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팝

들어가며

일반인 내가 하이텔의 동성애 모임인 “또사모”에 과감하게 가입하기까지는 하나의 작은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음악동호회에서 여름을 맞이한 여름 특집감상회를 어떤 주제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내가 제안했던 ‘게이 아티스트 특집’이 의외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문화적 폐쇄주의 사회라는 것은 철들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부터 체험하고 있었지만 대다수가 X세대라 일컬어지는 20대 초반, 더욱이 외국의 음악을 폭넓게 접해오며 좀더 개방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 그 모임에서마저 “사회에 민감한 문제로 우리 동호회의 이미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반대 주장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충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요보다는 팝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198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뉴웨이브에 매료되었고, 전세계 소녀 팬들의 연인이었던 듀란듀란(Duran Duran), 컬처클럽(Culture Club) 역시 나의 우상이며 연인이었다. 1980년대 뉴웨이브의 유행은 유니섹스(Unisex)의 열풍을 몰고 왔었다. 빨간 립스틱, 짙은 마스카라, 하얗게 화장한 얼굴, 나풀거리는 블라우스 등은 그 당시 뉴웨이브 밴드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0대 초반부터 이러한 뉴웨이브 밴드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동성애에 대한 놀라움이나 반감이 없었다. 계속 음악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많은 영국 아티스트들 중에 상당수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밝히고 난 직후의 매스컴이나 팬들의 반응이 더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팝 음악계 게이 아이콘의 역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장 대표적인 영국의 게이 아이콘(Gay Icon)을 꼽는다면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글램락에서부터 시작한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를 들수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 뚜렷한 윤곽의 얼굴, 짙은 화장,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과감함은 그 당시 기성세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1980년대 뉴웨이브 밴드들에 의해 좀더 과감한 형태로 재창조되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Bisexual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의 국민영웅인 세계적인 슈퍼모델 ‘이만’의 남편이지만 그는 첫번째 부인(첫번째 부인도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과의 사이에서 현재 20대 중반의 장성한 아들을 하나 두고 있기도 하다. 과거 영국의 주간지에 부인과 함께 주말이면 게이 바에 함께 손잡고 들어가서 나올 때는 따로따로 동성 파트너와 손잡고 나와서는 하루 밤을 따로 보낸 후 아침에 집으로 귀가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고, 그의 부인이 남편과 믹 재거(Mick Jagger. 롤링스톤즈 리드보컬)가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기자들에게 토로하기도 할 정도였다. 데이비드 보위와 더불어 동성애자(혹은 이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영국의 거물급 아티스트로는 엘튼 존(Elton John),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그리고 그룹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등이 있다.

1960-70년대의 대표적인 Gay Icon이 데이비드 보위였다면 1980년대에는 ‘여자보다 더 예쁜’ 컬쳐클럽의 보이 조지(Boy George)를 빼놓을 수 없다. 컬쳐(Clture Club)의 드러머와 연인 사이였던 그는 데뷔 후 몇 년간은 공식석상에서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I never sleep with man”이라는 강한 어조로 동성애자임을 적극 부인하고 나섰으나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한 직후의 인터뷰에서 수줍으나 상기된 표정으로 “I love you America! You realize a real drag-Queen when you see one.”라는 한마디 말로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식석상에서 밝힌 셈이 되었다. 후에 그는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힘들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세상에 공개한 후의 홀가분함을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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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bian Angels” by Diricia De Wet from Johannesburg, South Africa – Lesbian Ang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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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의 변화

1980년대 초반의 뉴웨이브가 겉치장을 위주로 음악에 담겨진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보여주는’ 게이 문화를 대표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영국의 synth-pop(일렉트릭 기타, 드럼, 베이스보다는 프로그래밍 된 드럼과 신디사이저를 주로 사용한 팝)을 구사하는 몇몇 게이밴드들은, 외모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노래에 담긴 메시지로서 Gay-pop의 한 주류를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Gay-pop을 정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 자신들과 그 아티스트와 그들의 음악을 추종하는 팬들의 섹슈얼리티에 있다. 아티스트 자신이 게이임을 밝힌 경우 그들의 음악을 gay-pop으로 분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 아티스트의 팬들의 대다수가 게이라면 그들의 음악은 Gay-pop으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예쁜 외모와 매력적인 몸매가 음악성보다 강조되어졌던 소년 그룹(‘테이크뎃’이나 ‘보이존’)들은 멤버들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열광적인 소녀 팬들 이외에 20세 이상의 남성 게이 팬들도 상당한 숫자였기에 Gay-pop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렇게 아티스트 자신이나 그들의 팬들의 섹슈얼리티 외에 중요한 음악 자체에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특징이라면 런던의 언더그라운드 게이클럽이나 바에서 단골로 흘러나오는, 춤추기에 적당하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빠른 템포, 서정적이며 흥겨운 분위기의 멜로디, 무겁지 않은 베이스라인, 뛰어난 가창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보컬 등이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주목할 만한 사실로 Gay-pop그룹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해왔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기존 팬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게이라는 사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고, 이러한 대중 앞의 공개는 오히려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게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는 팬들도 물론 있었다(이러한 예는 남성 팬들에게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대표적인 Synthpop그룹으로 자신들이 게이임을 밝히고 활발히 활동하는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 이라주어(Erasure)등은 대표적인 영국의 Gay-pop 아티스트들로 손꼽힌다.

섹슈얼리티에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대표적인 그룹인 펫 샵 보이즈는 엘튼존,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더불어 ‘거물급’ 게이 뮤지션에 속한다. 닐 테넌트와 크리스 로우의 Pet Shop Boys는 한때 두 멤버 사이의 염문설도 있었으나 인터뷰에서 서로가 서로의 취향이 아니라는 농담조의 발언으로 자연스럽게 그 염문설을 부인하기도 했다. 솔직하고 담담한 가사로 삶과 사랑뿐만 아니라 전쟁, 기아 등의 사회문제를 노래하기도 하는 펫 샵 보이즈 음악의 큰 특징은 오케스트레이션과 신디사이저를 기본으로 한 친숙하며 흥겨운 멜로디에 묻어 나오는 서정성과 우울함이다. ‘흥겨움과 우울함’,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공존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이들은 이 두 가지를 그들의 음악 속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키고 있다.

게이 이미지의 보편화

Gay의 영어 사전적 뜻은 Light-hearted, cheerful, brightly coloured. 즉 ‘흥겨움, 즐거움, 밝음’이다. 선진사회의식의 대표 격인 영국 사회에서조차도 동성애자들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성애자들 중심의 기존 사회로부터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외면, 멸시, 차별 등을 받아 왔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Pet Shop Boys의 ‘즐거우나 서정적이고 우울한’ 분위기의 음악은 이러한 사회성향에 비추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 시대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팝 음악처럼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큰 저항이나 거부감 없이 폭넓게 수용하는 분야도 드물다. 아티스트 개인의 섹슈얼리티와는 상관없이 Homosexual, Bisexual, Transsexual의 이미지는 매우 보편화 되 있다. 특히 최근 제작되는 뮤직비디오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팝 음악은 여러 가지 문화 형태 중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시대별로 그 당시 진보적인 젊은이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과 욕구를 표출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미 팝 음악의 큰 줄기로 떳떳하게 자리 잡고 다른 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Gay-pop은 단지 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소수’로 차별대우를 받는 전 세계 동성애자들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로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Rock ‘N Roll

록의 역사는 50년대부터다. 종래 서구의 팝은 음악형식면에서 서투른 마디 2부형식에 ‘달빛’ ‘별자리’ ‘장미’ ‘입맞춤’ 운운의 상투적 구절이 노랫말에 자주 등장했고, 전기악기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섹스, 사회문제, 종교 같은 주제는 멀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우울함과 비참함으로부터 도피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는, 즉 웃음과 슬픔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블루스는 흑인들만의 음악이었고, 소박하고 서민적이며 방랑과 이혼, 삼각관계, 음주 등을 노랫말에서 과감하게 다루었고, 전기기타, 드럼, 스틸기타를 사용했던 컨트리 앤 웨스턴은 촌스런 시골뜨기 음악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전후해 태어나 자본주의의 풍요를 누리면서 자란 50년대의 서구 젊은이들은 음악적 취향에 있어 기성질서에 저항했다. 이들은 멜로디 위주의 스탠더드 팝 대신 강한 비트의 음악에 몰두했다. 55년 빌 헤일리가 나타나 컨트리 앤 웨스턴밴드에서 리듬 앤 블루스를 커버한 레코드 ‘Shake Rattle & Roll’, ‘Rock around the Clock’을 발표했다.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거나 춤을 추게 할 수 있는 노래들이었고 그 동안 젊은이들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던 폭발음이었다. 특히 ‘Rock around the Clock’은 영화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그 해 여름 8주 연속 차트 1위를 독주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가 교내폭력을 그린 것이었으므로 이때 록큰롤음악 역시 틴에이저의 반항과 비행, 그리고 폭력과 관계된 음악이라는 이미지가 확고부동하게 심어졌다.

뒤이어 56년에는 남부 가난한 촌뜨기 트럭운전수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타나 로큰롤 광풍을 주도했다. 니그로의 사운드와 니그로의 감각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최초의 백인이었던 그의 음악 속에서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은 역동적인 결합을 이루었다. 그의 육감적인 목소리와 관능적인 허리율동은 기성세대에겐 지탄, 젊은이에겐 환호의 대상이었다. 그 외에도 50년대 중엽에는 척 베리, 리틀 리차드 등의 록큰롤음악이 쏟아져나왔는데, 이러한 음악은 모두 간단한 멜로디에 단순한 코드, 전기기타의 연주, 요동치는 듯한 리듬감, 터져나오는 듯한 에너지, 거칠게 절규하듯 부르는 격렬한 보컬과 다이나믹하게 몸을 움직이는 율동 등을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엘비스는 60년대 이후 연예인이 돼갔고 음악도 부드러운 팝발라드로 바뀌었다. 엘비스 팬들은 그를 쫓아갔지만, 그는 더 이상 로큰롤의 황제가 아니었다. 60년대초 미국과 영국에서 엘비스와 클리프 리처드가 로큰롤에 등을 돌리고 트위스트가 창궐하면서 로큰롤은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비틀즈를 위한 혁명전야였다. 음악산업의 변방이라 할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욕설이 난무하는 뒷골목에서 자신들 음악을 가꿔온 영국노동자계급출신의 더벅머리청년그룹 비틀즈는 무작정 질러대는 고함소리 하나로(?) 64년 미국공략을 단숨에 끝냈다. 록의 모든 장르를 실험한 이 신화적인 그룹은 70년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훌쩍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후 비틀즈를 필두로 수십여개의 영국 그룹들이 물밀 듯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더 후, 롤링 스톤즈, 야드버즈, 크림, 핑크 플로이드 등 비틀즈 이후 록 흐름의 주도권을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쥐게 된 근원이다.

64년 비틀즈의 상륙에 즈음해 미국에서는 버클리대학을 시작으로 성 정치 등에 관한 터부를 타파할 것을 주장한 Free Speech Movement을 비롯, 수년동안에 걸쳐 미국사회를 뒤흔든 학원투쟁과 도시흑인폭동, 무장봉기, 베트남반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자유정신의 최정점은 산타나, 더 후, 제퍼슨 에어플레인, 지미 헨드릭스, 존 바에즈 등이 참가한 69년 8월 우드스탁이었는데, 40만명이 구름처럼 몰려든 이 페스티벌은 폭우로 진흙탕이 되었지만 팬들은 열광했다. ‘fuck’을 계속 외치며 ‘베트남에서 죽음을’이라는 노래를 처절하게 선창한 컨트리 조에 이어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국가를 늘어지게 변주하며 저 위대한 미국의 이상에 야유를 보냈다. 정치적 저항과 낭만적 쾌락주의가 뒤섞인 히피즘적 반문화운동이 록과 결합한 최고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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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vis Presley promoting Jailhouse Rock” by Metro-Goldwyn-Mayer, Inc.
Reproduction Number: LC-USZ6-2067
Location: NYWTS — BIOG – The Library of Congress retrieved 3d02067r.jpg from Jailhouse Roc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 즈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UCLA의 영화학과 학생들이 도어즈를 결성해 키보드 중심의 사운드, 양친살해를 암시하는 노랫말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의 기수로 록뮤지션들의 많은 재킷을 디자인함) 밑에서 헤로인중독에 관한 노래를 기타의 금속성 소음에 맞춰 노래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급진적 정치운동에 관계한 매니저가 이끌던 그룹 엠시파이브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록은 전자악기의 비중이 더 커졌고, 앰프로 증폭되고 일렉트릭 장치에 의해 변형된 음은 폭력적이라 할 정도로 크고 자극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지금까지의 록음악을 록큰롤이라 한다면 이후의 록음악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록이라 부른다.

그러나 70년대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혼란스러웠던 사회변동에서 벗어나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고, 록에 대한 상업적 침탈, 마약, 지미 핸드릭스와 짐 모리슨과 제니스 조플린 등의 잇따른 죽음 등으로 록은 다시 쇠잔해지는 듯했다. 이때 비틀즈와 바톤터치하듯 나타난 영국의 레드 제플린, 제프 백, 크림 이상 세 그룹(이들은 모두 야드버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전기기타의 금속음을 강조하고 공격적인 비트의 연주를 굉음과도 같이 증폭시켜 들려주는 하드록을 연주했다. 이 밖에 블랙 사바스, 딥 퍼플, 주다스 프리스트, 퀸 등 메탈밴드들은 음악적 완결성이 뛰어난 메탈을 연주했으며, 특히 딥 퍼플은 클래식 요소를 하드록 속에 끼워넣는 노력으로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퀸은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아름다운 무대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기타의 파괴적이고 기교적인 연주, 그리고 악마적이고 남성적인 면모의 과시와 함께 완벽에 가까운 최고 수준의 연주를 자랑했으며 노래는 허무의 색채를 풍겼다.

또한 69년 킹크림슨을 필두로, 키보드를 많이 사용하고 클래식, 재즈, 현대음악의 요소를 자유자재로 섭취하며, 기존의 단순한 록리듬에 풍요로운 변박자를 도입하고, 신디사이저 등 새로운 악기를 사용한 ‘프로그레시브록’이 탄생했다. 특히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는 능란한 키보드 테크닉을 과시했고, 핑크 플로이드는 현대사회의 소외와 신경증을 소재로 하여,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공상과학적 음악, 웅장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아방가르드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독창적 세계를 보여주어 지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다.

이들에 반발, 76년 영국에서 섹스 피스톨즈가 등장한다. 펑크의 도래, 록 안에서 또 한 번의 반항이었다. 상업화한 메탈스타들을, 정교한 록음악을 비웃으며, 그리고 영국 자본주의 위기를 반증하듯, 섹스 피스톨즈는 냉소적이고 반상업적인 노래로 일관했다. 제멋대로 불러젖히고 노래에 전혀 소질이 없을뿐더러 배우는 데도 도무지 흥미가 없었던 이들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청중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곧 펑크밴드의 힘은 고갈되고 겉멋만이 덜렁 남게 되기도 했다.

레드 제플린을 정점으로 한 하드록 열기가 점차 식어갈 즈음, 하드록이 답답하다고 느낀 젊은이들은 80년대초 스트레이트한 요소를 더욱 높이고 강도에서도 날카로운 금속성 톤을 전개하는 헤비메탈 음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드록에 대한 더 강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메탈리카가 등장하면서 메탈은 드디어 주류의 위치로 부상했으며 슬레시 메탈, 데스 메탈 등으로 점차 분화해 나갔다.

메탈이 천하통일한 그 시점인 90년대 시애틀에서 출현한 너바나는 전통적인 사운드를 복고풍이나 짬뽕스타일로 표현한 얼터너티브록을 들고 나오면서 록 지평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를 계기로 탈장르시대가 열렸고 하나의 곡을 한 장르로 구분짓는 것이 어렵고 의미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너바나의 얼터너티브는 음악장르의 구분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운동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록은 그러나 너바나 이후에도 계속 발전, 70년대 영국에서 탄생된 펑크가 90년대 들어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네오펑크시대를 열었고, 최근엔 얼터너티브 이후 전자, 기계음으로 가득찬 테크노가 점차 힘을 얻고 있는 형국이다.

http://www.fortunecity.com/tinpan/morrissey/612/

언더그라운드, 인디펜던트, 하드코어

이는 대학 라디오 방송을 자주 타고 또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직업적 록 밴드나 뮤지tus의 음악을 가리킨다. 이 컬리지 록의 환경이 주류 팝/록 음악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 대한 ‘대안’ 구실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얼터너티브’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인기를 끈 록 음악은 상업 라디오 방송이나 MTV 등의 대중 매체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 음반사를 통한 음반 판매 및 배급망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유통되는 언더그라운드(혹은 인디펜던트) 뮤지션들의 음악이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미국에서는 하드코어 씬을 비롯한 인디 씬이 각 지방의 언더그라운드 하위 문화로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1970년대 펑크 운동의 음악적 영향과 에토스를 계승하면서 주로 지역 클럽에서의 공연을 통해 실력을 축적했고 자신들만의 독립 음반사(흔히 ‘인디 레이블’이라고 부르는)를 설립해 음반을 제작했으며, 주류 음반 시장과는 다른 독자적인 배급망을 수립하기도 했다. 

따라서 컬리지 록 방송, 언더그라운드 클럽, 인디 레이블, 하드코어 배급망, 이 네 가지의 접속이 얼터너티브 록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얼터너티브 록을 분류하면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몇 가지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얼터너티브 씬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활동했던 R.E.M.이나 U2 같은 밴드가 어째서 때로는 얼터너티브에 포함되거나 그 선조격으로 언급되곤 하는가라는 문제 같은 것인데, 이 두 밴드는 모두 1980년대 대학 라디오 방송의 인기 스타였으며, 특히 R.E.M.의 경우 1980년대 말까지는 클럽공연과 인디 레이블을 통한 음반 발매를 지속했던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속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분류가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가와 언더그라을드의 하위 문화로서 록은 단지 얼터너티브의 모태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얼터너티브는 언더그라을드에서 지상으로 을라왔을 때 비로소 출현했고, 그때서야 고립적인 하위문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1980년대 록을 ‘죽였던’ 상업주의의 화신 MTV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료 취임한 해이기도 한 1981년에 설립된 MTV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에 걸맞는 문화적 첨병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MTV의 가장 큰 관심사는 팝 음악에서 불쾌하고 거친 요소들을 깨끗이 쓸어 내는 것, 다시 말해 청년 문화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일찍이 MTV를 장식했던 듀란 듀란, 컬처 클럽 등은 글램과 펑크의 이미지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요소를 거세한 채 적절히 팝적으로 조합한 것이다. MTV의 보수성이 단적으로 잘 드러나는 것은 혹인 및 흑인 음악에 대한 태도였는데, 심지어 마이클 잭슨조차 단지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상당 기간 비디오 방영을 거부당하다가, 잭슨의 소속사인 CBS의 으름장에 못 이겨 간신히 방송을 탈 수 있었다 물론 잭슨의 대히트 덕분에 MTV는 일약 세계 최대의 대중 음악 매체로 부상할 수 있었고, 그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아낌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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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ova REM concert July 22 2003 blue” by Flickr user Stark (Stefano Andreoli) – http://www.flickr.com/photos/scaccia/39502728/.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80년대 내내 마이클 잭슨, 마돈나, 왬 등의 팝 스타들을 양산했던 MTV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당시 미국에서 ‘유일하게’ 형성된 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혹인 게토의 힙합 문화를 수용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MTV는 니르바나 등 이른바 시애틀 그런지 밴드들을 필두로 한 얼터너티브 록을 본격적으로 보급하는 데 앞장서기 시작했다. 1980년대 보수주의와 주류 팝 문화의 선봉에 섰던 MTV가 1990년대에 ‘얼터너티브 네이션으로 변모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새로운 록 음악이 대중에게 파고들어 돈벌이가 된다는 계산이 분명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상업적 계산이야말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식의 해답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즉, 문제는 왜 또다시 록 음악이 대중, 특히 청년 대중을 사로잡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아마도 좀더 폭넓은 사회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서 청년 문화가 차지한 위치로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영미권의 1980년대가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모든 측면에서 레이건-대처로 상징되는 신보수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록 음악 연구자 토니 커시너는 <대중 음악과 사회>라는 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청년 집단 내부에서도 보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며 이는 신우익 운동과 청년 공화주의자 혹은 청년 레이건주의 집단으로 표상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1980년대의 보수주의와 현란한 주류 팝 문화간에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명시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다분히 그런 혐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앞서 말한 하드로어 씬을 구성한 뮤지션들은 비교적 일찍부터 이런 보수주의-팝 문화에 반발했던 젊은이들에 속한다. 적어도 이들에게는 마이클 잭슨과 로널드 레이건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는 적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이 정치적 급진주의와 더불어 반 팝적인 이데올로기, 즉 듣기 편한 멜로디와 대중적인 스타덤을 강력 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0년대 중후반 이들의 국지적 출현은 억눌리고 소외당한 채 불만에 싸여 있는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팬들을 확보했지만, 대중적인 현상이 되기에는 아직도 여전히 고립 분산적인 활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그런 방식에 한계를 느낀 몇몇 밴드가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주류 음반 시장으로 치고 올라왔다는 것, 그리고 사회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정권으로 상징되는 보수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맞물리면서 1990년대 록 음악과 청년 문화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일어나게 된 것이다.

출처불명

College Rock

근본적으로 College Rock은 Alternative Rock의 태동기(1983 ~ 84)에서부터 대학가의 라디오을 주도했던 Alternative Music을 일컫는 개념이다. 대부분의 College Rock은 New Wave, Post Punk, 그리고 초기 Alternative Rock의 복합적인 영향아래 놓여있었다. 대부분의 College Rock 밴드들은 초기에 New Wave가 그랬듯이 메인스트림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비록 보다 예술적이긴 했지만 Post Punk만큼 실험적이거나 분파적인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많은 미국 밴드들이 그들의 뿌리를 Punk나 Hardcore에 두기는 했지만 모든 College Rock 밴드가 그렇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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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BG” by Matthew Jording from Brooklyn, NY, USA – DSC03697.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초기 밴드들중 주요한 두 밴드는 각각 미국과 영국에서 Guitar-pop을 선도하고 있었던 R.E.M과 Smiths이다. 그럼에도 College Rock의 음악적 테두리는 보다 넓다. 그 범위는 대략 미국측에서의 Hardcore적인 언더그라운드 락씬(Sonic Youth, the Minutemen, the Meat Puppets, Dinosaur Jr., the Replacements), 영국에서의 New Wave 생존자들(XTC, Robyn Hitchcock, They Might Be Giants, the Violent Femmes, Camper Van Beethoven, the Pixies), 지적인 포크락(Billy Bragg, 10,000 Maniacs), 그들의 음악에 팝적인 요소를 가미한 포스트펑크락커(the Cure, Siouxsie & the Banshees), 씬써싸이저에 기반한 댄쓰팝 밴드(New Order, Depeche Mode), 그리고 귀를 찢는듯한 키타 소음에 팝훅을 뒤섞은 밴드(the Pixies, the Jesus & Mary Chain)에 이르기까지 소위 지적인 청취자가 좋아할만한 갖가지 조류의 인디펜던트 음악을 아우르고 있었다.

이후 메인스트림의 편입된 스타들은 U2, Peter Gabriel, Sting 등을 들 수 있다. College Rock의 전성기는 역설적으로 이후 Nirvana가 1991년 메인스트림을 격파하면서 끝을 맺었다. 대학가의 래디오 선곡은 메인스트림의 그것과 흡사해졌고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얼터너티브/인디 밴드들은 땅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렸다.

주요앨범들

The English Beat: I Just Can’t Stop It [1980]
Jane’s Addiction: Ritual de lo Habitual [1990]
Tracy Chapman: Tracy Chapman [1988]
Marshall Crenshaw: Marshall Crenshaw [2000]
XTC: Fossil Fuel: The XTC Singles 1977-1992 [1996]
Sonic Youth: Sister [1987]
Violent Femmes: Violent Femmes [1983]

AllMusic 참조

Alternative 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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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ctronic band” by Johnny_Marr.jpg: shokophoto
Bernard-sumner-berkeley-1987.png: Andwhatsnext
derivative work: JD554 (talk) – Johnny_Marr.jpg
Bernard-sumner-berkeley-1987.png.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Alternative Dance는 Alternative 혹은 Indie Rock의 예민하고 멜로딕한 곡구조와 일렉트로닉 비트, 씬써싸이저, 샘플러와의 결합에 의해 생성되었다. 또한 포스트디스코 댄쓰뮤직씬에서 클럽을 기반으로 한 장르이다. 팝에 기반을 둔 많은 Alternative 가수들이 몇년에 걸쳐 이러한 음악스타일을 실험하였는데 이는 클럽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스타일은 주로 영국에서 많이 시도되었는데 ’80년대 초반 Kraftwerk 스타일의 Synth-pop과 음울한 포스트펑크의 결합이 그 선구적 시도였다면 ’80년대 말의 Manchester 씬과 EMF, Jesus Jones등의 Punk’ N Roll은 그 절정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90년대 들어서는 Acid House, Trip-Hop 등으로 파생해나갔다.

주요 앨범들
The Stone Roses: Stone Roses [1989]
EMF: Best of EMF: Epsom Mad Funkers [2001]
Electronic: Electronic [1991]
Wolfgang Press: Legendary Wolfgang Press & Other Tall Stories [1985]
Pop Will Eat Itself: This Is the Day…This Is the Hour…This Is This! [1989]

AllMusic 참조

Jangle Pop

1967 Rickenbacker 360-12 12 string electric guitar owned and photographed by Greg Field.jpg
By Outerrealm – This is my own guitar photographed by myself 10/10/12 for purposes of this articlePreviously published: not published, CC BY-SA 3.0, Link

jan·gle
- v. (-gled, -gling) v.i.
1 땡그랑거리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다.
2 <古> 입씨름하다, 말다툼하다.
-v.t.
1 …을 땡그랑[시끄럽게] 울리다.
2 <신경·감정 등을> 곤두서게[안달나게] 하다, 괴롭히다.
-n.
1 [U] 귀에 거슬리는 소리, 가락이 맞지 않는 소리, 땡그랑[쨍그랑]거리는 소리; 소음, 시끄러움.
2 <古> 말다툼.

Jangle Pop은 ’60년대의 찰랑거리는 기타 연주와 팝멜로디를 차용한 ’80년대 초중반의 포스트펑크 무브먼트 와중에서 자라난 스타일이다. R.E.M.의 등장으로 불붙은 Jangle Pop은 또한 포크락적인 요소도 일정 정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팝에 기초한 포맷을 지니고 있다. Jangle Pop은 메인스트림은 아니었다. 가사는 때로 고의적으로 불가해했으며 그들의 싸운드는 때로 거칠고 아마추어리즘적 – 소위 do-it-yourself적인 작품생산을 추구하며 – 이었다. Jangle Pop은 1984년과 1987년의 기간 동안 그 절정기를 맞이하였는데 R.E.M, Let’s Active와 같은 Southern-Pop 밴드와 더불어 웨스트코스트의 언더그라운드를 기반으로 하며 보다 싸이키델릭한 밴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이르자 서로 분간하기도 어려울 만큼 비슷한 스타일의 밴드들이 판을 치자 인기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R.E.M은 가까스로 메인스트림에 진입하게 되었지만 많은 그룹들이 ’90년대가 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Camper Van Beethoven: Telephone Free Landslide Victory [1985]
  • Let’s Active: Cypress/Afoot [1989]
  • Guadalcanal Diary: 2X4 [1987]
  • Game Theory: Tinker to Evers to Chance (Selected Highlights 1982-1989) [1990]
  • Rain Parade: Emergency 3rd Rail Power Trip [1983]
  • Marti Jones: Used Guitars [1988]
  • The Soft Boys: Underwater Moonlight [1980]

Madch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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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ch” by Mike Colvin – http://www.flickr.com/photos/mikecolvin82/124404117/.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Madchester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영국락계를 뒤흔드는 주요한 힘이었다. acid-house의 댄쓰리듬과 멜로디팝의 혼합을 통해 태어난 Madchester는 짧게 연속적으로 끊어치는 리듬, 싸이키델릭하면서도 장식적인 연주와 코러스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노래의 구조는 매우 친근한 반면 음악의 배열과 자세는 매우 모던하면서도 때로는 레트로적인 분위기 – 즉, 찰랑거리는 키타싸운드, 소용돌이치는듯한 올갠 등 – 를 풍기기도 했다. Madchester를 대표하는 두 밴드가 있었는데 The Stone Roses와 Happy Mondays가 그들이다. The Stone Roses는 전통적인 키타팝 밴드이다. 그들의 노래는 느슨한 비트에 의해 뒷받침되는 팝튠에 가깝다. 그들의 노래는 어떤 면에서는 ’60년대 팝 – 그들이 Simon & Garfunkel의 노래를 리메이크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것 – 의 현대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Happy Mondays는 래퍼의 쌤플링에 비틀즈풍의 코러스와 음습한 싸이키델릭 댄쓰를 뒤섞었다. 이런 전혀 다른 접근법에도 불구하고 두 밴드는 acid-house의 음악과 문화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룹의 인기가 높아져감에 따라 영국 언론들은 이 두 밴드를 – 그리고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The Charlatans와 Inspiran Carpets을 묶어서 – “Madchester”라 이름지었다.(밴드 멤버들이 다소 헐렁한(baggy) 옷들을 즐겨입었기 때문에 “Baggy”로 알려지기도 했다) Madchester는 수년간 영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뒤 이들 밴드들의 레코드사와의 계약문제로 인한 앨범 발표 지연, 마약문제 등으로 인하여 서서히 인기가 식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들의 영향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심지어 얼터너티브씬에서조차) 그러나 Madchester의 후손들은 – 컨템포러리와 클래식팝의 격돌에 영향받은 Oasis, Pulp, Blur 등 – ’90년대 중반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Brit 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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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dy Eye collage” by Liam_Gallagher6.jpg: Will Fresch from San Diego, CA, United States and GAC_Oasis_live_in_HK_2009.jpg: Jase Lam from Hong Kong, China
derivative work: FotoPhest (talk) – Liam_Gallagher6.jpg and GAC_Oasis_live_in_HK_2009.jpg.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브릿팝(Brit Pop)이란? 원어로 Brit이란 영국본토를 나타내는 British를 말하고, pop이란 모두 알고 있듯이 오늘날의 팝음악… Popular Music의 준말이다. 음악을 조금 들었던 사람들에겐 “브릿팝”하면 RadioHead를 가장 많이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Radio Head는 브릿팝이라고 할 수 없다. 이유는 Radio Head는 Made in U.S.A. 제품이기 때문이다. 워낙 밴드의 분위기가 영국밴드와 비슷하고 영국팬들에게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비슷한 예로 Smashing Pumpkins도 영국밴드가 아닌 미국밴드이다).

브릿팝은 90년대 초반 복고풍과 다시 부상한 비틀즈의 열풍에 의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으며(오아시스 같은 경우는 드러내놓고 ‘우리는 비틀즈를 베꼈다’라고 말할 정도) 리듬보다는 가벼운 멜로디가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국>노래를 말한다. 하지만 브릿팝은 음악적 형식이 아닌 음악의 국적에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장르속에 아주 다양한 형식을 포괄하고 있다. RichardIII로 97년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된 Supergrass는 아주 강한 음악을 선보이며, Pulp는 댄스음악(?)으로 주류에 입장했다. 또, Blur는 사회성 강한 노래를 부르고, Suede는 Glam Rock을 적절히 교배시킨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브릿팝이라는 집합속에는 이처럼 다양한 원소가 있다. 단지 주의할 점이 있다면 Blur와 Oasis만을 브릿팝의 전부로 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심화되기 시작한 록이라는(아니 심화되기 시작한지 꽤된) 테두리 안에 서의 장르 나눠먹기는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하여 눈만뜨면 새롭다라는 미명 아래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장르의 홍수사태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몇차례에 걸쳐 있었던 일이었지만 극히 적은 시일내에 수십가지 장르의 탄생을 맞이하는 이 상황은 음악 매니아들에게 있어선 굉장한 호김심 또는 부담감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태(?)에 빌미를 제공케한 이름에 책임을 묻는다면 당연히 브릿팝을 떠올리게 된다. 이 여러가지 음악들이 광위의 대중들 사정권 안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모던 록 혹은 뉴 웨이브라는 음악적 범주안에 모든 것을 묶어놓기에는 그 형평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보다넓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는 영국 음악의 현상을 지칭하여 브릿팝이라 부르기 시작 하였는데, 아마도 블러의 등장과 그에 따른 아류급 밴드들에게서 사전적이나마 정형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뭐 사전적이든. 주관적이든간에 각각의 정의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브릿팝이란 개념의 등장은 얼터너티브의 탄생 배경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하고 싶다. 얼터너티브 역시 하나의 촛점을 가질 수 없는 젊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록을 포괄하기 위한 의미였으며 얼터너티브라는 표현속에는 이미 가까운 시대에 영화를 누렸던 뉴웨이브나 펑크의 개념이 도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얼터너티브가 미국쪽 개념이라면 인디 록이나 모던 록은 영국적인 성격이 다분한 표현이다. 얼터너티브가 그런지나 하드코어. 멜로디 코어 등의 신종 장르를 아우르는 상위 개념이라면 브릿 팝 역시 모던록, 인디록, 테크노를 포괄하는 보다 큰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듯 싶다.

단, 반드시 유념해야할 부분은 얼터너티브가 영미권 모두의 복고 사운드의 전통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는데 반하여 브릿팝은 다분히 영국적인 사운드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영국 밴드인 Bush나 Spacehog가 그렇게 성공했으나 절대로 브릿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브릿팝을 영국 음악의 대안이라고 보는 관점도 브릿팝은 영국 음악의 현재이며.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교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브릿팝이라는 복합적이고 거대한 품안에서 새 생명을 가진 여러 장르들이 잉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관심의 촛점이 되고 그 지명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너무 후한 관심으로 그들을 평가한다고 얄미운 눈으로 쳐다볼 일이 아닌것이다.

이렇듯. 모든걸 다 포함하고 있는 둥글둥글한 뭉텅이에서 “영국”이라는 딱딱한 껍질로 무장한채 .그 속에서 빠져나와 이젠 또다른 그들까지 잉태해내고 있는 전사들 – 그게 바로 브릿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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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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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ta rhymes breaks it down for the mobile geeks” by Nabeel Hyatt – originally posted to Flickr as busta rhymes breaks it down for the mobile geeks.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70년대 전반에 DJ들에 의해 힙합이 탄생한 후 본격적 발전은 1978년 Sugerhill Gang의 “Rappcr’s Dehght” 싱글레코드의 발매로 시작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흑인음악 레이블인 Sugcrhill Rccords가 새워졌고 첫 여성 그룹인 Scqucnce의” Funk You Up” 싱글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바로 랩의 탄생과 레코드 발매 통한 대중 속으로의 본격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던 것이다.

1980년대

그룹/래퍼들이 모두 레코드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샘플리 사용시법과 신디사이저/드림머신으로 이루어진 비트는 Miami Bass로 발전,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Run-DMC는 1983년 싱글을 발표하면서 사회 비판적인 가사로 주위를 끌면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백인힙합그룹 Beastie Boys는 앨범 “Licensed to lll”을 발표하여 백인사회에까지 힙합의 인기를 퍼뜨렸다. KRS-One의 Boogie Production, Gang Starr등의 등장으로 랩은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Eric B. and Rakim은 수준 높은 가사로 높은 인정을 받았으며 Public Enemy는 흑인인권운동적 가사와 짙은 정치적 성향으로 많은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은 무엇보다 도 West Coast(미국서부)에 서의 힙합의 발전으로 특징지어진다. 동부에서 탄생한 힙합은 서부로 중심이 건너가기 시작해 소위 갱스터랩(Gangster Rap)의 형태로 90년대 초반까지 주도권을 잡게 된다. 1988년 앨범 straight outta compton은 캘리포니아 LA 갱스터 스타일의 랩을 소개했으며 또 후에 N.W.A를 탈퇴한 lce cude도 서부의 갱스터랩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1990년대 초

1990년대 초반에는 두 가지 상반된 스타일과 랩이 인기를 끌었는데, 바로 “댄스랩” 과 갱스터랩이다. Jamaica dancehall 계통의 음악은 크게 히트하고 카리브해안과 연계로 힙합에 또 다른 생기를 불어 넣었다. 수많은 dancehall 아티스트들이 힙합 뮤지션과 합작하거나 솔로 앨범을 낸다. snoop doggy dogg와 같은 갱스터래퍼들의 등장을 불러왔다. 이와 같은 갱스터랩의 공격적이고 여성비하적인 가사는 흑인사회 안밖으로부터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다시 동부쪽 그룹들이 랩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JAZZ와 Funk의 요소를 이용한 곡들을 선보였으며 QBC스타일을 소개한 Mobb Deep과 Nas 그리고 데뷔 앨범 ready to aie를 발표한 notorious B.I.G등이 모두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곡들을 발표로 거칠어진 두 실력있는 래퍼간의 싸움은 결국 두 레이블간의 분쟁, 양 코스트간의 분쟁으로 변하여 결국 Tupac과 notorious B.I.G의 안타까운 즉음으로 막을 내렸다.

현재

힙합의 주류이던 갱스터랩, 그리고 동부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랩들 대신 이제 Puff daddy의 독특한 프로듀싱을 거친 다소 가볍고 빠르고 파티풍의 음악이 많은 인기를 끌기시작했다.샘플링에 크게 의존하는 Puff daddy의 프로듀싱기법은 랩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많은 스타일의 랩이 모두 동시에 존재하면 대중적으로 도 큰인기를 얻고 힙합의 전성시대라고 할수있다. 힙합은 즉 이 시대의 재즈인 것이다. 자신들의 틀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다은 장르와의 융합을 활발히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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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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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01-mika” by Mikamote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랩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변천과정을 거쳤는가. 랩의 탄생은 DJ들로부터 비롯된다. 1970년대 미국, 특히 뉴욕시에는 Disco열풍이 불어서 많은 DJ들이 흑인빈민가 등지의 거리에서 댄스파티를 열곤 했다. 이들은 DJ Smokey, Kool DJ D같은 DJ들이었는데, 랩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DJ는 바로 Kool DJ Herc였다. Kool DJ Herc는 다른 DJ들같이 Disco레코드를 틀어주는 대신,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R&B 또는 Funk Dance레코드를 주로 틀어주었다. 그런데, Herc가 특이했던 것이, 그는 노래를 트는 대신에, 간주부분(Break-beat)을 계속 반복하여 틀어주곤 했다. 그 간주부분에 사람들은 춤을 추기 시작 했고, 이들을 Herc는 “b-boys”, 또 그들이 추는 춤을 “b-boying”, 또는 “Break-Dancing”이라고 불렀다. 한편, Kool DJ Herc는 자신의 파티에 항상 MC를 데리고 다녔는데, Coke La Rock라는 이름의 이 MC의 역할은 음악 중간 중간에 마이크로 춤을 추는 사람들의 흥을 돋구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MC’ing”이었고, 나중에 “rapping” 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즉, 랩의 탄생이다. 참고로, 같은 시대에 DJ Hollywood 또한 Kool DJ Herc와 같은 스타일로 DJing을 했는데, 그는 자신이 MC역할도 했다.

그런데, 그가 MCing을 하던 중, 반복했던 말들중 하나가 “..hip, hop..”이어서, “hip hop”이 랩을 지칭하는 표현들 중 하나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Herc의 뒤를 이어 많은 DJ들과 MC들이 Herc의 스타일 을 발전시키며 랩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 이들중에는 유명한 Afrika Bambaataa(아프리카어매리컨의 해방을 꿈꾸었던 라스파타리아니안)도 있어서, 그는 자신의 Zulu Nation을 형성 하여, 랩과 DJing을 발전시켰다. 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70년대 후반, 1978년 Suger Hill Gang이 “Rapper’s Delight”란 첫 랩싱글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다음해에 Sequence는 “Funk You Up”이라는 노래로 랩을 더욱 대중화 시켰고, 1980년 Kurtis Blow는 “The Breaks”란 노래로 랩으로서는 첫 Gold를 기록했다.1982년에 Afrika Bambaataa는 그의 Soul Sonic Crew와 함께 “PlanetRock”을 시작으로 신디사이져와 드럼머신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Electro Funk 시대(그는 이러한 시도를 멀리 바다 건너 독일의 Kraftwerk의 스타일을 차용한 것인다. 그 당시 많은 이들은 Kraftwerk의 음악을 일종의 써커쓰 정도로 치부하고 있을 시기였다.)를 시작하였다. 특히 Afrika Bambaataa는 sampling을 그의 “Looking for the Perfect Beat”에서 처음 본격 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역시 1980년대를 장식하였던 래퍼로 Run-DMC를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It’s Like That”이란 노래로 랩에 도시 빈민가 흑인들의 힘든 삶을 본격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락가수Aerosmith와 “Walk This Way”를 발표하면서 랩의 대중화에 기여했다(이 노래는 당시 타이틀곡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랩음반에 처음 타이틀곡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곡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랩의 대중화에 기여한 또다른 그룹은 바로 Beastie Boys이다. 그들은 “Licensed To Ill”앨범을 발표함으로써 백인들사이에도 랩 음악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에 서부에서 등장한 랩스타일이 바로 갱스터랩이다. 이 스타일의 랩은 먼저 가사에서 LA 중심부의 갱들 싸움(Gangwar) 과 힘든 삶을 표현했으며, Gangsta Rap의 시작은 N.W.A.의 1988년 도 앨범 “Straight Outta Compton“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동부 랩의 대표주자인 Public Enemy는 미국사회에서 흑인은 철저한 약자이며 갱스터라는 존재부여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는 파티풍의 춤추기 좋은 랩스타일도 그 발전을 보았으니, 그 대표적인 래퍼는 MC Hammer의 “U Can’t Touch This”나, 백인 래퍼 Marky Mark and the Funky Bunch 의 “Good Vibration”, Vanila Ice의 Ice Ice Baby, 또는 Kriss Kross의 “Jump”를 들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은 과거 히트곡의 샘플링을 통하여 부수적인 이익을 노리려는 상업적인 속셈이 눈에 두드러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 랩은 그 스타일의 다양성과 가사의 내용에 있어서 많은 발전이 있었고, 또 그 과격함에 대해 미국사회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 게 되었다. 주 공격대상은 가사의 과격함, 폭력조장, 여성비하 표현등이었으며, Ice-T의 노래 “Cop Killer”는 미국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고, 경찰관을 쏜 사건에서 범인 십대소년이 2Pac의 “2Paclypse Now”앨범을 듣고있었다는 데에 당시 부통령 Dan Quayle이 2Pac과 랩 전반에 대해 비난했고, 2 Live Crew는 1989년도 앨범 “As Nasty As They Wanna Be”로 Florida주에서 외설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2Pac과 Notorious B.I.G.간의 마찰이 2Pac이 출소후 Deathrow음반사로 옮기면서 결국은 Deathrow사와 Badbay사,그리고 East Coast와 West Coast간의 마찰로 번져, 한동안 랩계에 큰 문제로 인식되었으며, 이는 두 래퍼 2Pac과 Notorious B.I.G.의 죽음 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두 래퍼의 죽음이 East와 West의 마찰에서 비롯되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음악적 갈등이 음악외적 갈등으로 확산되어 많은 폭력이 오간것은 사실이다.

1990년대에는 위와같이 많은 문제와 논란이 있었지만, 음악적으로는 그 어느 시대에 비교될 수 없는 발전을 보았다. 매년 발매되는 랩앨범의 발매량은 물론, 많은 래퍼들의 등장, 대중적 선호도등, 모든 방면에서 랩은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부의 Wu-Tang Clan이나 서부의 Dr. Dre같은 대표적 래퍼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레이블을 키웠고, 또, 독특한 스타일의 많은 실력있는 래퍼들이 등장하여, 앞으로도 랩의 전성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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