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엊저녁에 넷플릭스에서 감상하다가 말다가 했던 다큐멘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봤다.  바로 바오 능옌(Bao Nguyen)이라는 감독의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원제 : The Greatest Night in Pop)』이라는 제목의 2024년 다큐멘터리다. 대체 어떤 밤이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일까? 팝 평론가나 팝 애호가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가리키고 있는 밤은 1985년 1월 28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날 밤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밤이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이라는 것일까? 세상에 수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일단 팝 역사에서 바라보자면 그날은 팝 음악 산업계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제12회 아메리칸뮤직어워즈(American Music Awards)』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슈라인 오디토리엄(Shrine Auditorium)이라는 곳에서 열린 날이란 것이 첫 번째 단서다. 매우 유력한 단서다.

그런데 ‘아메리칸뮤직어워즈 중요한 행사인 것은 알겠는데 특별히 1985년에 열린 그 행사가 그렇게나 중요해서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인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정답은 ‘아메리칸뮤직어워즈 말고 그다음에 있었던 이벤트’다. 그것은 바로 시상식이 열렸던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A&M 스튜디오에 미국의 아티스트들이 함께 모여 We Are The World라는 곡을 녹음한 바로 그 밤을 말하는 것이다.

We Are The World라는 곡은 80년대 팝 팬이라면 이미 익숙한 곡이다. 이 곡은 이미 1년 전에 붐타운래츠의 프론트맨 밥 겔도프가 아프리카, 특히 에티오피아 인민의 굶주림 등 비참한 삶을 보도한 BBC 프로그램에서 감화받아 팝 뮤지션을 모아 녹음한 Do They Know It’s Christmas?에1 영감받은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가 팝계의 거물 매니 켄 크라켄(Ken Kraken)에게 제안한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곡이었다.

위대한 흑인 음악 뮤지션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였던 해리 벨라폰테는 영국에서의 기획을 보고 아프리카에서의 비극을 아프리카 계열의 뮤지션이 많은 미국의 팝 음악계가 외면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아프리카를 돕기 위한 유사한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이었다. 이 결과 켄 크라켄의 인맥이 작용하면서 초기에 라이오넬 리치, 마이클 잭슨, 퀸시 존스와 같은 팝계의 거물이 합류하여 프로젝트에 살을 붙여 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 레코드사의 기획자들이 달라붙어 뮤지션들을 어렵게 섭외하는 등, 다큐멘터리에서 묘사하는 수많은 난관을 거치면서 마침내 “위대한 밤” 동안에 탄생한 곡이 바로 We Are The World다. 특별히 그 밤이 아메리칸뮤직어워즈가 열린 밤이었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나마 그날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활동하는 미국의 거물급 뮤지션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최적의 날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날 밤 어떠한 우여곡절 끝에 곡의 녹음을 완성할 수 있었는지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화면으로만 봐도 가슴이 벅찰, 당시 팝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던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그 좁은 스튜디오에 모여 노래를 완성하는 과정이 당시 촬영한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그날에 관한 훗날의 인터뷰 중에도 쉴라 이(Sheila E.)2의 인터뷰가 마음 아팠는데3 아무튼 나머지 가수들의 고생도 나름 다 의미가 있었다.4

이 기획에 대한 사견을 말하자면 해리 벨라폰테가 위대한 인물이고 – 심지어 맑스주의자라는 설도 강하고 – 이 기획이 결코 만만한 기획이 아니었음은 분명함에도 그 한계는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밴드에이드 자체도 그렇지만 이 기획 역시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일세계의 셀럽들이 제삼세계 인민의 곤궁에 대한 일시적인 시혜적 시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5

그럼에도 1985년 1월 28일이 “가장 위대한 밤” 중 ‘하루’일 수 있다는 사실에는 공감한다. 이를테면 아프리카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영국의 백인 뮤지션 위주로 –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 시작한 프로젝트가 미국의 흑인 뮤지션 위주의 프로젝트으로 – 조금 더 연대의 의미가 강화된 – 진화했다는 의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그 한계를 비춰보면 그게 그것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다큐멘터리를 상기해 볼 때 의미는 절대 만만치 않다.

그 다큐멘터리는 사샤 젠킨스(Sacha Jenkins)가 감독한 2023년 『선데이 베스트 : 에드 설리번 이야기(원제 : Sunday Best)』라는 다큐다. 나 역시도 에드 설리번을 그냥 팝 역사상 초창기의 가장 유명한 버라이어티쇼의 사회자 정도로 생각했지만, 다큐를 본 다음에 알게 된 실상은 엄청났다. 그는 단순한 사회자를 넘어서 팝 음악, 특히 흑인 음악을 주류에 안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일랜드+유태인 계 “백인” 진보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이 다큐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어떤 면에서는 이 다큐멘터리가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의 프리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밤에 활약한 많은 아티스트들은 상당수 에드 설리번의 도움을 받아 그의 쇼에서 데뷔하고 그 뒤 연예계에서 활약했던 이들이다. “위대한 밤”의 당사자 해리 벨라폰테, 스모키 로빈슨,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등이 애드 설리번의 “의식적인” 도움으로 애드의 쇼에 출연하면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에드는 처음에 신문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스포츠 관련 칼럼을 쓰면서 그 당시 업계에 만연해 있던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칼럼을 쓴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연예계 행사의 사회를 보던 그는 새로운 매체인 TV쇼에서의 호스트로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이 쇼가 바로 그의 이름을 단 애드 설리번 쇼였고, 이 쇼는 앞서 언급했듯 유색 인종에게 전국구 데뷔의 기회를 마련해주면서 미국 팝 음악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쇼가 된다.

요컨대, 서구권의 팝 음악계에서 – 또는 다른 예체능계도 그렇지만 – 어쩌면 어쩔 도리 없이 선각자적인 백인의 도움을 받아 유색 인종이 업계에 진출하는 시기가 있었다.6 그중 가장 적극적인 선각자 중 하나가 바로 에드 설리번이었고, 그의 도움을 통해 연예계에서 기반을 다진 이들이 1980년대 마침내 이제 유색인종인 본인들의 기획으로 마음의 고향인 아프리카 등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이 바로 We Are The World였던 것이다.

당신은 그날이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가?

  1.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 기획에 참여한 대다수의 뮤지션들이 백인 뮤지션이었다는 점인데, 특별히 기획자들이 이러한 인종적 비율을 의식했다기보다는 그냥 영국 팝 음악계가 그렇게 이미 편성되었던 측면은 분명하다. ↩
  2. 쉴라 이는 아메리칸뮤직어워즈에서 생애 최고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
  3. 즉, 요지는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들은 사실 쉴라 이가 아닌 프린스를 무대에 초청하고 싶은 마음에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쉴라 이를 떡밥으로 부른 것이었다.(는 것이 쉴라 이의 생각이고 이는 거의 정설일 것이다) 그런데 “Check Your Ego At The Door”라고 퀸시 존스가 스튜디오에 써 붙여 놓을 만큼 강한 에고를 가진 이들이 한 번에 모인 그날 밤에서도 특히 프린스는 너무 에고가 강한 이였고, 라이오넬 리치에 따르면 그는 “별도의 녹음실에서 별도의 기타 솔로”를 요구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그날 그 에고 강한 밥 딜런도 시큰둥한 표정을 하면서도 나머지 뮤지션들과 끝까지 한 방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날은 그냥 쉴라 이 홀로 미니애폴리스 사단의 일원으로서의 참가에 의의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획자들이 프린스의 솔로 파트로 염두에 두고 있던 파트는 잔뜩 긴장한 휴이 루이스(Huey Lewis)에게 돌아갔고, 그는 이 파트를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
  4.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솔로 파트는 신디 로퍼(Cyndi” Lauper)의 파트다. 다큐에서 신디 로퍼 파트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 이유가 허탈하면서도 재밌다. ↩
  5. 그래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진행된 중 가장 급진적인 프로젝트는 인종차별 정권에 저항하는 남아공의 진보 세력과 연대한다는 의미를 지닌 Artists United Against Apartheid의 Suncity였다 ↩
  6. 예를 들면 방탄소년단이 지미 팰런 등과 같은 미국 주류 토크쇼의 백인 진행자의 도움 없이 미국 주류 음악에 편입할 수 있었을까? ↩

Bad

1987년 8월 31일 Michael Jackson의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Bad”가 에픽 레코드사를 통해 출시되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Quincy Jones와 Michael Jackson이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1987년 1월 5월부터 7월 9일까지 할리우드에 있는 웨스트레이크 오디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전의 작품 “Thriller”가 워낙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에 “Bad”가 나오기까지는 무려 5년이 소요될 정도로 제작팀은 신중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LP에는 열 곡, CD에는 열한 곡이 담긴 이 앨범은 거의 Jackson이 다 쓰다시피 한 60곡 중에서 추려진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60곡 중에서 30곡이 녹음되었고, 선정된 열한 곡 중에서 아홉 곡이 Jackson의 작품이다. “Bad”의 사전 프러덕션은 1986년 11월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세션은 이듬해 1월 5일 시작한다. 이 앨범은 Jackson의 앨범으로는 최초로 모든 녹음, 믹스, 마스터가 디지털 레코딩 설비로 이루어졌다. 앨범이 출시된 초기에 비평가들은 앨범이 다소 실망스럽다고 혹평하였다. 하지만 이런 혹평과 전작의 성공에 대한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Bad”에서는 아홉 개의 싱글이 발매되었고, 이중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Another Part Of Me”, “Dirty Diana” 등이 인기를 얻었다. 이 히트곡 중 다섯 개의 곡이 빌보드 핫100 정상을 차지했는데,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는 앨범은 두 개뿐이다.1 빌보드 탑200 차트 정상에 올라 6주간 머문 앨범의 판매량은 전 세계적으로 3천만 장 이상 팔렸다. 그래미상 시상식에서는 여섯 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Leave Me Alone” 트랙에 대해 베스트 단편 비디오(Best Short Form Video) 부문과 베스트 엔지니어 녹음(Best Engineered Recording) 부문(수상자 Bruce Swedien) 등 두 개의 상을 수상하였다. 발매 당시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비평가는 생각을 바꾸어 이 앨범을 가장 위대한 앨범의 반열에 올려주었다. VH1은 2009년 MTV세대의 가장 위대한 1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43위에 선정하였고 롤링스톤은 역대 가장 위대한 500개의 앨범에서 이 앨범을 202위에 선정하였다.

1. “Bad”
2. “The Way You Make Me Feel”
3. “Speed Demon”
4. “Liberian Girl”
5. “Just Good Friends” (featuring Stevie Wonder)
6. “Another Part of Me”
7. “Man in the Mirror”
8. “I Just Can’t Stop Loving You” (featuring Siedah Garrett)
9. “Dirty Diana”
10. “Smooth Criminal”
11. “Leave Me Alone” (CD버전과 디지털 다운로드로만 가능)

  1. 또 하나의 앨범은 Katy Perry의 2010년 앨범 Teenage Dream. ↩

Beat It

“Beat It”은 Michael Jackson의 가수 경력을 통해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적이었던 앨범 Thriller에서 커팅되어 1983년 2월 3일 세 번째로 싱글로 출시된 곡으로 Billie Jean과 함께 Jackson의 싱글 중 가장 인지도 높은 곡으로 남게 되었다. 롤링스톤은 이 곡을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500곡’ 중 344위에 선정하여 음악적 중요성 역시 인정을 받았다. 이 곡은 특이하게도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베스트 남성 락보컬 퍼포먼스’를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Eddie Van Halen이 간주에서 유명한 기타 솔로를 선보인 덕이 크다.

“Beat It”은 Michael Jackson이 작곡하고 Quincy Jones가 프로듀스를 맡은 곡이다. Jackson은 이 곡의 장르 성격에 대해 이전에 언급하지 않았으나 Jones는 이 곡을 The Knack의 “My Sharona”와 같은 락음악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Jones는 Eddie Van Halen에게 기타 솔로를 부탁한다. 놀랍게도 Halen은 밴드의 다른 멤버 등 다른 사람들이 다들 어이없어 했는데도 무보수로 기타를 쳐줬다. 곡의 유명한 인트로는 Synclavier의 메이커가 1981년 내놓은 “The Incredible Sounds of Synclavier II”라는 데모LP에서 빌어 왔다.

에픽 레코드사의 부사장인 Frank DiLeo는 “The Girl Is Mine”과 “Billie Jean”의 성공을 보고 “Beat It”의 성공을 확신한다. 그의 예감대로 “Beat It”은 “Billie Jean”과 동시에 탑5에 오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7주 동안 1위를 차지했던 “Billie Jean”이 The Dexys Midnight Runners의 “Come On Eileen”에 의해 1위 자리를 뺏겼지만 1주 후 “Beat It”이 바로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여 3주간 정상에 머물렀다. 이 곡은 또한 빌보드 R&B 싱글 차트에서도 1위를 기록한다. 이 곡의 장르는 락이자 R&B인 셈이다.

“Beat It”의 가사는 패배와 용기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don’t be a macho man”이란 부분은 Jackson이 얼마나 폭력을 싫어하는지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유명한 뮤직비디오에서 더욱 명확히 전달되고 있다. Bob Giraldi가 감독한 이 작품에서 Jackson은 칼로 승부를 내려는 갱단 사이를 화해시키고 군무를 추는 장면으로 평화를 노래한다. 한편으로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연상시키는 이 뮤직비디오는 Jackson의 Billie Jean 비디오와 함께 흑인 음악이 MTV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뮤직비디오
The Incredible Sounds of Synclavier II 의 인트로 원음 듣기

Thriller

The cover has Jackson reclining in a white s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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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은 1979년 솔로 앨범 Off the Wall로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팝, R&B, 락, 포스트디스코, 펑크(funk), 어덜트컨템포러리의 장르가 골고루 배합된 이 앨범은 Stevie Wonder, Paul McCartney, David Forster, Quincy Jones 등이 프로듀서와 작곡가 등으로 가세하여 전 세계적으로 2천만장이 판매된 블록버스터였다. 이 때문에 Michael에게는 새 앨범에 대한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새 앨범 Thriller는 이러한 배경 하에 이전 앨범 발표로부터 3년 만인 1982년 11월 30일 발매되었다.

프로듀서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Quincy Jones가 주로 맡았고 Michael도 일부 곡들에서 프로듀서로 가세했다. 아홉 개의 트랙 중에서 Michael이 네 개의 곡을 썼고 James Ingram, Rod Temperton 등이 작곡진에 가세했다. 녹음은 1982년 4월에서부터 11월까지 LA에 있는 웨스트레이크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예산은 약 75만 달러가 소요된 값비싼 앨범이다. 앨범 수록곡 중 “Baby Be Mine“과 “The Lady in My Life”를 제외한 일곱 개의 트랙이 싱글로 발매되어 전곡이 빌보드 핫100 차트 10위 안에 올랐다.

앨범은 현재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략 5천1백만 장에서 6천5백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1984년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이 앨범은 ‘이 해의 앨범’을 포함하여 8개 부문을 수상한다. 이러한 성과는 Michael Jackson이 인종적인 음악 장벽을 뛰어넘는데 큰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Michael Jackson은 이제 ‘백인이 좋아하는 흑인음악’을 넘어 ‘누구나 좋아하는 팝음악’을 만드는 흑인음악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악관에 가서 당시 美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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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thriller” by Poolparty. Licensed under Wikipedia.

Thriller에서의 군무장면

실제로 Michael Jackson은 대중음악계에서조차 공공연한 인종차별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는 전작 Off The Wall이 ‘이 해의 앨범’에 선정되지 못한 것에 화를 냈다고 한다.(아마도 인종차별적 이유로) 결정적으로 Michael은 롤링스톤誌에 자신을 커버스토리로 다룰 의향이 있는지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나는 끊임없이 흑인을 커버로 하는 잡지는 팔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다려. 그 잡지들이 내게 인터뷰를 구걸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실제로 Michael이 인터뷰를 구걸하는 잡지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MTV의 등장과 이 매체의 활용은 Thriller의 성공에 큰 기여를 한다. 1981년 ‘런던에서의 미국인 늑대인간’이라는 공포물을 내놓은 John Ladis는 Thriller의 감독을 맡아 마치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서사구조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큰 인기를 얻었다. “Billie Jean”이나 “Beat It” 역시 현란한 무용과 재미있는 스토리 덕택에 MTV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1 이것은 또 하나의 인종차별에 대한 승리였다. MTV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부인하였지만 어쨌든 Michael 의 성공이 흑인음악 비디오 방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앨범은 최초로 구입한 LP다. Thriller의 전주에서의 발걸음 소리를 스테레오로 들으면서 전율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아시아의 어린 소년이 흑인가수의 앨범을 살 생각을 했을까? 그의 음악이 아니었더라면 1984년 발표된 더 걸쭉한 흑인음악 풍의 팝음악인 Prince의 Purple Rain이 그런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일부 의식 있는(?) 비평가는 Michael Jackson의 이 앨범이 지나치게 “백인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백인 위주의 시장에겐 또 하나의 흑인음악이었을 뿐이다.

1. “Wanna Be Startin’ Somethin’”
2. “Baby Be Mine”
3. “The Girl Is Mine” (with Paul McCartney)
4. “Thriller”
5. “Beat It”
6. “Billie Jean”
7. “Human Nature”
8. “P.Y.T. (Pretty Young Thing)”
9. “The Lady in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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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히 “Beat It”에서의 군무(群舞)는 Michael의 죽음 후 기획된 한 프래쉬몹에서의 소재가 되는 등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

Ai No Corrida

Quincy Jones는 다른 아티스트들을 위해 많은 노래들을 작곡하고 프로듀스했지만, 이 곡은 자신이 직접 연주한 곡이다. 이 이상한 제목은 일본영화 “감각의 제국(In The Realm Of The Senses)”에서 따온 것인데, 영화의 오리지날 타이틀이다. Jones가 물론 뛰어난 작곡실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 곡은 그의 작품이 아니다. 이 곡은 Ian Dury and the Blockheads와 함께 일하기도 했던 영국의 Funk/New Wave 뮤지션 Chaz Jankel이 동료 Kenny Young가 함께 만들어 1980년 셀프타이틀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내놓은 곡이다. 이 곡에서 백업 싱어는 Patti Austin, 일렉트릭 피아노 연주는 Herbie Hancock의 솜씨이며, 리드 싱어는 Dune이란 이름의 아티스트다. 오시마 나기사가 감독한 1976년 작 “감각의 제국”은 일본과 프랑스의 합작품이다. 노래 제목은 앞서 말했듯이, 혼란의 시기에 사랑과 육욕에 집착하는 연인의 비극적인 최후를 그린 이 영화의 일본어 타이틀 “愛のコリーダ”에서 따왔다. コリーダ는 스페인어로 투우(鬪牛)를 의미한다. 따라서 타이틀의 의미는 “사랑의 투우”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영어권 사람들은 본뜻과 상관없이 들리는 대로 “ain’t no corridor”, 즉 ‘출구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이 제목을 ‘달아나지 마라(Don’t run away.)’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In the Realm of the Senses.jpg

“In the Realm of the Senses” by The poster art can or could be obtained from Argos Films.. Licensed under Fair use via Wikipedia.

한편 Chaz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그 제목은 영어권에서는 ‘감각의 제국’이라 알려진 한 영화의 일본어 타이틀이다. 영화는 여관주인과 사랑에 빠진 한 하녀의 실화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은 INXS의 리드싱어 마이클 허친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사상태로 몰고 가는 음란행위에 몰두해있었다. 허친스처럼 여관주인은 섹스 하던 중에 죽었다. 하녀는 그의 성기를 잘라, 주머니에 넣은 채 경찰이 그녀를 잡을 때까지 완전히 넋이 나가 거리를 헤맸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녀는 일종의 페미스트적 순교자의 표상이 되었다. 1970년대 후반, 내 머릿속엔 이 멜로디가 들어 있었는데 친구 Pete Van-Hooke가 내게 Ken Young을 소개시켜줬다. 그는 프랑스에서 매년 열리는 음악 컨퍼런스 MIDEM에 날 불렀다. 그리고서는 흥분해서 “Chaz 그 멜로디에 멋진 생각이 떠올랐어! 아이노코리다!” 난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바보같이 대답했다. “아이노후?(I know who?)” 그는 스토리를 설명해주었는데, 솔직히 난 좀 그걸 쓰는 게 불편했다. 난 그냥 그가 어떤 남자 녀석을 그리워하는 소녀, 또는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 써줬으면 했을 뿐이다. 당초 나의 생각과 동떨어져 내 버전은 트랙의 처음에 흥얼거림이 있었는데, 그건 어린 시절 내가 런던 교외에서 들을 수 있는 도로의 윙윙거림과 같은, 자는 중에 듣곤 했던 소리와 같았다. 그 아이디어는 그 이야기에 대해 내가 꿈꿨던 것이다. 그것을 통해 발견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웃음] 난 언제나 그 곡이 엄청 성공할거라는 것을 알았다. 퀸시존스의 비서가 나에게 전화해 존스가 그 곡을 녹음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난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누군가 그 곡을 내 손에서 가져갈 것이란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원문 보기]

결국 Chaz의 설명에 따르면 이곡의 제목을 Ai No Corrida로 정한 이는 공동작곡가 Kenny Young 인 셈이다. Chaz가 당초 10대의 가벼운 사랑이야기를 가사로 하려던 것과 달리 Kenny는 연인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병적인 사랑을 다룬 영화의 제목을 사용하여 곡이 더욱 신비로워지게 하는데 기여한 셈이다(듣는 이들은 제목의 의미를 잘 몰랐지만 어쨌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제각각 의미를 부여했을 테니까). 어쨌든 이 뛰어난 멜로디를 가진 명곡은 이런 사연을 가지고 Chaz와 Kenny의 손을 거쳐 Quincy Jones에 의해 좀 더 남성적인 버전으로 재창조되어 오늘날 최고의 디스코 명곡의 하나로 남게 되었다.

Chaz Jankel 버전
Quincy Jones 버전

참고한 곳들
caution, hot
songfacts.com
wikipedia.org
MUSIC BLOG OF SALTYKA AND HIS FRIE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