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Distributed by Relativity Records – U.S. Press Kit for The Pink Opaque at Worthpoint, Public Domain, Link
Cocteau Twins는 1979년부터 1997년까지 활동한 스코틀랜드 록밴드다. 기타와 드럼 머신을 담당한 로빈 거스리(Robin Guthrie)와 베이스 윌 헤기(Will Heggie)가 스코틀랜드 중부에 위치한 그레인지머스(Grangemouth)에서 결성하였다. 1981년에 The Hotel International라는 디스코텍에서 디제이를 하고 있던 거스리는 나중에 그룹의 보컬을 맡게 될, 당시 17세의 엘리자베스 프레이저(Elizabeth Fraser)를 만나 그를 팀에 영입했다. 이로써 밴드의 구성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졌고 4AD와도 레코드 계약을 하고 앨범을 내놓으며 그들의 미래는 좀 더 밝아지게 되었다.
1983년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의 유럽 순회공연의 보조 밴드로 참여했다가 함부르크에서 밴드는 공연에서 빠졌다. 그 와중에 베이스를 맡았던 헤기가 그룹을 떠났다. 이 공백은 이후 다중 악기 연주자 사이몬 레이몬드(Simon Raymonde)로 채워졌다. 1990년에 Heaven or Las Vegas이라는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앨범을 내놓은 이들은 그때부터 하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거스리의 약물남용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고 그들의 앨범을 쭉 내어주던 4AD의 창업자 이보 왓츠 러셀(Ivo Watts-Russell)과의 갈등도 심해졌다.
결국 밴드는 밴드 해체라는 파국의 길로 접어든다. 20년째 해체한 그들은 드림팝과 에테리얼웨이브(Ethereal wave)의 선구자적인 역할은 한 밴드였다. 그리고 이후 이들의 음악은 슈게이즈 음악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탐슨트윈스와 종종 헷갈리곤 한다.1 여성 한 명 남성 두 명이라는 특이한 밴드 구성도 닮았고 밴드명에 ‘쌍둥이’가 들어간 것도 똑같다. 한쪽은 장 콕토를 의미하고 다른 쪽은 에르제의 작품 ‘땡땡의 모험’의 형사 캐릭터를 의미하지만,2 어쨌든 재밌게도 둘 다 ‘쌍둥이’라고 작명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Stephen Dalton(저술가) : 빈스 클락(Vince Clarke)은 송라이터였고 소리 제작의 뒤에서의 추진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줍어하는 프론트맨이었어요. 하루는 데이브 간(Dave Gahan)이 보위의 “영웅들”을 학교 연습실에서 부르는 것을 듣고 그에게 자신의 그룹에서 노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262쪽] 디페쉬모드의 창립 멤버들은 모두 노동계급의 동네에서 종교적인 가족 속에서 자랐죠. 고어와 간은 당시 계부의 슬하에서 컸어요. [중략] 그들은 글램락과 쏘울을 들으며 자랐어요. 데이빗 보위(David Bowie), 게리 글리터(Gary Clitter), 스팍스(Sparks), 크래프트베르크(Kraftwerk). 그러나 펑크가 배질던(Basildon)을 강타하자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새로운 염가의 신디사이저들 덕분에 제한적인 음악적 능력을 갖춘 노동계급의 십대들이 갑자기 예술적이고 아방가르드한 팝을 만들게 된 거죠.[262-263쪽]
Martin Gore : 우리에게 신디사이저는 펑크(punk) 악기였어요. 즉각적이고, DIY(do-it-yourself) 도구였어요. 왜냐하면 그건 여전히 새롭고 한계가 없을 것 같은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죠.[262쪽] 나는 정말 배질던이 싫었어요. 거기서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죠. 밴드에 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도피였어요. [263쪽]
Dave Gahan : 난 그저 주목받고 싶었어요. [중략] 하루는 경찰차가 집밖에 섰어요. 엄마가 “너한테 온 거야?”라고 물었고 나는 “네.”라고 대답했죠. [263쪽] 솔직히 말해 음악이 날 구원했어요. The Clash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죠. ‘나도 할 수 있어.’ 난 언제나 늘 과시적인 사람이었어요. 아주 어릴 적에 이모들이 오면 믹 재거나 게리 글리터를 흉내내며 엄마를 즐겁게 해줬었죠. [264쪽]
Andy Fletcher : 우리는 열한 살 때부터 매년 거대한 크리스찬 락페스티발이 열리는 그린벨트에 가곤 했어요. 사실 거기서 U2를 1980년에 한 번 봤어요. 솔직히 그건 교회와 음악의 사회적 영향력보다 더 컸죠. 그건 엄청나게 거대한 사회적 현상이었어요. 그리고 배질던은 할 게 없었어요. 차를 훔치거나 교회에 가는 것 빼고는.[264쪽]
펠라 아니쿨라포 쿠티(Fela Aníkúlápó Kútì, 본명 Olufela Olusegun Oludotun Ransome-Kuti, 1938년 10월 15일 ~ 1997년 8월 2일)는 나이지리아의 음악가이자 정치 활동가였다. 그는 요루바 음악, 가나 음악의 영향, 미국 펑크(funk), 재즈를 결합한 나이지리아 음악 장르인 아프로비트(Afrobeat)1의 주요 혁신가로 여겨지고 있다. 찬송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리듬, 타악기에 초점을 맞춘 이 스타일은 쿠티의 뛰어난 천재성을 바탕으로 국내외에서 크게 유행했다. 서구권에서는 특히 브라이언 이노와 토킹헤즈 그의 음악(예를 들면 Afrodisiac)에 심취하고 영향받아 Remain in Light 등 아프로비트를 도입한 음반을 만들기도 했다. 드러머 크리스 프란츠는 학창 시절 우연히 아프리카 물건 들을 파는 가게에서 그의 앨범 Shakara를 듣고 반해서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의 앨범을 구입했다고 한다.2
쿠티는 나이지리아 여성 권리 운동가인 푼밀라요 랜섬-쿠티(Funmilayo Ransome-Kuti)3의 아들이다. 해외에서의 초기 경험 이후, 그와 그의 밴드 Africa ’70(드러머이자 음악 감독인 Tony Allen이 참여)은 1970년대 나이지리아에서 스타덤에 올랐고, 그 동안 그는 나이지리아 군사 정권의 노골적인 비평가이자 표적이 되었다. 1970년 그는 Kalakuta Republic 공동체를 설립하여 군부 통치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 공동체는 1978년 Kuti와 그의 어머니가 부상을 입은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그는 1984년 모하마두 부하리(Muhammadu Buhari)4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지만 20개월 후 풀려났다.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녹음과 공연을 계속했다. 1997년 사망한 이후로 그의 아들 Femi Kuti가 그의 음악 재발매와 편집을 감독했다.
갑자기 새벽부터 Double의 음악에 꽃혀 discogs에서 그들의 앨범을 구매하려고 헤매고 있는 중이다. 약간 드라이한 보컬에 째즈 풍의 멜로디에 신쓰를 결합한, 소위 소피스티팝(sophisti-pop) 계열의 뮤지션이다. Captain of The Heart가 꽤 인기를 끌었던 밴드로 기억하는데 지금 찾아보니 희한하게도 영미권이 아닌 스위스 국적의 밴드다. 1987년 발표된 그들의 두번째 스튜디오 앨범 Dou3le을 유튜브에서 풀앨범 영상을 찾아 듣고 있는데 Lessons in Love 시절의 Level 42를 연상케 하는 음악을 구사하고 있다. 예전에 종로에 있었던 미니멀리즘 풍의 카페에서 약간 허세를 떨며 코로나를 마시며 들으면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이다. 아무튼 디스콕스에서 Blue 와 Dou3le을 CD로 구입. Blue앨범이 더 희소성이 있는지 배송 포함 가격이 Dou3le의 3배 가격이다. 도착할 날만 기다려야겠다.
브라이언 이노(Brian Eno)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라 그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앰비언트 뮤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이 장르의 첫번째 앨범으로 널리 알려진 앨범(앰비언트 1: 공항을 위한 음악)을 발매한 것만으로도 역사책에 이름을 올릴 만하다. 하지만 브라이언 이노가 U2, Coldplay,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을 포함한 아티스트를 위해 한 일은 그 자신의 일만큼이나 중요했다.
Eno는 오하이오에 있는 New Wave 밴드 Devo의 첫번째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첫번째 앨범을 프로듀싱하는 임무를 맡은 Eno는 “Mongoloid,” “Jocko Homo,” “Uncontrollable Urge”와 같은 바보같은 노래에 신스를 추가하도록 설득했다.
이전에는 펑크록 밴드로 여겨졌지만, 이로 인해 Devo는 80년대를 지배할 장르의 초기 사례 중 하나인 New Wave로 탈바꿈했다.
브라이언 이노는 멈추지 않고 Talking Heads의 경력에서 중요한 순간에 세 장의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성공적인 데뷔를 앞두고 Eno는 가장 실험적인 시기의 프로덕션을 맡았다. More Songs About Buildings and Food, Fear of Music, 그리고 특히 Remain in Light 는 밴드를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붙였고, 마지막에는 서구의 청중에게 생소한 반복적이고, 최면적이고, 겹겹이 쌓인, 아프리카에서 영향을 받은 노래 구조의 노래가 많이 등장했다.
이 덜어낸 것(less-is)이 더 많은 접근 방식은 80년대를 지배할 Depeche Mode, New Order, Pet Shop Boys와 같은 단순화된 신스 중심 밴드를 위한 플로어를 비웠다.
No New York
하지만 모든 행동에는 정반대의 반응이 있다. New Wave의 꼬리에 바로 붙어 있던 것은 No Wave였다. 이 팝적이고 신스 중심의 노래에 의해 날카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을 감지한 뉴욕의 예술 아이들은 펑크와 메탈을 받아들여 Sex Pistols의 애국가적 멜로디와 Black Sabbath의 귀에 맴도는 리프를 버렸다. 이런 음악 스타일은 Swans, Sonic Youth, James Chance and the Contortions, Teenage Jesus and the Jerks, Glenn Branca의 초기 레코드의 소음과 악의(malice)의 벽에서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거친 사운드에 정통한 주류 음악가는 Brian Eno 자신뿐이었을까? 최첨단 음악의 팬인 Eno는 몇몇 유명한 No Wave 밴드의 레코드를 큐레이팅하고 제작했다. No New York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장르를 처음 접하게 한 것이다. 그것은 80년대에 포스트 하드코어 메탈이 나아갈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National Pastime이라는 이름의 영국 밴드가 1984년 내놓은 Lunacy (Extended Mix)라는 싱글을 감상하고 있다. 이 싱글 앨범은 1984년 발매되었고 이듬해 Built To Break라는 정식 앨범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팝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심지어 영어판 위키피디아에도 정보가 없다. 다행히 페이스북에 이들의 공식 홈페이지가 있어 그곳에서 – discogs와 함께 –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이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어릴 적 일본의 음악잡지에서 이들의 사진과 밴드 이름을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적 여가활동’이라는 특이한 이름이라 기억에 남았던 듯하다.(비슷한 경험으로는 개인적으로는 China Crisis) 여하튼 노래는 상당히 깔끔하게 뽑힌 뉴웨이브 사운드로 앨범 한 장 내놓고 차트 진입도 못 한 채 기억에서 지워질 정도의 밴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페이스북 2년 전 글을 보니 멤버 중 한분도 유명을 달리하신 것 같고. 명복을 기원합니다.
A Lunacy (Extended Mix) 6:20
B1 It’s All A Game 3:50
B2 Built To Break (Trailer Version) 3:061
뮤직비디오를 보니 보컬의 춤사위가 사뭇 격정적이다
이곡이 맘에 들어 이곡을 소개할까 했는데 유튜브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아마 싱글 삽입곡이라 정보가 없는 것 같다 ↩
아침 출근길에 요즘 가장 핫한 뮤지션 중 하나인 Dua Lipa가 2020년 내놓은 그의 2집 Future Nostalgia를 감상했다. 이 앨범은 그의 섹시한 외모와 허스키한 보컬이 신쓰웨이브 풍의 레트로한 디스코 리듬과 화학적 결합에 성공하여 팬데믹 시절 공연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앨범이다. 한편 이 앨범을 감상하며 흥미로운 인물을 한 명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한 Stuart Price다.
스튜어트 프라이스의 이름이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때는 Madonna와 함께 그 유명한 Hung Up을 선보였을 때다. 마돈나라는 레트로한 뮤지션을 레트로한 에어로빅복을 입혀 레트로한 ABBA의 Gimme! Gimme! Gimme!를 샘플링한 곡을 부르게 하여 – 역의 역의 역발상 – 제2의 전성기를 맞게 한다는 시나리오는 좀 과잉설정일 정도로 황당한데 실제로 이 스토리를 성공시킨 이가 바로 스튜어트 프라이스다. 이런 시도는 뮤지션의 미래 – 나아가 음악의 미래 – 를 제시하는 수단이 레트로라는 점에서 이른바 레트로퓨처리즘(Retro Futurism)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1
By Unknown (Name unten links nicht lesbar) – [1], Public Domain, Link 레트로퓨처리즘적인 그림 하나 : 예전 사람들이 상상했던 2000년대
2000년대 즈음하여 1980년대의 신쓰팝을 추종하여 새로운 장르를 실험한 신쓰웨이브(Synthwave)가 바로 이러한 레트로퓨처리즘 노선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80년대 신쓰팝, 유명한 80년대 미드 Miami Vice 등의 오리지널을 가지고 재생속도를 늦춘달지, 의도적으로 비디오 재생이 찌그러지는 화면을 만든달지, 느닷없이 그리스의 조각상이 등장한달지 하는 방식을 통해 그 시절을 추억 – 패러디, 오마쥬, 희화화, 대상화 그 어떤 표현이든 – 하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서브장르로서 어느 정도 유명해졌다.
신쓰웨이브가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선데에는 The Weeknd의 공헌이 적지 않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Stuart Price 역시 공헌자로서의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80년대 키드로서 실력을 쌓아 Madonna, Pet Shop Boys, New Order 등 80년대의 적자(嫡子)의 앨범의 프로덕션을 맡으면서 그들과 본인의 커리어하이를 찍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신예 두아리파 역시 그의 손을 빌어 영국 국내용 뮤지션이 아닌 글로벌 댄싱퀸의 자격을 획득했다. 음악인으로서 더 좋을 일이 있을까? 자신이 즐겨듣던 이들의 음악을 배워 다시 자신이 그 스타일로 프로덕션해주고 이를 다시 신예에게 활용하는 경험을 갖는다는 것.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작 스튜어트 프라이스의 활동 중 좋아하는 시기는 그가 직접 뮤지션으로 무대를 뛰던 시기다. 그는 프로듀서로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에 Les Rythmes Digitales라는 솔로프로젝트로 음악을 만들었고 Adam Blake, Johnny Blake 와 함께 Zoot Woman이라는 3인조를 결성하여 몇장의 음반을 내놓았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주트우먼 시절을 좋아한다. 이들의 컨셉트 역시 레트로퓨처리즘이었다. 2000년대였음에도 일부러 촌스러운 정장 차림으로 80년대 신쓰팝을 재생하면서도 그 이후의 댄쓰팝의 트렌드와의 가교 역할을 한 밴드가 바로 주트우먼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2024년 신보를 내놓는 등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 중인 현재진행형 밴드다.
Duran Duran의 Girls on Film을 오마쥬한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Zoot Woman의 Living in a Magazine 비디오
Future Nostalgia라는 앨범명도 바로 이 Retro Futurism이라는 표현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Sophie and Peter Johnston은 뉴캐슬 출신의 신쓰팝 듀오로 오누이 지간이다. 그들은 1980년대에 BBC라디오1의 디스크자키였던 John Peel의 눈에 띄어 영국의 텔레비전 시리즈 TX45의 주제음악을 연주하였다. 1983년 “Television Satellite”이라는 곡이 Peel의 Festive Fifty1에 37번째 곡에 선정되었다. 그들의 유일한 차트 히트곡은 “Happy Together”로 1986년 영국 싱글 차트 99위에 올랐다.
Albums
Sophie and Peter Johnston (1986) Singles
“Losing You” (1985)
“Happy Together” (1986) – UK No. 99
“Television Satellite” (1987)
“Torn Open” (1987) Links 인터뷰
Fiftive Fifty는 원래 연말에 편집되어 John Peel의 BBC 라디오 1 쇼 청취자들에 의해 투표된 올해의 베스트 50곡의 연례 목록이었다. Peel이 연주하는 음악의 다양성이 아니라 청취자들 사이의 다수의견을 완전히 대변하는 인디와 록 노래가 지배적이었다. ↩
“역사상 최고의 콘서트 필름입니다!” 토론토 인터내셔널페스티벌에서 토킹헤즈의 새롭게 리마스터된 콘서트 다큐멘터리 스탑메이킹센스의 시사회에서 이 베테랑 감독이 선언했다. 리는 그룹이 이십여년만에 처음으로 대중에 전체 밴드의 모습으로 나타난 영상회와 질의응답 시간의 사회를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다.
몇년 동안 팬들은 멤버인 데이빗번, 티나웨이마우스, 크리스프란츠, 제리해리슨에게 재결성해줄 것을 애걸해왔다. 그러나 월요일의 이벤트는 이 락커들이 서로 한 방에 모일 수는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테스트였을 것이다. 번과의 마지막 만남이 “20여년 전”이었다는 프란츠는 그가 2020년 내놓은 생동감있는 회고록 리메인인러브에서 회고하길 번은 그룹의 공동작업에 대해 반복적으로 단독의 작곡인 것으로 간주했었고, 1991년 모두를 놀라게 하는 밴드의 해산을 주도했다. 그리고 나머지의 바람과 반해서 EMI의 카탈로그에 완전한 소유권에 서명해버렸다. 한편 웨이마우스는 이전에 번을 “트럼프주의자”이자 “거래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TIFF에서 잠복해있던 드라마는 재빨리 잠재워졌다. 리의 사회 하에 상영 후의 인터뷰는 최대한 밝고 공손했다. “역사상 최고의 콘서트 필름입니다!” 그는 다시 선언해서 그룹이 그들의 음악과 영상의 유산을 축하며 미소짓게 만들었다.
“토킹헤즈는 너무나 뛰어난 밴드이고 우리가 라인업을 확장했을 때…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었습니다.” 프란츠가 말했다. “자화자찬해서 미안한데 우리 밴드 멤버가 오늘밤 다시 함께 한 것이 너무 좋아요.”
CBGB의 열기 속에서 구성된 토킹헤즈는 1970년대 뉴욕에서 협조적이고 매혹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운드에 집중하는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라이브 연주로 경력을 시작했다. 이는 그들을 보다 전통적인 가사-코러스-가사 위주의 동료 뮤지션과 차별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특히 피어오브뮤직(1979)에서 종합적인 텍스쳐를 락에 결합하고 차기작 리메인인라잇(1980)과 스피킹인텅스(1983)에서는 아프리카의 그루브에 영감을 받은 복합적인 리듬을 만들어내는 등 스튜디오 마술에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토킹헤즈는 비록 2021년이 되어서야 평생공로상으로 처음 그래미를 받기는 했지만 드물게도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적이었다.
1984년 발표한 스탑메이킹센스는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라이브 공연을 소중하게 담아냈다. 이 획기적인 필름은 당신을 토킹헤즈가 스피킹인텅스 투어로 3일 밤을 연주하는 로스엔젤레스의 판타지스 극장으로 데려간다. 당시 그룹은 쇼에서 라인업을 서서히 확장하면서 보다 풍부하게 실연하는 사운드나 장엄한 연출법 등을 선보였다.
당신이 스탑메이킹센스를 처음 접했든 반복적으로 시청을 했든 (해리슨이 감리를 맡은) 리마스트된 사운드를 포함한 복각판은 당신을 즉시 그들의 연주장으로 데려간다. IMAX에서 극단적으로 친밀한 경험을 맛볼 수 있다.(“그는 너무 땀이 흥건하네요!” 번의 근접 샷에서 내 이웃 하나가 말했다.) 극장의 팬들은 “버닝다운더하우스”에 원 모양으로 회전했고 “원스인어라이프타임”에서는 리는 좌석을 차고 일어난 이들에 합류했다. “라이프디어링워타임”의 연주 동안 번의 모습에에는 다시 한번 계단에서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지금 이걸 봤을 때 난 이게 극장에 오는 이유야!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번이 “내 랩탑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라고 농담하기 전에 이야기했다.
상영회 이후 리는 동기부여 감독 역을 맡았다. “모두 환영해주세요. 전세계적으로 기록을 세울 예정입니다.” 토킹헤즈 101으로서 부분적으로 발매의 역할을 인지하고 있기에 리는 타임라인과 함께 1983년 어떻게 촬영했는지에서부터 밴드와 청중이 2023년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이르기까지 질의를 진행했다. 특별히 웨이마우스의 그의 베이스 스타일에 친밀감을 보이며 리는 그에게 이 필름에서 맘에 드는 연주가 무엇인지 물었다. “이봐요 스파이크” 그가 대답했다. “그건 마치 내 아이들 중 누구를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같아요.”
토킹헤즈의 발언이나 팬의 질문은 – 예를 들면 “완전 새로운 관객에게 이 상징적인 영화를 상영하니 어떤 느낌인가요?”와 같은 – 이 방안에 하나의 단어를 남겼는데 ‘사랑’이다. 리는 다시 강조했다. “사랑!” 리는 항상 같은 정서를 공유한 것만은 아닌 이들 밴드 구성원을 위한 치료의 힘이 있는 주문이라도 되는양 소리쳤다. “영원하다!” 그는 그들의 유산에 대한 확신감으로 반복했다. “풍부하고 세심한 사운드!” 그는 그룹이 기뻐할 정도로 강조하였다.
“이 필름이 힘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로 당신은 스테이지 위에서 우리가 무척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해리슨의 말이다.
“제가 거기에 사랑이란 단어를 다시 넣어도 될까요?” 리가 물었다. “사랑! 사랑!”
“사랑과 즐거움, 그리고 청중이 ‘당신도 이 중 하나야’라고 말하고 있어요.” 해리슨이 이어나갔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당시의 놀라운 감정이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토킹헤즈는 리를 좀 더 자주 만나야 하고 이는 그들에게 좋은 일일 것이다.
게일블레커가 디자인한 아이코닉한 빅수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번은 일본에서 그의 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는 극장에서 동작과 부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실제 삶보다 크다고 이야기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난 생각했는데 오~! 내 양복도 역시 커야겠구나.” 번이 말하자 폭소가 터졌다.
“오늘은 정말 컸어요.” 프란츠가 대꾸했다.
웨이마우스는 필름을 찍기전에 “모든 곡의 악보를 따고, 각 연주자가 무엇을 하는지, 누가 움직이는지를 알기 위해” 밴드와 함께 몇주간 여행했던 비주얼 컨설턴트 샌디맥레오드에게 고마움을 표했는데 “내 생각에 그게 실제 촬영에서 굉장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밴드는 또한 팀의 노력으로 스탑메이킹센스의 감독으로 많은 신뢰를 받았던 조나단드미에게도 칭찬을 쏟아부었다.
“난 그가 이것을 일종의 합주 필름이라고 보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번이 고인이 된 감독에 대해 말했다. “당신은 많은 배우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하나하나의 캐릭터에 대해 알게 되죠.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하는지 바라봅니다. 나는 나많의 세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프란츠가 덧붙였다. “조나달은 우리를 많이 신뢰했어요. 우리가 하는 것이 영화로 만들 가치가 있고 또한 그것이 미래에 기억될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해줬죠.”
리는 아쉽게도 밴드 멤버들이 어떻게 이제 잘 지내게 됐는 지에 대해서나 라이브를 위한 재결합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번은 다만 최근 사람들에게 그가 그룹을 끝내게 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고 그것을 “꼴 사나운 해체”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한다. 토킹헤즈의 이전의 2002년 공개 석상에서 프란츠는 록앤롤 명예의 전당에게 밴드가 “행복한 끝맺음”의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한 바 있다. TIFF는 보다 행복한 것이 되었다.
“마술같아요.” 웨이마우스는 스탑메이킹센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감상은 그 밤 그 자체에게도 쉽게 적용될 것이다. “모든 것이 특별해요. 당신이 우리와 청중 사이에 대해 이야기한 그 사랑, 팀웍, 우리 동료, 영화를 찍은 동료. 모든 것이 멋집니다.”
Flash And The Pan은 호주의 뉴웨이브 밴드다. 이 밴드는 호주에서 가장 위대한 락밴드로 평가받는 The Easybeats의 멤버였던 Harry Vanda와 George Young이 1979년대에 시작한 프로젝트다. 이 듀오의 첫 성공은 데뷔 앨범의 수록곡 Walking In The Rain의 인기였다. 이 곡은 후에 Grace Jones가 그녀의 1981년 앨범 Nightclubbing에서 커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Hey St. Peter가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핫100 차트 76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앨범도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는데 유럽, 영국, 미국 등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Albums Flash and the Pan (1979)
Lights in the Night (1980)
Headlines (1982)
Early Morning Wake Up Call (1984)
Nights in France (1987)
Burning up the Night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