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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st All Odds(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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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에 이만큼 파묻힌 영화가 있을까?80년대대중의 감성을날카롭게 자극했던 유명감독 Taylor Hackford에(사관과 신사의 그 감독)Jeff Bridges, Rachel Ward, James Woods 등 유명배우들이 멕시코 환상적인 경치의 휴양지며유적지 돌아가며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Against All Odds 라는 표현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오로지 Phill Collins 의 애절한 발라드로만 기억될 뿐이다.

이유를 되짚어 보자면 첫째, 노래가 너무 명곡이었다(갑자기 “따봉”을 외치던 그 광고가 생각난다. 사람들은 “따봉”은 기억하는데 그 쥬스의 브랜드는 기억 못하는 그런 철저히 실패한 광고). 둘째, 느와르란 장르는 80년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당대의 스타 Jeff Bridges, Rachel Ward가 전라의 연기를 펼치는가 하면 걸출한 느와르 배우 Richard Widmark가 측면지원을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의 왠지 들뜬 분위기는 안티히어로와 팜므파탈이 매력을 발산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 관객들은 차라리 같은 해 나온 코믹한 형사물 Beverly Hills Cop의 손을 들어주었다. 셋째, 결정적으로 영화가 수렴되는 맛이 없고 산만하다. 남미의 환상적인 피난처에서의 두 연인의 뼈를 불사르는 사랑에서 느닷없이 LA로 건너뛰더니 주인공 Terry는 악당들을 한방에 보낼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별 이유도 없이 악당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만다.

그럼 영화가 재미없었냐 하면 ‘정말’ 재미있다. 적당한 긴장감, 멋지게 펼쳐지는 경치, 유치하지만 그래서 볼만한 로맨스(또는 육욕), 적당히 건드려지는 물질문명의 야욕 등 느와르의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었고 나름 잘 믹스도 시켰다. 문제는 이러한 통속성이 잘 어우러져 화학적으로 융합이 되어야 하는데 조금씩 삐끗 하다는 느낌이 이질감을 준다는 사실이다.

아무려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Rachel Ward의 뒤로 흐르는 주제가가 이 모든 것을 보상해준다. 몇 안 되는 80년대 느와르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으신 분에게 추천. 물론 ‘제대로’ 된 80년대 느와르를 원하시면 Body Heat 를 추천.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1946년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 뜨내기 건달, 학대받는 아내, 둘의 공모, 이를 모르는 그리스인 남편, 느와르가 갖추어야할 기본문법을 착실히 갖춰놓고 진행되는 이 영화는 성행위의 적나라한 묘사로 인해 개봉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이런 구설수 때문에 국내에서는 ‘우편 배달원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개봉제목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고 바꾸는 해프닝도 있었다(대체 우편 배달원과 포스트맨의 차이가 뭐람).  하지만 영화는 노골적인 성애영화라거나 – 물론 웬만한 성애영화보다도 성적묘사가 탁월하다 – 전통적인 느와르하고는 약간 다른 노선을 걷는다. 영화는 둘의 범죄행위가 과연 죽음으로 단죄 받을 만큼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살짝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범죄의 요소만 빼고 본다면 서로 다른 성격의 상처받은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적 성격도 강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극의 진행은 이 건달과 남편 살해범이라는 두 커플이 해피엔딩을 맺을지도 모르는 희망을 관객에게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서 일어나는 어이없는 사고는 ‘마치 인간은 미워하지 못해도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관객을 희롱하는 것만 같다. 잭니콜슨의 애절한 눈물연기가 인상적인 라스트신이었다.

Not Of This Earth

Roger Corman 감독의 1957년 작을 원작으로 한 SF 영화. 몇몇 상황설정을 제외하고는 – 그리고 여성들이 보다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나체를 많이 보여준다는 점 등 – 오리지널과 다르지 않은 스토리로 진행된다. 특기할 점은 포르노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Traci Lords 가 간호원 역으로 출연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이 후 Johnny Depp 이 출연한 컬트 무비 Cry Baby 에 출연하는 등 나름대로 진지한 연기활동을 펼쳐나간다. 배우들의 연기는 한층 어색해져서 보는 사람들이 민망할 정도이다. 다만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특수효과는 진일보하였다. 개봉 당시 미국내 극장 수입은 8만 달러에 불과했다 한다. 포스터에서 보이는 저 괴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The Departed

잭니콜슨, 마틴쉰, 레오나르도디카프리오, 맷데이몬, 마크왈버그, 알렉볼드윈. 한 연기 한다는 이 양반들이 죄다 모여 만든 남성성 짙은 하드보일드 영화다. 홍콩영화 무간도를 마틴스콜세스가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Face Off, 첩혈쌍웅 등에서 오우삼이 즐겨 다뤘던 두 영웅의 정 반대의 삶을 통해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소재로 하고 있다. 서로 다른 조직에 스파이로 들어간 두 사람의 엇갈린 운명이 선명하게 대비된다. 대사의 절반이 욕이고 장면전개는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이리 저리 건너뛴다. 한 가지 궁금한 것. 디카프리오가 데이몬의 연인에게 주었던 그 노란 봉투의 내용은 왜 끝내 공개되지 않았을까? 도중에 결말이 바뀐 것인지?

Pride and Prejud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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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인물 엘리자베스 베넷이야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캐릭터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하지만 안 끌리는 – 역시 무엇보다도 너무 못생겨서(?!) – 콜린스보다는 언젠가 자신을 확 잡아당겨줄 사랑할 남자와 함께 하고 싶다는 그녀. 로맨틱코미디에서 신물 나게 보아온 인물상이다. 하지만 이 캐릭터가 19세기 초반 여성작가가 쓴 소설에서 등장했다면 꽤나 심각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1813년 여류작가 제인오스틴이 발표한 이 작품은 이성관계의 연결고리를 지위나 재산으로 보기보다는 둘 사이의 감정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을 법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산층 이하의 영국여인에게 결혼이란 로맨스의 귀결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벌이인 동시에 가족부양의 주요한 수단 일만큼 절박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한정상속’이라고 하여 여자에게는 상속권이 없었고 가장 가까운 남자친척 – 극중에서는 콜린스 – 에게 상속권이 있었다고 할 만큼 여성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었기에 고소득의 직업군이 있을 리 없을 당시 여성들에게 결혼이외에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작가 스스로도 혼기가 차자 청혼을 받았으나 남자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면서 평생을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하니 결국 엘리자베스는 사랑이라는 너무 위험한 베팅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깔고 있는지라 극 초반 다섯 자매의 호들갑은 충분히 이해할법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예쁘게 포장하여 무도회장이라는 시장(市場)에 내놓아 검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무도회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한 맏딸 제인이 빙리의 뇌리에 꽂혔고 엘리자베스는 어디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시큰둥하기만 한 달시와 어색한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는 그야말로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이라 할 만한 장르적 형식, 즉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오만한 달시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엘리자베스. 주위에서도 다들 서로 싫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그 미묘한 긴장감, 그 뒤로 그들을 받쳐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시대극의 충실한 재현이 볼거리를 만들어준다.

1940년대부터 영화화되기 시작하여 1995년 BBC에서 시리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었고 그 뒤에 원작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브리짓존스의 일기’까지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라 2005년 영화화에 많은 이들이 그 성과에 대해 반신반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타기도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역의 배우가 맘에 들지 않는다. 너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약간 나온 턱이 시종일관 눈에 밟혔다.(-_-;) 아버지 역으로 나온 도널드서덜랜드는 극 내내 변변히 등장도 못하다가 말미에 엘리자베스의 결혼소식에 눈시울을 붉히는 철촌살인의 명연기를 보여준다.

18세기 페미니스트라 할 만한 제인 오스틴, 그리고 그의 알터에고였을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결혼에 성공하였고 제인 오스틴은 당시에는 찬밥 대우를 받았으나 오늘날 영국에서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최고의 문학가로 손꼽히고 있다한다. 둘 모두에게 잘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사랑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이 결혼의 필수조건이라는 모던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가 좌절했을 많은 여성들에게 원작은 오히려 여성해방 지침서가 아닌 싸구려 로맨스 소설로 간주되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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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Frankenstein

패러디의 천재 멜브룩스가 1931년 제작된 공포영화의 걸작 Frankenstein 을 리메이크했다. 그리고 이 작품도 걸작이 되었다. 선조의 성을 물려받게 된 Dr. Frederick Frankenstein(Gene Wilder)은 세계적인 과학자이면서도 그의 할아버지가 시도했던 시체 되살리기 실험의 재개를 단연코 거부한다. 성에는 어딘가 괴기스러운 하녀 Inga 와 하인 Igor가 기다리고 있다.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여 결국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의 할아버지가 시도했던 신의 영역으로 도전을 재개하기로 한다. 멍청한 하인 이고르(정말 골 때리게 웃긴다)가 뇌를 잘못 가져오는 바람에 살아난 시체는 엄청난 육체적 능력에 걸맞지 않는 멍청이로 재탄생해야만 했다(갑자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생각나). 그런 그에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탭댄스라도 가르쳐보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멜브룩스가 만든 또 다른 작품 Blazing Saddles 와 함께 그의 감독이력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Gene Wilder 가 공동집필하였다.

War Of Worlds

Steven Spielberg가 2005년 감독한 이 영화는 H.G. Wells 의 동명의 소름끼치는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스토리는 사뭇 다르다. 당연히 원작에 충실했던 Byron Haskin 감독의 1953년 작과도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전편이 등장인물 들 사이의 인간관계보다는 우주생물체의 습격의 스펙터클함에 주력하는 반면, 이 작품은 무책임한 노동자 남편 Ray Ferrier(Tom Cruise)가 그의 아들딸을 우주괴물들로부터 보호하는 과정에서 복원되는 가족애를 중심축에 두고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에 따라 스펙터클 역시 전편보다 훨씬 뛰어나다. 사실 원작의 내용을 보자면 거의 무기력에 가까운 군대의 화력으로는 애당초 우주괴물을 상대할 수 없었기에, 그래서 결말이 다소 어이없을 수밖에 없기에 이 단점을 극복할 필요는 있었다. 따라서 리메이크 작품은 뭔가 관객의 시선을 잡아당길 수 있는 스토리를 삽입하였고 이전 작품에서 가족을 중심축으로 두곤 했던 스필버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함에 결국 이 영화는 딸(Dakota Fanning)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에 관한 가족영화라 할 수 있다. 부제로 “Saving Dakota Fanning”을 달아도 어색하지 않다. 

어쨌든 “우주괴물의 습격”이라는 소재는 오손 웰즈도 탐낼 만큼 픽션에서 언제 써먹어도 질리지 않는 소재이다. 당초 스필버그는 수년에 걸쳐 이 소재를 영화화할 계획이었으나 90년대 말 Independence Day, Armageddon 등 이른바 이런 유의 영화제작이 붐이어서 이 시기를 피해 2005년 제작하였다고 한다. 흥행을 염두에 두었을 포석이지만 어쨌든 작품성으로만 놓고 보자면 앞서의 두 영화보다는 이 영화의 작품성이 우수함은 분명하다. 약간은 질리기도 하지만 “가족”이라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바탕에 깔고 있고 스토리 전개 역시 앞서의 영화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다만 편집증적 인물 Ogilvy(Tim Robbins)의 등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곁가지로 이야기하자면 헐리웃이 이런 유의 스펙터클 영화를 제작할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펜타곤에 협조를 요청한다고 한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본격화된 이러한 공생관계는 군의 협조를 통한 제작비 절감을 노리는 헐리웃과 프로파간다로 영화를 활용하고자 하는 군 당국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곤 했다. 역시 Tom Cruise 가 주연을 맡았던 Top Gun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공생관계를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앞서 언급한 두 영화 Independence Day, Armageddon 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펜타곤은 Independence Day에서 군인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작협조를 거절했고 아부로 점철된 협조공문을 보낸 Armageddon 은 군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다는 당국의 자체판단에 의해 전폭적인 협조를 받았다 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 War Of Worlds 는 펜타곤의 협조를 받았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군인의 활약상이 Independence Day 보다 더 형편없기 때문이다. 기껏 보호막이 제거된 우주괴물에 박격포 몇 발 날려 쓰러트린 것이 전적의 전부인데 군이 협조했을리 만무했을 것이다. 물론 우주인들도 자신들을 “악의 세력”으로 그렸으니 협조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스필버그나 되니까 누구의 협조도 없이 이런 거창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

The Four Feathers

A.E.W Mason 이라는 소설가의 원작을 바탕으로 1939년 Zoltan Korda 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원작을 영화화한 네 번째 사례이자, 유성영화로는 첫 번째 만들어진 사례이다. 이후로도 TV 시리즈로 한번, 극장개봉작으로 또 한 번 영화화되었으니 총 여섯 번이나 영화화되었다. 비록 A.E.W Mason 이 헤밍웨이에 필적하는 훌륭한 소설가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소설이 여섯 번이나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작의 어떠한 매력요소가 이토록 영상작가들의 관심을 끄는 것일까? 그것은 영국의 제3세계에 대한 식민지 활동이 극에 달하는 1800년대 말에 대해 영국인들 – 또는 서구인들 – 이 느끼는 강한 향수와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즉, 이 시기는 서구열강의 지도자로서의 영국이라는 위치, 이를 대변하는 영국인들의 강한 자긍심, 식민지 아프리카의 광대한 평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감 등 모험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나 영상이 추구하여야 할 매력요소가 이 시기에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기병대 장교이기도 했던 감독 Zoltan Korda 는 수단의 수도 카르툼을 둘러싸고 영국군과 마흐디(Mahdi는 구원자 또는 영웅을 의미하며 실제 이름은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이끄는 반란군(?) 간에 벌어졌던 실제전투을 실제 전투 장소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양쪽의 병사까지 일부 써가면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연출하여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촬영기법은 이후 수많은 전쟁영화에서 답습되었다.

그렇다면 영화 제목인 <네 개의 깃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깃털은 겁쟁이를 상징한다. 주인공 Harry Faversham 은 영국군 장교로 수단으로의 파견을 얼마 두지 않은 시점에 불쑥 군을 떠나고 만다. 남은 친구 셋은 그를 겁쟁이로 간주하고 그에게 깃털 세 개를 보낸다. 남은 하나는 그의 약혼녀의 불신을 상징한다(1939년 작에는 약혼녀가 그에게 깃털을 주지 않았지만 2002년 작에서는 직접 준다). 바로 이 대목이 영화가 드라마의 형식으로써 가져야 할 기본갈등을 이루고 있다.

39년 작을 보면 Faversham 은 어릴 적부터 시를 읽기 즐겨하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군인집안 출신으로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억지로 군에 입대했을 뿐이다. 수단파견의 시점에 공교롭게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미련 없이 군을 관두고 만다. 반면 2002년 작에서는 집안의 강요는 동일한 설정이되 Faversham 의 아버지도 사망하지 않았고 다만 주인공은 약혼녀와의 결혼, 그리고 정말 수단파견이 겁이 나서 군을 그만두는 설정이다. 결과적으로 설득력 측면에서는 39년 작이 보다 설득력이 있고 2002년 작은 이후의 어설픈 드라마 전개의 원죄로 작용한다.

영화가 계속 이어지려면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든 겁쟁이라는 비난에 반응하여야 한다. (사실 이 부분이 원작의 가장 어설픈 설정일 수도 있는데) Faversham 은 비난을 무시하는 대신 한 맺힌 깃털 세 개를 들고 수단으로 무작정 떠난다. 그리고는 전쟁 중에 눈이 먼 그의 친구 John 과 감옥에 수감된 나머지 친구들을 구하고 결국에는 카르툼 요새를 수복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참 의아한 게 결국 친구들이 그런 곤경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가 수단으로 갔어야 할 의의가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가다보니 친구들이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영웅이 된 빈약한 개연성의 설정이다. 특히 2002년 작에는 Faversham 을 돕는 원주민이 등장하는데 그를 돕는 이유가 다만 신의 뜻이라고 말해 관객을 의아하게 만든다.

이상에서 간단히 알아본 극의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원작을 포함한 이 영화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철저히 지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은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1930년 작) 에 등장하는 국수주의 부르주아들처럼 조국을 위해 몸 바치라는 허세에 반감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반전(反戰)적 주장을 펼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깃털 세 개의 치욕을 씻기 위해 군인들보다 더 뛰어난 활약으로 제국주의 영국의 명예(?)를 수호한다.

에르제의 유명한 만화 캐릭터 땡땡이 콩고에서 그랬듯이 그들은 열등민족에 대한 보호자적 지배를 당연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점이 이 영화가 지니는 명백한 한계이다. 때문에 언제까지 제국주의적 관점을 당연시할 수 없었던 2002년 작은 어설프게도 John 의 연설을 통해 Faversham 의 행동이 조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정을 위해 그러했노라고 변명을 한다. 어쩌면 여전히 이슬람을 적으로 몰아세워 난도질을 하는 다이하드 유의 액션물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Power of One 과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백인 선지자의 역할은 놓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과연 이 작품이 또다시 영화화될 적에는 또 어떠한 핑계거리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King Kong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통해 컬트영화 전문 감독에서 일약 헐리웃 블록버스터의 거두로 떠오른 피터 잭슨이 고른 차기작은 1933년 만들어진 킹콩의 리메이크였다. 피터 잭슨이 왜 이 작품을 골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 스펙터클 무비를 만들 재력과 명성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성공을 통해 이루어진 시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킹콩의 오리지널 작품은 헐리웃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 중 하나인 거대한 고릴라를 내세워 영화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획득하였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영화이다. 그렇지만 원래 온순하고 평화로운 종인 고릴라에 대한 어쩔 수 없는 – 다른 생명에 대한 애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선한 면모를 그리고는 있지만 결국은 괴수 영화의 주인공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되는 폭력성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 편견을 필름에 담았기 때문에 무지한 대중은 한동안 고릴라를 난폭한 짐승으로 오인하였고 이로 인해 동물애호가들의 비판을 감수해야했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피터 잭슨이 이러한 동물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 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가가 비판적 영화관객들의 핫이슈가 된 시점에서 어떻게 킹콩을 묘사할 것인가 하는데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편이다. 결과적으로 봐서는 감독은 일단 일부 세세한 묘사를 제외하고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듯싶다. 오히려 그는 관객들의 동물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 이 온순한 유인원으로서의 고릴라와 난폭한 괴수로서의 ‘고릴라를 닮은’ 거대한 유인원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듯싶다.(어쨌든 섬세한 컴퓨터그래픽 덕으로 킹콩의 보다 인간적인(?) 면모는 오리지널보다 두드러질 수 있었다)

영화 자체로 파고 들어가면 이 영화의 플롯 자체는 ‘미녀와 야수’에 괴수 영화를 짬뽕한 영화이다. 애초부터 맺어질 수 없었던 이상한 커플의 사랑이야기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한 나락에 빠진 영화제작자의 욕망과 주위 인물들의 모험담이 결합되어 소위 ‘사랑과 야망, 그리고 모험’ 이 총망라된 버라이어티쇼로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스케일의 영화는 당연하게도 1930년대보다는 21세기의 최첨단 영화제작 환경에서 보다 박진감 넘치게 재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적 상상력은 반드시 상상력의 빈 공간을 오감의 만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극대화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글로 표현된 매체만으로도 희열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최첨단 기술을 통해 영화화되었다고 해서 원작에서 느끼는 희열을 반드시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요컨대 원작과 리메이크 중 어느 작품이 더 맘에 드는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혜숙의 구미호가 좋은지 고소영의 구미호가 좋은지가 개인의 몫인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은 첨 글을 쓸 때 킹콩에서 감지할 수 있는 폭력적 자본주의에 대한 메타포에 대해 이야기할까 했으나 이런 유의 영화이야기는 이미 뻔한지라 생략.

Miami Vice

실제로 TV 시리즈물을 감독했던 Michael Mann 이 감독하였으며 공간적 배경도 마이애미라는 점에서, 그리고 제목 역시 TV 시리즈의 제목과 같다는 점에서 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형사 시리즈물 Miami Vice 의 극장판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지만 사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당시 인기를 얻었던 Jan Hammer의 시리즈 주제곡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점에서는 Mission Impossible 과 비교된다),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TV 시리즈물 인기의 핵심이었던 Don Johnson 의 이미지를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목만 같은 별개의 영화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당시 시리즈물이 지향했던 화려한 80년대 패션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다(역시나 주인공들이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스포츠카와 멋진 수트를 입고 다니긴 하지만). 오히려 하드보일드적인 영상은 세기말의 우울한 마이애미를 그리고 있다. 극의 서술도 남성 스타일의 정통 형사극을 지향하고 있어 러쎌웨폰과 같은 슬랩스틱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문제는 극의 긴장감을 고취시켜줄 정교한 드라마인데 이 부분은 그리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신선하다거나 짜임새 있는 맛은 없다. 소니 역의 콜린파렐은 개인적인 취향인지 모르겠으나 미스캐스팅이라 생각되지만 결정적인 미스캐스팅은 공리다. 너무 투박하여 머리를 아프게 하는 영어발음에 자신의 정체성을 못 찾아 극중 내내 헤매는 모습은 극으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이다. 정 아시아계 팜므파탈을 고르고 싶었으면 차라리 장만옥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다만 Jamie Fox 는 그나마 새로운 흑인 액션영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