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앨범

Rain Do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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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Waits와 Iggy Pop과 Jim Jarmusch는 ‘삼란성 쌍둥이’가 아닐까 생각될 만큼 서로 다르게 생겼으면서도 분위기가 닮았다. 그래서인지 Tom과 Iggy는 Jim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고 Jim은 Tom의 음악을 그의 영화에 즐겨 썼다. 또 그래서인지 Tom의 노래가 Jim의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상황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Tom의 대표작 Rain Dogs는 그런 면에서 음악으로 듣는 Jim의 영화와도 같은 분위기다. 1985년 9월 발매된 이 앨범은 “도시에서 퇴거당한 이들”이라는 느슨한 콘셉트를 가진 앨범이어서 더더욱 영화적이다.1 스타일적으로는 블루스와 뉴올리언즈 분위기가 물씬 나는 관악 연주가 어우러져 서커스 악극단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Tom은 이 앨범의 대부분의 곡을 1984년 가을 맨해튼에 있는 한 지하방에서 두 달 동안에 거쳐 썼다고 한다. 그리고 앨범 작업에 도시의 분위기를 가미하기 위해 거리에서의 소음이나 카세트레코더에서 나오는 모호한 소음을 녹음해 두었고, 후에 앨범 곳곳에 배치되었다. 또한 이국적 분위기를 위해 다양한 악기가 동원되었는데 이 중에는 마림바, 아코디언, 더블베이스, 트럼본, 밴조 등이 있다. 이러한 음악적 기조는 신디싸이저와 드럼머신이 지배하던 1980년대 중반의 대중음악계에서는 매우 이채로운 일이다.

앨범 녹음작업 또한 매우 즉흥적이었다고 한다. 기타 연주를 맡았던 Marc Ribot의 회고에 따르면 밴드는 녹음에 들어가기 전에 연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Tom은 스튜디오에서 그들에게 어쿠스틱기타로 곡을 연주해줬다. Tom은 곡의 방향을 위한 제안을 하긴 했지만 처음이나 두 번째 테이크에서 어떤 곡이 나올지에 대해서는 그때의 상황에 의존했다. Tom은 이 앨범에 The Rolling Stones의 Keith Richards도 초대했다. Tom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동물과도 같은 감각으로 곡 작업에 대한 제안을 했다고 한다.

굉장히 익숙한 앨범 커버는 스웨덴의 사진작가 Anders Petersen이 함부르크에 있는 홍등가 Reeperbahn 근처에 있는 Café Lehmitz에서 1960년대에 찍은 사진 연작 중의 하나를 사용한 것이다. 사진 속의 남녀는 Rose와 Lily로 불리웠다 한다.

앨범 듣기

  1. 실제로 이 컨셉트는 Martin Bell 감독의 1984년 다큐멘터리 Streetwise에 영감 받아 생각해낸 것이라 한다

All Mod C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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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am – All Mod Cons“. Licensed under Wikipedia.

요 며칠 The Jam의 All Mod Cons를 즐겨듣고 있다. 1978년 밴드의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으로 발매된 이 작품은 밴드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앨범의 제목은 “일체의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를 의미하는 “all modern conveniences”라는 주택 광고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광고 카피를 줄인 숙어다. 밴드는 이 표현을 자신들의 모드 리바이벌 스타일의 작품에 일종의 말장난으로 가져다 붙인 것이다.

앨범 전체 수록곡은 The Kinks의 “David Watts”의 커버 버전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소위 “브리티시 인배이전(British Invasion)”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타이틀곡인 “All Mod Cons”는 성공한 이들에게 싹싹하게 굴다가 그들이 실패하는 즉시 떠나버리는 변덕스러운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Mr. Clean”은 Paul Weller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워킹(Woking)이라는 영국 남부 도시의 외곽에 있는 주식거래 지역에서 느낀 이미지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다.

“계급 문제는 당시 제가 매우 중요했어요. 워킹의 외곽에는 주식중개인 벨트가 있었죠. 그래서 난 이미지를 가지고 씨티(The City)에 가기 위해 워털루 역까지의 기차를 잡아타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미스터 클린은 그런 나의 시각이었죠.”

앨범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의 발라드 “English Rose”는 오리지널 앨범 발매 시에는 제목도 가사도 없었다고 한다. Paul 은 이 노래에는 음악 자체 없이는 가사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싱글로 발매된 앨범의 마지막 곡 “Down in the Tube Station at Midnight”은 영국 차트 15위까지 오르면서 그룹의 발표작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곡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곡은 지하철을 이용하여 아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다가 극우 깡패들에게 얻어맞는, 한 젊은이의 독백으로 구성된 곡이다.

Q매거진은 “가장 위대한 100개의 영국 앨범”에서 이 앨범을 50위로 선정했다. 또한 NME는 2013년의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219위로 선정했다.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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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82년 3월 24일 Talking Heads의 다섯 번째 앨범이자 더블 라이브 앨범인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1977년 11월 17일 매사추세츠州 메이너드에 있는 ‘WCOZ 노던 스튜디오’, 1978년 8월 23일 일리노이즈州 시카고에 있는 ‘파크 웨스트(The Park West)’, 1978년 9월 16일 캘리포니아州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보딩 하우스(The Boarding House)’, 1978년 12월 18일 오하이오州 클리브랜드의 ‘아고라(The Agora)’, 1979년 8월 24일 매사추세츠州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 퍼포먼스 센터(Berklee Performance Center)’, 1979년 11월 17일 뉴저지州 파사익에 있는 ‘캐피톨 극장(The Capitol Theater)’, 1980년 8월 27일 뉴욕시에 있는 ‘센트럴 공원’, 1980년 11월 8일부터 9일까지 뉴저지州 체리힐에 있는 ‘에메랄드 시티’, 1981년 2월 27일 일본 동경에 있는 ‘썬플라자 콘서트 홀’에서 녹음되었다. 연주되는 곡들은 “Talking Heads: 77”,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 “Fear of Music”, “Remain in Light” 등 그룹이 이전에 낸 스튜디오 앨범의 수록곡들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1977년 11월부터 1981년 2월까지의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한 열일곱 곡을 담은 이 더블 앨범은 반절은 네 명의 밴드 멤버로, 나머지 반절은 게스트 뮤지션들의 도움을 받아 총 10명의 진용으로 진행된 공연을 담은 것이다. 게스트 뮤지션으로는 기타에 Adrian Belew, 키보드에 Bernie Worrell, 백보컬에는 Dolette McDonald와 Nona Hendryx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 앨범의 카세트 버전에는 “Cities”가 보너스트랙으로 들어있다. 2004년 재발매된 앨범에서는 오리지널 LP에서 삭제되었던 트랙들이 대거 포함되면서 길이가 거의 배가 늘었다. 추가된 곡은 총 여덟 곡이다. 오리지널 앨범은 발매 당시 빌보드 탑200 차트에 31위까지 올랐고 영국 앨범 차트에는 22위까지 올랐다.

Dream Into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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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3일 영국의 신쓰팝 뮤지션 Howard Jones의 두 번째 앨범 “Dream Into Action”이 발매되었다. Rupert Hine이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영국 남부의 콧스월즈(Cotswolds)라는 도시에 있는 팜야드 스튜디오에서 1984년 말에서 1985년 초까지 녹음되었다. 소위 “원맨밴드(one man band)”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던 성공적인 데뷔 앨범 “Human’s Lib” 이후 Howard Jones는 여러 외부 뮤지션들의 도움을 받아 두 번째 앨범을 완성했다. 관악기 섹션에는 TKO Horns라는 관악기 그룹의 도움을 받았고 백킹 보컬에는 Afrodiziak과 The Effervescents라는 보컬 그룹의 도움을 받았다. 이 앨범에서는 Jones의 최고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Things Can Only Get Better”(#5 Pop)를 비롯하여 “Life In One Day” (#19 Pop), “Like To Get To Know You Well” (#49 Pop) 등이 연달아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Jones는 앨범의 수록곡의 리믹스 버전을 – “No One Is To Blame”은 Phil Collins가 프로듀스하기도 했다 – 모은 EP “Action Replay”를 내놓기도 했다. 이 중 “Blame”은 1986년 3월 싱글로 발매되어 미국 차트 4위까지 오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Dream Into Action”은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2위, 빌보드 탑 200 차트에서는 10위까지 올라1 Howard Jones의 가장 성공적인 정규 앨범이 되었다.

  1. 영국 발매분과 미국 발매분은 수록곡이 일부 다르다

Songs Of Faith And Dev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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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eche Mode – Songs of Faith and Devotion”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93년 3월 23일 영국의 신쓰팝 밴드 Depeche Mode의 여덟 번째 스튜디오 앨범 “Songs Of Faith And Devotion”이 미국에서1 발매되었다. Depeche Mode와 Flood가 함께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스페인의 마드리드(대부분의 녹음은 여기에서 진행되었다고), 독일의 함부르크, 영국의 런던 등지에서 1992년 2월과 1993년 1월 사이에 녹음되었다. 이전 앨범 “Violator”에 비해 기타 사운드가 한층 강화되었고 라이브 드럼 연주를 샘플링해서 가미했다는 점이 이 앨범의 특징이다. 이 때문에 신쓰팝이라는 느낌보다는 당시 유행하던 얼터너티브락적인 요소가 많이 느껴졌고, 심지어 개인적으로는 당시 Zooropa 등으로 한층 말랑말랑해진 U2의 사운드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2 당시의 작업은 싱어 David Gahan의 술과 약물 남용 문제 탓에 어렵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이 앨범을 홍보하기 위한 14개월에 걸친 월드 투어인 “Devotional Tour” 동안 Gahan의 약물 탐닉은 심해졌고 Martin Gore는 과음으로, Andy Fletcher는 신경쇠약 등으로 고통 받는 등 총체적 난국의 상황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 탓에 오랜 동안 그들과 함께 했었던 Alan Wilder는 공연이 끝난 뒤 그룹을 떠나고 말았다.3 어쨌든 앨범에서는 “I Feel You” (#37 Pop, #1 Modern Rock, #3 Club Play),4 “Walking In My Shoes” (#69 Pop, #1 Modern Rock), “Condemnation” (#23 Modern Rock) 등의 싱글이 차례로 인기를 얻었다.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와 빌보드 탑 200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5

  1. 영국에서는 하루 전인 1993년 3월 22일
  2. 어느 면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프로듀서 Flood가 바로 U2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Achtung Baby”의 프로듀서였다
  3. 이런 난국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후속 앨범 “Ultra”를 내기까지 4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4. 얼마 전 Johhnny Marr가 커버하기도 했던 곡
  5. 양국에서 모두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DM에게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Crocodiles

An album cover showing four men amongst some trees at night. In the top left-hand corner of the cover is the band's name and the album's name is in the top-right corner, both are in yellow text.
Echo & the Bunnymen Crocodiles”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Crocodiles는 영국의 포스트펑크 밴드 Echo & the Bunnymen의 데뷔앨범이다. 1978년 리드 싱어 Ian McCulloch를 중심으로 결성된 이 밴드는 “The Pictures on My Wall”을 데뷔 싱글로 내는 등의 음악활동을 하다가 1980년 6월 그들의 데뷔앨범 작업을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가 불과 3주 만에 녹음을 끝냈다. 밴드의 매니저 Bill Drummond와 The Teardrop Explodes의 키보드 주자였던 David Balfe가 프로듀스한 이 작품은1 영국에서는 1980년 7월 18일에, 미국에서는 같은 해 12월 17일에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 17위까지 오르는 성적을 거두었다. “Pictures on My Wall”과 “Rescue“가 싱글로 발매되었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음울하다. 영국의 음악잡지 NME는 McCulloch의 가사가 “슬픔, 분노, 체념이라는 주제로 흩뿌려져 있고, 주제가 격렬한 동물/性的 이미지로 보강되었다”라고 평했다. 실제로 McCulloch는 “Pride”에서 “엄마가 말하길, 누나가 말하길, ‘널 비웃어도 되겠지?’”라고 읊조리는가 하면, “Stars Are Stars”에서는 “넌 하늘로 침을 뱉는다. 왜냐하면 그건 비어있고 공허하기 때문이지”라고 노래한다. 이런 체념적인 태도는 McCulloch의 가녀리게 떨리는 보컬 때문에 그 불안한 기운이 더해진다. 앨범 커버마저 우울한 기분을 자아내게 하는 이 앨범은 Joy Division 으로 대표되는 포스터 펑크의 문법에 완벽하게 조응하는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앨범 발매 이전에 “Pictures on My Wall”이 그들의 최초의 싱글로 먼저 발매되었고 “Rescue”도 5월 5일 발매되었다. 이 곡은 영국 싱글 차트 62위에 올라 밴드 최초의 히트곡이 되었다.

  1. 다만 싱글 Rescure는 Ian Broudie가 프로듀스했다

Clo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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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Division Closer”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Closer는 영국의 포스트펑크 밴드 Joy Division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발매된 스튜디오 앨범이다. 1980년 7월 18일 레코드 레이블 Factory를 통해 발매된 이 앨범은 리드 싱어 Ian Curtis가 자살로 생을 마친 두 달 후에 발매되어 그의 유작이 되었다.(그의 삶과 죽음은 Anton Corbijn의 영화 Control을 통해 재조명되기도 했다) 유명한 앨범 재킷은 Martyn Atkins와 Peter Saville이 맡았다. 사진은 Bernard Pierre Wolff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제노아에 있는 한 가족 묘지를 찍은 사진이다. 묘지 사진을 쓰자는 아이디어는 Peter Saville의 아이디어로 Ian의 죽음을 전해들은 Peter가 그의 죽음을 기리고자 낸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Martin Hannett이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오프닝 트랙의 제목이기도 한 J.G. Ballard의 소설 The Atrocity Exhibition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Ian은 사실 그 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대부분 곡의 가사를 다 썼다고 한다. 어쨌든 이 앨범은 그룹의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준 걸작 앨범이 되었다. 한 평론가가 “고딕락의 어둠의 일격(dark strokes of gothic rock)”이라고 표현한 이 앨범은 이후 고딕락, 이모(emo), 인디 뮤지션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는 앨범으로 남게 되었다. 12인치 LP로 발매된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6위까지 올랐고 호주에서는 4주간 1위에 머물렀다.

The Joshua Tree

A landscape monochrome photograph of U2 in the desert sits in the center of a black background. U2 are standing on the left half of the photograph, with a mountain range on the right half. Tiny gold text reading "THE JOSHUA TREE U2" is stretched across the top of the black background.
The Joshua Tree”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87년 3월 9일 U2의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The Joshua Tree”가 발매되었다. Daniel Lanois와 Brian Eno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6년 1월에서 1987년 1월까지 더블린에 있는 여러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U2는 “The Unforgettable Fire”을 내놓은 후 1985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공연을 다니거나 휴식을 가지며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앨범 중 많은 곡들은 1984년에서 1985년까지 미국 순회 공연을 다니면서 느낀 점을 노래로 만든 것들이다. 이 앨범에는 밴드 멤버의 미국에 대한 애증섞인 감정, 종교적인 명상 등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음악적으로도 여전히 펑크적인 요소가 많이 담긴 이전 앨범에 비해서 뿌리 음악에 대한 성찰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Bono가 1985년에 Steven Van Zandt의 Sun City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덕택이었다. 이 자리에서 Bono는 Keith Richards와 Mick Jagger 블루스를 연주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Bono의 생각에 그의 밴드는 펑크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ono는 Bob Dylan, Van Morrison과 교류하며 아일랜드 음악의 뿌리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경험 역시 새 앨범에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유명한 앨범 커버의 사진은 Anton Corbjin의 작품이다. 그가 사진을 찍은 이 장소가 바로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에 있는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이다. Corbjin은 밴드에게 이 나무의 이름이 구약성서의 예언가 조슈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말해주었다. 공원에서 그들은 나무 한 그루가 본래 군집으로 자라는 나무의 특성과 달리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외로운 나무에서 사진을 찍었고 Bono는 앨범의 이름을 이 나무의 이름에서 따오기로 결정하였다. 앨범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또한 비평적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미국 앨범 차트에서 1987년 4월 4일 7위에 진입했는데 이는 Eagles의 1979년 앨범 “The Long Run” 이후 가장 높은 차트 데뷔였다. 앨범은 미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20여개 나라에서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앨범에서는 “With Or Without You”(뮤직비디오)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포함하여 네 개의 싱글이 정상에 올랐다. 밴드는 이 앨범의 홍보 공연 “Joshua”를 시작하였다. 이 공연은 필름에 담겼고 “Rattle And Hum”이라는 이름으로 1998년 말 공연 실황 앨범이 발매되었다. 1988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밴드는 ‘그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2개 부문에서 수상한다. 앨범은 리마스터되어 2007년에 LP와 CD로 재발매되었다.

Licensed To 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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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censed to ill”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1987년 3월 7일 Beastie Boys의 데뷔 앨범 “Licensed To Ill”이 빌보드 탑200 차트 정상에 올라 7주간 머물렀다. 1986년 11월 15일 발매된 이 앨범은 최초로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한 랩LP로써 빌보드 R&B 차트 2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Rick Rubin과 Beastie Boys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5년 초에서 1986년 말까지 뉴욕에 있는 Chung King House Of Metal에서 녹음됐다. 이 앨범은 당시 막 인기를 얻고 있던 힙합, 랩 등과 락음악의 샘플링을 혼합하여 이 서브장르를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하였다. 발매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어 첫 2주 동안 백만 장이 팔려나간 이 앨범에서는 많은 히트곡이 쏟아져 나왔는데 “(You Gotta) Fight For Your Right (To Party)”과 “Brass Monkey” 등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No Sleep To Brooklyn”에서는 Slayer의 Kerry King이 가세하여 리드기타를 연주하였고 뮤직비디오에서도 글램메탈을 패러디하는 식으로 등장한다. 이 제목은 Motörhead의 “No Sleep ‘til Hammersmith” 앨범에 대한 조롱이다. King이 이 곡에 참여한 것은 당시 Rick Rubin이 Slayer의 앨범도 프로듀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은 원래 이 앨범의 제목을 “Don’t Be A Faggot”으로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이 제목이 동성애 혐오적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후에 밴드의 멤버 Adam Horovitz는 그 제목에 대해 사과했다). 앨범의 유명한 커버는 David Gambale (aka “World B. Omes”)의 작품인데 산허리에 추락하고 있는 보잉 727 제트기의 일러스트레이션이다.(실제로 1986년 3월 멕시코의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 산에서 보잉 727 추락사고가 있었다) 비행기의 끝부분에 등록번호 “3MTA3”이 적혀 있는데, 이는 사실 트릭으로 거울에 비추어 보면 “EAT ME”를 의미하는 일종의 암호다.

Love Supreme

이코노미스트에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발매된 재즈 명반 “Love Supreme”에 관한 칼럼이 게재되어 여기에 번역해서 올려둔다.

A blue-tinted black-and-white photograph of Coltrane's face looking to the left, with the logo "A Love Supreme/John Coltrane" written in white bold Arial across the top.
John Coltrane – A Love Supreme” by Source. Licensed under Wikipedia.

재즈에서 가장 유명한 징과 함께 시작한다. 몇 초 후, 더블베이스가 4노트의 “Love Supreme” 주제를 이어받는다. John Coltrane은 강렬한 색소폰 솔로를 시작한다. 그리고 30분 뒤,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러나 여전히 5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신선하게 들린다.

재즈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였던 Coltrane은 1967년 그의 나이 40살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간혹 한 해에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기도 하는 다작의 아티스트였다. 1965년 2월에 발매된 “A Love Supreme”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비평가로부터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Supreme”에 관해서는 과장이 좀 있다. 이 작품은 그 시기의 Coltrane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압도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예를 들어 “Sun Ship”이나 “Crescent”와 같은 작품들) 그 명성은 아마도 몇몇 다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이 작품은 1960년대 중반의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접근하기 쉽다. “Supreme”은 Coltrane의 기술적인 힘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발매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가 조성(調聲)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그의 앨범 다수는 재즈 클럽에서의 “해프닝”의 결과물로써 고도로 추상적이다. 익숙하지 않은 귀로는 몇몇은 거의 감상하기 어렵다.(“Live at the Village Vanguard Again!”을 시도해보라) “Supreme”은 숙달된 기술과 1960년대 Coltrane의 지성주의가 잘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상당히 이지리스닝인 것이다.

“Supreme”은 또한 Coltrane에게 있어 가장 종교적인 앨범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가장 헌신적인 재즈 팬이 아닐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아는 것을 느낄 수 없는 이들에조차 어떤 영감을 준다. 그는 요절했다. 그는 맹렬하게 연습했는데, 하루 12시간 씩 했다고 하고, 이는 아마도 가장 기술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룬 색소폰 연주자가 되게 하였을 것이다. Charlie Parker나 Miles Davis와 같은 다른 재즈 거인들과 달리 그에게는 섹스와 관련된 짓궂은 일화가 거의 없다. 그래서 Coltrane의 팬들은 이 사람에 대해 아는 바를 조각조각 모아야 한다.

1950년대 후반의 마약중독에서 회복되는 동안 Coltrane은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었고 “Supreme”은 명백하게 종교적인 함축이다. 라이너노트에서 그는 이 작업을 “그에게 바치는 변변치 않은 제물”이라고 칭했다. 첫 악장 “Acknowledgment”에서 Coltrane은 가스펠과도 같은 투로 “A Love Supreme”이란 가사를 되뇐다.(어떤 사람들은 그가 실은 “Allah Supreme”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여긴다. – 진지한 재즈 학자들조차 전적으로 믿을 만 하다고 여기지는 않는 주장)

제 4악장 “Psalm”은 Coltrane이 그의 색소폰과 말을 “주고받은” 시에 대한 낭송이다. 당신은 여기에서 그 대화를 들을 수 있다(꽤 감동적이다). 이 작품은 빛나는 색채로 끝을 맺는다. Coltrane은 두 번째 색소폰으로 오버덥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Supreme”은 발매된 그 맥락 때문에 중요하다. Coltrane은 발매 이후 몇 달 후에 사망한다. 이후 어떤 색소폰 주자도 그 정도의 인기와 비평적 찬사를 얻지 못했다. “Supreme”이 나올 즈음 재즈의 인기를 폭락하기 시작했다. 락밴드가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디너 재킷과 작은 클럽이 곁들여진 재즈는 앰프가 가미된 기타와 화려한 의상에 비해서 매우 쿨하지 않은 것이 된 것처럼 보였다.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새롭고 어린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극적으로 자신들의 스타일을 바꿨다. “Supreme”이 나온 3년 후, Davis는 “Miles in the Sky”(명백하게 비틀즈에 대한 고개 끄덕거림이 담긴)이라는 앨범을 내놓는다. 그는 Jimi Hendrix와 함께 연주했다. Herbie Hancock은 전통적인 재즈를 거의 전적으로 생략하였다. 일그러뜨린 기타 사운드, 전자 베이스들, 락 리듬, 그리고 큰 썬그래스가 음악적인 이행기에 함께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Supreme”에 대한 광범위한 숭배는 부분적으로 지금 의미하는 것에 의해 설명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어필했던 “적정한” 재즈라 여기는 마지막 앨범이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그리고 다시는 회복되지 않은 한 예술 형식의 최후의 일제사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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