전을 스왐프팝 swamp pop 이라고 한다. 컨템포러리, 클래식 락, 알앤비, 그리고 컨츄리 음악이 Cajun(아카디아(Acadia) 출신 프랑스인의 자손인 루이지애나주의 주민, 앨라배마주미시시피주 남부의 백인과 인디언[흑인]의 혼혈아 : 역자주) 주민들을 염두에 두고 녹음되었다. 몇몇 가사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Cajun 악기로 녹음되기도 했다. 몇몇 스왐프팝은 전국적인 차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지역의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었다.


커버버전은 때로 익숙한 곡을 최신 취향에 맞게 만들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Singin’ In The Rain” 은 원래 1929년 헐리우드의 익살극 영화에 쓰였던 곡이다. 유명한 진켈리 Gene Kelly 버전은 1950년의 헐리우드 뮤지컬을 위해 최신 스타일로 도입되었고 1952년 같은 제목으로 녹음되었다. 1978년 프랑스 가수 쉴라 Sheila 가 비디보션그룹 B. Devotion group 과의 협연으로 한때 뮤지컬 세대의 취향에 맞게 재편된 그 곡을 디스코 풍으로 커버했다. 디스코 전성 시대에 유명한 곡들이 디스코 스타일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다. 영화 감독 바즈루맨 Baz Luhrmann 은 그의 영화들에 사용하기 위해 옛날 노래들을 현대화시키고 스타일화 시켰다. Strictly Ballroom에서의 존폴영 John Paul Young 의 “Love Is In The Air”, Romeo and Juliet에서의 캔디스테이튼 Candi Staton의 “Young Hearts Run Free”, 그리고 냇킹콜 Nat King Cole, 니르바나 Nirvana, 키쓰 Kiss, 델마휴스턴 Thelma Houston, 마릴린먼로우 Marilyn Monroe, 마돈나 Madonna, 물랭루즈 Moulin Rouge에서의 티렉쓰 T Rex 등의 새로운 커버버전은 각각의 영화의 구조에 맞게 디자인된 것들이다. 그리고 현세의 청중들의 취향에 맞게 재편된 것들이다.


신진 아티스트들은 때로 미국의 아이돌과 국제적인 대응하는 이들에 의해 증명된 유명하고 ‘안전한’ 곡들을 연주하면서 대중에 소개되기도 한다. 기존 아티스트들은 종종 커버버전을 녹음함으로써, 또는 다양한 라이브 공연에서 녹음되지 않는 커버버전을 연주함으로써 그들이 음악경력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에게 영감을 미쳤던 아티스트나 노래들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U2는 아바 ABBA의 Dancing Queen을 라이브로 불렀고 카일리미노그 Kylie Minogue는 클래쉬 The Clash의 “Should I Stay Or Should I Go”를 연주하였다. 이들 곡들은 그들(U2와 카일리 미노그 : 역자주)의 캐릭터와 전혀 맞지 않아서 녹음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라이브를 할때에는 그들은 아티스트적인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종종 공인된 ‘라이브 레코딩’으로 발매되어 합법적인 커버버전이 되기도 한다.


펑크 뮤직은 클래식 락을 펑크적 형식으로 재해석하여 기존 곡을 파괴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Me First & the Gimme Gimmes, The Mighty Mighty Bosstones, NOFX, Goldfinger 와 같은 밴드는 그 방면으로 유명하다. 최근 몇 년간 몇몇 잼밴드들과 관련 그룹들이 힙합 음악들을 커버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콘서트에서 라이브로 연주되고 있다. 아마도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어 상업적으로 발매된 중에 제일 유명한 커버는 스눕더기독 Snoop Doggy Dogg 의 “Gin and Juice”를 the Gourds가 소화해낸 블루글래스 bluegrass 버전일 것이다. 피쉬 Phish, 켈러윌리엄스 Keller Williams 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Rappers Delight” (The Sugarhill Gang), “Baby Got Back” (Sir Mix-A-Lot), 그리고 다른 힙합 곡들을 커버했다.


비틀즈 The Beatles 는 그 어떤 밴드들보다도 많은 커버버전을 가지고 있다. “Yesterday”는 1965년 오리지날이 나온 이래 약 3천 번 커버되었다. 많이 커버버전된 다른 곡들은 리차드베리 Richard Berry 의 악명높은 “Louie Louie”, “Free Bird” (Lynyrd Skynyrd), “No Woman No Cry” (Bob Marley & the Wailers), 밥딜런 Bob Dylan 과 레오나드코헨 Leonard Cohen 의 예전 곡들 많은 부분들이 있다(2002년 12월 31일 현재 레오나드코헨의 곡 중 공식적으로 커버된 곡의 수는 759곡이다).


많은 유명밴드들이 전적으로 다양한 다른 밴드들에 의해 자신들의 곡이 다시 불려진 – 때로 오리지날과 전혀 다른 – 트리뷰트 앨범을 가지고 있다. 영화 I Am Sam 의 사운드트랙은 이와 관련 특히 유명한 사례이다. 이 앨범은 다양한 모던락 아티스트들에 의해 커버된 비틀즈 트랙을 싣고 있다. 또다른 유명한 사례는 Conception – 스티비원더  Stevie Wonder 와 그의 mentee India. Arie에 의해 불려진 오리지날 곡들을 커버한 곡들로 구성된 – 스티비 원더의 곡을 재해석한 – Conception 이다.


피시나 그레이트풀데드 The Grateful Dead 와 같은 잼밴드는 스튜디오가 아닌 콘서트에서 커버하기로 유명하다.


몇몇 상업적으로 성공하거나 유명한 커버버전은 노래 제목, 오리지날 아티스트, 오리지날 버전의 발매년도가 커버한 아티스트와 발매연도에 따라오기도 한다.

거물가수가 말하는 신참음악가가 돈 버는 방법

최근 Wired.com 에서는 미국의 어느 고참 가수의 글이 화제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David Byrne 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영미권의 펑크, 뉴웨이브 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전설적인 펑크락 클럽 CBGB를 통해 데뷔한 이래 펑크/뉴웨이브의 전형이 되어버린 그룹 Talking Heads의 리더이자 프론트맨이었기 때문이다.(한국어 팬페이지 가기)

그런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기술혁신과 불법다운로드 등으로 망해간다고 아우성치는 음악 산업계에 일침을 놓는 글을 Wired.com에 올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이미 기득권인 그이지만 ‘총체적 폭로(total disclosure)’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이 글을 통해 음악 산업계의 감춰진 기득권의 일면을 보여주면서 현재의 기술혁신 등의 상황이 음악가들에게는 오히려 기회임을 말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이 그동안 관련 산업계에서 회자되어온 내용이 많지만 그 산업에 직접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거물급의 인사가 한 말이기에 무게감이 한층 크다. 불법 다운로드, 음악의 거대산업화, 신인의 등용문 등 여러 주제가 많지만 글이 무척 길기에 편집자 마음대로 요약 발췌하였다. 원문의 의도와 다른 내용이 있다면 가차 없이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wired.com/entertainment/music/magazine/16-01/ff_byrne?currentPage=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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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ohead가 최신앨범을 온라인을 통해서 발표했고 Madonna는 워너브로스에서 콘서트홍보 회사인 라이브네이션으로 망명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음악산업의 형태가 종말을 맡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다. 오늘날 비즈니스를 하는데 있어 독보적인 방법은 없다. 적어도 내 계산으로만도 여섯 가지의 방법이 있고 음악가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과거에는 음악은 우리가 듣고 경험하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순수한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행사였다. 녹음기술이 존재하기 전에는 음악과 사회적 콘텍스트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교회, 술집, 군대 등에서 불리는 음악들은 각기 그 사회적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것을 집으로 가져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음악은 그저 경험이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기술이 이러한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녹음을 통해 음악은 생산물이 되고 팔리고 거래되고 재생되었다. 이로서 음악은 경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레코드회사가 음악을 경제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자.

  • 자금조달
  • 상품제조
  • 상품유통
  • 상품홍보
  • 음악가들의 경력과 녹음의 조언 및 가이드
  • 회계정리

이것이 오늘날 상품을 내놓기 위해 시스템이 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레코드, 테잎, 디스크 등이 음악을 실어 날랐다. 그런데 오늘날 이와 똑같은 것들을 실어 나르는 데에 그 서비스의 가치가 줄어들고 있다.

예를 들면

녹음비용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수준으로 가고 있다. 음악가들은 녹음을 위해 레이블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음악가는 직업적인 스튜디오, 엔지니어, 프로듀서를 이용하는데 필요한 최소자금인 1만5천불을 지불할 돈이 없다. 그러나 이제 앨범은 이메일을 확인하는 노트북으로도 만들 수 있다.1

제조와 유통비용도 제로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다. LP나 CD는 기본적으로 드는 제조단가, 수송단가가 있다.(사실 우리는 음악에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플라스틱에 지불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을 통한 유통은 거의 공짜다. 이 방법을 통하면 100카피건 100만 카피건 비용 차이가 거의 없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레이블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몇몇 레이블은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하던 역할이 보다 혁신적인 방법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Brian Eno[footnote]또 하나의 거물음악가로 Roxy Music의 멤버이기도 하였으며 프로듀서로서 수많은 명반을 제작하였다.[/footnote] 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I Think Music 이라는 인디밴드들의 온라인 네트웍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제작방식에 회의감을 표시했다.

“구조적으로 그들은 너무 크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전적으로 수세적인 위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라고는 음악가에게 큰 금액의 선금 –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밴드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인 – 을 줄 수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러나 그게 다다.”라고 Eno는 이야기했다.

여섯 가지 음악유통 모델
현재 음악유통 모델은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모든 것이 기획사에 의해 기획되는 방식이다. Pussycat Dolls, Korn, Robbie Williams 등이 이러한 방식인데 이들은 일종의 브랜드가 된다. 회사는 이들을 이용해 음악, 티셔츠, 팬시상품 등 수많은 관련 상품으로 돈을 번다. 때로는 음악가들도 많은 돈을 벌지만 대부분의 돈은 자본투자가들에게 흘러간다.

2. 전통적이고 표준적인 유통 모델이다. 과거의 Talking Heads 가 이런 식이었는데 레코드 회사가 녹음, 제조, 유통, 홍보를 하고 음악가는 로얄티를 받는다. 이 방식은 레이블이 녹음한 것들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소유한다.

3. 라이센스계약은 표준적인 방식과 비슷하나 이 경우는 음악가가 지적재산권과 마스터레코딩의 소유권을 가진다. 재산권들을 향유할 권리가 레이블에 주어지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음악가에게 귀속된다. 만약 음악가들이 기업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된다면 이 방식을 살펴볼만 하다. Arcade Fire가 인디레이블인 Merge와 맺는 관계가 이런 식이다.

4. 이익분배 모델인데 내가 2003년 Lead Us Not Into Temptation를 내놓을 때 Thrill Jockey와 일하면서 사용한 방식이다. 레이블에게 최소한의 선금만 받고 이익은 분배하였다.

5. 음악가가 제조, 유통만 빼놓고 다 하는 방식이다. 기업의 역할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인센티브도 적다. 이 모델에서 음악가는 창의성을 보장받지만 도박이기도 하다. Aimee Mann이 이 방식을 채택했다. 그녀는 “많은 음악가들이 그들이 벌 수 있는 많은 돈들이 소유권과 라이센싱을 포기함으로써 날아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6. 셀프유통모델이다. 자신이 음악을 만들고, 생산하고, 연주하고, 판매한다. CD는 공연이나 웹사이트에서 판다. 홍보는 MySpace 를 이용한다. 음악가는 총체적으로 창의적인 권리를 부여받는다. 실제로는 거리에서 CD를 팔고 라이브를 하는 신참 음악가에게는 의지할 곳 없는 자유, 대단히 추상적인 독립이긴 하다. Radiohead 가 이 DIY 모델을 채택했다. 소비자들은 음악을 다운받고 그들이 지불하고 싶은 가격으로 지불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이들과 같은 유명밴드에게는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변화의 초석이기도 하다. Radiohead의 매니저 Bryce Edge는

“이 업계는 종말이 다가온 것처럼 반응한다. 그들은 음악을 평가절하시키고 무료배포한 것처럼 말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 음악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전혀 다른 의미다.”라고 이야기했다.

자유 VS 실용주의
어떠한 모델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음악가들이 위의 모델들을 혼합하고 적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음악 산업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읽은 적이 있는가? 실은 좀 더 많은 기회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대스타들에게는 여전히 그들의 신보를 작업해주고 홍보해줄 전통적인 대규모 기획사를 필요로 하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회사들을 통한 작업도 진행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여하한의 모델은 단일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하다. : 우리가 음악으로부터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음악이 우리를 이끄는 우리 머리와 가슴 속의 대지(大地)로 이끌 것인가. 우리는 음악을 통해 그곳으로의 여행 티켓을 얻을 수 있는가.

  1.  이를 두고 어떤 누리꾼은 원 글의 댓글에 ‘어떻게 메일확인하는 노트북으로 음악을 만드느냐’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난독증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유일 뿐이다.

80년대 초중반의 대중가요

Cho Yong-pil from acrofan.jpg
Cho Yong-pil from acrofan” by acrofan.com – http://www.acrofan.com/ko-kr/life/content/main.ksp?mode=view&cate=0203&wd=20130424&ucode=0802030301&page=1&keyfield=&keyword=.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http://my.netian.com/~uickusa/music/mj704.html

대중가요계의 제 3의 안정기와 수퍼스타 조용필

⑴ 가요계의 천하통일, 조용필

70년대는 포크의 등장으로 기존 가요계의 주된 흐름인 트로트와 스탠다드와는 분리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나가고, 70년대 후반 록이 거기에 또 하나의경향을 보태는 등 새로운 경향들이 어느 것 하나도 뚜렷한 주도성을 잡지 못한 채 솟아오르는 시기이다.
79년에 조용필은 이전까지의 가요의 성과를 종합하고 총괄함은 물론 그 수준을 한 단계 높이면서 수퍼스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창 밖의 여자>, <비련>, <못찾겠다 꾀꼬리>, <촛불>, <물망초>, <꽃바람> 등 그의 재기를 성공시킨 노래들은 모든 계층에 고루 대중적이면서 선율적이며 느낌이 풍부한 단조스탠다드와 강한 리듬·음색의 록을 결합시킨 노래들이다. 또한 조용필은 다양한 쟝르의 곡을 통해 거의 전연령층·전계층에 호소력을 발휘한다. 조용필의 노래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다양한 쟝르에걸쳐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록에 가까운 노래들 :
<단발머리>, <나는 너 좋아> 등
# 정통 스태다드 :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꽃순이를 아시나요>, <정> 등
# 정통 트로트 :
데뷔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에야> 등
# 포크적·가곡적 분위기의 노래 : <친구여>
# 민요 : <한오백년>, <강원도 아리랑> 등

이렇게 다양한 쟝르를 소화한 가수가 소화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스탠다드와 록을 결합한 노래들을 성공시킴으로써 80년대 전반 가요계의 판도를 결정지었고, 이러한 경향에 따라 김수철, 전영록, 윤시내, 이은하, 이선희 등 가요계의 대중적 히트곡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80년대 가요계는 70년대와는 달리 수퍼스타 조용필을 중심으로 일정한 안정기를 맞게 된다.

⑵ 최고의 상품으로서의 조용필

거의 전 연령층, 전 계층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구매자를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용필은 가요계에서 최대이윤을 창출하는 가장 우수한 상품이며, 그 상품적 우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작위적인 노력이 가해진다. 즉 계획적인 매니지먼트에 의해 그다양성이 유지된다. 한 가수가 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경향을 가지게되거나,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경향과 이미지가 최대 이윤창출이라는 원리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다.
다양한 경향의 노래가 동시에 실린 음반이 기획되고 (1집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3집 <고추잠자리>와 <물망초>, <미워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동시에 실림), 다양한 이미지로 부를 작품의 경향과 그 무대, 관객의 취향에 따라 의상 등을 선택하여 변신해가며 적재적소에 등장한다.
또한 대중가요의 경향 변화에 따라 작품의 경향을 바꾸어 나간다. 예를들어 장조트로트가 유행할 때에는 <허공>, 발라드가 유행할 때에는 <그대 발길이 머무는 것에>,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유행할 때는 <꿈> 등을 발표한다.
팬클럽의 결성 등을 통해 인기의 조직적 관리를 시도하는 등 본격적인 가요산업의 시대를 열어나가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전영록, 이선희가 나타난다.

⑶ 가요 수용층으로서의 10대

조용필의 등장이 확인시켜준 것은 10대 -대학생이 아닌 중고등학생 – 특히중학생이 매우 중요한 가요수용층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성스러운10대 팬들이 본격적으로 등장 (70년대 어니언스나 이수만에 대한 호응과는그 질이 다르다).- 10대가 가요의 주요 구매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소형 오디오의 대중적 보급과 경제적 여유로 10대의 음반 구매가 가능해졌다는 것과관련이 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80년대부터 텔레비젼을 중심으로 하는 가요계의 중심적흐름은 10대를 겨냥한 작품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속에서 10대들은 대중음악의 주요한 소비자, 음반 구매층이며, 팬클럽과 박수부대 등으로 ‘이것이 대세다’라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오피니언리더의 구실을 하는 계층이 된다.
가요계의 흐름이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게 되면서 전영록, 구창모, 김수철,이선희 등 10대를 겨냥한 가수들의 대거 등장한다. 이시기 가사를 살펴보면 수용층인 10대를 겨냥하여 유아적 발상과 표현이많이 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깨끗이 지워야 하니까’,’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못 찾겠다 꾀꼬리’,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내 사랑 울보’, ‘만나 사랑한게 잘못이었나봐’, ‘그대 우나봐’,’…했잖아’,’…했어요’ 등

⑷ 록의 제2세대의 전성기와 록의 대중화

조용필의 등장은 록의 대중화를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대학가요제 출신을 비롯한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대거 등장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록의 제2세대가 전성기를 맞게 된다. – 당시 {영 11} 같은 청소년 쇼프로그램은 이들이 빠지면 이루어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송골배 <어쩌다 마주친 그대>,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김수철 <못다핀 꽃 한송이>, <왜 모르시나>, <나두야 간다>, <젊은 그대>등

록의 대중화 시대의 인간형과 세계 인식

포크와는 달리 록은 반문화적 분위기를 가지고 출발하지 않고 처음부터 대중가요의 내용적 관행을 따르면서 대중적으로 시작하였다. 록의 제2세대에 이르러서도 록 특유의 세계인식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비극적 사랑노래의 내용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특히 가사를 중시하지 않는 분위기는음악양식과 질감, 기법을 중심으로 노래를 발전시킨다.
록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절규’이다. 여태까지의 가요에서는 없었던 남성의 고음과 째지는 듯한 전자악기의 음향, 폭발적인 드럼, 강한 리듬들이 사용된다. 대개 고음부와 저음부가 나뉘며, 클라이맥스인 고음부는 맨 앞의 저음부보다는 완전히 한 옥타브 높은 음높이에서 진행된다. 김수철의 <못 다핀 꽃한송이>, <모르시나>,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 등을 보면 한 옥타브 위로의도발적인 절규와 같은 상승이 있다. 저음부와 고음부의 분리와 고음부의 절규는 이 시기부터는 대중화되어서 <잊혀진 계절> 같은 팝발라드 계열의 작품에서도 흔히 드러난다. 조용필의 <촛불>, <비련> 등은 아예 고음부의 절규부터시작하는 강렬함을 보인다.
이러한 노래들의 표현을 보면 이성적이지 않고, 머리보다는 몸으로 먼저 다가온다. 지적이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도볼 수 있다.
슬픔의 표현이 직설적이며 도발적이다. (직설적이라는 점에서는 트로트와일치하며 도발적이라는 점에서는 다름) 비극의 원인을 자신의 탓(운명이든 못난 탓이든 여자이기 때문이든)으로 돌리는 자학적 심리와, 그 비극으로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트로트와 흡사하다. 그러나 록의 인간형은 자폐적이며, 사이키델릭한 분위기는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과 세계 사이에 일정한 벽이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세계가 세상 전체보다도 중요하며 자신의내적 세계에 의해 세상 전체를 규정되고 좌지우지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록에서의 자신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것은 곧 세상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같은 극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창밖의 여자>

그 파괴적이고 도발적이며 극단적 분위기의 절규는 자신을 가장 절절하게드러내는 것이며, 록의 아름다움의 핵심이 된다. 도저히 절규하지 않고서는견딜 수 없는 인간의 자기 회복, 인간성의 발현과 같은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그만큼 이 세게가 절규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어둡고 힘든 곳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성의 발현이 파괴적일 정도로 극단적이라는 것에 그 비극성과 불건강성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가사에 드러나는 경우는 그리 흔치않고, 악곡과의 결합을 통한 정서, 질감으로 드러난다.
가사 내용은 복잡한 내면심리를 드러낸다. 특히 팝발라드의 산문적이고 서술적인 가사들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네가 떠나가서 슬프다’ 정도의 단순한 논리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랑이든 이별이든 사람의 움직임이나 외적 사물로의 정서의 응집 (가을의 풍경이라든지, 새의 울음이라든지)보다는 한 순간의 느낌이나 분위기,감각의 포착, 복잡한 내면 심리의 포착으로 기울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사랑함에 세심했던 나의 마음이 / 그렇게도 그대에겐 구속이었소

믿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 어저다가 헤어지는 이유가 됐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희나리>

(추제호 작사·작곡, 구창모 노래)

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 그래도 우리는 좋아 좋아

알 수 없는 너의 고백이 / 내 마음을 뛰게 하지만

그런 것은 너무 어려워 싫어 (후략)

<나는 너 좋아>

(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노래)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말로 가면 갈수록 강화된다.
팝발라드, 댄스뮤직, 트로트의 세 양식의 태동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가요의 양식은 팝발라드, 댄스뮤직,트로트의 세 양식으로 정리·정립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면 그 정립이 거의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⑴ 팝발라드의 태동

스탠다드의 전쭷을 가지고 있으면서 포크와 블루스의 세련된 분위기를 수용하는 작품도 많다. 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화성을 구사하면서 주로 피아노가 주도하는 반주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장조가 주도적이고, 가사는 체언으로 시상을 응축하기보다는 용언으로 서술적으로 마무리하여 말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주는 경향이 주도한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로부터 시작하여(박건호,이범희 콤비의 신선함), 이선희 <J에게>, 최성수 <남남>, 이광조<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문세<난아직 모르잖아요>, <그녀의 웃음소리뿐> 등으로 이어진다.

⑵ 댄스뮤직의 본격화

가창력보다는 용모와 춤을 중심으로 하는 비디오형 가수가 등장하게 된다. 남자가수는 10대를 겨냥, 여자가수는 20대 이상 성인을 겨냥한다.
록의 대중화와 고고, 디스코로 이어지는 대중춤의 유행이 바탕이 된다.
나미 <빙글빙글>,<유혹하지 말아요>,<보이네> 등 건반주자 김명곤의 세련된편곡이 돋보임. 뒤를 이어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등의 등장.

⑶ 트로트의 유지와 장조 트로트의 부활

주로 여자 트로트가수가 주도한다. 정통 트로트 분위기의 김연자, 스탠다드와 결합한 특이한 창법의 김수희, 심수봉등이 등장하게 된다. 퇴행적 비극성을 보다 직설적인 어법으로 노래하면서 목이 메는 듯한 창법이나 휴성의 호흡을 심하게 섞어 간드러지면서도 애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창법으로 노래한다.
뒤를 이어 주현미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같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다.
첫째, {쌍쌍파티}라는 뽕짝메들리의 대중적 인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뽕짝메들리는 익숙한 노래를 매우 단순하고 일률적인 기계적 편곡에 담아서, 동일한 템포의 리듬으로 끊임없이 들려주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노래 하나하나가 아니라 쉬지 않고 동일한 기계적 리듬의 노래가 흘러나와 시간을 채운다는 점이다. 주로 운전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일을 하면서 노래를 듣는 성인층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성인용 춤곡의 구실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번갈아 부르는 ‘쌍쌍파티’라는 발상 자체가 이러한 성인용 춤곡의 분위기를 만들어 냄)
둘째, 장조 트로트의 부활.
{쌍쌍파티}의 성공으로 데뷔한 주현미의 첫 신곡 <비 내리는 영동교>를 통해 단조트로트가 주도한 흐름을 깨고 장조 트로트의 시대를 열고, 이러한 흐름은 <신사동 그 사람>, <잠깐만>으로 이어진다.
셋째, 나훈아식 창법을 계승한 꺽는 목을 남용하는 목소리를 트로트의 대표적 창법으로 굳히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현철, 문희옥 등으로 이어지면서 두드러진다.(김수희,심수봉을 거치면서 주현미에 이르기가지 트로트는 주로 과장된 창법, 목소리 사운드의 변화로 신선함을 유지함)
넷째, 이전의 트로트보다 단순해지고 표현은 유치해졌으며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 현철<사랑은 나비인가 봐>,문희옥의 {사투리 디스코}등), 훨씬 중년의 향락적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 문희옥<사랑의 거리> 등
즉, 이는 더이상 트로트에 진지한 삶의 무게가 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요계의 다양화와 언더그라운드

텔레비젼에 연연하지 않고 한때의 인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면서,개성있는작품세계를 추구하는 대중음악인이 늘어난다. 70년대 초 포크와 록의 후예들이지만 70년대의 작품세계와 많이 다르다.
팝 세대가 40대에 이르면서 그만큼 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가요인들이 양적, 질적으로 축적되고, 수용층의 취향도 다양해진 것이다. 이들은 가요계의 중심적 흐름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콘서트와 음반판매를 통해 자신의음악세계를 고집하면서 소수의 고정수용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한다.
혹은 한때 텔레비젼에 출연하는 인기가수였으나 그 유행이 지나가버린 싱어송라이터들이 그 창작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계속 변화시키면서 언더그라운드로, 혹은 영화음악 등으로 음악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⑴ 포크 계열

가사를 중시하는 특성 때문에 대개 이 계열의 언더그라운들들은 ‘음유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포크 계열의 언더그라운드는 80년대에 들어서서는이미 그 나이가 모두 30대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포크 특유의 지적이고 맑고순수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70년대 초반과 같은 철없을 정도의 순수함은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내면으로 칩거하여 세상을 관조하는 소극적분위기를 풍기거나(입을 게으르게 움직이는 창법이 일반적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상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거나 대중가요의 일반적 관행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하는 경향을 보인다.
* 조동진 : 72년 데뷔 후 7년만에 1집 음반을 냄. (79년) <작은 배>, <행복한 사람>, <나뭇잎 사이로> 도시적 세련미와 사색적인 분위기.
* 정태춘 : <촛불>,<시인의 마을>이 실린 1집 이후에는 거의 음반으로만 활동을 해옴. 포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스탠다드를 많이 이어받고 있음. 투박함 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함.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서망부가> 등
* 해바라기 : 대중적 음악어법을 구사. 트로트적 분위기가 나는 스탠다드와결합한 <모두가 사랑이예요> 등으로부터 록의 분위기를 내는 <어서 말을 해>까지. 내용도 사랑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다.
* 신형원 (한돌) : 민중가요권의 작곡자 한돌의 작품.88년 이전까지는 민중가요와의 관계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었고 그저 특색있는 언더그라운드 포크가수로 알려져 있었음. <불씨>, <유리벽>, <개똥벌레>
* 송창식 : 대곡 분위기의 작품까지 소화했던 최전성기를 넘어서고, 80년대초 작곡자로서 <밀양 머슴 아리랑>, 김연자의 <당신은> 같은 대중적인 곡을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87년 <참새의 하루>,<담배가게 아가씨> 등에서 보통사람의 일상을 낙관적으로 긍정하는 작품을 발표. 국악에 대한 관심도 보임(진보성보다는 국악의 음색을 연구하는 정도).

⑵ 블루스, 록 계열, 록의 제 3세대

* 김창완 : 동요를 비롯하여 명랑하고 순진하면서도 참신한 작품을 발표.초기 산울림보다는 대중의 취향을 파악한 듯 참신함을 강조하면서도 대중적임.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청춘>, <안녕>* 김수철의 영화음악, 춤음악. 국악과의 결합 시도
* 신촌블루스 : 이정선을 중심으로 함. 이정선은 포크4인조 해바라기로부터 시작하여 한영애를 데리고 블루스로 변화하였고,블루스를 중심으로한 그룹 풍선을 만들어서 이광조, 엄인호 등과 활동한 성과를 바탕으로 이정선, 한영애,김현식, 엄인호, 정서용, 60년대말 소울가수 박인수 등과 신촌블루스로 활동. 정통 블루스.
* 들국화 : 전인권을 중심으로함. 우리나라 록의 최고 단계를 보여줌 음악적 세련됨. 가사에서도 록적인 인식태도도 이미 체질화된 듯, 이전보다 강하게 록적인 세계인식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자폐적인 인간형, 주관적 세계의 절대화. <오후만 있던 일요일>,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순간의 시간을 중시하는 상대적 시간관념 등.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그래 아마난 세상을 모르나 봐 /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하지만 후횐 없지 찾아 헤맨 모든 꿈 / 그것만이 내세상 /

그것만이 내세상

<그것만이 내 세상>

(최성원 작사·작곡)

기나긴 하루 지나고 대지 위에 어둠

이 오늘 오늘은 끝남을 말해주는데

오늘의 공허를 메우지 못해 또 내일로 미뤄야겠네 (후략)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조덕환 작사·작곡)

* 하드록·헤비메탈 그룹 : 백두산, 시나위, 부활, H2O등.

이들 언더그라운드는 우리나라 가요를 다양화하며 과감한 시도를 통해 가요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하는 구실을 하지만, 반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가요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와 우리나라 대중의 음악적 감수성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미국문화 추종적인 분위기를 가장 짙게 가지고 있는 부류이기도 하다.

가요의 미국화 경향의 강화와 우리말 파괴

조용필에 이르러 기존의 가요의 흐름과 록의 결합이 안정적이며, 신촌블루스나 들국화에 이르면 미국의 이른바 정통 블루스, 정통 록의 정착과 재생산이 완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트로트에서 단조스탠다드로 내려왔던 한국가요티가 전혀 나지 않는 완전한 미국화가 이루어진다. 이들에 이르면 3화음체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미국식 재즈, 블루스,록에서 사용하는 불협류의 화음들이 자유자재로 구사된다. 또한 발음이 미국식 음운으로 교체되고, 우리말의 억양과는 다른 액센트와 우리말의 흐흡을 고려하지 않은 악곡을 많이 사용한다. 심지어 일부러 우리말 가사를 들이지 않게 발음하는 경우까지도 있다.
(혜은이의 <작은숙녀>)
이런 현상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이런 것을 쓰는 것이 오히려 세련된 것이라는 느낌까지 주기도 한다. (마치 영어나 독불어의 직역투 문장이 지적인 문장인 것같은 느낌을 주는 것처럼)
예) / 날 기억 / 하는 사람 / 들을 지금 모두
나중에는 아예 영어로 된 가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우리말 파괴는 비단 대중음악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8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음악과의 동질화가 진행될수록, 포크보다는 록이, 미국음악과 더욱 동질적인 세련된 언더그라운드일수록 더욱 심하다.

눈여겨볼 80년대 중반 가요의 흐름

글. 김영대( toojazzy@nownuri.net )


한가지 전제를 깔고 시작하자. 이 연재물은 ‘댄스 음악에도 음악성이 있음’과 같은 고귀한 목적이 없다.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댄스 뮤직은 그저 춤을 추기 위해 존재하는 enjoyable한 음악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댄스 뮤직이 무언가. 어찌 보면 대중음악이라는 본질의 극한에 닿아 있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장르일 것이다. 그저 들으면 되고 그저 춤을 추면 된다. 사실 이것이 본질이다. 물론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선 일방적으로 양산되는 댄스뮤직에 대해 헤게모니 운운하는 극단적 이분법이 적용되어, 록과는 화해할 수 없는 반대편에 위치하게 되었다. 대중 음악부문 중 가장 활발히 수출되어 잘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기본적인 완성도를 논할 수준은 지났다고 보는 시각이 있기도 하지만 예술을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보는 현실이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한가지,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음악 그 자체를 뒤로한 사회적인 논쟁에 불과했다. 누가 더 많이 팔고, 누가 더 많이 차지하고 누가 더 많은 팬을 확보하느냐. 결국엔 그런 문제들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댄스 뮤직을 사회현상이 아닌 음악 그 자체로 받아들여본 시도는 있었던가. 물론 있기는 있었다. 소방차-서태지-HOT로 이어지는 지극히 단순한 계보들. 비록 방송국의 단골 메뉴였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에 빠진 다양한 음악적 흐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연재물에서는 바로 그런 아쉬움들을 메워갈 것이다. 한국 음악사에서 빠질 수 없는 댄스 뮤직앨범들과 문제작들, 그리고 그것들에 영향을 끼친 음악적 흐름들과 뮤지션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무작정한 설명이 아닌 앨범을 따라가며 들어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뜻대로 잘 풀려 나갈지는 미지수이다. 아무쪼록 격려와 질책 부탁드린다.


[눈여겨볼 80년대 중반의 흐름-조용필,전영록,이문세,소방차,김완선,박남정]


필자는 한국 댄스 뮤직의 본격적인 시작을 89년에서 90년까지로 보고 있지만 그 실마리는 이미 80년대 중반에 제공이 되었다는 점을 우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당시에는 ‘댄스 뮤직’이라는 개념은 오로지 미국의 팝음악에만 적용되는 듯한 인상이 강했고 흔히는 그저 ‘보통의 노래보다 빠른 정도의 신나는 음악’이라는 정도였다. 그나마 미디 등의 보급 이전으로 그룹사운드 위주로 음악이 편곡되다보니 오히려 댄스보다는 록에 가까운 음악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조용필의 노래들이 그랬고 유영선과 커넥션의 음악이 그랬다. 보통의 노래들보다 리듬이 빠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댄스곡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의 음악인들 중에는 최신조류에 가장 민감한 인물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전영록이었다.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등 지루한 구성을 탈피하여 가벼운 터치와 리듬, 단순한 멜로디속의 다이나믹한 전개가 특징이었던 전영록의 업템포 곡들은 상당부분 현재의 댄스 음악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발라드 음악의 대표주자로 여겨졌던 이문세 역시 간간이 댄스적인 느낌을 주는 곡들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붉은 노을>과 같은 곡은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템포를 가진 곡이었고 <이밤에>는 한창 유행하던 go-go풍의 전형적인 댄스곡이었다. 하지만 댄스 뮤직을 전면으로 내세운 팀들은 이후에 등장한다. 바로 소방차, 김완선 그리고 박남정. 이들이 이전의 뮤지션들과 전적으로 달랐던 것은 바로 가수가 아닌 댄서출신이었다는 점이었다. 전영록만 하더라도 발라드와 댄스를 넘나드는 싱어송 라이터였고 화려한 무대매너를 보여주긴 했지만 특별히 안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적어도 안무가 노래만큼 비중을 차지한다던가(소방차 <어젯밤 이야기>, <통화중>, <하얀바람>) 혹은 안무 때문에 음악이 히트하는 상황도 만들어졌다.(박남정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소방차의 쉬운 멜로디와 가벼운 동작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어서 인기가 높았고 김완선과 박남정은 외국의 그 어느 스타들 못지 않은 다양한 댄스 테크닉을 선보이며 젊은층을 열광시켰다. 이들은 내놓는 앨범마다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 80년대말까지 끊임없는 인기행진을 계속한다.



      
[JH] 김완선… 그 이름 오랜만에 듣네요.. 현대음률 속에서~ 순간속에 보이는… 이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08월08일-
[다시] 오늘밤에,,,오늘밤?? 그런 제목이었던듯한데요. 김완선은 들을수록 너무 좋더군요 ^^;;; -08월08일-
[moz] 리듬속에 그 춤을.. 이었던 것 같은데요. 예전에 학교 밴드의 보컬을 하던 친구와 이야기나눴던 주제가 김완선은 워낙에 뒤에서 받쳐주는 백업들이 빵빵해서 음악적 수준이 뛰어날 수 밖에 없었죠. 노래실력만 좀 더 좋고 눈만 좀 이상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평가가 내려졌을지도… -08월08일-
[moz] 오늘 Kuwata Band의 Skipped Beat를 다운받아 들어봤는데 소방차의 G까페가 이노래를 표절한 거구만요. -08월08일-
[Willa] 김완선 그 노래는 리듬속의 그 춤을..이 맞아요. 87년 2집앨범에 들어 있죠. 이 앨범에선 나홀로 뜰앞에서라는 청승맞은 댄스곡도 히트했었죠…. -08월08일-
[Eva] 오늘밤은 김완선 데뷰곡이죠… -08월08일-
[moz] 당시 김완선의 앨범에서 키타는 신대철이 맡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 앨범에 에디반헬런이 참여했던 케이스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08월09일-
[Faith] 김완선의 리듬속의 그춤을 이 노래를 신중현이 작곡했단 사실 아시는 분이 몇이나 될련지.. 1집땐 산울림의 김창훈이, 2집땐 신중현이, 3집땐 이장희가 나섰었죠.. -08월20일-

80년대의 음악, 들국화, 그리고 서태지…

http://www.fancyria.com/board/read.cgi?board=bipyong&y_number=191&nnew=2

* 상당히 과격한 주장이긴 한데 의미있기도 한것 같아 펍니다. *

먼저 여러 가지 화끈하게 씹어주고 싶은 현안들이 널려 있지만, 우선 대한민국 음악사를 왜곡하고 정신병자 정치하는 놈들 수준으로 타락시켜 놓으려는 서태지와 빠순이들의 수작을 확실하게 뭉게야 하겠다. <난 서태지 수하에서 맹목적으로 따라는 그 기집년들을 빠순이라 부른다.>

밝은미친세상님은 대한민국 음악사에서 한국음악의 전성기를 1980년 직후의 조용필 시절과 90년의 서태지 시절이라 하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1960년대 신중현 선생이 발굴한 펄시스터즈와 김추자가 1탄이면, 80년대초의 대학가요제에서 잇달아 등장한 활주로와 블랙테트라 즉 송골매, 그리고 마그마로 등장한 조하문, 홍서범, 건아들 등과 몇 년 선배출신인 산울림 등 대학가요제 출신 록그룹들과 사랑과 평화, [벗님들] 등의 실력파들이 오버로 대거 진출하여 무교동 나이트클럽을 인기리에 활약했던 시절이 2탄이라고 안다.

즉, 조용필씨와 송골매가 동시에 누볐던 시절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들국화, 김현식, 유재하, 신촌블루스, 봄여름가울겨울, 즉 동아기획사의 ‘하나옴니버스’로 대표되는 언더음악 시기가 3탄이다. 여기에 다섯손가락, 동물원, 빛과 소금, 시인과 촌장, 이문세를 필두로 한 대중가요까지 포함된다.

그럼, 서태지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대형사고이지 뭐~!

언제나 대한민국에는 팝음악은 그야말로 매니아용 음악이었고, 대부분의 대중들은 조용필씨가 우승을 연거푸 거머쥐던 [가요톱10]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문제는 서태지 빠순이 지랄년들은 이 시절을 ‘뽕짝과 발라드만의 시절’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자, 1980년대에는 ‘젊음의 행진’이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당시 10와 20대를 두루 걸치는 음악인들이 주로 나와서 개그도 하고 음악도 했는데 이때 회고되는 음악인들이 장난이 아니다. 립싱크는 거의 통용되지 않던 상황에서 대학의 탈춤, 민속음악패들이 가끔 출연했다 사라지질 않나, 손수 제작한 뮤직비디오도 틀어 놓고 실력 좋은 그룹들이 연주하다가 가기도 했었던, 물론 [젊음의 행진]의 최고 수혜자는 뭐니 뭐니 해도 ‘전영록’이 아니었나 회고된다. 아니라면 후반기부터 방송을 시청한 나의 부족함이라고 용서해주면 좋겠다.

그러나 전영록조차도 [젊음의 행진]에 출연하면 ‘불씨’같은 록음악을 불러제꼈고, 1980년대에는 [강변가요제]에서 대한민국 음악공모전사상 최대의 이변이라 할 수 있는 ‘티삼스’의 ‘매일 매일 기다려’의 대상수상이라는 일도 있었고, 김수철이라는 희대의 ‘작은 거인’이 뽕짝성으로 오해를 샀던 국악적인 곡들과 록과 원맨밴드(서태지가 원맨밴드? 이 양반 앞에서 쇼를 부려?)를 동반해서 [가요톱10]을 누볐었다.

발라드라고 우스워?…

그 당시 폭발적인 가창력의 여성싱어들이 대거 등장했었으니 이선희와 정수라가 있었고 이문세씨의 최전성기이다. 그렇다고 촌티 나냐? 하하하! 가소로운 서태지 빠순년들을 보았나. 지금에는 아무나 다 하는 스테이지 매너를 그 맹숭맹숭하던 1980년대에 선보인 축축한 보컬로서 아메리카 유럽의 클럽가수를 연상시켰던 나미도 있다. 테크노? 산울림의 김창완씨도 슬금슬슴 테크노를 준비하고 있었다지만 당대 한국적 테크노의 시발이 될 뻔도 했던 ‘김학래’가 있다. 물론, 아깝게 사라졌지만 ‘해야 해야’라는 단 한 곡만으로도 서태지놈의 ‘하여가’의 어설픈 태평소나 양현석이 만들어 놓은 원타임의 ‘쾌지나 칭칭나네’는 발가락의 때도 못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분은 개그맨 이성미씨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모르면 말고…)

그렇다.

1980년대는 음악성과 음악인의 실력, 무대매너와 요연한 절규마냥 묻혀버린 다양성의 시절이었다. 그러면 그런 80년대가 꽁짜로 나왔을까? 1980년대, 비디오 테잎과 M-TV, 그리고 칼라공중파 방영의 시대가 열리면서 막 칼라방송을 시작한 방송국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대한민국 음악의 전성기 2탄으로서 음악열기에 스텝을 밟기 시작했는데…
아다시피 그 당시는 지금처럼 음악관련 프로와 앨범 뮤직비디오 관련상품으로 인한 막대한 금권시장이 형성되지 않던 시절이라 음악 프로그램은 KBS의 [젊음의 행진] [가요톱텐]이 장악하는데, 당시 김광한씨라는 걸출한 디제이겸 음악애호가가 의기투합해 KBS에서 일을 하면서 막 활발히 활동하던 M-TV의 최신 뮤직비디오를 소개하면서 팝음악들이 결코 심심치 않게 소개되었고, 이로 인해 낮시간에 팝음악을 중점으로하던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가 인기를 얻는다.

이것이 80년대 양대 DJ들의 시대였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CD 좀 수집했다고 평론가인양 수작부리거나 영화잡지에 기어 나와서 쉽지 않은 용어 남발하는 상태와는 똑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로 인하여 마이클잭슨이 휩쓸던 시절에 유독 한국에서는 ‘듀란 듀란’과 ‘웸’이라는 브리티쉬출신 뉴웨이브 록그룹들이 지금의 빠순이만큼의 팬층을 형성하며 인기몰이를 했고, 주로 방송보다는 십대잡지를 통한 팬들의 열기가 교류되었으니 지금도 아련히 기억나는 ‘하이틴’ ‘음악세계’가 바로 그때의 잡지들이다.

사정이 이러하였던 바로 그때 그 시절의 그런 음악계의 현황은 공중파방송(KBS로 회고되는데…)에서 미국의 그래미상을 특집으로 신년 프로그램으로 편성하여 일류급 성우들의 더빙으로 방송하였던 것이다~!

어머나!!!???? 진짜야?? *_* T_T… *.*… !!!.

생각을 해보라…

그래미시상식에서 보이죠지가 한국성우의 더빙으로 마이크 잡고 소감발표하는 것이 특집방송으로 케이블도 아닌 KBS에서 틀어지는 안방극장을… 80년대에는 그래미시상식이 아카데미시상식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그만큼 한국 음악층의 수준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여기서 결론은 분명해진다.

그 열악했던 1980년대는 사실 대한민국 음악문화가 가장 최고조였던 시절이었고 상급이었던 것이다. 자, 여기서 밝은미친세상님이 조용필과 80년대를 회고하고 중요시하는 것은 결코 서태지놈을 음해하거나 비아냥거리거나 비방하는 것과는 180도 상황이 다른 것이란 것을. 1980년대가 최고의 음악문화였었기 때문인 것이지 결단코 빠순이들의 그 드럽고 추잡한 오빠놈을 씹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1980년대가 무조건 때려잡는 시절이라고?.. 그래서 우리 90년대 N세대는 상관이 없다고? 웃기는구나. 80년대는 한 마디로 심의위원회가 막강하던 시절이지. 지금이라고 근본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적어도 잔혹물과 포르노 등이 막혀 있는 것은 21세기라는 현재도 달라진 것이 없다.

물론 조PD나 DJ D.O.C.의 가사는 꿈도 못꿨다만, 자꾸 웃기는 건 그 정도로 가사가 풀린 2000년도의 N세대라는 것들은 독한 가사로 풍자와 공격을 개시하는 음악인들은 무시하고 붕어가수들만 좋아하냔 말이다.

1970년대에 한대수나 김민기씨가 당했던 수난처럼 앨범 자체가 파기 당하는 상황도 아니라서 조금만 노력하면 앨범가게를 뒤져서 찾아서 들을 수가 있는데도 자신들을 ‘에이리언’인양 자기최면을 걸어놓은 것들을 보면 서태지놈 이후로 막대하게 망가진 상태임을 절감케 된다.

들국화의 멤버가 대마초로 입건되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값을 치루고 나왔다. 그럼 서태지놈은 어떻한가?.. 온갖 표절의혹에도 굳건한 슈퍼스타라는 부도덕함과 십대들에 대한 무책임한 선동으로 빠순이를 양산하고 있으면서도 오늘도 자신의 허영과 돈을 위해서 아이들을 선동하고 있다.

죄란 죄값을 치룬 과거의 죄보다도 당연히 값을 치루지 회피하고 부정하는 죄가 더욱 무겁고 악랄하다. 그리고 마약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문제이고, 한도를 넘지 않는 한 개인문제를 대중적인 문제로 확산시키는 것은 부적절함이 상식이다.

그러나 서태지놈은 어떻한가?..

서태지놈이 만들어 놓은 협소한 빠순이 양산 산업시스템은 수많은 아이들을 정신적인 벼랑과 황폐화로 몰아넣고 있다. 서태지놈의 죄는 서태지놈 자신만 치뤄야 하는 죄에 더해, 수많은 아이들을 지옥길로의 길동무를 삼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의 들국화는 음악외적인 쇼/오락 비즈니스와 비주얼이벤트로 십대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조종하는 짓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음악인의 기본인 음악성과 실력, 그리고 한국적인 정체성을 꽃 피운 음악인들이었다. 들국화는 신이 아니다. 기타 실력은 돋보이지 않지만 들국화는 그룹을 이루는 멤버들의 조화와 어울어짐을 주제로 한 음악인들이다.

서태지놈의 훌륭한 점은, 단지 비스티보이즈, 테이스트, 펄잼, 사이프레스 힐, 콘, 런 디엠시의 훌륭한 점을 칭찬해야 한다는 구호의 돌연변이로만 다가온다. 들국화는 적어도 서태지놈과 비교할 시에는 신에 근접하고도 남으리라.

지금, 표절꾼에다가 빠순이 조직보스, 거짓말장이, 돈벌레, 미제/일제 환자인 서태지놈이 들국화보다도 위대하거나 동등하다는 발언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나쁜 짓이다! 단지 돈을 벌었다는 것이 인기이고, 감성을 콘트롤 당하는 빠순이들이 감격파 음악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폐기물들이다. 왜냐? 그것은 죄악의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서태지놈을 이해는 못해도 신경끄지 못하는 것은 저런 벼락 맞을, 죄악을 용납해선 안되는 당연한 인간의 도리 때문이다. 저것들은 내가 가슴으로 사랑하는 음악을 살해하고 있는 것이다..

저것들은 다름 아닌….
문화사기단의 안티사이트 쥔장이며 풍선. 노란수건 흔들고 미친듯이 머리 흔들어되며 발광하는 넘들이다.

솜나무 12/19[05:51]

아..그리고 한마디 빼먹었는데, 서태지 병역 문제에 관해서 말씀들이 오갔는데 그건 분명 미친세상님의 잘못입니다. 국민의 의무는 곧 개인의 의무며 문제지 그 문제 자체를 가지고 서태지를 논하는 건 억지가 맞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대중적인 문제로 확산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남깁니다.

[다시] 음 갑자기 저기 욕을 먹고 있는 평론가들은 누가누가 꼽힐까 궁금해지네요.. -08월08일-
[LUPIN] 동시대가 아닌 다음세대 사람들에게 그 시대를 이해시키는건 아메리칸 top40에서 캐시 케이즘 목소리 빼고 노래 녹음하는것 만큼이나 어려운일 같군요 -08월09일-
[moz] 우리나라 가요계의 문제점은(in my humble opinion)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이 가요계 내부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팝음악의 본토인 영미권(주로 미국)에서 유입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음악적 단절감이 아닌가 싶네요. 후대에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로는 기껏해야 신중현 정도나? 이도 아닌듯 하기도 하고…. 암튼 가요를 잘 안듣는 입장에서 감놔라 대추놔라 할 처지도 아닌 저입니다만… -08월09일-
[moz] 80년대 또 하나의 야릇한 가수가 있었는데 이재민이라고 기억하십니까? <골목길>, <그 여인의 이름은>같은 곡들을 불렀는데 어찌 들으면 초기 크래프트베르크 스타일의 테크노팝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요즘의 라운지나 로우파이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유로댄쓰 얼치기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비주류의 음악을 했었죠. -08월10일-

New Romantics 와 패션

1980년대의 뉴로맨티시즘은 무엇인가?

뉴로맨티시즘(New Romanticism)은 1980년대 초기 런던의 나이트클럽에서 제조된 사조이다. 펑크(Punk)의 반(反)패션의 무정부주의적인 어법과 달리 몸단장에 보다 관심을 가졌던 창조적인 군상들로 이루어진 이 그룹 내에서의 활동가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구하곤 했다.

뉴로맨틱스는 사실적인 혹은 공상적인 테마와 헐리우드의 화려함을 차용하여 자신들의 외모를 꾸몄다. 현란하고, 칼라풀하고, 드라마틱한 외모를 위해 역사적 시기와 연관된 주름장식과 관능적인 옷감을 사용하였다. 펑크족과 대비되어 이들은 매력적이고, 사치스럽고, 아름답고, 나르시즘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클럽

런던의 나이트클럽은 주요 행사를 주로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에 열던 포맷을 바꾸기 시작했다. 소호의 클럽 “Gossips”는 화요일에 ”Bowie 의 밤“을 기획하기 시작했고 틈새시장의 기호에 맞춘 스페셜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폭넓진 않지만 소수가 열광하는 취향이 마련되었다.

이전의 펑크 활동가들이 점차 의상에 있어 “화려함(glamour)” 과 “로맨스(romance)”를 취하였고 클럽은 그들이 뽐낼 장소를 제공했다. 이러한 행사가 Blitz 와 St. Moritz 와 같은 클럽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이것이 로맨틱 무브먼트의 시작으로 인식되고 있다.

Adam and the Ants 1981.jpg
Adam and the Ants 1981” by http://coolinthe80s.com/music/adam-and-the-ants/. Licensed under Wikipedia.

Adam and the Ants의 대표적인 New Romantics 패션

뉴로맨틱 의상의 디자이너들

로맨틱 의상의 초기 디자이너들은 Vivienne Westwood, Colin Swift, Stevie Stewart, David Holah 등을 꼽을 수 있다. Westwood 는 잔뜩 멋부린 영국의 섭정기 (영국: 1811-20; 프랑스: 1715-23)의 디자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나중에 자신만의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특히 Adam and The Ants 를 위해 많은 디자인을 창조했다.

뉴로맨틱 팝그룹들

언론매체를 통해 그러한 복장이 빠르게 주류 패션에 전파되어갔다. 그리고 Adam And The Ants, Spandau Ballet, Duran Duran, Visage 와 같은 그룹이 차트 정상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David Bowie, Bryan Ferry, Boy George 등은 모두 그 시대의 영향력있는 싱어들이었다.

모험가 스타일의 해적 룩

전형적인 로맨틱 스타일은 해적 스타일이었다. 잔뜩 주름 잡힌 소매의 해적 셔츠는 값비싼 직물로 제조되었다. 연극적인 느낌이 무늬가 들어간 옷감으로 만든 벨벳재킷은 인기를 얻어 많은 재킷에 카피되었다. 뉴로맨틱의 외모는 개인적이었으며 통일성을 지향하는 펑크와는 달랐다. 뉴로맨틱스는 헐리우드의 1930년대와 1950년대의 판타지를 추구했다(그러한 의미에서 New 라는 단어가 붙었다).

시장 효과

글래모는 1980년의 형식이 되었고 의상은 정제되어가면서 패션가에 속속 등장했다.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http://www.fashion-era.com/new_romantics1.htm 에서 발췌, 번역 및 편집

[소설]잃어버린 얼굴(The Bourne Identity, 1980)

Ludlum - The Bourne Identity Coverart.png
Ludlum – The Bourne Identity Coverart” by From Amazon..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Robert Ludlum이 1980년 발표한 스파이 스릴러로 원제는 그 유명한 The Bourne Identity다. Jason Bourne이라는 기억을 잃은 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사나이의 모험과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이후 The Bourne Supremacy(1986년), The Bourne Ultimatum(1990년)까지 총 3부작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이다.

비록 2002년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사실 원작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전직 킬러’라는 설정만을 따왔을 뿐 이야기는 상당부분 원작과 다르다. 이렇듯 원작과 영화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 복잡한 내러티브의 원작을 한정된 상영시간의 영화에 담을 수 없는 점. 둘째, 냉정시대를 배경으로 한 원작을 2002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옮기기에는 관객들의 정서가 많이 달라졌다는 점. 셋째, 위 둘의 이유와 연장선상에서 Carlos라는 Bourne의 천적을 영화에서는 제외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원작에서 등장하는 Carlos는 Carlos Jackal이라 알려진 실존인물 Ilich Ramirez Sanchez을 염두에 둔 캐릭터다. 이 작품에서 Bourne은 냉전시대 악명 높은 극좌 테러리스트였던 그와 라이벌로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암살작전의 암호명이었던 트레이드스톤은 바로 Carlos의 검거작전의 암호명이다. 이러한 구도로 인해 원작은 선악의 경계가 모호했던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악의 구도를 명확히 하고 있다. 또 하나 차이가 나는 캐릭터는 바로 Marie의 존재감이다. 영화에서 수동적이고 어찌 보면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Marie는 원작에서 적극적으로 Bourne의 정체성을 찾아주려는 똑똑한 경제학 박사로 등장한다. 그녀의 본업이 국제금융투기집단의 횡포를 막으려는 캐나다 정부요원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요컨대 짧은 상영시간의 영화에 담을 수 없었던 많은 디테일들이 소설에는 담겨져 있으므로 영화를 재밌게 본 분이라면 충분히 그 재미를 즐길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국내에서는 고려원에서 1992년 1부를 발표한 이래 3부까지 총 여섯 권이 발간되었다. 다만 절판되어서 번역본으로 읽으시려면 헌 책방을 뒤지시는 방법밖에는 없을 듯 하다.

* 번역본 표지에 등장하는 Richard Chamberlain의 모습은 1988년 옮겨진 TV시리즈의 한 장면이다.

참고사이트
http://en.wikipedia.org/wiki/The_Bourne_Identity_%28novel%29
http://blog.naver.com/hidehiro/100006575946
http://pennyway.net/264

The top 100 British films as voted in a poll by the British Film Institute:

1. “The Third Man” (1949, Carol Reed) [제3의 사나이]
2. “Brief Encounter” (1945, David Lean) [밀회]
3. “Lawrence of Arabia” (1962, David Lean) [아라비아의 로렌스]
4. “The 39 Steps” (1935, Alfred Hitchcock) [39계단]
5. “Great Expectations” (1946, David Lean) [위대한 유산]
6. “Kind Hearts and Coronets” (1949, Robert Hamer)
7. “Kes” (1969, Ken Loach) [케스]
8. “Don’t Look Now” (1973, Nicholas Roeg)
9. “The Red Shoes” (1948, Michael Powell, Emeric Pressburger) [분홍신]
10. “Trainspotting” (1996, Danny Boyle) [트레인스포팅]
11. “The Bridge on the River Kwai” (1957, David Lean) [콰이강의 다리]
12. “If…” (1968, Lindsay Anderson)
13. “The Ladykillers” (1955, Alexander Mackendrick) [레이디킬러스]
14. “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 Karel Reisz)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15. “Brighton Rock” (1947, John Boulting) [브라이튼 락]
16. “Get Carter” (1971, Mike Hodges)
17. “The Lavender Hill Mob” (1951, Charles Crichton) [라벤더 힐의 도둑]
18. “Henry V” (1944, Laurence Olivier) [헨리 5세]
19. “Chariots of Fire” (1981, Hugh Hudson) [불의 전차]
20. “A Matter of Life and Death” (1946 Michael Powell, Emeric Pressburger)
21. “The Long Good Friday” (1980, John Mackenzie)
22. “The Servant” (1963, Joseph Losey) [하인]
23. “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 Mike Newell)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24. “Whisky Galore!” (1949, Alexander Mackendrick)
25. “The Full Monty” (1997, Peter Cattaneo) [풀 몬티]
26. “The Crying Game” (1992, Neil Jordan) [크라잉 게임]
27. “Dr. Zhivago” (1965, David Lean) [닥터 지바고]
28. “Monty Python’s Life of Brian” (1979, Terry Jones) [몬티 파이슨의 브라이언의 생애]
29. “Withnail and I” (1997, Bruce Robinson) [위드네일과 나]
30. “Gregory’s Girl” (1980, Bill Forsyth)
31. “Zulu” (1964, Cy Endfield) [줄루 전쟁]
32. “Room at the Top” (1958, Jack Clayton) [연상의 여인]
33. “Alfie” (1966, Lewis Gilbert) [알피]
34. “Gandhi” (1982, Richard Attenborough) [간디]
35. “The Lady Vanishes” (1938, Alfred Hitchcock) [사라진 여인]
36. “The Italian Job” (1969, Peter Collinson)
37. “Local Hero” (1983, Bill Forsyth) [로컬 히어로]
38. “The Commitments” (1991, Alan Parker) [커미트먼트]
39. “A Fish Called Wanda” (1988, Charles Crichton)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
40. “Secrets and Lies” (1995, Mike Leigh) [비밀과 거짓말]
41. “Dr. No” (1962, Terence Young) [007 닥터 노]
42. “The Madness of King George (1994, Nicholas Hytner) [조지왕의 광기]
43. “A Man for All Seasons” (1966, Fred Zinnemann) [4계절의 사나이]
44. “Black Narcissus” (1947, Michael Powell, Emeric Pressburger) [검은 수선화]
45. “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1943, Michael Powell, Emeric Pressburger)
46. “Oliver Twist” (1948, David Lean) [올리버 트위스트]
47. “I’m All Right Jack” (1959, John Boulting)
48. “Performance” (1970, Nicholas Roeg, Donald Cammell) [퍼포먼스]
49. “Shakespeare in Love” (1998, John Madden) [셰익스피어 인 러브]
50. “My Beautiful Laundrette” (1985, Stephen Frears)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51. “Tom Jones” (1963, Tony Richardson) [톰 존스]
52. “This Sporting Life” (1967, Lindsay Anderson) [고독의 보수]
53. “My Left Foot” (1989, Jim Sheridan) [나의 왼발]
54. “Brazil” (1985, Terry Gilliam) [여인의 음모]
55. “The English Patient” (1996, Anthony Minghella) [잉글리쉬 페이션트]
56. “A Taste of Honey” (1961, Tony Richardson) [꿀맛]
57. “The Go-Between” (1970, Joseph Losey)
58. “The Man in the White Suit” (1951, Alexander Mackendrick) [흰 옷의 사나이]
59. “The Ipcress File” (1965, Sidney J Furle) [국제첩보원]
60. “Blow Up” (1966, Michelangelo Antonioni) [욕망]
61. “The Loneliness of the Long Distance Runner” (1962, Tony Richardson) [장거리 주자의 고독]
62. “Sense and Sensibility” (1995, Ang Lee) [센스, 센서빌리티]
63. “Passport to Pimlico” (1949, Henry Cornelius)
64. “The Remains of the Day” (1993, James Ivory) [남아있는 나날]
65. “Sunday, Bloody Sunday” (1971, John Schlesinger)
66. “The Railway Children” (1970, Lionel Jeffries) [철로변 아이들]
67. “Mona Lisa” (1986, Neil Jordan) [모나리자]
68. “The Dam Busters” (1955, Michael Anderson)
69. “Hamlet” (1948, Laurence Olivier) [햄릿]
70. “Goldfinger” (1964, Guy Hamilton) [007 골드핑거]
71. “Elizabeth” (1998, Shekhar Kapur) [엘리자베스]
72. “Goodbye, Mr Chips” (1939, Sam Wood) [굿바이 미스터 칩스]
73. “A Room with a View” (1985, James Ivory) [전망 좋은 방]
74. “The Day of the Jackal” (1973, Fred Zinnemann) [자칼의 음모]
75. “The Cruel Sea” (1952, Charles Frend)
76. “Billy Liar” (1963, John Schlesinger) [거짓말장이 빌리]
77. “Oliver” (1968, Carol Reed) [올리버]
78. “Peeping Tom” (1960, Michael Powell)
79. “Far From the Madding Crowd” (1967, John Schlesinger)
80. “The Draughtsman’s Contract” (1982, Peter Greenaway)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81. “A Clockwork Orange” (1971, Stanley Kubrick) [클락웍 오렌지]
82. “Distant Voices, Still Lives” (1988, Terence Davies)
83. “Darling” (1965, John Schlesinger) [다알링]
84. “Educating Rita” (1983, Lewis Gilbert) [리타 길들이기]
85. “Brassed Off” (1996, Mark Herman) [브래스드 오프]
86. “Genevieve” (1953, Henry Cornelius) [즈느비에브]
87. “Women in Love” (1969, Ken Russell)
88. “A Hard Day’s Night” (1964, Richard Lester)
89. “Fires Were Started “(1943, Humphrey Jennings)
90. “Hope and Glory” (1981, John Boorman)[희망과 영광]
91. “My Name is Joe” (1998, Ken Loach)
92. “In Which We Serve” (1942 Noel Coward, David Lean) [토린호의 최후]
93. “Caravaggio” (1986, Derek Jarman) [카라바지오]
94. “The Belles of St Trinian’s” (1954, Frank Launder)
95. “Life Is Sweet” (1990, Mike Leigh)
96. “The Wicker Man” (1973, Robin Hardy)
97. “Nil By Mouth” (1997, Gary Oldman)
98. “Small Faces” (1995, Gillies Mackinnon)
99. “Carry On Up the Khyber” (1968, Gerald Thomas)
100. “The Killing Fields” (1984, Roland Joffe) [킬링 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