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영화

The Jerk

스티브 마틴은 찰리 채플린이 아니다. 우디 알렌도 아니다. 그에게서 찰리 채플린 식의 사회비판 정신과 페이소스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또한 우디 알렌 식의 도시우화도 기대하면 안 된다(물론 직접 시나리오 작업까지 참여한 L.A. Story에서 이런 가능성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의 주전공은 아니다). 그는 그보다는 차라리 부조리한 상황설정을 통해 휘발성의 웃음을 선사하는 – 때로는 어이없기까지 한 – 개그맨에 가깝다. 일부 평자들은 이런 유의 웃음을 깊이가 없다며 비판하지만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 코미디언의 본분이라는 정의에 비추어 본다면 그가 가장 재능 있는 코미디언중 하나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The Jerk 는 그런 스티브 마틴의 매력이 잘 배어나오는 코미디다. 가난한 흑인 소작인의 집안에서 자라나 자신이 흑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살아온(!) Navin R. Johnson (Steve Martin)은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영감을 얻어 집을 떠나 도시로 간다. 우연히 얻은 일자리는 주유소 직원. 이 주유소에서 그는 우연히 안경이 흘러내리는 것을 불평하는 손님의 안경에 작은 장치를 달아 불편을 없애준다. 이후 연쇄살인자에게 쫓기고, 새로 얻은 직장인 서커스단에서 만난 스턴트우먼에게 성적학대(?)를 받고, 마침내 아름다운 미용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낸다. 그 와중에 네이빈이 만들어준 안경으로 특허를 내어 성공한 손님이 그를 찾아 엄청난 수익금을 안겨줌으로써 일약 백만장자가 된다.

섹스가 무엇인지도 몰라 첫경험을 가족들에게 자랑하기까지 하는 멍청이 네이빈이 겪는 좌충우돌 인생사는 한참 후에 로버트 제메키스에 의해 만들어진 포레스트검프를 연상케 한다(물론 각각의 작품이 함의하는 메시지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또한 확실히 짐캐리 등이 주연한 덤앤더머는 스티브 마틴이 창조한 이 바보 캐릭터의 영향권 아래 있다(짐 캐리의 초기 캐릭터들은 스티브 마틴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동시대에서 그의 연기스타일과 비교될 수 있는 이는 몬티파이튼의 친구들, 특히 존 클리스를 들 수 있다.

스티브 마틴이나 그의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앞서의 두 위대한 코미디언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스티브 마틴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 확실히 기대에 충족시킨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뛰어난 연기자이다. 더구나 연기인생 중반기 이후부터는 출연작의 시나리오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작가로서의 능력도 증명하였다.

Monsieur Hire

Monsieur Hire.jpg
Monsieur Hire” by http://www.allocine.fr/film/fichefilm-4755/photos/detail/?cmediafile=18658504. Licensed under Wikipedia.

철없는 금발미녀 Alice는 건달과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하는 것이 소원이다. 바로 길 건너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외모의 독신자 Hire 씨의 취미는 브람스의 피아노곡을 틀어놓은 채 Alice(Living Next Door To Alice?)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취미(?)의 Hire 씨는 경찰로부터 또 다른 금발미녀를 살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어느 번개 치는 저녁에도 Alice 를 훔쳐보던 Hire 는 그만 Alice 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고 만다. 그러나 대범하게도 Alice 는 Hire 에게 접근하여 그를 은밀히 유혹한다. 너무 사랑하여 감히 그녀를 손댈 수 없는 Hire 는 그녀의 향수와 같은 종류의 향수를 음미하며 그녀를 회상한다. 왜 Alice 는 보잘 것 없는 Hire 에게 접근하는 것일까? 이것이 살해사건과 함께 또 하나 영화가 던져주는 미스터리다.

우리에게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Hairdresser’s Husband)”로 유명한 Patrice Leconte 감독이 그 영화를 만들기 한 해 전에 만든 작품이다. 스릴러라는 장르 형식을 띤 작품으로서는 이채롭게도 화면과 내러티브는 나직하고 은근하다. 그것은 Alice 를 사랑하는 – 그 사랑이 관음증적 사랑이라는 왜곡된 형태이기는 하여도 – Hire 의 고단한 일상을 소묘하기에는 그만이다.

Hire 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을까? Alice 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을까? 아니면 그 둘은 선택할 다른 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Paths Of Glory

Paths of Glory (1957 poster).jpg
By “Copyright 1957 United Artists Corporation.” – Scan via Heritage Auctions. Cropped from the original image., Public Domain, Link

개인적으로는 영화 감상할 때 롱테이크니 트래킹샷이니 하는 현란한 영상문법보다는 내러티브에 빠져드는 편이다. 영화에서의 영상기법이나 소설에서의 문체는 그 자체로도 감상포인트이긴 하나 역시 매력적인 이야기를 꾸며주는 양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탠리큐브릭의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각적 요소의 탁월함과 현란함은 그 자체로도 매료될만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개미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장면이나 참호 속을 시찰하는 장면은 유사한 장면의 연출에 있어 고전으로 남을만한 – 또는 지금 재탕을 해먹어도 여전히 매력적일만한 – 표본으로 남을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물론 지나친 비주얼함이 극의 집중에 방해가 될 만도 하나 적어도 개인적으로 그로 인해 내러티브를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반전(反戰)영화로 자리매김하였고 프랑스 군인에 대한 – 또는 군대 체제에 대한 – 신랄한 시각으로 말미암아 1975년까지 프랑스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이 작품은 큐브릭의 영화이력의 이정표로 인정되고 있는 역작이다. 그의 개인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일 수도 있는데 영화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배우 Susanne Christian 은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서부전선에서 사령관 역할을 하고 있던 Broulard 장군은 개인영달을 위해 가능성 없는 개미고지의 점령을 명령하고 Dax 대령은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부하들의 피해를 뻔히 알고도 진격명령을 내린다. 일부 부하들이 진격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진격은 막대한 피해만 남긴 채 실패한다. 분노한 Broulard 장군은 희생양을 위해 무고한 사병 셋을 군사법정에 회부한다.

전직 변호사였던 Dax 대령은 그들을 변호하지만 법정에는 기소장도 없었고 증거제출도 거부한 채 사병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그 와중에 Broulard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령이 양심적인 장교의 고백에 의해 밝혀지지만 군부는 사형언도를 취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내용을 Broulard 장군의 축출에 활용한다. 이러한 더러운 암투에 Dax 대령은 진저리를 치지만 부하사병들이 포로로 잡힌 한 독일소녀의 노래에 나지막한 허밍으로 동참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다.

명백히 잘못된 명령임에도 이에 복종하였으나 이내 부하들을 감싸기 위해 희생양을 자처한 Dax 대령의 캐릭터는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보다는 고뇌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나약한 인간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그럼에도 말미부분에 암시되는 새로운 희망은 약간 작위적인 면이 없잖다. 차라리 부하사병들이 독일소녀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보다는 그녀를 더 그악스럽게 약 올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와 아래에서 모두 배신당하는 Dax 대령의 모습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The Sand Pebbles

Sound Of Music 으로 유명한 Robert Wise 감독이 Richard McKenna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여 Sound Of Music 을 제작한 이듬해인 1966년 만든 반전(反戰)영화이다. 시대는 1926년 혼란기의 중국에 정착 중인 San Pablo 라는 군함 – 선원들은 이 이름 대신에 조약돌이란 뜻의 Sand Pebbles 라고 부른다 – 에 배속된 Jake Holman(Steve McQueen)은 군인정신 투철한 군인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배의 엔진에만 관심이 있는 엔지니어를 자처한다. 여정 중에 만난 아름다운 여인 Shirley Eckert(Candice Bergen)에 연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사회적이고 냉소적인 성격 탓에 극 초반 더 이상의 로맨스는 진행되지 않는다.또한 이러한 그의성격 탓에 동료들 중에서도 유일한 친구는 Frenchy(Richard Attenborough)뿐이었고 함장인 Collins(Richard Crenna)와도 충돌을 빚곤 한다. 

193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동안 화면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중국의 혼란상을 배경으로 국민당 군인 등 중국인과 미군과의 갈등, Mailey라는 중국여인과 Frenchy 의 가슴 아픈 사랑, Jake 와 Shirley 와의 만남, Jake 의 억울한 누명과 이로 인해 빚어지는 선상반란의 긴박감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극적긴장감을 유지한다. 영화는 표면상으로 중국인 폭도들의 잔인함과 Collins 함장의 강직한 군인정신, 또는 신사도를 대비시켜 자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포장하고 있으나 또 다른 이면에는 전쟁의 비참함과 부질없음을 깔면서 이 영화의 제작당시 자행된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헐리웃 주류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감독과 작품 자체의 한계로 인한 타협으로 보이는데 Jake가 영화 말미 함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무정부주의적 성향의 선교사를 두둔하며 자신에게는 맞서 싸울 적은 없다고 선언하는 부분에서 감독의 제작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극중 등장한 San Pablo 호는 실존했던 군함이 아니라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에서 쓰였던 미군전함 Villa Lobos 를 모델로 홍콩에서 제작된 것이라 한다. 당시까지 중미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홍콩과 대만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Steve McQueen 은 이 작품에서의 호연 덕택에 생애 유일하게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

마녀는 누군가의 이름을 바꿔서 그를 지배한다. 우리가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호명하는 행위는 그 사물을 정의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작단계이다. 이름 모를 새나 이름 모를 꽃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우리는 그 새나 그 꽃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또는 그것들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붙여진 그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그것들을 우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명확한 의지표현이다.

치이로라는 이름이 과분하다며 센으로 이름을 바꿔버린 마녀 유바바의 행동은 그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지배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센은 부모님이 지어주었을 자신의 본명을 계속 기억함으로써 자신을 노예로 부리고 부모님을 돼지로 둔갑시킨 유바바의 지배에 저항한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 준 하쿠의 본명을 알려줌으로써 그의 해방을 도모하기도 한다.

<앨리스의 이상한 모험>과 <오즈의 마법사>의 일본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히야오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삿날 길을 잘못 들어버리는 바람에 겪게 되는 정령(精靈)들의 목욕탕에서의 한바탕 소동은 히야오가 이전부터 관심을 가져오던 주제, 즉 어린 소녀의 성장기와 환경오염에 대한 경고가 적절히 결합된 한편의 판타지다. 버블경제의 몰락으로 쇠락해버린 버려진 유원지라는 공간의 설정이 흥미롭다. 다만 개인적으로 컴퓨터그래픽과 수작업으로 그려진 그림간의 미스매치가 다소 눈에 거슬린다.

Young Frankenstein

패러디의 천재 멜브룩스가 1931년 제작된 공포영화의 걸작 Frankenstein 을 리메이크했다. 그리고 이 작품도 걸작이 되었다. 선조의 성을 물려받게 된 Dr. Frederick Frankenstein(Gene Wilder)은 세계적인 과학자이면서도 그의 할아버지가 시도했던 시체 되살리기 실험의 재개를 단연코 거부한다. 성에는 어딘가 괴기스러운 하녀 Inga 와 하인 Igor가 기다리고 있다.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여 결국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의 할아버지가 시도했던 신의 영역으로 도전을 재개하기로 한다. 멍청한 하인 이고르(정말 골 때리게 웃긴다)가 뇌를 잘못 가져오는 바람에 살아난 시체는 엄청난 육체적 능력에 걸맞지 않는 멍청이로 재탄생해야만 했다(갑자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생각나). 그런 그에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탭댄스라도 가르쳐보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멜브룩스가 만든 또 다른 작품 Blazing Saddles 와 함께 그의 감독이력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Gene Wilder 가 공동집필하였다.

Rear Window

히치콕의 제작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너희들도 훔쳐보고 싶잖아. 그치?”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는 짐짓 점잔을 빼며 남의 일에는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Privacy 의 개념을 발전시켜왔다. Curiosity Killed The Cat, Nono Of Your Business 등과 같은 영어 관용구는 이러한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 또는 동물에게 –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붐비는 거리 한 가운데서 누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도 나도 하늘을 쳐다보고야 마는 그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이 누구에게나 내재해있다. 영화는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함이 없이 충족시켜주는 적절한 매체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L.B. Jeffries(James Stewart)은 다리를 다쳐 깊스를 하는 바람에 영화를 보러가거나 하는 그런 욕구분출구가 없었다. 그래서 옆집의 안방을 슬금슬금 훔쳐보기 시작했다. 관객은 주인공의 눈을 통해 이 훔쳐보기에 동참했다. 때마침 그의 훔쳐보기를 정당화시켜줄만한 일이 벌어졌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Jeff 는 몸이 달아 이 상황을 애인에게 알리고 애인(Grace Kelly)은 그의 발을 대신해 살인현장에 잠입한다. 한정된 공간과 주인공의 한정된 능력이라는 설정은 스릴러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데 한 몫 한다. 결국 살인사건을 해결하게 됨으로써 주인공은 영웅이 되었지만 그의 훔쳐보기는 Michael Powell 의 1960년 작 Peeping Tom 의 주인공의 그 음란한 훔쳐보기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할 것이 없다. 훔쳐보기란 애당초 사건해결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일종의 원죄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이다. Brian De Palma 감독이 Body Double에서 이러한 설정을 오마쥬했다.

Dreamgirls

어쩌면 뮤지컬 영화야말로 가장 헐리웃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장르라 할 것이다. 비록 그 출발은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권이었지만 영화화 등을 통한 상업성에 있어서는 단연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영화는 프로파간다라기보다는 ‘환상의 실현’이라는 생각을 가진 – 어쩌면 가장 교묘한 프로파간다일지도 – 영화인들은 선술집 극장쇼에 스토리를 집어넣으면서 발전한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스크린에 끌어들이면서 일상에 지친 관객들에게 꿈과 환상을 전달했다.

유성영화의 등장은 헐리웃 뮤지컬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기술적 발전이었다. 이에 따라 브로드웨이 등에서 수혈을 받아 MGM을 중심으로 거칠 것 없이 발전해오던 헐리웃 뮤지컬 영화는 이후 사실주의적인 영화장르의 발달, 뛰어난 뮤지컬 배우들의 쇠락, 조지거쉰과 같은 뛰어난 뮤지컬 작곡자들의 사망 등으로 말미암아 비인기 장르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Bill Condon 은 시카고, 드림걸스 등을 통해 뮤지컬이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82년 초연한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흑인음악의 메카 모타운과 인기 흑인 여성 트리오 슈프림즈의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캐릭터들은 실존인물인 모타운 설립자 베리고디주니어, 슈프림즈의 리더 다이아나로스,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마빈게이 등과 오버랩되고 있다. 극 후반으로 가면서 영화의 주연으로 급부상하는 에피는 슈프림즈의 싱어 플로렌스 발라드를 대변하고 있다. 극적 구성에 있어서는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탄한 것이 뮤지컬의 특성인 반면 이 영화에서는 한 신인그룹의 성장과 갈등, 비정한 음악 비즈니스 계의 단면, 이후 극적반전 등을 통해 나름대로 탄탄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극중 레코드사의 사장인 커티스테일러주니어는 비주류인 흑인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리는데 일조를 한 반면 비즈니스를 위해 소속가 가수들에게 독재를 휘두르는 야누스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Phantom of the Paradise에서 Swan 이 지녔던 악마성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할 수도 있겠다. 뮤지컬이 은연중에 백인음악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면 이 영화는 흑인음악을 소재로 하고 있는 만큼 당연하게도 R&B를 주조로 하는 정열적인 흑인음악이 전편에 걸쳐 펼쳐진다.

극 초반 지미얼리 – 에디머피가 연기했는데 썩 훌륭했다 – 가 부르던 정열적인 댄스곡에서부터 팝이 가미된 드림걸스의 음악 등 오늘날 대중음악의 주류로 자리잡은 흑인음악의 소사(小史)가 귀를 흥겹게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확 잡아당기는 ‘훅(hook)’이 부족한 게 흠이다. 이 작품에는 제이미폭스, 비욘세놀즈, 에디머피 등 현재 흑인 연예계를 주도하는 주요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연 이 영화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한 – 아메리칸아이돌에서 불운하게 그랑프리를 놓친 – 제니퍼허드슨이다.

첫 출연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연기력과 가창력을 통해 일약 헐리웃의 차세대 스타로 떠올랐는데 영화계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비롯한 여러 영화제의 수상으로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축하해줬다. 다만 극 중반 그녀가 부르는 솔로곡 And I Am Telling You I’m Not Going 의 애절함에 많은 비평가들이 극찬을 하였는데 개인적으로는 너무 길어서 지루했다. 아무튼 이 영화 한편으로 헐리웃이 전전(戰前)에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뮤지컬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리라 보긴 어렵지만 적어도 하나의 메이저 장르로서의 체면치레는 계속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P.S. 영화의 헤피엔딩과 달리 플로렌스 발라드는 팀에서 축출된 후 불운한 인생을 살다가 32살의 어린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멤버들 간의 불화도 해소되지 않았다.

絞死刑(Death By Hanging)

극은 한 사형수 R의 교수형이 처해지는 장면의 묘사로 시작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밧줄에 매달린 R은 의식은 잃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당황한 참관인들(교도관, 검사, 신부, 의사 등)은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살리는 희극에 뛰어든다. 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R은 자신이 R임을 깨닫지 못하고 참관인들은 R의 성장배경과 그가 저지른 강간살인을 재연하며 R이 R임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재일 한국인이었던 R의 어두웠던 가정환경, 그의 범행동기, 살인 당시의 상황이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R은 결국 자신 스스로는 사형을 받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국가의 또 다른 범죄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모든 사형 받을 이들을 대신해 사형을 받겠노라고 스스로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하고 교수형으로 사라져간다. 결국 어쩌면 이 모든 사형을 둘러싼 참관인들의 해프닝은 R이 교수형을 받으며 아래로 추락하는 찰나의 순간에 꾸었던 꿈일지도 모른다. 루이스 브뉘엘 스타일의 실험적인 코미디 형식을 빌려 실제 있었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사형을 다룬 이 영화는 사회적 징벌로써의 사형의 부적절함,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무지와 편견, 스스로 살인자였던 일본이 또 다른 살인자를 처벌하는 모순 등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한 편에 소화해내고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이슈를 나름의 시각으로 펼쳐내어 대가로 인정받은 오시마 나기사는 진정한 범죄자는 전쟁으로 국민들을 내몰아 수만 명을 살인한 국가임을 고발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R의 역은 실제 한국인인 윤윤도가 열연하였다. P.S.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미국에서는 1950년대 실제로 사형수가 형집행 후에도 살아남은 일이 있었다. 부실한 전기의자의 성능 탓이었다. 사형수는 같은 범죄로 두 번 처벌받을 수 없다며 사형을 재개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으나 기각되고 두 번째 전기의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미성년자인 흑인이었다.

오시마 나기사에 대해 알아보기

War Of Worlds

Steven Spielberg가 2005년 감독한 이 영화는 H.G. Wells 의 동명의 소름끼치는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스토리는 사뭇 다르다. 당연히 원작에 충실했던 Byron Haskin 감독의 1953년 작과도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전편이 등장인물 들 사이의 인간관계보다는 우주생물체의 습격의 스펙터클함에 주력하는 반면, 이 작품은 무책임한 노동자 남편 Ray Ferrier(Tom Cruise)가 그의 아들딸을 우주괴물들로부터 보호하는 과정에서 복원되는 가족애를 중심축에 두고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에 따라 스펙터클 역시 전편보다 훨씬 뛰어나다. 사실 원작의 내용을 보자면 거의 무기력에 가까운 군대의 화력으로는 애당초 우주괴물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결말이 다소 어이없을 수밖에 없기에 이 단점을 극복할 필요는 있었다. 따라서 리메이크 작품은 뭔가 관객의 시선을 잡아당길 수 있는 스토리를 삽입하였고 이전 작품에서 가족을 중심축으로 두곤 했던 스필버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함에 결국 이 영화는 딸(Dakota Fanning)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에 관한 가족영화라 할 수 있다. 부제로 “Saving Dakota Fanning”을 달아도 어색하지 않다. 

어쨌든 “우주괴물의 습격”이라는 소재는 오손 웰즈도 탐낼 만큼 픽션에서 언제 써먹어도 질리지 않는 소재이다. 당초 스필버그는 수년에 걸쳐 이 소재를 영화화할 계획이었으나 90년대 말 Independence Day, Armageddon 등 이른바 이런 유의 영화제작이 붐이어서 이 시기를 피해 2005년 제작하였다고 한다. 흥행을 염두에 두었을 포석이지만 어쨌든 작품성으로만 놓고 보자면 앞서의 두 영화보다는 이 영화의 작품성이 우수함은 분명하다. 약간은 질리기도 하지만 “가족”이라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바탕에 깔고 있고 스토리 전개 역시 앞서의 영화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다만 편집증적 인물 Ogilvy(Tim Robbins)의 등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곁가지로 이야기하자면 헐리웃이 이런 유의 스펙터클 영화를 제작할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펜타곤에 협조를 요청한다고 한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본격화된 이러한 공생관계는 군의 협조를 통한 제작비 절감을 노리는 헐리웃과 프로파간다로 영화를 활용하고자 하는 군 당국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곤 했다. 역시 Tom Cruise 가 주연을 맡았던 Top Gun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공생관계를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앞서 언급한 두 영화 Independence Day, Armageddon 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펜타곤은 Independence Day에서 군인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작협조를 거절했고 아부로 점철된 협조공문을 보낸 Armageddon 은 군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다는 당국의 자체판단에 의해 전폭적인 협조를 받았다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 War Of Worlds 는 펜타곤의 협조를 받았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군인의 활약상이 Independence Day 보다 더 형편없기 때문이다. 기껏 보호막이 제거된 우주괴물에 박격포 몇 발 날려 쓰러트린 것이 전적의 전부인데 군이 협조했을리 만무했을 것이다. 물론 우주인들도 자신들을 “악의 세력”으로 그렸으니 협조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스필버그나 되니까 누구의 협조도 없이 이런 거창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