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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er

The cover has Jackson reclining in a white s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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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은 1979년 솔로 앨범 Off the Wall로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팝, R&B, 락, 포스트디스코, 펑크(funk), 어덜트컨템포러리의 장르가 골고루 배합된 이 앨범은 Stevie Wonder, Paul McCartney, David Forster, Quincy Jones 등이 프로듀서와 작곡가 등으로 가세하여 전 세계적으로 2천만장이 판매된 블록버스터였다. 이 때문에 Michael에게는 새 앨범에 대한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새 앨범 Thriller는 이러한 배경 하에 이전 앨범 발표로부터 3년 만인 1982년 11월 30일 발매되었다.

프로듀서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Quincy Jones가 주로 맡았고 Michael도 일부 곡들에서 프로듀서로 가세했다. 아홉 개의 트랙 중에서 Michael이 네 개의 곡을 썼고 James Ingram, Rod Temperton 등이 작곡진에 가세했다. 녹음은 1982년 4월에서부터 11월까지 LA에 있는 웨스트레이크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예산은 약 75만 달러가 소요된 값비싼 앨범이다. 앨범 수록곡 중 “Baby Be Mine“과 “The Lady in My Life”를 제외한 일곱 개의 트랙이 싱글로 발매되어 전곡이 빌보드 핫100 차트 10위 안에 올랐다.

앨범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략 5천1백만 장에서 6천5백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이 앨범은 ‘이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8개 부문을 수상한다. 이러한 성과는 Michael Jackson이 인종적인 음악 장벽을 뛰어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Michael Jackson은 이제 ‘백인이 좋아하는 흑인음악’을 넘어 ‘누구나 좋아하는 팝음악’을 만드는 흑인음악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악관에 가서 당시 美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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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thriller” by Poolparty. Licensed under Wikipedia.

Thriller에서의 군무장면

실제로 Michael Jackson은 대중음악계에서조차 공공연한 인종차별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는 전작 Off The Wall이 ‘이 해의 앨범’에 선정되지 못한 것에 화를 냈다고 한다.(아마도 인종차별적 이유로) 결정적으로 Michael은 롤링스톤誌에 자신을 커버스토리로 다룰 의향이 있는지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나는 끊임없이 흑인을 커버로 하는 잡지는 팔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다려. 그 잡지들이 내게 인터뷰를 구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실제로 Michael이 인터뷰를 구걸하는 잡지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MTV의 등장과 이 매체의 활용은 Thriller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다. 1981년 ‘런던에서의 미국인 늑대인간’이라는 공포물을 내놓은 John Ladis는 Thriller의 감독을 맡아 마치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구조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Billie Jean”이나 “Beat It” 역시 현란한 무용과 재미있는 스토리 덕택에 MTV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1 이것은 또 하나의 인종차별에 대한 승리였다. MTV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부인하였지만 어쨌든 Michael 의 성공이 흑인음악 비디오 방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앨범은 최초로 구입한 LP다. Thriller의 전주에서의 발걸음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으면서 전율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아시아의 어린 소년이 흑인가수의 앨범을 살 생각을 했을까?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1984년 발표된 더 걸쭉한 흑인음악 풍의 팝음악인 Prince의 Purple Rain이 그런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일부 의식 있는(?) 비평가는 Michael Jackson의 이 앨범이 지나치게 “백인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백인 위주의 시장에겐 또 하나의 흑인음악이었을 뿐이다.

1. “Wanna Be Startin’ Somethin’
2. “Baby Be Mine”
3. “The Girl Is Mine” (with Paul McCartney)
4. “Thriller”
5. “Beat It
6. “Billie Jean”
7. “Human Nature”
8. “P.Y.T. (Pretty Young Thing)
9. “The Lady in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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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히 “Beat It”에서의 군무(群舞)는 Michael의 죽음 후 기획된 한 프래쉬몹에서의 소재가 되는 등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Coming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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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ComingUp” by http://www.jpgr.co.uk/r6035.html. Licensed under Wikipedia.

1980년 6월 28일 Paul McCartney & Wings의 “Coming Up”이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3주간 머문다. Paul McCartney가 작곡한 이 곡은 그가 솔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일곱 번째 정상에 오른 곡이 되었다. Paul은 스코틀랜드 시골의 그의 별장에서 “McCartney II”를 녹음하던 1979년 여름 이 곡을 만들고 모든 연주파트와 대부분의 보컬을 스스로 녹음한다.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Paul은 이 곡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아이디어 없이 드럼 트랙에서부터 시작하여 기타, 베이스 등을 차례대로 붙여나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컬에는 다양한 스피드로 변주할 수 있는 피치콘트롤이 사용됐다.

싱글로 발매하기 몇 달 전에 Paul은 그의 밴드 Wings와 함께 짧은 영국 순회공연에서 이 곡을 선보인다. 이 과정에서 1979년 12월 17일 Glasgow의 글래스고아폴로에서 가진 공연이 녹음됐다. 1980년 4월 이 곡의 스튜디오 버전이 출시되었다. 그리고 라이브 버전은 Wings의 1975년 앨범 “Venus And Mars” 시절의 트랙 “Lunchbox/Odd Sox”과 함께 스튜디오 버전의 B면에 수록되었다.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은 라이브 버전을 더 사랑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 미국의 콜롬비아 레코드사는 “McCartney II” 앨범에 라이브 버전을 포함시키고자 했지만 Paul은 이를 거절한다. 콜롬비아 레코드사의 한 임원은 “미국인은 폴 매카트니의 진짜 목소리를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결국 타협점으로 찾은 것은 앨범의 첫 출시 때 홍보용의 라이브 버전 7인치 단면 싱글을 북미에서 보너스로 포함시킨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이 노래는 차트 2위에 올라 3주간 머문다. 미국에서는 1980년 4월 26일 73위로 핫100 차트에 등장한 이 곡은 9주 후에 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빌보드는 비록 라이브 버전이 더 방송을 자주 탔음에도 처음에 핫100 차트에 A면 곡으로 차트에 1위에 머물러 있던 기간을 포함하여 12주 동안 등재해놓았다. 빌보드는 후반 아홉 주가 돼서야 차트에 B면으로 표시했다.

이 노래가 인기를 얻던 시기에 비슷한 순위에 머물러 있던 곡들은 Lipps Inc.의 Funky Town, Gary Numan의 Cars, Billy Joel의 It’s Still Rock N Roll To Me 등이었다. 70년대를 댄스뮤직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던 디스코, 이제 막 인기 몰이를 하기 시작한 신쓰팝, 그리고 이들 트렌드 사이를 비집고 “여전히 록앤롤”이라고 외치던 음악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Coming Up은 이 와중에 한 위대한 뮤지션이 시대의 조류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낸 뉴웨이브 스타일의 댄스락 넘버인 셈이다.

한편 이 노래는 Paul의 친구이자 또 다른 위대한 뮤지션인 John Lennon의 음악 역정에 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전까지 5년째 음악계를 떠나 그의 아내 오노 요코와 시간을 보내고 있던 John은 이 노래를 라디오에서 듣게 됐다. 이 곡에서 자극을 받은 John은 1980년 11월 발매될 앨범 “Double Fantasy”를 구성하게 될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Ebony And Iv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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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ny and Ivory” by Personal scan of the single cover. Licensed under Wikipedia.

Paul McCartney와 Stevie Wonder가 함께 부른 “Ebony And Ivory”가 1982년 5월 15일 빌보드 핫100 차트 1위에 올라 7주간 머문다. Paul McCartney가 작곡한 이 곡은 McCartney에게는 솔로 활동 기간 중 여덟 번째로 차트 1위곡이 되었고, Wonder에게는 일곱 번째의 차트 1위곡이 되었다. McCartney는 코미디언 Spike Milligan의 발언에 이 곡의 영감을 얻었는데, Milligan은 “검은 건반, 하얀 건반, 그리고 당신은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 둘을 연주해야 합니다. 친구!”라고 말했다. 즉 이 곡은 인종을 피아노 건반에 비유하여 인종 간의 화해를 주제로 한 곡이다. 이 노래의 처음 버전은 1980년 Paul 혼자서 노래한 버전이다. 듀엣으로 부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Paul은 바로 Stevie Wonder를 떠올렸다. 이후 Paul의 양아버지 Lee Eastman 이 Stevie에게 이 말을 전해줬고 노래를 들은 Stevie는 듀엣에 동의했다. 두 슈퍼스타는 1981년 2월 AIR 스튜디오에서 만나 기본 트랙과 목소리를 녹음한다. 이 곡은 Paul McCartney의 “Tug Of War” 앨범에 수록되어 3월 29일 싱글로 출시된다. 발매되자마자 인기가 치솟았고 Keith McMillan이 감독한 뮤직비디오도 만들어졌다. 비디오에서 둘이 각자의 파트를 연주하고 함께 노래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둘은 바쁜 스케줄 탓에 각각 런던과 L.A.에서 따로 비디오를 찍어야 했다. 이 싱글은 그래미에서 ‘이 해의 녹음과 노래’ 부문을 포함하여 3개 부문에서 수상한다. 또한 McCartney는 비틀즈 멤버 중에서 최초로 빌보드 R&B 차트 순위에 오르는 멤버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인종차별 정책이 실행되던 시대에 이 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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