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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Remain In Light을 내놓은 뒤 Talking Heads는 한동안 꿀맛같은 휴지기를 가졌다. 이 시기에 데이빗번은 브라이언이노와 함께 1981년 My Life in the Bush of Ghosts라는 제목의 앨범을 내놓았다. 데이빗 개인적으로는 The Catherine Wheel이라는 앨범 작업도 했다. 우연히도 나머지 멤버들도 같은 해 자신들만의 창작물을 냈다. 즉, 크리스프란츠는 티나웨이머스와 함께 Tom Tom Club이라는 밴드를 조직하여 셀프타이틀 앨범과 Under the Boardwalk를(1982년) 내놓았는데, 첫 번째 앨범에서 발매된 싱글 Genius Of Love가 크게 인기를 얻었다. 제리해리 역시 The Red and the Black이라는 솔로 앨범을 내놓았다.
물론 밴드 활동도 이어지고 있었다. 1982년 밴드의 라이브 앨범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가 발매되었다. 스튜디오앨범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감도 없지 않지만, 이 앨범은 그 나름대로의 그간의 밴드의 음악적 성과가 차곡차곡 담겨진 뛰어난 라이브앨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밴드는 “확장한 토킹헤즈”와 함께 일본 및 유럽을 포함한 순회공연도 – 라이브 앨범을 홍보하는 라이브! – 가졌다.1 이렇듯 밴드 멤버는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만족스러운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기간이 이후의 활동에 있어 가지는 특별한 의미는 각자의 사이드프로젝트를 통해 멤버들이 점점 더 흑인음악의 다양한 면을 그들의 음악에 녹여내는 목표를 추구하였고 많은 성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밴드의 리듬 섹션끼리 모여 만든 탐탐클럽의 펑키(funky) 댄스팝 사운드가 대중에게 먹혔다는 점이 나머지 멤버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2 이러한 사실은 바로 1983년 밴드의 이름으로 발표한 Speaking in Tongues가 백인 락과 흑인 댄스팝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3
악상의 작업은 롱아일랜드에 있는 크리스의 아파트 등에서 진행되었고, 몇몇 기본 트랙은 뉴욕의 Blank Tapes에서 녹음했다. 본격적인 앨범의 녹음은 바하마에서 이루어졌다. 이노는 이제 프로듀싱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4 그렇게 되면서 프로듀서의 이름은 Talking Heads가 되었다. “확장한 토킹헤즈” 멤버중 상당수는 이번에는 앨범 작업에서부터 참여했다. Bernie Worrell은 Girlfriend is Better에서 신디사이저를 맡았고, Nona Hendryx과 Dolette McDonald는 유사(類似) 가스펠곡과도 같은 Slippery People에서 쏘울풀한 보컬을 맡아주었다. Steve Scales는 Burning Down the House 등에서 퍼커션을 연주했다.
특징적인 세션 뮤지션은 Wally Badarou와 Alex Weir다. Level 42와 함께 활동했던 왈리는 이 앨범에서 세 곡의 신디사이저 연주를 맡아서 앨범의 그루브를 책임졌다.5 R&B 밴드 The Brothers Johnson의 멤버였던 알렉스는 Adrian Belew 대신에6 기타를 연주했다. 알렉스는 어이없게도 라이브앨범 The Name of This Band is Talking Heads의 홍보를 위한 라이브 투어에서부터 참여했는데,7 더 많은 흑인 뮤지션의 참여는 더 많은 흑인 음악이 가미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결과로 Rolling Stone의 David Fricke은 “예술적인 백인 팝음악과 딥 블랙 펑크(funk)를 구분하는 얇은 선을 마침내 무너뜨린 앨범”이라고 극찬했다. 물론 이미 그 얇은 선은 탐탐클럽이 부순 상황이었고 이 앨범은 그 후속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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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라우첸버그(Robert Rauschenberg)가 디자인한 앨범 아트
앨범 아트는 데비잇의 작품이다. 이전 작품의 커버 아트에 비해 많이 밝은 톤이라는 느낌인데 당시 밴드는 (토킹헤즈의 팬이기도 했던) 장미쉘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나 데이빗 호크니( David Hockney)와 같은 팝아트 예술가들이 주최하고 동석했던 파티에 가는 등 당대의 화가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데이빗도 이런 작풍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또한 로버트 라우첸버그(Robert Rauschenberg)가 디자인한 이 앨범의 한정판의 디자인도 못지않게 밝은 톤인데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창작 과정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는데 원래는 라우첸버그의 디자인이 정식 버전이 될 예정이었으나 너무 복잡한 작품 구성 때문에 대량생산이 어려워서 한정판이 되었다. 그래서 데이빗이 임시로 로스엔젤레스의 선셋마퀴스(Sunset Marquis) 호텔에 있던 의자를 넘어뜨려 찍은 사진을 조합한 커버를 만들게 된 것이다.8
이 앨범은 월스트리트저널에서도 리뷰를 써줄 정도로 상업적인 인기를 얻었다. 밴드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만 백만장 이상의 카피가 팔리며 RIAA로부터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특히 카셋테잎의 판매가 두드러졌는데 십대 사이에서의 소니의 워크맨 열풍이 이러한 트렌드를 가속화하였다. 레코드사는 테잎에는 오리지널보다 더 긴 리믹스 곡을 수록할 수 있었는데 이 앨범에서도 Moon Rocks를 포함한 다섯 곡이 테잎 버전이 LP 버전보다 길다. 이런 변주를 통해 회사는 소비자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더 많은 수익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9
대세가 된 MTV의 존재도 앨범과 싱글의 인기에 한몫했다. 도시 외곽의 평범한 이층집의 벽과 도로에 데이빗의 얼굴이 줌인된 영상이 비춰지고, 전부 하얀 색의 의상을 입은 밴드 멤버들이10 아이, 뚱뚱한 남자, 늙은 여자 등으로 교체가 되는, 토킹헤즈 특유의 수수께끼 같은 Burning Down the House11의 뮤직비디오가 MTV에서도 인기를 얻으면서 밴드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갔다. 요컨대 스피킹인텅은 워크맨과 MTV라는 시대적 조류에 잘 적응한 한 아트락 밴드의 성공담이라고 할 만하다.
이 앨범이 개인적으로 보다 각별한 이유 하나는 내게 토킹헤즈라는 존재를 처음 알려준 노래가 앨범의 첫 번째 트랙이자 밴드의 가장 큰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Burning Down the House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 노래가 좋아서 시내 레코드 가게에 가서 그들의 앨범을 구입하였다. 그런데 사들고 온 앨범은 알고 보니 밴드의 후속작 Little Creatures였다. 토킹헤즈의 앨범중 국내에 유일하게 라이센스로 나온 앨범은 그 앨범뿐이었고 가게 점원은 그 앨범을 내게 안겨준 것이었다.
이렇게 나를 토킹헤즈의 파리지옥에 빠져들게 만든 곡이 수록된 앨범, 그게 바로 음악적 “방언(Speaking in Tongues)”이 터져 나오는 이 앨범이다. 이 앨범이 특히 맘에 드는 점은 흑인 음악으로의 지향점을 보다 명확히 하면서도 전작 Remain In Light을 의식하여 보다 더 아방가르드한 방향으로 진행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팝적인 요소를 한층 가미하여 본인들도 의식하지 않았을 상업성과 음악성의 얇은 선 사이에서 마음껏 하고 싶은 음악을 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은 앨범의 홍보를 위한 공연은 1984년 조나단 드미(Jonathan Demme)가 감독하여 만든 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연 기록물로 간주되는 Stop Making Sense로 이어졌으며, 같은 이름의 라이브 앨범이 탄생하는 등 이어지는 토킹헤즈의 창작물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재밌는 점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토킹헤즈와 The Smiths가 스튜디오 앨범 수에서 2배의 차이(각각 8개와 4개)가 나는데, 딱 이 앨범이 토킹헤즈의 다섯 번째 앨범이라는 점이다. 즉, 스미쓰는 이 마수걸이를 넘지 못했고 토킹헤즈는 어렵사리 그 작업을 했기에 스미쓰의 2배의 스튜디오 앨범을 만들어 낸 것이다.
- 일본에서 데비잇과 제리는 아델르 루츠(Adelle Lutz)라는 시세이도 모델과의 염문에 휩싸이기도 한다. 삼각관계의 승자는 데이빗에 가깝다.(This Must Be The Place, 234-236쪽) ↩
- 제리도 이에 대해 같은 의견이었는데 그는 “탐탐클럽이 성공했기 때문에 토킹헤즈의 경쟁적인 정신을 다시 촉발할 수 있고 우리는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발언했다.(This Must Be The Place, 2396쪽) ↩
- 펑키함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했다. 한 예로 데이빗은 Making Flippy Floppy라는 곡의 가사를 쓰면서 flippy floppy가 무슨 의미인지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만 그 발음이 펑키(funky)했기 때문에 가사로 채택했다.(This Must Be The Place, 241쪽) ↩
- 크리스에 따르면 이노는 이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는데 예를 들면 그는 미국까지 콩코드를 타고 올 텐데 그 비용을 밴드가 부담하라고 했다고 한다.(Remain In Love, 290p) ↩
-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왈리 역시 보렐처럼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받은 연주자였고 Level 42 이외에도 그레이스존스의 Warm Leatherette에서 곡을 쓰고 연주하는 등의 실력파 뮤지션이었다. ↩
- 토킹헤즈의 전기 This Must Be The Place의 서술(234쪽)에 의하면 블루가 더 이상 밴드와 일하지 않게 된 계기는 그가 탐탐클럽과 같이 작업했는데 크리스와 티나가 제대로 정산을 해주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애드리안은 크리스와 티나를 만나면 언제나처럼 즐겁게 인사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같은 책 239쪽) 한편 크리스는 애드리안이 Robert Fripp 과 작업하기 위해 그들과 합류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Remain In Love, 291p) ↩
- This Must Be The Place, 233p ↩
- This Must Be The Place, 248p ↩
- This Must Be The Place, 249-250p ↩
- 흥미롭게도 일본의 락그룹 안전지대(安全地帯)도 이 영상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하얀 색 의상을 입고 공연을 하고 있다 ↩
- 크리스의 회고에 따르면 이 노래의 제목은 크리스가 관람했던 P-Funk 공연에서 관객들이 “Burn down the house”라고 외쳤던 상황을 밴드 멤버들 간의 잼에서 흉내 내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Remain In Love, 28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