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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Lies Love

오랜 기간의 준비 끝에 David Byrne과 Fatboy Slim의 공동 프로젝트 “Here Lies Love”가 내년 2월 23일 발매될 예정이다. 2개의 CD(각각 다른 싱어가 노래하는 22곡 수록), 이들 곡중 여섯 곡의 비디오가 담긴 DVD,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100페이지의 책이 패키지로 선보일 예정이다. 싱어는 Florence Welch, Santigold, Sharon Jones, Roisin Murphy 등이 참여했다.

talkingheads.net

꽤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Talking Heads Net 을 블로그 체제로 개편했습니다. 그냥 news feed에 걸리는 Talking Heads 관련 소식만 – 거의 David Byrne 에 관한 소식이었지만 – 업데이트하곤 했는데 아예 싹 갈아버리고 예전 콘텐츠를 업데이트해서 조금씩 올릴 생각입니다. 이 사이트와도 연관이 있으면 같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에드윈 콜린스 인터뷰

이 포스트에서 이어진다.

 그 당시 스미스가 포스트카드 소속 밴드들을 따라한 걸까요?

내가 듣기로는, 스미스의 첫 앨범이 나오기 이전부터, 조니 마는 로디 프레임 (주: 아즈텍 카메라의 프론트맨)한테 푹 빠져있었다고 하더군요.

 

‘Simply Thrilled Honey’나 ‘Consolation Prize’의 가사에서 모리시가 후에 ‘Pretty Girls Make Graves’에서 표현한, 과도하게 성적인 여성을 감당할 수 없는 신경쇠약에 걸린 나약한 타입의 인물을 예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거칠고, 나는 너무 나약해.’

글쎄요. 스미스가 등장하기 전에도 우리는 이런 저런 음악을 만들었죠. 하지만 그건 철저히 포스트 펑크적인 것이었습니다. ‘로저 맥긴 같은 헤어스타일을 해봤어’라는 가사를 만들었고, 버즈 풍의 12현 리켄바커를 사용했습니다. 반면 스미스는 그보다 한층 더 나갔습니다. 그들은 사운드를 더 듣기 좋게 만들었어요.

 

당신이 추구한 것이 일반적인 포스트 펑크는 아니었습니다. 대신 유머를 담고 있었죠. 포스트 펑크는 고뇌로 가득 찬 황량한 정서를 다뤘어요. 하지만 오렌지 주스는 슬픈 노래에서마저도 위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건 다소 뒤틀린 위트이긴 했지만요. 또 당신은 스스로를 보고 웃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비통한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에 관한 가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그 생각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흔히 우리는 본능적으로 상당수의 록음악이 바보 같다고 의구심을 품게 되잖습니까. 특히 많은 이들이 흔히 심오하다고 여기는 록음악에 대해서는요 –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수지 앤 더 밴시스 (주: 런던 출신의 고딕 펑크 밴드)나, 혹은 보다 보편 타당한 예인 이언 커티스는 멋쟁이 토리 (주: Tory) 청년이었어요. 어떤 이들이 짐 모리슨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를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커티스가 그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난 조이 디비전의 몇몇 곡은 좋아했지만, 그들의 추종세력은 탐탁지 않았습니다.

 

1980년에서 81년 사이 언론은, 오렌지 주스와 포스트카드를 이언 커티스의 죽음 이후 상징화되고 절정에 달했던 환각상태의 음습함 위에 비친, 삶을 긍정하는 한줄기의 빛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것 같군요. 물론 많은 기사는 그저 즉각적인 반응이었던 것이지만요. 이런 류의 염세성은 우스꽝스러워요. 섹스 피스톨즈가 그런 존재였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 로튼이 보여준 들뜬 격렬함과 분노는 진짜배기였어요. 그가 역설하던 것은 대단히 영리한 생각이었지요. 그는 영국 음악계의 커다란 흐름의 변화를 대표하는 이였습니다. 그 덕분에 내가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피스톨즈 이후 나타난 모든 것들, 1세대 펑크 밴드 – 버즈콕스, 클래시, 빅 고다드 – 는 흥미로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음악을 시작하던 당시엔 별 쓰레기 같은 밴드도 많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진지하게 생각했죠. 펑크를 어떤 추진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단지 작은 게슈탈트 전환을 이루려는 시도일 뿐이었습니다.

 

포스트 펑크는 인디 레이블과 협력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 방식은 1980년엔 이미 게토화가 진행된 상태였죠. 포스트카드는 인디 레이블이긴 했지만, 게토에서 벗어나 차트에 진입하려는 시도를 했어요.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짓이었죠. 우리에겐 차트에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거든요. 펑크가 흥미로웠던 것은, 그게 처음 등장했을 땐, 대단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통제불능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등장했을 무렵엔 많은 펑크와 포스트펑크 밴드가 지루한 음악을 만들고 있었어요. 펑크의 공식과 현실에 대한 순응에 잠식당한 거죠.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던 겁니다. 한 줌의 관심이라도 얻고 싶으면 뭔가 다른 걸 해야만 했죠. 우리가 했던 게 그렇게 인위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요: 어떤 선언도 없었구요. 우리가 어떻게 주목 받을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한 적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알란 혼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스티븐 달리가 리슨이라는 체인 레코드숍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알란을 만났고 우리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어요. 우리가 조니 앤 더 셀프 어뷰저스, 스틸 펄스, 백스태버스를 서포팅하던 공연에 그가 왔었죠. 당시엔 새틀라이트 시티였고 현재는 글라스고 아폴로 (주: 1987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된 그 공연장에서 우린 거기서 공연하는 모든 밴드의 오프닝을 섰어요. 처음으로 연주한 곡은 Live 1969에 수록된 ‘We’re Gonna Have a Real Good Time Together’였죠. 그리고 그를 만났습니다. 알란은 당시엔 꽤나 통통했고 해리스 트위드 소재의 재킷을 입고 있었습니다. 옷깃엔 작은 나찌 버튼을 달고 있었죠. 그런 류와는 어떻게든 연관되고 싶지 않았어요. 알란은 우리와 함께 무대에서 영화 프로듀서스의 수록 곡인 ‘Springtime for Hitler’를 부르고 싶어했죠.

 

마지막 곡으로요?

그는 프로듀서스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알란은 영화 카바레에 나왔던 모든 글램록과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책을 좋아했어요. 록 앤 롤 애니멀 투어 시기의 루 리드는 그의 머리에 철십자를 새겨놓았죠. 보위와 그의 로우 앨범이 구체화시킨 베를린 데카당스와 관련된 모든 것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스티븐은 그걸 싫어했어요. 아무래도 그는 그런 게 지겨웠나 봐요. 그리고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 운동이나 그와 유사한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이 계속되자 알란이 이러더군요, ‘난 록에 반대하는 인종주의 운동 같은 걸 더 하고 싶은데.’

 

그는 그런 철딱서니 없는 나찌 관련 내용을 그의 팬진에 실었죠?

네. 그는 자신의 플랏메이트였던 브라이언 수퍼스타가 그린 조야한 만화도 싣곤 했어요. 그는 후에 파스텔즈의 멤버가 되었어요. 나찌 제복을 입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같이 놀기 좋은 사람이었나요? 알란 말입니다.

글쎄, 그때는 그를 그럭저럭 감당 비스무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하라면, 글쎄요… 그는 완전 조증인데다, 흥분을 잘하는 사람이었죠. 뭔가에 대해 우울해하거나 그게 아니면 완전 들떠버리는 –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었어요.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그런 사람이기도 했구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담 삼아, 미스터 포스트카드라고 부르면 정말 좋아했어요. 보스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맬컴 맥라렌이나 버니 로즈 같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는 폴의 매니저인 케이 캐롤 같은, 펑크 밴드의 매니저들에게 흥미를 가졌습니다. 초기 펑크 시기에 수행된 인터뷰를 보면, 매니저는 밴드의 프론트맨 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알란은 매니저들에 관해선 정말 빠삭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펑크가 위대한 것은, 그것이 매니저가 밴드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되는 ‘매니저 록’의 시기를 열었기 때문이라고 누누이 얘기했죠.

 

아, 그럼 그는 포스트 카드의 사장이자 오렌지 주스의 매니저였던 거네요?

포스트카드에 소속된 모든 밴드의 매니저 일을 하긴 했죠. 그런 척만 했던 것이던가요. 조셉 케이를 제외하곤 그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대망상증이었어요.

 

오렌지 주스와 다른 포스트카드 소속밴드는 친한 관계였나요?

난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다들 신경과민 상태였거든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민했구요, 모든 것이 과장되었던 시기인 사춘기를 막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쉽게 화내고 흥분하고 욕지거리를 했어요.

 

밴드내의 역학관계는 어떠하였습니까?

음, 밴드를 오래하고 싶었으면 데이브 맥클라이몬트를 밴드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예스 같은 밴드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좀 연주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원래 있던 베이시스트가 뉴-소닉스 [오렌지 주스 전의 밴드]를 탈퇴했을 때 그에게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결국은 그가 오렌지 주스가 겪었던 몇 번의 해체 상황을 주도하게 되었죠. 첫 번째 것은 조셉 케이가 해체하고 난 뒤의, 오렌지 주스가 5명으로 구성되어있었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맬컴 로스 (주: 조셉 케이의 기타리스트)가 우리 밴드에 있었죠. 다들 밴드활동에 좀 싫증이 난 상태였어요. 맬컴과 데이빗이 탈퇴를 했고 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어느 쪽에 붙어야 되지? 걔들은 제케를 드러머로 들이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죠,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우리 밴드는 좀 더 행복했을 겁니다. 그가 베이스 연주자로서 오렌지 주스의 음악에 대단한 공헌을 한 것도 아니었구요. ‘Rip It Up’의 베이스 리프는 내가 롤랜드 303 베이스 머신으로 만든 것이지요.

 

애시드 하우스 풍의 베이스 라인을 만드는 걸로 유명한 기계로군요.

출시된 지 1주일만에 구입을 했습니다. 이매지네이션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그들의 프로듀서인 스웨인과 졸리가 그 303 베이스 머신을 사용했다는 소릴 들었거든요. 마찬가지로 그 기계를 사용한 맷 비안코의 곡인 ‘Get Out Your Lazy Bed’도 접하게 되었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참 괴이한데. 일반 베이스 기타 같은 소리를 내는데 동시에 포르타멘토 (주: 다른 음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연주법) 도 가능하다니. 굉장히 매끄러워. 이 기계를 꼭 구해야겠어.’ 프로그래밍하는 건 정말 힘들었지만 우리 프로듀서가 어떻게 해결책을 찾았더랩니다. 제케가 베이스 음이 합성된 그 성공적인 트랙의 드럼 파트를 연주했죠. 303이 ‘Rip It Up’ 싱글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도 맥클라이몬트의 업적에 대해 조금 얘기해봅시다: 이보십쇼, 평가할 것은 평가해야죠. ‘Falling and Laughing’같은 초기 오렌지 주스의 싱글엔 정말 뛰어난 디스코 풍의 베이스라인이 존재한다구요.

아뇨. 그가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제안하긴 했지요. ‘Falling and Laughing’의 베이스라인 중 절반을 그가 만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베이스 연주는 정신 없었어요. 피터 훅 신드롬이었죠. 베이스와 기타를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연주요. 마치 베이스 소리가 바리톤 기타 소리 같아요.

 

‘Rip It Up’과 그 가사에서 표현된 지루함, ‘이거 끝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외침은 마치 오렌지 주스가 자신들이 선도했던 그 무브먼트가 시작하던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짝반짝하고 낙관적이며 차트 지향적인 음악을 만들겠다는, 새로운 팝 가치관 말입니다. 모든 것이 꼬였다는 생각이 든 적 있습니까? 아니면 오렌지 주스는 차트에 들지 못한 반면 다른 밴드가 당신이 제창한 아이디어를 사용하며 행복하게 차트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절망했나요?

헤어컷 100이 오렌지 주스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했죠. 아란 스웨터를 입은 제임스 (주: 맨체스터의 기타팝 밴드)의 사진도 본 적 있어요. 마찬가지로 얼터드 이미지스도 초딩 밴시스 이미지에서 탈피해 보다 포스트카드스러운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었죠.

 

얼터드 이미지스와 헤어컷 100이 차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며, 이젠 밴드의 방향성을 추스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 아마추어적인 매력을 뿌리며 보다 차트 경쟁력이 있는 음반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오.

그런 셈이죠. ‘Rip It Up’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수행한 실험이었습니다. 리듬 섹션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었어요. 리드 기타 사운드를 다듬을 때 오래된 70년대 훵크 머신이자 정교한 와와 페달인 머트론 바이페이즈를 사용했습니다. 톰 톰 클럽의 ‘Genius of Love’에서 그 사운드를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물론 그 기계엔 엄청 많은 매개변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작업물은 ‘Genius of Love’와는 전혀 달랐죠. 베이스라인을 보완할 수 있는 정제된 사운드를 원했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조합이예요. 초기곡인 ‘Falling and Laughing’이나 ‘Poor Old Soul’에서 사용된 60년대 풍 쟁글 기타와, 디스코의 괴상한 조합 말입니다.

존 새비지 (주: 포스트 펑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영국의 음악평론가)가 나보고 그랬어요, 그 앨범 (주: Rip It Up을 말하는 듯)은 구 펑크와 새로운 팝 사이에 마지막으로 존재한 과도기적 음반이라구요. 내 노래의 가사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버즈콕스의 노래 ‘Boredom’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Spiral Scratch EP (주: 버즈콕스의 데뷔 EP)는 포스트카드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EP는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죠. 마치 심리치료를 받을 때처럼요. 그 EP를 들어보니 우리도 뭔가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싶었지만 대신 이 구식의 오렌지 주스 기타 사운드를 새로운 팝의 맥락에 포함시키고자 했죠. 프로듀서였던 마틴 헤일스는 재즈 훵크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Boredom’과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이야기한 것이 바로  ‘정교한 아마추어리즘’이죠, 너무 매끈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정신 없는 것도 아닌…

미래주의와 바보 같은 신스팝이 벌이고 있는 일을 목격했기 때문에, 난 우리의 밴드를 그런 이들과는 분리시키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음악 잡지가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어요. 엔엠이 같은 잡지가 이 주의 싱글로 선택한 싱글은 5천장은 팔렸거든요. 우리 음악은 라디오 전파를 전혀 타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잡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키치한 음악이나 멍청한 음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기 싫었죠. 당시엔 신스팝의 미학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휴먼 리그는 꽤 좋아하긴 했지만요. 허나 우리가 음반을 만들던 때에 신스팝 무브먼트는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1981년의 음악 씬을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선택해야 했죠.

 

당신이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섹스 피스톨스 티셔츠를 입는 것을 주장한 게 그 시기에 – 뉴 로맨티시즘의 절정이었습니다 – 벌어진 일입니까? 스타일과 나이트클럽에 사로잡힌 음악 씬을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 중심에 뉴 사운즈 뉴 스타일스아이디 같은 잡지나 미래주의자라고 명명된 별볼일 없는 음악이 있었죠. 지금은, 그런 음악의 일부는 좋은 팝 레코드였다고 생각합니다 – 게리 뉴만의 ‘Now I’m alone’ 같은 건 괜찮잖아요 – 하지만 당시에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게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지요. 건강 다음으로 중요했어요.

 

오렌지 주스는 글래스고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이들이 돌연 당신의 스타일과 당신의 음악을 모방하기 시작했어요.

때문에 글라스고 언더그라운드 씬이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죠. 이전에, 글라스고에선 스톤 더 크로우스의 매기 벨이나 프랭키 밀러 같은 블루스 록이 강세를 보였죠. 당시 학생이었던 틴에이지 팬클럽이 우리의 팬이었습니다. 심플 마인즈가 인기가 좋긴 했지만 우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밴드를 결성하게끔 영향을 미치진 못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포스트카드가 크리에이션 레코즈 (주: 알란 맥기가 설립한 인디 레이블. 오아시스가 여기서 시작했다. 후에 소니한테 팔렸고 지금은 없어졌다)의 설립에 영향을 주기도 했구요.

 

그리고 포스트카트는 솀블링 기타/큐티/C86 (주: 영국의 음악주간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 엔엠이가 86년에 제공한 컴필레이션 카세트 테이프. 81년에 제공된 C81의 후속작인 셈이다. C86라는 이름은 테이프의 길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던 C60, C90등과 1986년을 결합시킨 것이다. 후에 러프 트레이드를 통해 바이닐로도 발매되었다) 무브먼트가 일어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스웰 맵스와 텔레비전 퍼스널리티스의 도움도 좀 받아가면서요. 당신이 쓴 가사인 ‘세속적인 것을 가까이 해선 안 돼’는 C86가 이뤄야 하는 바였을 겁니다.

난 우리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던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일본에선 80년대 후반에 네오 아코라는 무브먼트가 발생하였죠. 대표적인 밴드가 플리퍼스 기타예요. 그리고 그들의 밴드명은 우리 앨범 커버에 있는 돌고래 (주: 오렌지 주스의 데뷔 앨범인 You Can’t Hide Your Love Forever의 커버 사진을 말한다. Flipper는 물갈퀴를 뜻함) 에서 연원했죠. 플리퍼스 기타의 첫 앨범명은 Three Cheers For Our Side였지요. 그건 제임스 커크의 곡에서 이름을 빌려간 거예요. 그들의 노래 중엔 ‘Let’s Cut Our Hair Like James Kirk Did Long Ago’라는 제목의 곡도 있죠. 당시에는 우리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지 몰랐습니다. 그 땐 그걸 인식하지 못했거든요; 우리는 그저 글라스고의 남성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음악을 만들었어요. 그래도 언젠간 애들 같은 스타일에서 벗어날 때가 있는 법이죠. 성서에도 그런 구절이 있잖습니까.

 

당신에겐 그게 언제였다고 생각합니까?

‘Rip It Up’이 발매된 무렵이었죠. 그 시기의 사진을 보니까 내가 보이 스카우트 모자를 쓰고 바덴 포웰 시기의 스카우트 셔츠를 입고 있더군요. 하지만 동시에 모토바이커들이 입는 바지를 입기도 했죠. 모토바이크 부츠랑 19세기 풍의 헌팅 재킷을 정말 좋아했어요. 처음 그런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반향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큐티들이 그걸 전유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 대한 흥미를 잃었죠. 다들 본인들이 좋아서 애들 같은 행동을 하는 거예요… 마치 상처 입은 이들이 자신들의 유년기를 담보해줄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요.

에드윈 콜린스 인터뷰

이 인터뷰는 영국의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의 포스트 펑크 인터뷰 모음집 [Totally Wired]에 수록된 것이다. 책이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형식이 잡지가 아닌 책이라는 점 때문에 원문을 첨부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바란다. 책은 아마존 등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인터뷰는 상/하로 나뉘어 포스팅 될 예정이다.

정확한 인터뷰 시기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솔로 행보에 대한 질문이 많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80년대 중후반에 수행된 인터뷰가 아닐까 한다.

에드윈 콜린스는 스코티시 트위 팝 씬의 가장 중요한 아이콘으로, 흔히 쟁글팝을 발명했다고 평가받는다. 자신의 밴드인 오렌지 주스가 해체된 이후에는 지속적인 솔로 활동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2005년에 두번의 심한 뇌졸중을 앓았다. 가족과 동료의 도움으로 2007년 복귀에 성공하였다.

이탤릭체로 표기된 것은 사이먼 레이놀즈의 질문이다.

당신은 이제 프로듀서 활동을 하고 있고 당신 소유의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지요. 그 때문에 음악의 신비로움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나요? 어떤 사운드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걸 전문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순수하게 음악감상을 하는데 방해물로 작용합니까?

그렇습니다. 음악가와 프로듀서는 모두 특별한 방식으로 음악을 듣습니다: 흩어져있는 사운드를 집어내지요. 베이스라인을 듣고요. 우울한 일이에요. 순수한 감상을 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술에 취하거나, 배경음악을 들을 때에나, 음반을 한 덩어리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은 음반을 분석하기 시작해요. 하지만 포스트카드 (주: 오렌지 주스의 첫 레이블이자 글라스고 인디 씬의 주요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던 무렵부터 업질러진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러머였던 (주: 에드윈 콜린스의 밴드 오렌지 주스의 드러머) 스티븐 달리가 기자가 된 사실이 전혀 놀랍지가 않아요. 그는 우리들 중 가장 분석적인 사람이었거든요.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죠, ‘우-, 여기 이 소리가 정말 마음에 드는데, 다른 음반의 이 소리를 추출해다 그걸 섞을 수도 있고 말야.’ 샘플링이란 게 존재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렌지 주스 초기 싱글을 만들 무렵의 일이었죠.

오렌지 주스는 마치 포스트-펑크에 대한 반작용 같습니다 – 조이 디비전의 음울함과 분노, 또는 포스트-펑크의 계몽성에 반하는 것 말입니다. 당신은 사랑과 낭만으로의 회귀를 행했어요. 갱 오브 포나 스크리티 폴리티 같은 전임자들과는 다른 화법을 구사했죠. 그건 보다 편안하고 위트 넘치고 부드러운 사운드였어요.

스크리티 폴리티와는 캠든에서 함께 지내곤 했죠. 당시 그린은 (주: 스크리티 폴리티의 프론트맨인 그린 가트사이드) 흑인음악에 대해선 초짜였어요. 나에게 이런 실없는 물음을 던지곤 했죠, ‘해밀튼 보해넌이 누구야?’ 이게 1980년 후반의 일이었어요, 오렌지 주스의 첫 앨범이 나오기 전이요. 나중에 그린은 힙합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흑인 음악은 버진 레코즈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캔터베리 씬 같은 거요, 로버트 와이어트나 햇필드 앤 더 노스 말입니다. 그들은 목가적인 히피 스타일이었죠. 우리는 같은 프로듀서와 일을 했어요, 아담 키드론이라는 사람이었죠. 스크리티는 좋은 친구들이었지만, 그린이 엔엠이의 이언 펜먼과 인터뷰한 것은 거드름쟁이들의 싸움에 다름 아니었어요. 정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죠! 그들은 데리다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 기호학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멍청한 짓이에요. 그게 유용한 논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음악과도 관련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있었습니다.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는데요, 그건 의식적인 결정이었죠. 예술학교에 가긴 했는데, 그것조차도 대학은 아니었습니다; 디자인 학교였죠. 그곳에서 그린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진보적 음악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최대한 드러내는 이들이요. 그리고 그건 일면 경쟁적이기도 했죠. 그린은 매우 경쟁적인 인텔리 친구입니다. 오렌지 주스의 기타리스트인, 제임스 커크는 대단히 말이 없는 친구지만, 독학파이고 그린이 언급하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는 그냥 말을 아끼는 쪽을 택했어요. 스티븐 달리는 그보다는 말이 많았죠. 그래서 그린은 꽤나 생색을 내며 스티븐을 ‘오렌지 주스의 가장 똘똘한 멤버’라고 불렀습니다. 제 관점에서는, 이론과 기호학은 곡을 쓰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어요; 좋은 문학작품만은 유용했습니다 – 플롯 구성, 인물,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같은 거요. 문학 평론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시간 낭비입니다. 스크리티들의 아지트에서 뭉개며 제가 처음 접한 게 있는데요, 지금은 소위 ‘정치적 공정함’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입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걸 들으며 나는 쟤들이 미쳤구나 생각했어요. ‘삽입 섹스를 하는 게 쿨한가?’ 이런 얘기를 했다구요!

하지만 오렌지 주스는 남성의 여성성이나, 非남성우월주의에 천착하지 않았던가요. ‘Simply Thrilled Honey’에서, 적극적으로 성을 구애하는 이는 여성이고 당신은 예민한 낭만주의자이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요. 오렌지 주스와 포스트카드는 나름의 성 정치학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는 성 정치학이긴 했지만요. 당시의 글라스고에서는 그걸 이해하기가 더욱 쉬웠을 겁니다. 우리 부모님이 헤어지신 뒤에, 나는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살았는데요, 그들은 얼마 안 가, 나와 내 여동생에게 학을 떼었죠. 여동생은 그때 13살이었고 저는 15살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말에는 이 우아한 남부 글라스고의 교외 생활에 우리를 끼워 맞췄습니다. 축구 경기라도 있는 토요일엔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었죠. 70년대는 공격적인 시대였어요. 그래서 오렌지 주스의 이미지는 우리의 스코티시 동료에 반대하고, 특색 없는 펑크밴드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오렌지 주스는 모두 글라스고의 상류층 교외지역인 비어스덴 출신인 거죠?

그렇습니다, 주택 단지가 있는 변두리 지역에 살긴 했지만요. 그게 내가 중간 계급 출신이긴 하지만, 내 어머니는 미술 학도였고, 아버지는 미술 교사였던 이유입니다.

대다수의 주요한 스코티시 포스트-펑크 밴드가 중간계급 출신이었다고 보아도 괜찮은 겁니까?

심플 마인즈는 전적으로 노동계급 출신이었죠. 하지만 조셉 케이는 상류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거기에 당신의 가정환경은 문화적으로 풍족했고 약간은 자유분방한 편이었지요?

어떤 면에서는요. 나의 할아버지는 존 오그로츠에서 50마일 가량 남쪽에 있는 헬름스데일이라는 작은 마을 출신이었습니다. 그분은 16살에 글라스고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고 스코틀랜드의 역대 최연소 교육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종합적 교육 방식을 스코틀랜드 교육계에 도입시켰어요. 할머니는 나에게 러시아 문학과 스페인 문학을 접하게 해 주었구요. 그분은 인텔리지요, 그린과는 다른 부류긴 하지만요. 아흔 한살이시지만 지금도 얼마든지 그분과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요. 그분은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게 당신이 록의 문학적 영역에 발을 디딘 이유입니까? 보위나 루 리드 같은 부류로요.

펑크시대 이전에, 난 프로그레시브 음악이나 컨셉 앨범 등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플린처럼 너무 시끄러운 음악도 안 좋아했구요. 글램 록은 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팝이기도 했습니다. 전 디스코 클럽이나 소울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런 음악에 대한 끔찍한 엘리트주의적 속물근성이 언제고 존재해왔습니다. 록이 보다 지적인 음악이란 생각이죠. 훵크와 소울이 쿨한 음악으로 여겨지던 80년대 초반에 조차, 게리 캠프 (주: 스팬도 발레의 기타리스트, 송라이터)는 이런 애길 했습니다, ‘음악적으로는 소울과 훵크를 취했고 거기에 지적인 가사를 덧붙였죠.’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는 ‘Instinction’ 같은 멍청한 곡을 썼잖아요. 그리고 톰 벨에게 곡을 써 준, 린다 크리드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이런 가사를 썼습니다, ‘그는 작은 보조기구를 신고서 훵키하게 걸었어.’ 그 어떤 장르에서도 그런 가사를 쓰는 이는 없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화이트 라이엇 투어가 벌어졌을 때, 클래시가 아닌 서브웨이 섹트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빅 고다드나 서브웨이 섹트가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기타리스트인 롭 시몬스는 펜더 머스탱을 사용했습니다. 고음부는 완전히 조여져 있었고 음정은 하나도 맞지가 않았죠. 당시에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연주한 곡 중 하나인 ‘Parallel Lines’를 듣고 스윗의 ‘Fox on the Run’을 떠올렸어요. 그 곡은 제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유는 이거예요, 서브웨이 섹트는 음악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거죠.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같은 밴드는 1976년에 펑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악기를 잡은 거잖아요. 이건 심플 마인즈처럼 연주능력이 훨씬 월등하고, 오랫동안 연주를 해 온 밴드와는 다른 속성을 갖는 것이었죠. 찰리 버칠은 오랫동안 기타를 연주해 왔지만, 나는 76년에야 기타를 잡았어요.

서브웨이 섹트는 야심찬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큰롤에 관한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 말입니다: 로큰롤이 그 자신의 역사가 되어 사람들을 짓누른다. 젊은이들에겐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명민한 이들이라면 그것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했는데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납니다. 이젠 빅과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땐 몰랐으니 그가 지금보다 더 괴팍하게 보였죠. 그는 후기 서브웨이 섹터에 스윙 음악을 도입했는데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왝 클럽을 둘러싸고 ‘록음악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야.’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죠. 그전의 서브웨이 섹트는 노던 소울의 영향을 받았었는데 이 시기의 음악은 한번도 녹음된 적이 없었습니다. 훌륭했던 필 세션을 제외하고는요. 그보다 더 전 단계의 서브웨이 섹트 음악은 텔레비전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이 또한 녹음된 적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겐 언제나 아이디어가 넘쳐났어요. 어떠한 정치성에 대한 합의가 있었고, 음악적으로는 최근 들어 모조나 언컷과 같은 잡지가 널리 알린 좋은 음악에 대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건 코스텔로가 훌륭한 펑크 시인이라는 점이었어요. 물론 코스텔로의 가사는 빅의 가사에 비할 바가 못됩니다만은. 그다지 재기 발랄한 가사는 못 되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것이 1978년의 몇 달 동안, 서브웨이 섹트가 특별한 라인 업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시기의 그들은 세계 최고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라인 업으로 스튜디오 작업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남아있는 자료가 없죠.

난 그 시기에 그들이 한 공연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카드의 알란 혼은 보았죠. 그와 스티븐 달리가 런던에서 서브웨이 섹트의 부틀렉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거기에 ‘Holiday Hymn’이란 곡이 실려있었어요. 그 곡은 서브웨이 섹트가 한 번도 녹음 한 적 없는 곡이죠. 하지만 오렌지 주스가 그 곡을 커버했습니다.

오렌지 주스를 구상할 때 당신은 이미 서브웨이 섹트의 쨍그렁대는 예민한 사운드에 노출된 상태였어요. 그래서 빽빽하고 헤비한 사운드의 펑크에선 찾기 힘든 날 것의 사운드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레치 기타가 그 생각을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말고 그레치를 사용하던 이들은 스트레이 캣츠였어요. 그들은 에디 코치런이 사용하던 희귀한 50년대산 그레치를 사용하고 있었죠. 나는 컨트리 젠틀맨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Live 1969 게이트폴드 커버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루 리드가 컨트리 젠틀맨을 들고 있거든요. 난 그 앨범의 사운드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그레치는 펜더의 맑은 사운드와 깁슨의 꺼끌꺼끌한 사운드를 모두 가지고 있죠. 또한 스타일과도 연관이 있었고, 또 브랜드 기타치곤 가격이 싼 편이었죠. 다른 이들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도 있었구요. 또한 그 기타를 사용한다면 누군가는 벨벳과의 연관성을 눈치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븐은 이걸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 음악에 60년대의 감수성을 불어넣기 위해서 그레치를 사용하였습니다. 펑크의 열정과 템포를 유지하는 동시에 Live 1969에서 영향을 받은 리듬 기타 사운드를 거기다 섞는 거죠… 그리고 나일 로저스도요.

그래서 더욱 음역대가 높은 음악이 된 겁니까? 번쩍번쩍대는 사운드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번쩍거리는’ 음악은 로저 맥긴 같은 사운드예요. 그런 사운드를 추구한적도 있긴 합니다. 12현 기타를 사용한 ‘Simply Thrilled Honey’가 그 예지요. 벨벳 외에도 버즈와 버팔로 스프링필드에게서도 우리의 음악의 중추를 형성한 사운드에 대한 영감을 얻었죠. 예쁘장한 멜로디를 만들 땐 기타가 거치적거릴 때도 있어요. 파워 팝 무브먼트의 일원이었던 플리저스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마치 패브 포 (주: 비틀즈)처럼 차려 입곤 했습니다. 우린 그렇게까지 잡다하게 스타일을 뒤섞고 싶진 않았어요. 우리의 태도가 60년대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그만큼 펑크에서도 영향을 받았거든요. 그 밖에도 디스코의 영향도 있었구요. 컨트리 앤 웨스턴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알란 혼이 책임이 있죠. 알란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좋아했어요. 펑크 이전 시기의 지그재그 (주: 영국의 음악잡지)도 읽었구요. 그래서 서부 해안의 록 – 버팔로 스프링필드, 퀵실버 메신저 서비스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었죠. 알란은 백과사전식의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에요.

당신과 알란은 한 때 좋은 친구였습니다.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요즘엔 연락을 주고 받진 않아요. 나보다는 내 아내인 그레이스가 그와 더 돈독한 관계였죠. 하지만 그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렌지 주스의 형성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지요.

포스트카드에 있던 모든 밴드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그의 취향을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요. 내가 구상하고 제시한 것은 벨벳과 루 리드 그리고 글램 록이었죠. 보위를 정말 좋아했어요. 빅 포라는 잡지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보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재키라는 잡지도 사곤 했어요. 엔엠이도 가끔 보았지만 정말 가끔이었죠. 스티븐 달리는 록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엔엠이의 취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렌지 주스의 다른 멤버들은 절대 디스코 클럽에 가지 않았지만 나는 달랐어요. 교회의 청년부 디스코 클럽부터 시작해서 셔플스라는 곳을 다녔죠. 1976년 무렵에, 스트레이트한 바지나 비달 사순 스타일의 앞머리 같은 초기 소울보이 스타일을 하고 디스코 클럽에 가면, 사람들이 싸움을 걸려고 했을 겁니다. 단지 스트레이트한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패려고 드는 거에요. 디스코 클럽에 있던 사람들은 흰색 반팔 셔츠와 얇은 타이를 하고 있었어요, 다들 풋내가 났죠. 셔플스에 있던 많은 이들이 동유럽 산 플라스틱 샌들을 신고 있었어요. 내가 오렌지 주스 활동을 하며 샌들을 신었던 건 그런 디스코 의상에 대한 되갚음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당신은 너구리 털 모자를 쓰곤 했죠, 그렇지 않습니까?

대다수의 것들을 육해군 상점에서 구했습니다. 너구리 털 모자도 그 중 하나에요. 단추가 달린 셔츠나 체크무늬 셔츠도 많이 입었죠. 런던에 위치한 플립 같은 가게에서 그런 것들을 팔았거든요. 난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의 스타일을 좋아했어요. 펫 사운즈의 커버 사진에서도 영감을 얻었습니다. 모드 스타일의 단추 달린 스웨이드 재킷 말입니다. 러빙 스푼풀이 입던 줄무니 셔츠도 차용했지요.

그러니까 그룹의 이미지를 여기 저기에서 가져다 붙인 거네요. 포스트 모던의 방식으로요. 마치 당신들의 음악과 같은 양상을 띠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아요. 그 정도로 스타일을 의식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뭐 이런 식이었습니다. 알란은 한 때 펫 사운즈의 커버에 완전 빠져있었어요.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랬습니다, ‘이게 좋은 표지인 건 맞는데 음악은 그런 패션과는 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지.’

조셉 케이의 맬컴 로스는 자신들이 상당히 신 청교도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깔끔한 모드 스타일에 – 약도 안 하고 술도 별로 안 마시는 그런 거요. 오렌지 주스는 어땠습니까?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습니다. 약도 안 했어요. 내가 술에 맛들이기 시작한 건 스물 두 살이 되던 무렵이었죠. 그리고 난 친목을 위해 술을 마시는 부류예요. 어머니는 두 잔 이상 못 드세요 – 그게 한계죠. 아버지는 이혼하시기 전 까진 술을 안 드셨어요. 술과 친한 환경이 아니었죠.

오렌지 주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이런 파릇파릇한 얼굴의 천진난만함과 감성입니다. 로큰롤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죠.

스티븐 달리에게 큰 영향을 까친 것은 줄리 버칠과 토니 파슨스의 책 The Boy Looked At Johnny였죠. 독특하고 비틀린 도덕성을 설파하는 책이었습니다: 스피드 (주: 각성제의 일종)는 괜찮지만, 마리화나는 안 돼. 데이브 맥컬로프와 한 오렌지 주스 초기 인터뷰에서, 맥컬로프는 포스트카드를 둘러싼 모든 것은 마크 E. 스미스 (주: 맨체스터의 포스트 펑크 밴드 The Fall의 프론트맨)가 신 청교도라 칭한 바로 그것과 같다고 했어요. 스미스가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던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직설적인 가사가 아니라 알쏭달쏭하거든요. 하지만 엔엠이 독자 투고란을 보면 그게 마치 우리와 관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맨체스터 씬의 일원이었던 틸러 보이즈와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었구요. 그들의 팔랑대는 앞머리 때문이죠. 오렌지 주스가 글라스고보다는 맨체스터에서 인기가 있었던 게 이와 관련이 있을까 궁금했어요.

Orange Juice / You Can’t Hide Your Love Forever

모조의 부록 [80년대의 80가지]에 실린 단평이다.

 

Contributed by David Hutcheon

80 From The Eighties

오렌지 주스

You Can’t Hide Your Love Forever

[Polydor]

Chart Position: UK 21 US –

 

>>그들은 알 그린, 존 포거티, 버즈, 칙 그리고 루 리드에 영감을 얻어 80년대 인디 씬을 이끌었다.

 

우리는 스테이지에서 뛰었어, 연주는 할 수 없었지만/게다가 우리는 할말도 없었지.” 이런 종류의 가사는 1981년의 포스트 펑크 씬에서 나올 법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대처리즘이 낳은 황량한 영국에 대한 선동적훵크가 씬을 휩쓸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오렌지 주스가 들고나온 것은 다변적인 박자로 잘게 채워서, “노래하는 것에 대한 느슨한 해석의 보컬을 담아, 다층적인 12현 기타 사운드로 뒤덮고, 로저 맥긴스러운 반바지와 40년대 풍의 괴상함이 물씬 느껴지는 기집애 같은 백킹 보컬로 치장한 낭만적인 도피주의의 신선하고 천진한 사운드였다. 에드윈 콜린스와 제임스 커크의 재치있는 가사를 더하니 (Falling And Laughing, Felicity, Consolation Prize를 들어보라모두 자그마한 걸작들이다) “젊은 스코틀랜드의 소리” (그들의 이전 레이블인 포스트카드가 슬로건으로 사용했던 문구이다) 에 대한 메이저 레이블의 해석의 근거가 명확해진다: 이 밴드가 보여주는 만큼의 매혹적인 혼란을 드러내는 데에는 진정한 천재성과 재능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스미스를 비롯해서, 사라 레코즈, 탈룰라 고쉬에 벨 앤 세바스찬과 프란츠 퍼디난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그 뒤에서 뒹굴고 웃어대던 이들이다.

 

이것도 들어봐: 빅 고다드 What’s The Matter Boy?

Orange Juice

You Can’t Hide Your Love Forever

[Polydor]

Chart Position: UK 21 US –

>>They took inspiration from Al Green, John Forgerty, The Byrds, Chic and Lou Reed, And pioneered ’80s indie.

“We leapt on stage, though we couldn’t play/Futhermore we had nothing to say.” There were not the sort of lyrics you expected to hear in post-punk 1981, when agit-pop-funk songs about the wasteland of Thatcherism were all the rage. But what Orange Juice offered was the fresh naivety of romantic escapism, rolled up in frequent tempo change, a loose interpretation of the term ‘singing’, multi-layered 12-string guitars, fringes like Roger Mcguinn’s, short trousers and girly backing vocals that reeked of 1940s whimsy. Add Edwyn Collins’ and James Kirk’s lyrical wordplay (take your pick from Falling And Laughing, Felicity, Consolation Prize… mini-masterpieces all) and what becomes clear is the real key to this major-label interpretation of “The Sound Of Young Scotland” (a slogan used by their previous label, Postcard): it takes real genius, ability and hard work to be as winningly untogether as this band appeared to be. Falling and laughing in behind were everybody from The Smiths, Sarah Records and Tallulah Gosh to Belle And Sebastian and Franz Ferdinand.

Also Check Out: Vic Godard What’s The Matter Boy? [MCA, 1982]

닐 핀 인터뷰

음악평론가 그램 톰슨은 음악 속의 죽음을 다룬 책인 I Shot A Man In Reno를 쓰며 다양한 음악가들을 인터뷰하였다. 인터뷰는 블로그에 포스팅 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이 인터뷰는 크라우디드 하우스의 프론트맨인 닐 핀을 인터뷰한 것이다.

원문: http://ishotamaninrenobook.blogspot.com/2008/09/neil-finn-reno.html

닐 핀, mortality에 대해서 말하다

Interviewer: Graeme Thomson

가장 최근의 크라우디드 하우스 앨범인 Time on Earth는, 2005년에 일어난 밴드의 전 드러머였던 폴 헤스터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곡을 쓰는 동안 그 사건을 얼마나 의식했습니까?

앨범에서 그 사건이 차지하는 바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일은 제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에 쓰던 곡들은 모두 그 일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모든 곡이 그 일에 관한 것은 아니고, 몇몇 곡은 전혀 상관이 없지만, 영향을 받은 것만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음울하거나 감상적인 방향이 아닌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받았기를 바랄 뿐이죠. 하지만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곡을 쓸 때 그런 것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는 편이거든요. 곡을 쓰는 초기 단계에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믿는 편입니다. 나는 그리 체계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우연적으로 곡을 쓰게 되는 것을 신뢰하는 편이예요. 다른 이들은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곡을 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정제되어 있지 않고 추상적이라 하더라도 즉흥적인 작곡은 수용할만한 것입니다. 내 생각에, 즉흥적인 작곡의 소재가 되는 것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앨범에서 영혼을 갈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느껴졌다면 실제로 그런 거겠죠. 나는 그 일 (주: 폴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내 삶에 있어 하나의 어긋난 사건이었어요. 아직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을 극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앞으로 오랫동안 그 일이 나를 괴롭힐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 슬픔이자 그리움이기도 합니다 – 그는 좋은 친구였으며 꽤 오랜 시간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죽기 전 몇 년 간 자주 만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와 나를 이어주는 강한 유대감이 언제고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곡에 대해 얘기해 보죠. 좀 더 오래된 곡 중 “Hole In The River”는 비교적 직접적인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비극을 내쫓는 의식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곡은 아버지에게 고모의 죽음을 전해들은 직후에 쓴 것입니다 [그의 고모는 자살하였다]. 거의 아버지가 말한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건 죽음에 대해 서술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결정이었던 것 같아요. 때때로 세상이 일상 속에 감춰진 비참함과 우울함에 대해 모른 척하고 관심 갖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Nobody Wants To”가 그에 관한 곡입니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봐, 우리가 듣게 될지도 모르는 가장 끔찍한 뉴스가 뭐가 있을까. 아니, 이런 건 집어치우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어. 그럼 그것을 극복하고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당신의 두번째 솔로 앨범인 One Nil 또한 죽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직접적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그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죽음만큼 누군가의 의식을 잡아 끄는 것은 없어요. 특히 그것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났을 때는요. 죽음과 우리 사이의 간격은 계속해서 좁아지고 있죠. 나는 꽤나 운이 좋은 편이예요. 어린 나이에 그런 사건에 직면하지 않아도 되었거든요. 하지만 자신이 언젠가 죽게 될 거란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사실에 천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나이에 상관없이 일어나죠. 앨범에 수록된 “Anytime”같은 곡에선 일련의 사건을 구성했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개를 보았어 / 열심히 고양이를 뒤 쫓고 있었지…’ 그러다 보니 우리의 삶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얘기하면 재밌겠다 싶더라구요.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딱히 칙칙하고 섬뜩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유용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삶을 대할 수 있게 해준다고 봅니다.

“She Goes On”당신의어머니혹은할머니에대한곡이라는사람들의추측에대해선어떻습니까, 실제로그것은누구에관한이야기도아니죠.

그렇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친구를 위해 곡을 하나 만들어 장례식에서 불렀죠. 음반에 수록하기 위해 만든 곡은 아니었는데, 다시 들어보니 누구에게나 감흥을 줄 수 있겠다 싶더군요. 결혼식에서나, 장례식 같은 데서 쓸모 있는 작곡가가 될 수 있단 건 멋진 일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악을 중요한 가족 모임에서 틀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면 정말 기쁩니다. 도움이 되는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작곡가인, 마크 에이첼과도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그는 작곡가를 기회주의자라고 평하더군요. 특히 죽음에 관한 곡을 쓴다는 점에 있어서요. 동의하십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기회주의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한 면이 있거든요. 음습한 유머감각을 발휘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 그래도 덕분에 좋은 음반을 만들게 되었잖아!’ 이런 류의 농담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 음악엔 자존심과 이기주의도 내포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기저에는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나와 감정을 공유하고, 내 음악에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어떤 보편성, 갈망 또한 존재합니다. 타인에게 감정적 공명을 불어넣고, 그들이 감정 이입을 할 무언가를 때려 박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곡을 쓰다 보면 사람들이 곡이 내포하고 있는 감정에 빠져들 것이란 감이 와요. 그러니까, 가끔은 그런 끔찍한 일들이 좋은 결과물을 낳기도 합니다. 악의를 담은 곡을 쓰는 것이 가능하며, 그런 곡이 좋은 음악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그 동안 그런 음악을 만들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폭력성을 띠는 음악에 대해 염려하는 편입니까? 그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측면에서요.

폭력성을 담은 음악은 가끔 정말 재미있어요. 최대한 잔인하고 악마적으로 보이려고 엄청 노력하잖아요.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게 예전만큼 쉽지 않은 세상이죠. 살인 발라드 류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 한번도 그런 장르의 음악에 끌린 적이 없어요. 하지만 잠시라도 폭스 뉴스를 보려고 노력하거나 갱스타 랩을 들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에 삶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태도도 일면 있겠지요.

가톨릭 환경에서 자란 것이 죽음을 대하는 당신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나요?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던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었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걸 대체할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구요, 다만 요즘엔 이 삶이 전부라고 해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집중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며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드는 건 유용한 일입니다. 만약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난 불교신자가 아니고 그것의 교리를 따르지도 않지만, 달라이 라마가 말한, 행복은 이 땅 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상을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 생각이 실제 천국에 다다르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관점에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덜 진중한 사람이 되거나 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으니까요.

Time on Earth에 멋진 구절이 있지요: “지옥이 있다면/천국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부분을 쓸 때 서핑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만큼 진중한 사고의 바탕에서 나온 가사는 아니죠! 가장 높은 파도를 타며 그 순간에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습니다.

I Shot a Man in Reno에서 난 크라우디드 하우스가 특정되지 않은 영적인 느낌을 표출한다고 적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느낍니까?

공동체는 음악을 다룰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곡을 할 때, 나는 사람을 중시하는 편인데, 나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같은 것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공유하는 어떤 것을요. 물론 다른 동기도 있습니다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관념들이 내 음악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마련이죠. 최근에 공연에서 보면시간을 흐를수록 그런 경향은 더 강해집니다 관객들이 노래를 하고 싶어하는데, 그건 정말 놀랍습니다. 그들의 의지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것은 훌륭하지요!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 중의 하나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서 그들의 노래를 듣는 것이었어요. 이제 그들은 4중주의 합창을 합니다. 정말이지 아름답습니다. 마치 성당에 있는 거 같지요. 종교적인 의미로 치환하진 마십시오. 단지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 초월적인 것을 경험했다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fin.

팝가수 레녹스 ‘올해의 평화여성상’ 받아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확산 방지를 위해 노력해온 스코틀랜드 출신의 팝가수 애니 레녹스(55)가 11일 노벨평화상 정상회의에서 올해의 ‘평화여성상’을 수상했다. 레녹스는 2003년 ‘싱(SING)’이라는 노래를 만든 뒤 마돈나, 셀린 디온 등 세계적 여성 팝스타 23명과 함께 에이즈 퇴치 운동을 전개하는 등 아프리카에서 특히 여성, 어린이들의 에이즈 감염을 예방하고 그 해악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데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자로 결정됐다. [전문 보기]

축하해요 레녹스 누님~~

레드 웨지

원문은 위키피디아에서 볼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Red_Wedge

레드 웨지

붉은 말뚝은 영국의 대중음악가들이 젊은이들을 정치일반과 노동당의 정책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조직한 집단이다. 이들은 1987년 총선을 앞두고 마가릿 대처 정권을 내쫓기 위한 희망을 품고 결성되었다.

빌리 브랙이 주도하고 (그의 1985년 Jobs for Youth 투어는 레드 웨지의 원형이나 다름 없었다), 폴 웰러 그리고 커뮤나즈의 리드 싱어 지미 소머빌이 콘서트를 열며 매체에 모습을 들어냈다. 그들은 또한 노동당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레드 웨지는 1985년 11월 21일 국회의사당에서 이루어진 리셉션에서 시작되었다. 리셉션은 노동당 국회의원 로빈 쿡이 진행하였다. 그들은 러시아의 구성주의 화가 엘 리시츠키의 1919년 작품, Beat the Whites with the Red Wedge에서 그 이름을 빌렸다. 러시아 혁명의 자취를 감지할 수 있었음에도, 레드 웨지는 공산주의 단체가 아니었다; 노동당과 공식적으로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도 없었으나, 초기엔 노동당 당사에 사무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룹의 로고 또한 리시츠키의 영향을 받아, 네빌 브로디가 디자인하였다.

레드 웨지는 몇몇 대규모 공연을 벌였다. 최초의 공연은, 1986년 1월과 2월에 이루어졌으며 브랙, 웰러의 밴드인 스타일 카운슬, 커뮤나즈, 주니어 기스컴, 로나 기, 제리 대머스 그리고 게스트로 매드니스, 프리팹 스프라우트, 톰 로빈슨, 로이드 콜, 스미스가 참여하였다.

1987년 총선기간에, 레드 웨지는 레니 헨리, 벤 엘튼, 크레이그 찰스, 필 주피터스, 해리 엔필드 등이 참여하는 코미디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주요한 음악가 구성원들과 함께 더 더, 캡틴 센서블, 블로우 멍키스가  함께하는 공연을 하였다. 그들은 또한, Move On Up이라는 선거 책자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것의 서문은 당시 노동당 당수였던 닐 키녹이 작성한 것이었다.

1987년 보수당에게 연속 세 번째 승리를 가져다 준 선거 이후, 상당수의 음악가 성원들은 정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 공연을 몇 번 더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잡지인 Well Red는 계속 출간되었지만,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자 1990년 레드 웨지는 공식적으로 해산하였다.

(좌에서 우로) ‘Barking의 음유시인’ 빌리 브랙, ‘빨갱이 켄’ 켄 리빙스턴, ‘보수당에게 2번 털린 남자‘ Bedwellty의 닐 키녹 경, ‘모드의 아버지’ 폴 웰러

앤디 질과 마이클 허친스

마이클 허친스는 호주 출신의 인기 밴드 인엑시스의 보컬리스트이자 프론트맨이었고 97년 자살, 혹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95년부터 그는 솔로 앨범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 앨범의 프로듀스, 공동 작곡, 연주를 갱 오브 포의 앤디 질이 맡았다. 아래의 글은 그에 관한 내용은 담은 짧은 글이다.

원문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http://www.gangoffour.co.uk/gillmusic/Producer_Hutchence.htm

앤디와 마이클은 1995년에 처음 만났다. 하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다. 80년대, 인엑시스의 인기가 최정점이었을 때, 인엑시스는 어디에서나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누구나 그들의 음악을 알고 있을 정도의 밴드였다. 갱 오브 포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으나,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적인 추종자들을 얻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추종자 중에는 동료 음악인들도 포함되어있다. 마이클도 그들 중 하나였고 갱 오브 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갱 오브 포의 곡 “Anthrax”는 마이클 허친스가 주연을 맡았던 80년대 영화 “Dogs in Space”의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마이클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던 무렵에야 조우하게 되었다. 마이클과 폴라 예이츠의 관계가 막 미디어에 의해 드러난 때였고,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는 오히려 마이클로 하여금 스스로의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고자 하게끔 만들었다. 그는 이미 여러 뮤지션들과 솔로 활동을 해 온 터였다, 가장 가까운 예로는Bomb The Bass의 팀 시메넌 같은 이들과. 하지만 그는 좀더 날카롭고 거친 사운드를 원했다. 어느 날 그는 앤디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신의 솔로 앨범에 기타를 연주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앤디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몇 분 뒤, 마이클은 다시 전화를 걸어, 사실은 그와 곡을 같이 쓰고 싶었노라고 말했다.

앤디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마이클의 집으로 갔고, 함께 작업하였다. 그 결과물은 마이클의 첫 셀프 타이틀 솔로 앨범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앤디는 마이클의 외동딸, 타이거의 대부이고 여전히 친구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

그는 대단한 음악가였고, 공연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며, 또한 훌륭한 가수였습니다.” 앤디가 말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는 것과 사람들이 그가 얼마나 재능 있는 사람이었는지 깨달을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요. 그 정도로 유명세를 얻고 나면 보통은 괴물이 되어버리지요. 하지만 마이클은 항상 솔직했고,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이었어요.

“마이클이 죽은 그날 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어요.앤디가 말을 이었다. “사고일 수도 있고, 혹은 순간적으로 화가 났거나 절박했던가 아니면 두 감정을 모두 느꼈던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그는 전방위적인 공격을 받았고 자신이 사랑했던 가족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귀 담아 듣지 않으렵니다. 그는 유쾌하고, 멋진 사람이자 좋은 친구였습니다.

마이라 영 1999

Duran Duran 블로그에 올라온 Roxy Music DVD 리뷰

One of the most influential bands of all time, Roxy Music gets a well-deserved and expertly produced career retrospective in this new DVD. Originally broadcast by the BBC in late 2008, the documentary covers the entire active recording career of the band as well as their recent reunions. The DVD expands on the original broadcast with nearly a half hour of additional interviews, as well as three previously unreleased live tracks from a 2006 London concert. 전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