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Michael: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 내에서의 보기 드문 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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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iversity of Houston Digital Library – http://digital.lib.uh.edu/u?/p15195coll6,268, Public Domain,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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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노트 : Clay Cane 는 “Live Through This: Surviving the Intersections of Sexuality, God, and Race,”의 저자이다.

2016년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또 한방 먹었다. 조지 마이클이 53세의 나이로 심장 질환으로 보도된 원인으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소셜미디어는 그의 히트곡들 “Father Figure,” “Faith”, “Praying for Time” 등으로 그를 회상하느라 북새통이 되었다. 조지 마이클은 신과도 같은 목소리, 뛰어난 작곡 능력, 죽이게 잘 생긴 얼굴의 팝스타 이상의 인물이었다.

Georgios Kyriacos Panayiotou 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조지는 음악이 인종적으로 분리되고 주류의 문화가 가혹할 정도로 반(反)동성애적인 시절에 유명세를 얻은 백인, 남성, 동성애자, 쏘울 가수였다. Justin Timberlake, Robin Thicke, Sam Smith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 마이클처럼 이들도 팝 가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R&B 가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백인이기 때문에 “팝”으로 분류되고 있다.

R&B를 부르는 백인 가수가 된다는 것의 특혜는 — 또한 지겨울 정도로 팝음악 방송에서 틀어대는 — 종종 음악 산업에서 인지를 못하곤 한다. 음악에는 언제나 깊은 차별이 존재하였다. 음악 산업은 Billie Holiday, Dinah Washington, John Lee Hooker 와 같이 레이블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만 그들 자신은 몇 푼밖에 쥐지 못하는 “인종 레코드”로부터 구축됐다. 한편 Pat Boone 또는 Elvis Presley와 같은 백인 아티스트들은 원래 흑인 아티스트들이 부른 노래를 불러대며 몇 백만 달러를 벌었다. R&B 싱글 차트조차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기이하게도 “Hot Black Singles”라고 이름 붙여졌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Prince, Michael Jackson, Whitney Houston이 깨부쉈다. 조지 마이클은 R&B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백인 아티스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쏘울 사운드”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다. 그는 노력하지 않고도 쏘울풀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씌워졌던 비난처럼 문화적으로 남용하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는 “도시의 여장자(urban drag)”에 있지도 않았고 흔치 않은 흑인 프로듀서와 계약을 맺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흑인 아티스트들처럼 – 말년의 Teena Marie처럼 – 쏘울풀했을 뿐이다.

1988년 조지 마이클은 빌보드의 “탑 블랙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가 됐다. 또한 “One More Try”로 “블랙” 차트에서 1위를 마지막으로 차지했는데, (이제는 Hot R&B/Hip-Hop Songs로 이름이 바뀐) 그 다음 백인 아티스트는 2007년 “Lost Without U”를 부른 로빈 티클이다. 1980년대의 흑인 커뮤니티에게 조지 마이클은 프린스나 Janet Jackson처럼 그들의 사운드트랙이었다. 더욱이 그는 흑인다움을 연기하지 않은 자생적인 아티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이자 프로듀서였다. 이는 영감과 적절함의 차이다.

조지 마이클의 명성은 LGBT 커뮤니티에게 가장 소름끼치던 그 시기에 다시 한 번 찾아온다. AIDS 위기. 잘 알려져 있다시피 Ronald Reagan은 이미 수십만 명의 사람이 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번째 임기의 말까지 AIDS 위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게이나 퀴어라는 것은 AIDS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므로 조지 마이클과 같은 팝스타에게는 “외치고 자랑스럽다(out and proud)”라는 여지는 없었다. 그는 음악 산업의 옷장 안에 갇혔다.

그러나 “Freedom! ’90″에서 그는 가죽 재킷으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이전의 이미지에 불을 댕겼다. 명백하게 밝힌 것은 아니지만 조지 마이클은 이 히트곡의 가사를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난 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로 했어. / 네가 알아야 할 무언가가 있어. / 내가 너에게 그것을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 / 내 속 깊은 곳에 뭔가가 있어. / 내가 되어야 할 그 어떤 존재가 있어.” 조지 마이클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자신이 되기로 결정했다.

1998년 마이클은 비버리힐스의 공원에서 잠복경찰과의 “추잡한” 행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아웃팅 당했지만, 이 가수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비디오 “Outside”에서 이 사건을 비웃었다. 그가 이성애자가 아니란 사실이 크리스털처럼 투명해지자 조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몰랐을까 하는 등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진실한 당신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보상은 늘 없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그는 마약, 체포, 건강 문제와 같은 보도에 질질 끌려 다녔다.

조지 마이클은 그의 성적기호로 인해 배척되었고 그를 무자비하게 스토킹하는 미디어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2005년 이 가수는 게이와 이성애자들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미디어에서의 게이는 이성애자를 편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자동적으로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가 더럽고 음란한 f****r 이고 당신은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감당을 못해요.”

분명히 조지 마이클이 없이 샘 스미쓰, Adam Lambert, 또는 오늘날의 다른 많은 공개적으로 퀴어인 아티스트가 있을 수 없다. 샘 스미쓰는 언젠가 마이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나는 조지 마이클에 대한 기이하고도 시들지 않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을 왜 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이유다.”

나는 사람들이 미묘한 차이가 있는 조지 마이클의 유산에 대해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단순한 팝스타가 아니었다. 그는 쏘울풀했고 아티스트들이 제조업화된 음악 산업에서 진정한 자아로의 길을 닦는 정체성을 교차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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