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House on the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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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HousePoster“. Via Wikipedia.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웨스 크레이븐의 1972년 감독 데뷔작. 꽃다운 나이의 두 소녀가 철없이 마약장수로 보이는 꼬마에게 접근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변을 당하게 된다. 그 꼬마는 네 명의 탈옥수의 일행이었던 것이다. 강간과 납치, 그리고 끝내는 잔인한 살육까지 자행하는 탈옥수들의 눈에서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들이 살육을 자행했던 그 숲의 건너편에는 피해자 중 한 소녀의 집이 있었고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그 집에서 일박을 청한다.

우연히 악당들의 대화를 들은 소녀의 어머니는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고 끔찍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영화는 B급 영화의 미덕을 살려 폭력적인 면에서 나름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납치당한 소녀에게 바지에 오줌을 싸보라고 을러대는가 하면 두 소녀가 성관계를 갖게 하며 이를 즐기는 등 엽기적인 – 그러나 실제 상황이라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 장면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부모들의 복수극도 못지않게 엽기적인데 -사실 엄마의 복수극이 가장 엽기적인데너무 잔인한(!) 스포일러라 생략 -특히 소녀의 아버지가 악당에게 사용하는 전기톱은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에서 사용되기 2년 전에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방면의 선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처녀성을 잃고 숨진 딸을 위해 복수하는 부모라는 설정에 있어 잉마르 베르히만의 The Virgin Spring 과 비교되기도 한다는데 – 이 영화가 잉마르 영화의 리메이크라고 하거나 또는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거나 등등 – ,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주제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이런 저런 상황으로 변주되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처녀성은 ‘절대’선(善)을, 강간은 ‘절대’악(惡)을 의미하니 악을 응징하는 보복은 정당성을 획득하고 이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 역시 악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이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는 독자나 관객에게 극적쾌감을 안겨주니 이 이상 더 좋은 플롯이 어디 또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만드는 이나 수용하는 이나 아무런 죄책감 없이 폭력의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도이다.

반면 감독 웨스 크레이븐은 이 영화의 제작의도가 당시 미국이 치루고 있던 베트남전을 보면서 느낀 “폭력의 실상에 대한 내 인식이 반영된 영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들은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어떠한 폭력도 용서될 수 없다는’ 평화적인 메시지로 수렴되어야 할 텐데 정말 그러할지는 오리무중이다. 다만 폭력적인 영화가 상영되는 주말에 그 인근에서 폭력범죄가 감소한다는 희한한 조사결과도 있는 만큼 이 영화가 상영된 극장 인근에서 감독이 의도한 효과가 있을 개연성도 있겠다.

요컨대 이 작품의 미덕은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하위장르 중에서 현실에 근접한 일종의 ‘리얼리즘적인 공포영화’(내 마음대로 장르 규정하였음)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동 시대의 다른 공포영화들이 ‘엑소시스트’와 같은 초자연적인 소재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처럼 좀비/괴수 영화 장르로 약진할 때에 웨스 크레이븐은 나름대로 현실에 기반을 둔 사회적 이슈로 승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감독의 장기는 이 후 ‘공포의 계단’이나 ‘스크림’ 등에서 십분발휘되었다.

한편 이 영화는 2007년 개봉예정으로 리메이크 작업 중이라고 한다.(2009년에 발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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