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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bbing Gri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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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bbing Gristle” by Xic667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Throbbing Gristle은 다다이즘 운동에 영향받은 COUM Transmissions라는 퍼포먼스 아트 그룹(1969년~1976년까지 활동)에서 발전하여 1975년 결성된 영국의 음악/비주얼아트 그룹이다. COUM Transmissions의 마지막 공연이 Throbbing Gristle의 첫 공연이었다. 그룹은 Cabaret Voltaire와 함께 인더스트리얼 음악을 처음 추구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1 하지만 다소 팝 친화적인 음악을 추구했던 Cabaret와 달리 이들의 음악은 보다 전위적이었다. 이들의 공연은 때로 도발적이었는데 포르노그래피와 나찌의 강제수용소의 사진이 등장하는 등의 해프닝 때문에 악명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그룹은 자신들의 의도가 매력적인 음악을 만들기보다는 인간의 삶의 어둡고 강박적인 측면을 분석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들은 테잎에 담긴 사전에 녹음된 샘플과 고도로 왜곡된 배경을 깔고 있는 특수효과 등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룹은 1977년 첫 싱글 “United”/”Zyklon B Zombie”로 데뷔한다. 이어 데뷔 앨범 The Second Annual Report를 내놓는다. 이 앨범은 자신들의 레이블 인더스트리얼 레코드사에서 786장만을 찍어냈지만, 이후 팬들의 요청으로 뮤트 레코드사를 통해 대량으로 시장에 판매되었다. 상반된 평가를 받은 데뷔 앨범과는 달리 이후 발표된 D.o.A: The Third and Final Report of Throbbing Gristle이나 20 Jazz Funk Greats는 평론가의 찬사를 얻는다. 특히 D.o.A는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라는 책에 필청 음반으로 추천을 받기도 한다. 이후 80년대에 낸 두 개의 앨범은 더더욱 실험적인 작업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1986년 내놓은 앨범은 제목도 붙이지 않아 CD1이라는 비공식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그룹은 1981년 해산했지만 개별 멤버들은 그 뒤로도 많은 프로젝트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2004년 재결성했지만 멤버 Peter Christopherson의 죽음 이후인 2010년 다시 해산했다.

Studio albums
The Second Annual Report (1977)
D.o.A: The Third and Final Report of Throbbing Gristle (1978)
20 Jazz Funk Greats (1979)
Journey Through a Body (1982)
CD1 (1986)
TG Now (2004)
Part Two: The Endless Not (2007)
The Third Mind Movements (2009)

  1. 그룹은 2009년 BBC에서 제작된 Synth Britannia에서 자신들은 “펑크가 아니라 인더스트리얼”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Chris Frantz에게서 듣는 Talking Heads의 초기시절

Q :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에서 당신은(Chris Frantz) 어떻게 David Byrne 과 The Artistics를 조직하게 되었나요? 그리고 그 밴드는 Talking Heads와 비교할 때 어땠나요?

A : 차에 치이는 여자에 관한 학생영화를 만들면서 사운드트랙을 필요로 했던 Mark Kehoe라는 친구를 통해 David을 알게 되었죠. 그가 David와 내게 그 일을 맡겼어요. 우린 그 일을 썩 잘했고 그에게 밴드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물었죠. 그는 동의했고 우리는 다른 RISD 애들과 함께 The Artistics를 조직했죠. The Artistics에서 우리는 음악을 함께 만들었고, 몇몇 곡은 Talking Heads 연주목록이 되었어요.

Q : 그럼 그게 어떻게 Talking Heads로 발전했고 Modern Lovers 의 기타리스트였던 Jerry Harrison이 어떻게 그림 속에 들어왔죠?

A : Tina 와 나는 RISD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뉴욕으로 옮겼죠. David 는 벌써 와있었고요. 난 그에게 나와 함께 새 밴드를 조직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그는 이에 응했어요. 그래서 난 Tina가 우리와 비슷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밴드에 합류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 때까지 일 년여를 함께 연습하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다음에 CBGB의 Hilly Kristal에게 오디션을 받으러갔죠. 그는 “음. 며칠 후에 너희들을 the Ramones 앞에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트리오로 한 일 년 함께 한 후에, 키보드와 기타를 연주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합류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Tina와 내가 The Local이라는 Mickey Ruskin의 빠 들 중 한 군데에 있었는데, The Modern Lovers의 베이시스트 Ernie Brooks를 우연히 마주쳤어요. 난 Ernie의 삼촌이 내 아버지의 동업자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 소개를 했고 Ernie는 나에게 Jerry에게 우리와 키보드 및 기타를 연주해주는 문제에 관해 전화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래서 난 그렇게 했죠. 그리고 Jerry가 솜씨가 더 나아지라는 것을 확신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가 적임자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Q : 어떤 것이 Talking Heads의 중요한 과도기였다고 생각하시나요?

A : 계약을 안 한 밴드들의 CBGB 페스티발에 관한 The Village Voice의 기사에서 우리 사진이 첫 페이지에 오른 때가 큰 도약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순간은 우리가 1977년 5월 The Ramones와 함께 유럽 및 영국으로 투어를 갔을 때죠.

Q : 1977년의 데뷔앨범 이후 어떻게 프로듀서 Brian Eno와 만났고 밴드가 더 나아가는데 어떠한 영향을 받았나요?

A : Brian은 첫 영국 공연인 런던 공연에 왔었고, 우리 음악을 프로듀스하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어요. 우리는 이미 그의 팬이었습니다.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었죠.

Q : 80년대 초반부터 밴드는 아프리카의 리듬, 디스코-펑키, 그리고 다양한 표현들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왜 the Stop Making Sense 영화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낸다고 생각하십니까?

A : 사실은 우리는 학창 시절부터 아프리칸, 더브레게(Dub reggae), 디스코 등을 들었었어요. 우리 스타일로 삼는 것에 시간이 걸렸을 뿐이고,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는 우리 스타일이 된 거죠. 아프리카나 자메이카 밴드에게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에요. Stop Making Sense는 길 위에서 우리의 재주와 모두가 관련된 뛰어난 작업들을 연마하느라 보낸 몇 년의 결과에요. 나 역시 여전히 좋아하는 필름입니다.

출처

Tom Tom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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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a weymouth tom tom club” by dmax3270; David T. McFarlane, Jr. – http://www.flickr.com/photos/mclink/1440807172/.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Tom Tom Club은 뉴욕 펑크씬의 선두주자 Talking Heads의 멤버 Chris Frantz(드럼), Tina Weymouth(베이스) 부부의 싸이드프로젝트 밴드이다. 그룹의 시작은 Frantz 부부가 휴가를 즐겼던 바하마에서 Monty Brown과 Stephen Stanley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넷은 David Byrne과 Talking Heads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스타일의 뮤직을 만들기 위해 뭉쳤다. 로맨틱하고 댄써블한 팝뮤직 스타일을 지향했던 이들은 1981년 데뷔앨범 Tom Tom Club이 골드앨범을 차지했고 이 앨범의 히트싱글 Genius Of Love는 이는 Talking Heads가 이전에도 이후에도 달성하지 못한 상업적인 성공 사례였다. 그들은 그러나 Talking Heads 활동을 계속해나가면서 Tom Tom Club을 지속시켜 나갔다. 심지어 Talking Heads의 명작 Stop Making Sense의 게스트로써 선보이기도 했다. Talking Heads가 1991년 해산하자 Tom Tom Club이 그들의 주된 활동무대가 되었다.

더 많은 정보

디스코그래피
1981 Tom Tom Club [Sire]
1983 Close to the Bone [Sire]
1988 Boom Boom Chi Boom Boom [Red Eye]
1991 Dark Sneak Love Action [Sire]
2000 The Good, The Bad and the Funky [Rykodisc]
2001 Good Bad Funky [Festival]
2010 Genius of Live
2012 Downtown Rockers

Thieves Like Us

오랜만에 아마존에서 CD 몇 장을 주문했다.

Passion Pit – Chunk of Change
Thieves Like Us – Play Music
Neon Indian – Psychic Chasms

이들 중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밴드는 Thieves Like Us. 밴드 명에서 확 냄새나는 것은 New Order 필의 밴드가 아니냐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밴드 명이 New Order 의 히트곡 중 하나와 같기 때문이다.(실제로 Radiohead는 밴드명을 그들이 존경하는 Talking Heads의 히트곡 제목에서 따왔다) AllMusic을 찾아보니 역시 짐작대로  New Order 의 곡에서 밴드명을 따온 것 같다. 노래 역시 New Order와 매우 흡사한 분위기다. 일렉트로닉에 기반을 둔 리드미칼한 멜로디, 약간은 떨리는 듯한 여린 보컬 – 얼핏 일렉트로닉한 Belle & Sebastian 이란 느낌도 난다 – 이 영락없이 어린 New Order의 분위기다. 그들의 곡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드는 곡은 Drugs in My Body인데 예의 New Order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한편으로 후렴구가 Wire의 Eardrum Buzz의 일부분과 유사하긴 한데 한번 비교해보시길.

디스코그래피
2008 Play Music Shelflife
2010 Again & Again Shelflife

Drugs in My Body
Wire – Eardrum Buzz
홈페이지

Trash Can Sinatras

스코틀랜드 출신 인디팝 밴드 Trash Can Sinatras는 싱어이자 키타리스트인 Frank Reader가 주축이 되어 1987년 결성된 5인조 밴드이다. 처음에는 커버밴드(다른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연주하며 생활하는 밴드)로 시작하였던 이들의 음악인생은 한 지방술집에서의 공연모습이 Go! Discs 레이블의 사장 Simon Dine의 눈에 띄면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그들의 뛰어난 첫싱글 “Obscurity Knocks”는 1990년에 발매되어 그들이 Aztec Camera, Orange Juice 등의 스코티쉬팝의 선배들을 이을 수 있는 뛰어난 적자임을 증명하였다. 두번째 싱글 “Only Tongue Can Tell”에 이어 그들의 데뷔 앨범 Cake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호응을 얻었는데 특히 대학가 래디오 방송에서 인기를 누렸다. 이 즈음 베이스를 맡았던 McDaid가 그룹을 떠났다. 1993년 그들의 두번째 앨범 I’ve Seen Everything이 발표되었지만 그 즈음 인디락계는 그런지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쟁글팝은 호응을 얻는데 실패했다.

라인업 : Frank Reader(v), John Douglas(g), Paul Livingston(g), George McDaid(b), Stephen Douglas(d)

디스코그래피
1990 Cake London
1993 I’ve Seen Everything Polygram
1996 A Happy Pocket Go Discs

링크
Official Site
Japanese Fan Page COOL!
Links
Fan Page

‘Til Tuesday

‘Til Tuesday는 1985년 “Voices Carry”란 곡 하나로 MTV와 팝챠트를 강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드라마틱한 데뷔는 결국 용두사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발매된 두개의 싱글은 주목을 끄는데 실패했고 그들 역시 팬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져 갔다. 그룹의 간판스타였던 Aimee Mann은 보스턴에 있는 버클리 스쿨에서 수학한후 그 도시의 펑크씬에 뛰어 들었다. 그녀는 Young Snakes나 초기 시절의 Ministry와 함께 활동하였다.

1983년 그녀는 남자친구인 Michael Hausman (드럼)과 그의 친구들인 Joey Pesce (키보드), and Robert Holmes (키타)와 함께 ‘Til Tuesday를 조직하여 보스턴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한 지방 래디오 방송국의 밴드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여 Epic 레코드사와 계약하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리고 1985년 데뷔싱글 Voices Carry를 녹음하였다. 이와중에 Mann과 Huasman은 연인 관계를 청산하였고 이후 쏭라이터 Jules Shear가 Mann의 새로운 연인이 되었다.

1986년 가을 그룹은 두번째 앨범 Welcome Home을 녹음하였다. 그러나 앨범은 히트곡을 내지 못하였고 Pesce가 그룹을 떠났다(그의 빈자리는 Michael Montes가 메꿨다). 그룹은 또한 키타리스트 Jon Brion과 Clayton Scobel을 보강하였다. Welcome Home이 발매된 즈음 Mann은 다시 Shear와의 연인관계를 끝냈다. 1988년 발매된 그룹의 세번째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Everything’s Different Now에서는 Elvis Costello가 작곡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판매량은 Welcome Home에도 못미쳤다. 그러나 비평은 호의적이었는데 주로 Mann의 일취월장한 작곡솜씨에 초점이 맞춰졌다.

Aimee Mann은 80년대의 부시시한 헤어스타일로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각인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 결과로 현재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솔로경력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보컬과 쏭라이터 능력이 겸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솔로 작업은 P.J. Harvey, Tori Amos 또는 Liz Phair와 동등한 레벨로 인정받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5 Voices Carry [Epic]
1986 Welcome Home [Epic]
1988 Everything’s Different Now [Epic]

링크
RollingStone.com의 ‘Til Tuesday관련 페이지
Aimee Mann Official Site

Tiff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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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ffany-las-vegas-hilton-1993-04-24” by Dtobia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어느 시대에나 ‘10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생동감 혹은 반항적인 세대이다. 특히 대중문화가 사회전체의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20세기, 그 중에서도 20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대중음악계에서 10대는 가장 주요한 수요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의 코드 역시 10대의 감수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럼에도 대중음악의 생산자는 아직까지는 기껏해야 20대가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는 10대가 정상적인 음악교육 등을 통해 대중음악의 주체적인 생산자로 나서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80년대 전까지만 해도 10대의 대중음악인들은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서히 그 기류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팝음악계의 거대 레이블의 등장과 이들의 철저한 사전기획에 의해 조련된 10대들은 이전에 거쳐야 했던 음악의 통과의례 없이도 기술의 발전과 마케팅으로 어느 정도 윤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이러한 10대 파워의 대표주자는 Debbie Gibson, Martika, New Kids on the Block, New Edition 등이 있었고 지금 소개하는 Tiffany 역시 대표적인 10대 파워였다.

Tiffany Renee Darwish 는 1971년 10월 2일 오클라호마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즐겨 불렀고 LA의 한 컨트리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다 우연히 컨트리뮤직의 베테랑인 Hoyt Axton 과 Mae Axton 의 눈에 띄게 된다. 이후 몇 년간 Tiffany 는 TV쇼나 Jerry Lee Lewis, George Jones 등 컨트리스타들의 오프닝공연에 출연하였다.

1986년 Tiffany 는 매니저 George Tobin 과 계약을 맺고 그의 도움으로 MCA 와 레코딩 계약을 맺게 된다(Tobin은 그녀를 독재적이라 하리만큼 철저히 관리했고 이것이 후에 갈등으로 이어진다). 1987년 데뷔앨범 Tiffany 가 나왔고 즉각 순회공연에 들어갔다.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MTV가 그녀의 싱글 “I Think We’re Alone Now”를 틀어대기 시작하자 팬층은 빠른 속도로 늘어갔고 앨범은 팝차트 정상에 오르게 된다. 이어진 싱글 “Could’ve Been”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불행은 집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Tiffany 의 어머니는 그녀가 실종되었다는 신고를 하는가 하면 매니저가 그녀를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Tiffany 는 그런 어머니에 대항하여 법적자유를 주장하였고 매니저 Tobin 의 편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the Beatles 의 커버 “I Saw Her Standing There” 가 차트 정상에 올랐다(그녀의 순회공연의 오프닝밴드로 한 무명의 10대 밴드가 기회를 잡았는데 그들이 바로 New Kids on the Block 이었다).

1988년 2집 Hold an Old Friend’s Hand 가 발표되었는데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Tiffany 의 팬층이 비슷한 스타일인 New Kids on the Block 으로 급격히 이동하였음을 의미하는 신호였다. 3집 New Inside 는 발매되자마자 바로 청중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꾸준히 앨범을 내놓은 그녀는 2002년에는 플레이보이의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번갯불과 같은 반짝 성공은 한편으로 허망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많은 10대들에게, 그리고 그 10대를 활용하고자 하는 기획사에게 기회의 땅에 대한 이정표가 되기도 했다. 이후 90년대는 앞서의 경험을 교훈삼은 수많은 10대 가수들이 난무하게 된다. 물론 그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극히 소수이지만….

디스코그래피
1987 Tiffany MCA
1988 Hold an Old Friend’s Hand MCA
1990 New Inside MCA
2000 Dreams Never Die
2000 The Color of Silence Eureka

링크
Official Site
Online Fan Club

Thomson, Ali

1959년 Scotland의 Glascow에서 태어난 Ali Thomson은 지방 밴드에서 피아노와 노래를 부르며 그의 음악경력을 시작하였다. 70년대 중반 London을 근거지를 옮기는 그는 마운틴 레코드사를 위해 작곡을 시작하였다. Gary Wright이 그가 쓴 두 곡(Dream Weaver와 Really Wanna Know You)을 녹음하였다. California로 근거지를 옮긴 그는 그의 동생 Doug와 함께 A&M 레코드사의 오디션에 응모한다. 그의 데뷔앨범 Take A Little Rhythm이 나온 후 몇몇 사람은 이 앨범의 Paul McCartney의 것이라고 착각하였다. 이 앨범에서 타이틀곡이 차트 15위까지 Live Every Minute이 차트 42위까지 진출하였다. 두번째 앨범이 발표되었지만 실패하였고 그후 그들에 관한 소식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같은 Scotland 출신인 Bay City Roller의 Billy Lyall이 두 앨범에 세션 뮤지션으로 참여하였다.
Ali Thomson은 이후 몇몇 신진 뮤지션들의 곡을 써주거나 아키라 이노우에라는 일본 뮤지션의 앨범(1987)에 프로듀서와 보컬로 참여하고, Boo Hewerdine라는 그룹의 앨범 Joke(1996)의 프로듀서로 참여한걸로 짐작된다.

디스코그래피
1980 Take a Little Rhythm [A&M]
1981 Deception Is an Art [A&M]

Thompson Tw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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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pson Twins Feb84” by Ohconfuciu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Thompson Twins가 처음 탄생한 것은 지난 1977년 전직 음악교사였던 Tom Biley가 당시 영국에서 새롭게 붐을 이룬 펑크 스타일에 레게와 아프리카 리듬을 섞은 사운드를 연주하는 7인조 그룹을 결성하면서, 이들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틴틴의 대모험’의 등장인물인 탐슨 쌍동히 형제의 이름을 따서 밴드의 이름을 지었다.

이들은 주로 댄스클럽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기대화는 달리 일부 댄스클럽에서만 인기가 있을 뿐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있을 때,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흑인 아티스트 조 리웨이(Joe Leeway)와 뉴질랜드에서 온 방송 기자 출신의 앨러나 커리(Allena Currie)가 가입하면서 그룹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이들은 1981년 데뷔 앨범 AProduction To Participation을 발표하였고 뒤 이어 82년에는 2집 Set을 발매했다. 이 때 멤버는 초창기와 달리 탐, 엘레나 그리고 조 리웨이의 트리오로 단축되어 있었다. 2집 Set에서 싱글로 발표한 In The Name Of Love가 미국과 영국의 댄스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3집 Sidekicks에서는 토속적인 타악기에 신서사이저를 조화시킨 Lies를 전세계적으로 히트시키면서 일약 세계적인 뉴웨이브 그룹으로 부각되었다.

이어서 84년의 4집 Into The Gap에서는 더욱 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는데 특히 Hold Me Now, Doctor Doctor는 전세계의 방송가와 디스코텍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펑크 스타일의 독특한 의상을 입은 이들의 콘서트는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4장의 앨범 발표로 단단한 기반을 구축한 이들은 다섯 번째 앨범 제작 중 톰 베일리가 과로로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있었으나 Live Aid에서 훌륭하게 재기, 1985년에 5집 Here’s To Future Days를 발표했다. 비록 4집에 비해서는 그 열기가 조금 사라지긴 했지만 Lay Your Hands On Me가 히트하였다. 이를 기회삼하 그들은 다시 한번 세계 순회 공연에 나섰는데, 이 순회 공연 중에 조 리웨이가 탈퇴하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엘레나 커리가 병원에 입원, 그룹의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후 루퍼트 파인이라는 프로듀서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6집 Close To The Bone을 발표하였으나 이전만한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디스코그래피
A Product Of…(1981)
Set (1982)
Quick Step And Side Kick (1983)
Into The Gap (1984)
Here’s To Future Days (1985)
Close To The Bone (1987)
Big Trash (1989)
Queer (1991)

링크
팬페이지

They Might Be Giants

They Might Be Giants March 25th, 2005.jpg
They Might Be Giants March 25th, 2005” by Be3n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전염성이 강한 멜로디에 기묘한 유머감각과 뉴욕 포스트펑크씬의 아방가르드 미학을 조합한 음악을 구사했던 They Might Be Giants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가장 예기치못했던 얼터너티브 밴드 성공스토리였다. 음악적으로 John Flansburgh와 John Linnell 듀오는 모든 것에서 그들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차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로운 절충주의는 그들의 불가사의하고 기괴한 유머감각에 의해 잘 버무려졌다. ’80년대 그들은 인디레이블에서의 싱글발표와 계속적인 투어를 통해 그들은 대학 캠퍼스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 ’90년대 메이져 레이블로 이적한 후 발표한 Flood는 MTV의 지원사격 등에 힘입어 골드앨범이 되는 등 상업적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어 그들은 그런지가 도래하기 전까지 가장 성공적인 얼터너티브 밴드로 평가받게 된다. 그러나 그룹의 예측불가능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90년대 중반에는 MTV를 뒤덮은 포스트그런지 그룹들과 모던락 래디오에서 외면당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그리고 또다시 그들은 일종의 컬트로 남게 되었다.Flansburgh와 Linnell은 소년시절부터 친구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래를 쓰기 시작한 그들은 대학교에 들어간 후 본격적인 밴드생활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음악적 경력의 무대를 부르클린으로 결정한 그들은 George C. Scott 주연의 영화에서 밴드의 이름을 차용하고 드럼머쉰을 이용하여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곧 맨허튼 언더그라운드에서 실력자로 부상하였고 많은 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레코드 취입은 그리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앤써링머쉰에 노래를 녹음하는 방식을 시도하였고 이런 희한한 술수가 먹혀들어가 마침내 인디레이블인 Bar/None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1986년 별도의 이름이 붙지 않은 데뷔앨범을 발매하였는데 대학가 라디오에서 인기를 얻게 된다. 싱글 “Don’t Let’s Start”의 기발한 비데오도 MTV의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2집 Lincoln에서는 “Ana Ng”가 컬리지 히트싱글이 되었고 앨범차트 89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메이저레이블의 주목을 받은 TMBG는 마침내 1990년 Elektra와 계약을 맺고 그 해 말 Flood를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는 “Birdhouse in Your Soul” 과 “Istanbul (Not Constantinople)”가 크게 히트하여 마침내 골드앨범의 영광을 누리게된다. 1992년에 발매된 Apollo 18은 전작에 비해 덜 성공적이었다. 앨범의 써포트투어에서 TMBG는 처음으로 완전하게 갖춰진 백밴드를 쓴다. 이 밴드에는 Pere Ubu의 베이시스트였던 Tony Maimone와 드러머 Brian Doherty가 가세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얼터너티브락 씬에 몰아친 그런지락의 기세로 말미암아 TMBG는 언론과 MTV의 주목을 받는데 실패하였다. 이후에 발표된 일련의 앨범들 역시 주류의 외면을 받았지만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는 여전히 많은 컬트팬들이 지지를 보냈다.

디스코그래피
1986 They Might Be Giants Restless-Bar/N
1989 Lincoln Restless-Bar/N
1990 Flood Elektra
1992 Apollo 18 Elektra
1994 John Henry Elektra
1996 Factory Showroom Elektra
1998 Severe Tire Damage [live] Restless
1999 Live BMG Special
1999 Long Tall Weekend They Might Be
2001 Mink Car Restless
2001 Holidayland Restless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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