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tti Poli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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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Scritti” by Marco Raaphorst – Flickr: The new Scritti.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 Green Gartside와 Tom Morley는 Leeds에서 열린 Sex Pistols의 공연에 반해 음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런던으로 본거지를 옮긴 그들은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 동창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밴드의 이름은 Green이 당시 읽고 있던 Antonio Gramsci의 “Politician Writing” – 이탈리아 제목이 “Scritti Pollitici”였음 – 에서 차용하였다. 밴드의 음악스타일은 펑크와 레게 싸운드였고 보컬은 무척 정치적인 입장을 띄었다. 당시 정치는 Green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정치학 서적을 탐독하였고 “Young Communist League”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DIY 레코드를 만들어서 그들만의 레이블인 St. Pancras의 이름으로 Rough Trade를 통해 배급하였다. 싱글들은 잘 팔려나갔고 음악잡지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인터뷰 등을 위해 Green은 마지못해 그룹의 프론트맨으로 나섰고 곧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입장을 띈 이미지로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스타일은 음악잡지에서 선호되는 스타일이었다.

1979년 Green은 심한 병에 걸렸고 South Wales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Soul과 R&B에 감화받은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나머지 멤버들에게 밴드의 스타일을 바꿀 것을 설득했고 음악적 방향을 재정립하게 된다. Green은 Rough Trade와 함께 작업하면서 세개의 싱글과(“The Sweetest Girl”, “Faithless”, “Asylums In Jerusalem / Jacques Derrida” (double A-side)) 한개의 앨범(“Songs To Remember”)을 내놓았다. 싱글들은 영국 인디차트에서 인기를 얻었다.

1984년 Green은 뉴욕 출신인 David Gamson와 Fred Maher을 끌어들여 이전과는 또 색다른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씬쓰팝 스타일로 선회한 1984년과 1985년은 Scritti에게 최고의 해였다. Green은 Virgin과 계약을 맺었고 다섯개의 싱글(“Wood Beez (Pray Like Aretha Franklin)”, “Absolute”, “Hypnotize”, “The Word Girl” and “Perfect Way”) 과 한개의 앨범(“Cupid & Psyche 85”) 을 내놓았다. “The World Girl”은 영국차트 6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고 “Perfect Way”는 미국차트에서 11위까지 올랐다. 1988년 3집 “Provision”과 세개의 싱글(“Oh Patti (Don’t Feel Sorry For Loverboy)”, “First Boy In This Town (Lovesick)”, “Boom! There She Was”)을 내놓았지만 “Oh Patti (Don’t Feel Sorry For Loverboy)”만이 영국차트 13위까지 올랐다.

이 와중에 앨범작업 등에 지쳐버린 Green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David과 Fred는 다른 아티스트들과 작업하기 위해 그룹을 떠났다. 1990년 Martin Ware(Heaven 17, BEF:The British Electric Foundation)에 의해 다시 스튜디오로 끌려나온 Green은 BEF의 앨범 “Music Of Quality and Distinction Vol. II”를 위해 Stevie Wonder의 “I Don’t Know Why I Love You (But I Love You)”의 커버버젼을 녹음하였다.

Scritti Politti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건 밀레니엄의 끝무렵인 1999년이었다. David Gamson과 함께 다시 시작한 작업은 키타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쏘울에 경도된 스타일이었다. 이 앨범에서는 힙합씬의 많은 스타들이 함께 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2 Songs to Remember Rough Trade
1985 Cupid & Psyche 85 Warner
1988 Provision Warner
1999 Anomie & Bonhomie Vir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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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official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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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xy Music

Roxy Music - TopPop 1973 03.png
“Roxy Music – TopPop 1973 03” by AVRO – Beeld En Geluid Wiki – Gallerie: Toppop 1973.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아트락과 프로그레시브 그리고 아방가르드가 적절히 접목되었던 이색그룹 “Roxy Music”의 청사진이 그려진 것은 1970년 11월, 브라이언 페리의 두뇌에서 시작되었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오랜 친우인 베이시스트 그래험 심슨과 록시뮤직에 동승할 인재들을 서서히 캐스팅하기 시작했으며, 그 노력의 소산으로 키보디스트 브라이언 이노와 목관악기의 귀재 앤드류 메케이, 그리고 나이브한 드러머 덱스터 로이드와 나이스 출신의 키타리스트 데이빗 오우 리스트 등을 규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워낙 다양한 개성의 인재들이 모였던 부작용으로 1972년에 선보인 셀프타이틀 데뷔앨범을 전후해서 데이빗과 덱스터가 그룹을 등졌고, 그 후임으로 이미 로컬그룹(Smokestack)에서 명성을 높이고 있던 휠 멘저네러(키타)와 폴 탐슨(드럼)이 가입,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는다. 킹크림슨의 철학적인 가사담당으로 널리 알려졌던 피터 신훨드의 제작으로 등장했던 록시뮤직의 첫앨범은 [Virginia Plain]과 [Pyjamarama] 같은 히트곡을 배출하면서 영국챠트 1위에 오르는 성공적인 거보를 내딛었다.

이후 다소의 멤버교체를 단행하여 발표했던 73년초의 2집 [For Your Pleasure], 73년 말의 3집 [Stranded](당시 18세였던 천재 에드윈 좁슨 가입), 74년의 4집 [Country Life], 75년의 5집 [Siren], 76년의 6집이자 실황앨범이었던 [Viva Roxy Music] 등에 이르기까지 5년동안에 예지가 번뜩였던 6매의 명반을 토해낸후 더욱 실험적인 사운드를 구사하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79년에 재결성되어 [Manifesto]를 발표)휠 맨저내러는 [Diamond Head]를, 앤디 메케이는 존 케이지의 제자답게 전위적인 작품세계를 [In Search Of Eddie Riff]를 통해 각각 노출했으며, [Quiet Sun : Mainstream]이라든가 [801 : Live]같은 진취적인 실험앨범의 주역으로 역시 “록시뮤직” 패밀리들이 참여했고, 브라이언 페리는 수많은 솔로앨범을 통해 리더의 역량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디스코그래피

  • Roxy Music (1972)
  • For Your Pleasure (1973)
  • Stranded (1973)
  • Country Life (1974)
  • Siren (1975)
  • Manifesto (1979)
  • Flesh and Blood (1980)
  • Avalon (1982)

링크

Romeo V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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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eo Void” by www.RomeoVoid.net. Licensed under Wikipedia.

라인업 : Debora Iyall(Vocals), Benjamin Bossi(Saxophone), Peter Woods(Guitar), Frank Zincavage(Bass)

79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뉴웨이브 계열 그룹으로 당시 Post-Punk라는 신조류에 주목하고 있던 415 레코드에 스카우트 되어 81년에 메이저 데뷔했다. 다소 선이 굵은 편이지만 매력적인 보컬의 – 언뜻 Siouxsie & the Banshees의 Siouxsie Sioux를 연상시킨다 – 여성 싱어 Debora Iyall 을 중심으로 섹스폰이나 퍼커션을 도입하여 독특한 음악세계를 추구한 그룹이다. 작곡은 Peter Woods와 Frank Zincavage, 가사는 Debora Iyall, 팀의 독특한 칼라는 섹스폰의 Benjamin Bossi에 의해 주도되어 조화로운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던 이 그룹의 히트곡은 “A Girl In Trouble”, “Never Say Never” 등이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1 It’s a Condition [415]
1982 Benefactor [Columbia]
1984 Instincts [Columbia]
1992 Warm, In Your Coat [Columbia/Legac]

링크
Debora Iyall Fan Page
Biography

Prince

Prince at Coachella 001.jpg
“Prince at Coachella 001” by Micahmedia at en.wikipedia – Own work (Original caption: “I created this work entirely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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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Prince, O(+>, TAFKAP, The Artist formely known as Prince, The Artist
본명 : Prince Roger Nelson (later Prince Rogers Nelson)
생년월일 + 고향 : June 7, 1958 in Minneapolis, MN, USA

프린스와 섹쓰는 그 자체로 자웅일체처럼 느껴진다. 그의 다인종적인 외모와 퍼플레인 시절의 연보라색의 화사한 의상의 결합은 그야말로 그만의 섹쓰 왕국의 프린스의 모습 그 자체였다. 물론 I would die for you같은 노래에서는 섹쓰가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지만 그건 그가 때로는 다른 것도 생각한다는 말이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Sheila E, Vanity, The Revolutions를 거느렸던 이 왕자는 그의 신하들을 음악계 곳곳에 배치시켜 80년대 흑인음악에 프린스표 음악을 유포하였다. Sheila E의 Glamorous Life나 Chaka Khan의 I Feel For You는 챠트를 뒤흔들며 프린스의 음악이 얼마나 대중에게 흡입력이 있는가를 증명해주었다.

성(性)을 주요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마돈나와 비교할 수 있는 그는 백인 취향의 건전한 음악을 생산해냈던 마이클잭슨과는 마치 음악계의 마틴루터킹과 말콤엑스같은 지형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80년대 흑인 음악의 무협지를 읽는 듯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Bio from 오이뮤직

” 실험정신과 선정성의 결합, Prince ”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와 흑인들의 전유뮬로 여겨졌던 소울 음악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가를 증명해 보인 뛰어난 음악인 프린스. 혹자들로 부터 같은 58년 생인 마이클 잭슨과 함께 흑인 음악의 진정성을 백인들에게 팔아먹은 이단아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는 분명히 20세기 말 등장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 가운데 한 명이다.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 다양한 악기에 고루 능한 멀티 뮤지션이기도 하고 그에 앞서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이다. 시대를 앞선 음악성으로 인해 비난과 외면을 당했으나 ’84년의 [퍼플 레인] 사운드 트랙이 영화의 성공과 별개로 히트를 기록해 그는 새삼 재조명 받기에 이르렀다. 타이틀 트랙 외에 ‘When Doves Cry’, ‘I Would Die 4 U’ 등이 연이어 히트했고 앨범 자체도 천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해 다이아먼드 레코드를 수여 받았다. 실험정신과 선정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음악 세게는 사실 그가 미네소타 주의 중산층 출신이라는 치명적인 결점으로 말미암아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그는 쾌락과 예술 두가지를 추구하지만 열정과 젊음이 지나친 다작과 방종 그리고 절제의 부족으로 식어 들어가 NPG와의 활동 시작 이후 그의 음악이 지니는 에술적 가치와 대중적 인기가 고루 하강 곡선을 기록했다. [Love Sexy] 앨범을 통해 자신의 누드를 파격적으로 공개하기도 했으나 고향 미네소타 주 몇몇 음반 소매상들은 그의 앨범을 진열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 사건이 ’89년 5월 9일의 일이다. 프린스는 [워너]를 통해 ’96년까지 활동했는데 레이블과의 불화로 스스로의 뺨에 노예(slave)라고 새기고 다니기도 했으며 자기 이름을 부정해 스스로를 남성과 여성의 상징을 조합해 만든 이상한 기호 뒤로 은폐해 결국 TAFKAP(The Artist Formerly Known As Prince)라 불리기도 했다. 소속사를 BMG로 옮기면서 [Emancipation(해방)]이라는 타이틀의 3CD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적 이후 발표한 [Rave Un2 The Joy Fantastic]은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난 속에 발매된 지 2년도 안 되어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그는 요즘 디지털 시대에 힘 입어 인터넷 상에서 신곡을 발표하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디스코그래피
1978 For You
1979 Prince
1980 Dirty Mind
1981 Controversy
1982 1999
1984 Purple Rain
1985 Around The World In A Day
1986 Parade
1987 Sign O’The Times
1988 Lovesexy
1989 Batman
1990 Grafitty Bridge
1991 Diamonds And Pearls
1992 o( + >
1993 Gold Nigga
1993 The Hits / The B-Sides
1994 1-800-New-Funk
1994 Come
1995 Exodus
1995 The Gold Experience
1996 Girl6
1996 Chaos And Disorder
1996 Emancipation
1998 Crystal Ball
1998 The Truth
1998 Kamasutra
1998 New Power Soul
1999 The Vault… Old Friends 4 Sale
1999 Rave Un2The
1999 Crystal Ball [Limited Edition]
2001 The Beautiful Experience [Bellmark]
2001 The Rainbow Children
2002 One Nite Alone…Live!
2004 Musicology
2004 The Chocolate Invasion
2004 The Slaughterhouse
2006 3121
2007 Planet Earth
2009 Lotusflow3r
2009 MPLSound
2010 20Ten
2014 Plectrumelectrum
2014 Art Official Age
2015 HITnRUN Phase One
2015 HITnRUN Phase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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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챌 프린스 게시판
드림위즈 Prince 소개
Online Fan Community

Pretenders, The

Pretenders Dec 81.JPG
“Pretenders Dec 81” by Ohconfucius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미국 태생의 여성락아티스트, 크리시 하인드(Chrissie Hynde : 심플마인즈 짐커의 아내)가 이끄는 4인조 뉴웨이브 그룹 프리텐더즈의 탄생은 1979년에 이루어졌다. 수준높은 평론과 날카로운 비평으로 유명한 영국 팝계의 유력지 NME(New MusicalExpress)에서 음악평론을 쓴 바 있는 크리시 하인드는 1952년생으로 어릴 때부터 영국을 동경하여 1973년 고향인 아크론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생계 유지를 위해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그녀는 우연히 NME지의 기고가 닉크 켄트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그의 추천으로 NME지에 글을 쓰게된 크리시는 날카로운 비평으로 인정받게 되고 오래지 않아 그녀 사진이 직접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녀는 독자적인 레코드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던 데이브 힐의 눈에 띄어 그의 후원 아래 멤버들을 모아 1979년 프리텐더즈를 조직하였다. 그 해 말 이들은 싱글 Stop Your Sobbing과 Brass In Pocket을 발표하였다.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이들에게 시련이 닥쳐오는데 80년 6월 키타를 담당했던 James Scott이 갑자기 사망하더니 81년에는 그룹을 탈퇴했던 Peter Pardon역시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러한 와중에 크리시는 딸을 출산하였고 싱글로 발표한 Back On The Chain Gang이 미국 챠트 5위까지 랭크되는 히트곡이 되었다. 이들 음악의 특징인 전형적인 뉴웨이브 싸운드에 60년대 말의 순수했던 락과 리듬앤블루스를 적절히 가미시킨 로맨틱한 싸운드를 구사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크리시 하인드의 청량감있는 보컬과 깔끔한 연주가 이러한 그들의 싸운드를 잘 뒷받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디스코그래피
1980 Pretenders (Sire)
1981 Pretenders II (Sire)
1984 Learning to Crawl (Sire)
1986 Get Close (Sire)
198 The Pretenders Live (Warner)
1990 Packed! (Sire)
1994 Last of the Independents (Sire)
1995 The Isle of View [live] (Warner)
1999 Viva el Amor (Warner)

링크
팬페이지
Archives Cool

Police,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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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ng ThePolice 2007” by Lionel Urman – Lionel Urman via email.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팝/록에 레게(Reggae)를 가미, 펑키(punky)한 사운드로 최고의 트리오로서 호평받는 그룹이 바로 폴리스(Police)다.Stewart Copeland와 Sting (b. Gordon Sumner)은 1977년 폴리스를 결성하였다. 밴드를 결성하기전 CIA 에이전트의 아들이었던 스튜어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영국으로 이주하기 전 그는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Curved Air와 잠시 함께하기도 했었다. 스팅은 교사생활을 하는 한편 째즈락 밴드 등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두 뮤지션은 한 로컬째즈클럽에서 만나서 키타리스트 Henry Padovani와 함께 프로그레시브 밴드를 조직하기로 했다. 처음 몇달동안 그룹은 런던의 펍에서 연주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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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Summers Marseille 2008” by JosuéJacob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1977년 후반 그룹은 그들의 첫싱글 Fall Out을 발매하였고 인디씬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패도바니는 첫싱글 Fall Out의 발매이후 앤디섬머즈(Andy Summers)로 교체되었다. 섬머즈는 이전에 애니멀즈의 두번째 라인업에서 활동하기도 한 실력파였다.1978년 봄, 폴리스는 A&M과 계약을 맺고 Roxanne를 발표했지만 챠트 진입에는 실패하였다. 그룹은 데뷔앨범도 없이 미국 공연을 강행했다. 빌린 차를 타고다니며 빌린 악기로 연주를 강행한 그룹의 첫앨범 Outlandos D’Amour이 1978년 가을 발매되었고 슬금 슬금 영국챠트와 미국챠트에 등장했다. 79년 재발매된 Roxanne는 영국챠트 12위까지 올랐다.이어진 앨범 Reggatta de Blanc에서는 싱글 Message in a Bottle이 영국챠트에서 4주간 1위에 머무는 대히트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그룹은 영국과 유럽에서 확실한 스타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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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wart Copeland Marseille 2008” by JosuéJacob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그들은 이어 서구 아티스트의 공연을 흔하게 접할 수 없는 태국, 인도, 멕시코, 그리스, 이집트 등을 돌며 그들의 음악을 전파하였다. 1980년 가을 발매된 Zenyatta Mondatta를 통해 폴리스는 북미 지역에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다. 이 앨범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탑10 진입에 성공하였고 영국에서는 4주 동안 1위에 올랐다. 앨범에 수록된 De Do Do Do, De Da Da Da라는 재밌는 제목의 싱글이 히트하였고 1981년 그들은 프로듀서 Hugh Padgham과 함께 네번째 앨범을 제작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Ghost in the Machine은 1981년 가을 발매되었다. 이 역시 영미 챠트의 1위를 기록하였고 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이 크게 히트하였다.1980년과 1981년의 눈부신 활동 덕택에 그들은 브릿어워드에서 최우수 영국 그룹에 선정되었고 세 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룹은 1982년에 휴식기를 가졌다. 각각의 멤버들은 이 시기에 각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스팅은 Spread a Little Happiness라는 싱글을 발매하여 영국에서 히트하였고 코폴랜드는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Rumble Fish의 영화음악을 맡았다. 섬머즈는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녹음하였다.1983년 폴리스는 그들 최고의 걸작 Synchronicity와 함께 돌아왔다. 이 앨범에는 미국챠트 1위에 8주간이 머문 최고의 히트곡 Every Breath You Take와 연속된 히트곡 King of Pain, Wrapped Around Your Finger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에서 멀티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엄청난 히트를 쳤다. 폴리스는 여세를 몰아 공연에 돌입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그룹은 안식일을 선언했다.그러나 이 “안식일”동안에멤버들간의 불화가 이어졌다. 그들은 한동안 함께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다.

스팅은 째즈에 기반을 둔 솔로활동에 착수하였고 1985년 Dream of the Blue Turtles를 발매하였다. 그 앨범은 국제적인 히트를 기록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더더욱 밴드활동으로의 복귀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코폴랜드는 1985년 월드비트를 추구하는 The Rhythmatist를 발매하고 영화음악과 TV주제가 등을 작곡했다. 그는 나중에 팝록밴드 Animal Logic을 조직하였다. 섬머즈는 아트락과 째즈퓨전 등 실험적인 음악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따금씩 Fripp과 John Etheridge와 함께 음악활동을 진행하였다.이후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걸쳐 우리는 이 재기발랄한 세명의 멤버가 함께 모여 만든 음악을 접할 수 없었다. 80년대를 압축적으로 살아간 폴리스는 멤버 각각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이 화학적으로 훌륭하게 녹아들어간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 밴드에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음악이 시대적 조류와 함께 펑크락으로 분류되었다는 재밌는 사실때문에 이들은 단순히 펑크락으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측면이 있다. 음악사조상으로 팝과 락, 그리고 레게를 가장 훌륭하게 접목시킨 이들의 음악에는 펑크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젊은이의 분노와 저항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으며(펑크가 음악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스팅을 비롯한 각각의 멤버들이 오늘날 훌륭한 솔로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실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디스코그래피
1978 Outlandos d’Amour A&M
1979 Reggatta de Blanc A&M
1980 Zenyatta Mondatta A&M
1981 Ghost in the Machine A&M
1983 Synchronicity A&M
1995 Live A&M

링크
stingchronicity.co.uk
stingetc.com
Police/Sting Links
Sting의 영화활동

Parker, Gra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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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ham Parker” by Robman94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Graham Parker는 ’70년대 초반 영국의 펍록(Pub-Rock)씬에서 활동한 싱어쏭라이터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아티스트 중 하나이다. Van Morrison과 Rolling Stones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Parker는 락앤롤과 포크락에 냉소과 분노가 섞인 자신만의 열정과 뒤섞어 새로운 휴전스타일을 창조해냈다. 그의 앨범들은 펍록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매력적인 그만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고 스타가 되려 노력하지 않았고 이어서 등장한 Elvis Costello의 존재에 의해 그의 존재가 가리워졌다. 여러 이상한 직업을 전전했던 Parker는 진지하게 음악적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여러 펍록 밴드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1975년 그는 데모테잎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자신을 시장에 내다팔기로 결심했다.

1975년 새로운 인디라벨인 Stiff의 공동설립자인 Dave Robinson은 Parker의 데모테잎을 듣고는 이 쏭라이터에게 The Rumor라는 백밴드를 조직하도록 격려했다. Robinson은 곧 키타리스트 Brinsley Schwarz, 키보디스트 Bob Andrews, 키타리스트 Martin Belmont, 드러머 Steve Goulding,베이시스트 Andrew Bodnar 등 펍록씬에서 활동하던 몇몇 스타들을 불러모았다. DJ Charlie Gillett의 도움으로 1975년말 Mecury와 레코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새로이 조직된 밴드는 Nick Lowe의 프로듀스로 데뷔앨범 제작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앨범 Howlin’ Wind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다. 두번째 앨범 Heat Treatment의 이어진 찬사에도 불구하고 Parker는 Mecury에 불만이 쌓여갔다. 그는 회사가 그의 앨범의 홍보를 게을리 했다고 여겼다. 세번째 앨범 Stick To Me는 결국 앨범발매 예정일 전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다시 녹음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Parker는 그와 비슷한 음악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Elvis Costello에 의해 그의 존재가 가리워 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마침내 Parker는 Mecury와의 계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1978년 여름 라이브 더블앨범을 발매했다. 그리고는 이어진 Mecury와의 분쟁후에 Arista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후 처음 발매한 앨범은 그의 전 소속사를 드러내놓고 욕한 Mecury Poisoning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다.

이어진 앨범 Squeezing Out Sparks – Nick Lowe가 어떤 형태로든지 앨범제작에 관여하지 않은 첫앨범 – 는 또다시 평론의 극찬을 받았다. 싱글 Local Girls역시 래디오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이 앨범은 미국 챠트 40위안에 들었고 2백만 카피 이상이 팔리는 등 그의 가장 앨범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앨범이 되었다. Parker가 드디어 메이저로 입성하는 듯 했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진 앨범 The Up Escalator은 팔리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Parker는 The Rumor를 해체하기로 맘먹었다. 1982년 Another Grey Area에서 그는 Jack Douglas를 프로듀서로 고용하고 세션뮤지션들을 활용했다. 엇갈린 비평을 얻은 이 앨범은 간신히 챠트 51위까지 올라갔다. 이어진 앨범들도 비슷한 처지였다.

Parker는 The Shot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백밴드와 함께 Elektra 레코드사로 옮겼다. 그리고 Wake Up(Next To You)가 탑40에 올랐는데 이 곡이 그의 유일한 챠트 히트곡이다. 앨범 역시 챠트에 Squeezing Out Sparks가 머물러 있던 만큼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는 Elektra와 트러블이 생겼고 그는 재빨리 Atlantic으로 옮겼지만 여기서 그는 싱글 한장도 내놓지 못하고 만다. Parker는 결국 1988년까지 또다른 앨범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RCA와 계약을 체결하고서야 The Mona Lisa’s Sister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 앨범에서는 Get Started(Start a Fire)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그의 시대가 다시 오는 듯 하였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이어진 앨범들은 호의적인 평에도 불구하고 챠트의 끝자락만 붙잡고 늘어졌다. 결국 그는 소위 컬트라는 수식어가 노상 따라다니게 될 판이었다. 1992년 Capitol로 소속사를 바꾼 그는 Burning Questions를 내놓았고 이 역시 무시당했다.

90년대에도 Parker는 인디라벨에서 꾸준히 앨범활동을 펼쳐나갔다.

Punk77의 Garam Parker소개

디스코그래피

1976 Howlin Wind Mercury
1976 Heat Treatment Mercury
1977 Pink Parker Mercury
1977 Stick to Me Mercury
1978 The Parkerilla/Live Mercury
1979 Mercury Poisoning Arista
1979 Squeezing out Sparks Arista
1980 The Up Escalator Razor & Tie
1982 Another Grey Area Razor & Tie
1983 The Real Macaw Razor & Tie
1985 Steady Nerves Elektra
1988 The Mona Lisa’s Sister Buddha
1989 Live! Alone in America RCA
1990 Human Soul Diablo
1991 Struck by Lightning Diablo
1992 Burning Questions Diablo
1993 Live Alone! Discovering Japan Gadfly
1995 Old Grey Whistle Test Series [live] Alex
1995 12 Haunted Episodes Razor & Tie
1995 Live on the Test Windsong
1996 Live from New York, NY Razor & Tie
1996 Acid Bubblegum Razor & Tie
1997 The Last Rock N Roll Tour [live] Razor & Tie
2001 That’s When You Know Polygram

링크

grahamparker.net

Orange Juice

스코틀랜드의 네오팝의 중심에 섰던 Orange Juice는 1976년 글래스고에서 처음 결성되었다. 당시 밴드의 이름은 Nu-Sonics였는데 보컬과 키타를 맡았던 Edwyn Collins, 키타 James Kirk, 베이스 David McClymont, 드러머 Steven Daly 등으로 구성되었다. 1979년 이들은 이름을 Orange Juice로 바꾸고 Collins의 제자격인 Alan Horne이 설립한 레이블 Postcard의 선봉에 서게 된다. 당시 이들은 펑크의 마초적인 공격성에 대한 거부감을 표하며 로맨티시즘과 인디펜던트팝의 적극적인 옹호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80년의 데뷔싱글 “Falling and Laughing” 은 “Blueboy,” “Simply Thrilled Honey”, “Poor Old Soul” 등의 싱글이 연속으로 발표되었다. 곧 정식 데뷔앨범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Orange Juice는 Postcard를 떠나 Polydor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1982년 You Can’t Hide Your Love Forever라는 이름의 데뷔앨범 발표후 Josef의 Malcolm Ross가 그룹에 가입하였다. 이로 인해 그룹멤버는 다소간의 조정을 거쳐야 했다. 이와중에 Zimbabwe 태생의 드러머 Zeke Manyika가 그룹에 가담하였는데 이로 인해 Collins는 보다 새롭고 휴전적인 팝과 블루아이드쏘울을 실험해볼만한 공간을 갖게 되었다. 1982년 Rip it Up은 앞선 작품보다 보다 야심적인 작업이었다. 이 앨범에는 “I Can’t Help Myself”와 같은 모타운 싸운드에 대한 존경어린 작품에서부터 에너지틱한 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이 선보였다. 그러나 뒤이은 작품들은 챠트에 진입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Polydor와 그룹사이에 불화가 잦아지게 되었다. 결국 Ross와 McClymont가 그만두었고 그룹은 Collins와 Manyika의 듀오의 형태로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레게 프로듀서인 Dennis Bobell와 함께 1984년 EP Texas Fever를 녹음하였다. 몇번의 변변찮은 공연후에 Collins와 Manyika는 스튜디오로 돌아와 The Orange Juice를 녹음하였다. 싱글들은 챠트진입에 실패하였고 Polydor는 Collins를 뺀채 Manyika의 솔로활동을 시도하였다. 1995년 “A Girl Like You”에 이르러서야 Collins의 상업적 성공이 한번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디스코그래피
1982 You Can’t Hide Your Love Forever [Polydor]
1982 Rip It Up [Polydor]
1984 The Orange Juice [Polydor]

링크
에드윈 콜린스 인터뷰
Discography
Edwyn Collins에 관한 글
Rip It Up 뮤직비디오

Oingo Boingo

Oingo Boingo in 1987. From left to right: Dale Turner, Sam "Sluggo" Phipps, John Avila, Steve Bartek, Danny Elfman, Johnny "Vatos" Hernandez, Mike Bacich, Leon Schneiderman.
By MCA Records – Ebay Listing Front: No Watermark BackArchives: Front Back Front Watermarked, Public Domain, Link

Oingo Boingo(Boingo로도 알려진)는 남캘리포니아에서 결성된 뉴웨이브 밴드이다. 그들의 음악은 사실 어느 한 스타일로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Ska, Funk, Country, Jazz 등 다양한 음악스타일에 복잡한 리듬과 기이한 가사를 오버랩시키는 등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해내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 특히 관악기를 아주 유머러스하게 사용하였는데 필자에게는 이점이 아주 매력적이다 – 이러한 음악적 역량은 주로 밴드의 핵심인 Danny Elfman의 독특한 취향과 뛰어난 음악적 능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이후 10장의 정규앨범을 녹음한 그들의 역사는 Danny의 형인 Richard Elfman(영화배우이자 감독)이 자신의 영화 Fobidden Zone의 음악작업을 위해 1978년 The Mystic Knights of The Oingo Boingo – Oingo Boingo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들이 창조해낸 단어이다 – 란 희한한 이름의 밴드를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그룹은 얼마가지 않아 해체되고 Danny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그룹을 조직하고 1980년 데뷔앨범의 발표를 위해 이름을 Oingo Boingo로 간단히 줄여 사용하게된다. 이후 1994년의 셀프타이틀 앨범 발매후에는 아예 Boingo로 더욱 줄여 사용하기도 하는 등 이름부터도 그들의 변덕스러운 재기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의 기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데 이들은 매년 할로윈마다 공연파티를 갖는가 하면, 사용하는 악기도 전통적인 악기에서 그치지 않고 쓰레기통, 차바퀴 덮개 등 비전통적인 악기(!)들을 이용하는 등 퍼포먼서적인 취향을 한껏 드러냈다. 이러한 그들의 독특한 스타일로 말미암아 얼마가지 않아 그들에게는 일종의 컬트팬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Oingo Boingo의 메인스트림으로의 진입은 1985년 발표된 앨범 “Dead Man’s Party”의 타이틀트랙이 탑40에 진입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 그들이 의도하였든 또는 의도하지 않았든 – 1987년의 Boi-ngo에서는 또다시 열광적인 그들만의 컬트팬에게로 복귀하였다. Oingo Boingo는 또한 영화 사운드트랙 작업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는데 1986년작인 Weird Science의 주제가를 불러 큰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이 성공으로 인해 Danny Elfman은 영화와 TV의 음악작업 – Simpsons의 주제가 역시 그의 작품인것 아시죠? – 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만의 사이드프로젝트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그의 열성팬이었던 Tim Burton과의 오랜 공동작업과 우정은 꽤 유명하다. 결국 Danny는 영화음악 작업에 온힘을 쏟기 위해 ’90년 Dark at the End of the Tunnel 발표이후 그룹을 떠나게 된다. 이후 앞서 말했다시피 밴드 이름을 Boingo라 줄이고 셀프타이틀 앨범을 발표하였던 그들은 결국 1995년 공식적으로 해체하였다.

디스코그래피

1980 10 Inch EP IRS
1981 Only a Lad A&M
1982 Nothing to Fear A&M
1983 Good for Your Soul A&M
1985 Dead Man’s Party MCA
1987 Boi-ngo MCA
1988 Boingo Alive MCA
1990 Dark at the End
of the Tunnel MCA
1994 Boingo Giant
1996 Farewell [live] A&M

링크

Oingo Boingo
FAQ

Fan Page
Oingo Boingo Tattoos

Nena

Sommernachtstraum MUC 2013 11.JPG
“Sommernachtstraum MUC 2013 11” by Michael Movchin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Commons.

1980년 흥행에 실패한 단 한장의 앨범을 낸채 해산해버린 The Stripes의 보컬리스트였던 Nena Kerner는 Berlin에서 새로운 밴드 Nena를 조직하였다. 데뷔싱글 “Nur Getr?mt”는 독일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독일어 버전으로 발매된 두번째 싱글 “99 Luftballons”은 1984년 미국에서 엄청난 반응을 얻었고 국제적으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경쾌한 키보드 사운드와 강렬한 락비트가 인상적인 이 곡은 특히나 반핵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는 이미지를 풍기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의 앨범판매는 지지부진했고 결국 1987년 밴드는 해산하였다. 1989년 이후 Nena는 그녀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을 내놓으며 솔로 활동을 지속시켜나갔다. 또한 아이들을 위한 일련의 앨범들도 내놓거나 독일의 TV에 정기적으로 출현하는 등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Members : Nena Kerner(V), Carlo Karges(G), Uwe Fahrenkrog-Petersen(K), J?gen Dehmel(B), Rolf Brendel(D)

디스코그래피
1983 Nena Epic
1984 Fragezeichen CBS
1984 International Album CBS
1984 99Luftballoons Epic
1985 It’s All in the Game Epic
1985 Feuer Und Flamme CBS
1986 Eisbrecher CBS
1989 Wunder GeschechenEpic/CBS
1990 Komm Lieber Mai (Songs For Children)CBS
1992 Bongo Girl Alex
1994 Und Alles Dreht Sich RMG
1995 Nena Live (1995) RMG
1995 Unser Apfelhaus Polydor
1996 Nena Und Die Bambus B?en Bande Polydor
1997 Jamma Nich Polydor
1997 Nena’s Weihnachtsreise Polydor
1998 Nena Live (1998) Polydor
1998 Wenn Alles Richtig Ist Dann Stimmt Was Nich Polydor
1999 Nena Macht Rabatz Polydor
2000 Nena Macht Rabatz Polygram

링크
Official 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