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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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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0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 Impawards, Fair use, Link

이 영화에 따르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는 실존했던 대륙이었고 외계인들의 지구 전진기지였다. 영원한 삶을 영위하는 이 신비로운 외계인들이 어느 날 지구에 남겨진 그들의 외계인 동료(정확하게 말하자면 커다란 고치[cocoon]속에 잠들어 있는 외계생물체들)를 데려가기 위해 지구로 왔다. 그들은 배를 빌려 알을 건져내는 한편 그 알들을 임시로 얻은 저택의 수영장에 보관한다. 그런데 그 수영장은 이웃 양로원의 장난기심한 노인들의 놀이터였다. 이들 노인들은 새 주인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데 갑자기 원기가 왕성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의 삶은 젊은이들의 삶에 못지않은 활기찬 삶으로 변신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생의 꿈이 실현된다는 설정의 독특한 소재의 SF 영화이다. Don Ameche, Wilford Brimley, Jessica Tandy(히치콕의 The Birds 의 히로인) 등 연로하신 과거의 스타들이 역동적인 연기를 선보이느라 꽤나 고생하셨을 것이 눈에 선한 이 작품은 이 덕분인지 그 해 아카데미에서 Don Ameche 에게 남우조연상을, 특수효과 제작팀에게는 특수효과상을 선사했다. 반면에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외계인 역의 Tahnee Welch(라퀄웰치의 딸)은 안 따라주는 연기 탓에 이 작품 이외에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는 형편없는 연기경력을 쌓게 된다. 후속편은 전편만큼의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The Omeg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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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mega-Man-Poster” by allposters. Licensed under Wikipedia.

소련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낀(?) 미국이 엉뚱하게 세균병기의 공격을 받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지구는 오염되고 사람들은 호흡마비 등의 증상을 보이며 죽어간다. 인류의 멸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Robert Neville 박사(Charlton Heston)는 자신이 개발하여 아직 실험단계에 있던 백신을 맞고 살아나지만 살아남은 어떤 이들은 심하게 오염되어 낮에는 잠을 자고 어둠을 틈타 활거 하는 변종인간, 일종의 뱀파이어가 되고 만다. 이들 무리의 우두머리 Matthias (Anthony Zerbe)는 인류가 도구의 사용으로 멸망을 초래하였음을 지적하며 반달리즘적인 파괴행위를 일삼는다. 한편으로 Neville을 그러한 타락한 문명의 상징으로 지목하며 그를 없애려 한다. 낮에는 거리를 활보하다 밤에 자신만의 은둔처로 숨어버리는 Neville 의 외로운 삶은 우연히 만난 정상적인 여인 Lisa과 그 친구들을 통해 구원받는다. 하지만 Matthias 일행의 집요한 폭력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오히려 Lisa 일행까지 위협을 당한다. The Quiet Earth(1985) 와 Dawn Of The Dead(1978) 를 교묘히 섞어놓은 듯한 – 그런데 실제로는 본 작품이 가장 먼저 만들어져(1971년)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후계작이라 할 수도 있겠다 ― 독특한 분위기 SF 인 이 작품은 인류가 냉전과 핵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던 시점에 제작되었다는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화 초반 텅빈 LA 거리는 ‘혹성탈출’에서의 망가진 자유의 여신상 만큼이나 – 이미 한차례 인류멸망의 좌절을 ‘혹성탈출(1968)’에서 경험한 바 있는 Charlton Heston 의 기용은 적절한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 충격적이었고 이 후 이 씬은 The Quiet Earth, 28Days Later 등에서 답습된다. 현재 Will Smith 를 내세워 영화의 원작 제목인 I Am Legend 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가 개봉예정이라 한다.

The Rutles

Monthy Python 의 일원이었던 Eric Idle 과 Saturday Night Live 의 제작자 Gary Weis 가 비틀즈를 소재로 만든 가짜 다큐멘터리. Nasty, Barry, Stig, Dirk 로 구성된 인기 최고의 밴드 The Rutles 의 신화를 분석하기 위해 방송인 Eric Idle 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특별한 플롯보다는 그때그때의 개그를 통해 웃음을 유발시킨다. The Rutles 의 곡이나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를 언급함에 있어서도 비틀즈의 곡과 영화 제목을 교묘히 비틀고 있다. 그러나 특별한 풍자라기보다는 웃음유발이 우선인 측면이 있다(예를 들면 Tragical History Tour, Yellow Submarine Sandwich 등등). Monthy Python 의 웃음 코드를 좋아했던 이들이라면 그럭저럭 웃으며 즐길 수 있지만 같은 Monthy Python 출신의 테리길리엄이 주는 독특한 웃음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감이 있다. 또한 오히려 한참 후에 나온 유사한 형식의 영화 This Is Spinal Tap 에 비해서도 짜임새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청출어람이라고나 할까?

Klute

Alan J. Pakula 의 ‘패러노이아 삼부작’ 중 가장 이른 1971년 제작된 스릴러물. John Klute (Donald Sutherland)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친구 Tom Gruneman 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의 유일한 단서는 Tom 이 편지를 보내곤 했다던 뉴욕의 콜걸 Bree Daniels (Jane Fonda). 남성에게 적대적인 그녀를 설득하여 Tom 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지만 상황은 점점 꼬여져만 간다. 형식은 스릴러이지만 실제로는 무뚝뚝한 존과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브리와의 사랑이야기에 가깝다. 묘한 인연으로 만난 둘이지만 점차 서로를 아끼게 되는 전개과정이 제법 귀엽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과일가게로 둘이 쇼핑하러 간 장면에서의 제인폰다의 애틋한 표정연기와 존의 옷자락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극의 품격을 높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이 시기 베트남전에 대해 소리 높여 비난했던 제인폰다는 반전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의 심볼로 부상되었고 극 중에서도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몸부림치는 도시여성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이 덕분에 그녀는 그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The Bank D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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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righted 1940 – Universal Pictures Corp.” – Scan via Heritage Auctions. Cropped from the original image., Public Domain, Link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만큼은 아니었지만 헐리웃 코미디의 또 하나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W.C. Fields(본명 William Claude Dukenfield) 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의 걸작.

술과 담배에 절어 살며 식구들로부터 천대를 받는 한량 Egbert Souse(주인공은 늘 사람들에게 “소세이”로 발음해달라고 요구한다)는 블랙푸쉬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우연히도 영화감독 자리가 맡겨지는가 하면 뜻하지 않게 은행 강도를 잡은 용감한 시민으로 둔갑하게 된다.

은행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에게 은행경비원 자리를 제안한다.(집에 가서 장모에게 이를 자랑하는 소세이에게 장모는 “우리 집을 저당잡고 있는 그 대단한 은행 말이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자못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감지된다(!)) 어쨌든 소세이는 나름 은행경비원의 임무를 (블랙푸쉬 카페에서) 성실하게 수행한다(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던 꼬마를 을러대기도 하는 등).

한편 소세이는 카페에서 만난 채권장사의 말에 현혹되어 미래의 사윗감인 은행직원에게 채권투자를 종용하고 솔깃한 은행원은 공금을 유용하여 투자를 감행한다. 때마침 은행감독원이 은행에 찾아들고 이때부터 그들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 와중에 또 다시 은행에 강도가 들고 소세이는 인질이 되어 자동차를 몰고 강도와 도주하게 된다.

Fields 는 어린이, 개, 여자를 싫어하지만 술과 담배를 사랑하는 염세주의자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페르소나를 창조하여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캐릭터가 분명히 드러나는데 주인공의 냉소는 마지막 자동차 추격씬에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적인 웃음을 선사한다. 때문에 이 라스트신은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라스트신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7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 – 하나는 슬랩스틱 코미디라면 하나는 개그라 불리는 – 모두에서 깔끔하고 상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The Last House on the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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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HousePoster“. Via Wikipedia.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웨스 크레이븐의 1972년 감독 데뷔작. 꽃다운 나이의 두 소녀가 철없이 마약장수로 보이는 꼬마에게 접근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변을 당하게 된다. 그 꼬마는 네 명의 탈옥수의 일행이었던 것이다. 강간과 납치, 그리고 끝내는 잔인한 살육까지 자행하는 탈옥수들의 눈에서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들이 살육을 자행했던 그 숲의 건너편에는 피해자 중 한 소녀의 집이 있었고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그 집에서 일박을 청한다.

우연히 악당들의 대화를 들은 소녀의 어머니는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고 끔찍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영화는 B급 영화의 미덕을 살려 폭력적인 면에서 나름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납치당한 소녀에게 바지에 오줌을 싸보라고 을러대는가 하면 두 소녀가 성관계를 갖게 하며 이를 즐기는 등 엽기적인 – 그러나 실제 상황이라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 장면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부모들의 복수극도 못지않게 엽기적인데 -사실 엄마의 복수극이 가장 엽기적인데너무 잔인한(!) 스포일러라 생략 -특히 소녀의 아버지가 악당에게 사용하는 전기톱은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에서 사용되기 2년 전에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방면의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처녀성을 잃고 숨진 딸을 위해 복수하는 부모라는 설정에 있어 잉마르 베르히만의 The Virgin Spring 과 비교되기도 한다는데 – 이 영화가 잉마르 영화의 리메이크라고 하거나 또는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거나 등등 – ,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주제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이런 저런 상황으로 변주되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처녀성은 ‘절대’선(善)을, 강간은 ‘절대’악(惡)을 의미하니 악을 응징하는 보복은 정당성을 획득하고 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 역시 악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이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독자나 관객에게 극적쾌감을 안겨주니 이 이상 더 좋은 플롯이 어디 또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만드는 이나 수용하는 이나 아무런 죄책감 없이 폭력의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도이다.

반면 감독 웨스 크레이븐은 이 영화의 제작의도가 당시 미국이 치루고 있던 베트남전을 보면서 느낀 “폭력의 실상에 대한 내 인식이 반영된 영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들은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어떠한 폭력도 용서될 수 없다는’ 평화적인 메시지로 수렴되어야 할 텐데 정말 그러할지는 오리무중이다. 다만 폭력적인 영화가 상영되는 주말에 그 인근에서 폭력범죄가 감소한다는 희한한 조사결과도 있는 만큼 이 영화가 상영된 극장 인근에서 감독이 의도한 효과가 있을 개연성도 있겠다.

요컨대 이 작품의 미덕은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하위장르 중에서 현실에 근접한 일종의 ‘리얼리즘적인 공포영화’(내 마음대로 장르 규정하였음)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동 시대의 다른 공포영화들이 ‘엑소시스트’와 같은 초자연적인 소재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처럼 좀비/괴수 영화 장르로 약진할 때에 웨스 크레이븐은 나름대로 현실에 기반을 둔 사회적 이슈로 승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감독의 장기는 이 후 ‘공포의 계단’이나 ‘스크림’ 등에서 십분발휘되었다.

한편 이 영화는 2007년 개봉예정으로 리메이크 작업 중이라고 한다.(2009년에 발표됨)

The Parallax View

정치적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정치 스릴러의 귀재인 Alan J. Pakula 가 그의 전성기였던 1974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케네디의 암살사건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분명한 이 작품은 호쾌하게 펼쳐지는 화면 안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과 삼류신문기자 조 프래디의 대결이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시애틀의 전망대인 스페이스니들에서 유망한 정치가가 총격에 쓰러진다. 다른 이가 그를 쏘았음이 분명하지만 엉뚱한 친구가 저격범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비명횡사한다. 조사위원회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하지만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이 하나둘씩 의문사 한다. 마침내 음모집단의 존재를 눈치 챈 조 프래디는 현장탐방에 나서고 우연히 Parallax Corporation 이라는 이상한 회사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감독은 관객에게 스릴러 특유의 묘미인 반전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를 통해 정치적 음모집단이 어느새 우리 곁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그럼으로써 얼마나 자주 우리를 기만하는지를 각성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감독의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주제를 각인시키고자 하느 그의 형식실험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A Shot in the Dark

어느 부유한 사업가의 저택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보고를 받는 경찰서의 고위간부 드레퓌스에게 보고자는 ‘재앙’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재앙은 바로 그 사건의 담당 형사로 클루조 형사(피터 셀레스)가 배정되었다는 사실.

그들의 걱정대로 클루조 형사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분수에 빠지고 코트에 불을 내고 마침내 이층에서 떨어지는 등 온갖 사고를 몰고 다닌다. 때마침 도착한 드레퓌스는 그를 사건에서 제외시켜버리지만 고위층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다시 클루조가 사건을 담당한다.

같은 해 만들어진 유명한 코미디물 Pink Panther 를 통해 창조된 캐릭터 클루조 형사를 재활용한 일종의 속편 성격의 작품으로 전편에 버금가는 피터 셀레스의 완벽한 슬랩스틱 연기를 통해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물론 피터 셀레스는 자신의 캐릭터가 이렇게 정형화되어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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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1962)” by The poster art can or could be obtained from Warner Bros. Pictures.. Licensed under Wikipedia.

캐시 베이츠가 Misery에서 식칼로 관객들을 위협하기 28년 전에 이미 베티 데이비스가 특유의 그 가공할(!) 눈매 하나만으로도 – 이 시점에서 Bette Davis Eyes 를 BGM으로? – 관객을 넉아웃시켰다. Kiss Me Deadly 등으로 B급 무비의 거장으로 떠오른 로버트 알드리치의 1962년 작으로 연예계에 종사하던 자매의 갈등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이 몸서리치는 공포영화를 창조해냈다.

Baby Jane 은 춤과 노래의 신동으로 가족의 자랑거리임은 물론 자신을 캐릭터로 한 인형이 나올 정도의 아역스타이다. 그런 그녀를 무대 뒤에서 바라보는 언니 Blanche 는 분노의 눈물을 삼킨다. 세월은 흘러 둘이 성인이 되었을 즈음에 상황은 역전이 되었다. Blanche 는 최고의 흥행배우로 성장했고 Jane 은 천덕꾸러기 싸구려 배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언니 Blanche 는 그런 동생을 감싸준다. 그러던 어느 날 끔찍한 교통사고 Blanche 가 하반신 불수가 되면서 그녀의 연기 인생을 막을 내린다. 사람들은 Jane 이 질투심에 일으킨 사건이라고 수군거린다. 세월이 흘러 초로의 여인들이 된 자매는 한집에 살면서 옛 추억을 곱씹으며 세월을 보내지만 어느 날 Jane 의 행동이 이상해지면서 영화는 급반전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테마를 공포영화의 소재로 사용한 감독의 가치전복적인 발상이 놀라운 영화이지만 그러한 반문화적인 쾌감에만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탄탄한 구성과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 – 특히 김완선보다 더 무서운 눈의 소유자 베티 데이비스의 연기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눈살이 찡그려질 정도다 – 등에 힘입어 독특하고 매혹적인 한편의 가족공포물의 걸작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충격적인 라스트신은 그 충격이 가히 찰턴 헤스턴이 절망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혹성탈출’ 급이라 할만하다.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e(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비록 이 영화의 소개에 의례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실험주의 등과 같은 친해지기 어려운 단어들이 함께 하지만 이를 너무 심각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른 걸 다 제쳐두고라도 이 영화는 건방진 부르주아를 약 올리는 흥겨운 마당극 한판일 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부르주아들은 외교관의 신분을 이용한 더러운 마약거래에 손대고 가장 친한 친구의 와이프와 거리낌 없이 바람을 피우는 족속들이지만 대마초를 피우는 군인을 비난하고 마티니를 마시는 법을 모르는 운전기사를 조롱한다.

그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매일 밤 만찬으로 자신들의 넉넉함을 과시하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만찬은 이런 저런 이유 탓에 연기된다. 심지어는 그들이 결국 무대 위의 배우라는 사실이 들통 나(?) 만찬이 연기되기도 한다. 루이스 브니엘은 이런 만찬 실패담(?)을 큰 줄기로 다양한 캐릭터의 몽환적인 꿈 이야기를 배치해 영화에 시적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결국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관객의 극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차단하지만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과장된 행동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진지하게 – 코미디를 진지하게 연기하고 있으니 더욱 코미디스럽다 – 연출되고 있기에 이 작품이 의의를 가지는 것이리라(상투적인 “꼭 봐야할 영화 100선”따위에 불명예스럽게 매번 거론되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