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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금자씨, 이제는 평안히 쉬소서

어제 모처럼 주말에 쉬었던 관계로 영화 한편 감상하였습니다.

감상한 영화는 ‘친절한 금자씨’ 영화 제목 자체가 심상치 않아 인구에 회자되고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건방진 금자씨’로 패러디되기까지 했던 영화라 왠지 감상 전부터 이미 친숙해있던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입소문에 비해 대중의 코드와는 괴리가 있는, 즉 흥행요소가 별로 없는 영화였다는 심증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장르를 표현하자면 ‘잔혹 여인극장 코미디 버전’이라고 할까요? 소싯적 오전 시간 라디오나 TV에서 종종 들려오던 목소리 기억하시죠? “금자씨는 제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더욱 저며 오는 모성애를 부둥켜안고 울어야만 했다” 뭐 이런 유의 신파조의 읊조림 말이죠.

시대배경은 2004년 임에도 의도적으로 펼쳐지는 과장된 복고풍의 미장센, 화장, 그리고 의상은 비정상적인 캐릭터, 그리고 줄거리와 함께 영화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줄거리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볼까요? 이 영화는 줄거리를 이야기해봤자 특별히 스포일러랄 게 없을 만큼 처음부터 패를 까놓고 진행됩니다. 올드보이 식의 반전을 기대한다면 실망이 크실 겁니다. 다만 영화 중간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의외의 장면에 대한 당혹감으로 극적 긴장감을 채워가고 있죠. 복수심의 원천이 올드보이가 까닭모를 구속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면 금자씨에서는 모성애입니다. 복수심이 이성이 아닌 본능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면 모성애야말로 가장 큰 복수심의 원천이겠죠.(복수는 나의 것은 부성애였죠? 아마?)

그러나 역시 이 영화에서 줄거리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스타일’입니다. 이영애가 어떻게 변하였는가?, 권총은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들어야 했는가?, 복수를 끝낸 이들은 왜 핏빛 케익을 즐겼는가?(일종의 카니발 의식?) 등등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유머코드는 사실은 대중성을 의식한 감독의 타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현존 문명세계에서는 인간의 죄악을 사법체계에 의존하지만 영화라는 장르는 끊임없이 사적인 복수극에 유혹을 느낍니다. 더티해리 시리즈에서는 크린트이스트우드가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아닌 총에 의존하여 복수극을 감행하고,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같은 초능력자들도 법이 아닌 자신의 초인성을 수단으로 복수를 감행합니다. 금자씨 역시 감옥에서 다져진 냉철하고 초인적인 의지로 상황을 돌파해내죠.

결국은 복수를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그 카타르시스는 배트맨의 복수극처럼 허망합니다. 복수를 끝낸 후 빨간 아이섀도를 지우면서 자신의 복면을 벗어버리지만 관객인 저로서는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아쉬움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절대 악인 한 명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슈퍼맨 있다고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않듯이 금자씨가 복수를 했다고 유괴라는 범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남는 것은 배트맨이나 슈퍼맨에서 볼 수 있는 스펙타클 정도일 텐데 금자씨가 그나마 기대고 있는 것은 스타일과 블랙유머일뿐이죠. 금자씨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보여줬던 막가파적 액션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예뻐서일까요?

Desperate Living

추잡한 영화의 달인 John Waters 의 1977년 작이다. 핑크플라밍고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어이없음’이 일관되게 되풀이되는 영화이다. 흑인하녀의 엉덩이에 깔려죽는 남자, 용의자의 팬티를 뺏어 입고는 오르가즘에 몸부림치는 경찰, 여자 친구를 위해 성전환 수술을 했다가 여자 친구가 실망하자 가위로 성기를 잘라버리는 레즈비언, 흑인하녀와 동성애에 빠지는 여인 등 극단으로 치닫는 캐릭터들이 총집합하여 맥락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한판 해프닝을 벌인다. 다만 이야기 흐름상으로는 옷을 거꾸로 입고 거꾸로 걸어다니라는 둥 엉뚱한 소리만 해대는 여왕의부당한 압제에 맞서 변혁을 꿈꾸는 레즈비언 들의 혁명영화(?)로 해석될 수도 있다.중상류 계급 출신이지만 어릴 적부터 괴상한 취미에 맛을 들여 그의 전 영화인생을 이런 ‘뻘쭘한’ 영화 만들기에 전력을 쏟은 John Waters 의 악취미는 확실히 누구도 범접하지 못했던 영역 – 기껏해야 보다 얌전한(?) 스타일로 데이빗크로넨버그가 접근했다고 해야 할까? – 일 것이다.

영화소개

Heavenly Creatures(1994)

우정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 악랄하리만큼 변태적인 컬트 Bad Taste 의 감독에서 ‘반지의 전쟁’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피터잭슨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1994년작. 외골수 파울린이 생기발랄한 소녀 줄리엣(케이트윈슬렛)을 만나서 애정에 가까운 우정을 발전시켜나가는 와중에 둘은 줄리엣의 엄마가 자신들의 우정을 파괴하려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결과는 파국적 종말. Bad Taste, Dead Alive 의 악동 스타일 영화로 명성을 얻은 피터잭슨은 정통극 영화에도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준 영화. 실화의 주인공은 후에 소설가가 되었다 한다.

Cachor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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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areleasingbearcub” by Poster scan.. Licensed under Wikipedia.

스페인산 퀴어 영화다. 일단 퀴어 영화도 흔치 않은 소재인데다 스페인산이라니 스페인의 동성애자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할 법도 하다.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제법 살집이 있는 – 이 영화의 영어제목 Bear Club에서 Bear는 살집이 있으신 동성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그쪽으로도 제법 시장(?)이 크다고 한다 – 두 남자가 벌이는 섹스신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성기, 거침없는 마약문화의 노출 등 제법 하드코어하게 나간다. 그렇지만 그러한 낯선 문화만 제쳐놓고 본다면 그리 거부감 없는 일상적인 드라마다. 사고뭉치 누나로부터 떠맡은 조카, 서먹함을 극복하고 같은 핏줄의 애정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닥치는 시련, 이에 대한 극복 등 게이코드라는 배경을 깔고 일상에서 벌어질법한 일을 무리 없이 그려낸 수작이다. 감독은 이런 잔잔한 드라마를 통해 동성애도 우리네 나머지 삶의 구성요소 중 특별할 것 없는 하나임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