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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Strummer: The Future Is Unwri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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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Strummer” by Masao Nakagamihttp://www.flickr.com/photos/goro_memo/776514749/.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Punk를 정확히 언제 누가 발명(!)하였는지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The Clash가 그 많고 많은 펑크밴드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밴드들 중 하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펑크밴드의 중심에는 Joe Strummer가 있었다. 영국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터키, 멕시코 등을 돌아다며 컸던 Joe는 영국으로 돌아와 부모와 떨어져 그의 형과 함께 기숙학교에 다니며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다.

Joe가 불의의 심장마비 사고로 운명을 달리 한 2002년으로부터 4년이 지난 2006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The Future is Unwritten은 이 독재적이고, 한편으로 인간적이고, 한편으로 급진적이었던, 그리고 스스로는 뮤직씬에서 한 번도 섹시심볼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하던 이 잘 생기고 매력적인 인간의 다양한 인간적 모습, 그의 음악, 그리고 그가 꿈꾸던 세상을 그 주변인들과 팬들의 인터뷰를 통해 재생시켰다.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가 The Clash로 옮겨가기 전에 만들었던 The 101’ers에서 함께 음악을 한 이들, 이 시절 버려진 주택을 점거하여 같이 살던 이들, Mick Jones를 포함한 The Clash의 멤버들, 그를 영화에 출연시킨 Jim Jarmusch, 함께 영화에 출연한 Steve Buscemi, 그의 팬이었던 John Cusack, Matt Dillon, Bono 등등. 이들은 The Clash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그를 추억하기도 한다.

The Clash는 “무정부주의적”이라 불리던 – 사실은 무정부주의적이라기보다는 “주의”에 얽매이지조차 않은 철저한 체제부정에 가까웠지만 – Sex Pistols에 비해 확실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요구했고 가사는 직선적이었다. 이러한 분명한 정치적 태도는 후에 밴드가 상업적으로 성공하게 됨에 따라 그들을 옥죄는 모순의 씨앗이 되었고, Joe는 그런 이유 등을 포함한 다양한 이유로 방황하게 된다.

Joe의 이런 모습에서 전에 다른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았던 또 하나의 위대한 아티스트 George Harrison의 방황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소 차이가 있었고, 그 방황의 대안 역시 달랐지만 무절제한 쇼비즈니스에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황폐하기 만들기보다는 보다 진실한 삶을 추구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둘의 태도는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죽었단 사실도 닮았다.

둘의 유사점이 또 있다면 바로 음악적인 면에서 서구에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음악을 들여와 밴드의 음악적 지향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Joe는 자메이카에서 레게를, George는 인도의 전통음악을 도입하여 각각의 음악세계와 접목하였고 이는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매우 성공적이었다. 특히 Joe의 레게와 펑크의 결합은 反인종주의를 지향하는 밴드의 정치적 태도가 음악적 형식으로도 성공적으로 구현됐다는 특징이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아쉬운 점은 이 점이다. 어떻게 The Clash가 다른 펑크밴드와 달리 정치적 지향과 음악적 형식을 유기적으로 통합시키는 계기인 레게를 접했고, 그것을 그들의 음악에 도입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많지 않다.1960~70년대 영국이라는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정치적, 지리적, 인종적 위치와 그런 격변이 The Clash의 음악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였는지를 좀 더 조명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DVD는 다큐멘터리 본 작품이외에 별도로 다큐멘터리에 싣지 않은 인터뷰들을 담고 있다. 이 인터뷰의 내용이 또 상당해서 별도의 콘텐츠로 여겨질 만하다. 내용도 별도로 챙겨볼 필요가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데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Martin Scorsese가 우연히 The Clash의 음악을 듣고 푹 빠졌고, 이들의 음악에서 그의 걸작 Raging Bull을 만드는데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에피소드였다. The Clash와 Raging Bull 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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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h 21051980 12 800” by Helge Øverås, http://www.helgeoveras.com/concertphoto.shtml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2.5 via Wikimedia Commons.

The Clash는 Sex Pistols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어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들던 1976년에 결성 되었다. 소위 얼터너티브 록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너바나와 펄 잼이 양대 산맥을 이루었듯이 섹스 피스톨스와 클래시는 런던 펑크를 대표하는 밴드로 주목을 받았다. 피스톨스가 펑크의 전형적 스타일을 주도함으로 해서 부각되었다면 클래시는 보다 음악적인 면에서 각광을 받았다. 당시 영국의 노동자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던 래개와 스카 사운드가 클래시의 주된 색체였고, 흥겨운 로커빌리 사운드에 펑크 특유의 과격함과 유쾌함을 담기도 했다. 그들은 데뷔작에서부터 5집 Combat Rock에 이르기까지 음악적 완성도를 더해 나갔으며 다양한 시도를 계속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노력은 클래시가 피스톨즈에 비해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또한 인종, 실업 문제, 전쟁 등 당시의 젊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서를 나타내는 정치적인 가사를 썼다. White Riot에서 클래시는 체제 순응적인 백인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Tommy Gun에서는 반전 메시지를 담았다. 그들은 거대자본이 만들어낸 록 비즈니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그것은 펑크록이 탄생했을 당시의 정서이기도 했다. 클래시의 데뷔앨범에 수록되어 있는 Whiteman In Hammersmith Palais에서 그들은 새로운 밴드들이 반항을 돈으로 바꾸고 있다고 비난했다. London Calling에 수록된 Death Or Glory에서는 자본의 힘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과시하였다. 이례적으로 트리플 앨범으로 발매한 4집 Sandinista! 때는 레코드 회사의 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트리플 앨범 발매를 강행하였으며, 레코드사에서 책정한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밴드와 레코드사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한편, 클래시의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메시지는 의식있는 밴드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었으나, 그로인해 지나치게 영웅시되거나 과대포장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피스톨즈가 무정부주의자라서 무정부주의를 부르짖은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밴드의 리더 죠 스트러머는 “사람들이 우리를 체 게바라 쯤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종종 걱정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통해 만들어진 그들의 메시지들은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를 드러내었고, 수많은 록 팬들의 공감을 얻었다. (from Clash on the web)

세상을 등진 Joe Strummer의 명복을 빕니다.

디스코그래피
THE CLASH – UK Version(1977)
GIVE’EM ENOUGH ROPE(1978)
THE CLASH – US Version(1979)
LONDON CALLING(1979)
SANDINISTA!(1980)
COMBAT ROCK(1982)
CUT THE CRAP(1985)
THE STORY OF THE CLASH(1988)
CLASH ON BROADWAY(1991)
SUPER BLACKMARKET CLASH(1993)
LIVE : FROM HERE TO ETERNITY(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