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 세이코(松田聖子) 내한공연 후기


공연장 입구(이미지 출처)

J-Pop의 레전드 마쓰다 세이코(松田聖子)가 데뷔 45주년을 맞아 생애 처음으로 지난 2월 22일 인스파이어 무대에서 내한 공연을 가졌다. 잘 알고 있다시피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일본의 대중문화 유입을 막아오고 있어서 범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일본의 대중음악은 한국에서만큼은 큰 인지도를 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대중음악의 큰 별이라 할 수 있는 마쓰다 세이코도 내한 공연을 갖기까지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 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인스파이어 리조트에 셔틀버스를 타고 일찌감치 도착했다. 처음 와보는 인스파이어 리조트는 인천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복합 위락시설로 세이코짱이 공연할 공연장과 함께 호텔, 카지노, 위락시설, 쇼핑몰을 갖춘 시설이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이 시설의 개발과 관련하기도 하여서 이름은 꽤 들었었지만, 많이 돌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라 방문은 처음이었다. 전체적인 시설 규모는 국제공항 근처의 위락시설치고는 인상적인 기능의 시설은 아니었다. 아무려나~

시간이 되어서 입장했는데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공연의 관람자는 8천 명에 달한다고 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공연장의 규모는 대략 그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시설이었다. 우리는 S석의 1열을 예약했기에 공연장 제일 첫 줄에 앉았다. – 다만 오른쪽 끝 언저리 좌석이어서 아내가 불만이 많았다 – 거기에서 공연장을 바라보니 2층에 듬성듬성 빈 자리가 있었지만, 관객들이 나름 차곡차곡 들어차서 티켓 파워가 어느 정도는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일본 팬이 상당수 그 자리를 채워줬겠지만.


뛰어난 연주 실력을 선보인 연주자들 (이미지 출처)

공연 예정 시간인 다섯 시가 되었지만, 공연은 시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의 팬들이 – 내 뒷자리 중년 남성 팬이 주도했다 – 갑자기 ‘세이코’를 외치면서 박자를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에 호응해서 – 아마도 대부분이 일본인 팬이었을 듯 – 세이코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대략 5분에서 10분 동안 쉬지 않고 세이코를 연호하여서 나는 슬슬 ‘이분들 초장부터 너무 힘을 빼시는 것 아닌가’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10분이 지난 즈음에 드디어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했다.

각주 :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 중 하나가 일본의 관객들은 상당히 조용히 공연을 감상하는 편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게 이날 다 깨졌다. 세이코를 연호하는 팬들도 그렇고 내 옆자리의 중년 일본 여성은 일찌감치 ‘세이코(聖子)’라고 크게 쓰여 있는 하트 모양의 조형물을 만들어와서는 공연이 시작되자, 바로 일어나서 세이코짱의 안무를 따라 하면서 그의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이미 한두 번 그의 공연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는 추측이 가능한 팬질이었다. 스고이~!

첫 곡은 예상을 다소 벗어나는 곡이었다. 아마 공연이 한창 달아오를 즈음에 부르지 않을까 예상했던, 한국에서 그의 인지도를 10~20%쯤 상승시켜 주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뉴진스의 하니가 불러서 유명해진 바로 그 곡 ‘푸른 산호초(靑い珊瑚礁)’가 공연의 첫 곡이었다. 무대 디자인은 추억을 되새길 팬들을 위한 고려였는지 레트로풍의 디자인이었다. 이후 백업 보컬 등을 겸할 무용수들도 발레복을 입고 나와 춤을 춰서 다소 이색적이기도 했다. 세션들은 층이 진 무대 아래편에서 연주해 주었다.


앵콜 무대에서 손하트 날리는 세이코짱(이미지 출처)

공연은 대략 세이코짱이 대략 3곡 정도를 소화하고 이후 무용수들이 연주에 맞춰 춤을 추면서 세이코짱이 새로운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고 무대도 바꾸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락밴드의 거칠게 몰아치는 열정적인 콘서트의 분위기라기보다는 추억을 소환하게 만드는 아이돌의 무대라는 느낌이 다분한 것이 사실이었다. 바뀌는 무대에 따라 세이코짱은 공주 컨셉트로 노래하기도 하고 드럼이나 기타를 직접 연주하는 락걸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열심히 하는구나!’의 느낌을 주는 공연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연주자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 세이코짱과 함께 꾸민 어쿠스틱 무대가 마음에 들었다. 세이코짱의 발라드곡들을 위주로 차분하게 이어진 무대에서는 세이코짱이 (연습해 온) 한국어와 일본어로 설명을 이어가면서 무대를 가졌다. 물론 프롬프트로 읽었겠지만, 그의 한국어 솜씨는 인상적일 정도로 뛰어났다. ‘한국 공연에 대단히 정성을 들였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실한 모습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이 어쿠스틱 공연에서 내 최애곡인 SWEET MEMORIES를 불러주었던 장면이었다.

전체적으로 공연은 이 어쿠스틱 공연을 포함하여 2시간 정도 이어졌는데, 앞서 언급한 세션 및 무용수 등 다수의 인원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 개인적으로 봤던 해외 아티스트 공연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 일단 티켓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공연이었다. 게다가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일본 팝의 레전드가 내 눈앞에서 손하트를 날려주는 공연이었기에 – 제일 앞자리에 앉은 특혜 – 비록 추억을 쌓아 온 일본 팬만큼 아니겠지만 충분히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재소환할 수 있는 멋진 공연이었다.

셋리스트(출처)

青い珊瑚礁
渚のバルコニー
秘密の花園
天国のキス

時間の国のアリス
ピンクのモーツァルト
チェリーブラッサム
シェイプオブハピネス

愛されたいの
エイティーン
セイシェルの夕陽
スイートメモリーズ
ベルベットフラワー

赤いスイートピー
ロックンルージュ
裸足の季節
風は秋色
ハートのイヤリング
白いパラソル
レモネードの夏
天使のウインク
夏の扉

素敵にOnce Again
大切なあなた

The Karate Kid

The poster shows an elderly man looking at a teenager. In the background, the teenage stands on stop of a small wooden pole doing a karate stance at a beach. Below, the tagline reads "He taught him the secret to Karate lines in the mind and heart. Not in the hands". The films titles, credits, and rating is printed below the tagline.
Fair use, Link

백만 년 만에 가라데키드를 다시 보고 있다. 일단 영화를 제작한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작품이고 서양 영화를 추종하던 우리나라에서도 나름 인기를 얻었다. 다만 당시는 가라데가 일본 무술이었고 이를 추종하는 영화는 일본 영화가 아닐지라도 배척받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차마 개봉을 금지하지 못했지만, ‘가라데키드’라는 원래의 이름 대신 ‘베스트키드(Best Kid)’라는 매우 애매하고 어색한 이름으로(심지어 문법도 틀렸다) 국내에서 개봉했다.

그런데 오늘 몇백 년 만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영화의 원작자들은 이 영화를 일뽕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남주 다니엘에게 가라데를 가르쳐주는 미야기 상. 너무나 유명한 캐릭터다. 그런데 사실 미야기 상은 본인을 일본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스스로를 오키나와인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과 미야기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때 미야기는 오키나와의 위치를 알려준다. “차이나 히어, 저팬 히어, 오키나와 히어.”

더 나아가서 가라데에 대한 미야기의 태도도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미야기는 다니엘에게 가라데는 중국의 무술이라고 가르친다. karate에서의 te는 손을 의미하고 kara는 ‘빈(empty)’이라는 의미인데 이 모든 것은 중국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다니엘에게 미야기가 가르치는 무술은 중국의 무술이고 그의 출신지는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다.1 다니엘이 영화 내내 욱일기 문양의 헤어밴드를 하고 있지만, 그건 일본 군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80년대, 이 영화를 배급한 미국 영화사나 이를 수입한 한국 영화사나 당연히 그렇게 인식했겠고, 오늘날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는 사실은 일뽕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미야기 상은 다니엘에게도 이야기하지만, 미국 이민 2세로서 참전용사다. 그 와중에 아내와 아이를 잃은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딱히 일본을 좋아했을 이유도 없다.2 그러니 미야기 선생이 다니엘에게 가르친 것은 군국주의가 아닌 자립정신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주 다니엘의 역할을 맡은 랄프 마치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는 1961년생 배우로 영화에서의 고딩의 역할을 맡았을 당시 그의 나이는 22~23세였다. 서양인들이 급격하게 노화되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동안은 역대급이다. 그 후 이 영화의 스핀오프인 코브라카이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봐도 그의 동안은 역대급이다. 복 받은 얼굴이다. 코난쇼에서 그의 이름의 정확한 발음 등을 두고 코난과 그의 베프가 다툰 에피소드도 너무 재밌다.

  1. 이게 현재까지 실제로 알려진 가라데의 역사적 기원이기도 하다 ↩
  2. 게다가 그는 아무로 나미에처럼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 출신의 원주민이다. ↩

보리수 린덴바움

어제 보리수 린덴바움(菩提樹 リンデンバウム)이란 영화를 보았다. 1988년 작품으로 당시의 인기 여배우였던 미나미노 요코(南野陽子)와 마츠다 세이코의 남편이기도 했던 칸다 마사키(神田正輝)가 남녀 주연을 맡은 영화다. 내용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윈 아사미가 내용은 정체 모를 독지가의 도움으로 의대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 발생하는 사랑, 갈등, 그리고 이별 등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판 ‘키다리 아저씨’라고 할 수 있겠는데, 갈등과 그 극복 과정 등에 대한 묘사나 연기가 좀 밋밋해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자세한 내용에 대한 소개는 여기를 참고) 주요 감상 포인트는 오히려 일본이 잘 나가던 80년대 말의 도시인의 깔끔한 패션 센스와 풍경 등 당시 일본인의 삶이었다.(물론 이것도 영화 안에서 과장된 삶일 수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점은 주요 조연으로 출연하는 타케모토 타카유키(竹本孝之)라는 배우가 얼핏 The Smiths의 Johnny Marr와 닮았다는 점이다. 그 역시 음악인이기도 하다. 노래 실력은 별로다.

Humpe & Humpe 의 Yama-Ha

Humpe & Humpe 는 작곡가, 가수, 프로듀서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했던 Annette Humpe 가 여동생 Inga와 만든 일종의 프로젝트밴드였다. 이들은 본국인 독일에서 1985년 셀프타이틀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 흥미로운 곡이 하나 있는데, 제목은 Yama-Ha 다.

짐작하다시피 이 제목은 일본의 유명한 브랜드 야마하를 말하는 것이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Yamaha, Mitsubishi, Toyota, Suzuki, Sony, Minolta, Kawasaki, Sanyo, Casio, Toshiba.” 당시 세계를 점령한 일본의 브랜드로 가사를 꾸민 것이다. 후덜덜한 기분이.

일본의 1980년대는 거칠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곡이다. 전자제품, 자동차, 모터싸이클, 카메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은 특유의 고품질과 미려한 디자인으로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어릴 적 aiwa를 통해 처음 스테레오를 들으며 느끼던 전율이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제조업 제국은 몰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석양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토요타는 리콜 사태로 자존심을 구겼고, 샤프는 파산 설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고, 소니는 하나의 시대정신에 가까웠던 Walkman의 생산을 중단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한 기업, 한 나라, 나아가 체제의 흥망성쇠는 역사학, 경제학, 경영학 등 허다한 학문의 끊임없는 연구대상이다. 대상을 일종의 유기체로 본다면 그것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지금 일본의 상황이 우리의 피하고 싶은 미래가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뮤직비디오

일본의 뉴웨이브(New Wave)씬 – 글:이종현

안녕하세요. 세 번째 시간을 맞이하는 ‘J’s Musis’의 이종현 입니다. 지난 2주간 밴드붐과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에 대해 얘기를 해봤는데요, 오늘은 뉴 웨이브 편을 2주에 걸쳐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원래 다음주 예정이었던 ‘비주얼 락’ 편은 3월 경에 횟수를 늘려서 다뤄드리기로 할께요.

전셰계적으로 펑크와 디스코가 큰 인기를 모으던 70년대 후반이 거하고 이념, 사상과는 별개의 보다 진보적이고 세련된 음악으로 등장했던 것이 바로 뉴 웨이브죠. MTV로 대표되는 영상 세대를 주요 타겟으로 시작됐던 뉴 웨이브는 포스트 펑크를 비롯, 많은 80년대 음악의 기초가 되기도 했으며 테크노, 얼터너티브 탄생에 큰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일본의 경우 뉴 웨이브는 거의 영미권과 비슷한 시기인 70년대 말에 시작돼 80년대 중반이후 테크노로 대표되는 전자음악과 비주얼 록으로 그 스타일이 나눠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본의 뉴웨이브는 테크노나 비주얼 록의 전향없이 80년대 초반 스타일을 꿋꿋하게 지켜가는 뉴 웨이브 밴드들이 적지 않게 있으며 이 중에는 해외 진출에도 성공한 케이스가 꽤 많기도 하죠. 나이스 뮤직이 일본 시장은 물론 해외 진출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뉴 웨이브 씬을 굳이 언급해야하는 이유는 90년대 일본 대중음악을 뒤흔드는 수많은 실력자들이 과거 뉴 웨이브 바람을 타고 등장했던 수많은 밴드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죠. 문화진보를 요구했던 뉴 웨이브 전사들은 10수년이 지난 현재의 주체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YMO < Be a Superman > 일본 뉴 웨이브의 시작은 70년대 중반 이후 전설적인 두 팀이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바로 YMO라고 불리는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와 플라스틱스가 바로 그들이죠. 뉴 웨이브의 시작이자 상업주의 전자음악의 시작으로 알려지는 이들은 멤버 개개인이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며 음악뿐만이 아니라 일본 열도의 문화 전반을 움직이는 주체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3인조로 구성됐던 YMO는 일본 보다 영국에서 먼저 화제를 모았던 특이한 팀이예요. 60년대 사카보토 큐 이후 전무했던 일본 뮤지션의 해외 진출이라는 염원을 쉽게 달성해 준 장본인임과 동시에 해외 뮤지션을 일본에 불러들이는 공로를 갖고 있는 팀이 바로 YMO입니다.

YMO after playing a 2008 concert in London. From left to right: Ryuichi Sakamoto, Yukihiro Takahashi, Haruomi Hosono
By YMO2008.jpg: The_Junes of Flickr.comderivative work: Solid State Survivor (talk) – YMO2008.jpg, CC BY 2.0, Link

밴드 해체 이후 사카모토 류이치는 영화 음악과 현대 음악의 일인자로 세계 시작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로버트 프립, 데이빗 실비앙 등과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패션 디자이너 출신인 다카하시 유키히로는 패션몰 경영과 함께 솔로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또한 음악적인 부분의 핵이었던 호소노 하루미는 일본 앰비언트 뮤직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아이돌 출신 여가수 모리타카 치사토를 부인으로 얻기도 했죠.

YMO 못지 않는 수퍼 멤버 진용을 갖추고 있던 플라스틱스는 해외 활동보다는 내수용 밴드로 각광을 받았었죠. 5인조로 시작된 플라스틱스는 대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밴드 해체 후 사토 치카와 나카니시 도시오는 멜론이라는 팀을 결성해 플라스틱스의 맥을 이어 갔습니다.

한편 밴드의 간판이었던 사쿠마 마사히데는 프로듀서로 변신해 주디 앤 매리, 글레이, 구로유메 등의 앨범에 참여하며 90년대 가장 성공한 프로듀서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음악과 그래픽 디자이너를 겸하는 종합 예술인 다지바나 하지메는 로우 파워스라는 밴드를 결성해 명상 음악에서부터 펑크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을 구사하고 있죠.

뉴 웨이브 음악이 주류 음악과 결탁하면서 더 이상의 뉴 웨이브로의 구실을 못하고 있을 즈음 인디 씬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뉴 웨이브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펑크를, 사운드 기법적으로는 모던함을 추구한 이들은 비교적 전자 음악의 성향은 강하지 않았지만 아이돌 스타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던 대중 음악 씬에 자극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었죠. 일풍당(一風堂), ZELDA(젤다), 우초텐(有頂天), 래핑노즈, 로사 룩셈부르그 등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메이크업을 동반한 퍼포먼스성 공연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80년대 말부터 대학가를 주변으로 새로이 인기를 얻는 음악들이 발굴되고 있었어요. 그런 분위기를 통해 발굴된 팀이 오카무라 야스유키, 카스테라, 소프트 발레, 디렉스(De-Lax), 매스커린 드라이브, 뉴에스트 모델 등이 있습니다. 싱어송 라이터이자 건반 연주자인 오카무라 야스유키는 발라드를 구사하는 가수로 지식인의 사랑을 얻는 독특한 케이스의 뮤지션입니다.

철학적인 노랫말이 돋보였던 카스테라는 기존 음계를 파괴하는 실험을 꾸준히 펼쳐 유니콘과 더불어 대학가의 큰 사랑을 받았던 학생 밴드였는데요, 리더였던 토모프스키는 밴드 해체 후 현재 솔로로 활동을 하고 있죠. 비주얼 매니아들에게까지 크게 어필했던 소프트 발레는 드페쉬 모드를 모델로 활동했던 뉴 로맨틱 계의 팀이죠. 보컬리스트였던 엔도 류이치가 최근 솔로 활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80년대 비주얼 록/테크노에 파장을 남겼던 뉴 웨이브는 90년대 이후 컬리지 록/얼터너티브/노던 롤이라는 의미로 변신하며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죠. 이중 여성 보컬을 앞세운 데이트 오브 버스, 딥 인더 풀, 살롱 뮤직 등은 일본 시장은 물론 해외 진출에까지 이름을 알린 바가 있습니다.

2주에 걸쳐 7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친 일본의 뉴웨이브 음악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아쉬움이 남지만 못다한 얘기는 다음 기회에 계속 이어드리도록 하구요, 2월의 ‘J’s Music’ 예고를 해드릴께요. 이제 보다 깊숙히 일본 음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요, 2월엔 3주동안 일본의 힙합 음악에 대해 특집으로 알아볼 예정입니다. 일본 힙합의 역사,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일본이 낳은 대표적인 힙합 DJ까지. 그리고 3월에는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는 비주얼 락에 대해 역사와 음악의 특징, 어떤 뮤지션들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J’s Music 앞으로도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본의 뉴웨이브 편 2부를 모두 마칠께요. 지금까지 이종현이었습니다.

http://www.mbc.co.kr/NETOP/9901/jsmusic/jsmusic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