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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원하지 않나요?

휴먼리그의 ‘날 원하지 않나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댄서로 활동할 당시에 이미 흘러간 노래로 불렸던 곡이었다. 재유행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도 항상 이 곡을 좋아했다. 이런 곳에선 섹시한 가사가 어울렸다. 하지만 잘 들어보면 리드 싱어, 필 오키가 쓰라린 마음의 상처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신을 원하지 않느냐는 노래 제목도 정욕이 아닌, 불신에 젖은 얘기였다.[결백,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비채, 2005년, p431]

퍼온 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인데… 걍 퍼왔습니다. 왜 퍼왔나.. 이 사이트와 뭔 관련이 있나.. 하는 의문은 끝까지 읽으면 풀릴까요?

고등학교 시절에 여행을 하다가 야간 열차에서 야쿠자 아저씨와 동석을 하게 된 적이 있다. 하여간 얼핏 보기에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보란 듯한 야쿠자 타입으 로, 그 옆에는 역시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야쿠자의 정부 타입인 여자가 달라붙어 있는데, 그 맞은편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다. 딱히 좋아서 그 자리를 고른 게 아니 고, 상대편이 제멋대로 내가 있는 자리에 와서 앉은 것이다. 나는 소심한 소년이었 던 터라 어디 다른 자리로 옮기고 싶었지만, 어설프게 자리를 옮겼다가 시비라도 걸 어 오면 속수무책이니까─야쿠자란 그런 일에 굉장히 민감하다─그대로 참고 그 자 리에 내내 앉아 있었다.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밤도 깊어졌는데, 창문을 열어 놓은 채 달리는 구식 열차라 아무래도 모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온다. 야쿠자 아저씨는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찰싹 찰싹거리더니, 도무지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잠들어 있던 정부를 흔들어 깨워서는 둘이서 줄창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모 기향 대신인 모양이다. 효과가 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묘안이기는 하다. 야쿠자란 사람들은 별의별 일들을 다 생각해내는구나 싶어 감탄스럽게 보고 있었더 니, 이번에는 나를 향해 ‘이봐, 학생. 자네도 사양말고 피우라고’하며 롱피스 한 갑을 주었다. 사양말고 피우라니, 나는 아직 열여섯에 담배 같은 거 피워 본 적도 없는 애송이다. 정부 쪽도 심각한 표정으로 연거푸 담배를 피우고 있다.

결국 나도 하룻밤 내내 담배를 피워대야만 하는 지경에 빠졌다. 덕분에 머리는 지 끈거리지, 잠은 오지 않지 엉망이다. 정말 야쿠자는 대처하기 곤란하다.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풀장에 수영을 하러 갔더니 문신이 새겨진 어깨 에다 보트 하우스의 트레이너를 거치고 서프 팬티를 입은 야쿠자가 있었다. 이런 인 간도 곤란하다. 유무라 테루히코(湯村輝彦)[footnote]동경태생. 일러스트레이터. [/footnote]와 가타오카 요시오(片岡義男)[footnote]소설가[/footnote]와 휴먼 리그를 좋아한다는 둥 떠드는 야쿠자가 있어도 좀 곤란하다.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역시 곤란하다.

신스팝(synth pop)의 역사

□ 신디사이저(synthesizer)

이미 1870년대에 몇몇 사람들은 전기적으로 생산되는 음악에 대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50년이 되어서야 보다 진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독일 퀼른에 오직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만 세워진 스튜디오가 있었다. 최초의 신디사이저는 1955년 미국 RCA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초기의 신디사이저는 매우 비싸고 다루기 어려웠다. 1960년대에 진정으로 유용한 신디사이저가 만들어졌다. Don Buchla 와 Bob Moog 가 만든 것들이 그 예이다. Bog Moog 는 신스팝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사용된 미니무그(MiniMoog)나 그 밖의 작품과 같은 신디사이저 제작자로 가장 전설적인 인물이다. 1970년대에 신디사이저의 생산은 대규모로 성장하였다.

최초의 신디사이저는 아날로그였다. 모든 사운드는 신디사이저의 버튼이나 바(bar)와 같은 움직이는 컨트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로, 그리고 컴퓨터와 연결되는 디지털 신디사이저가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MIDI 라고 불리는 인터페이스를 이용했다. MIDI 는 음질이나 박자 등에 관한 정보를 보낸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의 사운드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사운드를 표현하는 숫자들을 보낸다. MIDI 는 이제 대부분의 퍼스널컴퓨터에 있다. 현대 신디사이저를 위한 가장 일상적인 사운드 소스는 샘플링이다. 예로 진짜 사운드의 디지털 녹음. 대부분 그것은 평범한 음악 악기나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에서 추출된다. 때로는 상이한 기술이 섞이기도 한다.

□ 신스팝(synthpop)

1960년대 말 이미 유명한 뮤지션들은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Beach Boys 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음악을 많이 바꾸지는 않았다. 1968년 최초의 신디사이저로만 연주된 레코드가 발매되었는데 Wendy Carlos 의 “Switched On Bach” 가 그것이다. 그것은 Moog 신디사이저로 바흐를 연주한 음악이었다. 독일에서는 Organisation 과 같은 실험적인 밴드가 1968년 조직되었다. 그들은 1970년 Kraftwerk 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당시 그들은 불협화음이지만 혁신적인 신디사이저 음악을 연주했다. 그들은 1970년대 초반 독일에서 세 개의 앨범을 내놓았다. 그들의 음악은 좀 더 리드미컬해지고 보다 이해하기 쉽게 변해갔다. 1974년 그들은 국제무대의 데뷔작인 “Autobahn”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은 신디사이저와 음향효과가 결합된 20분 길이의 카드라이브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음악을 만들었고 이후 일곱 개의 앨범을 내놓는다. 그들은 신스팝의 스타일을 정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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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Michel Jarre 2008” by Jean michel jarre from flickr user littleO2.jpg: Daniele Dalledonne
derivative work: HekeruiJean michel jarre from flickr user littleO2.jpg.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68년 프랑스의 Jean-Michel Jarre 가 역시 일렉트로닉 음악을 시작했다. 예로 그는 오페라를 신디사이저와 결합하였고 이것이 1972년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첫 앨범 “Oxygene”은 1976년 발매되었다. 그는 클래식과 실험음악에 영향 받아 연주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대부분의 앨범은 통상적인 신스팝과 같은 튠을 사용하지 않는다. 1981년 그는 중국에서 공연을 가진 최초의 서방 음악가가 되었다. 1984년 앨범 ”Zoolook”을 녹음했다. 이 앨범에서는 전 세계 30가지 언어가 샘플링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그는 우주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최초로 녹음하려고 시도한다. 우주비행사이자 색스폰 연주자인 Ron McNair 가 우주선 챌린저를 타고가 우주에서 그와 함께 연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다. 챌린저가 출발 후에 바로 폭발해버렸고 그의 녹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Jarre 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백만의 관중 앞에서 장대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열 장 이상의 앨범을 녹음했다. 이밖에 신디사이저를 초기에 많이 다룬 뮤지션으로 Brian Eno, Mike Oldfield, Pink Floyd, Tangerine Dream, Vangelis 등이 있다.

1970년대 말 특히 영국에서 신디사이저를 주된 악기로 쓰는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Gary Numan, Ultravox, OMD, Human League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Kraftwerk 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Depeche Mode 가 결성되었다. 그들은 Vince Clarke 이 밴드를 떠나 Yazoo(미국에서는 Yaz라 불림)를 결성하고 후에 Erasure 를 결성한기 전까지는 1981년의 그들의 힛싱글 “Just Can’t Get Enough” 과 같은 행복하고 천진난만한 신스팝을 선보였다. 이후에는 보다 멜랑콜릭해지고 어두워졌다. 다른 영국 밴드가 1981년 레코드를 내놓았는데 Duran Duran, Eurythmics, Tears For Fears, Thompson Twins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신스팝의 일종을 선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악기도 사용했다. 캐나다에서 Rational Youth 나 스웨덴의 Adolphson-Falk 가 이와 같은 밴드들이었다. 1984년 Howard Jones, Nik Kershaw, 그리고 독일 밴드 Alphaville 과 같은 신스팝 아티스트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의 다른 신스팝 밴드로는 A-ha, Bronski Beat, New Order, Soft Cell, Visage, Yello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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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talking” by CHR!S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84년 유로디스코라 불리는 팝음악이 새로운 형태로 등장한다. 특히 Scotch와 같은 이탈리아 밴드와 Modern Talking 과 같은 독일 밴드가 많았다. 유로디스코는 신디사이저에 기반을 두었기에 신스팝과 구분하기가 어렵다. Pet Shop Boys 의 음악도 유로디스코로 불렸다. 1986년 신스팝의 기반이 약화되었고 이후 오직 신디사이저에 상당 정도 의지하여 만들어진 음악만 신스팝이라 불렸다. 신디사이저는 계속해서 팝음악의 주요한 악기로 자리잡았다. 유로디스코가 영국에 와서 Stock/Aitken/Waterman라는 팀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Kylie Minogue, Rick Astley, Bananarama, Dead Or Alive 와 같은 많은 아티스트를 위해 레코드를 프로듀스했다.  1987년 하우스 뮤직이 영국에 선을 보였다. 이 음악은 본래 시카고에서 출생하였다.(예로 Frankie Knuckles) 하우스는 신디사이저에 기반하여 모노톤과 음향효과가 가미된 댄스음악이었다.

1991년 테크노 음악이 벨지움과 네델란드에 선을 보였다. 이 장르는 본래 1980년대 중반 이후 연주되기 시작한(예로 Derrick May) 디트로이트가 출생지이다. 테크노 역시 신디사이저에 기반을 둔 댄스음악이지만 하우스보다 무겁고 어둡다. 독일에는 U96과 같은 아티스트가 있었다. 1992년 유로디스코가 독일로 돌아온다. 스타일은 좀 더 터프하게 변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프로듀서가 생산한 전형적인 유로디스코 밴드는 흑인 래퍼와 여성 싱어였다. 음악은 신디사이저 멜로디와 래핑, 그리고 심플한 코러스로 구성되었다. 유로디스코는 이제 가끔 ‘댄스’로만 불리울 뿐이었다.

Page, S.P.O.C.K, Sista Mannen Pa Jorden, This Fish Needs A Bike 가 유명한 스웨덴 신스팝 밴드다. Elegant Machinery, Daily Planet, Daybehavior, Encounter, Saft 등이 기타 신스팝 밴드이다. 보다 새로운 스타일의 신스팝 밴드는 미국의 Anything Box, 영국의 Mesh, 독일의 And One 등이 있다. Electronic, Saint Etienne, Kim Wilde 가 신스팝에 가까운 영국 아티스트이다. Melody Club, Kamera, Bobby 등은 신스팝에 가까운 신세대 스웨덴 아티스트이다.

http://www.synt.nu/history/

Human League / D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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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e-cover” by Album cover artwork (c) Virgin Records (UK) 1981. Licensed under Wikipedia.

80년대 개막과 함께 동시에 들어선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보수정권시대의 팝음악은 70년대 음악과 커다란 차이가 나타났다. 때는 커피든 오디오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전자산업의 만능시대였으며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중요시되는 시대였다. 이른바 릴렉트로닉 전성기였고 비디오 시대였다. 대중음악도 따라서 외적 형태 (일렉트로닉)나 가수의 외모가 노랫말과 음악성보다 우선시되었다. 80년대 초반 전자음악(electronic music)의 유행을 몰고온 것은 영국 그룹들이었다. 거기에 바로 전세대의 펑크(뉴웨이브까지 포함)가 갖는 분노의 메시지는 자취를 감추었고 핑크빛 낭만의 소리로 질퍽했다. 그것이 대처리즘의 보수적 사회분위기에 휩쓸린 당시 영국 청년들의 대체적인 정서였다. 이무렵 뉴로맨틱 운동의 선두주자들은 듀란듀란(Duran Duran), 스팬도 발레(Spandau Ballet), 소프트 셀(Soft Cell),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이었고 데이비드 보위도 잠시 후 그 물결에 가세했다. 그러나 미국 정복에 가장 먼저 성공하여 뉴로맨틱 팝의 길을 닦은 주인공은 휴먼리그(Human League)라는 그룹이었다.

필 오우키(Phill Oakey)가 이근 6인조 영국 셰필드 출신의 이 그룹은 일렉트로닉팝 시대의 본질적 특성을 함축했다. 우선 그들은 재래식 악기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룹엔 드러머, 베이스주자, 기타리스트가 없었고 가수를 빼고는 신시사이저 연주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전통적인 키보드 신시사이저 대신 롤랜드 마이크로 콤포저 시퀀서를 앉혀 드럼 연주를 컴퓨터로 찍어 만들어냈다 드럼비트가 칼로 잰듯 정확하게 맞아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 음악’이 드디어 선을 보이게 된 것이었다. 필립 오우키는 82년 “뮤지션”지에 “우린 아마추어들이지만 개의치 않는다. 드러머를 고용하지 않고도 리듬을 만들어낼 기술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신들 스스로 프로음악인이 아니라고 공언하면서도 그들은 82년 미국 데뷔앨범 <<데어>>(Dare)로 “비틀즈처럼 넘버원 레코드를 갖고 싶어했던”꿈을 실현했다. “롤링스톤”지는 89년 “<<데어>>는 80년대 수준에서 록을 침투하고 있던 일렉트로닉의 공습을 위한 길을 깔아놓았다”고 정리했다. 싱글 <나를 원치 않나요>(Don’t you want me)는 가분히 전미 싱글차트 정상을 점령. 미국시장이 적극적으로 신시사이저 팝을 수용하려들고 있음을 반증했다.

얼핏 신시하이저하면 떠오르는 몰인간성과 차가움을 극복하고, ‘멜로디와 리듬만 좋다면 신시사이저도 통한다’는 사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미국 청취자들은 당시 <나를 원치않나요>를 들으면서 컨투리 음악으로 착각할 만큼 정겨움을 느꼈다. 사실 그들의 지향점도 ‘팝화된 신시사이저 사운드의 완성’이었다. 휴먼리그는 77년 결성되어 일렉트릭 사운드의 선구자 크라프트베르크의 뒤를 쫓았으나, 80년대 들어 거기에 팝적 색채를 덧칠하게 되었다. <<데어>>앨범의 프로듀서인 마틴 러센트(Martin Rushent)는 “나는 크라프트베르크가 아닌 모든 사람이 접근할수 있는 것, 이른바 팝적인 일렉트로닉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고 밝혔다. 재미있는 것은 휴먼리그가 자신들을 섹스 피스톨즈와 연계시켰다는 점, 그들은 섹스 피스톨즈가 그랬듯이 연주를 잘하는 것보다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로큰롤 과정을 두고 보더라도 음악인으로서의 자질보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는 것이었다.

휴먼리그의 이같은 자세는 자신들의 대중적 사운드에는 걸맞지 않았지만 뜻밖의 진지한 입장 개진이었기에 눈길을 끌었다. 그런 만큼, 노래도 의식의 무풍지대가 아닌 날카로운 사회적 시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초>(Seconds)는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관한 노래였고 <군중의 소리>(Sound of crowd)는 병든 사회가 빚어낸 편집증을 다루었다. <하느냐 죽느냐>(Do or die) 또한 침묵의 종식에 대한 요구였으며 만만하게 인식된 <나를 원하지 않나요>도 실은 망각풍조가 팽배된 현실에 대한 일침이었다.

“내가 널 만났을 때 넌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지. 내가 널 데려와 가꾸어 돌려놓았지. 그래서 새사람을 만든거야. 5년이 지난 지금 넌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성공이 네겐 너무 용이했지. 그러나 이렇게 서게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잊지마. 난 너를 옛날로 되돌릴 수 있어.”

<나를 원하지 않나요> 평범하지 않은 직설적 표현은 그들을 단연 뉴로맨틱 운동그룹진영 가운데 돋보이도록 해 주었다. 휴먼 리그는 음악하는 입장과 노랫말로 자신들이 백퍼센트 대중성 지향그룹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시사이저 만능주의’와 ‘컴퓨터음악 시도’는 음악인으로서의 기본적 자질과 관련해 비판의 도마위에 오리기도 했다.그것은 음악을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지 음악의 전부여서는 곤란했다. 이 점에서 그들에겐 결코 롱런할 수 없는 그룹이라는 숙명이 드리워져 있는 셈이었다. 그들의 본질은 당연히 많은 반발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신시사이저와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휴먼’, 즉 인간이라고 그룹명을 내건 점부터 비위가 거슬린 사라들을 위시하여 표출된 반발이었다.(임진모)

Human Le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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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leaguemk2” by A&M Records 1982. Licensed under Wikipedia.

‘일렉트릭 아바’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단순한 멜로디와 신서사이저 등 전자 음향을 유합해 새로운 일렉트로닉 팝을 창출해냈던 Human League는 1970년대 후반 팝의 한 분야로 발전된 테크노 팝의 대표주자로 영국의 쉐필드에서 1977년 결성되었다. 그 곳 출신의 컴퓨터 엔지니어였던 이언크레이그 머쉬와 마틴 웨어 두 사람이 필립 오키와 함께 손을 잡고 정식으로 그룹을 결성했다. 팀 결성 직후인 1978년 3월, 이 그룹의 네번째 멤버가 된 에드리언 라이트를 가입시키면서 휴먼리그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데, 이 때부터 이들은 팝에 전자적인 요소를 가미함과 동시에 슬라이드 조작을 통한 시각적인 영상 창조에 주력했다.

쉐필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에딘버러에 있는 패스트 트로덕션의 제작사 밥 라스트를 만났고, 밥은 이 들의 진보적인 발상을 높이 평가, 드디어 레코드 취입을 제의하였다. 이 것을 계기로 버진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한 이 들은 두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그러나 두 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유럽 공연을 마친 후 2명의 멤버가 탈퇴해 버려 사실상 휴먼리그는 해체 상태나 다름없었다. 남은 두 명의 벰버는 당시 디스코 클럽에서 노래하던 17세의 조앤 캐더럴과 수전 설리를 참가시켜 새로운 출발을 꾀했다. 계속해서 이언 버든과 레질로스라는 지방 밴드의 리더 조 콜리스를 가입시켜 다시금 휴먼리그의 중흥을 꾀앴다.

한편 휴먼리그를 탈퇴한 두 명의 멤버는 Heaven17이라는 새로운 그룹을 결성했다.

혼성 6인조 테크노 팝 그룹으로 재기의 발돋움을 시작한 휴먼리그는 첫 앨범 Dare를 1982년 초에 발표했는데,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그 해 여름 싱글 Don’t You Want Me가 미국 팝챠트 1위에 오르면서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듬해인 1983년 초에 싱글 Mirror Man과 Fascination을 다시 히트시켰다.

그러나 84년에 발표한 Hysteria는 Dare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들은 1990년에 Romantic?을 발표하고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5년후인 95년에 Octopus를 발표했다. 또한 2001년에는 신작 Secrets를 발표하여 All I Ever Wanted를 히트시켜 건재함을 과시했다.

디스코그래피

1979 – Reproduction
1980 – Travelogue
1981 – Dare
1984 – Hysteria
1986 – Crash
1990 – Romantic?
1995 – Octopus
2001 – Secrets

링크

http://www.ozemail.com.au/~jjva/human.htm
Blind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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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ven 17

영국의 테크노-팝 트리오 Heaven 17의 역사는 Martyn Ware와 Ian Craig Marsh을 중심으로 1977년 The Dead Daughters란 이름의 듀오로 처음 결성한데서 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곧 Philip Oakey와 Adi Newton과 어울려 그들의 이름을 Human League로 바꿨다. 이 둘은 그룹에 1980년까지 머물렀다.

씬써싸이저를 새로운 표현도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Marsh와 Ware는 The British Electric Foundation이라는 프로덕션 프로젝트를 결성하였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에서 Tina Turner, Sandie Shaw, Gary Glitter와 같은 다양한 뮤지션과 함께 작업을 했다. 이 프로젝트의 데뷔앨범 1980’s Music of Quality and Distinction, Vol. 1 은 Ware와 Marsh가 Sheffield 드라마 센터에서 만난 전직 사진작가 Glenn Gregory도 참여하였다. 1981년 듀오는 Gregory와 Heaven 17을 조직하였는데 이는 The British Electric Foundation은 처음이자 가장 성공적인 싸이드프로젝트였다. 데뷔 싱글 (We Don’t Need This) Fascist Groove Thang은 어느 정도의 히트를 기록하였고 앨범 Penthouse and Pavement가 그해에 발매되었다.

1983년 The Luxury Gap의 발매와 더불어 B.E.F는 한켠으로 밀려나고 Heaven 17이 주된 작업이 되었다. 싱글 Temptation, Come Live with Me, Crushed by the Wheels of Industry, Let Me Go 가 연이어 히트하였고 How Men Are가 영국내에서 히트하였다. 그룹은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1986년 다수의 게스트 뮤지션과 보컬리스트들이 참여한 Pleasure One이라는 앨범으로 복귀하였다.1988년 Teddy Bear, Duke & Psycho의 상업적 실패후 그룹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Ware는 Terence Trent D’Arby의 데뷔앨범작업에 포커스를 맞췄고 Marsh는 B.E.F 작업으로 돌아가 1991년 Music of Quality and Distinction, Vol. 2를 발매했다. 1996년 재결성된 Heaven 17이 Bigger Than America와 함께 돌아왔다.

디스코그래피
1981 Penthouse and Pavement Virgin
1982 Heaven 17 Arista
1983 The Luxury Gap Virgin
1984 How Men Are Virgin
1986 Endless Virgin
1986 Pleasure One Virgin
1988 Teddy Bear, Duke & Psycho Virgin
1996 Bigger Than America WEA
1999 Live at Last Heaven 17
2001 Temptation: Live in Concert Castle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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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thouse and Pavement(300k mpeg audio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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