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테크노의 역사

영국 테크노의 역사는 곧 테크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국의 테크노의 태동에서 변천을 거쳐 현재의 대중화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비단 테크 노만이 영국 대중 음악의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경향을 대변해온 장르는 아니겠지만, 테크노의 변천 추이를 되짚어 보면 70년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모든 영국 대중 음악의 기술적인 발자취와 거의 상통한다는 점에서 진보정신의 순수한 모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테크노의 기원과 기본적인 틀은 독일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그 형식의 다양성과 실용성을 갖춰 다각적인 테크노의 붐을 일으킨 것은 영국의 몫이었다.
영국이 공업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온갖 공장들이 각처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다지만 소규모 전자 제품이나 악기를 만드는데는 그다지 신통한 재주가 없었던 관계로 영국의 뮤지션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악기를 구입할 수 밖에 없었고 웬만큼 악기레 이블의 협찬을 받거나 밴드의 지명도가 있기 전까진 사구려 중고 악기에 의존하는 뮤지션들이 많은 것이 음악 강국 영국의 현실이었다.

그런 탓에 영국의 테크노는 테크노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중견 뮤지션들이나 비교적 생활이 윤택했던 인텔리 출신의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시작될수 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대중 지향보다는 아트록과 결합되거나 뮤지션의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기 위한 솔로 앨 범의 도구로 이용될 뿐이었다(독일과는 달리 젊은 뮤지션들 사이에 테크노 바람이 일기까 지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굳이 조그마한 바(bar)나 클럽에서 공연을 할 이유가 없었던 부유한 테크노 뮤지션들의 대개는 아트 스쿨 혹은 공학도 출신이었는데 그런탓에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사운드를 표출하기 보다는 자기 도취적이고 약물과 연계를 맺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들에 근접하기 시작했다.
사이키델릭과 아트록의 붐에 편승해 등장한 전자 사운드를 표출하는 여러 실력파 밴드들은 첨단기기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기계적 비트와 갖가지 다양한 효과음을 실전에 활용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테크노 취향의 음악들로 방향을 우회하게 된다. 70년대 초 공간과 시간에 대한 묘사를 담은 호크윈드(Hawkwind)를 비롯한 스페이스 록 밴드들이 바로 영국 테크노의 시발점인 셈이다.

인간적인 풋풋한 연주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극단적인 표현양식을 추구한 이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화제를 모으자 각종 전자음악을 구사하는 밴드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했고 그 중 74년은 테크노와 전자 사운드의 기념비적인 해로 일렉트로폰(Electrophon)의 Zygoat, 세븐스 웨이브(Seventh Wave)의 Things to come등의 명반들과 브라이언 이노의 초기 앰비 언트적인 작품들이 속출한 시기였다.

특히, 브라이언 이노는 글램적인 요소가 다분한 록시 뮤직(Roxy Music)에서의 활동을 끝 으로 각종 프로젝트 결성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로버트 프립, 로버트 와트와 펼친 일련의 작품들은 스페이스 록 차원이 아닌 그 이상의 진보성과 의미를 지닌 작업들이었다. 이후 패트릭 모라즈, 릭 웨이크만, 마이크 올드필드, 릭 라이트 등의 건반 연주자와 리퓨지, 킹덤 컴 등의 밴드들이 신서사이저/키보드로만 일관된 음반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테크노의 기법상의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로 두번째 변혁이었던 것이다. 그후 78년경 브라이 언 이노가 표방한 앰비언트에 대한 연구, 천재 뮤지션 에디 좁슨등이 발견되면서 신서사이저 와 드럼 머쉰을 통한 원맨 밴드 붐이 가열됐고 테크노는 매니어들 음악의 최상의 선택으로 끊임없는 지지를 얻게 된다.

80년대 이후 테크노는 영국 대중음악 신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다시금 인식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댄스 음악과의 접목을 통하면서부터다. 이것은 70년대 말엽까지의 매니어 취향, 혹은 극단적인 실험 음악 형태의 테크노를 벗어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으로 변모했다 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왜 이러한 테크노의 댄스 뮤직화의 시발점이 하필 영국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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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Big Ben Phone box” by , wiki+spam@eindruckschinderdomain.de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2.5 via Wikimedia Commons.

그것은 앵글로 색슨족의 자기 우월주의와 타인종, 문화에 대한 배타적인 사고방식에서 이유 를 찾을 수 있다. 흑백이 공존하는 그리고 식민지 작업을 통해서 많은 인종을 거느리고 있 었던 영국이었지만 유독 백인 위주의 문화만이 토착화 되면서 영국에는 흑인의 그루브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런 연유로 마땅한 댄스음악이 생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은 안팎으로 상황이 좋았다. 댄스음악 빈곤에 대한 자기 반성과 함께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던 디스코가 기술적인 문제에 부딪쳐 주춤하면서 전자 음악의 힘을 빌기 시작한것이다(아울러 영국에는 많은 수의 악기들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다소간의 흑인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들은 디스코로 패셔너블한 부분들에 관심을 갖던 모던 보이들은 뉴 웨이브(New Wave)로 각각 제 갈길을 찾기 시작했다. 두가지 음악은 공존하면서 기술적인 많은 부분들을 협력하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부터 테크노는 그 세력을 독일에서 영국으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다.

카바레 볼테어, 조이디비전으로 시작된 뉴 테크노 사운드의 움직임은 휴먼 리그(Human League), 뉴오더(New Order), ABC, 하워드 존스(Howard jones), 디페쉬 모드(Depeche Mode) 등 팝과 테크노 댄스를 혼합한 음악들로 변모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영국 음악의 부흥은 시작됐다. 하지만 80년대 중반까지 펼쳐진 일련의 음악들은 테크노라는 의미보다는 전자음악, 뉴 웨이브라는 의미로 통용될 뿐이고 또 확실히 기계에 의존하는 부분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말 앰비언트라는 장르와 인디펜던트라는 의미, 매니어용 댄스라는 구분이 알려지면서 대도시 클럽과 소규모 공연장을 중심으로 분파가 갈려지기 시작했고 테크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거듭됐다. 유투(U2)와 데이빗 보위(David Bowie) 같은 대스타들이 새로운 조류와 브라이언 이노 같은 대 뮤지션을 섭렵하여 자랑스레 대중앞에 섰고 테크노 는 단숨에 인디펜던트 음악에서 오버그라운드, 메인스트림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믹싱 DJ나 스튜디오 맨에 불과하던 사이드 뮤지션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관중을 포섭 하기 시작했고 하나 둘씩 스타밴드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모던록/얼터너티브란 모호함을 함축한 장르가 가세하면서 상승세의 테크노 뮤지션들까지 덩달에 매체에 알려지 게 되었고 그들 역시 상종가를 누리면서 모던록 스타들의 뒤안길에서 믹싱 작업을 조달하 던 테크노 보이를 청산하고 서서히 전면에 나설 채비를 해가고 있었다. 록 음악에서 제휴 한 과격한 행동과 사운드를 선보이기 시작한 프로디지(Prodigy)나 케미컬 브러더스(Chemical Brothers)와 같은 팀들이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빅히트를 하게 되자 테크노는 완연한 대중 가요로 정착되게 된다.

테크노가 완연한 인기를 얻을 즈음 영국에선 괴이한 현상이 발병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분별한 장르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테크노의 수직 상승이 장르 탄생의 모태가 된 셈인데 덥(Dub), 트랜스(Trance), 레이브(Rave), 트립 합(Trip Hop), 애시드 하우스(Acid House), 하드코어 테크노(Hardcore Techno), 신스 팝(Synth Pop)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장르들이 탄생했고 단명했으며 다른 장르와 연대하여 또 다시 생성했고 장르에 관한 설명서 가 있어야 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장르와 명칭에 혼란을 겪게 됐다. 90년대 말로 치닫는 현재의 테크노는 이제 브릿팝(Brit Pop)이라는 화두를 무참히 잠재우고 영국을 넘어 세계 각지에 그 세력을 확장 시키고 있는 영국 대중 음악의 최고의 장르이자 글로벌 사운드가 되어있다.

http://myhome.shinbiro.com/~www098/techno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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