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 콜린스 인터뷰

이 포스트에서 이어진다.

 그 당시 스미스가 포스트카드 소속 밴드들을 따라한 걸까요?

내가 듣기로는, 스미스의 첫 앨범이 나오기 이전부터, 조니 마는 로디 프레임 (주: 아즈텍 카메라의 프론트맨)한테 푹 빠져있었다고 하더군요.

 

‘Simply Thrilled Honey’나 ‘Consolation Prize’의 가사에서 모리시가 후에 ‘Pretty Girls Make Graves’에서 표현한, 과도하게 성적인 여성을 감당할 수 없는 신경쇠약에 걸린 나약한 타입의 인물을 예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거칠고, 나는 너무 나약해.’

글쎄요. 스미스가 등장하기 전에도 우리는 이런 저런 음악을 만들었죠. 하지만 그건 철저히 포스트 펑크적인 것이었습니다. ‘로저 맥긴 같은 헤어스타일을 해봤어’라는 가사를 만들었고, 버즈 풍의 12현 리켄바커를 사용했습니다. 반면 스미스는 그보다 한층 더 나갔습니다. 그들은 사운드를 더 듣기 좋게 만들었어요.

 

당신이 추구한 것이 일반적인 포스트 펑크는 아니었습니다. 대신 유머를 담고 있었죠. 포스트 펑크는 고뇌로 가득 찬 황량한 정서를 다뤘어요. 하지만 오렌지 주스는 슬픈 노래에서마저도 위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건 다소 뒤틀린 위트이긴 했지만요. 또 당신은 스스로를 보고 웃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비통한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에 관한 가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그 생각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흔히 우리는 본능적으로 상당수의 록음악이 바보 같다고 의구심을 품게 되잖습니까. 특히 많은 이들이 흔히 심오하다고 여기는 록음악에 대해서는요 –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수지 앤 더 밴시스 (주: 런던 출신의 고딕 펑크 밴드)나, 혹은 보다 보편 타당한 예인 이언 커티스는 멋쟁이 토리 (주: Tory) 청년이었어요. 어떤 이들이 짐 모리슨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를 알고 계시겠죠. 하지만 커티스가 그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난 조이 디비전의 몇몇 곡은 좋아했지만, 그들의 추종세력은 탐탁지 않았습니다.

 

1980년에서 81년 사이 언론은, 오렌지 주스와 포스트카드를 이언 커티스의 죽음 이후 상징화되고 절정에 달했던 환각상태의 음습함 위에 비친, 삶을 긍정하는 한줄기의 빛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것 같군요. 물론 많은 기사는 그저 즉각적인 반응이었던 것이지만요. 이런 류의 염세성은 우스꽝스러워요. 섹스 피스톨즈가 그런 존재였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 로튼이 보여준 들뜬 격렬함과 분노는 진짜배기였어요. 그가 역설하던 것은 대단히 영리한 생각이었지요. 그는 영국 음악계의 커다란 흐름의 변화를 대표하는 이였습니다. 그 덕분에 내가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피스톨즈 이후 나타난 모든 것들, 1세대 펑크 밴드 – 버즈콕스, 클래시, 빅 고다드 – 는 흥미로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음악을 시작하던 당시엔 별 쓰레기 같은 밴드도 많았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진지하게 생각했죠. 펑크를 어떤 추진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단지 작은 게슈탈트 전환을 이루려는 시도일 뿐이었습니다.

 

포스트 펑크는 인디 레이블과 협력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 방식은 1980년엔 이미 게토화가 진행된 상태였죠. 포스트카드는 인디 레이블이긴 했지만, 게토에서 벗어나 차트에 진입하려는 시도를 했어요.

그래요. 말도 안 되는 짓이었죠. 우리에겐 차트에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거든요. 펑크가 흥미로웠던 것은, 그게 처음 등장했을 땐, 대단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통제불능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등장했을 무렵엔 많은 펑크와 포스트펑크 밴드가 지루한 음악을 만들고 있었어요. 펑크의 공식과 현실에 대한 순응에 잠식당한 거죠.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던 겁니다. 한 줌의 관심이라도 얻고 싶으면 뭔가 다른 걸 해야만 했죠. 우리가 했던 게 그렇게 인위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요: 어떤 선언도 없었구요. 우리가 어떻게 주목 받을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한 적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알란 혼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스티븐 달리가 리슨이라는 체인 레코드숍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알란을 만났고 우리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어요. 우리가 조니 앤 더 셀프 어뷰저스, 스틸 펄스, 백스태버스를 서포팅하던 공연에 그가 왔었죠. 당시엔 새틀라이트 시티였고 현재는 글라스고 아폴로 (주: 1987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된 그 공연장에서 우린 거기서 공연하는 모든 밴드의 오프닝을 섰어요. 처음으로 연주한 곡은 Live 1969에 수록된 ‘We’re Gonna Have a Real Good Time Together’였죠. 그리고 그를 만났습니다. 알란은 당시엔 꽤나 통통했고 해리스 트위드 소재의 재킷을 입고 있었습니다. 옷깃엔 작은 나찌 버튼을 달고 있었죠. 그런 류와는 어떻게든 연관되고 싶지 않았어요. 알란은 우리와 함께 무대에서 영화 프로듀서스의 수록 곡인 ‘Springtime for Hitler’를 부르고 싶어했죠.

 

마지막 곡으로요?

그는 프로듀서스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알란은 영화 카바레에 나왔던 모든 글램록과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책을 좋아했어요. 록 앤 롤 애니멀 투어 시기의 루 리드는 그의 머리에 철십자를 새겨놓았죠. 보위와 그의 로우 앨범이 구체화시킨 베를린 데카당스와 관련된 모든 것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스티븐은 그걸 싫어했어요. 아무래도 그는 그런 게 지겨웠나 봐요. 그리고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 운동이나 그와 유사한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이 계속되자 알란이 이러더군요, ‘난 록에 반대하는 인종주의 운동 같은 걸 더 하고 싶은데.’

 

그는 그런 철딱서니 없는 나찌 관련 내용을 그의 팬진에 실었죠?

네. 그는 자신의 플랏메이트였던 브라이언 수퍼스타가 그린 조야한 만화도 싣곤 했어요. 그는 후에 파스텔즈의 멤버가 되었어요. 나찌 제복을 입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같이 놀기 좋은 사람이었나요? 알란 말입니다.

글쎄, 그때는 그를 그럭저럭 감당 비스무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하라면, 글쎄요… 그는 완전 조증인데다, 흥분을 잘하는 사람이었죠. 뭔가에 대해 우울해하거나 그게 아니면 완전 들떠버리는 –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었어요. 만사를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그런 사람이기도 했구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담 삼아, 미스터 포스트카드라고 부르면 정말 좋아했어요. 보스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맬컴 맥라렌이나 버니 로즈 같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는 폴의 매니저인 케이 캐롤 같은, 펑크 밴드의 매니저들에게 흥미를 가졌습니다. 초기 펑크 시기에 수행된 인터뷰를 보면, 매니저는 밴드의 프론트맨 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알란은 매니저들에 관해선 정말 빠삭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펑크가 위대한 것은, 그것이 매니저가 밴드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되는 ‘매니저 록’의 시기를 열었기 때문이라고 누누이 얘기했죠.

 

아, 그럼 그는 포스트 카드의 사장이자 오렌지 주스의 매니저였던 거네요?

포스트카드에 소속된 모든 밴드의 매니저 일을 하긴 했죠. 그런 척만 했던 것이던가요. 조셉 케이를 제외하곤 그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대망상증이었어요.

 

오렌지 주스와 다른 포스트카드 소속밴드는 친한 관계였나요?

난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다들 신경과민 상태였거든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민했구요, 모든 것이 과장되었던 시기인 사춘기를 막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쉽게 화내고 흥분하고 욕지거리를 했어요.

 

밴드내의 역학관계는 어떠하였습니까?

음, 밴드를 오래하고 싶었으면 데이브 맥클라이몬트를 밴드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예스 같은 밴드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좀 연주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원래 있던 베이시스트가 뉴-소닉스 [오렌지 주스 전의 밴드]를 탈퇴했을 때 그에게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결국은 그가 오렌지 주스가 겪었던 몇 번의 해체 상황을 주도하게 되었죠. 첫 번째 것은 조셉 케이가 해체하고 난 뒤의, 오렌지 주스가 5명으로 구성되어있었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맬컴 로스 (주: 조셉 케이의 기타리스트)가 우리 밴드에 있었죠. 다들 밴드활동에 좀 싫증이 난 상태였어요. 맬컴과 데이빗이 탈퇴를 했고 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어느 쪽에 붙어야 되지? 걔들은 제케를 드러머로 들이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죠,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우리 밴드는 좀 더 행복했을 겁니다. 그가 베이스 연주자로서 오렌지 주스의 음악에 대단한 공헌을 한 것도 아니었구요. ‘Rip It Up’의 베이스 리프는 내가 롤랜드 303 베이스 머신으로 만든 것이지요.

 

애시드 하우스 풍의 베이스 라인을 만드는 걸로 유명한 기계로군요.

출시된 지 1주일만에 구입을 했습니다. 이매지네이션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그들의 프로듀서인 스웨인과 졸리가 그 303 베이스 머신을 사용했다는 소릴 들었거든요. 마찬가지로 그 기계를 사용한 맷 비안코의 곡인 ‘Get Out Your Lazy Bed’도 접하게 되었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거 참 괴이한데. 일반 베이스 기타 같은 소리를 내는데 동시에 포르타멘토 (주: 다른 음을 부드럽게 넘어가는 연주법) 도 가능하다니. 굉장히 매끄러워. 이 기계를 꼭 구해야겠어.’ 프로그래밍하는 건 정말 힘들었지만 우리 프로듀서가 어떻게 해결책을 찾았더랩니다. 제케가 베이스 음이 합성된 그 성공적인 트랙의 드럼 파트를 연주했죠. 303이 ‘Rip It Up’ 싱글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도 맥클라이몬트의 업적에 대해 조금 얘기해봅시다: 이보십쇼, 평가할 것은 평가해야죠. ‘Falling and Laughing’같은 초기 오렌지 주스의 싱글엔 정말 뛰어난 디스코 풍의 베이스라인이 존재한다구요.

아뇨. 그가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제안하긴 했지요. ‘Falling and Laughing’의 베이스라인 중 절반을 그가 만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의 베이스 연주는 정신 없었어요. 피터 훅 신드롬이었죠. 베이스와 기타를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연주요. 마치 베이스 소리가 바리톤 기타 소리 같아요.

 

‘Rip It Up’과 그 가사에서 표현된 지루함, ‘이거 끝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외침은 마치 오렌지 주스가 자신들이 선도했던 그 무브먼트가 시작하던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짝반짝하고 낙관적이며 차트 지향적인 음악을 만들겠다는, 새로운 팝 가치관 말입니다. 모든 것이 꼬였다는 생각이 든 적 있습니까? 아니면 오렌지 주스는 차트에 들지 못한 반면 다른 밴드가 당신이 제창한 아이디어를 사용하며 행복하게 차트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절망했나요?

헤어컷 100이 오렌지 주스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했죠. 아란 스웨터를 입은 제임스 (주: 맨체스터의 기타팝 밴드)의 사진도 본 적 있어요. 마찬가지로 얼터드 이미지스도 초딩 밴시스 이미지에서 탈피해 보다 포스트카드스러운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었죠.

 

얼터드 이미지스와 헤어컷 100이 차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며, 이젠 밴드의 방향성을 추스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 아마추어적인 매력을 뿌리며 보다 차트 경쟁력이 있는 음반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오.

그런 셈이죠. ‘Rip It Up’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수행한 실험이었습니다. 리듬 섹션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었어요. 리드 기타 사운드를 다듬을 때 오래된 70년대 훵크 머신이자 정교한 와와 페달인 머트론 바이페이즈를 사용했습니다. 톰 톰 클럽의 ‘Genius of Love’에서 그 사운드를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물론 그 기계엔 엄청 많은 매개변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작업물은 ‘Genius of Love’와는 전혀 달랐죠. 베이스라인을 보완할 수 있는 정제된 사운드를 원했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조합이예요. 초기곡인 ‘Falling and Laughing’이나 ‘Poor Old Soul’에서 사용된 60년대 풍 쟁글 기타와, 디스코의 괴상한 조합 말입니다.

존 새비지 (주: 포스트 펑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영국의 음악평론가)가 나보고 그랬어요, 그 앨범 (주: Rip It Up을 말하는 듯)은 구 펑크와 새로운 팝 사이에 마지막으로 존재한 과도기적 음반이라구요. 내 노래의 가사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버즈콕스의 노래 ‘Boredom’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Spiral Scratch EP (주: 버즈콕스의 데뷔 EP)는 포스트카드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EP는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죠. 마치 심리치료를 받을 때처럼요. 그 EP를 들어보니 우리도 뭔가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싶었지만 대신 이 구식의 오렌지 주스 기타 사운드를 새로운 팝의 맥락에 포함시키고자 했죠. 프로듀서였던 마틴 헤일스는 재즈 훵크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Boredom’과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이야기한 것이 바로  ‘정교한 아마추어리즘’이죠, 너무 매끈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정신 없는 것도 아닌…

미래주의와 바보 같은 신스팝이 벌이고 있는 일을 목격했기 때문에, 난 우리의 밴드를 그런 이들과는 분리시키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음악 잡지가 더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어요. 엔엠이 같은 잡지가 이 주의 싱글로 선택한 싱글은 5천장은 팔렸거든요. 우리 음악은 라디오 전파를 전혀 타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잡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키치한 음악이나 멍청한 음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들기 싫었죠. 당시엔 신스팝의 미학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휴먼 리그는 꽤 좋아하긴 했지만요. 허나 우리가 음반을 만들던 때에 신스팝 무브먼트는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1981년의 음악 씬을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선택해야 했죠.

 

당신이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섹스 피스톨스 티셔츠를 입는 것을 주장한 게 그 시기에 – 뉴 로맨티시즘의 절정이었습니다 – 벌어진 일입니까? 스타일과 나이트클럽에 사로잡힌 음악 씬을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 중심에 뉴 사운즈 뉴 스타일스아이디 같은 잡지나 미래주의자라고 명명된 별볼일 없는 음악이 있었죠. 지금은, 그런 음악의 일부는 좋은 팝 레코드였다고 생각합니다 – 게리 뉴만의 ‘Now I’m alone’ 같은 건 괜찮잖아요 – 하지만 당시에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게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지요. 건강 다음으로 중요했어요.

 

오렌지 주스는 글래스고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이들이 돌연 당신의 스타일과 당신의 음악을 모방하기 시작했어요.

때문에 글라스고 언더그라운드 씬이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죠. 이전에, 글라스고에선 스톤 더 크로우스의 매기 벨이나 프랭키 밀러 같은 블루스 록이 강세를 보였죠. 당시 학생이었던 틴에이지 팬클럽이 우리의 팬이었습니다. 심플 마인즈가 인기가 좋긴 했지만 우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밴드를 결성하게끔 영향을 미치진 못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포스트카드가 크리에이션 레코즈 (주: 알란 맥기가 설립한 인디 레이블. 오아시스가 여기서 시작했다. 후에 소니한테 팔렸고 지금은 없어졌다)의 설립에 영향을 주기도 했구요.

 

그리고 포스트카트는 솀블링 기타/큐티/C86 (주: 영국의 음악주간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 엔엠이가 86년에 제공한 컴필레이션 카세트 테이프. 81년에 제공된 C81의 후속작인 셈이다. C86라는 이름은 테이프의 길이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던 C60, C90등과 1986년을 결합시킨 것이다. 후에 러프 트레이드를 통해 바이닐로도 발매되었다) 무브먼트가 일어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스웰 맵스와 텔레비전 퍼스널리티스의 도움도 좀 받아가면서요. 당신이 쓴 가사인 ‘세속적인 것을 가까이 해선 안 돼’는 C86가 이뤄야 하는 바였을 겁니다.

난 우리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로 대단했던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일본에선 80년대 후반에 네오 아코라는 무브먼트가 발생하였죠. 대표적인 밴드가 플리퍼스 기타예요. 그리고 그들의 밴드명은 우리 앨범 커버에 있는 돌고래 (주: 오렌지 주스의 데뷔 앨범인 You Can’t Hide Your Love Forever의 커버 사진을 말한다. Flipper는 물갈퀴를 뜻함) 에서 연원했죠. 플리퍼스 기타의 첫 앨범명은 Three Cheers For Our Side였지요. 그건 제임스 커크의 곡에서 이름을 빌려간 거예요. 그들의 노래 중엔 ‘Let’s Cut Our Hair Like James Kirk Did Long Ago’라는 제목의 곡도 있죠. 당시에는 우리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지 몰랐습니다. 그 땐 그걸 인식하지 못했거든요; 우리는 그저 글라스고의 남성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음악을 만들었어요. 그래도 언젠간 애들 같은 스타일에서 벗어날 때가 있는 법이죠. 성서에도 그런 구절이 있잖습니까.

 

당신에겐 그게 언제였다고 생각합니까?

‘Rip It Up’이 발매된 무렵이었죠. 그 시기의 사진을 보니까 내가 보이 스카우트 모자를 쓰고 바덴 포웰 시기의 스카우트 셔츠를 입고 있더군요. 하지만 동시에 모토바이커들이 입는 바지를 입기도 했죠. 모토바이크 부츠랑 19세기 풍의 헌팅 재킷을 정말 좋아했어요. 처음 그런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반향이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큐티들이 그걸 전유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 대한 흥미를 잃었죠. 다들 본인들이 좋아서 애들 같은 행동을 하는 거예요… 마치 상처 입은 이들이 자신들의 유년기를 담보해줄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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