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몇개의 영화 단평

Drive My Car movie poster.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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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를 최근 넷플릭스와 와챠로 옮겼다. 옮긴 김에 어떤 영상이 있는지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나중에 볼 영상 찜하느라 시간을 좀 보냈는데, 오랜만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가게 구석구석을 뒤져서 ‘희귀한’ 비디오를 발견하는 듯한 재미를 느꼈다. 넷플릭스에는 없었던 – 또는 내가 그동안 찾지 못한 – 영상이 몇 개 있었는데, 예를 들면 동경러브스토리, 리포맨, 4차원의 난장이 E.T., 아푸 3부작 등을 발견했다. 아무튼 그 와중에 이번 달 압축적으로 꽤 많은 영화를 몰아서 본 것 같다. 그래서 여기 단평을 남긴다.

코드명 J (1995)

윌리엄 깁슨의 단편 소설 《메모리 배달부 조니》를 원작으로 하는 사이버펑크 계열의 영화다. 마침, 영화를 보기 몇 주 전에 오랜만에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를 다시 읽었기에 그 기분의 연장선상에서 넷플릭스를 끊기 며칠 전에 감상했다. 영화의 원제는 소설의 원제와 같은 《Johnny Mnemonic》인데 우리나라 출시 명은 뜬금없이《코드명 J》로 바뀐다. 좀 어이없는데 암튼, 호불호가 있는 영화인데 결국 윌리엄 깁슨 팬이라면 나름 즐기며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키아누 리브스의 연기는 너무 어색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2023)

아내가 왓챠에 재밌는 영화가 있다고 추천해 줘서 왓챠에서 처음 본 영화다. 아무 정보 없이 본 이탈리아 영화인데 2023년 만든 영화인데도 2차 대전 직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흑백 필름에 주인공인 여성이 남편에게 수시로 폭력을 당해 《자전거 도둑》 유의 좀 짜증 나는 리얼리즘 영화인가 했더니 의외로 코믹한 연출도 있어 그리 많이 짜증 나지 않으면서 보았다. 결국 신파조로 흘러가는 듯한 고통받는 여성의 삶이 막판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통해 희망을 찾게 되는데 그 부분이 가장 큰 이 영화의 매력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2025)

트위터에서 다들 재밌다고 하는데 사실 디카프리오의 청승맞은 모습이 포스터여서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화장실에 갈 때는 제외하고는 거의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정주행했다.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가 괜찮으면서도 어딘가 현학적인 냄새가 났는데, 이 영화는 그런 느낌 없이 직관적으로 캐릭터들에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영화였다. 《허공에의 질주》에 대한 21세기 변주라는 느낌도 들었고, 희망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희미하게라도 미소를 지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노예 12년 (2013)

이 영화는 쿠팡플레이에서 봤다. 솔로몬 노섭이라는 실존 인물이 북부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가 사기꾼의 꼬임에 빠져 남부로 갔다가 노예로 팔리며 12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보는 것도 고통스러워 한 며칠간 안 보다가 다시 보기도 했다. 극 중간에 노섭이 백인 관리의 린치로 나무에 목이 묶인 채로, 발끝으로 서서 며칠을 버티는 장면이 압권인데 거기서 며칠 감상을 쉬었다. 이 영화를 흑인에서 백인으로 인종을 바꾸고 SF적 요소를 가미하면 찰턴 헤스턴 주연의 《혹성탈출》이 된다.

국제첩보국 (1965)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첩보물 3부작인 렌 데이턴 원작의 해리팔머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인데 얼마 전에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하게 되어 처음 스크린으로 감상하였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스파이 세계의 환상을 그대로 소설과 영상에 옮긴 작품이라면 이 해리팔머 시리즈는 ‘노동계급 스파이’라는 설정의 안티히어로물이다. 당시 영국 영화계의 대세 배우인 마이클 케인이 해리 팔머 역을 맡아 삐딱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지닌 스파이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존 배리의 서늘한 멜로디의 사운드트랙도 극의 분위기에 크게 기여했다.

드라이브마이카 (2021)

개저씨 없는 – 오히려 심히 심약한 성격의 일남 – 홍상수 영화 보는 느낌. 그 와중에도 물론 원작자 하루키 스타일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타르코프스키가 《솔라리스》에서 미래주의적 분위기 연출을 위해 도쿄의 고가도로 드라이브 장면을 찍었다던데 그 장면이 연상되는 드라이브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이 눈이 시원해지면서 인상적이다. 차는 현대인에게 이동의 수단이면서 대사 연습의 공간이자 진실한 대화의 장소다. 여담으로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차로 가면 그 비싼 민자도로 통행료랑 뱃삯이 얼마였을지 궁금하다.

플란다스의 개 (2000)

봉준호의 장편 영화 연출 데뷔작. 오랫동안 그 영화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 마치 그 영화를 진작 봤다는 착각에 빠질 때도 있는데 어렴풋이 이 영화도 그런 영화. 백수 생활이 짜증 나는 와중에 아파트 내에서 짖어대는 개 때문에 짜증이 증폭되는 남주의 좌충우돌과 이 남주와 희한하게 동선이 겹쳐 같이 어울리는 여주에 관한 이야기다. 정말 단편 정도로 그칠 소재를 멱살 잡고 장편으로 만들어 극장 개봉에까지 성공했다는 것이 봉준호 감독의 실력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연기는 어설펐고 남주 아내 역의 배우가 가장 연기가 좋았다.

알제리 전투 (1966)

폴 토마스 앤더슨《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만들며 레퍼런스로 중요한 영감을 얻었던 작품으로 언급한 영화다. 제국주의 일타강사 프랑스에서는 금기시되는 치욕의 역사인,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독립 과정을 다큐멘터리 찍듯이 만들어서 당시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작품이다. 지금 다시 봐도 형식이나 연출 기법이 고루하지 않다. 이 의사(擬似) 다큐 형식의 연출은 그 뒤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오늘날 유럽이 왜 제삼세계 인민의 집단이민으로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해 역사적 링크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메트로폴리스 (1927)

개인적으로는《플란다스의 개》처럼 보지는 않았으나 여태 봤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영화였다. (아니면 봤어도 까먹었을 수도 있고) 암튼 최초의 SF영화라 할 수도 있고, 최초의 계급투쟁 영화라 할 수도 있고, 여러모로 엄청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도시 풍경에 대한 묘사 하나만 놓고도 할 말이 너무 많은 영화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마리아. 배우가 너무나 극명한 두 명의 캐릭터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서 깜놀. 연기력, 춤솜씨, 그리고 특히 어떻게 양쪽 눈을 그렇게 차이 나게 뜰 수 있는지 감탄하였다.

난징! 난징! (2009)

조금 전에 막 감상을 끝낸 이 글의 마지막으로 소개할 영화다. 일본의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하고 있는 중국 영화다. 요즘 만들어진 중국 영화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연출이 예상보다 차분해서 좀 의외였다. 대학살이라는 잔혹한 역사에 비해 오히려 톤이 좀 낮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흑백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제리 전투의 존재를 부정하는 프랑스처럼 일본도 난징 대학살의 존재를 외면한다. 제국주의 전통(!)을 지닌 국가가 이 모양이니 세계평화가 요원한 것이다.

The Karate Kid

The poster shows an elderly man looking at a teenager. In the background, the teenage stands on stop of a small wooden pole doing a karate stance at a beach. Below, the tagline reads "He taught him the secret to Karate lines in the mind and heart. Not in the hands". The films titles, credits, and rating is printed below the tag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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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 만에 가라데키드를 다시 보고 있다. 일단 영화를 제작한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작품이고 서양 영화를 추종하던 우리나라에서도 나름 인기를 얻었다. 다만 당시는 가라데가 일본 무술이었고 이를 추종하는 영화는 일본 영화가 아닐지라도 배척받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차마 개봉을 금지하지 못했지만, ‘가라데키드’라는 원래의 이름 대신 ‘베스트키드(Best Kid)’라는 매우 애매하고 어색한 이름으로(심지어 문법도 틀렸다) 국내에서 개봉했다.

그런데 오늘 몇백 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영화의 원작자들은 이 영화를 일뽕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남주 다니엘에게 가라데를 가르쳐주는 미야기 상. 너무나 유명한 캐릭터다. 그런데 사실 미야기 상은 본인을 일본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오키나와인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과 미야기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때 미야기는 오키나와의 위치를 알려준다. “차이나 히어, 저팬 히어, 오키나와 히어.”

더 나아가서 가라데에 대한 미야기의 태도도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미야기는 다니엘에게 가라데는 중국의 무술이라고 가르친다. karate에서의 te는 손을 의미하고 kara는 ‘빈(empty)’이라는 의미인데 이 모든 것은 중국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다니엘에게 미야기가 가르치는 무술은 중국의 무술이고 그의 출신지는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다.1 다니엘이 영화 내내 욱일기 문양의 헤어밴드를 하고 있지만, 그건 일본 군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80년대, 이 영화를 배급한 미국 영화사나 이를 수입한 한국 영화사나 당연히 그렇게 인식했겠고, 오늘날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는 사실은 일뽕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미야기 상은 다니엘에게도 이야기하지만, 미국 이민 2세로서 참전용사다. 그 와중에 아내와 아이를 잃은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딱히 일본을 좋아했을 이유도 없다.2 그러니 미야기 선생이 다니엘에게 가르친 것은 군국주의가 아닌 자립정신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주 다니엘의 역할을 맡은 랄프 마치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는 1961년생 배우로 영화에서의 고딩의 역할을 맡았을 당시 그의 나이는 22~23세였다. 서양인들이 급격하게 노화되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동안은 역대급이다. 그 후 이 영화의 스핀오프인 코브라카이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봐도 그의 동안은 역대급이다. 복 받은 얼굴이다. 코난쇼에서 그의 이름의 정확한 발음 등을 두고 코난과 그의 베프가 다툰 에피소드도 너무 재밌다.

  1. 이게 현재까지 실제로 알려진 가라데의 역사적 기원이기도 하다 ↩
  2. 게다가 그는 아무로 나미에처럼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 출신의 원주민이다. ↩

To Live & Die in LA

형사물의 전형을 제시한 걸작인 1971년작 프렌치커넥션(The French Connection)의 감독 윌리엄 프레드킨(William Friedkin)이 1985년 내놓은 형사물이다. 그런 면에서 프렌치커넥션은 매우 1970년대스럽고 이 영화는 또한 매우 1980년대스럽다. 두 작품 모두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비정한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의 본질에 여전히 충실하고, 특유의 스릴 넘치는 자동차 레이스도 빼놓지 않았고,1 형사인 남자 주인공이 무모하리만치 수사에 집착한다는 설정은 유사하지만, 시대가 변한 만큼 영화의 스타일과 사운드트랙 등이 많이 바뀌었다. 주인공인 리차드 챈스(Richard Chance)는 더 야비해졌고, 음악은 프렌치커넥션의 째즈 음악에서 80년대 뉴웨이브로 바뀌었다.

우선 캐스팅을 칭찬해 줄 만하다. 일단 챈스 역에는 훗날 히트 드라마 CSI의 “길반장“으로 인기를 얻게 될 윌리엄 패터슨(William Petersen)이 호연을 펼친다. 길반장의 후덕함이 아닌 젊은 시절의 샤프한 미모와 기럭지로 열혈 형사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악역에는 이미 그 한해 전에 ‘불의 거리(Streets of Fire)’에서 신선한 악당 캐릭터를 선보인 윌리엄 데포(Willem Dafoe)가 맡았다. 챈스의 파트너 존 부코비치(John Vukovich) 역에는 왜소하고 소심하게 생긴 존 팬코우(John Pankow)가 맡았다. 처음에는 약간 미스캐스팅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의 캐릭터 변화를 고려할 때 훌륭한 캐스팅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 각종 조연급도 훌륭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 잘 포진되어 있다.

한편, 챈스의 그의 파트너 존 부코비치의 파트너십 스타일은 좀 독특하다. 프렌치 커넥션에서는 지미 도일과 소니 그로소의 파트너십 다소 고지식할 정도로 끈끈한 파트너십 스타일이었다. 더티해리에서의 해리의 파트너 치코 곤잘레즈는 그를 도우려다 살벌한 형사의 세계를 알게 되자 형사를 그만 둘 정도로 나약한 스타일이었다. 리셀웨폰의 마틴 릭스와 로저 머터프는 인종적으로나 성격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케미가 되어버리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존은 챈스보다는 더 정공법을 선호하는 강직한 스타일이지만, 결국 집착하고 있는 범죄의 해결을 위해서는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서슴지 않는, 그리고는 종국에는 챈스와 악독하게 닮아가는 진화형(!)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마지막으로 음악 이야기를 해보자. Wang Chung이 전체적인 음악을 맡았기에 사실상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듀오의 세 번째 정규 앨범이다. 1985년 9월 30일 게펜(Geffen)에서 발매되었다. 타이틀곡인 To Live and Die in LA는 앨범의 첫 번째 싱글로 발매되었고, 미국 빌보드 핫 100 에서 41위까지 올랐다. 썩 훌륭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LA라는 하드보일드한 범죄의 도시의 이글거리는 야자수 풍경과 매우 잘 어울린다. 그들을 선택한 이는 그룹의 노래 중 Wait와 Dance Hall Days를 특히 마음에 들어 한 프리드킨 감독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캐치한 뉴웨이브 사운드 덕분에 이 영화는 또 하나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역시 80년대의 인기 범죄물이었던 마이애미바이스를 생각나게 한다.

  1. 감독이 말하길 프렌치 커넥션을 만들 당시 누군가 조언하길, 뭘 하든 반드시 자동차 레이스는 집어넣으라고 조언했고 그 조언에 따라 만든 장면이 영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레이스로 남게 되었다. ↩

세일러복과 기관총(セーラー服と機関銃)

양친을 잃은 여고생 호시 이즈미가 난데없이 야쿠자의 보스가 된다는, 다소 어이없는 설정의 B급 감성의 1981년 작. 극의 전개 중에도 계속 어이없는 전개의 연속이지만, 사이사이 뭔가 색다른 화면 연출 등이 가미되어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감독이 『태풍클럽』의 소마이 신지(相米そうまい 慎二)しんじ라는데 역시 두 영화의 분위기가 닮았다. 폭주족 오토바이 레이스랄지 이즈미의 부하들과 동급생들이 어울려 불상 아래서 술을 마시는 장면들이 『태풍클럽』에서의 일과 후 학교에서의 군무를 연상케 한다. 주연을 맡은 야쿠시마루 히로코(薬師丸 ひろ子)의 매력이 영화의 흥행에 오할은 한 것 같고 주제가도 좋다. 예전 영화를 볼 때 특히 당시의 도시 풍경을 보는 것도 큰 재미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은 1980년대 초의 도쿄의 풍경이 잘 담겨 있어 매력적이다.

Moonlight

A multicolored monochrome close image of Chiron (Portrayed by Alex Hibbert, Ashton Sanders, and Trevante Rhodes), in three different stages of his life, as a child, teenager, and young adult. Accolades and excerpts of text from film reviews can be seen in the poster. The film's tagline reads "This is the story of a lifetime".
By https://a24films.com/films/moonlight/, Fair use, Link

지난 주말에 봤는데 흑인 판 왕자웨이(王家衛) 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직접적으로 생각나는 영화는 해피투게더였고 그 외 이런저런 부분이 왕자웨이식 미장센이 연상되었다. 모든 배우가 흑인이었고 공간적 배경도 마약을 거래하는 정말 찐위험한 동네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흑인이나 마약 관련 영화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 않은, 심하게 말해서는 파스텔 톤의 느낌의 영화였다. 어린 샤이론(Chiron)을 돌봐주던 후안이 마약상이었고 성인이 된 샤이론이 마약상이 됐음에도 그들에게서는 악인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이건 이를테면 유색인종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정당성 부여 기제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영화를 계속 그런 톤으로 끌고 온 연출 의도에 따른 느낌으로 보인다. 마지막에 ‘나의 몸에 손댄 것은 너뿐’이라는 샤이론의 고백도 그가 소년원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젊은 여성 혼자 살면서 아무런 위기감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영화 리틀포레스트에서 느낌과 유사했다. 샤이론 연기는 청소년 시절의 샤이론 배우의 연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카에타노 벨로소(Caetano Veloso)의 노래가 나와서 반가웠다.

마이애미바이스 두 번째 시즌 감상 완료

엊저녁에 80년대의 아이콘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형사 시리즈물 마이애미바이스(Miami Vice)의 두 번째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 Sons and Lovers를 감상했다. 전에 모든 시즌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블루레이 전집을 구매하여 틈나는대로 감상하고 있는 애청 TV쇼다. 전집을 구매한 지는 꽤 되었는데 엊저녁처럼 가끔 생각날 때마다 “아껴” 보는 바람에 이제야 두 번째 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백인 남주 쏘니 크로켓(James “Sonny” Crockett)이 아니라 그의 파트너인 흑인 남주 리코 텁스(Ricardo “Rico” Tubbs)다. 리코는 이 형사물 첫 에피소드 당시에는 뉴욕의 형사였다. 그런데 마약상이자 불구대천의 원수 에스테반 칼데론(Esteban Calderone)이 역시 형사였던 그의 형 라파엘(Rafael Tubbs)을 살해하고 달아나자 그를 쫓아 마이애미로 온 것이다.

결국 리코는 시즌 중반에 에스테반을 추격하여 그를 제거하고 형의 복수를 완수한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 안젤리나(Angelina)가 우연히도 에스테반의 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안젤리나는 리코의 곁을 떠나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는 리코를 해치우려는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에스테반이라는 괴소문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에스테반이 아니라 안젤리나였다. 실은 리코를 죽이려는 자는 에스테반의 아들이자 안젤리나의 남동생이었던 올란도 칼데론(Orlando Calderone)이었고 안젤리나는 이를 리코에게 알려주려 온 것이었다. 리코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데리고서 말이다. 도망가라는 안젤리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리코는 올란도와의 일전을 준비하게 된다. 기쁨과 분노의 감정이 섞인 채로.

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피소드인지라 수차례의 폭발 장면이 나오는 등 스케일도 크다. 그리고 리코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두 개의 곡이 꽤 비중 있게 쓰였다. Roger Daltrey의 After the Fire와 Phil Collins의 Long, Long Way to Go. 두 거장 뮤지션의 노래가 흐르는 동안 리코는 안젤리나와의 즐거웠던 추억과 쓰라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온전히 리코 텁스의 것이었다.

아파라히토 [1956]

Poster
By Likely to be Epic Films or Merchant Ivory Productions or Sony Pictures Classics, the producers/distributor of the film –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s/13_10/1957/48956/l_48956_04db894c.jpg, Fair use, Link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연구소』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전에 부산외대 이광수 교수가 게스트로 출연해 인도에 관한 특집을 진행했는데 아침부터 보고 있다. 인도의 종교, 지리, 풍습 등 복잡다단한 인도 사회의 단면을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하고 있어 인상 깊게 보고 있다. 보고 있다 보니 문득 예전에 감명 깊게 감상했던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의 『아푸 3부작』이 생각났다.1 현대 인도 영화의 특징을 규정하고 있는 소위 “발리우드 영화” 스타일의 춤과 노래가 뒤섞인 영화가 아닌 진지한 드라마로 차분하게 인도 인민의 삶을 전하는 작품으로 『파테르 판찰리』(1955), 『아파라히토』(1956), 『아푸의 세계』(1959) 총 3부작이다.

오늘 감상한 작품은 3부작의 2부에 해당하는 『아파라히토』다.2 애초 감독은 3부작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파테르 판찰리』의 국제적인 성공과 비평적 찬사에 힘입어 이 작품을 만들고 내친김에 3년 후 세 번째 작품을 만들어 3부작을 완성했다고 한다. 『아푸 3부작』이라는 별칭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전체 작품은 벵골 지방에서 사는 아푸라는 외동아들이 있는 성직자 가족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1950년대 대다수의 탈식민지화된 나라가 그렇듯이 인도 역시 엄청난 문화적/문명적 격변을 겪게 되었고, 아푸 가족도 그 시기에 이전 세대와는 무척 다른 삶을 걷게 되었다. 3부작은 그런 아푸 가족의 여정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지가 거의 십 년이 지나서 줄거리도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정도라 새로운 느낌으로 봤다. 그 와중에 앞서 말한 이광수 교수가 설명해 준 인도 사회의 풍습을 영화에서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어서3 더 보는 재미가 있었다. 줄거리는 사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약간 신파조라 생각되지만, 희한하게도 당시 서구에서는 이 영화를 보고 문화적 충격이 매우 컸다고 한다. 예로 서구식 교육을 받고자 대도시로 떠난 아들과 모친의 정서적 갈등 등에서 그런 신선함을 느꼈다고 하던데,4 그것은 역시 질풍노도의 격변을 겪었던 식민지 인민의 세대 간 갈등에 대한 공감 능력이 제일세계와 제삼세계가 달라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초중반의 영화를 감상할 때면 늘 하곤 하는 잡념이 있는데 ‘저 배우들은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잡념이다. 20세기 중반 작품이니만큼 아푸를 연기한 배우는 생존해 계시지 않을까 하고 검색해 보니 이름이 피나키 센굽타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을 뿐 생존 여부 등 보다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이 배우를 비롯하여 당시 많은 배우들이 이 영화에서 처음 연기를 했을 정도로 아마추어였다는데 그러한 이유에서 정보가 없는 것 같다. 이 배우도 출연작이 이 3부작밖에 없는 듯하다. 어쨌든 어찌 보면 그의 삶 자체가 아푸였을지도 모른다. 근대화와 더불어 배우라는 삶을 살며 걸작에 출연한 인도 소년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1. 블로그 어딘가에 기록을 남겨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금 검색해 보니 2016년에 봤다. ↩
  2. 뱅골어로  অপরাজিত , “굴하지 않는 자” 정도의 의미라고 한다. ↩
  3. 예를 들어 특정 카스트의 남성이 벌거벗은 상체에 긴 줄을 어깨에 걸고 다닌달지 ↩
  4. 아푸는 고향에서 기차로 3시간 거리인 캘커타로 유학을 떠나는데 어찌 보면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근대화로 인해 놓인 기차라는 존재를 통한 공간적 거리의 축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고 이 영화에서도 기차는 그런 사회의 풍경을 묘사하는 주요한 소재다. ↩

Desperately Seeking Susan

Desperately Seeking Susan movie post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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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포스터는 수백 번 본 것 같은데 영화 자체는 오늘 처음 봤다. 마돈나가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에 출연한 1985년 영화다. 뉴저지의 중산층 주거지에서 지루한 남편과 함께 생기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로버타(로재나 아켓, Rosanna Arquette)는 타블로이드에 실린 ‘절박하게 수잔을 찾아서(Desperately Seeking Susan)’라는, 사람을 찾는 광고에 흥미를 느끼고 무턱대고 약속 장소인 배터리 공원(Battery Park)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고를 낸 짐(로버트 조이, Robert Joy)과 그의 애인 수잔(마돈나, Madonna)이 재회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이 셋, 그리고 짐의 친구인 데즈(에이단 퀸, Aidan Quinn)1가 그들의 주위를 배회하는 로버타의 남편, 청부 살인범2, 마술사 등과 뒤죽박죽 뒤엉키며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상당히 재밌는 스토리 설정, 마돈나의 걸크러시에서 느낄 수 있는 생명력, 마돈나와 로재나 아켓의 80년대 패션, 맨해튼의 80년대 풍경 등이 감상 포인트다. 마돈나의 노래는 Into the Groove가 주제가처럼 쓰인다.

  1. 이 배우는 좋아하는 80년대 코미디 스테이크아웃(Stakeout)에서 출옥한 악당으로 출연해서 기억하고 있다. ↩
  2. 윌 패튼(Will Patton)이라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이 배우는 1987년작 노웨이아웃(No Way Out)에서의 인상적인 연기가 생각난다 ↩

로봇 드림 (Robot Dreams)

In a bustling street in New York City (with the Empire State Building shown in the background), A dog holding a bag holds hands with a robot who is seen holding roller skates on its neck. A movie theatre is seen from behind presenting the film's titles on the marquee with other animals entering the theatre and others going about their lives.
By https://bteampictures.es/robot-dreams/, Fair use, Link

2024년 작 애니메이션이다. 2008년 작 월이(WALL-E)와 1984년 작 일렉트릭드림스(Electric Dreams)1를 합친 느낌의 애니메이션이다. 백사장에 홀로 버려졌다는 점에서 월이를 닮았고, 로봇과 인간과의 교감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일렉트릭드림스를 닮았다. 즉, 소재 면에서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작품이다. 다만, 작풍이나 80년대 뉴욕의 소소한 삶의 풍경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뉴욕은 80년대는 아니고 2000년대에 한 번 가보았지만, 작품을 보면서 나름 그때의 맨해튼의 느낌이 전해져 감흥에 젖기도 했다. 80년대 음악 애호가로서 소소하게 재미있었던 점은 주인공인 개(DOG)가 가지고 있는 음반 들을 늘어놓고 친구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 노출된 그의 취향인데, Talking Heads, The Smiths, R.E.M., Blondie 등의 앨범 재킷이나 이름이 거명되어서 흥미로웠다.2 아마 원작자의 취향이 아닐까 싶다. 정작 영화의 주요 동기를 제공하는 노래는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다. 쿠팡 플레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3

  1. 국내 출시명 ‘로맨틱 컴퓨터’ ↩
  2. 사실 이 트윗을 보고 흥미를 느껴 작품을 찾아 감상하게 된 것이다 ↩
  3. 개인적인 드라마 취향으로는 쿠팡 플레이가 압도적으로 넷플릭스보다 마음에 든다. 더 소프라노스, 더 와이어, 석세션, 식스핏언더 등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드라마가 많이 있다. ↩

The Last of England

Amor Vincet Omnia.jpg
By Cropped from [1], Public Domain, Link

일요일 아침에 데릭 자먼(Derek Jarman) 감독의 1987년작 ‘영국의 최후(The Last of England)‘를 보았다. 보았다기보다는 그냥 틀어놓고 딴짓을 했다. 그렇게 해도 감상에 지장이 없을 만큼 스토리라인이 복잡하지 않은 영화다. 이를 “시적인(詩的)”인 영화라고 표현한다. 내용은 넓게 보아 마가렛 대처 정부에서의 숨 막히는 상황을 – 특히 동성애 등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 등등 – 비판하는, 이를 “영국의 최후”라고까지 표현하는 내용이다. 영상들은 굉장히 퇴폐적이고 노골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한 소년이 카라바지오(Caravaggio)의 작품(물론 복사본이겠지만) Amor Vincit Omnia에서의 큐비드를 강간하는 장면이다. 영화 소개에서는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영화 후반에 신부로 등장하는 정도다. 주인공이라는 것도 의미 없다. 영화의 마케팅 포인트 정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