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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큐비즘, 기계, 건축, 공산당, 서민적 레크리에이션 등등.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큐비즘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페르낭 레제(Jules Fernand Henre Léger)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나열해보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중 하나로는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립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2008년 한국에서 열린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이 열릴 때에 국내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작품이 앞서 나열한 페르낭 레제의 그림에 관한 키워드가 포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Les Loisirs. Hommage à Louis David
huile sur toile de Fernand Léger – 1948-1949
Pari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 Centre Georges Pompidou
© ADAGP Paris 2004
© CNAC / MNAM – distr : RMN / Jean-François Tomasian

1881년 생인 페르낭 레제는 건축을 공부하다 1910년경부터 큐비즘 운동에 참가, 피카소, 로베르 들로네 등과 함께 적극적인 추진자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위대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기계문명, 건축, 추상회화의 접점을 모색하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1919년 그린 ‘도시’ 라는 작품을 보면 이러한 경향을 잘 목격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기계문명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이를 즐겨 표현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기계문명과 기술진보에 대해 낙관적이란 점에서 목가적인 反기계문명론자와는 다른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이 유별날 것은 없다.

그의 작품만의 특징을 하나 들자면 유난히 원통형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기계 플랜트에 들어가는 각종 배관을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 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런 레제의 원통형에 대한 집착은 구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가 그린 사람들은 원통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사람들은 뚱뚱해 보인다기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골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뚱뚱한 사람을 즐겨 그렸던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다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작품을 맥락 없이 전시장에서 만난다면 그저 평범한 남녀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쯤으로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술진보로 노동자들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담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작품이다. 예의 원통형 몸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천국” 미국에서 유입된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하고 하이킹을 즐기고 있는데, 기술진보로 직장에서 잘리는 대신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그린 사회는 이미 이상적인 노동자 중심의 사회가 전제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퐁피두 센터의 설명에 따르면 레제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노동자를 위한 유급휴가를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휴가는 이전까지 귀족이나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에서 잘 느낄 수 있다. 프랑스 노동자는 마티뇽 협정 이전까지는 유급휴가를 즐길 수 없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가와의 타협, 기술진보로 인한 사회잉여의 증가 등이 노동자의 여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래서 자연히 이 작품에는 혁명까지는 아니어도 사회개혁을 통한 노동자 세상에 대한 낙관이 담기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오늘날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노동자의 유급휴가는 – 사실 잘 알다시피 그마저도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그렇듯이 이렇게 지난한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레제와 같은 예술가들의 선전선동에 의해 기틀을 다져온 것이다. 일단 무엇이든지 가지게 된 자들은 웬만해선 기득권을 잘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풍을 “사회주의 이론의 결과이되, 전투적인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적인 것이라 평했는데, ‘여가’는 이러한 평가에 잘 어울리는 작품일 것이다.

The Commitments(소설)

아일랜드의 수도 Dublin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Derek 과 Outspan 이 그들이 몸담고 있는 밴드 And And And 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음악에 대해 빠삭한 Jimmy 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Jimmy 는 Frankie Goes To Hollywood 를 누구보다도 먼저 들었고 남들이 열심히 듣고 있을 때는 이미 그들을 쓰레기 취급할 정도로 음악을 듣는 감각이 앞서 있었다.(소위 Hipster?) Jimmy 는 And And And 가 커버하고 있는 Depeche Mode 를 싸구려 “아트스쿨” 음악이라고 치부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이정표를 제시한다. 이른바 “Dublin Soul”!!


Jimmy 에 따르면 Soul 은 보통사람, 즉 인민(people)들의 음악이다. Soul 은 “I wanna hold your hand” 따위의 에두른 표현이 아닌 “I feel like sex machine”과 같은 진솔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랑을 노래한다. 바로 Sex 그 자체를 노래한다. 또한 Soul 은 정치(politics)이다. Jimmy 에 의하면 어느 정치정당, 심지어 노동당마저 Soul 이 없어서 나라꼴이 말이 아닌 것이다. Soul 은 착취 받는 흑인계층, 보다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의 음악으로 정치적인 선동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이 만들어질 밴드는 더블린에서 Soul 을 전파하는 전도사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밴드는 하나하나 형상을 빚어간다. 섹서폰, 피아노, 드럼 등 차근차근 진용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고 보컬에는 후에 밴드의 문제아로 등장하는 Deco 가 가세했고, 밴드의 정신적 지주이자 또 하나의 문제아로 자리매김하게 될 Joey 가 트램팻을 맡게 되었다.  


소설은 이런 일련의 밴드의 결성과정과 성장과정, 그리고 갈등과 뒤이은 밴드의 해체를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를 엮어서 서술하고 있다. 후에 이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와는 큰 틀에서 비슷한 사건으로 전개되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Jimmy 는 영화와는 달리 많은 부분을 Joey 에게 의존하고 있다. 또한 밴드멤버 간의 갈등의 결정적 계기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소설에서는 갈등 폭발의 방아쇠는 밴드멤버들이 모두 사모하고 있던 Imelda 가 당기게 된다.  


음악을 주제로 하는 소설은 그 음악을 – 영화와 달리 – 직접 들려줄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시도할 수 없지 않을까 할 정도로 어려운 시도다. Roddy Doyle 은 자신의 고향인 Dublin 과 모타운의 음악인 Soul 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실체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한데 엮으려 시도했고 그 시도는 유의미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소설을,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더 이상 Dublin 을 정치적 갈등과 가난의 고장으로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Clerks

비번인 가게 점원 Dante Hicks 는 12시까지만 가게를 봐달라는 사장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애인 Veronica 가 놀러왔는데 섹스 상대 숫자 때문에 싸우고 예전 애인이었던 Caitlyn 은 아시아 디자이너와 결혼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완벽한 달걀을 찾는다는 손님은 바닥에 온통 계란을 늘어놓고 이상한 짓을 다하고 사장은 뒤늦게 먼 도시로 떠나버린 것으로 드러난다. 마틴스콜세스의 ‘After Hours’ 가 가게 안에서 펼쳐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Dante Hicks 의 하루는 그야말로 엉망진창 그 자체다. Kevin Smith 에 늘 등장하는 ‘제이와 조용한 밥’이 이번에도 예외없이 등장하고 ‘조용한 밥’ – Kevin Smith 본인 – 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침묵을 지키다 최후의 순간에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주는 몇 마디를 건넨다. 이런 저런 재치 있는 대화가 땅콩 까먹는 것 같은 재미를 주는 영화.

Kes

가난한 노동계급 집안의 존재감 없는 소년의 자아극복에 관한 영화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상 조롱과 소외에 시달리는 빌리캐스퍼라는 소년이 황조롱이(kestrel) – 황새목 매과의 조류 – 한 마리를 발견하고 이를 조련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존재감을 회복한다는 단순한 스토리다. 하지만 감독 켄로치 Ken Loach 는 두 달도 안 되는 짧은 촬영기간의 이 저예산 영화에서 억지스러운 감정이입 없이 보잘것없는 인간이 어떻게 자아를 실현해나가는가를 무리 없이 서술해나가고 있다. 마르쿠제는 어느 책에선가 노예의 삶이나 다름없는 노동자가 예술적인 성취를 추구하면서 자기해방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는바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와 어느 정도 맥락이 통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Soy Cuba

Soy Cuba(“나는 쿠바다”라는 뜻)는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이다. 쿠바혁명 이후 쿠바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착취당하고 있던 쿠바를 대표하는 전형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젊은 여인, 하루아침에 땅에서 쫓겨 난 농민,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학생 등 갖가지 삶의 군상이 비춰지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제3세계 식민지라는 구조적 질곡에 몸부림치는 소시민들이다. 결국 이 영화는 혁명의 결과를 묘사하진 않지만 학생투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농민들의 모습에서 결과의 단초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니더라도 그 형식의 탁월함이나 마술 같은 영상 자체로도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을 만하지만 미국에서는 오랜 기간 상영금지 목록에 올라있었다.

‘빵과 장미’를 보고

막 영국 감독 켄로치의 최신작 ‘빵과 장미’를 봤습니다. 켄로치는 잘 아시겠지만 사회주의자로서 일관되게 좌파적 시각과 민중의 시각에서 작품을 만들어 온 작가시죠. 그의 작품은 드라마적인 영화문법을 쓰고 있습니다. 평이한 카메라웍, 어찌 보면 도식적이기까지 한 플롯 등… 그래서 과거 즐겨 보던 어려운 표현주의적인 작품이나 요즘의 MTV식의 편집으로 정신없게 만드는 그런 작품을 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싱거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은 어찌 보면 그가 작품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쉬운 언어로 전파하고자 하는 그만의 형식미학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플롯을 구태여 복잡하게 꼬지 않고 서민들이 즐겨 보는 평이한 드라마 기법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되 사태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고 정확히 꿰뚫는 그런 자신만의 리얼리즘 미학.

이 영화 ‘빵과 장미’ 역시 그러한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멕시코 국경을 월경하는 불법이민자들의 숨가뿐 모습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주인공 마야의 빌딩 미화원으로의 취직, 노조조직원 샘(아드리안 브로디라고 왜 그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할베리하고 딥키쓰했던 그 총각이 역을 맡았습니다)과의 만남을 통한 노동자 의식의 각성, 사측의 노골적인 방해공작, 샘과 마야의 애정사, 이어지는 투쟁, 그리고 마침내 노조의 승리에 이르기까지 담담하고도 담백하게 진행됩니다.(마지막에 반전이 있는데 그것까지 말하면 스포일러이므로 함구)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제게 공포영화였습니다. 저는 흔히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즐기는 이유가 스크린내의 공포가 우리한테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안도감 때문에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곤 합니다(그래서 사실 좀비니 늑대인간이 나오는 영화보다는 실제 우리의 일상을 헤집는 Fatal Attraction 이나 Rosemary’s Baby 같은 영화가 훨씬 무섭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 ‘빵과 장미’는 노동자의 비참한 일상과 그에 따른 고통이 섬뜩하게 표현되며 그 고통이 다른 공포영화와 달리 우리의 일상 속에서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가장 고밀도의 공포영화인 셈이죠. 먼 나라 미국에서의 미화원이 겪는 고통은 지금 이 땅 남한 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제목입니다. ‘빵과 장미’.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노동자들은 시위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 시위에 들고 나온 플래카드에는 이렇게 써있습니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러나 또한 장미를 원한다.” 빵은 말 그대로 경제적인 요구입니다. 장미는? 그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입니다. 노동자의 인격을 파괴하는 장면은 중간관리자 페레즈를 통해 형상화됩니다. 취직 명목으로 첫달치 월급을 뺏어가고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그는 언제나 얄미운 자본의 악랄함의 가장 밑바닥의 모습입니다.

빵 뿐만 아니라 장미를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 모든 인간관계에서 요구된다는 생각이 최근 들어 부쩍 듭니다. 저 다니는 회사에서도 미화원 아주머니들에게도 인사를 합니다(사실 의식적인 노력입니다만 대부분 사원들은 안 합니다). 또 다른 것들이 많겠죠. 누가 되었건(그게 우리가 척결해야할 악랄한 지배계급이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예의, 상호존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야 된다고 봅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이걸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회주의자이건 또는 자본주의자건 간에 (하물며 좌파들끼리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건 빵보다도 중요하니까요.

영화에서 루벤이라는 남자미화원이 청소하고 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그를 훌쩍 건너 넘어가자 마야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유니폼을 입으면 우린 투명인간이 되는 것 같아.”

2003-07-06

‘로저와 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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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 and me” by The poster art can or could be obtained from Warner Bros... Licensed under Wikipedia.

원제 : Roger & Me
제작년도 : 1989년
감독 : Michael Moore

미시간주의 플린트는 디트로이트 못지 않은 자동차의 도시다. 그곳은 또한 영화감독이자 지독한 독설가인 마이클무어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 플린트에서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시의 경제의 가장 큰 축이던 GM사가 공장을 멕시코로 이전해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정을 주도한 이가 바로 GM의 CEO(요즘은 사장이나 회장이 아니라 이렇게 불러줘야 한다) 로저 스미스였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그 바람에 집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을 바라보던 마이클 무어는 로저 스미스에게 그에게 단 하루만이라도 플린트에 들러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의 처지를 보기를 권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 3년이 훌쩍 넘은 후에야 GM직원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 석상에서 간신히 그와 조우한다. 하지만 마이클의 날선 질문에 로저가 무시하면서 사태는 종결.

그 와중에 실직한 노동자들은 타코벨에서 점원노릇을 하고, 매혈을 하고, 토끼를 팔고(왜완용으로 팔다가 남은 놈은 식용으로 판다), 집세 체납자들을 쫓아내는 부보안관이 되고, 감옥의 간수가 된다(GM 사태 이후 범죄율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시는 새 감옥을 지었고 감옥 준공파티를 열어 일반인들에게 돈을 받고 감옥에서 하룻밤 잘 수 있게도 했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안되는 이들은 범죄를 저질러 예전의 직장동료가 간수로 있는 감옥신세를 진다. 전국 자동차 노조 위원장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내젓는다(에라이~).

시당국은 플린트를 관광도시로 만들겠다며 시예산을 들여 하이얏트 호텔과 오토월드(무너져 내린 자동차 왕국의 씁쓸한 유물로 가득한)를 만들지만 호텔은 파산하고 오토월드는 문을 닫는다. 가진 이들은 ‘위대한 개츠비’ 파티(미국인들이 좋아하는 1920년대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그 당시의 의상을 입고 즐기는)를 열어 세상풍파와 무관함을 뽐낸다. 그러면서 반드시 나쁜 면만을 보지 말라고 주문한다. 좋은 면이 무어냐는 마이클의 질문에 한 여인은 대답한다.

“뭐 예를 들면 발레랄지…”

1980년대 말에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는 시대와 장소를 훌쩍 뛰어넘어서 2004년 남한 땅의 상황과 근사하게 중첩된다. 오늘 자 신문을 보면 한국은행의 철없는 총재 박승씨마저 ‘고용 없는 성장’을 인정하였다. 또한 산업이 공동화되고 있다 한다. 수출은 사상최대의 흑자인데 내수는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어디선가 성장은 분명히 하고 있는데 그게 노동자들에게까지 전파가 되고 있지 않다는 소리다.

또다시 해묵은 논쟁을 들추어 내보자. 기업이 벌어들인 돈은 누구의 돈인가? 그리고 성장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많이 양보해서) 공동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재벌의 아들은 불과 몇 년만에 엄청난 부를 움켜쥐고 노동귀족은 곰팡이 슨 집에 살고 있을까? 왜 플린트의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이 일구어낸 자동차 왕국에서 어느날 갑자기 쫓겨나는 것일까? 자신들이 일구어낸 자신들의 공장에서….

원래 아무리 혁신적인 영화라도 만들어진지 한 4∼5년만 지나도 촌스러워지는 법인데 –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 그리고 최신영화들을 비교해보자 –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른 촌티가 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그 시대의 상황이 오늘날 이 땅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아 한가지 틀린 구석이 있긴 하다.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미남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은 노동자를 위로한답시고 플린트를 방문해 실직 노동자 12명과 한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며 적당한 대안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결국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식당만 돈벌어준 꼴이 되었지만). 21세기 우리의 대통령은 귀족노조의 전투적이고 이기적인 노동운동 때문에 나라꼴이 엉망 된다는 어이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 그 대신 그는 자본가들과 삼계탕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