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ly Johnson의 새 앨범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카리스마 넘치던 리드싱어 Holly Johnson이 새 앨범 Europa를 내놓았다. 아래는 트랙리스트.

1. Follow Your Heart
2. In And Out Of Love
3. Heaven’s Eyes
4. So Much It Hurts
5. Dancing With No Fear
6. Europa
7. Glorious
8. Hold On Tight
9. Lonesome Town
10. You’re In My Dreams Tonight
11. The Sun Will Shine Again

선주문은 여기서 할 수 있고 디지털 다운로드로는 아이튠스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 노래감상은 여기로 가서.

[자료 출처]

Vi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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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s-victory”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1984년 6월 22일 The Jacksons의 열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Victory가 에픽 레코드사를 통해서 출시되었다. Michael Jackson, Jackie Jackson, Marlon Jackson, Randy Jackson, Tito Jackson, David Paich, 그리고 Steve Porcaro가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3년 11월 11일부터 1984년 5월 7일까지 뉴욕, LA 등 다양한 도시의 다양한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1983년 봄의 “모타운 25” TV 스페셜에서의 The Jacksons의 재결합 공연 이후 그룹은 3년 전에 발표한 Triumph 이후의 새 앨범을 내놓을 것을 결심했다. 이 앨범은 여섯 명의 잭슨 형제가 모두 참여한 유일한 앨범이 되었다. 또한 Michael Jackson이 리드 싱어로 전체적으로 참여한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Jacksons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형제들 사이에서의 경쟁심 때문에 그룹으로써의 앨범이라기보다는 각 멤버들의 솔로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는 앨범의 성경이 강했다. 다만 Jermaine Jackson은 마이클과 듀엣을 하기도 했고, 마이클은 다른 세 곡에서 백그라운드 보컬을 맡기도 했다. 이 앨범에서는 Mick Jagger가 함께 노래한 “State Of Shock”이 팝 차트 3위 R&B 차트 4위에 오르는 인기를 얻었다. 이외에도 “Torture” (#17 Pop, #12 R&B)와 “Body” (#47 Pop, #39 R&B)등이 인기를 얻었다. 앨범은 빌보드 탑200 차트에서 4위까지 올랐고 R&B 앨범 차트에서는 2위까지 올랐다. 앨범의 홍보를 위해서 일명 Victory Tour도 진행되었다. 순회공연이 끝난 후에 Michael과 Marlon은 그룹을 떠난다. 남은 넷은 계속하여 The Jacksons의 이름으로 활동하며 몇 장의 앨범을 더 냈다.

발매당시 우리나라의 팝음악 잡지 음악세계에서는 특별부록으로 카셋테잎으로 된 이 앨범을 줬다.

Toture 노래 듣기

Flash And The 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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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Koch for Anefohttp://proxy.handle.net/10648/ab4a2d98-d0b4-102d-bcf8-003048976d84, CC0, Link

Flash And The Pan은 호주의 뉴웨이브 밴드다. 이 밴드는 호주에서 가장 위대한 락밴드로 평가받는 The Easybeats의 멤버였던 Harry Vanda와 George Young이 1979년대에 시작한 프로젝트다. 이 듀오의 첫 성공은 데뷔 앨범의 수록곡 Walking In The Rain의 인기였다. 이 곡은 후에 Grace Jones가 그녀의 1981년 앨범 Nightclubbing에서 커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Hey St. Peter가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핫100 차트 76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앨범도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는데 유럽, 영국, 미국 등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Albums
Flash and the Pan (1979)
Lights in the Night (1980)
Headlines (1982)
Early Morning Wake Up Call (1984)
Nights in France (1987)
Burning up the Night (1992)

보다 상세한 디스코그래피

Cassette Tape

통상 카셋테잎(Cassette Tape)이라 불리는 콤팩트카셋(Compact Cassette) 또는 뮤직카셋(Musicassette)은 오디오의 녹음과 재생을 위한 마그네틱 테잎 형태의 레코딩 포맷이다. 통상 이미 녹음된 형태 또는 녹음을 위해 아무것도 녹음되지 않은 형태로 판매되었다. 원래는 구술 녹음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기술이 발전에 따라 음악 감상용이나 초기 컴퓨터의 데이터 저장용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0년 초에서 1990년대 말까지가 카셋테잎이 가장 일상적인 녹음 수단이었다.

1935년 AEG는 Fritz Pfleumer가 1928년 발명한 마그네틱 테잎의 기술에 근거하여 최초의 오픈릴식(reel-to-reel)의 테잎 녹음기를 “Magnetophon“이란 이름으로 – 독일에서는 Tonbandgerät 란 이름으로 – 출시한다. 하지만 비싼 가격과 어려운 작동 방법 때문에 1950년대 까지 대중화되지 못하고 주로 라디오 방송국과 레코딩 스튜디오 등에서만 사용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에 진공관이 트랜지스터 등으로 대체되는 등의 기술발전에 따라 가격이 크게 낮아져 대중화의 막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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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 machine-readable author provided. Lgreen~commonswiki assumed (based on copyright claims). – No machine-readable source provided. Own work assumed (based on copyright claims)., CC BY-SA 3.0, Link

1962년 필립스가 새로운 제품을 발명한다. 이 제품은 Compact Cassette이라는 트레이드마크를 달고 유럽과 미국에 각각 1963년과 1964년에 소개되었다. 필립스는 또한 1964년 11월 “캐리코더 150(Carry-Corder 150)”이란 이름의 녹음기/재생기를 미국에서 출시해 1966년까지 25만 개를 넘게 팔았다. 1968년까지 85개의 제조업체에서 2백4십만 개가 넘는 재생기를 팔았다. 초기에 그리 좋지 않았던 음질은 1970년대 8트랙 테잎의 보다 나아진 품질 등의 계기를 통해 계속 개선되어 갔다.

통상 ferric oxide라는 화합물을 재료로 하는 마그네틱 테잎으로 생산되었지만 좀더 발달된 기술이 사용된 “크롬” 테잎이나 “메탈” 테잎이 더 비싼 값에 팔리기도 했다. 테잎의 길이는 통상 재생시간의 분으로 표시되었다.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각 면이 23분의 길이로 되어 있는 총 46분의 재생시간을 가진 C46과 총 60분의 재생시간을 가진 C60이었다. 이외에도 90분과 120분, 그리고 그 이상의 재생시간을 가진 제품도 있었다. 테잎을 갈아 끼우는 수고를 없애는 “오토리버스” 기능도 도입되는 등 기술발전은 계속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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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manTPS-L2” by Original uploader was FPAtl at en.wikipedia Later versions were uploaded by Kafziel at en.wikipedia. – Originally from en.wikipedia; description page is/was here..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카셋테잎은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79년 출시된 Sony의 Walkman과 같은 소지 가능한 포켓 레코더의 등장과 고음질의 재생기의 등장이 활용도를 획기적으로 높였기 때문이다. 카셋테잎 자체보다 그리 크지도 않은 혁신적인 제품이었던 Walkman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며 LP의 대체물이 되어가는 카셋테잎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소지가 간편한 크기와 녹음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철의 장막 너머로 락음악을 전하기도 하는 등 개발도상국에서 특히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테잎은 소위 녹음을 위한 “공(blank)테잎”으로 팔렸다. 소비자는 이 테잎을 이용해 자신이나 친구의 레코드에서 또는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오디오를 녹음할 수 있었다. 당시 음악업계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집에서 테잎으로 녹음하는 것은 음악을 죽이는 짓이다(Home Taping Is Killing Music)”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녹음할 권리를 주장했다.1 그레이트풀데드와 같은 반골적 기질의 밴드는 그들의 공연을 녹음해 팔라고 독려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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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taping is killing music” by Seems that the original poster found it here and cropped..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이러한 논란은 법적분쟁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1988년 “CBS 대 암스트래드” 케이스가 있었다. 당시 암스트래드는 고속의 두 개가 붙어있는 카셋데크와 같은 기기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 기기를 이용해 소비자는 한 테잎의 내용물을 손쉽게 다른 테잎에 복사할 수 있었다. 명백히 음악업계가 반대하는 녹음을 용이하게 하는 상거래였지만 결과는 암스트래드의 승리였다. 그 기기를 이용해 소비자가 그런 행위를 할 개연성이 높음에도 제조업체의 책임은 없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전체적인 팝시장과 더불어 싱글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카셋테잎의 존재는 소중한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음반 가게에서는 소비자가 녹음해서 듣고 싶은 노래를 적은 리스트를 가져오면 웬만한 LP가격의 절반 정도의 가격에 그 노래를 녹음한 카셋테잎을 팔았다. 거리에선 불법으로 녹음된 테잎을 파는 소위 “구루마 테잎”이 염가에 판매되었다. 주머니 사정이 신통치 않았던 학생 팬들은 이런 테잎을 이용했고 후에 CD에서 노래를 테잎에 편집 녹음해 친구에게 선물하는 이벤트도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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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track inside” by User Isis on en.wikipedia – Originally from en.wikipedia; description page is (was) here * 20:50, 21 October 2002 [[:en:User:Isis|Isis]] 198×276 (12,479 bytes) <span class=”comment”>(photo of inside of 8-track tape cartridge)</span>.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서구에서 테잎의 인기는 1980년대가 저물면서 빠르게 쇠퇴했다. 대체재는 CD였다. 2001년 전체적으로 팔리는 음악 매체 중에 테잎이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4%였다. 이제 대부분의 메이저 레이블은 테잎의 형태로 음악을 생산해내지 않는다. 하지만 향수는 남는 법. Sonic Youth의 Thurston Moore는 2009년 “나는 오직 카셋테잎으로만 음악을 듣는다”고 선언했다. 몇몇 인디 음악가들은 여전히 테잎으로 음악을 녹음하고 판매한다. 하이파이에 대한 일종의 반항의 형태로 로우파이(Low-Fi) 장르도 발전했다.

1990년대 DAT나 MiniDisc와 같은 테잎을 대체하는 디지털 녹음용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카셋테잎의 기술개발은 중단되었다. 카셋테잎 돌풍의 주역 필립스는 1992년 DCC(Digital Compact Cassette)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런 후계자들은 카셋테잎이 누리던 인기를 얻지 못했다. 2011년 개정판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는 콘사이스 버전에서 “cassette tape”이란 단어를 삭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전에 새로운 400개의 단어를 대체하기 위해 구시대의 단어를 삭제한 것이다.

  1. 이러한 선동은 mp3 시대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는데 RIAA는 “mp3 불법 다운로드는 공산주의를 다운로드하는 것과 같다”며 뒤에 붉은 얼굴의 레닌이 서있는 포스터까지 만들기도 했다.

C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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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anCars”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beggars.com.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1979년 영국의 아티스트 Gary Numan은 그의 앨범 The Pleasure Principle에서 “Cars”를 싱글로 내놓았다. 이 곡은 영국과 캐나다의 싱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고 미국 싱글 차트에서는 9위까지 올랐다.1 이로써 이 곡은 시장에서나 뮤지션들 모두에게 신디싸이저를 이용한 뉴웨이브 음악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계기가 된 곡이 되었다.

이 곡은 Numan이 싱글 네 개와 영국 차트에서 인기를 얻은 “Are ‘Friends’ Electric?”을 포함한 LP 두 개를 발표한 이전 밴드 Tubeway Army라는 이름을 버리고 처음 내놓은 곡이다. 음악적으로 이 곡은 이전의 곡들보다 더 밝아지고 보다 팝친화적이었다. Numan은 후에 이 곡을 만들 때 상업적 성공을 염두에 두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 때가 아마도 ‘이게 히트 싱글이 될 수 있을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만든 첫 노래에요.”라고 말했다.

“Cars”의 제작에는 베이스와 드럼과 같은 리듬 섹션은 전통적인 악기를 사용됐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미니무그(Minimoog)와 폴리무그(Polymoog) 키보드 등의 아날로그 신디싸이저를 이용됐다. 간주 부분에는 탬보린이 쓰이기도 했다. Numan의 보컬은 대부분 무미건조하게 마치 로봇이 노래하는 듯한 톤으로 녹음되었다. Numan에 의하면 가사는 그가 직접 거리에서 겪었던 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한번은 런던에서 트래픽에 갇혀있었어요. 그런데 앞차의 사람들과 문제가 생겼죠. 그들은 나를 차에서 끌어내 때리려 했어요. 난 문을 잠그고 마침내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그들에게서 도망쳤죠. 그런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이는 현대에서 당신이 차안에서 얼마나 안전함을 느끼는 지를 설명하는 것이에요. 그 안에 있을 때 당신의 모든 멘탈이 달라집니다. 그건 당신만의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왕국과 같죠.”

뮤직비디오

  1. Numan이 비록 영국에서는 몇 개의 히트곡이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이게 그의 유일한 탑40 곡이 되었다.

Coming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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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ComingUp” by http://www.jpgr.co.uk/r6035.html. Licensed under Wikipedia.

1980년 6월 28일 Paul McCartney & Wings의 “Coming Up”이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3주간 머문다. Paul McCartney가 작곡한 이 곡은 그가 솔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일곱 번째 정상에 오른 곡이 되었다. Paul은 스코틀랜드 시골의 그의 별장에서 “McCartney II”를 녹음하던 1979년 여름 이 곡을 만들고 모든 연주파트와 대부분의 보컬을 스스로 녹음한다.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Paul은 이 곡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아이디어 없이 드럼 트랙에서부터 시작하여 기타, 베이스 등을 차례대로 붙여나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컬에는 다양한 스피드로 변주할 수 있는 피치콘트롤이 사용됐다.

싱글로 발매하기 몇 달 전에 Paul은 그의 밴드 Wings와 함께 짧은 영국 순회공연에서 이 곡을 선보인다. 이 과정에서 1979년 12월 17일 Glasgow의 글래스고아폴로에서 가진 공연이 녹음됐다. 1980년 4월 이 곡의 스튜디오 버전이 출시되었다. 그리고 라이브 버전은 Wings의 1975년 앨범 “Venus And Mars” 시절의 트랙 “Lunchbox/Odd Sox”과 함께 스튜디오 버전의 B면에 수록되었다.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은 라이브 버전을 더 사랑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 미국의 콜롬비아 레코드사는 “McCartney II” 앨범에 라이브 버전을 포함시키고자 했지만 Paul은 이를 거절한다. 콜롬비아 레코드사의 한 임원은 “미국인은 폴 매카트니의 진짜 목소리를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타협점으로 찾은 것은 앨범의 첫 출시 때 홍보용의 라이브 버전 7인치 단면 싱글을 북미에서 보너스로 포함시킨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이 노래는 차트 2위에 올라 3주간 머문다. 미국에서는 1980년 4월 26일 73위로 핫100 차트에 등장한 이 곡은 9주 후에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빌보드는 비록 라이브 버전이 더 방송을 자주 탔음에도 처음에 핫100 차트에 A면 곡으로 차트에 1위에 머물러 있던 기간을 포함하여 12주 동안 등재해놓았다. 빌보드는 후반 아홉 주가 돼서야 차트에 B면으로 표시했다.

이 노래가 인기를 얻던 시기에 비슷한 순위에 머물러 있던 곡들은 Lipps Inc.의 Funky Town, Gary Numan의 Cars, Billy Joel의 It’s Still Rock N Roll To Me 등이었다. 70년대를 댄스뮤직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디스코, 이제 막 인기 몰이를 하기 시작한 신쓰팝, 그리고 이들 트렌드 사이를 비집고 “여전히 록앤롤”이라고 외치던 음악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Coming Up은 이 와중에 한 위대한 뮤지션이 시대의 조류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낸 뉴웨이브 스타일의 댄스락 넘버인 셈이다.

한편 이 노래는 Paul의 친구이자 또 다른 위대한 뮤지션인 John Lennon의 음악 역정에 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전까지 5년째 음악계를 떠나 그의 아내 오노 요코와 시간을 보내고 있던 John은 이 노래를 라디오에서 듣게 됐다. 이 곡에서 자극을 받은 John은 1980년 11월 발매될 앨범 “Double Fantasy”를 구성하게 될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Talkin’ ‘Bout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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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man – Revolution” by 7″ gramophone picture sleeve. Licensed under Wikipedia.

“Talkin’ ‘Bout a Revolution“은 싱어송라이터 Tracy Chapman의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에서 두 번째 싱글로 발매된 곡이다. 빌보드 핫100 싱글 차트에는 75위에 머물러 전작 ”Fast Car“의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빌보드의 다른 4개의 차트에 올라가는 등의 다양한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곡이 되었다. 특히 모던락 차트와 R&B/힙합 차트에 동시에 오르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 밖에서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탑40에 오르는 사랑을 받았다. 정치적 각성에 대한 직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노래는 또한 2011년 튀니지의 혁명 과정에서 라디오 방송국의 애청 레퍼토리가 되기도 했다. G, C, Em, D.의 심플한 기타 코드가 곡 내내 계속되며 ”가난한 이들이 그들의 것이었던 것을 찾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반복하는 노래인지라 프로파간다 송으로 매우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는 Living Colour, Reel Big Fish와 같은 얼터너티브락 밴드들이 즐겨 리메이크하였다.

뮤직비디오

게스트북을 설치했습니다

한가한 일요일 오전 80s Net에 게스트북을 설치했습니다. 남기실 말이 있으신 분들은 애용해주세요. 바로 가시려면 여기를 클릭.

Barack Obama signs Parliament of Canada guestbook 2-19-09.JPG
Barack Obama signs Parliament of Canada guestbook 2-19-09” by Pete Souzahttp://www.whitehouse.gov/photogallery/working-with-canada/.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캐나다 의회에 방문하여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는 오바마

When In Rome – The Promise

신쓰팝 밴드 When In Rome이 그들의 최고 히트 싱글 The Promise의 리믹스 버전과 Heaven Knows, 그리고 보너스트랙 Wherever You Go 등을 담아 2006년 내놓은 앨범이다. 위의 커버는 그 즈음에 가진 샌프란시스코 공연에 판 CD로 당시 싱어의 싸인이 담긴 커버다. 당시 공연은 또 다른 신쓰팝 밴드 Animotion과의 합동 공연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Animotion이 먼저 공연했고 두 번째로 When In Rome이 공연했는데 이때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When In Rome의 키보드 주자가 키보드를 점검하다 문제가 있는지 “엔지니어 없냐?”고 말하자 관중들 상당수가 “I Engineer”를 외친 것이다. “I Engineer”는 Animotion의 히트곡이다.

1 The Promise (Original Radio Edit)
2 The Promise (Covenant Mix)
3 The Promise (Coliseum Mix)
4 The Promise (New Radio Edit)
5 The Promise (Instrumental Version 2006)
6 Heaven Knows (Ultimix Mix)
7 Wherever You Go (Bonus Track)

The Lexicon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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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Lexicon” by The cover art can be obtained from the record label.. Licensed under Wikipedia.

The Lexicon of Love는 영국 출신의 뉴웨이브 밴드 ABC가 1982년 내놓은 데뷔 앨범이다. 이 앨범은 컨셉트 앨범은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싱어가 충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려 시도했지만 실패함으로써 겪은 마음의 상처라는 주제를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앨범은 The Buggles 출신의 Trevor Horn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엔지니어는 Gary Langan이 맡았다. 한편 클래식과 팝 양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Anne Dudley의 오케스트레이션과 JJ Jeczalik의 Fairlight CMI 프로그래밍의 도움을 받았다. 이 넷은 후에 Art Of Noise를 결성한다. 프로덕션 팀이나 세션 플레이어들은 ZZT 레이블의 기초를 다진 이들이었다. Tears Are Not Enough, All Of My Heart, Poison Arrow, The Look Of Love(Part One)이 영국에서 차트 20위안에 올랐다. Poison Arrow, The Look Of Love(Part One)은 미국 싱글 차트에서 각각 25위와 14위까지 올랐다. 앨범은 영국 차트에서 1위, 미국 차트에서 24위까지 올랐다. 2004년 삭제된 부분과 초기 데모, 그리고 1982년 공연의 라이브 버전 등이 포함된 두 장짜리 디럭스 디스크가 뉴트론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다. 2009년에는 ABC가 런던의 로얄알버트홀에서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와 함께 앨범의 수록곡을 가지고 공연을 가졌다. 2012년 앨범 발매 3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한 번 로얄드러리레인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Side One
1. “Show Me” – 4:02
2. “Poison Arrow” – 3:24
3. “Many Happy Returns” – 3:56
4. “Tears Are Not Enough” – 3:31
5. “Valentine’s Day” – 3:42
Side Two
6. “The Look of Love” (Part One) – 3:26
7. “Date Stamp” – 3:51
8. “All of My Heart” – 5:12
9. “4 Ever 2 Gether” (ABC/Anne Dudley) – 5:30
10. “The Look of Love” (Part Four) –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